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수련 옮김 / 인간사랑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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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 읽기가 마치 '말아톤' 같다.

그와 함께한 마라톤때문에 발,다리 관절이 쑤시다.

이 책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끝을 보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중간에 설 연휴가 겹쳐서 그런 때문이기도 하다.그렇지만 실제로 페이지/sec를 구한다고 하더러도 달팽이 횡단보도 건너가는 기록이 나올 듯 하다. 마치 아마추어 건강 마라톤 생중계를 바라보듯 지루하기도 했다.물론 마라톤의 코스가 결코 지루하진 않았던 듯 하다.라캉도 있고,마르크스도 있고,헤겔도 있다.중간 중간에 급수코너에는 반가운 히치콕도 만나고 오스틴,카프카도 기다린다.또 가끔 쉬어가라고 처음 들어 보는 듯 하지만 또 어디선가 들어본 듯 한 농담의 퍼레이드도 대기하고 있었다.

결국 문제는 참가 선수의 함량 부족에 있다.동네에서 뜀박질 좀 한다고 넙죽 번호표 가슴에 붙이고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 참가 신청을 해버린 꼴이다.직접적으로 말하자면-지젝을 도용하여 실재의 중핵을 까발리면-내가 지젝이 만들어 놓은 마라톤 코스에서 완전히 바닥 드러내고 말았다는 것이다.중간 중간 숨이 막히기도 했고 또한 어떤 언덕에서는 '그냥 덮고 쉬자.'라는 생각도 들었다.특히 책 후반부쪽으로 갈 수 록 말이다. 마라톤의 35km지점부터가 진짜 힘들다고 하듯이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도 대략 7-8부 능선부터 눈 밭에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두 서너장 넘기다가 꾸벅 꾸벅 졸았다.그러다 목이 아파서 선잠에서 깨면 후회가 밀려왔다."아..이 달리기를 계속해야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울며 걸으며 인내심 테스트 하듯이 이 책을 다 읽었다.일단 팔다리가 아프다만 그래도 치워버려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든다.그리고 날 유혹하는 다른 책들의 팔랑거리는 손짓에 마음이 녹아든다.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은 지젝을 읽는데 가장 먼저 추천되는 책이다.옮긴이는 친절하게도 그의 심오한 사상을 가장 쉽게 정리해 놓았다라고 말한다.거의 모든 목록들이  지젝 읽기의 관문으로 이 책이 많이 거론된다.그런데 이건 어떻게 보면 목욕탕에서 물 안뜨겁다고 아이 꼬시는 아빠같은 이야기이다.특히 나같은 비전공자이며 아마추어 독자들에겐 말이다.

내가 지젝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그의 이데올로기 비판과 정신분석학을 정치학의 영역으로 확산하는 접근때문이다.아무래도 사회과학을 전공한 때문인지 그가 잡고 늘어지는 마르크스-라캉-헤겔이라는 미끼에서 마르크스와 관련된 내용들이 가장 쉽게 이해가 되고 손에 와닿는다.책 초반부에 지젝은 라캉의 '증상'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증상'을 고안해낸 사람은 '마르크스'라고 말한다.하지만 그가 고전적의미의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흔히들 마르크스 비판으로 일컫어지는 '혁명론'과 '목적론적 역사관'에 대해 지젝은 반마르크스적인 입장을 취한다.그는 자본주의가 마르크스가 지적했던 이전의 생산양식과는 다른 양식이라고 말한다.오히려 '자본주의는 영원하다' 라고 말하면서 자본의 내적 모순이 그 자체를 더욱 혁명화하면서 지속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역설이라고 언급한다.지젝은 라캉을 살짝 집어 넣어 그의 '향락'이 이런 잉여 속에서 나타난다고 말한다.마르크스의 잉여가치라는 것이 라캉의 대상a와 만나는 지점을 지젝은 그렇게 설명한다.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에서는 내게는 새로운 개념들이 좀 등장해서 흥미로왔다.에를 들어 '주인 기표'라든지 , '누빔점' 이라든지, '고정적 지시자' 같은 개념들 말이다.이데올로기를 하나의 큰 덩어리로 취급하던 방식에 비하면 마치 이데올로기를 정육점 고기마냥 도마위로 올려놓고 또 분해해서 부위별로 나눈 느낌마저 준다.지젝은 이데올로기 비판에서 시작되어서 현실 정치 속의 반유태주의라든지 전체주의라는 것 까지 이런 논의를 이끌어간다.지젝의 전체주의에 대한 접근은 정신분석학적 방식이다.그가 말하는 파시즘 이데올로기에 있어 핵심은 희생의 도구적 가치가 아니라 자유주의적인 희생 자체의 형식인 '희생정신이다.그는 정신분석이 형식적인 희생 행위 속에 드러나는 외설적인 향락을 드러내기때문에 파시즘의 분석에 유효하다고 말한다.

지젝은 이 책이 라캉을 포스트구조주의의 망령에서 구조해서 헤겔로의 회귀를 완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문제는 라캉이 내게 '내 머리 속의 지우개'라는 거다.라캉의 개념들은 책을 읽는 동안 어떻게 따라가다보면 알 듯 도 하다.그런데 돌아서면 가물거린다.예를 들어 '실재'라는 것에 대한 설명만 해도 여러 가닥의 꼬인 줄들의 묶임처럼 말한다.그러니까 틈사이로 보면 이것도 ''실재'에 대한 설명이고 돌려서 보면 또 이것도 그런 설명이다.라캉만이 아니다.헤겔 역시 뭐 그닥 잘 아는 바는 아니다.그렇지만 지젝이 되살리고 싶어하는 '헤겔의 곡해'가 어떤 것인지 대략 이해는 간다.대개 헤겔 하면 '절대정신'과 '이상적인 일원론'으로 알려져있지 않은가.특히 현대 철학에서는 이런 헤겔을 폐기시키는 것이 과제였다고 할만큼 헤겔로 대표되는 독일관념론에 자주포를 쏘아대지 않았던가.지젝이 참으로 신통방통한 것은 역설적인 방법론을 동원해서 쓰러져가는 헤겔과 그의 변증법을 세우려고 한다는 것이다.그의 사유와 글쓰기가 참 특이한 것은 그런 지점이다.(이런 듯 보이는데 꼭 그것만은 아니면서..실제 두드리고 있었던 것은 다른 문이었다는 ...)지젝은 책 서문에서 '푸코와 하버마스'의 논쟁을 언급한다.그는 푸코를 포함하여 '포스트 구조주의'의가 헤겔의 '악무한'의 단계로 작용한다는 점을 지적한다.내가 이 책에서 정말 고생하게 된 '주체'문제와 관련해서 '푸코와 하버마스'의 간극을 이전에 예견한 사람들로 알튀세르와 라캉을 이야기한다.지젝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가지고 있는 형식주의를 비판하며 현실 자체를 무의식적으로 구조화하고 있는 환상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라캉을 예로 든다.즉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 장치와 호명사이의 연관을 설명할 수 있는 도구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대신 라캉은 현실의 잔여물과 잉여에 촛점을 맞춘다..그는 현실을 왜곡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상식적인 답변말고 현실 자체를 외상과 실재적인 중핵으로 부터의 도피처로 제공하는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말한다.

