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인가 현대의 지성 84
강정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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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소크라테스가 남겼다는 유명한 말, "악법도 법이다." 의 딜레마는 사실 오래전에 해소되었다.  최소한 감각적으로는 그렇다. "악법은 법이 아니다. 그리고 나쁜 법은 고치면 된다." 대학 1학년 때부터 불법 시위에 대한 주요 신문의 논설에 수시로 인용되던 문구가 소크라테스가 남겼다는 저 말이다. 나는 '법대로 하자' 라는 말에 대해서도 좀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그 말은 '법의 구성적 성격' 을 외면하고 현재 있는 실정법을 최고의 가치로 놓는 견해에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말의 함의에는 '우리사회에서는 법대로 되지 않는게 정상이다' 라는 인식론이 깔려있다.다들 말은 안하지만 법에 대해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법치주의'의 실종이라는 비이성적 상황이 정상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법은 공동선을 구현하고 구성원들의 이해를 조절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법은 일종의 젤리같은 것이다.어떤 완전한 형태를 갖고 있지만 또한 유동적이다. 내게는 '법실증주의'보다는 '법구성론'이 훨씬 매력적인 주제이다. 이 말이 법규정을 임의적으로 해석하고 마음대로 공동 규약을 위반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학자는 한국사회에서 실종된 '법치주의'에 대한 소시민의 반동이 작은 형태의 위반을 일상화한다고 말한다. 즉 높은 놈들은 몇 백억원을 해먹고도 잠시 카메라 앞에 포즈 취하고 풀려나는 마당이니 내가 좀 위반한다고 뭐 그리 대수인가 하는 식이다. 앞서 말한 '법치주의의 실종' 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가치인 '법치주의'를 완성하고 또 그 너머에서 '법의 구성적 과정'과 법의 사각 지대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강정인의 <소크라테스,악법도 법인가?> 중에서 소크라테스와 관련된 논문은 권창은 교수의 논문과 함께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에 실린 듯 하다.(이 책을 살펴보지 않아서 정확하진 않다.) 강정인의 이 책은 '소크라테스'문제 만을 다루고 있진 않다. 그 뒤에는 '시민불복종'의 문제, '진보와 보수'의 문제, 정치 불참의 의미,북한에 대한 내재적 접근과 외재적 접근의 장단점 등 정치학계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여러 주제들을 거론한다. 책의 제목이 <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인가?>여서 이 책이 온전히 소크라테스에게만 바쳐진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단 첫 주제는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의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디쯤에 '악법도 법이다' 라는 문구가 나오는지 찾아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결론은 하나다. 액면 그래도 '악법도 법이다' 라는 문장은 소크라테스의 책 어느 한 구석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자기의 벌어진 입으로 '악법도 법이거든' 이라고 말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는 거다.(행여 그 문장을 그대로 찾아낸다면 서양철학사가들이 깜짝 놀랄만한 세계적인 발견이 될 것이다. 그러니 유명해지고 싶으면 어서 찾아보자)  이 문구는 소크라테스의 격언이라고 해서 교과서는 물론이고 인터넷에서도 유령처럼 배회한다. 서양철학사가 김주일 교수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번역 과정의 오류에서부터 기인한다. '악법=법'이라는 번역을 국내에 통용 시킨 것은 일본의 법철학자 오다카 도모오다. 1937년에 개정한 <법철학>에서 소크라테스를 전거에 두면서 '악법도 법이기 때문에 응히 지켜야하며..' 라고 쓰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한번 굳어진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더우기 그것이 지배 이데올로그들로 활용하기 좋다면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후광을 뒤에 업고 싶은 정당성 없는 정권들은 반정부세력들의 실정법 위반에 대한 대중 이데올로그로 이 말을 적극 사용한다. 물론 신민 만들기에 앞장서는 국정 교과서가 소년 소녀들에게 이 말을 유포한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자...일단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은 아니다는 건 정리되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은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똑같이 그런 말을 하진 않았어도 그런 해석이 가능한 말을 한 건 아닌가요? " 빙고...그렇다. 좋은 질문이다. 이러면 이제 이야기가 좀 더 길어진다. 강정인 교수는 <소크라테스,악법도 법인가?>에서 이 좋은 질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들려준다. 중요한 것은 '악법도 법이다'는 식의 극단적 법실증주의는 전체 맥락에 대한 여러 해석 중 한가지의 해석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금과옥조' 라고 믿는 격언은 정언명제가 아니라 소크라테스라는 텍스트의 전체적 맥락에서 논쟁이 분분한 주제라는 것이다.  

모순은 소크라테스의 저서(물론 플라톤이 썻다) <변명>과 <크리톤>에서 도출된다.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소크라테스의 모순에 대해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변명>에서 아테네인들을 꾸짖고,철학 포기 요구를 거부하고, 불복종의 가치를 내뱉던 양반이 <크리톤>에서는 인간적으로 도망 한 번 가주시오..라고 부탁하는 친구 크리톤의 말을 나무라면서 인격화된 '법률'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법이행'의 중요성을 말씀하신다. 이어 꿔온 닭을 갚아주라는 신에 대한 채무이행을 부탁하시고 독배 원샷을 하신다. 뭥미? 뭐 어쩌라는 것이여? 단도직입적으로 묻것소? 법을 따르라는 말이요, 법에 개겨보라는 말이여?   

내가 <변명>과 <크리톤>의 모순을 해결한 방식은-물론 이것도 여러 가능성 있는 해석 중 하나이다- 강정인이 요약한 바에 따르면 절충론 중에서 그린버그와 아렌트의 해석방식이다. 소제목으로 보면 이해가 쉽다. '변명과 크리톤간의 모순을 일응 인정하되' '소크라테스의 자신에 대한 약속을 중심으로 일관되게 해석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즉 소크라테스는 법률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철학의 삶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철학적 삶이 선한 삶이라는 점을 아테네 시민들은 물론이고 자신에게 입증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철학을 위해 죽는 길을 택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두려워했을까? 그의 저서를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는 영혼의 불멸을 믿었고 죽음 이후에 현인들과 저승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만큼 큰 즐거움이 없을거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좀 심심하고 너무 상식적이지 않은가? 

재미있는 해석들이 몇 가지 있는데 물론 그중에는 음모론에 해당하는 것들도 있다.그로토같은 이들의 주장인데, 후학인 플라톤이 아테네인들로 부터 폐기처분되어 버릴 위기에 놓은 소크라테스의 신원을 복원하는 차원에서 <크리톤>의 방향을 잡았다는 것이다.즉 <변명>과의 모순은 그런 집필 의도때문에 발생하는 차원이라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모르겠으나 에피소드정도로 읽히지 않을까 싶다. 콩클턴의 해석은 수용자의 입장에 맞춰 이야기해온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을 토대로 <크리톤>을 '크리톤의 문제' 로 이야기한다. 뭔 말인고 하니. 소크라테스의 습성은 대화수준의 상대에 맞춰 이야기를 끌어간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급의 학자는 아니며 그저 스폰서나 다중지성정도에 해당한다. 콩클턴은 '고차원적 무법'과 '저차원적 무법'을 구분하여 <크리톤>이 '저차원적 무법'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즉 법철학의 근본 이념까지 가지 않고 법의 준수여부문제에 대해 그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콩글턴의 경우 소크라테스의 고차원적 법철학은 <크리톤>이나 <변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정치가>에 소개된다고 말한다.(어찌되었거나 주인공은 모두 소크라테스고 저자는 플라톤이니)  그 외에도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과 '부정의를 행하는 것'을  나누고 '악을 악으로 행하지 말라'는 문구를 통해 해석하는 알렌의 방식, 정의와 법률을 구분하여 불복종의 전거를 구하는 맥러플린, 정치와 철학의 간극문제로 해석하여 이의 해소를 도모하는 유벤의 방식등이 요약설명된다. 

