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변증법 - 철학적 단상 우리 시대의 고전 12
테오도르 아도르노 외 지음, 김유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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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체적 개념화를 거부하는 그의 글쓰기는 도구적 글읽기 이성에게 방해가 된다. 수행적이다. 이성의 자기반복과 파괴가 이루어지더라도 우리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아도르노는 지금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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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가 어쨌다구? What's Up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한보희 옮김 / 새물결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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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책이다. MTV 이론가로서의 지젝 보다는 정치철학(?)요리사로서의 지젝이 어울린다. 정치와 대중 의식, 문화연구와 비평이 주메뉴다. 당신이 정의의 편이라면 읽어야 한다. 당신에겐 삐딱한 성찰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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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누구나 철학총서 5
김현강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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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적인 지젝 입문서로서 용이하다. 지젝의 책을 몇 권 읽은 이들에게도 환승하는 공항대합실로 유용하다. 김포공항에서 바라본 서울이 서울의 진면목은 아니라는 한계와 도약의 긍정적 가능성만은 남겨놓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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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인주의 신화
이언 와트 지음, 이시연.강유나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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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천왕' 이라는 말이 있다. 그 시작은 8-90년대 홍콩,대만 영화의 젊은 배우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여명,장학우,유덕화,곽부성'이 그들이다. 이 말은 불교에서 동서남북을 관장한다는 사천왕상에서 그 모델명을 따온 것이다. 지금은 이 단어는 '한류4대천왕'이니 '얼짱 4대천왕'이니 해서 반복된다. 팬들 사이의 갈등은 대개 네번째 인물의 선택여부를 두고 발생한다. 즉 대개가 3번째까지는 비슷한 공감들이 형성한다. 문제는 늘 마지막 탑승자다. 궁금하다 싶으면, 걸그룹 4대천왕을 주위 사람들과 한번 논의해보시라.  

 

이안 와트의 <근대 개인주의 신화>에도 4대 천왕이 나온다. 그의 분석에 설득력을 부여할 문학사의 살아있는 유명 캐릭터들이다. 그 역시 네번째 인물의 선정 과정에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통상적으로 많이 뽑히지만 이안 와트에게서 보딩패스를 받지 못한 인물은 고뇌하는 인간 '햄릿'이다. 그가 페르소나 논 그라타(외교상 기피인물)이 된 이유는 햄릿이 지식인층에 유독 사랑을 받는 매니아적 인물이라는 것때문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이 책과는 관련이 없는 내용이므로 이 정도에서 지나가는 것이 좋을 성 싶다. 

 

 이제 저자가 선정한 4대 천왕들을 살펴보자. 면면은 이렇다. 악마와 거래하는 파우스트, 늙은 기사 돈키호테, 바람둥이 돈 후안, 무인도 표류자 로빈슨 크루소. (아무래도 '돈 후안'은 도덕적 이유때문에 도서 선정위원들의 기피인물이 아닐까 싶다. 그 덕분에 우리는 돈 후안에 대해 잘 모른다. 개인적으로도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조반니>와 조니뎁과 말론브랜도가 나온 영화<돈 주앙>밖에 보지 않았다.)저자는 이들이야 말로 '근대문학을 통과하며 개인주의를 반영하고 신화가 된 네 명의 남자들'이라고 단언한다. 로빈슨 크루소의 꽤재재함이나 돈키호테의 앙상함이 이미지적으로는 아이돌 4대천황의 위용만은 못하다. 그러나 이 옹색해보이는 늙은 인물들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아이돌들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고 빛을 발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근대 개인주의 신화>는 총 3장(르네상스와 반종교개혁기/낭만주의/20세기)으로 구성된다. 각 장의 마지막에 구체적 작품 분석을 넘어서 시대적 흐름과 몇 가지 개념형들에 대한 이해, 전체적 윤곽을 파악하는데 긴요한 평론이 실려있다. 이언 와트는 서문에서 이 책이 통사적인 연구임을 밝힌다. 4명의 인물은 최소한 그 시대의 어떤 흐름들을 반영하고 또 동시에 변형되어 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반영론이 늘 환영받는 것은 아니고 정당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예술이라는 것은 시대적 속성을 갖고 있긴 하지만 또 그것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영론이든 초월론이든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만큼 비평의 진폭을 크게 가져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안 와트는 이 4명의 인물의 성격과 위치들이 16세기와 17세기를 거치면서 어떻게 변모되어 가는지를 따라가고 있다. 그것을 통해 애초 이 인물의 탄생의 기원과는 매우 다른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 인물들에게 변화를 가한 사회적 영향력들을 고려하게끔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인물들은 -시기적으로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반종교개혁기라 불리는 반동적 시기에 태어났다.

