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
피에르 아도 지음, 이세진 옮김 / 이레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피에르 아도의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는 흥겨운 책이다. 귀에 익은 발라드처럼 주선율이 확실하다. 화성들이 다채롭다. 미리 겁먹는 사람들을 위해 말하지만,  피에르 아도가 만든 이 책에서 독자들이 구절양장 그리스 산길에서 미아가 될 일은 없다. 물론 너무 방심하면 자기 화장실 안에서도 길을 잊곤 하는 것이 인간인지라 장담은 못하겠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할 정도로 피에르 아도는 그가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하고 싶었던 바를 명백하게-반복적으로, 수많은 증거들을 들어서- 이야기 한다. 

우선 이 책은 거스리의 <희랍철학 입문>같이 그리스 철학의 주요개념을 풀어놓고 있는 책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시작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플라톤의 '이데아'가 뭔지, 스토아 학파의 '아파테이아'가 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앟는다. 이런 개념들이 책 속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개념들을 설명하는 것이 이 책의 주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래 묵은 그리스인들이 자기의 용어로 만든 개념들에 아픈 상흔이 있었다면, 이 책은 '치유의 반창고'가 충분히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주 선율, 즉 주목적은 무엇인가?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 는 소크라테스 이전 부터 중세의 스콜라 철학까지를 주로 이야기 한다. 각 철학 학파들의 세계관, 자연관, 윤리관, 철학적 훈련등이 다루진다. 하지만 각 철학 사조의 차이점 보다는 고대 철학이 가진고 있는 공통된 점을  부각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그 공통점은 '삶의 양식'으로서의 고대 철학이다. 즉 '철학은 삶이어야 한다.' 라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생활양식으로서의 철학'이 오뎅탕의 대나무 꼬치이다. 그리고 피타고라스,소크라테스,플라톤, 에피쿠로스 뭐 이런 멤버들이 꼬치에 대롱대롱 끼워진 형형색색의 오뎅들이 되신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오뎅 심장을 관통하는 '막대기 자체'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이 책의 핵심이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철학을 한다는 것은 삶을 제대로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피에르 아도는 '철학'과 '철학담론' 을 구분한다. 우리가 '철학'시간에 배우는 모든 철학사조들은 '철학담론'이다. 이것은 '철학들'이라고 이야기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앞에 있는 '철학이란 무엇인가?'. 수많은 대중 철학서의 첫장 제목 같기도 한 이말. 저자는 '철학'을 '실천하는 삶' 이라고 말한다. 특히 고대철학기에는 이런 '철학'과 '철학담론'이 구분되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이것이 분리되기 시작하는 것은 중세 시대- 초기 그리스도교의 영향이 빠져나가고 난 이후- 그리스도교가 갑자기 부상하면서 부터이다. 아도는 이런 취지에서 현대의 철학들,철학자들이 '이론화 경향'에 목숨거는 것에 대히 눈을 흘긴다. 고대 철학자들은 이성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삶을 추론해 냈다. 그리고 그것을 담론화하며 이와 함께 그들의 추론이 만들어낸 철학대로 살아나가려고 했다. 즉 이렇게 담론과 실천이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철학'이라는 말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극단적인예가 '소피스트'들이다. 그들은 말의 철학을 했을 뿐이다.