이어 등장하는 존롤즈의 <시민불복종의 정당화>문제는 따로 길게 언급하지 않겠다. 존 롤즈가 시민불복종의 문제를 지극히 자유민주주의의 개념틀 안으로 축소시킨다는 지적은 해야겠다. 또한 시민불복종을 비폭력의 문제로 협애와 시키면서 폭력과 시민불복종이 양립할 수 없다고 본 점도 '폭력/비폭력'문제에 대한 지극히 좁은 스펙트럼임을 지적한다.물론 존 롤즈가 시민불복종의 가치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시민불복종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내실화하는데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또한 시민불복종이 발생하는 귀책 사유는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권위와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에게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2부에 해당하는 '보수와 진보'의 문제는 사실 조금 시의가 지난 논의이긴 하다. 그렇지만 지금도 심심치 않게 '보수와 진보'에 대한 자기정초를 위한 질문이 나오고 있다는 점을 본다면 유효성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본다. 재미있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강정인은 '보수와 진보'의 개념에서 '진보'는 통칭 보수세력이든 진보세력이든 모두 가지고 있는 점이라고 본다. 그래서 그는 '보수'의 대립항으로 통칭되는 '진보'보다 조금 더 넓은 개념의 '혁신'이란 용어를 꺼낸다. 그렇다면 '진보/혁신'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가능하다. 몇 가지 예들이 등장하는데 일단 '혁신'을 '진보'보다 느슨하고 넓은 개념으로 설정한다. 차하순의 말을 재인용하면 이렇다. '진보는 역사의 진전 방향에 대한 일정한 인식은 물론, 역사가 어떠한 방향으로 진전되어야 한다는 가치판단을 전제한다.' 일종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 같다. 아무래도 글이 집필된 시기가 90년대 초반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현재적인 의미의 '진보' 개념은 이보다 좀 더 다층적인게 아닌가 싶다. 강정인은 현상 유지 개념을 통해 '진보/혁신'을 설명한다. 단순히 현상 유지와 현상 타파의 축 위에서 사회,정치적 이념이나 운동을 구분하는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보수 대 혁신'의 구별이 정당하고, 혁신적인 이념이나 운동의 일부만이 진보적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다.'  요즘 말로 하면 '반이명박' 전선의 깃발 아래에 있는 모든 세력이 스스로 진보라고 말하지만 강정인의 표현을 빌자면 '혁신'이라는 것이 오히려 적당할 듯 하다. 강정인은 이런 틀 안에서 '역사 안에서의 구원'을 찾는 대신에 '역사로부터의 구원'을 찾는 진보적 행위 역시 진보로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 말은 개인적으로 지식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포스트 담론에 대해 성찰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버크와 보수주의 정치철학'은 정말 보수주의자들이 읽어보아야할 내용이다. 실제로 버크의 주장을 들어보면 우리나라의 양심적 세력들은 대개가 '보수주의자'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알라딘에 가장 많은 축을 구성하는 역시 진보라고 이름붙이든 혁신이라고 이름붙이던 나는 '양심적 보수세력'이라고 본다. 물론 버크의 주장에서 시대한계적인 요인들은 제외하고 봐야 한다. 귀족제의 옹호같은 것을 가지고 현재적 의미의 '버크 읽기'에서 욕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다. 버크는 계몽주의적 진보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 또한 변화와 개혁에 대해서도 무조건 거부하지도 않았다. 사회가 잘 보존되기 위해서는 변화와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방식에 있어서 버크는 온건한 길,체제 내적인 길을 선호했다. 프랑스 혁명의 혼동상태를 직접 경험한 그로서는 어찌보면 나올수 있을 법한 주장이다. 이런 말을 들어보자. "개혁자는 국가의 결함에 접근함에 있어서 마치 '아버지의 상처를 치료하는 심정"으로 곧 '경건한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마치 사서삼경에 나오는 말 같지 않은가. 문제는 주체의 위치에 있다. 그 지점에서 흔히 말하는 '좌파'와의 차이가 발생한다. 하지만 다분히 식상한 도덕적 담론처럼 보이는 이 말은 실천영역에서 좌파나 우파를 막론하고 모두 고개를 끄덕일만한 대목처럼 보인다. 

요약된 버크의 사상을 읽다보면 결국 한가지 답에 도달한다. "대한민국 정치판에는 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자는 없다." 라는 것 말이다. 결국 우리 사회에 '보수주의자'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은 대개가 '철학 없는 보수세력'일 가능성이 높다.흔히들 이런 사람들은 '수구'라고 말한다. 조금 세련된 옷을 입으면 '뉴라이트'가 된다. 정치학자 김홍명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보수주의는)자생적인 역사를 지닌 하나의 정치적 입장, 세계관이 아니라 주위 환경에 시각을 맞춘 막연한 기질 혹은 심적 태도의 성격으로 나타나고 있다. '철학없는' 이란 말을 길게 설명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양심적 보수세력의 존재가 가끔 '좌빨'이니 '용공'이니라고 비난을 받는다. 이런 구도가 해체되고 '양심적 보수세력'이 자신의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날이 되어야 한국정치의 가능성은 열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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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리즘의 문화정치
스튜어트 홀 지음, 임영호 옮김 / 한나래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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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를 처음 보려고 했을 때 현재적 의미의 작용점은 MB정부였다. 물론 오래전 역사의 이불 속에 들어있는 추억을 다시 꺼내는게 현재 무슨 도움이 될 것이냐는 생각도 있었다. 또한 우리와 다른 정치환경 속에서 발생한 일인데 어떤 적용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처읽기'를 한 것은 30년전 영국에서 발생한 일을 그대로 가져와서 한국이라는 주형에 억지로 맞추기 위함은 아니다. '타산지석'을 '나는 그렇지 않지만 남들은 다른 산의 돌을 그대로 가져다 옮겨놓는다.'라고 이해하는 방식은 자기중심적이고 왜곡된 것이다. 러시아 혁명이든 68혁명이든 아니면 어떤 역사든 우리가 읽고 공부하는 것은 그것으로 아이디어를 얻고 성찰하려는 것이다. 결코 그것의 클론을 이 땅에 이식하려는 행동은 아니다. (일부에서 그런 이식작업으로 밥벌어 먹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스튜어트 홀의 <대처리즘의 문화정치>를 읽다보면 커다란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그것은 대처와 MB를 직접 대입하려는 유혹이다. 기본적으로 MB는 대처가 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대처가 실시한 정책과 철학의 큰 틀은 MB의 그것과 유사하다. 신자유주의, 기업하기 좋은 사회, 민영화, 복지정책의 축소 등등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처읽기'를 하다보면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자꾸 연상되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크게 다른 점이자- 또한 희망은- MB가 대처만큼 '헤게모니적'이지 않다는것. 그만큼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여간 '대처리즘'과  MB노믹스'의 유사한 점을 중심으로 폭로성 리뷰를 쓰고 싶어지기도 한다. 나를 유혹한 방식은 그것이다. 그렇게 하면 아마 알라딘의 추천이 몇 개는 더 늘겠지만 나는 그런 유혹을 물리친다. 이유는 스튜어트 홀이 이 책에서 그람시를 경유하여 그런 기계적 대입을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세와 국면'이란 것이다.  

