나치 시대의 일상사 - 순응, 저항, 인종주의, 개마고원신서 33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개마고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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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권력의 분산된 전체에 대항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어떤 작용지점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질 들뢰즈-

'파쇼' 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 '파스케스'이다. 이는 고대 로마의 집정관이 시가 행진을 할 때 맨 앞에 세우던 나뭇가지에 둘러 싸인 도끼를 말한다. 20세기 초에 이 말은 세계적인 비극을 몰고 오는 정치 혁명의 대명사가 된다. 우리가 '파쇼'라는 말을 생각하면 몇 몇 얼굴이나 몇 몇 장면들이 자동연상된다. 무솔리니, 프랑코, 히틀러,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하겐크로이츠, 홀로코스트...등등하지만 이런 고정화된 몇 가지 이미지들은 파시즘이나 나치즘과 같은 복잡한 현상을 몇 가지 인상으로 한정 짓는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가장 흔하게-또한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것이 '단절론'과 '의도주의'이다. 쉽게 말하자면 20세기 초에 발생한 유럽발 비극은 유럽 역사에서 비정상적이고 부정되어야할 독특한 기억이라는 점이고 이것의 가장 큰 원인은 지도자와 그의 추종자들의 망상적인 의도에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정의롭고 편리한 발상이란 말인가?)  

<파시즘>의 작가 로버트 팩스턴은 20세기 초반 유럽발 정치혁명으로서의 '파시즘'은 결코 단일하지 않은 현상이라고 말한다. 그의 역사적 파시즘 연구는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나치즘의 사이의 유의미한 차이를 보여준다. 또한 당시 유럽 각 국가에서 발생했던 파시스트운동의 여러가지 형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독일,이탈리아 뿐 만이 아니라 영국, 프랑스, 동유럽의 여러 국가에서도 파시즘 운동은 발생했다. 팩스턴은 이런 파시즘 운동의 역사적 보편성을 부각하면서 이것이 왜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 운동의 단계를 넘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는지 고찰한다. 즉 '파시즘의 조건'과 실제 '유의미한 파시즘 정치실험' 사이의 차이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이는 남발되는 '일상적파시즘'이나 '연성파시즘'논리에 한가지 대답이 될 수도 있다.  팩스턴의 <파시즘>에서 파시즘 정권이 추구한 것이 '대안적 근대성'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60년대 이후 파시즘 연구에서는 '근대성'의 문제는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메이슨은 '나치즘 속에 작동하고 있는 합리적 동력, 근대적 힘'에 대한 부분을 말한다. 즉 사회적 생산관계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파시즘 문제를 접근한다면 파시즘의 권위주의적 독재문제 뿐만이 아니라 파시즘을 횡으로 가르고 있는 근대화론의 문제 역시 중층적으로 다루어져여 한다는 입장이다.  

  팩스턴의 <파시즘>이 역사적 파시즘론에 비중을 두고 비교파시즘론을 통해 실체적인 파시즘의 현상에 주목한다면 포이케르트의 책 <나치시대의 일상사>는 독일의 나치시대에 집중한다. 시각은 더 미시적이다. 포이케르트가 들고 있는 돋보기의 소실점이 모이고 있는 지점은 '나치 시대의 경험'이다. 

일상사는 나치 체제를 아래로부터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제3제국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당한 사람들, 참여한 사람들.곁에 서있던 사람들은 나치의 도전을 어떻게 경험했는가?  

포이케르트의 <나치시대의 일상사>가 돋보이는 이유는 이렇게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통해 나치 체제를 조망한다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결코 '전체적 조망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일상사가 '새로운 영역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전망'이라고 말한다.   

우선 포이케르트는 "나치가 어떻게 그렇게 빠른 시일 내에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문제는 '바이마르 체제' 였다. 대중들은 패전 이후 '바아마르 체제'가 가져다 준 조합주의적 혼란, 전통적 가치에 대한 방향감 상실, 대공황의 여파등으로 퇴행적인 정상성에 대한 욕구가 높아진 것이다. 이것은 실제보다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대중들의 불만은 '더 이상 안된다'는 식의 일상적 합의로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여기서 히틀러의 나치가 등장하여 점짐적으로 그런 불만들을 자기 영역으로 포함해 낸다. 히틀러는 '모든 악은 바이마르 체제다' 라는 식으로 복잡한 사회관계망을 정리해 버린다. 여기서 나치즘에 대한 중요한 점이 언급되어야 한다. 나치즘은 어떤 일관된 정치적 목표와 정강이 있는 체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나치당이 일관된 정강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역시 변화무쌍한 공약으로 유권자들을 유혹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 데클레프 포이케르트, <나치시대의 일상사> 

나치당은 유권자의 직종에 따라 맞춤형 구애 작전을 실시한 독일의 첫 정당이었으며, 그 공약들 사이에 모순이 있건 없건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로버트 팩스턴 <파시즘>  

이 책 <나치시대의 일상사>는 일상사를 중심으로 하지만 결코 거대서사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가 '일상사'를 '새로운 전망'이라고 언급한 것은 그런 의미이다. 그는 역사적 연속성의 틀 속에서 나치즘을 배치시키는데, 즉 나치즘을 유럽 근대화의 정상적 과정 속에 등장할 가능성이 있는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사고'라고 평한다. 그는 나치제도의 특성으로 '운동으로서의 존재론적 특성','근대화의 힘','다극체제',' 철저한 계서제',' 인종주의','대외적 성공' 등을 들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60년대 이후 파시즘논쟁에서 자주 언급되는 기능주의론적 해석,즉 근대화론의 연속성의 도상 위에 포이케르트의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히틀러의 나치와 절연을 통해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는 서독 역시 '나치의 근대화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즉 나치를 움직였던 근대화의 동력이연속적인 횡선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가지 -앞으로 이야기할 '저항'문제와도 관련이 있는- 중요한 점은 나치가 전체주의의 상징으로 이해되지만 나치의 정권 운영방식은 다극적 체제였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공약의 남발'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나치권력 내부에 존재하는 기관사이에는 서로 다른 이해와 힘의 관계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이 존재했다. 로버트 팩스턴의 말이 좋은 예가 될 듯하다. 

파시즘 정당들이 써먹었떤 고안물 하나는-권력을 장악하려고 진지하게 고민했던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도 사용한 방법니다- '동형기구'(parallel structures)였다. -로버트 팩스턴,<파시즘>  

이것은 유명한 파시즘 연구가인 프랭켈의 '이중국가'로 표현한것과 같은 맥락이다. 프랭켈은 히틀러 정권때 합법적으로 구성된 정부라는 '표준국가'와  당의 '동형기구'로 구성된 '특권국가' 사이에 권력다툼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이런 권력들 사이의 갈등은 '저항'의 공간으로 이용된다는 것이 포이케르트의 주장이다.

포이케르트의 관심은 이제 '저항'의 문제로 넘어간다. '저항'의 문제와 동전의 양면으로 더 자주 언급되는 것은 '순응'이다. "도대체 왜 독일의 중간계급, 또는 두터운 노동 계급마저 나치즘에 동의를 보낸 것인가? "  나치의 비합리적 프로파간다에 속았기때문인가? 국가주의의 망령때문인가? 그저 정권의 폭력에 동의하는 척 한 것 뿐인가?  대중의 '순응'의 매커니즘은  여러 학문 분야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이고 나치시대를 그 모델로 자주 등장한다. 그 대답 역시 어물전의 생선만큼이나 다양하며 부분적으로 진실을 담고 있다. 한가지 피해야할 답은 -물론 이것 역시 어느정도 진실을 담고 있지만- 계몽주의적 태도이다. 바흐식 표현으로 하자면 "눈뜨라 부르는 소리있어."쯤 될 것같다. 심봉사 눈 뜨듯 확 눈을 뜨면 -마치 브나로드운동의 지사같은- 그런 불행한 역사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적 유토피아적 발상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그런 모든 사람이 눈을 뜨는 유포티아는 벌어지지 않는다. 대개 운동가들은 그런 지사적 존재로 현장을 찾았다가 이미 인민들이 눈을 뜨고 있는 존재였음을 발견하는 경우가 경험적으로 허다하다. 모택동은 역설적이게도 하방운동이라는 방식으로 그 역을 강제한다.  

포이케르트는  '일상의 순응'이 총체적이고 전일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푸코의 명제처럼 '권력이 있는 곳에는 저항도 있다.'라는 것을 나치에게 가장 탄압받던 노동계급과 나치의 이데올로기적 기획의 주목대상인 청소년층의 저항을 통해 보여준다. . 즉 대중들이 나치즘에 동의를 보낸 역사적 사실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저자는 그 저항은 '조직화',내지는'전면적'이지 못했다는 것이 치명적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작은 저항들'은 있었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소극적 저항' 내지는 '묵인'이었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포이케르트는 거대한 폭력이 만연한 시대에 일상의 저항은 '소극적' 형태나 '은유적' 형태를 띨 수 밖에 없었음을 비교적 긍정한다. 특히 저자는 히틀러 청소년단에 대한 도전을 흥미롭게 제기한다. 거의 준강제적인 히틀러 청소년단에 대해 일찌감치 어린노동자가된 청소년들이 만든 '에델바이스단'이 그것이다. 이들은 일종의 '안티집단'인데 그것이 단지 불평불만의 수준을 넘어 에델바이스단에 대한 사적 폭력으로 까지 이어진다. '에델바이스단'이 비교적 중하층계급의 청소년 하위문화 수준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좀 더 상류층 청소년 그룹은 '스윙재즈'에 몰입을 보여준다. 