지젝이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지루하면서도 이 마라톤을 쉽게 중단할 수 없는 매력으로 작용한다.마치 내가 대학 들어와서 마르크스를 처음만났을 때,푸코를 처음 접했을 때 느끼는 개안과도 같은 신선함이다.라캉을 인용하여 지젝은 자주 '질문에 곧 답이 있고 ...밀수품은 사실 수레다.'라는 식의 예를 든다.주체라는 것 자체도 기표들의 연쇄와 네트워크 속에서의 대답이라고 말할 정도니 형식과 틀이라는 '기표'들에 대한 접근은 '의미만이 진짜다'라고 생각하는 '진지함'을 추구한다고 가정된 주체들에게 한방 날릴 수도 있을 대목이다.또한 '스스로의 나'를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또는 '나는 타자의 모자이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아이디어를 줄것이다.실제 지젝은 주체의 사회 속의 선택 문제에 대해 부인하고 싶겠지만 "그는 자신에게 이미 주어진 것을 선택한다"라고 말한다.그리고 만약 자유선택-많은 자유주의자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주체는 정신병적 주체라고 말한다.즉 상징적 질서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고 기표의 네트워크 속에서 사로잡히지 않은 주체는 오로지 그런 주체 밖에 없다는 것이다.라캉의 재미있는 점은 -지젝은 이것을 라캉의 혁신성이라고 말하는데-여타 구조주의자들과 달리 대타자라고 하는 것 역시 빗금지어진 것이라고 말한다.하여간 역설에 역설이고 뒤집기의 또 뒤집기다.

"진리는 오인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계산하는 자가 그 계산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시저의 살해는 그 최종 결과로 시저주의를 가져온다" " "무엇을 원하는가?" "당신은 항상 두번 죽는다."

지젝이 인용하는 라캉의 말들은 참으로 오묘해서 알듯 말듯하다.그렇지만 이런 역설적인 말들이 나오기 전 단계의 이성적이라고 가정된 사고의 품안에서만 있어왔다면 옆집 강아지 짖는 소리에 귀기울여 보는 마음으로 "왜..그딴 식으로 생각하는데?" (지젝은 이런 질문이 외설성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는 것도 나쁠 바는 없을 듯 하다.

지젝 읽기는 마라톤 같았다.아마추어가 그냥 뛰기엔 분명히 버거운 길이었다.하지만 마라톤이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과학적 훈련을 받은 사람만 하는 운동은 아니다.요즘 각 지역마다 마라톤 축제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가 동호회회원들이고 일반인들이다.그들의 초기 목표는 풀코스 완주일 것이고 조금 더 쌓이면 3시간 주파를 목표로 할 것이다.달리는 사람들은 말한다.뛰다보면 어느 순간 몸이 가벼워지고 생각이 맑아지는 느낌이든다고...'러너스 하이'라고 하던가...하여간 하프도 제대로 못해대면서 풀코스를 뛰어 팔다리 고생시킨 죄는 있지만 지나가면서 만난 '지젝스러운' 풍경들은 다시 마라톤을 뛸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이 책은 누구에게나  한 번에 이해되는 책이 아닐 것이다.마라톤도 한 번에 완성되지 않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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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8-02-16 20:17   좋아요 0 | URL
이 참에 마라토너가 되실 거 같습니다.^^

드팀전 2008-02-17 18:55   좋아요 0 | URL
ㅋㅋ 그럴리가요...^^ 운동은 좀 해야하긴 하는데..아기 생기기 전에 좀 했을때는 성과도 보고 좀 좋았는데 다시 늘어나는 뱃살.

재독,삼독을 해야지 좀 더 이해가 될 듯 합니다.언제 다시 읽게 될 지는..ㅋㅋ

로쟈님의 달콤한 꾐에 빠져서 졸지에 푸하핫 거리고 있습니다.보답으로 제가 최근에 들은 퀴즈 하나 알려드리지요...따님께 물어보시길..
"비의 매니저 이름이 뭔지 아시나요?"
...
..
.
"비만관리" 라네요.크하항..전 무지 웃었는데 다 아는 이야기여도 할 수 없구

로쟈 2008-02-17 22:23   좋아요 0 | URL
딸아이는 비를 잘 모릅니다(한때 동방신기 정도를 알았죠). '비만관리'는 잘 알아듣지만.^^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 - 한 젊은 역사가의 사색 노트
이영남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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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는 모두 가루약을 먹는다.칼칼한 분말을 입 안에 털어넣가 쉽지 않다.때로는 씁쓸한 가루 한 줌이 입 천장에 붙어서 목구멍을 화공약품 처리장 처럼 만든다.어른이 되니 달라진 점이 약 봉투에서 가루약이 사라졌다는 것이다.언제부터인가 알약을 꼴깍 꼴깍 잘도 넘기게 되었다.약 먹는게 그나마 쉬워졌다.

역사학자 이영남이 쓴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는 당의정을 씌운 푸코 개론서이다.이 책은 '푸코'에 대해 언제나 알고 싶었지만 차마 '푸코'에 대해 물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이라면 환영할 만한 책이다.저자는 개인적 공부와 집단 학습을 통해서 자체적으로 소화한 푸코를 비교적 평이하게 서술하고 있다.먼저 번역투의 문장을 앞뒤 읽어가면서 맞추어 보지 않아서 좋다.전문적인 푸코 연구자들처럼 철학적 용어들의 남발 속에서 퍼즐 맞추듯 읽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좋다.그런 의미에서 '푸코'의 '푸'자에 대해 관심만 있었던 사람에게는 엔돌핀을 돋게 할 책인 것 만은 사실이다.

책 제목을 잘 살펴보자.책 표지의 디자인에 제법 이중적이다.보시다시피 책 제목은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이다.색깔로 구분해서 보면 앞과 뒤는 흰 글자이고 <...역사의 문법을..>은 검은 글자이다.따로 따로 떼어 보면 제목이 두 개 처럼 보인다.흰 글자 부붐만 보면 <푸코에게 배우다>.주어와 서술어만 갖는 제목이다.책 제목의 디자인에서 사실 이 책의 기회과 구성이 들어있다.재미있게 그러면서도 효과적으로 잘 뽑은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은 제목처럼 <푸코에게... 배우다>와 <...역사의 문법을...>이라는 2막으로 구성되어 있다.(실제로 책이 그렇게 1,2부로 나누어져 있다는 말은 아니다.) 저자는 푸코의 삶의 궤적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일종의 평전 하이라이트라고 보면 된다.디디에 에리봉의 저작 <미셀 푸코>가 중심적인 롤을 맡고 있다.또한 푸코의 콜레드 주 프랑스 강의와 미국에서의 인터뷰 내용들이 푸코라는 인물에 대한 조감도를 그리게 해준다.디디에 에리봉의 <미셀 푸코>를 읽었던 사람이라면 1분 30초짜리 극장판 예고를 보는 느낌을 줄 것이다.저자는 푸코의 삶을 따라가면서 개인적 삶의 역사가 어떻게 그의 작품과 관련이 있는지를 쫓는다.잘 알려져 있다시피 푸코는 '소수자들의 아더왕'이었다.푸코 자신이 총명함에도 불구하고 모난 성격으로 어렸을 때부터 광인 취급을 받아왔다.또한 청년기부터 그는 은밀하게 욕망할 수 밖에 없는 동성연애자였다.사회에서 이런 개인적 포지션이 <광기의 역사>라든가 <감시와 처벌>,<성의 역사>같은 저작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말이다.당연히 저자가 강조하고 감탄하는 것은 개인의 특수성을 내면 속의 분노나 분출로 끝내지 않고 사회적 보편성으로 확장해낸 푸코의 역량이다.저자는 푸코의 삶에 영향을 준 사건으로 앞의 두가지 외에도 정신병원에서의 근무,스웨덴 웁살라와 튀니스로의 외유,68혁명 등을 언급하고 있다.