이 책의 글들은 '철의 여인'이 몰락한 제국을 지배하던 시기에 씌여진 현장성 있는 글들이다. 때문에 후반부에가면 중복되는 느낌을 받을때도 있다. 스튜어트 홀은 먼저 대처리즘의 특성을 분석한다. 이전에 '대처읽기'에서도 몇 번 쓴 내용이어서 자세히 반복하지는 않겠다. 스튜어트 홀은 대처리즘을 두 가지의 모순적 결합체로 이해한다. '퇴행적 근대화'와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다. 앞의 것을 상징하는 구호가 '빅토리아 시대로 돌아가자'였다. 경제 이데올로기로서 신자유주의라는 개방 정책을 택하면서 내부적으로는 과거의 전통적 가치를 수호하는 도덕운동 성격을 갖는다.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은 스튜어트 홀이 풀란차스의(이 책에서는 풀랑자라고 번역한다.낯설다.) '권위주의적 국가주의'라는 개념에서 빌어온 것이다. 풀란차스의 개념은 '민주적 계급 지배의 외형들은 건드리지 않고 유지하면서, 스펙트럼에서 강제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강제/동의의 새로운 조합'(p300) 을 말한다. 스튜어트 홀은 이 개념에 몇 가지 국면적 비판을 가하고 난 이후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authoritarian populism)이란 용어를 만든다. 

스튜어트 홀의 '대처리즘 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대처리즘을 '헤게모니 전략 프로젝트'로 이해한것이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튜어트 홀의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선 이해가 필요하다. 홀은 '이데올로기 간의 인정투쟁과 헤게모니를 얻는 과정'을 (광의의)정치로 본다. 즉 대처는 단지 집권을 하고, 신자유주의를 영국사회에 이식하는 것에만 목적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처와 당시 집권 세력의 꿈은 그것보다 원대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영국의 재구성', '상식의 재구성'이다. '대처리짐의 역사적 프로젝트는 정치지형의 재구성,재정의 하고,정치 세력들 간의 균형을 바꾸어 놓으며,새로운 종류의 대중적 상식을 만들어냄으로써 이를 통해 시장,사적,소유적,경쟁적, '인간/남성'이 미래에 어울리는 유일한 방식들이 되도록 하는 일이다.(p397 )  이를 위해 대처는 아주 긴 시간동안 그리고 집요하게 이 문제를 추진해왔다. 그리고 대처의 집권기동안 영국은 어떤 형태로든 변한다. 이제 그 변화는 좌파든 우파든 현실로 인정하고 갈 수 밖에 없는 토대가 되어 버린다. 대처 후 블레어의 동당은 상당부분 대처리즘 하의 노동당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된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스튜어트 홀의 기본적인 목적은 '좌파의 갱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홀의 작업은 대처가 숙성할 수 있었던 영국 사회의 토양과 노동당 내부와 좌파의 경직성에 대해 돋보기를 들이덴다.  

영국은 전후 '조합주의'가 하나의 사회적 상식으로 자리잡았다. 보수당이든 노동당이든 기본적으로 정도는 나르지만 케인스주의라는 휘장아래 손을 잡았다. 문제는 노동자를 대표한다는 노동당의 이념이 '대중'으로 부터 멀어진 '의회주의'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사회민주주의에는 파비안주의의 흐름이 강했다. 파비안주의는 그람시가 말한 위로부터의 혁명 즉 '수동혁명'의 변형판이다. 결국 노동당은 정도는 다르지만 현실 사회주의가 빠졌던 가장 큰 함정인 '국가주의'에 함몰되고 만다. 변화하는 사회구성체의 성격을 외면한 노동당의 국가주의는 '관료제'성격을 띠게 된다. 여기에는 당연히 비효율의 문제와 정책집행기관과 대중 사이의 괴리가 발생한다. 대처는 이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집단주의'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개인의 힘'을 강조하는 '자유'의 가치를 가지고 대중들의 상식을 장악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대처는 노동당 보다 오히려 더 그람시의 '블록' 개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노동당이 경제주의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했다고 홀은 지적한다. 즉 '노동계급=노동당' 이런식으로 생각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정책의 집행방식 역시 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홀은 -계급을 부정하진 않지만-그람시를 인용하여 여러가지 욕망과 이해의 상관관계가 불균형하게 규합되는 '역사적 블럭'을 대입한다. (가끔 분기탱천한 이런 류의 글을 본다.  왜 '계급투표'를 하지 않지? 답답하네...라는 식의 댓글들 말이다. 대개 전통좌파의 설명방식은(또는 계급 개념에 별 생각 없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들 조차) '대중들이 스스로 계급의식이 부족해서.또는 지배집단이 헤게모니작업을 통해 그들이 올바른 생각을 갖는데 방해를 하고 있기때문에..라는 식이다. 그러니까 '거품'을 물수 밖에 없다. 물론 그 지적이 전혀 거짓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계급'문제를 절대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왜 다른 계급에 투표하는지도 이해하기 힘들다. 사실 좌파들이 그람시의 블럭개념을 모를이 없다. 그런데 그런 대답을 하는 것은 지키고 싶은 다른 무언가에 대한 욕망때문이다.물론 이는 내가 가진 '비본질주의적'입장에서 하는 말일 뿐이다.) 노동당이 전통적 좌파의 중심인 남성중심의 노동자 지지층에 기댄 반면 대처는 이미지 표상의 선두에 '소규모 자영업자들'을 내세운다. 대처 스스로 그런 집안 출신이었기때문에 누구보다 강한 흡입력이 있다. 그리고 대처는-가장 능했던 방식인데-맥락의 단순화와 부정적 극단화를 통한 개념의 재배치구도로 만들어낸다. 즉 나른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며 국가의 틀에서 안주하고 파업이나 하려는 노동자들과 맘모스처럼 거대해진 국가적 기업들 속에서 자기의 가정과 성공,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소규모 자영업자들. 이런 식의 대결구도 말이다.  말이 안되는 이데올로기적 장난질이다. 그런데 이 안에는 일단의 진실이 있고 물질화하기 쉬운 대중 이미지를 만든다. 결국 이런 구도가 만들어지는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어..어..하다' 가 끌려가는 것이다.대중들과 좌파들은 이런 대처의 작업에 속수무책이었다.  