히틀러의 머리이자 입이었던 괴링은 최기 히틀러를 신격화하는 이벤트들을 만든다. 대중들은 신격화된 인물과 정치쇼 속에 자신의 흔들리는 정체성을 투사하고 동일화의 안정감을 얻는다. 그런데괴링은 그것이 대중들에게 효과가 있으나 일시적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대중들은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뉘른베르크의 스펙터클은 지속적으로 동일한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괴링은 대신 일상적으로 제공하는 여흥을 대중기만의 술책으로 이용한다. 특히 당시는 라디오를 비롯한 대중매체의 도약기였고 괴링은 이런 특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당시 대중매체들은 적극적으로 독일인들의 정서적 파탄을 위무하는 작업들에 들어간다.쉽게 말하면 3S 정책과 동일한 맥락이다. 문제는 그 여흥의 제공은 이데올로기적이었다는 것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이렇게 말한다, 

"즐긴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것,고통을 목격할 때조차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즐김의 근저에 있는 것은 무력감이다. 즐김은 사실 도피이다.그러나 그 도피는 일반적으로 얘기되듯 잘못된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마지막 남아 있는 저항의식으로부터의 도피하는 것이다. 오락이 약속해주고 있는 해방이란 '부정성'을 의미하는 사유로부터의 해방이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  

제3제국의 여흥은 목적지향적이기 때문에 그 목적에 일탈하는 문화적 행위는 도발이된다. 청소년층이 열광한 '스윙재즈'는 그런 것이었다. 청소년들은 자유분방한 성, 비권위적 방식, 목적성없는 삶 등을 지향했다. 나치는 이런 도덕적 일탈을 악으로 규정했다. 나치가 보기에 스윙재즈는 흑인들의 저속한 문화이고 빈둥거리는 쓰레기들의 음악이었다. 포이케르트는 스윙재즈를 즐기며 나치로부터 핍박을 받게 된 중상류층 청소년들이 정치적을 '반파쇼'그룹은 아니라고 명확히 한다. 그렇지만 이들의 '비정치적' 문화행위는 지배계급의 패권적 문화에 대한 도전이었고 하위 체제 전체에 대한 문화적 저항의 기표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비정치적 문화행위가 광범위한 저항행위인지 아니면 결국 체제 포섭적인지의 문제는 하위문화 논쟁에서 매력적인 주제이다. 이걸 조금 더 알고 싶다면 문화연구쪽- 특히 하위문화연구쪽-을 살펴보면 좋다.) 에릭 홉스봄같은 좌파 재즈매니아는 저서<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에서 재즈 역사에 좌파세력들이 관여했고 또 재즈가 좌파공간을 확보해주었다는 점을 말한다.    

<나치새대의 일상사>의 결론에서 저자는 '나치즘을 근대의 병리사'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 근거를 요약한다. (밑줄 그어야할 중요한 지점은 '근대' 이다. '근대'는 해방의 역사이자 또 억압의 역사라는 점.) 저자는 나치의 '인종주의'과 관련된 근대성을 논의하는 과정에 푸코의 '배제','훈육','규율' 그리고 '권력-지식'의 문제를 큰 틀로 상정하고 논의한다. 포이케르트가 '근대적 병리사'로 바라본 나치의 몇 가지 특성 중 그의 견해를 축약하는 문장들은 이렇다. 

제3제국을 관통하고 있던 격심한 사회적 모순들은 한편으로는 나치의 민족공동체 이데올로기가 설정한 전선을 가로지르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반파쇼 운돈이 희망하던 주전선, 즉 "지배와 사회", 나치와 인민 사이의 전선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전선들은....근대적인 산업적 계급사회의 장기적인 발전 경향이 관철되고 있었다. 

나치즘은 전쟁을 통해 근대적 기술의 파괴적 힘을 보여주었고,일상생활에서는 사회적,정치적,도덕적 책임을 경원하는 원자화된 생활방식의 사회,사회적 통합이 관료제적인 절차와 포섭 그리고 대중소비의 공허한 자극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사회라는 침울한 전망을 현시했다. 

그리고 저자는 마지막으로 그의 일상사 분석과 접목시킨 '근대'의 문제가 '근대=야만'으로 이해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파쇼의 도전은 근대의 발전사가 자유를 향한 일방통행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오히려 자유란 언제나 새로인 그 실현 가능성을 탐색하고 실천에서 싸우는 것일 터이다. -<나치 시대의 일상사>

데틀레프 포이케르트는 49살의 나이로 애석하게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가 1987년에 썻다는 <바이마르공화국>은 아마 이 책을 이해하는 전편이 될 것이다. <나치시대의 일상사>는 좋은 책이다. 이런 책은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전망'이라는 저자의 말이 울림을 갖는것이다. '나치=히틀러, 대중독재=악' 으로 포켓 사이즈로 정리하고 행동하는 삶은 얼마나 편리하게 명료하며 아름다울만큼 빈약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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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동문선 문예신서 142
미셸 푸코 지음, 박정자 옮김 / 동문선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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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푸코의 1976년 콜레드 주 프랑스강의는 '계보학'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된다. 강의 시작을 알리는 몸 풀기이다. 또한 강의 전체를 지배할 문법에 대한 개괄이다. 푸코는 계보학을 '반과학'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 목적은 과학적이라고 간주되는 담론이 갖는 고유한 권력 효과에 대항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푸코는 첫 날 강의에서 '국부적 앎', '앎들의 봉기' 라는 용어를 쓰면서 비판의 국지적 성격에 대해 강조한다. 계보학의 기획의도를 푸코의 입을 통해 직접 들어보자. 

인식의 과학적 서열화와 그 고유의 권력 효과에 대항하여 국부적 앎들-아마 들뢰즈는 '소수의 앎'이라고 말할 것이다-을 다시 활성화하는 것.  ...  고고학은 국부적 담론성의 분석에 적합한 방법이고, 계보학은 그렇게 묘사된 국부적 담론성에서부터 출발하여 거기서 끄집어 낸 앎들을 작동시키는 전술이다. 

 쉽게 말하면 '당신의 앎이 권력의 자장 안에서 어떻게 틀 지워지고, 상화작용하고 있는지를 파악해야된다.' 는 것이다. '앎'은 결코 '진리' 일 수가 없다.  그렇게 착각되어 지기는 하지만말이다. 특히 푸코에게 타겟은 '계몽사상'이라는 '앎'이다. 푸코와 아도르노가 만나는 지점으로 많이 이야기되는 부분이다. 단순화시켜 보자면 '계몽= 윤리적 선= 진리' 로 가는 구도에 어깃장을 놓는 것이다. 푸코는 강의 중에 이런 작업을 서구 천년의 철학주인인 플라톤주의에 대한 소피스트의 복귀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다분히 푸코에게 가해지던 비판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푸코의 앎과 권력의 문제는 단적으로 우리 고등학교 철학 교과서에 반영된다. 고등학교 철학교과서의-조금도 의심없는 메인스트림은- '소크라테스-플라톤주의'이다. 소피스트는 소크라테스를 비방한, 곡학아세의 이단아이다. 그런데 여기에 "왜?" 라고 "왜 질문을 던지지 않는가?" 하는 것이 푸코식 방법이다.  

푸코는 절대적 진리의 문제보다 '담론과 권력의 문제' 에 중심을 둔다. (푸코에 대한 가장 일반화된 비판이 제기되는 곳이 이 지점이다.) 대신 푸코는 권력-권리-진실의 역학 관계를 묻기 위해 이런 질문을 한다. 총체적인 진리라든가, 헤겔식의 합의적인 총합 개념을 푸코는 거부한다.

권력의 관계들이 진실의 담론을 생산하기 위해 작동시키는 규칙들은 무엇인가? 

푸코는 자신의 가설과 이론이 일반되는 경향을 스스로 거부함다. 즉 분산된 여러 계보학들에 일관성 있는 이론적 토양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푸코를 구조주의적 틀 안에서 이항적 구도로 환원된다는 비판등은 최소한 그의 바람과는 반대로 작동하고 있는 부분인 것 만은 사실이다. 물론 푸코 텍스트를 독해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자율성이 있지만 푸코로서는 좀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푸코는 일단 자신의 권력 연구의 방법론을 정리한다. 푸코 권력론을 바라보는 핵심은 그가 권력의 문제를 -진실의 문제가 아니라- 힘의 관계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이 점 또한 푸코 비판에서 흔히 제기되는 문제이다. 여기에 푸코가 <감시와 처벌>등에서 말한  권력의 총체적 규율사회,훈육사회화를 덧 대면 가장 세속화화된 비판의 방식이 부각된다. 즉 푸코는 스스로 이항적인 체계에 빠져들면서 아도르노식의 전체주의 사회처럼 권력의 자장 안에 피할 곳이 없는 공간을 만든다는 것이다. 심지어 메르키오르같은 이는 '신무정부주의자'라고 불렀다. 이런 비판의 핵심은 푸코가 권력의 저항지점을 말살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푸코는 또한 실천적인 지성인으로 감옥문제에 관여했고,싸르트르와 거리에서 사진도 찍었고, 또 그의 입으로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라는 말도 남겼다.  도대체 그는 파리 좌안의 몽상적인 이론가였을 뿐인가 아니면 실천적 지성인이었을까? ) 푸코는 푸코의 앎의 방식에 따라 가장 정합적으로 움직였다. 그의 권력 이론은 그런 점에서 저항을 포기한 적이 없다. 문제는 유토피아를 가정하지 못하면 싸움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오래된 불안과 그에 동반하는 신학이다. 물론 유토피아를 상상하면서 나아가면 존재론적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으며, 나와 내 행동 주변에 천사 가브리엘이 임재함이 주는 충만감이 있을 수 있다.( 지젝이라면 정치적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철회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푸코는 권력 연구의 방법론을 이렇게 제시한다. 