저자가 푸코의 평전 압축에 할당된 종이를 모두 소진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푸코를 이해하기 위해,또는 푸코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위해, '호구조사' 부터 시작해준 것쯤으로 이해하면 된다.저자는 '침묵하는 역사'를 부활 시켜 '현재를 낯설게 보게 반든' , '현재의 역사가' 푸코에게 시선을 모은다.그래서 주로 언급되는 책이-푸코 저작 중 가장 많이 읽히고 또 쉽게 읽히는 -<광기의 역사>,<감시와 처벌>이다.역사-철학자로서 푸코를 상정하기에 이 두 책만큼 용이한 것도 없을 법하다.푸코가 이 두 책에서 말하고자 한 바를 따로 정리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푸코는 '계몽주의'와 '근대성' 이란 것에 시비를 좀 걸었다.그는 근대의 합리적 세계가 어떻게 배제를 통해 구축되었는지를 설명한다.푸코가 관심을 갖게 된것은 '권력-지식-담론' 이란 것들이 어떻게 신체에 작동하여 규율을 만들어내는지에 있었다.결과적으로 말하면 '권력은 모든 곳에 내재한다'는 것이었다.또한 마르크스식의 거대담론으로서의 권력이 아니라 세계의 곳곳에 나름의 정부를 세운 미시권력들이 다층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상정했다.그래서 푸코의 저항은 그런 미시적 지점에서 가능성을 본 것이다.그의 감옥정보모음GIP에서 활약과 실천적 지성인으로서의 모습은 이런 도상에서 이해되고 있다.

저자는 역사학자답게 2막으로 넘어가면서 역사가로서의 푸코를 이야기한다.<...역사의 문법을..>의 차원이다.저자는 푸코가 추구한 연구의 엄밀성과 열정을 상찬하고 실증주의적 접근에 큰 박수를 보낸다.또한 정치적 사유를 통해 임상 역사가로서 전문 역사가들에게 거대한 자극이 된 푸코의 업적을 칭찬하다.푸코의 사유를 동원하여 한국의 역사를 빗대어 보는 장도 따로 마련한다.저자는 박정희 정권의 근대적 '효율 우선주의' 프로젝트가 사회적으로 민주주의적 가치를-정치적 민주화만을 뜻하지는 않는다-부정하고 진화해 나갔다고 지적한다.우리 사회에 그동안 저류에 깔려있다가 이제 표면에 극적으로 등장할 '기업사회'가 대표적인 예가 될 터이다.이제는 더이상 숨어서 말할 필요가 없고,머뭇 거리거나,두려워 할 필요없이,극단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효율성'과 '경쟁력'의 시대 말이다.

저자는 책 말미에 가서 우리의 역사학과 역사 인식이 참고해야할 방향으로 미시사를 예로 들고 있다.저자가 부정하고 있지만 얼필 보면 푸코의 역사철학을 미시사로 끌고 오기 위해 앞에서 길게 푸코를 인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법도 하다.(저자는 분명히 푸코가 미시사가는 아니라고 말했다.) 미시사를 통해 거대담론 속에 사라진 개인들을 복원하는 것.그리고 이를 통해 '개인의 삶'과 '사회적 삶'을 네트워킹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전문역사가 뿐망이 아니라 누구나 해봄직한 이런 미시사류의 임상 역사가가 되기 위해 인문학적 자기 수양을 강조하고 있다.(저자는 미시사와 인문학적 소양의 강조를 위해 지금 서재 왼쪽 상단에 있는 긴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을 예로 들고 있다.마침 이 책을 작년에 감명깊게 읽었으니 이런 재수가...)

물론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운다>에도 기획의 특성상 약점이 없을 수는 없다.역사학자가 감동한 푸코가 되다 보니 푸코를 역사학으로 소급시켜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저자는 푸코의 책들이 도서관에서 사회과학코너에 어떤 것은 철학 코너에 어떤 것은 역사 코너에 있다고 말했다.그만큼 푸코는 멀티 플레이어다.물론 역사가의 입장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긴 했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FA 시장에 나온 푸코라는 선수를 '그는우리 쪽 사람이야'라고 외치는 섭외 에이전트의 인상이 든다.(물론 개인적 편견임을 밝힌다.내 거의 모든 글이 다 그렇듯이) 이정우 교수가 푸코가 사회과학자로 환원된 것에 대해 비판했듯이 또한 이 글 역시 역사학자로 환원되는 푸코라는 지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가 다루고 있는 푸코의 저작이란 것이 <광기의 역사>,<감시와 처벌>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도 지적할 만하다.물론 간간히 <지식의 고고학>,<성의 역사2,3>,<말과 사물> 등이 등장한다.그렇지만 상대적으로 앞의 저작에 비해 확실히 빈약하다.푸코의 중기 사상에 해당한다는 권력과 지식의 문제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또한 '푸코 용비어천가'에서 '푸코 비판'을 요구하기란 사실 어려울 수 있다.하지만 독자들을 위해 푸코에 대한 비판적 시선도 짧게 나마 언급하면서 넘어갔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욕심 아닌 욕심이 생기기도 한다.예를 들어 헤이든 화이트나 폴 베느 그리고 저자가 역사학자로서 그렇게 칭찬한 푸코의 역사적 사료 분석에 대해 엉터리라고 반대하는 학자들도 많았다.<임상의학의 역사>에 대해서는 정신분학학자들이 푸코의 지엽적인 자료 채택에 대해 비판 했다.그외에도<광기의 역사><감시와 처벌>등에서 푸코의 역사적 증거가 지나치게 선별적이고 왜곡적이고 또한 포괄적이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았다.<푸코>의 저자 메르키오르는 상당히 삐딱한 시선으로 '푸코 역사의 객관성은 역사의 여신 클리오에게 일급의 칭찬을 퍼부었던 세기에 이루어졌던 일급의 역사 연구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라고 악담을 퍼붓는다.또한 저자가 푸코 사상의 특징으로 말하는 '불연속성' 즉 에페스테메의 단절에 대해서도 그 만큼의 비판이 존재한다.심지어 푸코 자신도 후기에 오면서 '불연속성'에 대해 어떤 보완적 태도를 취했다고 알고 있다.장 피아제는 푸코의 사상을 '근대성에 대한 객관적이고 타당한 혐오라기 보다는 그저 근대성에 대한 막연한 혐오'라고 평가했다. 이와 연계하여 유명한 푸코와 하버마스의 논쟁 처럼 푸코의 '반계몽주의','반이성주의'와 그것이 갖는 철학적 문제의식 등에 대해서도 저자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그저 '역사적 실증에 바탕을 둔 근대성의 반성'으로서만 푸코를 말하고 만다.

한 가지 기획에서 푸코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하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한다.존중해줘야 할것은기획 의도다..이러 저런 이유로 사실 나는 이 책에 별 셋을 주고 싶었다.그렇지만 푸코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이 책을 볼 필요도 볼 일도 없다는데 생각이 머물렀다.대신 있어 보이는 레스토랑 앞에서 머뭇거린 경험이 있는 -나를 비롯한-사람들을 떠올렸다.