물론 스튜어트 홀의 이론들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이 책에서는 그런 비판에 대한 스튜어트 홀의 반비판도 만날 수 있다. 홀에 대한 비판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은 그가 '이데올로기 문제'를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것, 계급 문제에 대해 흐리멍텅한 태도를 취했다는 것, 대처에게 있지도 않은 어떤 일관성을 부여했다는 것 등등이다. 엘린 메이신즈 우드의 <계급으로부터의 후퇴>에서는 NTS, 즉 '뉴 트루 소셜리즘'이라고 해서 '신사회운동가'로서 스튜어트 홀을 직접 언급하며 '전통적 좌파'시각에서 비판하기도 한다. 물론 이 비판은 스튜어트 홀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문화연구를 비롯해서 68년 이후 유럽 좌파내에서 힘을 받은 '신좌파'들에 대한 성찰적 비판이다. 

<대처리즘의 문화정치>는 2,30여년전에 씌여진 글이다. 앞서 말했듯이 상이한 정치적 토대와 불균등한 자본주의 발전 국면에서 그의 논의를 그대로 이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에는 그런 국면적인 문제를 제외하고도 꽤나 설득력있는 아이디어들을 만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자유/평등이냐 묻는 질문등에 대해서와 같은...뒤에 설명하자.) 스튜어트 홀이 좌파의 재구성,진보의 재구성을 위해 제안하는 말은 현재의 우리가 보기엔 어느 정도 통속적인 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의미한 것은 이것이 제대로 실천해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선 그는 일단의 세계사적 변화의 길들을 정확히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대처리즘에게도 그가 일단의 진실이 있다고 말했다면 대처는 그 길목의 어떤 지점들에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는 좌파가 '보증받은 사회주의'를 버릴 것을 요구한다. 이어서 '급진적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하라고 주문한다. 마르크스의 '사회혁명'으로서의 사회주의를 환기시켜야 한다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좌파의 '국가주의'에 맞서서 오히려 '국가'에서 사회로의 이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노동자 계급 중심성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소수계층을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등이다. 결국 좌파의 성공을 위해서는 '새로운 종류의 역사적 블럭'들을 만드는 일이 우선이고 그것은 다양한 욕망의 결을 따라 이를 통합해낼 수 있는 정치의 역능을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좌파는 스스로의 '용어'를 가져야 한다. 이 용어들은 대중들의 상식에 바탕을 두고,또 새로운 상식을 만들어 나갈 비전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 좌파에게 부족한 것은 결국 '능동성' 이다. 반대는 반대로서 훌륭한 가치이지만 생산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 대중은 생산의 정치를 원한다.  

P.S) 가끔 '자유/평등' 중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이 질문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도덕 교과서 '더 생각해볼 문제'에도 나오는 중요한 문제이다. 이런 질문은 연원도 깊고 논의도 심도 있다. 자유민주주의 정치철학에서 '자유주의/공동체주의'도 따지고 보면 이런 근간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사회주의도 그런 문제에 대답하는 한가지 형식이다. 그런데 이런 본질적인 질문을 받으면 좀 난감하다. 왜냐하면 질문이 어떤 '선택'을 요구하고 있기때문이다. 대처가 가장 즐겨쓰는 방식이 일면의 진실을 극단화하여 배열하는 '선택요구'이다. 나는 예전에 이런 문제들에 대한 돌파구로서 지젝이 '반유태주의'에 대해 말한 '질문의 거부'하는 방식이 유효하다고 말했다. 이런 질문 자체는 질문으로서 의미가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이데올로기적 배열에 의해 구획시켜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즉 '자유'를 선택하면 '자유주의자=민주주의자' '평등'을 선택하면 '공동체주의=(확장하면)사회주의' 라는 식이다.  스튜어트 홀은 대처가 '자유'의 이념을 어떻게 도용하는지 보여준다. 

 '자유 이념의 특정한 버전(신자유주의에 해당)을 전유하고 다른 반동적인 이념들과 연결시킴으로써 하나의 전체적인 철학을 만들어 우파의 강령과 세력들 속에 연계지었다. 이들은 소극적 자유라는 이념을 '시장의 자유'와 같은 것이고 거기에 의존하는 것이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평등 이념과 대립되는 것처럼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사회적 해방이라는 더 폭넓은 의미에서 소극적 자유나 적극적 자유는 좌파의 철학에서 항상 핵심적인 요소였다. .... 시급한 것은 소극적 자유개념을 다시 탈환한 후 민주적 삶 전체의 심화라는 맥락 안에서 거시에 대안적인 접합을 부여하는 일이다.(p435) 

누군가 '자유/평등이냐? '묻는다면 장난스럽게 응하지 마라. 그리고 잠시 숙고후 질문지를 수정하라. 1)소극적 자유 2)적극적 자유 3) 사회적 자유 4) 기회의 평등 5) 분배의 평등 6).... 7)....  이렇게 하고 여러 개에 동그라미를 친다면 좀 답하기가 쉬워진다. 질문을 거부하면서 다시 주체적인 질문을 만듦으로서 이분법을 통한 '선택'의 이데올로기로부터 피하는 거다. 그리고 동그라미 친 가치들에 대해 꾸준히 실천해 나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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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하게 보기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소연 외 옮김 / 시각과언어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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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또는 라캉-을 만날 때 드는 느낌은 대학 초년생때 마르크스를 만날 때 드는 느낌과 유사하다. 지젝이 언급했듯이 라캉의 '징후'라는 개념을 선취한 것이 마르크스였기 때문만은 아니다.이 경험은 아주 감각적인 것이다. 뇌파에 어떤 전기적 자극을 주는 느낌....'타닥..타닥'. 이런 자극은 세계를 다른식으로 분할해서 볼 수 있는 문을 열어 준다. 사실 '의심의 삼인방' 이라는 니체-마르크스-프로이트가 인류의 지적 세계에 해 준 일은 그런 거대한 전기 신호가 아니었을까?  

 책 제목이 <삐딱하게 보기>이다. 미학 공부를 하다보면 자주 인용되는 그림 몇 개를 만난다.한스 홀바인의 <대사들>도 그 중 하나이다. 두 명의 인물 사이에 무언가 얼굴이 있다. 이것은 사실 이 그림 전체를 지배하는 기표이다. 그런데 제대로 보면 보이지가 않는다. 살짝 비틀어 보면 그곳에는 '해골'이 있다. 미술사에서 해골이나 죽은 동물의 모습같은 것들은 도상학적으로 '죽음'과 '삶의 유한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공식화된 듯 하다. 홀바인의 그림에서는 '해골'은 왜상의 지점으로 읽힌다. 지젝은- 라캉은-이 지점을 의미 추구의 심연을 드러내는 '무의미한 얼룩' 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속류 사회학적 시각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통속적 용어로 '삐딱하게 보기'는 '비판적으로 보기' 라는 뜻이다. 그래서 비판적 지식인이기를 원하는 진보가 좋아하는 독해방식이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위치를 기억하라. 그것은 최소한 손에 만져지는 영역이 아니다. <삐딱하게보기>에는 물론 정치사회학적인 대상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민주주의'같은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관념에는 구체적인 인간적 내용의 충만함이나 공동체적 결연의 순수성을 위한 공간이 전혀 없다. 민주주의는 추상적인 개인들의 형식적 연결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채워나가려는 모든 노력은 그 동기가 아무리 참되더라도 이내 전체주의의 유혹에 넘어가 버린다." 