 1) 모세혈관처럼 가는 끄뜨머리에서부터 권력을 포착 2) 권력을 의도나 결정의 차원에서 분석하지 말것 3) 권력을 전면적이고 동질적인 지배의 현상으로 간주하지 말것.-"권력은 개인들에게 면세통과될 뿐 그들 중 누구에게도 달라붙지 않는다." "육체를 관통하는 권력의 민주적,무정부주의적 배급은 없다." 4) 권력에 대해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분석 5) 섬세한 메커니즘 속에서 행사되는 권력은 교육이나 앎의 순환장치의 조직, 또는 그저 단순히 앎의 장치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앎의 장치들은 이데올로기적 구조물도 안고 그것의 동반자도 아니다.    

본격적으로<사회를 보호해야한다>의 강의에서는 권력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전쟁'이라는 역사적 요소를 끌어들인다. 푸코가 하는 일은 먼저 <전쟁론>의 클라우제비치를 뒤집는 방식이다. 클라우제비치는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해 지속되는 정치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푸코는 클라우제비치의 이 말에 앞서 그가 전유했던 다른 개념이 있다는 것을 가설로 설정한다. 즉 클라우제비치가 그 멋진 말을 남긴 건 그 전에 존재하는 다른 종류의 '전쟁-정치'의 관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푸코는 클라우제비치의 말을 "정치는 다른 수단에 의해 지속되는 전쟁이다." 라고 재전유한다. 이것은 역전된 개념을 재역전 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푸코는 '영구적 사회관계로서의 전쟁, 모든 관계와 모든 권력제도들의 소멸할 수 없는 토대로서의 전쟁에 대한 담론' 을 강조한다. 푸코는 "전쟁은 바로 평화의 암호이다." 라고 말한다. 침울한 담론인가? 사람들이 가능한한 멀리해야 하는 담론인가?  그렇다. 최소한 주도적인 철학-법 담론은 이 자격을 박탈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법으로 출발하려면 이런 '영구전쟁담론'은 말살되어야하기 때문이다. 푸코는 자기의 가설이 '빨치산의 담론'이라고 문학적으로 표현한다. 푸코의 정치적 저항성은 이런 두더쥐의 담론일 뿐, 정치적 허무주의나 정치적 저항의 토대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었다.   

푸코는 철학-법 담론의 반대편에 역사-정치담론을 배치한다. 그리고 분석을 영국과 프랑스에 한정하여 이야기 한다. 그는 역사-정치담론의 출발을 1630년경 영국의 청교도 혁명즈음과 17세기 말 프랑스의 루이 14세 말기 프랑스 귀족들의 정치투쟁으로 본다. 

이 때부터 전쟁은 확고하게 역사의 일부분이라는 분명한 형태로 나타났으며 사회를 두 개로 분리시키는 전쟁, '종족간의 전쟁'의 역사가 가시화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푸코는 이런 '종족전쟁'의 원형이 발전된 것을 부르주아 혁명, 계급 투쟁, 인종주의 전쟁까지 확장한다. 물론 맥락적인 차원에서 이런 투쟁들은 개별성을 갖는다. 다만 푸코의 의미는 계보적인 원형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 하다.

  영국-프랑스의 17세기 18세기에 대한 분석은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인다.영국의 경우 프랑스 출산의 기욤이 영국을 정벌하고 종족전쟁의 역사,정복의 역사를 은폐하고자 했던 역사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프랑스의 경우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띤다. 골족과 게르만족의 관계, 갈로로만 시대 형성에 대한 각기 다른 해석을 소개하며 정복-동화관계에 있어서 훨씬 다양한 스펙트럼이 구성되어 있음을 말한다.(영국-프랑스의 역사에 대해서는 책을 읽는 동안 검색 사이트를 통해 확인하며 넘어가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듯 하다. 최소한 왕조 흐름이라도 말이다.) 

이런 계보적 분석을 통해 결국 푸코가 판독하고자 한 것은 영구적 종족 전쟁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은폐되고 지속되어 왔는가 하는 점이다. 

 푸코의 권력 분석은 먼저 '경제적' 가설과의 결별을 말한다. 자유주의/마르크스주의가 여기에 해당한다. 전자는 권력을 상품. 모든 개인이 무언가 권리를 보유하고 양도하고 이전된다. 후자는  경제적 기능주의가 강하다. 정치권력이 경제에서 존재이유를 찾는방식이 문제가 되며 이 또한 권력을 생산-교환의 방식으로 작동시키고 있다.  
푸코는 '비경제'적 가설에 대해서도 거리를 두거나 확장시킨다. 먼저 권력 억압설이다. 프로이트-라이히의 가설이라고 푸코는 말한다. 푸코의 권력론의 핵심인 '권력은 억압적이기만 한가?' 는 이런 가설에 대한 푸코의 답변이다. 다음으로 권력대치설이다. 이는 니체의 가설로 권력관계의 토대가 힘들의 호전적인 대치로 보는 관점이다. 니체와의 관계에서 푸코의 다른 점 중 하나는 니체가 계몽에 대한 긍정을 예찬한 반면 푸코는 니체보다 훨씬 부정적으로 물고 늘어졌다는 점이다. 푸코는 억압가설과 대치설이 결코 비양립적이지 않다라고 말한다. 푸코는 억압과 전쟁을 관찰하고 이를 수정하여 "권력에서 작동된 메커니즘은 억압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이라는  '생산하는 권력' 이란 개념을 만들어낸다.

 푸코는 과거의 정치사상의 중심인-그리고 여전히 유효한- '계약-압제' 가설에서 가장 먼저 폐기시켜야할 것으로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지목한다. 홉스는 선험적인 권리를 주장하고 이에 대한 양도가 가능하다는 가설을 통해 이를 적용시켰다. 푸코는 '만인에대한 만인의 전쟁'이라는  홉스의 자연상태는 가상적인 것일뿐 실제적인 힘들의 직접관계가 아니라고 말한다.즉 홉스의 전쟁상태는 일종의 '의지의 대립'일뿐이고 , 조정되어야하는 외교의 대상일뿐이다. 
푸코는  홉스가 실제로 제거하고자 했던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했던 정복의 문제였다. <리바이어던>에는 언제나 계약이 있고 신민들의 겁먹은 의지가 있다.  홉스가 모든 전쟁과 모든 정복의 뒤에 계약을 다시 놓고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이론을 보존했던 것은 바로 이 투쟁과 영구 내전의 담론을 교묘하게 회피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홉스의 가장 큰 적은? 전쟁이고 저항이다. 푸코는 권력관계는 법이나 주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지배안에 다시 말해서 역사적으로 널리 펼쳐진 한없이 두텁고 많은 지배관계 안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고, 따라서 역사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앞서 말했지만 이 문제는 푸코 스스로도 주체의 자기실현을 통해 해결하려는 문제였고, 또한 비판이 되기도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푸코의 텍스트 안에는 실천적 의지를 통한 해방의 가능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푸코는 홉스 대신에 조금은 낯선 불랑빌리에라는 프랑스 귀족학자를 분석한다. 불랑빌리가 분석한 프랑스는 왕과의 권력 투쟁에 2개의 전선-즉 귀족/부르주아지가-이 동시에 존재한다. 골족부터 시작되는 계보학적인 권력의 상호관계와 전쟁,지배,동화,재역전의 문제(골족의 멸망한 귀족이 앎을 통해 어떻게 재역전되는지 재미있다.푸코의 저항담론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런 재역전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흥미롭게 따라읽어도 좋은 내용이다.

 그는 불랑빌리에의 현재적 의미를 몇 가지로 정리한다. 

1)전쟁의 우위성 부여 '어떤 형태의 사회건 그 어떤 사회에도 자연법은 없다.' '자연의 평등법칙은 역사의 불평등법칙 앞에서 허약하기 짝이 없다.' '자연의 힘보다 역사의 힘이 훨씬 크다' 상호간에 아무런 지배관계도 없는 개인들 사이의 자유, 그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각기 다른 사람들에 대해 완전히 평등한 그런 자유, 이 자유와 평등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힘이 없고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일 뿐이다. 

2)전쟁이 한 사회체에 자국을 남기는 것은 더 이상 침략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군사제도의 교대를 통해 모든 민간 질서에 전체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푸코의 개념 '내적 제도로서의 전쟁' 

3) 침입과 전투에 의해 표출된 어떤 특정의 힘의 관계가 어떻게 조금씩, 그리고 눈에 띄지 않게 역전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푸코의 개념 '전복의 내적 메커니즘'-->순환론적인 결정론이 아니라 영구적 권력순환 

4)불랭빌리에는 전쟁관계를 모든 사회적 관계 안에 잡아넣었다. 그러나 그의 전쟁은 일반화된 전쟁이다. 그것은 개인들의 전쟁이 아니라 그룹에 대한 그룹의 전쟁이다. 

푸코는 역사-정치담론으로서 '전쟁'의 중요성은 대혁명 이후 축소되었다고 말한다. 
18세기 귀족들이 주체로 부각시킨 '민족'이라는 개념을 부르주아지가 재부활시켰다. 귀족적 반동으로 쓰인 민족은 '왕과의 일체'가 중심적인 핵이었다. 반면 이제부터 민족을 구성하는 것은 왕이 아니고 다른 민족과 싸우기 위해 왕을 세우는 새로운 '민족'개념이 재가동된다. 민족은 국가라는 이름을 얻는다. 이어서 부르주아지는 인민이 되고 국가가 된다. 
  