 '푸코' 식당이 있다.정통 프랑스식 레스토랑이라고 한다.인테리어도 그럴싸하고 값도 비싸보인다.레스토랑의 협력업체 또는 경쟁업체로는 '바슐라르', '캉길렘','레비 스트로스','데리다','들뢰즈','하머마스' 등 그럴싸 해보이는 식당들이 있다고 한다.메뉴도 대충 어딘가에서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이야기다.그렇지만 또 낯선 요리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식당에 들어가보고 환상적인 맛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또 어떤 사람들은 먹기 너무 힘들다고,입맛에 안든다고 다신 안가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는 지나가면서 '푸코' 간판만 보고 '언제 한번 맛이나 볼까 '하는 사람에게 좋은 책이다.별로 비싸지도 않다.주방장이 대충 한국 입맛에 맞게 만들었다.가격은?.. 실제 프랑스 요리값이야 비싸겠지만 책으로 만나는 푸코야 '그래 봤자'  종이 값이다.이제 이 리뷰도 끝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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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8-01-21 15:32   좋아요 0 | URL
근사한 제목에 걸맞는 근사한 리뷰입니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1
토니 마이어스 지음, 박정수 옮김 / 앨피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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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책의 역자가 첫 머리에 쓴 글이다.그의 글을 읽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필요가 있다.우리들이 처음 사람을 만나면 상투적이고 진부할 지라도 별다른 도리 없이 '호구조사'하는 것 처럼 말이다.지젝은 슬로베니아라고 하는 서구 변방의 철학자다.그럼에도 '21세기형 사상가,MTV형 철학자' 라고 불린다.그의 글쓰기는 '종횡무진' 미스 신답다.히딩크 감독이 한국 축구를 4강에 올렸던 그 컨셉이 그에게도 적용된다. 선수 개개인의 능력을 극대화하며 그라운드를 장악하는 빨빨이 '멀티 플레이어'. 지젝은 확실히 '멀티 플레이어'다.그는 호수를 가로지르며 물살을 일으키는 바나나 보트처럼 철학,정치학,정신분석학.. 등등을 가로지른다.그의 글을 읽었던 사람은 그가 이 어려운 장르를 꿰매는 실력에 감탄하곤 한다.일명 '지젝식 테피스트리'라고 불린다.

지젝의 책을 좀 즐겁게 읽기 위해 이런 상상을 해보면 어떨까? 털북숭이 중년의 아저씨가 벽난로옆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퀼트를 하고 있는 모습 말이다.가끔 까딱 까딱 조는 그의 눈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좋아..그렇다면 지젝이 그의 양탄자를 만들기 위해 들고 있는,곰발바닥 같은 손에 쥐여져 있는 은빛 바늘에 주목해보자.어떤 바늘로 코를 뜨고 있는가?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의 저자 토니 마이어스는 간단 명료하게 지젝이 사용하는 세 개의 바늘브랜드를 알려준다.입문서에서는 이런 단호함이 오히려 좋다.헤겔,마르크스,라캉표 바늘이 그것이다.방법론적으로 지젝은 라캉의 개념들을 자주 이용한다.지젝을 읽기 위해 그의 라캉을 이해해야 하는게 그래서이다.문제는 지젝이 아무리 쉬운 영화의 예를 들어서 설명해준다 하더라도 <에크리>의 그 위대한 왕따 라캉의 독해가 녹녹치 않다는 것이다.지젝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전도사 역할을 하지만 그것은 궁극적인 목표에 이르는 도구에 가깝다. 지젝에게 중요한 것은 오히려 사상적으로는 독일 관념론의 거두라고 알려진 헤겔의 재조명과 정치혁명의 희망지로써 마르크스주의의 외연확장이다.즉 정치적인 라캉을 발굴하고 마르크스주의가 결여한 주체 모델을 제공하여 '자기 대상'을 변형하는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지젝은 냇물처럼 흘러가고 있다.그의 출발점을 계보학적으로 따져 볼 수 있지만 그것이 현재의 지젝을 그대로 보여주진 못할 것이다.저자는 결론에서 지젝의 작업이 소급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이는 지젝의 시대 정합성에 대한,그 비범함에 대한 칭찬이기도 하면서 또한  다음번 그의 행보가 어디로 향할지 미지수X 로 남겨 놓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지젝이 걸쳐 놓은 분야가 광범위 하다 보니 그의 사상을 몇 장으로 구획하여  설명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여기에는 근원적인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이 책은 이런 한계를 받아들이며 지젝의 문어발을 지젝식으로 과감하게 '소거'하고(^^ ;) 오징어 몸통 중심으로 몇 가지 개념들을 설명한다.이 책을 읽고 지젝에 더 관심이 가는 자들은 '따라 갈테면'... 더 따라가면 된다.책 말미에 지젝의 저서에 대한 간략한 브리핑을 해 놓았다.예를 들어 '지젝의 책 중 딱 한 권을 읽어야 한다면 <이데올로기라는숭고한 대상>이 좋다.가장 대중적으로 읽히지만 라캉의 개념에 대한 선지식이 없으면 힘들지도 모른다는 <삐딱하게 보기>' 라는 식으로 말이다.(이 정도면 '친절한 기획.. 씨' 이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나는 아니라고 했다' ^^) 에서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을 '주체'.,'탈근대성','이데올로기','환상','인종주의' 등 이다.물론 이를 설명하기 위해 라캉의 '세가지 계','대타자'등의 개념과 지젝이 주목하는 실재계와의 상호작용 등은 약방의 감초처럼 수시로 등장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지젝에게 관심을 갖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현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이슈 중에 하나인 '주체' 문제와 '이데올로기'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특히 그의 철학이 '정치'라는 쪽으로 더듬이를 대고 있기 때문이다.'주체'라는 것은 워낙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라서 줄기차게 이것만 물고 늘어질 수 없음이 안타깝긴 하다.그래도 '내가 누구인가' 아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주체' 문제는 틈만 나면 열어 보고 싶은 장독대에 묵혀둔 곶감 같은 것 아니겠는가?

'주체' 문제를 다루는데 늘 그 분이 있다. 교부재처럼 태글 걸리셔 절룩거리시는 그 분.바로 교과서에서 배워서-중요한 것은 그래서 지금까지 믿고 사는- '나는 생각한다,고로 존재한다' 라는 유명한 데카르트 선생님이다.좀 넓게 말하면 탈주체론,탈구조주의자들은 '주체는 외부의 영역에 지배받는다.' 라고 주장한다.푸코는 권력이라는 것을 상정했고 또 거기서 빠져나올 가능성의 주체에 대해 연구하다가 돌아가셨다.어쨋거나 이 주장에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하는 것은 주체가 데카르트처럼 '내부적인 구성물'이 아니라는 것과 주체의 '자기 동일성'이라는 것이 쉽게 부정된다는 점이다.(내 개인적으로는 '자기 동일성'의 부정에 대해 열광(?)하는 편이다.)... 어쨋거나 저쨋거나... 태종태세문단.속...요즘의 트랜드는 분열된 주체,꼭두각시 역할의 주체라면 지젝은 슬며시 거기에 딴죽을 건다.즉 '코키토'의 옹호를 주장하는 것이다.와우! 지젝처럼 최첨단이 '고기토'를 옹호했기 때문에 지젝 옹호자들은 잠깐 머뭇거렸다고들 한다.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지젝의 '코기토'는 데카르트적 주체 (좀 웃자고 이야기하면 '싸가지 없는 주체')는 아니다.지젝이 말하는 주체는 데카르트의 주관적,자이완전형의 주체와 객관성의 과잉인 탈구조주의적 주체와는 또 다른 주체이다.그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주체의 토대로 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주체가 철회되는 지점,세계가 절대적 부정성으로 경험된 지점,모든 것이 부정된 텅 빈 장소 속에 주체를 위치시킨다는 것이다.'주체는 공백이다' 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듯 하다. 지젝은 프레드릭 제임스의 <사라지는 매개자> 개념을 응용하여 자연과 문화 속에 사라지는 매개자로서의 주체를 상정한다.(대략 이해가 갈 듯 하지만...또 쉽게 설명하긴 어려운 개념인 듯...그래도 자꾸 보면 이해가 될 때도 있다 ^^ 책 말이다.)