 현재의 한국같은 상황에서 이 말은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도 있을 것이다. "아니, 공동체의 선을 위해 내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MB악법을 막기 위해 내가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는데 그래서 빼앗긴 민주주의를 구현하려고 하는데.... 민주주의는 그냥 추상적 개인의 연결이고 전체주의 유혹으로 넘어가는 무엇이라니? " 

하지만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그 곳이 아니다. 우리는 '정신분석학'의 영역 위에 서 있다. 결국 '삐딱하게 보기'의 사회적 진보의 열정으로 <삐딱하게 보기>를 만나려면 백전백패한다. 대신 <삐딱하게보기>는 우리에게 '주체'와 '세계' 사이의 관계를 그 틈새를 통해 읽게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여기가 로도스다.뛰어보아라'  물론 그곳은 로도스는 아니다. 지젝식으로 말하자면-만약 그곳이 '로도스'라면 그곳은 '무'이다. 뭔가 복잡해지려고 하는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지젝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 세계를 독해하는 또다른 방식 하나를 이해하려는 것이고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오딧세우스와 친구들이 항해하는 바다는 많은 비밀들을 숨기고 있다. 수많은 이야기들...마치 우리의 의식/무의식이 그런 것 처럼말이다. (사실 이 정도에서 리뷰를 그쳐도 될 것 같다.^^) 

<삐딱하게 보기>를 전부 정리하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다. 그건 지젝의 모든 책을 한 권으로 정리하려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지젝의 책들은 동어반복되는 것들이 많다. 이 책에서 만난 것들 역시 그런 반복의 선상에 놓여 있다. 그런 반복에 익숙해져서 인지 아니면 <삐딱하게보기>가 비교적 좀 쉬운편에 속한다는 평가때문인지 이 책을 보면서 예전에 비해 호흡을 세어가면서 뛸 수 있게 되었다.(이 말은 예전에 쓴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리뷰의 마라톤에 빗대어 말한 것이다.) 나는 분명히 아마추어로서 지젝을 읽고 있고 앞으로도 아마추어로서 이 마라톤을 즐길것이다. 그때도 말했지만 '모든 마라토너가 이봉주나 황영조가 될 필요는 없다.' 나는 내 페이스대로 이제 마라톤을 즐길수 있는 단계로 가고 있는 것고 그 점이 즐겁다. 점차 다리 근력이 생기면 유사 종목에서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나의 삼촌은 동호회 마라톤을 하시다가 이제 자전거로 종목을 바꾸어서 전국일주를 거뜬히 해내신다.)  

이번에 읽은<삐딱하게 보기>에는 대중문화의 예가 가득하다. 아무래도 그 덕에 조금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대중문화의 예가 많다고 이 책부터 지젝을 읽겠다고 한다면 별로 추천하고 싶진 않다. 대중문화의 예들은 라캉의 개념틀을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위한 지젝의 방법론일 뿐이다. 특히 2장에서 히치콕의 영화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렇지만 히치콕 영화를 요약한 내용이나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보고 싶다는 이유때문에 이 책을 읽는 것은 무의미하다. 라캉의 개념들에 대해 어느정도 이해-도대체 어느 정도의 이해란 어느정도일까?- 를 하고 접근하면 좀 낫지 않을까 싶다.  영화학에서 히치콕의 중요한 쇼트개념인 '시점 샷'이라는 것이 있는데,지젝은 그런 쇼트의 몽타주를 '대상의 응시'라는 개념을 통해서 불안을 고도화 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뭔가 그럴싸 해보이지만 영화학에서 이거 아주 쉬운 개념이다. 이제는 거의 모든 스릴러물에서 사용한다.) 그 외에도 히치콕 영화의 '성관계없음' (이것도 무슨 섹스를 한다,못한다 그런 개념이 아니다.)을 그의 몇 편의 영화들의 연속성을 통해 드러낸다. 유명한 '새' 같은 영화는 '모성적 초자아'의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영화'새'는 재난영화로 많이 읽힌다. 그것은 히치콕이 역설적이게도 '새'라는 '재난'을 통해 영화 초반에 도출된 정신분석학적 테제들을 은폐하고 있기때문이다.뭔말이고 하니....지젝의 말은 원래 영화'새'는 정신분석학적 텍스트라는 거다. 히치콕 영화의 연속성에서 그건 입증된다. '새'에서 주인공은 아버지가 없다. 그리고 엄마는 아들 연인의 성관계를 막으려는 존재이다. 정신분석학의 기본텍스트들이다. 그런데 '새'가 침입하면서 이런 관계들은 잊혀진다.아니 잊혀지게끔 받아들여진다. 그려면서 영화는 '영화적 진실'로 따라간다.(지젝의 <기묘한영화강의>를 보면 결정적인 순간에 새가 침입하는 장면을 예로 들고 있다. 그러니까 정신분석학은 그걸 이렇게 묻는거다. '그 새가 진짜 새야?' "왜 하필 그 때 새가 쳐들어오지?" "그 새는 결국 어떤 실재의 조각인가?') 히치콕의 영화를 펼쳤다 접었다 하면서 지젝은 라캉의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문장과 개념들을 설명한다. '성관계는 없다.' '담지자 없는 음성'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가 전부 알아서는 안된다' '네 자신처럼 네 증환을 사랑하라' 등등   

1장에서 중요한 예는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검은집>과 로버트 하인라인의 <조나단 호그의 불쾌한 직업>이다. 현실을 구성하는 대상 a 와 실재의 침입에 관련된 이야기다. 대상a를 바라보는 방식은 홀바인의 그림처럼 왜곡된 방식으로 밖에 존재할 수 없다. 지젝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작 실재의 '블랙홀'을 메우는 환상공간이라는 잉여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하인라인의 소설은 그 '실재'를 '무'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실재'를 상징화 해내지 못할 때 우리는 '광인'이 되는 것이다. 최근 영화에서 많이 나오는 주제가 바로 이런 '실재'의 침입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가족이데올로기' 즉 '중산층'이라는 환영을 깨는 방식으로 '실재'를 침입시킨다. 영화감독들이 그런 답답함에 어떤 분열을 불러일으키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일게다. 나같은 평범한 사람마저 그런 '뒤틀림'을 느끼는데 말이다. 실재의 침입 앞에 그 환영은 아주 쉽사리 산산조각난다. 즉 유지되어야만 하는 상징계의 그물망은 사실 열나 취약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손상을 남긴다. 그러니까 실재란 당신과 세계가 아주 비루하고 조악하며 비도덕적이고 모순적이며 비합리적인 사건들의 연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이건 자기겸손에서 우러나는 그런 것과 완전히 다른 엄청나게 다른 무엇이다.) 그것은 '무'에 가깝다. 나는 개인적으로 인터넷 공간의 개인이 그런 '상징화의 의미작용'에 가장 선진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육체화가 거세된 공간이라는 외상적인 조건이 가장 큰 역할을 할 것 같다.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모두 '징후'만 가지고 자기를 구성하고 있다. 결국 이를 통해서 '주체화'를 이루어낸다. 일종의 '내가 있던 그곳에 나를 있게 하라'의 인터넷판 변형이다. 그렇다보니 인터넷 공간에는 육체없는 도덕군자들이 양산된다. 내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육체없는' 과 '도덕' 그 양자 모두이다. 사실 그 '도덕' 이라는 것은 '비루함'을 세련되게 은폐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않는다.(푸하...욕태바가지로 먹겠군.나를 욕하지 말고 니체를 욕해라.)  