 이제 푸코는 '권력과 국가'의 문제를 '국가 인종주의' 발전 도상까지 왔다. 17-18세기 신체에 집중된 권력 기술이 18세기 말 신체가 아닌 '생명'을 대상으로 바뀐것이다. 푸코의 권력 개념중에 중요하며 자주 인용되는 '생물정치'(생정치,삶정치 등등으로 번역된다.)란 단어가 나온다.
'생물정치'(바이오 폴리틱스)는 육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종으로서의 인간을 향해 행해지는 권력문제에 관심을 둔다.권력과 앎의 상관관계로 보자면 인구통계학,우생학,공중보건학, 멀리는 사회보장제도가 이런 바이오폴리틱스와 관련을 맺는다. 물론 신체에 작용하는 권력의 기술과 생명에 작용하는 것 사이에는 대립적이지 않는 관계가 설정된다. 푸코는 생물권력이 작동하는 정치제도 안에 인종주의가 개입되고 이는 근대국가에서 행사된다. 도덕주의나 프로파간다의 문화주의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조금 낯선 대목이겠지만 그는 근대 인종주의의 특성은 의식 구조,이데올로기,권력의 거짓등과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권력의 기술하고만 관계한다.즉 이 말은 근대국가는 어느 경계선에서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 안에 이미 인종주의적 맹아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푸코는 나치의 생물권력과 절대군주가 결합된 방식을 '근대국가 기능 안에 새겨진 절대군주의 기제가 도달하는 최종지점'이라고 말한다. 

<사회를 보호해야한다>의 뒷장에는 이 책이 푸코 지적 여정 속에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말해준다. 즉 일종의 휴지기이며 이행기인 상태에서 나온 강의라는 것이다. <감시와 처벌>과 <성의 역사1권: 앎에의 의지>를 탈고한 이후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두 책에서 다루어진 문제들-권력과 앎의 문제, 규율권력-생체권력의 문제 등이 저자의 입을 통해 비교적 친절하게 다루어진다. 푸코가 근대정치사상에 기여한 지점에 관심이 있다면,또한 푸코의 전복적인(이제는 그렇지도 않지만) 접근방식에 관심이 있다면 푸코의 육성으로 그의 생각의 일면을 엿볼 수 있을만한 책이다. 특히 냉전 이후 '일상의 전쟁화'가 코드화된 한국에서 푸코의 접근은  이해되기 쉬운 대목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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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폴라니의 경제사상
J.R.스탠필드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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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그 경관의 일부분이 되어 버린 다수의 사건이-사람들은 이것을 보편적이라고 합니다- 실상은 명확한 역사사 변화의 소산이라는 점을 밝히는 일입니다."  ......미셀 푸코 <자가의 테크놀로지>중에서 

화제가 되었던 TV 광고 카피가 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웃고 넘기자니 실업자 100만 시대에 사는 직장인으로 입맛이 쓰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에서 전가의 보도로 쓰이는 말이 '구조조정' 아니던가? 정규직의 미래는 비정규직이고, 비정규직의 미래는 노숙자가 아니던가?  모두들 공포와 안도의 이중주 속에서 쩔뚝거리며 살고 있다. 20세기 초, 시장자유주의가 초래할 사회시스템의 붕괴를  경고했던 경제학자 칼 폴라니가 지금 한국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모습을 본다면 어떤 쓸쓸한 말을 건넬까 궁금하다.   

신자유주의가 시대의 진리인양 행세하고 있을 때 국내에서는 그에 대한 이론적 방어로 장하준의 '제도주의'가 관심을 끌었다. <사다리걷어차기>,<나쁜 사마리아인>등을 통해 장하준은 피할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여지는 '신자유주의'에 반격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는 일종의 조합주의적 대안을 이야기했다. (장하준의 분석과 조합주의 대안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비판이 있었다.) 그에 대한 비판은 생략하더라도 최소한 그의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은- 새로운 것이 많지는 않지만- 답답한 사람들의 마음에 희색을 돌게했다. 그는 시장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세계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실제로는 보호주의 속에서 성장을 해 놓고 현재의 이해를 위해 '사다리를 걷어차는 식'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비난했다.자본주의의 역사적 성장과정을 예로 들면서 '시장 자본주의'는 영원 불변의 가치가 아닌 역사적이며 상대적이며 또한 말처럼 '진정한 자유방임'인적이 없었음을 지적한다. 장하준의 제도주의적 문제제기 덕분에 국내에서 다시 관심을 끌고 있는 사람이 바로 경제인류학자인 칼 폴라니이다. 그는 시장 자본주의를 인류사적 발전의 도정 위에 올려놓고 그 허구성을 날카롭게 분석한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거대한 변환>도 이런 바람을 타고 오랜만에 국내 재출간을 앞두고 있다. 

칼 폴라니의 개념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배태성(embeddness)'이다.  embed라는 말은 주로 수동형으로 쓰이는 단어인데 '어디 어디에 파묻다' 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제 두가지 질문이 생긴다. '무엇을 어디에 파묻느냐?' 는 주체와 대상의 문제다. 폴라니는 자본주의 역사를 분석하면서 '경제' 는 사회 시스템의 한가지 구성요소임을 강조한다. 결과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랬듯이 '경제'는 '사회' 속에 파묻혀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경제'를 독자적인 것으로 이탈시켜놓은 전통적인 경제학의 형식주의와 시장방임주의자들을 비난한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시장 신화와 그들의 자본주의는 사회 전체의 가치와 존립기반을 붕괴시킨다. 폴라니의 '배태성'을 그대로 전용하면 하면 그들의 자본주의는 편협하고 몰역사적이며,자민족중심적인 즉 이탈된(disembedded) 것이다. 이제 앞서 말한 몹쓸 TV 광고 카피를 폴라니와 연결시켜 보자. 폴라니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재-배태성' (Reimbeddeness)은 이런 말이다.'  

'집 나간 경제, 너도 개고생 그만하고, 남들 개고생도 그만 시키고 이제 사회의 품으로 돌아와라'

그렇다면 사회의 우선성을 요구한 칼 폴라니의 경제 사상에 영향을 준 것들은 무엇일까?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꼽을 수 있다. 폴라니는 <초기 제국에서의 교역과 시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느 누구도 지금까지 인간생활의 물질적 조직을 깊이 꿰뚫어 본 사람은 없었다. 그는 사회 속에서 경제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의 문제를 폭넓게 제기하였던 것이다. 

폴라니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 사회의 시장경제를 통해서 경제에 대한 사회의 우월성과 경제의 '형식주의'에 반하는 '실체주의'의 전거를 확보한다. 모든 그리스 철학의 핵심 과제는 '공동체의 안위'로 귀결된다. 폴라니가 관심을 가진 것은 정보의 평등과 합리적 의사결정이라는 허구적 상황하에서 수요=공급의 일치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경제행위가 제도화되는 방식,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제도가 사회,정치,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폴라니가 '얼치기 시장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한 것은 단지 그것이 경제 행위 한가지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탱하고 있는 사고방식과 그들이 만들어 내는 시장신화와 이기적 개인이라는 근대적 개념들은 한 사회의 시스템 자체를 붕괴 시킬 끔찍한 디스토피아를 그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폴라니는 그런 면에서 형식주의자들과 달리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시장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 외에 폴라니는 마르크스와 오웬에게 영향을 받는다. 특히 그는 오웬이 제기한 '자본주의적 경향성이 갖는 항구적 악의 산출'이라는 문제를 문화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여 수용한다.  폴라니는 마르크스에게도 영향을 받았지만  일정정도 선을 긋는다. 문제는 마르크스의 '경제 결정주의'-정확히 말해서는 폴라니의 시대에 마르크스주의의 주류였던 '제 2 인터내셔널의 경제주의-에 반감때문이다. 폴라니의 방법론이 가진 인류학적 상대주의와 다원적인 경제사관은 마르크스의 '총체성'과 이론적으로도 어느 정도 배치될 수 밖에 없다.  

폴라니는 세칭 말하는 아담 스미스부터 시작되는 수요-공급의 주류경제학에 대항해 '인류학과 비교경제사'를 학문적 방법론으로 채택한다. 그는 시장자유주의자들이 제기하는 '이기적 인간관'에 제동을 걸면서 고대 사회의 경제 연구를 통해 '호혜성','재분배','증여' 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한다. 폴라니의 경제인류학의 연구의 사례들을 여기서 모두 설명하기란 힘들다.결론적으로 역사적 과정을 통해 그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자본주의적 인간'과 '자본주의적 사회'의 출현은 인류 역사에서 근자의 일이며 또한 일반적인 형태도 본성적인 태도도 아니었음을-폴라니는 자민족주의적 경제라고 말한다- 증명한다.  '시장자유주의자'들이 줄곧 외치는 '자본주의=이윤동기=이기적 인간본성'이라는 식의 도식 역시 고대 사회의 경제 연구를 통해 의심받는다. 고대의 어떤 사회에서도 '경제'를 우위에 둔 사회는 없었으며 '공동체'의 안위를 파괴하는 '이기적 개인'이나 제도를 방치한 사회도 없다.  