이쯤 되면 아도의 입장이 명백해졌다. 그렇다면 이제 두 가지를 더 첨부해 주어야 세속적인 이분법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을 듯 하다. 하나는 아도가 '실천의 철학'을 말한다고 '담론'을 필요없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결국 추론적 사고들을 정리하고, 논리화시키고, 정교화시켜서, 토론하여 교육하는 것이다. 아도는 '영성의 훈련'이라는 말로 고대 철학의 특징을 말한다. 현대 이론이 고담준론화 되어 있기 때문에 '거대 이론'이나 '담론' 이라는 말만 들어도 적대시 하는 태도는 기실 전혀 '철학'적이지 못하다. '담론'과 '실천'은 새의 날개처럼 우리들이 '더 나은 인간'이 되게 하는 철학의 목적에 기여한다.  다음으로 '실천'에 대한 부분이다. 이 '실천'이라는 것은 가끔 '행위'와 혼동되기도 한다. 아무래도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가져다 준 사이드 이펙트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도가 말하는 '실천'은 거리에 뛰쳐 나가 구호를 외치는 '실천' 을 말하지 않는다. 또 '아는 것을 실천하자' 라는 의미의 '물리적 차원'의 실천만을 뜻하지도 않는다. 오해를 살 수 있는 말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해 보자.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실천적인 삶이 필연적으로 타인들을 향하는 것은 아니다. 행동으로써 발생하는 결과들을 노리는 생각들만이 '실천적인' 것은 아니다. 정신적 활동과 자기 내에 목적을 지니며 그 자체의 관점으로 개진하는 성찰들이 그 보다 훨씬 더 실천적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철학은 '정리적 생활양식'이었다. 그외에도 고대 철학에서는 '높은 곳에서 바라보기'와 같은 정관적인 태도가 장려된다. 이 들이 궁극적으로 이런 '거리두기'를 통해서 다다르고 싶었던 것은 무었인가? 이 점이 중요하다. 그것은 어떤 이에게는 '선'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신'이었으며, 어떤 이에게는 '궁극적 쾌락'이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자기 감찰'로서의 자기 윤리학의 덕목이다. 즉 궁극적인 선에 다다가기 위한 개인의 절제와 금욕, 자기 훈련을 목적에 둔 '내먼적 실천형식'이다. 그리고 이들이 누구인지도 중요하다. 이들은 그리스 인이다. 그리스 인들은 '현재지향적' 이었으며 또 '실용적'이었다. 그들은 폴리스를 중심으로 누구보다도 더 '정치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들 철학자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바는 '타인과의 대화'이다. 플라톤의 거의 모든 저서가 대화로 이루어져있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스텔레스의 '실천'을 세속적으로 '내면으로의 소거' '타인과 세계에 대한 외면'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관적 태도'는 마치 현실의 지평을 떠나서, 관념의 즐거움만을 택하라는 것 처럼 해석하는 보수주의적 태도가 있다. 마치 '순수예술'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열정처럼 그것이 현재의 기득권에 아무런 해를 주지 않고,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충분히 열린 마음으로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면의 성찰' 만을 무 가운데 자르 듯 뚝 잘라서 강조한다. 이것은 코끼리의 다리를 잘라서 '이것이 코끼리의 실체다' 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무뢰한 짓이다. 세속적으로 말해서도 마찬가지다. '내면의 성찰' ,'영성의 훈련'을 위해서 소크라테스는 거의 거지처럼 살았다. 좀 극단적인 견유주의자 디오니게스는 노숙자였다. 유물론적인 에피쿠로스(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이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였다. 고병권이 번역하여 나와 있다.) 역시 '쾌락'을 '감각적 쾌락'과 '궁극적 쾌락'으로 나누고 후자를 쫓기 위해 금욕을 실천했다. 금욕이 덕목이었던, 스토아 학파는 말할 것도 없다. 거의 모든 그리스 철학은 '내면적 성찰'을 위해 '자기 절제'와 '금욕'을 요구 했다. 그런데 '타인에 대한 관계성'도 없고, '자기 절제'와 '금욕'도 없이, 쓸 것 다 쓰고, 누릴 것 다 누리며 현재의 감각적 세계의 모든 혜택을 배불리 누리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론'만을 빼먹어 쓰는 짓은 졸렬하고 무지한 짓이 아닐 수 없다. 그건 '철학'도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똥떵어리'일 뿐이다. 

피에르 아도의 말을 인용해 보자

철학의 실천은 개별적인 철학사조들의 대립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 우리의 '세계 내 존재','타인과의 존재'를 의식하려는 노력이며, 메를로 퐁키가 말한 것 처럼 '세계를 보는 법을 다시 배우고" 보편적 시각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 시각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개별성을 초월하고 타자의 입장에 설 수 있다.

고대의 철학적 삶은 항상 타인에 대한 관심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겠다.  

(프리드먼을 인용하여) 현대의 현자는 그토록 많은 심미주의자들이 혐오감을 보이며 외면했던 인간들의 하수구를 외면하지 않는다.