모든 강박관념들 중 가장 음란한 것으로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의무다. 이는 우리가 라캉의 논제를 이해해야하는 방식인데 그의 논제에 따르면 선은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악의 가면일 뿐이다....선의 배후에는 근본적인 악이 존재한다. 선은 특수하고 병적인 위상을 갖고 있지 않은 악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금세기 키치문학과 달리 칸트가 알지 못하는 것으로서 의무 자체의 또 다른 외설적인 측면이다. 

지젝은 논리적 대립과 현실적 대립이라는 말로 오해를 사전에 방지한다. (그러니까...MB가 선이란 말인가? 라고 묻지말란 말이다.) 지난해 영화 <다크나이트>를 보면서 왜 그렇게 배트맨의 뒤통수를 패대기 치고 싶었는지와 같은 맥락이다. 물론 우리가 '순수 악'에 대해 갈증을 느끼는 것은 단순히 '힘'에 대한 갈증이나 '일관성'에 대한 갈증만은 아니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저 문장을 'MB는 악이 아니야?"라고 이해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결국 문제를 -학자들의 만병통치 탈출구라는 -컨텍스트 차원과 대상-사물의 응시차원까지 확장해야 이해가 될 문제다. 더는 모른다. 생각만 약간 닿을 뿐.... 

 며칠전 서울에 가 있었다. 예전에 자주 걷던 길을 되짚어 걸었다. 겨울이지만 눈이 와서 덜 볼썽 사나왔다. 예전에 걷던 길을 다시 걷는 것은 '치유'를 위한 나만의 방식이다. 한 때 도움을 받았다고 다음에도 도움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는 그다지 '치유' 효과가 크지 못했다. 멋지게 길을 걷고 종로에서 책 몇 권 사고, 밤 9시에 종로에서 여관 찾아 헤맸다. 흘러넘치는 욕망의 거리에서 밤 9시에 여관잡기란 하늘의 별따기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실재'다. ^^ 결국 왔던 길을 거꾸로 돌아가서 중심가에 벗어난 모텔을 겨우 찾았다. 혼자 여관방에 누워서- 이것도 내겐 익숙한 풍경이다- 성인채널과 공중파를 잽핑하면서 봤다. 그냥 잤겠냐?  (대상 a를 만들어주마...이 리뷰를 봐도 그렇고, 자기진단을 해봐도 그렇고 아무래도 분열증이 시작된 것 것 같다.)   

내려오는 길에 기차에서 지젝-라캉의 연습용 책으로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를 읽었다. 정신분석학 텍스트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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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사유의 기원
장 피에르 베르낭 지음, 김재홍 옮김 / 길(도서출판)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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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시대가 이 세대를 어지럽힐 때도 /그대는 우리와는 다른 고민 속에 /인류에 친구로서 남아 있으리 /그리고 인간에게 그대는 말하리라
“아름다움은 참다움이요 참다움은 아름다움”이라고 - 그것이 그대가 지상에서 알 전부요 그대가 알 필요가 있는 전부다 .                  .... 키이츠 <그리스 옛 단지의 노래>
   

먼 여행을 떠날 때는 언제나 신발 끝을 단단히 묶어 두어야 한다. 첫 발은 무겁지만 이내 눈 앞에 펼쳐질 풍광을 기대한다면 심란함은 찰나의 일이다. 이제 우리는 장 피에르 베르낭의 <그리스 사유의 기원>이라는 책에 기대어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간 여행을 하는 우리의 눈 아래로는 아카데미아에서 토론하는 플라톤이 보이고 거리를 배회하는 소크라테스가 들어온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 시장 한 구석에서 시를 낭송하는 호메로스도 지나가고 전차를 몰고 달려가는 아킬레우스의 번뜩이는 갑옷도 보인다. 트로이 성이 무너진다. 조금 더 더 과거로 들어간다. 이제 우리는 BC 2000년 크레타의 미노스 궁전 앞에 와 있다. 왜 이 곳까지 온 것일까?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라는 말은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그 중 대표적인 중 하나는  '이성' 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 시대 이래 인류는 '이성' 의 진보에 바탕을 둔 역사의 패러다임 안에서 살아 왔다. 최초로 '이성'이란 개념을 알아내고 이를 통해 인류 역사에 기여한 것이 바로 그리스이다. 인류의 역사는 결국 '이성'의 역사가 아니던가? 서구인에게 그리스는 동양의 요순시대처럼 일종의 원형 지혜의 보고로 기억된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전체 문명은 그런 연장선상에 있다. 우리가 아무리 동양적인 것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더라도 인류의 역사가 서양이 주도한 보편적 이성의 역사 위에 정태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또한 동양의 가치와 역사를 지지하는 것이 이런 보편적 이성 개념의 폐기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장 피에르 베르낭은 인류가 아니 조금 더 좁혀서 이야기하자면, 그리스가 어떻게 '철학'이니 '이성'이니 하는 인류의 선물과도 같은 개념들 만들어 내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하여 폴리스를 만들고 그 공간 안에서 이를 어떻게 구체화시켰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 민주정의 완성기라는 페리클레스의 시기, 서구 철학의 첫번째 중흥기라 할 만한 플라톤의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장 피에르 베르낭이 그 기원을 이해하기 위해 첫번째 관문으로 내려놓은 곳이 BC 2000년 대이다. 너무 먼 시기라 가물가물한 지점이다. 우리나라 역사로 보자면 단군 왕검이 고전선을 세운 시기가 바로 그에 상응한다. BC2333년이다. 저자는 그렇게 먼 시기부터 시작해서 그리스 황금기 바로 직전에서 여정을 마감한다. 폴리스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계의 등장이 바로 이 짧은 책의 마지막 장에 해당된다. 

장 피에르 베르낭은 그리스 세계의 '단절'의 문제를 몇 가지 거론한다. BC 12세기의 도리아인의 침공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는 과거 그리스의 오리엔트와의 교류를 단절시켰으며, 단출하며 여백을 존중하는 기하학적 세계관을 반영케 했다. 이어지는 시기를 헬레스의 암흑기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시기가 끝나며 호메로스의 시대가 온다. 베르낭은 이런 고립과 재구축의 긴 시간들이 폴리스와 합리적 사고라는 새로운 고안물이 등장하는 서막이 된다고 말한다. 결국 그리스는 긴 단절 끝에 다시 재개된 오리엔트와의 교섭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독창성과 우월감을 만들어 내는 사유형식을 고민한다. 그리고 이 시기를 통해 정치적 사고와 철학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스 사유의 기원> 1장은 크레타의 미노스 문명이 갖는 궁전 중심의 문화에 대해 논한다. 이 궁전 문명은 이후 몇 번의 붕괴를 통해서도 사라지지 않고 미케네 문명과 멸망한 크레타를 계승한 아카이아인들에게 까지 계승된다.  2장에서는 뮈케네 사회의 군사조직중심적,궁전 중심적인 미케네 문명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리엔트적인 속성(히타이트)을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과거 크레타와 달리 군사적 역할이 강화된 모델이었다. 전사 계급의 특화같은 요소들도 돋보인다. 베르낭은 뮈케네 왕권의 몇 몇 가지 특성을 두고 '관료체제적이며 봉건적' 이라는 분석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견해를 보인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여전히 궁전 중심의, 왕 중심의 체제였다. 뮈케네의 사회상에서 중요한 것은 토지의 분할이다. 토지를 이중형태로 구분하고 있다. 하나는 세속토지이고 또다른 하나는 촌락공동체의 토지이다. 앞의 것은 왕과 전사들의 소유이고 뒤의 것은 공동체 땅이다. 이런 토지의 이원화된 구획과 권력의 이원화된 구조는 뒤에 다른 종류의 변화를 예상케 한다. 