지젝은 탈근대성에 대해서도 똥침을 한번 먹인다.탈근대성이란 것은 간단히 말해 '대타자'라는 것이 붕괴된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이다.탈근대론자들은 그 붕괴가 발생 시킨 자유에 대해 룰루랄라 하지만 실제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지젝은 이를 '재귀성'(반성성) 이라고 말한다.저자는 환경을 지키기 위해 또 다시 과학에 의존하는 주류환경론을 그런 예로 들고 있다.'대타자의 붕괴'는 지젝이 말하는 상징적 효력의 치명적 손상을 뜻한다.(지젝이 자주 인용하는 '닭대가리 인간'의 예가 제시된다.) 또 다시 어쨋거나 저쨋거나 ..태종태세 문단..속... 하여 '대타자'가 붕괴되어 버리니까 좋을지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더라는 것이 핵심이다.니체가 신의 사망을 선고하고 나니까 인간들이 모든 것을 다 해야 하는 것처럼 '상징적 효력'의 상실은 인간을 선택의 주체로 만들어 버렸다.이 겁많고 소심한 인간들은 결국 어디로 가느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한용운 스님의 시를 오역하여 '나는 복종하련다'로 간다는 것이다.이건 경제적인 선택이기도 하다.편의점에 가면 한 상품에 대해 서너가지 브랜드만 전시한다.너무 많이 전시하면 실제 구매가 떨어진다.왜냐하면 백 종류의 비누 중에 하나 고르는 것은 너무 큰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비경제적 행위이기 때문이다.'선택의 주체'로 홀로 남겨진 인간이 노예적 복종에 종속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또한 그와 유사하게 과도한 믿음이 주는 편집증이나 나르시즘의로 향하기도 한다.지젝은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행위'하라고 주문한다.행위는 구체적인 행동과는 다른 개념이다.이는 주체의 소거를 포함하는 재창조를 포함하는 부정의 양식이다.(이게 뭔지 구체적 행동 지침을 지젝이 이야기하지 않는다.지젝은 거의 행동지침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그게 답답해 보이기도 하지만..행동지침을 주길 바라는 것이 또한 얼마나 편리성에 근거한 노예적 근성인가...)

지젝은 탈근대의 상황을 논의하면서 다시 '이데올로기'에 대해 걸고 넘어진다.세계의 변화보다 세계의 종말을 꿈꾸기 쉬운 시대에 왠 '이데올로기'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후쿠야마인가 하는 분은 오래전에 '역사의 종언'이라는 생뚱맞은 이야기를 하셨고, 벨이라는 분은 <이데올로기의 종언>까지 언급하셨었다. 또 레닌 동상이 무너지자 '그럼 그렇지'라고 '이데올로기'를 극적으로 축소화 시킨 오역을 행하신 분들도 많았다.즉 그들이 생각하는 이데올로기는 양국이 주도한 냉전이라는 시대의 한 축이,한가지의 정치적 사상만을 뜻하는 것이었다.이데올로기가 그것일까? 냉전이 나오기 전부터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있었는데...과연 '이데올로기'가 단순히 '자본주의''공산주의''양키''빨갱이'하는 것만을 의미할까? ....지젝이 타인의 환상을 깨지 말라고 했으니 깨지 않겠다.안그러면 하이스미스의 <검은집>의 젊은 청년처럼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고....

대학들어가서 처음 배운 것이 알튀세르의 '상부구조/하부구조' 와 '이데올로기 장치'들이었다.범마르크스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의를 거칠게 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한 일곱말씀 중 하나와 거의 유사하다.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합니다" 이다.

지젝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슬로터다익의 냉소적 주체를 이 시대의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로 설명한다."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잘 알지만 여전히 그렇게 행동한다." 가 그것이다.이것은 과거 이데올로기 비판이 신비화를 밝혀내는 것이 있는 차원과 현격히 다른 인식지평을 보여준다.이는 인종주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과거 이데올로기 비판의 논리적 함의를 따르면 만약 사람들이 이데올로기라는 허위의식이 허위의식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면 비로소 광명이 시작될 것이라는 점이었다.그런데 '이건 아니다' 라는 것이 지젝의 생각이 참신한 점이다.주체들은 다 알고도 하지 않을 뿐이다.냉소적이게도.지젝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이데올로기를 근본적으로 앎의 차원에서 행동의 차원으로 이동시킨것이다.지젝은 티벳의 회전통 기도문의 예를 들면서 믿음의 물질화와 자동화된 신념에 대해 말한다.그러면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 갖는 내적 문제들(즉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믿음을 생산하는지)과 이분법적 구조를 비판한다.지젝은 상징계 내부의 틈을 은폐하는 장치로서,상장계에 통합될수 없는 적대로서,유령같은 보충물로서,또다른 층위가 있음을 주장하며 이데올로기 삼원구조층을 제시한다.

지젝은 우리가 탈이데올로기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냉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지배된 세상에 살고 있다라고 말한다.그리고 이와 함께 상징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환상이라는 프레임에 의존한다고 말한다.지젝은 언제나 사회는 분열되어 있었다는 말로 '적대'와 '당파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즉 우리가 아무리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일지라도 결국 그것은 어떤 이데올로기의 하나뿐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이해될 수 있다.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이데올로기는 없다'라고 하는 것 보다 최소한 사리판단에 맞는 것일 게다.지젝은 '환상'을 타인의 환상에 침범하지 말라고 말한다.그러면서 실재적으로는 '정부'의 환상에 대한 조절을 말한다.이 지점은 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즉 권력의 헤게모니를 움켜진 주체들의 환상이 어떻게 구성되어 지는지? 또한 같은 방식으로 왜곡된 주체들이 행사하는 조절능력에 어떤 당파적 환상이 존치하는지는 언급하지 않기때문이다.이와 더불어 지젝이 라캉을 이용하여 언급하고 있는 '욕망'에 대해서도 의문이 생긴다.'타자의 욕망'으로 수동화된 욕망이 아니라 들뢰즈가 말했다는 '생산하는 욕망'이라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지젝에게 이해가 될 런지 궁금하기 때문이다.어쨋거나 지지배배....지지배배다..

생긴 것과 사뭇 다르게 쿨한(?) 슬라보예 지젝.이런 사람들은 미움과 찬사를 동시에 받는다.나는 아직 지젝을 잘 모른다.또한 그의 철학이 부정적 의미에서 '철학'적이라고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어찌 되었건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이 없으면 '관념'의 장난으로 치부하는 신자유주의적 사고나 당장의 현실적 부정에 칼을 드는 것이 아니면 '사변'으로 취급하는 경박하고 과도민중화된 '유물론'적 접근에서나 말이다.문제적 철학자 지젝은 떨어져버린 페이퍼 뒷 장 취급받는 마르크스와 왕따 라캉을 다시 우리에게 돌려보내고 있다.그는 실천적 과제와 구체적 투쟁 지침을 이야기하지 않는다.(앞에도 이야기했지만 '과제'와 '지침'에 너무 목말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담임 선생님의 금주의 실천사항에 익숙해있더라도,인사계의 금주 작업 목표가 그리워져도,총학생 투쟁위의 투쟁지침이 가끔 그립더라도..지젝은 그런 것을 주지 않는다) 

"오늘날 정치적 공간이 구조화되는 방식은 점점 더 행위의 출현을 힘들게 한다". 지젝은 이 말 처럼 행위를 하는 장소를 규명하는데 공을 쏟고 있다.이를 통해 행위의 가능성을 창출해내고 싶은 것이 지젝의 목표이기 때문이다.낚시 바늘을 만드는 사람에게 낚시 방법과 낚시의 포인트를 묻지는 말자.그것은 지젝을 독해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행위하는 우리의 몫일지도 모른다.