피에르 아도식으로 말해서 우리 시대의 '철학자'란 누굴까 잠시 생각해봤다. 단지 어떤 담론을 만들고 그에 대한 학자적 양심을 거는 수준을 말하는것이 아니다.(지금까지 이야기했는데 아직도 철학자를 그렇게만 말한다면, 내가 글을 친절하게 이해시키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내면적 성찰'을 거쳐 '존재' 자체와 '삶'을 일치되게 만든 분들이다. 결국 우리 시대의 선생이라고 할 만한 분들, 장일순 선생, 전우익 선생, 권정생 선생....그리고 자연의 법을 거르지 않고 그에 맞춰 자연적 농법을 실천하는 농부들.. 이런 분들이 고담준론의 철학책 한 권 제대로 쓰지 않았지만 철학자들이 아닐까 싶다.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하자. <고대철학>이 읽기 좋다는 이야기다. 이 책을 읽다보면 왠지 '동양 철학'과 유사한 점을 느끼게 된다. 피에르 아도가 윤리학을 중심으로 그리스 철학을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책 말미에 아도는 '보편적 스토아주의'라는 개념을 꺼낸다. 즉'고대 그리스 철학'에 담긴 생각들이 지역성과 시간성을 넘는 보편성을 띤 것이 아닐까 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보편적 스토아주의'라고 하는 것에 대해 긴 설명을 하진 않지만 이것은 고대 인도, 중국의 철학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우리는 서양 철학을 공부하다 학문적으로 동양학을 배운 학자보다 오히려 더 유리하다. 한국인의 삶은 알게 모르게 이런 동양철학의 전통하에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고대 그리스 철학이 모두 올바른 삶이란 무엇인가를 위해 '죽음'에 대해 성찰하고 논리적 추론을 만드는 과정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에피쿠로스학파의 경우 '죽음'을 '무'이라고 설명한다.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자면 '죽음' 이후는 '삶의 영역'이 아닌 '비시간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궁극적으로 '현재의 생에 대한 집중'을 요구하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 역시 '삶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삶은 흘러간다' 는 식으로 '현재에 대한 집중'을 요구했다. 이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내면에 대한 집중'과도 같은 말이다.

우리는 이런 태도를 익히 알고 있는 공자의 대화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논어> 선진편에는 계로와 공자와의 대화가 나온다.

계로가 귀신을 섬기는 것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사람을 섬기지 못하며서 어찌 귀신을 섬기리요'라고 답한다. 이어 계로가 죽음에 대해 묻자 공자는 '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리오' 라고 답한다.

또한 '그리스 철학'이 '영성훈련'과 '공동체의 안정'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동시에 이루어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대학의 가장 유명한 구절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가끔 보수주의자들이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 '수신도 못하는 주제에'라고 하지만 그들은 <대학>이 이 개념들을 순차적으로만 배치한 것이 아닌 것을 모른다. 그리스 철학 역시 개인의 의식을 감찰하는 것과 이것이 더불어 사는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쳐야 하는 지에 대해 동시에 고민했다.

이 외에도 고대 철학 내내 강조되는 '높은 곳에 자기두기' ,'금욕', '감각적 세계에 대한 부정' 같은 개념들은 노자와 장자의 철학을 끊임없이 연상시킨다. 우리들은 알게든 모르게든 중국 고대철학의 세계관에 친숙하다. 그런 차원으로 보자면 서양 학자를 흥분시켰던 '고대 그리스 철학'과 '동양 철학'의 유사성 같은 것들이 책을 더욱 편안하게 만날 수 있는 문화적 자원이 된다.

이럭 저럭 피에르 아도의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야기 한 듯 하다. 사족 같지만 피에르 아도는 말년 푸코의 '그리스로의 회귀'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보냈다. 이것은 이 책의 서문에도 잠깐 언급된다. 푸코의 '자기 배려'라는 개념이 자신의 '영성 훈련'이라는 개념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프레데리크 그로가 쓴 <미셸 푸코 진실의 용기>에 보면 아도의 푸코 비판의 핵심이 나온다. 아도는 푸코가 "자신의 윤리적 모델을 실존의 미학으로 규정하면서 너무 단순한 자기 양성을, 다시 말해 20세기 말의 새로운 댄디즘 버전'을 제안했다고 비판한다.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 의 행간에도 나오듯이 아도는 고대인들의 자기 변형이 자기 퇴각이 아니라 자기 극복과 보편화를 중요시 하고 궁극적인 '일자'에 대한 합의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푸코가 자기 수양을 말하면서 결국 개인이 지향할 세계와 공동체 전체를 놓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미셸 푸코 진실의 용기>의 공저자인 장프랑소와 프라도 역시 고대 철학사 입장에서 만 본다면 푸코의 텍스트 축소와 생략이 지적될 만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피에르 아도 역시 고대 철학의 과학적 양상을 축소하고 고대 철학을 주로 윤리적 소명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지점을 염두해 두면서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본다면 더 넓은 바다로 나가기 위해 필요한 장비를 하나 더 갖춘 마음으로 길을 나서는 든든한 기분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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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8-10-28 16:53   좋아요 0 | URL
흥미진진한 리뷰에 힘을 얻어 도전해 봄직한 책입니다
다음달 주문에는 추천해 주신 사막이 들어갈 예정이에요