3장에서는 도리아인의 침입으로 발생한 헬라스의 변화에 대해 주로 언급한다. 이 시기 이후를 흔히 헬라스의 암흑기,또는 단절기라고 한다. 오리엔트와의 교류도 단절되고 사회의 주조를 이루는 가치도 달라진다. 이렇게 달라지는 단층은 오히려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조건이 된다. 호메로스의 시가들은 이런 단층이 만들어낸 '성과 속'의 분리와 세속화를 지향한 예가 된다. 또한 궁전 중심 체계가 붕괴하면서 촌락공동체와 전사 귀족(가문) 사이의 균형은 공백상태로 남게 되고 이는 새로운 격변을 초래하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새로운 혼란이고 그에 대한 반작용은 이를 해소하기 위한 '소피아'(지혜)의 출현으로 나타난다. 뒤에 출현하는 초기 자연철학자의 퓌시스 (자연)개념에도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그리스인들에게  퓌시스는 처음부터 '인간의 세계','인간의 관계'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따지고 보면 폴리스니 이소이아(평등),디케(정의),프로네시스(반성)이나 하는 그리스 철학의 모든 개념들은 이런 '인간'의 문제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베르낭은 이런 군주권의 붕괴가 아르케(지배,권력)의 분배형태로 나타난 것이 특징이라고 말한다. 그는 오리엔트인 스키타이의 전설과 아테네의 전설을 통해 그리스가 독특하게 권력의 분배와 상호 역할 분담, 견제 형태로 발전한 특징을 짚어낸다. 그리고 비로소 정치를 위한 '아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준비가 된것이다. 아곤을 하는 곳이 바로 지난해 시대를 거슬러 가장 뜨거웠던 '아고라'이다. 아고라가 가진 의미는 그 공간적 중심성은 물론이고 평등주의 정신,세속화 정신, 인민주의의 정신을 반영하는 상징이된다. 신의 위한 아크로폴리스와 세속을 위한 아고라가 아테네의 가장 중심적인 곳에 위치했다는 것은 도시의 골격이 어떤 정신성을 반영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4장 '폴리스의 영적 우주', 우리는 이제 BC 8-7세기 까지 왔다. 베르낭은 폴리스의 특징에 대해 몇 가지로 요약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폴리스는 무엇보다 다른 모든 권력 도구를 넘는 연설에 대한 탁월성을 함축하고 있다. 이는 정치와 로고스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수사학,궤변술,논리학의 발전을 점칠 수 있게 한다. 두번째 폴리스의 특징은 완벽한 공개성이다. 공통의 관심과 공통의 절차에 대한 강조이다. 왕이나 일부 가문이 보유했던 배타적 특권은 민주화와 드러냄이라는 이중적 이행과정 속에 놓여있게 된 것이다. 베르낭은 이를 '설명의 청구'라는 말로 표현했다. 세번째 특징은 이런 과정들을 '법의 기록'에 대한 강조이다. 정치학에서 '입법의 기능'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강력해진 것이다. 네번째로 중요한 것은 '호모이오이' 즉 국가 안에 모든 사람이 정치적으로 평등하다는 강력한 평등주의적 입장이다. 이것은 현대적 계급의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솔론의 개혁같은 것에서도, 플라톤의 정치철학 같은 곳에서도 볼 수 있는 '평등'은 각기 다른 계층의 역할에 대한 균형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베르낭은 이를 '기하학적 평등'즉 '비율'이라고 말한다. 어쨋거나 근대적 계급관념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이다. 그는 폴리스 중에서 베르낭은 스파르트를 가장 강력한 평등주의의 실천이 이루어진 곳으로 보여준다. 공동체중심주의는 어떤 형태로든 개인에게 동일한 요소들을 강제한다. 절제,금욕같은 것들이 스파르타는 물론이고 모든 폴리스에서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는 것은 더 논할 바가 없다.

5,6장에서는 폴리스의 중요한 구성원리들이 틀을 잡아 가는 과정을 설명한다. 우리는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디케의 개념,이소이아의 실천방안,소프로쉬네(절제)에 대한 관념들을 하나씩 읽어 나갈 수 있다. 정의,평등,절제 같은 것들은 여전히 현재에도 울림을 갖는다. 이런 개념들의 대상자이자 주체는 결국 중산계급자들이었다. 적절함과 중용은 계급적으로도 그들의 몫이었고 또한 사회 전체의 가치로도 가장 중심적인 곳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즉 시민계급은 귀족의 오만한과도 일반 대중의 안일함과도 거리를 둔 중요적인 위치에 있었고 이들이 '소프로쉬네'를 실천함으로서 도시 전체의 모델과도 일치하게 된다. 베르낭은 '소프로쉬네는 한 개인인 그 자신의 욕망과 쾌락을 이겨냈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도시를 코스모스로 만들고 또 도시를 극기하도록 만든다'라고 한 문장으로 말한다. 

7.9장은 초기 자연철학자-특히 아낙시만드로서-의 이야기를 꺼내는 듯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연철학의 모델이 어디를 가르키고 있었는 가를 말한다. 베르낭은 초기 자연철학자들의 우주관이 사실은 신적 우주관의 세속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신 신학이 궁극적으로 제우스를 필두로 한 군주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듯이 자연철학적 우주관은 '도시 체계 내에서 인간 세계를 코스모스로 만드는데 성공을 거둔 법과 질서의 개념을 자연 세계에 투사함으로써 도덕적 정치적 사고를 정교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아낙시만드로스의 '구형 우주론'과 단일원소 불가론은 다른 말로 하면 어떠한 것도 다른 어떤 것을 일방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폴리스의 균형과 대칭의 질서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베르낭은 <그리스 사유의 기원>의 결말에서 '이성'이 최초로 헬라스에 표현되고 확립된 것은 정치적 차원에서 였다고 말한다. 헬라스에서 개인은 시민과 분리될 수 없었고 시민들은 스스로 전체 구조를 형성하고 상호관계를 조정해 내었다. 즉 정치적 사유가 다른 사유들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철학이 이성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으로 '존재'와 '인식'의 문제를 파고 들었다고 본다.  