비교적 친절한 입문서이다.그리고 지젝에 대해서는 역시 알라딘의 로쟈님 페이퍼가 많은 도움이 된다.따라가기 힘들지만..쿨럭 쿨럭...가르마같은 논길을...쿨럭 쿨럭...다리를 절며 걸어보자.뭐가 되긴 되겠지.봄이라도 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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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8-01-14 14:03   좋아요 0 | URL
읽어보지도 못한 주제에 책 제목만 보고도 '저요'라고 대답하고 싶은 충동이. 쿨럭.

드팀전 2008-01-14 14:14   좋아요 0 | URL
쿨럭..다들 쿨럭..

기침을 하자/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 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김수영 <눈>....쿨럭..

길게 썻다고 절 미워하진 마세요.지난 번 대충쓴 리뷰에 대한 헛발질이거나 쿨럭이니까..
옹옹옹....쿨럭이 유행어가 될 듯.

로쟈 2008-01-29 13:29   좋아요 0 | URL
길게 썼음에도(!) 당첨되셨군요.^^

드팀전 2008-01-29 18:11   좋아요 0 | URL
요즘 트렌드인가봐요...멜기세덱님도 길어요.
양적 축적의 질적 변화를 꿰해볼때도 되었는데..(양과 질이 그렇게 잘 넘어 다니는지도 좀 의문이긴 합니다) anyway ...지젝은 순전히 로쟈님에게 잘보이려고(?) 읽고 있으니 잘 봐주세요.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글쓰기이자 사람이어서 다른 책들도 쌓여 있는데..최근에 나온 책은 보관함에 있구요.요즘 너무 바빠서 소설 한 권을 가지고 1주일째 붙들고 있습니다.

마늘빵 2008-01-29 15:11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 저도 같이 올라갔네요.

드팀전 2008-01-29 18:12   좋아요 0 | URL
이런 걸 동반우승이라고 합니다.ㅍㅍ
축하드려요...근데 이런걸 나눠먹기라고 비난하지는 않으려는지..
"과전불납리"하라고 햇는데..ㅋㅋ

멜기세덱 2008-01-29 15:34   좋아요 0 | URL
축하드려요! 드팀전님!! 지젝이로군요.ㅎㅎ
지젝이로군요. 로쟈님 덕에 몇 권 사놓긴했는데,영 엄두가 안나서리....ㅋㅋ
드팀전님 덕에라도 걍 한 번 도전해봐야겠네요..ㅎㅎㅎ

드팀전 2008-01-29 18:13   좋아요 0 | URL
^^ 길게 쓰면 다 되나봐요.자로 재봤는데 멜기님이 더 길게 썻어요..you win
<나쁜 사마리아인>으로 나는 왜 리뷰상을 받지 못했을까? 그게 이것보다 나앗는데...

이매지 2008-01-29 20:00   좋아요 0 | URL
제가 제일 짧게썼군요 ㅎㅎㅎ
이거 뭐 다른 분들 리뷰 보러 다니니 -_-
어떻게 그런 리뷰로 뽑혔을까 x팔리는군요 ㅠ_ㅠ
라캉은 정말 녹록치 않아요.
언제 다시 읽어보고 싶은데 엄청난 용기가 필요할 듯.
지젝도 미워하지는 않지만 가까이하기엔 살짝 먼 당신이랄까 ㅎㅎ

드팀전 2008-01-30 08:30   좋아요 0 | URL
제일 짧게 씌셨으면 산업적으로 보자면 가장 효율성이 높은거네요^^
투자대비 산출 ..^^ 님이 최고에요.^^
라캉은 전공자들로 어려워하던데요..

마노아 2008-01-30 01:42   좋아요 0 | URL
이번 주에는 제가 아는 사람 중 네분이나 이주의 마이 리뷰 당선되었어요. 축하합니당^^

드팀전 2008-01-30 08:31   좋아요 0 | URL
저도 아는 분이 많더군요.^^
사진은 마노아 님인가요....
이렇게 말하면 숙녀분께 실례가 되겠지만
하고픈 말은 안하면 배가 고파서 ㅋㅋ
"귀엽게 생겼어요."
 
HOW TO READ 라캉 How To Read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정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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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날도 아닌데 아지랑이가 보인다.올해 처음 읽었던 책 때문이다.라캉과 그의 친구로 인해 겨울 날, 책 장 속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때문에 눈 앞이 희뿌였다.무자년에는 슬라보예 지젝의 책을 읽어보려고 생각했다.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의 책을 접해보지 않았다.그래서 지난해를 마무리 하는 시점에 다음해의 독서계획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이- '내년에는 지젝을 읽어야지'라고 생각했다.처음으로 만만해보이는 <how to>시리즈를 골랐다.지젝의 별명은 '라캉의 전도사'이다.결국 라캉을 알아야 지젝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그런데 이 시리즈의 라캉은 공교롭게도 지젝이 썻다.그러니가 화투로 치면 '일타이피'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런데 잘못하면 일타이피 하려다가 확싸버려서 남 좋은 일 시켜 줄 수도 있는 법이다.)그러나 역시 욕심이다.이 책은 결코 라캉에 대한 친철한 개론서가 아니었다.

이 책은 <how to>시리즈 답게 가벼운 분량이다.그런데 왠걸 이 책을 읽으며 한 챕터를 서너번 읽어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대중문화를 이용한 지젝의 비유는 그럴싸 했지만 결국 라캉의 개념형들을 살펴보고 이해하지 않으면 읽기 만만한 책은 아니었다.라캉의 욕망의 삼각형 같은 것을 그리는 수준으로는 지젝이 설명하는 지젝식 라캉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그래서 읽던 책과 동시에 10여년 전에 개론 수준에서 봤던 권택영 교수의 <대중문화로 라캉읽기>라는 글을 다시 꺼내 읽었다.결국 두 가지 글을 동시에 본 셈이 되어버렸다.결과적으로 이 책으로만 한정하자면 결코 기획의도처럼 친철한 가이드 북이 되지 못한 셈이다.

재미있었던 것은 내가 오래전에 지젝의 입김을 맛봤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다는 것이다.권택영 교수의 글 아래 작은 주석에서 지젝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십 여년전에 라캉을 읽으면서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갔을 뿐,아래 있는 작은 주석까지 눈여겨 보지는 않았다.그리고 설령 보았다 하더라고 한참 뜨기 시작하는 지젝이라는 인물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진 못햇을 것이다.권택영 교수는 자신의 글이 최근 라캉의 해석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지젝의 접근을 많이 참고 했다고 발혔다.그러니까 두리뭉실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미 십 여년 전에 지젝의 글을 한번쯤은 접했던 셈이다.그러나 그 때나 지금이나 라캉이 만만치 않기는 피차 일반이다.그나마 다행이라면 좀 어렵고 확실히 와 닿지 않아도 계속 읽어볼 동력이 충분하고 그만큼 엉덩이가 무거워졌다는 것 뿐이다.물론 더 직접적인 것은 예전만큼 나를 재미있는 일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영화 <색.계>를 라캉식으로 분석하는 글이 인터넷에 많이 올라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아직 찾아 읽어보진 못했다.)또한 영화를 둘러싼 영화 외적인 현상까지 말이다.영화 <색.계>는 사실 섹스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닌데도 파격적인 섹스씬때문에 더 화제가 되었다.그리고 그 결과 낮시간 대에 중장년층 아줌마 관객들을 동원해서 나름대로 흥행몰이를 했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영화를 보고 나서 커피숍에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 호들갑 떨며 "그런 자세가 가능이나해? "라는 이야기가 나왔다고들 한다.영화 <색.계>에서 충돌되던 감정들과 욕망들,사건의 전개방식에서 응용되는 테마들은 라캉의 개념들로 분석하기 용이해보인다.물론 이미 많은 평론가들이 했겠지만...