 

파우스트,돈키호테,돈 후안은 모두 르네상스의 적극적이고 개인주의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뜻대로 나아가고자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반종교개혁 세력과 갈등하게 된다. <근대 개인주의 신화>(P.15)

 

이 인물들이 사회와 '갈등'한다는 점이 촛점이다. 이안 와트는-왠지 이름부터 영국 탐정 샬록 홈즈의 향기를 뿌리지 않는가?- '갈등'의 양상 속에서 네 인물들이 반동적 종교개혁기를 뚫고 낭만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어떻게 문학 속의 신화가 되어가는지를  그 흔적을 추적해 나간다. 대표적으로 괴테의 <파우스트>로 정착된 '파우스트박사'이야기를 보자. 파우스트 이야기는 16세기 전반부 흑마술사 게오르크 파우스트라는 인물로 부터 시작된다. 마술에 적대적이었던 당대의 인문학자들의 글을 통해 그의 존재가 확인된다. 그는 스스로 '파우스트의 후계자' '제2의 마구스'라고 칭하고 다녔다. 실제 마술사로서 작은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남색가라는 둥 유아 성애자라는 둥 사기꾼이라는 둥 세간의 혹평도 안고 있었다. 이안 와트는 당대 인문학자들이 점성술사나 영지주의적 마술사의 후계자라고 지칭하는 자를 언급하고 공격한 것에 실마리를 얻는다. 

 

학자들은 실존 인물로서의 게오르크 파우스트가 말로와 괴테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의 모델로  

얼마나 부적절한지 밝히는데 집중해왔기 때문에,실존 인물 파우스트가 어떻게 해서-나름 졸렬한 방식으로 나마-신화를 생겨나게 한 주요 세력들에게 매혹적인 상징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하지 못했다. <근대 개인주의 신화>(P.32)

 

이후 파우스트를 악마와 연관하여 부활시키는데는 루터파가 큰 역할을 한다. 루터는 기본적으로 신의 세계 속에 부정의 대상으로 악마성의 존재를 인정했다. 인문학자들이 이성의 힘에 의해 마술적 권능을 부정한데 비해 루터파와 기독교는 그런 '힘'이 있으며 그것이 이원론적 세계 속에서 악은  악마와의 거래를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구상화해낸다. 이안 와트가 떠돌이 실존인물인 게오르크 파우스크가 신화 속의 전설족 존재로 만든 가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때문이다.

이후 1587년에 괴테의 <파우스트>의 원전이라 불려도 손색없을 <파우스트 서>가 독일에서 출간된다. 몇 가지 원형들이 이 때 만들어지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성격부여, 욕망의 부정,기독교적 징벌메커니즘, 계약과 이행에 대한 강조 등이 그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16세기 기독교의 확산과 개인주의의 도래하에 '교훈주의'가 강조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후 영국의 크리스토퍼 말로의 <파우스트박사의 생과사의 비극적 역사>가 등장한다. 이안 와트에 따르면, 크리스토퍼 말로가 당대 대단히 파격적인, 파우스트적 인간이었다고 한다. 그가 파악하는 말로의 파우스트 신화 요체는 세가지로 요약된다. '개인의 직업선택, 대학 지성의 소외, 영혼의 영원한 파멸'이 그것이다. 흔히 파우스트를 '지식인 신화'의 대표적인 양상으로 꼽는 것이 말로의 공헌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이 '영혼의 영원한 파멸'이다. 이것을 이안와트는 종교적 분위기 하에서 개인주의가 반응한 위악적 선택의 결과로 바라본다. 즉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열망을 이어받았으나 실현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복수와도 같은 것이다.