드팀전 2008-10-28 17:48   좋아요 0 | URL
<사막>은 6-7년전에 봤습니다. 그 맘 때 제가 책 선물로 많이 주었던 것이 <사막>과 <눈먼자들의 도시>였습니다. 주제 사라마구 책은 이후에 입소문을 통해 인기를 얻어서 왠지 기분이 좋았습니다. <사막>도 품절 상태다가 이번 노벨상 수상으로 다시 인기를 얻지 않을까 싶네요. 사막 위에 나타난 청색 인간들인가...하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피에르 아도의 책도 좋습니다.

로쟈 2008-10-29 00:19   좋아요 0 | URL
아도가 <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이란 책도 쓴 게 있더군요(영역돼 있습니다). 한번 소개된 책의 반응이 좋아야 계속 나올 텐데요...

드팀전 2008-10-29 11:56   좋아요 0 | URL
영역...^^...우리말 번역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2008-11-24 1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8-11-25 09:21   좋아요 1 | URL
아..그러시군요. <반고흐효과>도 잘 읽었습니다.곧 아도의 책을 또 만날 수 있게되나요
 
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
H.D.F. 키토 지음, 박재욱 옮김 / 갈라파고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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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인은 극단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스인이 중용을 말할 때면, 조율된 현에 대한 생각이 그의 머리에서 결코 떠나지 않았다. 중용은 긴장의 부재와 정열의 결핍이 아니라, 참되고 맑은 음을 만드는 올바른 긴장을 뜻한다.  ..<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p375)

키토의 <The Greeks>는 1951년에 출간된 그리스 입문서이다. 

반 백년이 흐른 시점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입을 타고 있으니 이 분야에서는 '고전'이라고 해도 크게 나무랄 사람은 없을 듯 싶다. 말장난처럼 들리겠지만 이 책은 '그리스 고전을 읽기 위한 고전적 입문서' 인 셈이다. 앞에 인용했던 글은 이 책의 맨 마지막을 장식하는 말이다. 아름다운 글이다. 지난 여름 뜨거운 흥분의 물결이 가라앉은 시점에 다시금 큰 울림을 갖을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지금도 그대로 적용된다. 미국의 금융위기를 '신자유주의의 종말' 내지는 '퇴출'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는-그 마음의 간절함이야 알겠지만- 후쿠야마가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선언한 것 만큼이나 경솔하다.

<The Greeks>(우리말 긴 제목보다 이 원제목이 더 강렬하다.)는 고대 그리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철학사를 논하는 책은 아니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에 대한 사회문화사책이며 역사책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논하는 것은 그리스적 의미에서 '철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철학'책이라 말해도 좋다. 키토는 이 얇은 책을 통해 고대 그리스인들이 어떤 세계를 살았고, 어떤 사고관을 가지고 살았는지를 밝히려고 한다.

책은 모두 12장으로 되어 있다. 해당 주제별로 크게 모아본다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4장 까지는 고대 그리스의 기초를 만든 그 '이전'의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의 핵심부분은 5장 -9장로 보여진다. 5장의 주제가 '폴리스는 ...이다' 이고 9장의 주제가 '폴리스의 몰락을 가져온 원인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키토의 <The Greeks>에서 가장 중요한 한 단어를 꼽을 수 있다. 그것은 '폴리스' 이다. 다른 말로 하면 키토는 '그리스인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폴리스를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후 10장에서는 앞선 과정을 통해 살펴본 그리스인들의 세계관을 몇 가지로 정리한다. 11장과 12장은 부수적인 이야기들이다. 그렇지만 또 가장 논쟁이 많이 되기도 하는 주제들이다. 신들에 대한 해석문제, 여성, 노예 등과 그리스 시민과의 관계 같은 것들 말이다.