뭔가 정리된 리뷰를 좀 써보려했는데 능력 밖이기도 하고 지금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서 그만두기로 했다.올해 지젝을 읽다보면 지젝처럼 한 이야기 또 하고 한 이야기 또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이 책을 읽고 LP시리즈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를 보고 있는데 역시나 이 책에 나왔던 지젝의 인용과 예들이 여러번 재탕되고 있다.이 뿐 만이 아니라 그의 주요저서들에서도 그렇다고 한다.한편으로는 다행이기도 하다.반복학습의 효과로 뭔가 하나쯤 얻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게 하니 말이다.책 장을 한 장 넘길 때 마다 고민해봐야 하는 수많은 정보들로 인해 피곤하기는 하다.너무 많은 정보가 결국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이 책의 번역이 좋았는지는 사실 내 영역 밖이다.어려우면 내용이 어려워서인지 안 경우가 훨씬 많으니까.그럼에도 약간 뻑뻑한 부분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지젝의 말 중에서 한 두마디를 적어보면서... 오늘은 여기까징..

"라캉의 주체는 언제나 탈중심화 되어 있다.그의 요점은 내 주관적 경험이 자기 경험 외부에서 내 통제를 넘어서는 객관적이고 무의식적인 매커니즘으로 조종된다는 것이 아니라,훨씬 전복적인 것이다.즉 나는 내 가장 내밀한 주관적 체험,사물이 '실제로 나에게 보이는'노습,내 존재의 핵심을 구성하고 보증하는 근원적 환상을 빼앗기게 된다.왜냐하면 나는 결코 그것을 의식적으로 경험하지도,확신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진보 정치의 많은 부분에서 직면하는 위험은 수동성에 있는 게 아니라 유사 능동성,즉 활동과 참여의 몰입에 있다....실제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게 하기 위해 항상 활동 중에 있는 이런 상호 수동적 상황에 맞선 비판의 첫걸음은 수동성 속으로 물러나는 것,참여를 거부하는 것이다.진실한 활동,즉 좌표계 전체를 실질적으로 바꿀 그런 행위의 토대를 밝혀 준다."

"라캉에게 궁극적인 윤리적 과제는 진정한 깨어남이다.단지 수면으로부터의 각성이 아니라,깨어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우리를 지배하는 환상의 주문에서 깨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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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상의 아이들 - 세계화 시대의 야만, 어린이 노동
제레미 시브룩 지음, 김윤창 옮김 / 산눈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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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이의 이름은 '루빠' 이다.내가 이 아이를 본 것은 지하철에서다.옆에 앉은 사람의 신문을 훔쳐보다  아이와 시선이 마주 쳤다.내 돈 주고 사보지 않는 '조선일보' 였다.신문에서는 이 아이를 '돌깨는 아이 루빠'라고 소개했다.

조선일보에서는 몇 달 전에 our asia 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아시아 아동 노동의 현장을 촬영하고 이를 지역 민방과 기타 다른 매체를 통해 방송한 것이다.방송학계에서는 신문기업의 방송 진출의도가 드러난 시도로 보았다.나는 이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보지는 못했다.신문과 방송을 통해 이 시리즈가 나가고 국내에 후원금이 꽤 모였다고 한다.내가 지하철에서 본 신문의 기사는 캠페인 이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난 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후일담 기사였다.

나는 부랴 부랴 동영상을 검색해서 보았다.('돌깨는 아이 루빠'로 검색하면 만날 수 있다.이외에도 성매매하는 아이,길에서 꽃을 파는 아이등 많다.) '루빠'는 8살이고 네팔에 산다.네살 때부터 돌을 깻다고 한다.마을사람들은 강가에 천막을 치고 모여 살면서 모두 돌을 깨어 먹고 산다.돌을 깨는 작업은 매우 위험하다.아이들 중에는 망치에 손을 찧어 손가락이 마비된 아이도 있다.또 깨진 돌이 튀어 실명하기도 한다.하루 10시간씩 돌을 깨면 우리 돈으로 500원 정도 번다.이 마을에 아이들은 4살쯤 되면 강가에 앉아서 돌을 깬다.루빠 역시 그랬다.이 다큐멘터리에 보면 2살 정도 밖에 보이지 않는 아이가 돌망치를 들고 돌을 깨면서 논다.태어나면서 본 그 일을 앞으로 그 아이도 평생할 것이다.마을은 온통 돌가루 먼지로 회색이다.아이들은 거기서 일한다.루빠에게는 양팔이 없는 동생이 있다.이 아이는 돌을 깨지 못하니 아빠가 일하는 곳에서 새처럼 앉아서 미안함을 달랜다.다큐멘터리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무의미한 이 작업에 운명을 걸수 밖에 없는 상황을 지옥에 빗댄다.8살 짜리 루빠가 그런 말을 한다.

"글도 모르고 가난하니까 돌을 깨야해요 이게 내 운명이에요"

8살 짜리 아이 입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니...

다큐멘터리는 유엔아동권리 조약을 수시로 비춘다.즉 아이들의 노동을 금지한다는 규약이다.프로그램은 네팔 정부가 이 조약을 지키기 위해 아무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뉘앙스를 풍기며 끝을 맺는다.그런데 문제가 그렇게 단순할까?

제레미 시브룩의 <다른 세상의 아이들>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만약 당신이 따뜻한 마음과 동정심으로 충만하여 '아동 노동'을 없애는 것이 '선'의 실천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그리고 또 그런 '정언명령'을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다면. 이 책 <다른 세상의 아이들>을 읽어보아야 한다.제레미 시브룩은 19세기 산업태동기의 영국과 20세기 방글라데시 아이들을 교차편집하여 비교한다.19세기 당시 생활상을 묘사한 글들과 오늘날 남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풍경은 놀라울 만큼 유사성이 있다.

저자는 산업 혁명기 전부터 빈민 아동들의 노동이 이용되었다고 말한다.그리고 산업혁명기에 와서 아동 노동은 노예 노동을 대체하여 높은 수익성을 올리는 토대가 된다고 말한다.말썽많고 통제하기 힘든 노예 대신 순응적인 아동들이 그자리를 대신한 것이다.그리고 그 때 부터 이미 아동 노동에 대한 논쟁들이 있었다고 말한다.즉 '아동 노동폐지론'과 '아동 노동보호론'이다.제레미 시브룩은 '아동 노동폐지론'이 지극히 서구적 아동관에 바탕을 둔 가치라고 말한다.우리가 상식적으로 믿는 '아동'은 서구 근대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개념이다. 아날학파의 대가 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이 입증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결국 서구 모델은 '노동 없는 유년기'라는 근대적 관념을 창조한다.그련데 대부분 방글라데시 같은 빈국에서 아동 노동이 금지되면 어떻게 될까? 불행히도 이는 한 가족의 '생존권'을 뺏는 결과를 낳는다.온 가족이 하루 종일 일해야 겨우 먹고사는 마당에 아이들의 일을 전면적으로 금지시킬 수 없다는 점을 상식적인 휴머니즘이 잊고 있다는 것이다.미국 의회에서 아동 노동에 의존한 의류사업을 금지하기 위해 실시한 '하킨 법안'은 아동 노동 금지가 아무리 욕구는 강할지라도 그렇게 무턱대고 실시할 수 없는-훨씬 섬세한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하킨법안'이 강제되면서 빈국에서는 일종의 '풍선효과'가 발생했다.아이들은 의료공장에서 쫓겨나서 더 열악한 공장으로 향하거나 거리로 흘러들어갔다.아이들이 더 비밀스럽고 열악한 곳에 더 대항력없이 스며들게됨에 따라 아동 노동을 금지하겠다는 법안의 취지는 무색해지고 말았다.