만약 사회의 실체인 인간과 자연,뿐만 아니라 이를 조직화한 기업이 파괴적인 악마의 맷돌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면...어떤 사회라도 무지막지한 허구적 시스템의 결과 앞에서 잠시도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폴라니는 <거대한 변환>에서 이런 전통 사회의 흐름이 단절되는 19세기의 사회경제를 집중적으로 분석한다.(이 책의 저자인 스탠필드는 폴라니와 달리 17세기론을 주장한다.) 그는 19세기 자본주의 경제의 제도적 특징을 '세력균형','금본위제','자유국가','자기조정적 시장경제' 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자기조정적 시장경제'라는 것이다. 이 말은 시장이 알아서 합리적으로 결정해준다는 시장자유주의자들의 금과옥조이자 신화이다. 폴라니는 결코 시장경제가 인간조건의 자연적 또는 자연발생적 성장의 결과가 아니라고 본다. 또한 자기조정적 시장이라는 것 역시 하나의 이데올로기였으며 이것이 점차 정책에 영향을 미쳐 자유방임주의 정책을 만들게 되었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결국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설계' 라는 개념이 중요하다. 그에 따르면 다수의 시장만 가지고 시장경제가 형성되지는 않는다. 아담 스미스 이전에도 시장은 많았고 어디에나 있었지만 그것을 '시장경제'라고 하지는 않는다. 폴라니는 시장경제 발생의 '인간설계'의 중요한 요소로 '국가의 개입'을 들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시장자유주의자들은 '국가'를 적대시하며 '최소국가'를 요구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국가의 제도적 지원의 혜택을 누린다. '이현령 비현령 상인윤리'다.   

시장경제가 이렇게 형성되었으면 교환이라는 것이 핵심요소로 나서야한다. 자본주의적 교환은 '상품'이 없으며 불가능하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폴라니의 유명한 개념인 '허구적 상품'이 시장에 당당히 나서는 것이다. 폴라니는 '노동, 토지, 화폐' 를 허구의 상품이라고 말한다. 

노동, 토지와 화폐는 본래 상품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노동은 생활 그 자체와 함께 하고 따라서 그 성질상 판매하기 위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며..인간 활동의 다른 이름이다. 토지는 인간에 의해 생산되지 않는 자연의 다른 이름이다. 실질적 화폐는 결코 생산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며 은행이나 국가재정의 메커니즘을 통해 존재하게 되는 구매력의 표시일 뿐이다. ... 노동, 토지, 화폐에 상품이라는 말을 붙인 것 자체가 완전히 허구적이다. 

물론 폴라니는 이 세가지 요소가 상품처럼 교환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 스탠필드의 설명을 조금 더 들어보자.  

폴라니의 핵심은 시장경제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상품의 허구성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것, 이것은 시장경제의 허구적 또는 신비화된 기초는 자기조정적 시장경제의 신비적 성격으로 나타난다.허구적 전제를 기초로 세워진 시장경제의 모양은 사회조직의 현실적 개념이 아니다. 이는 철저하게 유토피아적 개념인 것이다.  

폴라니의 견해를 정리하면 시장자유주의 경제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실체이긴 하지만 이질적인 녀석이다. 또한 그 출발부터 시작해서 유지양상조차 허구적이다. 그런데 두려운 것은 이 녀석을 그냥 두었을 경우 사회는 총체적 파국상태를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폴라니를 비관주의자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마지막에 중요한 개념이 하나 더 있다. 미셀 푸코는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폴라니는 이런 식으로 말한다. 

인간사회는 자기 파괴적인 메커니즘을 무디게 하는 대항적 방어운동이 없었더라면 멸망했을 것이다. 

폴라니는 '자기조정적 시장'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반동적인 움직임'이 늘 상존한다는 것을 말했다. 자기조정적 시장이 인간본성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기서 벗어나려는 경향이 자연발생적이라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폴라니는 국가의 개임 뿐만이 아니라 역사적 제단계-심지어 제국주의나 민족주의,법인기업들-마저도 그런 방어적 반응의 주체가 되곤 한다고 말한다. 폴라나의 이러한 생각은 '조합주의 복지국가'나 '혼합경제'에 반영된다. 그는 자신의 주장이 좌파 집산주의로 오해받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속류 맑스주의 목적주의적 결정론과 반자유주의에 반대했다. 그와 함께  폴라니는 방어적 반응이 시장경제의 보완물로 작동시키는 '협애한 개입주의'에도 선을 긋는다. 그는 자기조정적 시장경제 해체를 요구하지만 결코 이것이 시장의 소멸을 예고하지는 않았다. 시장메커니즘은 어쨋든 도구성을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장경제가 붕괴되는 자리에 두가지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그것은 관리된 경제를 운영하는 두 가지 사회적 실체로서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이다. 폴라니는 이탈된 경제를 복원하여 '관리된 경제'로 돌아섰을 때의 문제를 '자유'의 훼손으로보는 '편협한 자유론'을 공격한다. 

자유주의자에게 자유의 개념은 단지 자유기업의 옹호로 전락하였다.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은 무책임의 경제학을 대표하는 것이다.  

J.M 클라크는 '통제의 경제학은 무책임의 경제학과 싸우고 있는 중이다.' 라는 말로 나쁜 자유에 대항하는 소중한 자유의 의미를 되짚어내었다. 폴라니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 보다 풍부한 자유를 제공해야 할 임무에 성실하는 한 권력이나 계획화가 인간에게 등을 돌리고 인간이 그 덕분에 구축하고 있는 자유를 파괴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이것이 복합사회에 있어서 자유의 의미이다. 

<칼 폴라니의 경제사상>은 폴라니의 경제사상의 출발과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폴라니의 저서들을 중심으로 주된 이야기를 끌어나가고 있지만 조금 더 가시성 높은 설명을 위해서 폴라니 이후 연구자들과 경제인류학자들의 저서들 중 유사한 대목들을 인용한다. 또한 역자의 보론에서는 제도주의학파의 창시자로 알려진 베블렌과 폴라니를 비교하여 제도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경제인류학을 통해 유사한 접근을 시도한 폴라니를 동류항으로 묶고 있다.또한 간략하게나마 베블렌 이후의 제도주의 지류들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는 것도 장점이다.  

이 책에 나오지는 않지만 폴라니의 한계에 대한 부분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그의 방법론이 '고대'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 계보적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 형성과정의 허구성을 지적해 낸 부분은 인정하지만 역사적 존재로 등장한 자본주의 이후의 문제에 대해 치밀하지 못하다는 점, 또는 문헌적 접근을 중심으로 한 결과 결국 실제적 생산-노동의 관계성 속에서 작용-반작용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 또한 자연스러운 반작용 형성과정을 형식적으로 설명하며 동력 형성의 주체 문제는 거론되지 않는다는 점, 국가와 자본을 둘러싼 담론에서 국가의 선험적 중립성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자본주의 외에 대안이 없다', '시장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이다'는 식으로 고개를 박고 있는 사람들에게 폴라니는 충분한 해독제 역할은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관적이게도 '종교적 신념'은 때로는 맹목적이어서 잘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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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주의! 저항에서 유희로 한길컬처북스 23
바트 무어-길버트 지음, 이경원 옮김 / 한길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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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헤어조그의 영화 <위대한 피츠카랄도>를 기억하는가? 피츠제랄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보다는 조금 덜 유명하지만 그래도 관뚜겅 열기전에 봐야할 '세계 100대 영화' 같은 강박적인 목조르기를 요구하는 목록에 가끔 들기도 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오페라매니아인 피츠카랄도가 자신의 근거지인- 제국주의 사업현장이다- 아마존 강가에 오페라 하우스를 짓고자 한다. 다들 미친 짓이라고 손가락질 하지만 무모함마저 번뜩이게 보이는 금발의 백인은 증기선을 타고 오페라하우스를 지으러 간다. 하지만 가는 길에 난관에 부딪힌다. 폭포와 물살이 세서 도저히 원하는 목적까지 뱃길로 갈 수가 없는 것이다.  무모한 예술광은 드디어 사람들이 꿈에서나 상상하던 일을 실행한다. 배를 타고 산을 넘는 것이다. 실제 촬영도 증기선을 끌어서 산을 넘는 장면을 찍는다.마치 다큐멘터리인양 말이다. 영화 호사가들에게 가장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킨 건 실제로 인력을 동원하여 배를 산으로 넘긴 헤어조그의 광기어린 스펙터클이다. 이발소 그림같은 CG가 난무하는 <반지의 제왕>류의 스펙터클과는 완전히 종류가 다르다. 실제로 이 장면은 아마존의 야성과 날 것으로서의 광기가 결합을 하여 눈을 뗄수 없게 한다. 대형 화면에서 봤다면 영화의 줄거리나 해석을 떠나 이 장면이 주는 스텍터클과 살아 있는 장면을 만든 뒷이야기가 주는 아우라로 인해 순간적으로 해석적 감각이 교란되는 경험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위대한 피츠카랄도>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원주민과 피츠카랄도의 첫 대면장면이었다. 서구와 비서구의 시선이 교차하는 긴장을 상당히 멋지게 영상화해내었다. 아마존강의 고요한 흐름과 간헐적으로 울어대는 이름모를 이국의 새들. 그리고 그 어딘가에 숨어 있는 눈동자들. 이런 긴장에 이물감을 던져 넣는 것이 축음기를 통해 나오는 오페라다. 서로 다른 문명이 서로를 맞대고 숲의 리듬과 오페라의 멜로디를 따라  이렇게 치열하게 만나는 장면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바둑 고수들의 대국처럼 서로 한 점의 포석만을 해놓고 장고를 하는 것 같았다. 오페라는 이 영화를 끌어가는 모티브이자 피츠카랄도의 의지이고 또 문명의 상징이다. 그리고 또한 피스카랄도의 실패의 증거이며 끝까지 잃지 않으려는 서구 인본주의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흔히들 영화<쇼생크탈출>의 교도소 오페라씬을 영화 속 최고의 오페라 씬이라고 추천한다. 그렇지만 내게 -그 해석의 정치학을 떠나서- 최고의 오페라씬은 아직까지는 <위대한 피츠카랄도>의 고물 배 위의 오페라씬이다. 실패했지만 시거를 하나 물고 뱃전에서 오페라를 듣는 클라우스 킨스키의 미소는 잊혀지지 않는다.그리고 그의 당당함에 영화의 지배적 의미가 부여될 때 이 영화의 정치성은 '위대한 인간의 휴머니즘'이라는 식민담론이 백인을 미화해내는 정치적 전형을 따라가게 된다. 그것은 일종의 '인간 승리'라는 유혹적인 반정치의 방식으로 정치의 문제를 반어적으로 각성시키는 셈이다.  