 

'아, 피타고라스의 윤회설이 진실이라면 내 영혼은 나를 떠나고 나는 야만의 짐승으로 바뀌련만. 모든 짐승들은 행복하도다. 죽으면 그 영혼은 곧 스러지나니' <파우스트박사의 생과사의 비극적 역사 5막 2장>

 

이안 와트는 반종교개혁기의 통제된 개인주의의 욕망이 신이 주었다고 하는 불멸의 영혼에 사망선고를 내리는 형식으로 일종의 복수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클리언스 브룩의 결론을 재인용하며, 파우스트가 자신의 개인성을 유지한 것이 '그의 영광이자 파멸' 이라고 말한다.

 

청교도 윤리에 질식당한 주인공들은 부르주아 낭만주의 시대를 거치며 개인주의의 도래를 알리는 신화화된 인물로 변모된다. 이안 와트는 이 시기에 원작자들의 의도를 초월하는 의미를 얻는 단계로 이행된다고 말한다. 먼저 <근대 개인주의 신화>에서는 이런 대표적 경향으로 디포의 <로빈슨크루소>를 예로 든다. 경제적 개인주의, 현실적이고 실리적 철학, 노동의 강조, 고립, 자기중심성, 종교적 개인주의(근대적 개인에게 종교는 '일요일의 종교'라는 말로 중세적 의미에서 추락한다.) 등의 특징을 갖는 주인공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루소의 개인주의적 고립상태 ,마르크스의 노동과 여가,헤르더의 낭만주의 신화 등의 아이디어를 로빈슨 크루소의 특징을 설명하는 개념적 도구로 사용한다. 파우스트는 그럼 어떨까?  드디어 괴테의 손에 의해 인류의 고전으로 탄생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먼저 이안 와트는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의 '완전한 감정능력'에 관심을 갖는다. 그것은 "산다는 것의 의미"를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이며 "나 자신의 자아를 무한히 뻗어 모든 인류의 자아를 끌어당기기" 를 원하는 일이다. 저자는 괴테에 있어 파우스트가 1/2부 사이의 구성적 절연 속에서도 '진정한 자기중심적 탐색'이라는 과정을 멈추지 않는다고 분석한다. 이 시기에 특히 부각되는 파우스트의 특징 중 하나는 '낭만적 사랑'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율배반적인 부분이 있다. 현실적으로 여성은 비천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대신 그에 대한 반대 급부의 상상적 효과가 바로 '구원녀'식의 낭만주의적 여성관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외에도 괴테의 파우스트가 갖는 근대적 인간형의 증거 수첩에 변증법적 통일성 개념, 지적 엘리트주의, 경험과 행위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 등을 추가로 기록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20세기의 파우스트,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의 아드리안 레버퀸을 만나게 된다. 토만스 만의 이 소설은 당대 독일 역사에 대한 비극적 패러디의 운명을 갖고 있다. 이안 와트는 토마스 만에게서 '징벌적 개념'이 다시 부각되는 것을 읽는다. 하지만 이것은 과거의 종교적 의미와는 관련이 없다. 독일의 역사적 죄과에 대한 토마스 만의 신념이다. 괴테의 파우스트가 궁극적으로 구원이라는 통합을 얻어내는 반면 만의 주인공은 그렇게 되지 못한다. 저자는 아드리안 레버퀸이 '가장 부정적이고 불쾌한 형태의 개인주의를 자기중심적으로 구현하는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그가 '진살과 개인' 모두에 등을 돌리는 형태를 나치즘과 연결시킨다. 즉 개인주의적 극단의 선택이 가장 반-개인적 신념에 봉사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토마스만은 '파우스트와 독일의 동질성'을 연결시키고 있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파우스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요약했지만, 이 책<근대 개인주의 신화>의 주인공은 앞서 말했다시피, 파우스트,돈키호테,돈후안,로빈슨 크루소 이렇게 4명이다. 저자는 이들의 탄생부터 즉 반종교개혁기-낭만주의-근대를 '개인주의'의 형성을 둘러싼 갈등과 통합의 드라마로 설명한다. 이 주인공들은 탄생의 시기도, 지역도, 변화 양상도, 극중 캐릭터도 모두 차이가 있다. 저자는 이 잘나고 이기적인 인물들 중 라만차의 돈키호테 캐릭터에 사랑을 표현한다. 시대와 갈등하는 이 인물 중 가장 매력적이라는 것이 이유다.(그렇지 않겠는가?)  다양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안 와트는 결론에서 궁극적으로 이들을 묶는 개인주의의 슬로건을 "나란 놈 단지 생겨먹을 대로 살아갈 것이다." 로 요약한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 역시 주위에서 흔히 듣는 말이다. 결국 이 4명의 인물들은 어떻게든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내적 심성 또는 가치관의 일부를 선취하고 구현한 부분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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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생각 - 정의에서 민주주의까지