우리가 그리스를 읽는 것은 결국 그리스인들이 인간 사고의 역사에 새로운 차원을 부과했기때문이다. 시대가 다르고 상황이 다르지만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어떤 질문들과 그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는 너무 오래 전의 기억이어서 이제는 낯선 것이 된 것을 새롭게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므네모시네의 영역은 우리에게 무한한 상상력의 보고가 된다. 그리스는 여전히 우리에게 너무 많이 알려진 듯 잊혀진 영역이며 또한 부서진 잔해로만 그 속살을 잠깐씩 보여주는 아름다운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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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보리행론 역주
샨띠데바 지음, 최로덴 옮김 / 하얀연꽃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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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고요하지 못하다. 덩달아 마음도 평화롭지 않다. 바람 앞에 촛불이 팔랑 거리듯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 씩 마음이 거칠 거칠 해진다. 벌겋게 달아오른다. 벽돌을 비벼댄 사포처럼 너덜거린다. 커다란 바위돌을 발목에 묶고 물 밑으로 던져진 듯 계속 내려만 간다. 이제는 한숨 마저도 얼어 버릴 깊이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어떤 선배는 최근에 가끔 악몽을 꾼다고 피식 웃으며 말한다. 나는 어젯 밤 악몽은 아니었지만 꿈 속에서도 평화롭지 못했다. 

올해의 마지막 책으로 티벳 대승불교경전인 <입보리행론>을 읽었다. 나는 불교도는 아니다. 그러나 가끔 마음이 심란할 때는 불경을 몇 구절을 읽으며 도움을 받기는 한다. 가끔 순간적인 치유의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일종의 진통제처럼.  

마음은 메아리보다 빨리 울려 퍼지니/지키기 어렵고 다스리기 어렵다/지혜로운 사람은 그 근본을 바르게 하니/ 그의 현명함이 더욱 깊어진다. -<법구경> 심의품-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일은 몸에 근심을 불러일으키니/거리낌없는 마음으로 악행을 저질러 스스로 무거운 재앙을 부른다 -<법구경> 우암품-  

고통을 벗어나려는 마음은 있지만/고통의 수렁 속으로 똑바로 질주하고/행복을 바라지만 너무나 어리석어/ 자신의 행복을 적인양 부숴버린다 -<입보리행론> 공덕품 

사실 이런 경전의 글들은 문자적 이해를 넘어선다. 부처께서도 중생의 구제를 위해 문자를 이용하셨을 뿐 열반의 도가 문자로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셨다. 가끔 가다 한번 걸음을 멈춰 읽는 이런 책들에서 그 중심된 생각을 내가 함부로 말해서는 안될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이 책이 주의하는 끊임없는 분별심이 발동했다는 점을 말해야겠다.  불교의 경전 속에 나타나는 극단적인 세속 부정에 불편한 마음도 생겼고, 유물론적인 입장에서 철학적 인식론에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부수적인 일이었다. 

수천 겁을 쌓아 온 보시와/ 선서께 올린 공양들 모두/ 선행이라 할 만한 것은 모두/ 단 한 번의 분로로 무너진다. - <입보리행론> 인욕품 

무언가 원인없이는 생겨나지 않으며/무언가 있어야 생겨난다/적들이 바로 인용긔 원인이라면/어떻게 이 적들을 장애라고 하리오 -<입보리행론> 인욕품 

어떤 중생도 아만으로 무너지나니/번뇌에 대한 자신감이 없기때문이다/ 자신감 있는 이는 적의 힘에 굴복하지 않고/ 그들은 오히려 아만의 적을 다스린다 -<입보리행론> 정진품  

노련한 전사인 적과 함께/ 전장에서 칼끝을 마주친 것처럼 번뇌의 무기를 조심해서 피하며 번뇌의 적들을 붙잡아 매야 한다. - <입보리행론> 정진품  

불교는 기본적으로 현실계를 부정하는 인식론을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하면 이 세계는 윤회의 법에 의해 고통받는 곳이고 올바른 인식견해와 수행을 통해 떠나야할 그런 곳일뿐이다. 우리의 육체 역시 근원적으로 구더기의 먹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대승의 진리는 인식론적 초월에만 있지 않다. 설령 그 곳이 허상의 땅이고 우리의 몸이 그저 가피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원리의 측면에서 본 것일 뿐이다. 모든 공양과 계송에서도 '회향'이 빠지지 않는 이유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입보리행론>에서도 '회향'을 마지막장에 배치한다. '중생의 구제' 라는 것은 대승의 중요한 원칙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위해 '나와 남을 바꾸어 보는 수행'이라고 말한다. 공자는 '인'을 이야기하면서 '역지사지'를 이야기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이와 함께 중생을 어머니로 생각하여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하는 평등심을 통해 모든 이의 이익을 위해 깨닫고 펼쳐나가라고 말한다.    

세상의 행복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모든 것은 남의 행복을 빌어서 생기며/세상의 고통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모든 것은 나만의 행복을 원해서 생긴다/ 

많은 말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어리석은 이는 자신을 위해서 일하고/ 부처는 남을 위해 일한다./이 두 가지의 차이를 잘 보라. -<입보리행론> 선정품 

미혹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의 이익을 위하여/ 집착과 두려움의 극단에서 벗어나게 하고/ 윤회에 머무는 자를 성취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공성의 열매이다. -<입보리행론> 지혜품

<입보리행론>은 문자 그대로 '부처의 도를 깨닫고 행하기 위한 입문서'이다. 티벳 대승 불교에서 기본 경전으로 읽히는 책이라고 한다. 달라이 라마 역시 자주 <입보리행론>을 가지고 설법을 하시기도 한다고 들었다. 책은 경전들이 그렇듯이 형식을 갖추어 구성되어 있다. 순서가 아주 논리정연해서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1장에서 보리심의 공덕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2장 <죄업 참회품>에서는 보리심 수행을 위해 장애가 되는것을 제거하는 방법이 나온다. 이어서 <불방일품>,<억념자각품>등이 있다. 여기까지가 일종의 예비수행단계라고 보면 된다.  이런 과정이 끝나면 6 바라밀 중 앞서 말하지 않은 4 바라밀의 내용으로 나아간다. <인욕품>,<정진품>,<선정품>,<지혜품>이 그것이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이 모든 깨달음을 중생과 함께 나누겠다는 <회향품>이 나온다. 이 책의 역자는 4행씩 구성된 경전 원문을 적고 조금 더 쉬운 문체로 다시 역자해주를 한다. 다른 첨가물들은 거의 없고 그냥 문맥을 풀어 쉬운 말로 정리한 정도이다.  

조금 구성이 특이한 장이 <지혜품>이다. 여기서는 앞의 것들과 다르게 불교철학에 대한 논쟁이 등장한다. 각 행 하나 하나가 상당히 깊은 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서양철학의 인식론 논쟁을 떠올리게도 한다. 여기서는 관념론적으로 가장 극단쪽에 있는 중관학파가 다른 실유론자들이나 유심론자들의 질문에 반박하는 형식을 취한다. ('일체유심조' 라는 마음의 실체라는 것 역시 중관학파의'공마저 공하다'는 무실체론에 맞부딪혀서 부정되는 식이다.) 앞서 말했듯이 한 문답이 인식론에서 논문 하나가 나올 만큼인 주제들이지만 그 외곽만 이해하는 선에서 읽어나가면 흥미롭다.    

한 해가 저문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 세계가 모두 힘들다. 그런 고통 속에서 우리는 서로 남이 아니다.  천주교 미사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평화를 빕니다' 라고 말해주는 의례였다. 나와 세계가 정의로운 속에 평화롭길 바란다. 여러분도... 

불타는 돌덩이와 칼날의 비도/ 이제부터는 꽃들의 비가 되고 

서로의 무기로 부딪치던 이들도/ 이 순간부터는 꽃을 던지게 하소서.  <입보리행론> 회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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