키토는 독자들에게 그리스를 바라볼 때 조금 더 '다양성'을 갖고 바라봐주길 요구한다. 가끔 우리는 현재의 다양성과 복잡성이라는 사슬에 묶여 과거는 이보다 더 단순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광학기술의 발전처럼 현대의 연구가 발전할 수 록 이런 것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냐 아니면 '상식'이라는 함정 속에서 생을 마감하느냐의 차이이다.

 키토는 책 첫머리에서 부터 서구 역사의 시작처럼 느껴지는 고전 그리스가 '새로운 창조'의 시간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오히려 작가는 '새로운 르네상스'였다고 말한다. 북방의 헬레네스 문화와 남방의 크레타 문명이 가장 극적으로 융화되어 꽃을 피운 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리스 문화의 절정기라는 것이다.BC 5세기의 페리클레스의 시대가 그런 시기였다. 이런 그리스 문화의 혼종성은 그리스 예술의 위대성과도 연결된다. 이오니아와 도리스 기둥으로 기억되는 지적긴장감과 예술적 쾌락이 균형과 조화를 완벽하게 이루어낸 것이다. 흔히들 그리스 미학을 규정하는 '대칭' '균형' 같은 개념들이 이런 하이브라이드의 결과인 셈이다. 그리스인들의 변증법적인 조화의 미덕은 호메로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일리아드>는 통일성과 인과성, 도덕법칙의 존재를 밝힌 책이다. 물론 <일리아드>중 단 하나의 단어를 찾아야 한다면 그것은 '아르테'이다. 호메로스는 '아르테'를 향한 삶의 열정과 '숙명'이라는 이름의 생의 비극적 틀 사이의 긴장감을 아름다운 글로 남겨놓은 것이다.

키토가 요구하는 '다양성'의 시각에는 '그리스인들'에 대한 '다양한 시각'도 함께 들어 있다. 그는 '그리스인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종류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탈근대적인 감각의 개인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탈근대적 칼럼들에 영향을 받은 개인에 대한 강조가 아무런 철학적 맥락 없이 쓰이고 있다. '집단주의'에 대한 반대로서의 '가벼운'개인에 대한 존중말이다.) 저자는 그리스인들이 개별 행위의 특수성과 동시에 보편성을 동시에 중요시 했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남아 있는 그리스 비극들 모두를 생각해 보면 이는 더 설명이 필요 없다. 그리스 비극은 낭만적인 우울감만 주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 공동체적인, 다른 말로 하면 정치적 비극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인의 '개인성과 보편성의 결합'이라는 주제로 넘어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 둘이 상호관계를 맺는 장소를 이해해야 한다. 그곳이 바로 '폴리스'이다. 저자 역시 '폴리스'라는 말을 '도시국가'로 번역하는 것이 나쁜 번역이라고 말한다.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의 피에르 아도는 아예 '도시'라고 번역한다. '폴리스'는 -다른 고대 그리스어들과 마찬가지로- 현대에 적절한 번역이 없다. 그러므로 그냥 '폴리스'라고 쓰는 것이 가장 옮은 듯 하다. 폴리스는 기본적으로 작은 공동체이다. 플라톤은 이상적인 폴리스의 숫자를 시민 5 천명이라고 말했고, 이포다마스는 총 인구기준 10만명이라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 몇 몇 폴리스를 제외하고는 이 것보다 작았다. 왜 작아야하는가? 이것은 나중에 폴리스 멸망원인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선 폴리스는 친족공동체, 부족 공동체의 한 형식이 발전한 것이다. 그 안에는 물론 귀족들부터 노예까지 다양한 계층이 존재했다. 물론 중심은 시민이었다. 그들은 농업을 가장 중요시했으며 자급자족 경제를 유지했다. 요즘 만날 수 있는 다양한 '탈주형 공동체'들의 원형은 '폴리스'에 있다. '폴리스'는 정체를 유지하기 위한 각 내부 관계를 파악하기 용이했고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직접 참여가 가능했다. 즉 모두가 책임지는 공동체 말이다.