애덤 스위프트 지음, 김비환 옮김 / 개마고원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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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어느 책에서가 "이 땅에 살고 세계에 거주한다." 라는 말을 했다. '정치'의 존재조건이자 인간의 조건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고전적 의미에서 인간의 모둠살이는 정치를 만들며 정치가 모둠살이를 반영한다. 또 정치의 주체는 정치의 외연을 생산한다. 넓은 의미에서는 세계 속의 타자와 관계 맺는 일 자체가 정치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를 대단히 협소하게 이해한다. 지그문트 바우먼은 <자유>라는 책에서 이 책의 주요 주제인 '자유'에 대해 '소비자로서의 자유'만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시민적 공화주의 구성을 요청하는 벤저만 바버 역시 그의 책 <강한 시민사회 강한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것이 그저 '투표자'로서의 자유로 축소되었다고 반성을 요청한다. 결국 이런 수동적 정치인식은 스스로를 정치로 부터 소외시킨다.  새로운 해방의 사유형식은 언감생심이다. 냉소주의와 허무주의가 그 자리를 차지게하게 된다. 에이프릴 카터가 <직접행동>에서 시민적 참여를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한점, 특히 비폭력 투쟁에 힘을 실어 말한 것은 이같은 정치냉소주의에 공간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이 책 <정치의 생각>에도 나오지만 기술발전과 더불어 소통방식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즉 인터넷이나 SNS등의 소통 수단의 발전은 그나마 정치적 사안에 대안 담론 공간을 넓혀 놓았다. 하지만 정치적 사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측도 '선거'라는 정치 행위 범주 주변에서 배회한다.  "어떤 가치가 자신의 주장을-또는 타인의 것을- 정당화하는가?" 대해 깊이 있게 돌아보지 않는다. 진지한 고민과 합리적 사유보다는 수사학에 더 민감하다. 이성의 사용보다는 '파토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정당화의 근거가 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예를 들어 '사회 정의, 자유, 민주주의 '등등. 어느 누가 이런 가치들을 거부할 것인가? 어느 누가 이런 가치들은  용도폐기 대상이라고 말하겠는가? 그렇다보니 이런 가치들은 대개 자신을 방어하고 타자를 공격하는 기표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것이 실정이다. 해마다 TV 에 깜짝 등장해서 의아하게 만드는 00 공작원들이나 어르신 연대같은 단체들의 수사는 어떤가? 그들 모두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공동체를 수호하자."라고 말하지 않던가. 그들을 수구 반동 세력이라고 하면서 비판하는 진보 진영에서도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슬로건으로 그들을 공격한다. 이 둘이 만나서 행동을 멈출 때는 '애국가'가 흘러나올 때 뿐일지도 모른다. 수사 위에 같은 이름의 또 다른 수사가 쌓여 바벨의 탑이 만들어진다. 패거리 지어 싸우는 것이 정치이지만,현실정치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그들이 말하고는 있는 슬로건의 다층적,심층적 의미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한다. 자신이 쓰고 있는 자기를 규정하고 또 보호해주는 그 정치적 정당성에 대해서 말이다. 

 

이제 우리는 <정치의 생각>이 제기하는 길을 따라 '정치철학'이 거주하는 곳으로 이동할 준비가 된 것이다.   