바트무어 길버트의 <탈식민주의! 저항에서 유희로>를 이야기 하기 전에 글머리가 너무 무거워졌다. 언젠가 '피츠카랄도'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했는데 떡본김에 제사지내는 심정이 되었다. 이 책은 탈식민주의 이론에 대한 전반적인 입문서로서 상당히 잘씌여졌다. 저자의 글쓰기 방식이 평이해서였는지, 역자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돋보여서인지  이런 류의 번역서에서 종종 발견되는 소화불량은 거의 없었다. 이 책이 특히 돋보이는 것은 입문서로서 가져야 할 서술의 방법과 접근태도가 일목요연하다는 것이다. <탈식민주의 저향에서 유희로>의 구성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서론에 해당하는 부문에서는 '탈식민주의 이론'의 전반적 경향을 일러둔다. 탈식민주의에 대한 현재적 비평-즉  텍스트화된 자족적 비평과 학문적 정체-를 소개하고 이런 비판의 정당성과 반론의 근거를 이야기한다. 먼저 저자는 현재 '탈식민주의 이론'을 둘러싼 비판적 논의를 이해하기 '탈식민주의 비평'과 '탈식민주의 이론'을 방법론적으로 구분한다. 이 책에서는 후자쪽에 중심을 두고 이후 주요 작업이 이루어진다. 본론에는 '탈식민주의 이론'의 '성삼위'라고 말해도 무방할 세 명의 주인공들의 이론이 소개된다. 에드워드 사이드, 가야트리 스피박, 호미 바바이다.(올해 번역 예정된 책 중에 호미 바바의 <민족과 서사>가 있는 것으로 안다.) 이 책에서는 먼저 각 사상가들의 이론이 출발하게 된 계기와 방법론, 그리고 그들 이론의 변천사를 정리한다. 이 세사람은 모두 탈식민주의 이론가로 칭송받지만 '탈식민주의'에 접근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 사이드가 '서구/비서구'의 이항대립적 구도를 명확히 전거로 삼고 있다면 스피박은 '하위계층'과 '페미니즘' 문제에 호비바바는 '양가성'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 그렇다보니 서로 비판하며 충돌할 수 있는 대목들이 나온다. 저자는 그런 문제들을 그 때 그 때 상호비교를 통해서 설명한다. 즉 차이를 통해서 그들 이론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좀 더 명쾌하게 이해시키는 것이다. 이 세 명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나면 결론 부문에서 저자는 '탈식민주의 비평'과 '탈식민주의 이론'과의 변증법적 화해를 도모한다. 기본적으로 이 둘 사이의 단절보다는 연속성을 인정하면서 다양성과 차이성의 발현을 해소되지 않는 방식으로 결합시키기를 요구한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대위법적인 화해' 그 중에서도 '무조협주곡'의 화해라는 것에 저자가 긍정적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저자는 먼저 현재 탈식민주의 이론에 대한 항간의 비판으로 식민성 논의에 '고급 이론'의 도입을 통해 '텍스트적 혁명' 즉 지적 유희단계로 나아가는 경향성에 대해 언급한다. 이런 차원에서 탈식민주의 이론의 시작점 또는 분기점으로 보는 것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다. 이 책의 선구적 업적은 사이드의 옹호자나 비판자들 마저도 인정하지 않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는 <오리엔탈리즘>을 기점으로 해서-그래서 저자 입장에서는 이 책을 분기점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탈식민주의 비평' 과 '탈식민주의 이론'으로 구분한다. 그렇다면 '탈식민주의 이론'에 전거가 되기도 하고 또 탈식민주의 이론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가 되기도 하는 '탈식민주의 비평'은 무엇인가? 시간적으로 보자면 물론 <오리엔탈리즘>이전에 존재했던 강력한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 비평전통이다. 이 책은 주로 아프리카 탈식민주의자들을 이야기한다. 물론 다양성과 차이성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책 후반부에 일종의 모델로서 카리브해 비평모델을 설명하기는 한다. 우리에게 가장 유명한 탈식민주의 비평가는 알제리의 파농이다. 그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은 '탈식민주의 비평'의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받으며 또 '탈식민주의이론'이 역사성과 물질성을 수혜받을 수 있는 전거로 자주 제시되곤 한다.  

이 책에서는 '탈식민주의 삼총사'의 이론을 비판하면서 세가지 비평의 잣대가 자주 동원된다. 먼저 탈식민주의 자체 내의 상호비평, 두 번째는 탈식민주의 비평가들의 작업, 마지막으로는 마르크스주의 비평이다. 아마드의 <이론 안에서>는 이 책 전반에 걸쳐서 여러번 거론된다. 물론 이 세가지는 다시 합종연횡의 방식으로 각각의 이론들의 비판과 반비판의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내부 비판과 외부자극이 가능한 것은 궁극적을 '탈식민주의론' 자체가 다루어야 하는 대상이 정치,경제, 문화, 민족, 인종, 역사,정체성, 주체,  등등에 걸쳐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방법론적 접근에 있어서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이 전거로 삼는 이론들의 혼재성도 문제가 된다. 사이드는 푸코와 그람시를 혼합하려고 한다. 스피박은 데리다와 마르크스를 넘나든다. 바바는 푸코와 라캉이 서로 덧붙여진다. 저자는 여기에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이 스스로 끊임없이 또는 모순적인방식으로 자신들의 이론을 수정해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이드의 경우는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사이에서도 차이가 생긴다. 결정론적인 푸코를 받아들였던 사이드는 후기에 가면서 저항의 문제와 저항 주체의 긍정성에 대해 훨씬 우호적으로 나아간다.또한 방법론적으로도 앞의 저서가 서구작가들의 텍스트 분석을 통한 오리엔탈리즘의 입증이었다면 후기 작업에서는 비서구작가의 작품에 더 높은 관심을 보여서 그 상화연관성을 두텁게 한다. 물론 저자는 정치와 문화의 불가분성이나 일체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두 책의 일관성을 강조하는 부분도 잊지 않는다. 스피박은 '하위계층'의 재현을 두고 왔다 갔다 한다. 스스로도 '모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밝힌 스피박이니 오죽하겠는가. 스피박은 사이드에 비해 애초부터 식민담론보다 저항담론에 더 비중을 둔다.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으로 결국 다시 '서구/비서구'의 동질화 반복과정을 택한 것에 비해 사이드가 덜 관심을 둔 이질성과 여성주체 문제를 화두로 꺼내든다. 그녀는 인도라는 상황하에서 '서발턴'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면서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 라는 제목만으로도 전통적 질문을 구성해낼 문제에 달려든다. 스피박은 초기에는 하위계층을 완전한 타자로 설명했으나 후기에는 개입을 통하 발화가능성에 기대기도 한다. 또한 발화자로서 스피박 자신의 위치에 대해 인정하면서 탈식민주의 논의 자체가 반복하게 될 또 다른 형태의 폭력에 대해 경계한다. 스피박은 기본적으로 이질성과 차이를 중요시 여기면서도 '전략적 본질론'이라는 개념을 통해 신식민지적 상황의 해방을 위한 연대의 길을 열어놓는다. 호미 바바는 '혼종성'과 '양가성'이란 개념을 통해서 식민주의 권력의 일방적 관계에 다른 선을 하나 긋는다. 바바는 '모방'이란 것이 일종의 저항의 형태로 반복된다고 말하며 모든 문화의 혼종화 과정에 대해 강조한다. 이것은 파농이 과거에 지적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즉 식민권력자는 결코 전제적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며 대항 권력으로부터 늘 불안해하며 또 스스로도 재구성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식민 권력의 문제를 조금 더 다양한 측면에서 볼 수 있게 해주기도 하며 또한 극단적인 패배주의적 심리상태에 위안이 되기도 한다. 바바의 이런 생각은 물론 식민관계의 물리적 권력의 힘을 간과한다는 지적과 함께 식민권력에 대한 작용과 피지배자에 대한 작용을 동일한 결과로 본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사실 이 책에 나오는 사이드, 스피박, 바바의 이론과 그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들을 정리하는데만도 꽤나 오랜시간이 걸릴 것이다. 또한 그런 담론 투쟁이 담고 있는 의미까지 되짚어서 둘아본다면 그 두배의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방법론적으로 저자가 이 담론 투쟁들을 구획하고 있는 방식들을 따라가는 것이 어쩌면 편의적인 발상이긴 하지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몇가지 대립적인 개념들이다. 제국주의/ 신식민주의, 정체성/혼종성, 보편성/특수성, 통일성/이질성, 물질성/비물질성, 경험주의/담론주의. 이 책에 나오는 탈식민주의 논의와 그에 대한 비판은 사실 이런 커다란 개념들의 밑바탕하에서 이것들을 배합하면서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제국주의담론'이 물질성과 경험주의에 강조를 두고 있다고 본다면 탈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은 그런 층위에서 이루어진다. 각론으로 봐도 이와 유사하다. 사이드가 개별 식민국가의 다양한 양상에 대해 보편적인 이론의 문제를 제기한다면 바바나 스피박같은 이들은 탈식민주의 내에서도 차이성에 더 큰 애정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러한 강조는 가끔 또다른 형태의 본질론으로 환원되는 이론적 모순이 발생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하위주체'를 강조하며 이론적 구획을 시도하다보면 특정하게 양식화된 하위주체가 발현되고 마는 본질화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만다는 것이다. 바바에게도 그런 문제가 누차 발생한다. 보편적으로 말하자면 의도하지 않았던 특화와 의도하지 않았던 묵살이 발생하게 된다.  