제레미 시브룩은 아동 노동이 발생하게 되는 원인을 역사적인 가난,빈곤한 교육체계,세계화,그리고 소비주의를 꼽고 있다.서구는 이런 문제를 제공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외면하고 서구적 가족 규범을 유엔의 이름으로 강제하고 있다.저자는 많은 서구국가들 역시 전통 사회에서는 가족 경제 내에서 아동 노동을 일정 정도 인정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서구 국가들은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집단망각하면서 마치 자신들이 아동들의 도덕적 십자군인양 행사하고 있는 것 뿐이다.우리 나라의 50-60년대만 생각해봐도 이는 분명하다.우리 아버지 세대만 하더라도 시골에서 꼴베고 소 풀먹이는 등 가족 경제에 노동력을 제공했었다.저자는 서구의 양심이 실제로 핵심에서 종종 멀어지며 수혜자들에게 미칠 결과에 대해서도 잘 고려하지 않는다고 우려한다.

이런 논의가 이어지다보면 결국 '답은 성장이다'로 귀결되곤 한다.일정 정도의 성장 없이는 분명히 아동 노동 문제 해결에 답이 없어 보이긴 한다.그렇지만 이런 성장론자들은 주로 서구 성장 모델을 금과옥조로 삼고 그걸 따라하면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다.그렇다면 서구의 빈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절대 빈곤은 많이 벗어났지만 불행히도 서구와 그를 열심히 따라하는 우리나라에도 여전히 많은 빈곤층이 존재한다.요즘 밥못먹고 사는 사람이 어디었어라고 한다면 인터넷에 우리나라 결식아동 숫자를 검색해보면 된다.문제는 성장이 아니라 성장에 따른 분배이다.저자는 서구 성장의 역사가 정복과 통제의 역사였음을 잊지말라고 말한다.이런 류의 주장은 가난한 나라에게 실제로 가능하지도 않는 식민경제 모델을 따르라고 제시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다고 말한다.오히려 현재 불고 있는 세계화는 국가의 위치를 축소하고 빈부격차를 벌여서 아이들에게 일을 시킬수 밖에 없는 가난한 빈민들에게 더 큰 짐만 안기는 서구와 빈국내 기득권자들만을 위한 발전방향이라고 비난한다.

또한 사람들은 '교육'의 부재에 대해서도 말한다.교육수준이 높아지면 아이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지 않고 좀 더 나은 작업장에서 일할 것이라고 말이다.맞는 말이다.그런데 가난한 나라에서 교육받은 일부는 여전히 실업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학교에서 배운 것들은 실제 써먹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저자는 가난한 나라에서 아동 노동이 무조건 나쁘다고만 말하지는 않는다.그 안에는 사회적응을 위한 교육기능도 있고 실제로 그렇게 작용하기도 한다.아동 노동의 문제는 단순히 관념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생존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현재적 문제이다.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시각에서 많은 부분을 돌아볼 수 있어야한다.

제레미 시브룩은 아동노동 폐지론과 문화적 다원주의에 바탕을 둔 옹호론 사이에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안타까운 것은 저자가 이 균형점에 대해 딱부러진 도표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자칫하면 아동노동 옹호론이나 점진주의적 폐지론 (유해 환경하의 고된 노동에서의 해방)등이 아동노동 악용론자들에게 이용될 가능성도 다분하다.그렇지만 서구화된 우리의 시각에 아동 노동에 대한 조금더 균형잡힌 시각을 주는데 이 책은 도움이될 듯 하다.

또한 우리의 따뜻하지만 낭만적인 양심에 대해서도 돌아볼 수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조선일보가 기획한 our asia는 좋은 프로젝트였지만 결국 그런 상식의 지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그리고 이런 점도 생각해 볼 만하다.조선일보가 줄기차게 신자유주의의 선봉장으로 나서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거의 승리주의 전도사이다.그런 철학은 전 세계 아동노동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철학과는 상반된다.대신 조선일보는 our asia를 통해서 개인의 낭만적 인도주의로 문제를 치환시켜 버렸다.우리는 더 많은 돈을 내거나 더 슬픈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면서 무언가 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낀다.우리는 이를 통해 스스로 착한 사람이라는 안도감을 갖기도 한다.사실 이런 작업들이 전혀 무의미하다고 생각치는 않는다.하지만 그 안에 있는 또 다른 섬세함을 읽지 못한다면 결국 그 일은 자기만족을 위한 '비아그라'일 뿐이지 않을까?

제레미 시브룩은 그들을 다른 세상의 아이들이라고 칭했다.하지만 제목이 잘못되었다.그들은 우리 세상의 아이들이다.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하자.작은 기부가 그 첫 걸음일 수 있다.하지만 거기서 생각을 멈추지는 말자.그 순간부터 그 작은 기부는 우리의 위선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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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7-12-07 21:51   좋아요 0 | URL
그래도 저는 조선일보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사이비 꼴통짓도 물론 계속 하고는 있지만, 요즘의 조선일보 국제뉴스는 과거보다는 확연하게 업그레이드 되었답니다. 차원이 좀 다르구나 하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꼴통이라기보다는 '온정적 보수주의'에 많이 다가섰다고나 할까요. 저는, '구조적 모순'을 짚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푼두푼 돕는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무튼 드팀전님의 리뷰는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에도 동의하고요. 실은 이 책 지금 제 책상 위에 있거든요. 세미나 하려고 사놓았는데.. 지적하신 부분들 잘 생각해가며 읽고, 친구들과 토론해보겠습니다. :)

드팀전 2007-12-08 11:24   좋아요 0 | URL
글쎄요...이것 저것 많이 하는 것은 맞다고 생각합니다.그런 부분들이 하나 하나 잘못되었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예전에 나왔던 조선의 북섹션은 무척 좋아라하기도 했습니다.그 작은 부분들에도 불구하고 그 물들이 흘러서 무엇과 누구를 위한 어떤 방향으로 작용하는 바다로 흘러가는지 흐름을 보면된다고 생각합니다...저자가 한푼 두푼 돕는것을 의미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가끔 이런 글들은 그런 식으로 제단되는 것이 석연치 않습니다.또한 구조적 모순을 어떻게 해결하겠다고 말하지도 못합니다.저자가 진짜 이야기하고픈 바는 한푼 두푼의 '인간적감정'으로 보지 못하고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점을 인식하자는거겠지요....개개인의 인간으로서 도무지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게 구조라는 것 아니겠습니까..저는 거기에 자칫 그런 활동들이 '양심적 인간임을 보여주는 따뜻한 위선'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더하고 싶구요.기부를 하더라도 겸손하게 해야지요.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섬세'하게 말이지요.제레미 시브룩이 '기부'에 대해 말했다면 '섬세한 기부'를 하라고 했들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