 

"먼저 우리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적 이상들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런 정치적 이상들에 대한 상이한 해석들을 잘 알아둘 필요가 있다........우리에게는 정치철학이 필요하다."   <정치의 생각> (P.15)

 

<정치의 생각>의 구조는 일목요연하다. 정치는 가치의 정당성과 윤리의 문제를 포괄한다는 전제하에 시작된다. 정치철학은 도덕적 문제와 민감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저작의 생각이다. 먼저 애덤스위프트의 서론과 역사 김비환의 후기를 통해 이 책을 통해 정치문제를 바로보는 3가지 커다란 틀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저자는 정치를 '현실적, 단기적, 실행적, 대중현상' 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정치철학은 '개념적,장기적, 진리의추구' 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애덤 스위프트의 구분이다. 그리고 역자 김비환은 '정치철학'을 다시 한번 두가지로 나눈다. '전통적 정치철학'과 '분석적 정치철학이다' 우선 전자(전통적 정치철학)은 '거대정치담론,계급,민족, 국가, 제도, 혁명' 등을 다룬다. 마르크스주의에 영향을 받은 좌파가 다루는 정치철학도 이런 범주에 포함될 것이다. (좌파의 정치철학이 이런 거시담론의 분야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후자인 (분석적 정치철학)은 시민의 관점, 합리적 토론, 개념 또는 주장의 분석'을 과제로 한다. 그리고 그 목적은 현실적 정치문제에서의 토론과정에 실용적 장치를 제공하고 사고의 기본틀을 제시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 <정치의 생각>은 '정치철학책이며, 분석적 정치철학을 다룬다' 라고 하면 책에 대한 가장 압축적 설명이 될 수 있다.

 

애덤 스위프트는 <정치의 생각>에서 5가지 주제를 다룬다. '사회정의, 자유, 평등, 공동체, 민주주의' 가 그것이다. 저자는 비교적 공정하게 해당 견해와 이견들을 설명하는 입장에 서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시민사회중심의 자유주의적 입장을 강조함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그가 공동체 장을 설명하면서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오해를 재반론하는 형태를 취했기때문에 생긴 오해일 수도 있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겠으나,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애덤 스위프트가 최소한 대중들을 위한 정치 입문서로서 이 책의 서술에 상당히 균형잡힌 시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먼저 '사회정의'의 장에서는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말한 존 롤스와 노직의 '자유지상주의'를 대비시키고 있다. 롤스의 3가지원칙을 정리하면 1)평등한 기회원칙 2)공정기회의 원칙 3)차등의 원칙(최소극대화의 원리)라가 할 수 있다. 노직은 소유권 절대화 개념으로 맞선다. 노직의 재분배에 대한 흥미로운 주장은 '패턴에 따른 재분배에 대한 반대'개념이다. 절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에게 이는 정당한 소유권 행사에 대한 자유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던져야 하는 문제는 "과연 절대적 소유권의 경계가 어디인가?" 라는 질문이다. 또한 분배적 정의를 둘러싼 흥미로운 개념이 하나 등장하는 데 그것은 '응분의 몫'이라는 개념이다. 롤스와 노직이 각기 다른 이유로 응분의 몫에 대해 반대했는데 직관적 사고와의 차이점을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과제거리가 된다.

 

'자유'의 개념은 크게 이사야 벌린의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자유'개념의 이원성을 비판하면서 논의가 진행된다. 애덤 스위프트는 제럴드 맥킬럼의 " X는 Z를 하는데 Y로부터 자유롭다" 라는 유기적 차원의 자유를 그 대안으로 제시한다. 즉 벌린이 나눈 두가지 자유개념은 애초부터 분리가 불가능한 개념을 허구적으로 분리시켜 자유의 개념을 혼동시키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스위프트는 이 중 이사야 벌린이 전체주의적 도구화의 우려때문에 저어했던 '적극적 자유'를 포용하면서 다른 틀로 '적극적 자유'의 개념을 다원화시킨다. 애덤 스위프트의 개념틀은 '형식적 자유/ 실질적 자유,자율성/ 원하는 것을 할 자유','참여의 자유/ 사적개인의 자유' 이다. .    