'보편/특수'에 대한 최근의 추세는 물론 절충과 연대이다. 쉽게 말해서 계급과 소수자의 연대같은 이런 나이브한 개념들 말이다. 사실 이 책에 등장하는 비판가들 중에는 이런 인본주의적인 나이브함을 환상을 심어주는 행위라고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도대체 어떤 형태로 연대할 것인지에 대한 지도도 없으면서 헛된 망상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결론에서는 탈식민주의 이론에 대한 절충론적 해법과 문화적 혼종성, 다양성, 역사적 차이의 인정과 또한 연대를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탈식민주의의 다양한 논의에 대해 구하의 입을 통해 긍정적으로 묘사한다.일종의 탈식민주의 버전 인도판 '백화제방 백가쟁명'에 대한 긍정성이다.   

" 이러한 문제틀을 탐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있을 수 없다. 백 송이의 꽃이 만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잡초가 자라나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 한가지 사족을 얹자면 이 책의 저자는 문학 전공자이다. 사이드부터 해서 대개의 탈식민주의이론가들이 문학을 텍스트로 탈식민주의를 분석하고 있다. 입문서가 가진 계열성의 특징을 따라간 것이기도 했겠지만 아무래도 문학의 비중이 높다. 이 책에서 사이드에 대한 '제국주의 담론'측 비판자로 자주 등장하는 존 매켄지의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가 보완물이 될 수도 있을 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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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철학
프리도 릭켄 지음, 김성진 옮김 / 서광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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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드팀전): 안녕하십니까? 

A.(드팀전 @) : 안팎으로 부는 바람이 날카로와서 그다지 안녕치는 못합니다. 배를 바닥에 깔고 있자니 답답하고 고개를 들자니 모래바람에 눈을 뜨기 어렵군요. 

Q: 음...(그냥 인사치레로 한 말인데 '안녕합니다' 하면 되지..) 그렇군요. 요즘 직장인들을 대표한다는 사자성어 '복지부동'을 실천하고 계시군요. 

A: 예,'복지부동' 하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살아가려면 바람의 움직임을 잘 살펴야 하는데 그렇게 영민하지는 못해서요. 고성능안테나를 올리지는 못하고 바닥에 머리 박은 김에 모래 위에 개미들이 어떻게 사는지 살펴보고 있어요. 꼬물 꼬물 다니는 녀석들의 움직임을 보는 것도 새로운 발견입디다. 

Q: (이거 완전 똘아니야?. 농담따먹으며 뭔 인터뷰를 하겠다고) 예 예.. 후에 개미 연구 성과물이 나오면 그 이야기는 그 때 다시 한 번 하기로 하구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먼저 요즘 난데 없이 지중해쪽으로 가셨습니다. 여권이나 비자도 없이 말이지요. 최근 그리스에 관심을 가지신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A: 음...글쎄요. 일종의 '오래된 미래' 의 자기 발견정도 아닐까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걸어왔던 길이잖아요. 예를 들자면, 몇 년전 부터 산티아고 순례가 여행객들의 필수코스로 들어가잖아요. 그러니까 산티아고 길 옆에 사는 농부인 셈입니다.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와서 열심히 가는 걸 보아만 온거죠. 그러면서 한동안 '뭐 한다고 저런데..' 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농한기도 되고  할 일도 없고 그런 참에 '저기 가면 뭐가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겨서 그냥 뒷꽁무니를 따라가는 그런 형상입니다. 

Q: 네...그래도 무언가 좀 더 특별한 계기나 결정적인 이유가 있을 듯 한데요. 

A: 앞서 말했듯이 큰 계기는 따로 없구요...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적은 있습니다. 학문을 하는데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직업으로서의 학문' 다른 하나는 '교양으로서의 학문' 말이지요. 30대 초반쯤에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아마 그 때 공부를 계속 했으면 유학가서 '예술사회학'이나 '문화연구' 같은 걸 했을 것 같아요. 어쨋거나 그 길은 제가 가지 않았던 길이었구요. 그러니까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일단은 포기한 거지요. 결국 남는 건 '교양으로서의 학문'입니다. 전자에 비해 학문적인 객관성이나 엄정함,체계성 같은 것은 덜할 수 밖에 없어요.대신 잡식성의 즐거움은 있습니다. 억지로 딱딱한 걸 먹어서 배탈날 일도 없구요, 적당히 자기가 조절하면서 씹어낼 수 있으니까 좋구요. 가끔은 목마를 때 레몬에이드도 한잔 마실 수 있구요. 제 현재 위치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세부적인 철학 용어 하나를 가지고 그 의미와 해석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훈련도 필요하고 ,물론 그 역할도 중요하지만 제게 그건 '학문하는 전문가' 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저런 것들을 깨치고 느껴서 자기 안에서 어떻게 통합해내고 또 나를 변형해내고...결국엔 그게 세상을 어떻게 변형해 낼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거에요. 예를 들어 어떤 철학자 하나 열심히 읽고 그 세론들을 분석하며 연구소에서만 왕 노릇하며 대접받는다면 그거는 '포름알데히드 철학'을 통해서 자기자리 보전하려는 생계 수단인거죠. 별거 아니에요. 농사꾼이 '쟁기'로 생계를 유지하는 거고, 대학 교수는 '학문'을 쟁기삼아 먹고 사는 거죠. 중요한 것은 그 '쟁기'가 아니라 '쟁기'를 쓰는 사람이니까요. 쟁기를 날렵하게 갈았다고 그가 최고의 수확을 거두는 것도 아니고 하늘과 땅의 섭리를 아는 농사꾼도 아니라는거지요. 사람들은 가끔 착각을 해요. 전문적인 용어의 엄밀성을 따지며 상대방의 '야코'를 죽이면 자기가 위대한 인간이 된 줄 압니다. 그런데 그거 그냥 '좋은 쟁기'만 열심히 닦아대다 보면 하는 거에요. 앞서 말했듯이 '좋은 농부'는 '쟁기'만 갈지 않지요.  

학문이라는 쟁기 가는데 청춘을 다 보낸 이들도 사실 불쌍하긴 해요.대학이라는 바닥은 자칭 '달마대사'같은 노인들이 엉덩이까지 파묻고 있어서 뚫기도 쉽지 않지요...간접적으로 들어본 바에 의하면 그 바닥이 아주 상종못할치들이 많지요. 배운 건 많으니 말들은 많고 지기는 죽기보다 싫고...하여간 한국의 학문구조가 그래서 제가 공부를 안한 걸 수도 있어요...핑계치고 약하지만. 어쨋거나불우한 강사들을 여럿 알아서 그런지 ^^  

Q: 그러니까 '교양인'으로서 이론적 엄정함과 학제적인 틀에 신경을 덜 쓰며 사는게 좋다는 말이시군요. 그런데 '그리스철학'에 기본적인 공부를 하신 적은 있나요? 

A: 기본적인 공부라여 그저 대학교 철학사 수업수준이지요. 소크라테스를 읽었던 것도 그 때였던것 같구요. 딱히 그리스라고 더 애정을 가진 적은 없었습니다. 저는 사회과학을 공부한 사람이었구 그 쪽에 매력을 느꼇지만 철학을 제대로 공부한 적은 없어요. 물론 늘 관심은 갖고 있고 파편적으로 얻어들은 것들은 있지만 말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사회과학에서 말하는 '비판이론' 쪽이 가장 흥미로왔습니다. 아무래도 학부과정에서 대학교수님들의 영향이 컸겠지만 말입니다. 그 쪽 분들이 강의도 잘하시고 사회참여적이셨거든요. 대학 다닐때도 제 관심은 마르크스와 그의 후예들 정도 였습니다. 지금도 전 마르크스와 그 후예들의 분석이 이 사회를 읽어내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해요. 그런면에서 잡탕 마르크스파 손들어보라고 하면 저기 보이지 않는 한쪽 구석에서 쑥스럽게 손을 들지도 모릅니다. 잡탕 마르크스파와 그 후예들 하면 사실 안걸리는 사람이 몇 없을지도 모른다구요...흐흐 .그렇지만 그건 중요한 여러 가지 중에 하나일뿐 .. 어쨋거나 이런 저런 책을 보다보면 자꾸 그리스가 걸리더라구요. 니체나 아도르노 같은 이들도 그리스에 대해 일가견이 있었구요...푸코 같은 이들은 후반부에 '그리스의 회귀기'가 오기도 하잖아요. 하여간 어딜 가든지 걸리는 인간들이 몇 있는데 예를 들자면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니체도 꼭 넣고 싶어요. 이런 사람들의 원저작들도 사실 그다지 많이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원저작을 읽는다고 바로 뭔 그림이 나오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관계성 속에서 파악되지 못하면 사실 별 의미가 없는 어려운 내용만 가득한 책으로 끝날 수 도 있잖아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바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들어가지 않는 이유입니다. 물론 그 기간동안 이런 책만 읽지는 않아요. 직업적 학문을 할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도 없구요...긴 시간을 잣대로 삼아서 하면 곧바로 플라톤의 <국가>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읽지 않는다고 부담스러울 필요가 없는거지요. 예를 들자면 이 두 책을 가운데 두고 멀리서부터 포위해 들어가는 식으로 읽는거에요. 그러려다 보니 대학교재같은 책들도 읽고 또 읽다가 다른 지류를 타고 잠시 세기도 하고...뭐 그렇죠. 그런데 이렇게 우회하다보면 의외로 재미있는 것들이 많이 걸려요.  그리스 미술 관련된 책도 좀 읽어야 겠다 싶구...펠로폰네소스전쟁사도 그렇고..완역본이 이제 곧 나올 3대 비극작가의 작품들도 다 읽고 싶고...호머와 베르길리우스도 마저 읽어야겠구. 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철학자들의 유물론도 상당히 흥미롭고 에피쿠로스의 철학도 그런 의미에서 매력적이구...하여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즐거움이 큽니다. 

Q: 시간도 없고 지면도 한정적이고 보는 사람도 지겨우니 좀 짧게 대답해 주실것을 부탁드리구요..이 책 <그리스 철학>은 어떻게 보셨어요? 

A: 한마디로 하면 '대학교재용 그리스 철학입문서' 정도가 좋을 것 같아요. 다루는 범위도 밀레토스학파부터 해서 플라티노스의 신플라톤학파 까지 다루니 고대 그리스 철학 전범위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봐야겠네요. 책 구성은 크게 4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 이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헬레니즘. 이렇게 말이지요. 책의 분량으로 구분해서 그런겁니다. 즉 각 파트가 4분의 1분량쯤으로 보시면 됩니다. 이렇게 보면 당연히 이 책에서 가장 큰 비중으로 거론하고 있는 곳이 어딘지 아시겟지요. 대부분 입문서가 그렇듯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책의 절반쯤에 해당하는 겁니다. 

Q: 책의 구성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납득이 갈 만하구요. '대학교재용' 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네요.긍정적인 의미인가요? 

A: 말 그대로입니다. '대학교재용' 이라는 의미는 군더더기 없이 핵심적인 내용만 건조한 문체로 씌였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선생님 아래서 읽는다면 훨씬 풍요로와 질 수 있는 내용입니다. 요즘 인기가 있는 '철학 소설류'와 비교하면 브라보 콘과 죠스바를 떠올리시면 되겟네요. 이 책의 장점은 다른 사족을 붙이지 않는 대신 압축적으로 각 시대와 철학자들의 사상을 요약하고 있다는 겁니다. 대신 이런 개념이 태동하게 되는 사회적 관계니 역사적 배경이니 하는 것은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많이들 보는 거스리의 <희랍 철학 입문>은 그런 면에서 조금 더 친철한 강의록이지요. 거스리의 경우에는 서문부터 그리스철학에 접근하는 태도부터 설명을 시작하니까요. 친철한 대신 분석적이고 개념적인 면에서는 아무래도 대중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서로 보완적으로 보면 좋을 책인 듯 싶어요. 물론 입문서들 안에서만 비교하면 말이지요. 시기적으로도 거스리의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끝나기 때문에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 

Q: 다른 장점들이 있나요? 

A: 이 책을 처음에 펼쳐보면 각 챕터들마다 넘버링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넘버링을 해놨을까 처음에는 궁금했는데요...읽다보면 이 넘버링이 상당히 유용합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이런 식입니다.  

(214)스토아 학파는 크세노크라테스(128)을 본받아 철학을 물리학,윤리학, 논리학으로 나눈다....이런한 로고스의 개념과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 개념(33) 과의 유사성은 분명하다.  

214번 챕터의 문장 일부이다. 스토아 학파의 개괄을 그리는 장인데.....플라톤 후기학파인 크세노크라테스를 살펴보려면 128번 챕터를 보면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 개념은 33번 챕터에 소개되어 있다. 이런 식의 서술은 각 철학학파 사이에서도 발견되기도 하고 또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같은 경우는 앞선 개념들을 재설명하는데도 이용된다. 

186번 챕터 중 일부--'아레테'의 사용범위는 도덕적 언어의 영역에만 제한되지 않는다.도구들이나 수공 기술자,그리고 신체기관들도 인간 자체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아레테'를 가질 수 있다. 이 개념은 능력의 개념과 연관된다.(168) 

168번 챕터 중 일부- <영혼론>에서 발췌....형상은 실제의 활동을 위한 능력이다. 영혼은 한 살아 있는 생명체의 형상이며 그것은 도끼의 기능 수행 능력과 그리고 눈의 시각 능력에 비교된다.아리스토텔레스는 합성체인 우시아,형상,질료를 서로 구별한다. 그리고 형상은 현실태와 동일시 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형상은 제 1의 현실태이며,이것은 제2의 현실태와 구별된다....결국 형상 또는 제 1현실태는 식물이나 동물에 있어서 그들의 제2현실태인 자신의 생명활동을 수행하는 잠재적 늘력이다.  

Q: 아무래도 압축된 여러개념이 폭풍우처럼 몰아치고 있을때 그 때 그 때 네비게이션을 들여다 볼 수 있으면 좋긴 하겠네요. 앞서 본 이야기들도 정신없이 몰아부치는 개념들 앞에서는 잊어버리곤 하는거니까요. 그 외에 다른 장점은 뭐 없나요? 

A: 한 철학자나 학파의 시작은 대개 생애나 구성과정에 대한 이야기로 출발하는데요...여기에는 후세의 연구가들의 해석에 따라 좀 다르게 읽히는 부분들이 있지요. 프리도 릭켄은 짧지만 이런 후대 분석가들의 해석을 소개합니다. 예를 들어 철학의 시작이라는 밀레토스학파 부분을 보지요. 도대체 밀레토스와 함께 무엇이 시작된거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새로운가 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저자는 몇 가지 상이한 접근을 소개하지요. 버넷의 경우 밀레토스인들의 신화와의 단절을 강조합니다. 반편 콘퍼드는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이 실험을 알지 못한 검증할 수 없는 것으로 그저 언어의 추상성에서만 신화와 구별된다고 합니다. 이 둘 사이에 예거는 이오니아인들이 합리적이고 경험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신학적 동기를 무시할 수 없다고 합니다.예거는 이 시기를 그리스인들의 철학적 신학기라고 명명하지요. 이런 식입니다. 그리스 철학의 출발을 가지고도 다른 해석이 가능하듯이...뒤에 나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체계에 대해서도 강조점에 따라 다른 부분이 있지요. 길게는 아니지만 이런 걸 언급해주는 것은 넓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측면에서 좋아 보입니다.

Q: <그리스철학>을 보면서 특히 좀 어렵게 느껴진 부분이 있었다면? 

A: 어느 한 부분이 쉬웠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구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쪽이 좀 어렵더군요. 특히 인식론부분에서요. 아무래도 인식론쪽에 대한 기초가 좀 부족해서 그런 것 같기도하구요. 언어를 중심으로 논리 함수 안에서 존재론을 탐색해나가는 방식이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물론 가장 크게 어려운 것은 '그리스 사유' 전체를 유지하는 공통된 가치들입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과 우리와 다른 것은 물론이고,그들의 사유방식와 사유의 토대가 현재와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그런 차이와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본다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일은 아니었습니다. 이건 그리스 철학을 읽는 내내 따라 다닐 문제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플라톤의 '국가'가 지금같은 체계를 갖춘 국가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그럼 뭐냐? '폴리스'다. 그럼 '폴리스'는 편의상 '도시국가냐?' 그렇다. 편의상 그렇게 하자.  그럼 '도시국가'는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토대와 어떤 가치 위에 서 있느냐? ....우리가 생각하는 작은 규모의 도시냐? ....그런데 이게 아니라는 거지요. 이런 개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이라는 개념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절제'라는 개념에도 그렇습니다. 거의 모든 단어들이 지금과는 다른 뉘앙스를 갖고 있다는 것 때문에 일종의 잃어버린 아틀란티스 대륙 위의 문장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결국 '내가 아는 것이 그들이 아는 것인가?" 라는 생각마저 들게끔 말이지요. 어쨋거나 누적된 현대적 이성과도 거리를 두면서 또 오래된 미래의 이성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점이 녹록치 않은 작업입니다. 

Q: 시간도 많이 되었고, 대단한 내용은 없지만 할 말은 다 한것 같지요.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묻고 끝내겠습니다. 리뷰를 이따구 방식으로 작성하신 이유를 한번 물어보고 싶고요.제 출연료는 줍니까? 

A: 음...제가 출연료를 요구해야하는거 아닌가요?  

Q: 음..그렇게 되나요? 그럼 서로 없던 이야기로 하구요..앞의 질문, 리뷰를 이딴 장난질로 처리한 이유나 들어봅시다.  

A: 딱히...뭐 매번 똑같이 쓰는 것도 지루하구요. 리뷰 형식도 가끔 바꿔주면 좋잖아요. 그리고 <그리스철학> 이란는 엄청난 내용을 어떻게 써야 할지 답도 없구. 책의 구성만 쓰기도 그렇고, 각 장을 정리할 수 도 없구,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야 앞으로도 또 울궈먹을테니까 그 때 그 때 하면 되고....하여간 궁여지책이자 지루함을 달래는 방식이었어요. 널리 이해 부탁해요. 

Q: (그럼 그렇지...쯔) 네...알겠습니다. 오늘 시간 내주셔서 고맙구요. 앞으로는 이딴 짓은 좀 자제해 보세요. 감사합니다. 

A: 네...이런 진부한 방식말고 색다른 형식실험을 모색해 볼께요. 능력된다면...감사합니다.(너 죽었어...사람불러 놓고 이따구로 인터뷰질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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