 

<정치의 생각>에서 가장 눈여겨 보게되는 부분은 평등이다. 모두가 좋아하는(?) 평등 말이다. 먼저 스위프트는 정치적으로 '평등주의적 전제'를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시민들 사이의 평등이다. 이 문제는 실제적 의미에 있어서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특히 좌파 쪽에서는 이런 식의 동일성에 근거한 시민사회적 정당화에 의심의 눈길을 오래도록 보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타당하다. 하지만 이것은 건너뛰도록 하자. 평등을 좀 더 주의깊에 읽어야 하는 이유는 현재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몇 번의 복지논쟁과 이를 둘러싼 정치적 사태 이후 급선회한 의심쩍은(?) 한국의 복지담론 상황 때문이기도 하다. 최소한 '복지=평등'이라는 고정된 개념 구도하에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평등' 에 대한 접근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애덤 스위프트는 평등처럼 보이지만 '평등' 개념과는 관련이 없는 몇 가지 생각들을 정리한다. 대표적인 것이 밴덤류의 공리주의, 라즈의 '체감의 원칙' 그리고 충분함에 대한 사유이다. 직관주의와 결과론적 사고의 경직성에 대해 비판적 참고가 될 수 있는 입장들이다. 개념어가 낯설 수 있는 라즈의 '체감의 원칙'을 보자. 이런 말이다. '재화의 요구가 덜 긴급한 사람들로부터 긴급한 사람들에게 재분배한다.'는 것. 쉽게 말하자면, 하루 굶은 사람보다 사흘 굶은 사람에게 먼저 밥을 준다는 것이다. 직관적으로 매우 옳바르다. 하지만 "이것이 '평등'이라는 개념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라고 질문할 수 있다. 

 

"우리가 상대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우선적인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들의 배고픔이 더 크고 그들의 필요가 더 절박하며 그들의 고통이 더 괴롭기에,배고픈 자들과 가난한 자들 그리고 질병으로 고통받는 자들에게 우리의 관심이 쏠리기 때문이지 평등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다." <정치의 생각>(p.178)

 

이것은 굳이 평등의 이름이 아니어도 정당화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선이란 개념은 어떤가? 또는 휴머니즘? 또는 자유의 확장? 애덤 스위프트는  재화의 편중이 비교를 위한 수단이지 그것이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스위프트는 지위재의 예를 들면서 상대적 격차를 인정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가 우려하는 바는 일종의 전체주의적 평등이다. 그것은 하향평준화를 초래할 수 있으며, 생산력의 진보에 위배될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는 사회적으로 발생하는 상대적 격차의 문제 유발하는 자존감 결여, 건강 불평등, 우애등의 연대의식의 문제들을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공동체'편은 자유주의를 오해하는 공동체주의자들에 대한 재반론 형태로 구성된다. 물론 몇가지 공동체주의에 대한 전제들이 있다. 공동체주의가 하나의 일관된 흐름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정치적 공동체주의(이 책에서 주로 논의하는)와 정치적 공동체주의가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한국적 상황에 맞추보면 정치적 공동체주의는 코뮌식의 좌파 급진주의부터 유교적 공동체복원까지 실로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갖는다.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앞서 말한 자유주의에 대한 오해들 중  몇 가지 문장을 모아 보면 이렇다. "자유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이라고 가정한다."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방식을 무시한다." "자유주의자들은 국가가 중립적일 수 있고 또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  이런 것들이 공동체주의가 자유주의에 덧씌운 오해 또는 몰이해라는 것이 스위프트의 생각이다. 저자는 이를 자유주의차원에서 반박함으로써 공동체주의/자유주의가 가진 미묘한 차이, 또는 일종의 비중 차이를 전한다. 특히 첫번째 언급한 '자유주의=자기중심주의,이기주의' 라는 만연한 오해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의 목적이라는 차원에서 부연을 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자유주의의 극단적 왜곡 형태를 자유주의와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해서 말이다.

 

"자유주의의 목적은 이기주의를 제한하는 규칙과 법률체계를 지지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자율적인 개인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동등한 관심과 존중을 보장받도록 하는 것이다." <정치의 생각>(p206)

"자유주의자들이 공동선을 무시한다고 비난하는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 정의 자체가 하나의 공동선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p224)

 

즉 자유주의의 긴 역사를 두고 봐도 '타인의 자유와의 양립'문제가 가장 큰 논쟁의 전장이었다. 아니 자유주의의 전부가 그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를 '자기만의 자유'라고 이해하는 것, 또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소아병적이다.

 

마지막 장이 문제많은 '민주주의'편이다. 애덤 스위프트는 다른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가 수사적으로는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정치체계의 모든 측면'을 나타내는 용어라고 말한다. 헌정질서를 유린한 독재자 역시 '민주' 와 '정의'를 말한다. 애덤 스위프트는 '자율' 또는 self-rule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민주주의를 고찰한다. 링컨의 유명한 문구를 빌자면 '민주주의는 인민에 의한 지배'이다. 그리고 이제 구체적인 문제로 참여방식이 가진 다양한 문제점들과 정당화 노력들을 설명한다. 결국 자기통치라는 개념은 법률로 이루어지는데, 법률의 생산에 관여할 수 있는 형식들과 관련된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이 문제에 가장 큰 걸림돌은 '대의제'였다. 대의제의 문제는 여러번 지적되었기 때문에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직접 민주주의의 실현이라고 제기된 전자민주주의 역시 애덤 스위프트는 비판한다. 직접 민주주의가 가져올 비전문성,비합리성 등을 문제삼는다. 이것은 대중현상의 부정적 측면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또한 올바른 결정과 정당한 결정의 차이를 물을수 도 있다.

 

좀 오래된 이야기이다. 알라딘에서 과거에 다수결 투표로 정치적 저항의 가부를 결정하자는 이야기가 있었던 적이 있다. 물론 투표 구성권의 문제(주권의 영역문제) 부터 피할 수 없는 함정이 있는 내용이었다. 백의 하나를 양보해서 '여론투표'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런 문장들은 편의주의적으로 다수결에 의지하려는 사고가 왜 반민주주의적인지 경종을 울리는 말이다. 설정된 의제 중 어떤 것들은 다수결로 논의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점만 명확히 하자.

 

"민주주의적 권위는 스스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데까지는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인민은 민주적 절차를 통해서도 애초에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권리들을 박탈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의 생각>(p274)

"(드워킨은) 시민들을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민주적 가치가 또한 다수결적 의사결정의 범위를 제한하는 원칙들도 정당화시켜준다고 말한다."

(p275)

 

대략적으로 <정치의 생각>에서 등장하는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 '정치의 계절'이라고 말이 자주들리는 때다. 이 말은 묘한 역설적 함의를 담고 있다. 마치 정치라는 것이 선거에 한정지어지며 반복적으로 돌아오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당연히 권리의 주체들이 수동적 대상이 된다. 오히려 주권자들은 대략 정치란 걸 잊고 지내다가 돌아오는 계절에야 비로서 양도된 권리를 찾으러 간다는 의미같다. 정치의 수금사원화다. 둘 다 모두 틀렸다. 비록 생활의 에너지의 대부분을 생계유지를 위해 사용하게 만드는 구조적 요인이 있다고 할지로도 정치는 4년마다 돌아오는 고지서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계절이라는 기후적 에피스테메에 사로잡힌 순환적 정치의 시간의 개념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주권자의 권리는 늘 우리에게 존재한다. 수금사원들을 뽑는 것만이 정치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것들에 숟가락 하나 더 얹는 것도 정치가 아니다. 정치는 .... 그래.... 듣기 좋은 말로....생성하는 것이다. 무엇을 만들까? 누가 만들까? 이제는 너무 흔한 혜안이 되어 버린 말.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이다." 라는 말을 중얼거리게된다. 애덤 스위프트의 <정치의 생각>은 우리에게 그런 준비를 위해 무엇을 더 살펴봐야 할지,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 속에 무엇이 더 들어 있고, 그 개념에 우리는 무엇을 더 넣을 수 있는지 고민해 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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