키토는 '폴리스'가 형성되는 몇 가지 지리적,역사적 요인들을 설명한다. 그렇지만 키토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폴리스 형성의 원인'은 '그들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정의를 실현하려는 소망, 덕을 고양하려는 소망을  '폴리스'를 통해 이루어 내길 원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폴리스'는 직접투표를 하고, 도편 추방을 했던, 단순한 '정치체제'가 아니다. 폴리스는 정치적, 문화적,도덕적 삶을 포함하여 공공의 삶 전체였다. 더 단순하게 도식화하자면 '그리스인은 폴리스다' 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을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으로 남겨 놓은 이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이 말은 곧 '인간은 폴리스에 산다' 와 같은 문장이다.

책의 중반부 7장쯤에 가면 고전기 그리스의 성쇠가 등장한다. 작은 폴리스였던 아테네가 성장해 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대학교 때 본 <플루타크 영웅전>을 다시 찾아보고 싶게끔 만든다.당시에 나는 낯선 그리스 이름들 때문이었는지, 사마천의 <사기열전>이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지금 다시 보면 또 다른 것들이 읽히리라.) 아테네가 그리스의 패자가 되는 것은 페르시아 전쟁에서의 승리 이후이다. 그리스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 '대 아네테 제국'을 꾸려나간다. 그렇지만 '통일 국가'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이유는 역시 '폴리스'에 있다. 그리스인들은 폴리스의 독립성을 깨고 싶지 않았다. 만약 대규모의 통일국가가 된다면 이것은 '폴리스'의 정체성과는 병립할 수 없는 적대적 모순관계가 발생한다. 직접 참여는 대의제에 자리를 양보해야 할 것이고, 이는 시민들의 자기통치보다는 참주등을 통한 지배-복종을 뜻하는 것이기때문이다.

키토는 실제 작동하는 폴리스를 근대적인 구분을 통해 말하는데, 이게 아주 적절하기도 하다. '아테네는 아마추어 국가다'라고 말이다. 잠시 생각해보자. 이 말은 짧지만 정확한 표현이고,또 함축적이다. 그리고 그 비극적 결말까지도 암시하고 있다.(이외에도 키토는 본인이 살던 영국을 배경으로 하긴 하지만 위트있는 표현을 자주 보여준다.) 플라톤이 '철인정치'를 말하고 아테네의 당시 상태를 비판 했던 것은 '폴리스'가 내재한 기본적인 모순들에 대한 비판인 셈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개선과 선을 추구하고, 도덕적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폴리스'가 무지한 사람들-소크라테스적 의미의-에 의해 그 기능이 부여받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문제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그리스인들의 '정체성'을 향한 열망은 시대의 움직임에 떠밀려 간다. 그리고 '폴리스'의 소박한 꿈은 그 자체 모순을 맞딱드리는 순간 붕괴 일로는 걷는다. 직접적인 계기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승리한 스파르타는 과두정을 실시하고 총독통치를 시행한다. 그리고 머지 않아 위대한 알렉산더의 마케네가 들이닥친다. 키토는 아테네가 패하는 계기를 내적인 원인에서 찾고 있다. 그는 고전 그리스 전성기 BC5 세기 페리클레스 시대와 BC 4세기의 데모스테네스의 시대를 비교한다. 그리스는 페리클레스 시대 이후로 잦은 전쟁을 통해 진정한 삶의 방식에 대한 물리적, 정신적 힘의 우월성을 잃기 시작했다. 특히 BC 4세기쯤에 이르면 '폴리스'는 정치적 무력증과 무관심에 빠져든다. 기토는 이 점을 시대적 대전환이라고 파악한다. 즉 삶에 대한 상이한 태도가 출현을 한 것이다. 즉 고전기의 그리스는 이제 지난 과거가 된 것이다. 저자는 희극 소재를 먼저 예로 든다. 과거 건강한 '폴리스'의 시대에는 희극도 그냥 장난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때가 되면 희극은 사적인 문제들에 대한 농담거리고 전락한다. 또한 정치에서 '전문가 그룹'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일종의 용병지휘관 들이다. 아테네는 전통적으로 시민개병의 전통하에 있었다. 그것이 또 폴리스의 삶이었다. 그렇지만 전쟁은 점점 더 많은 전략과 기술을 요하고 이에 따라 용병들이 자리를 잡는다. 이것은 비단 군사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런 변화는 '폴리스' 자체의 기반을 흔드는 것이기도 하다. '폴리스'에서 건강한 시민과 강건한 군인은 하나였다. 이것은 전쟁에서의 '효율성'과 '전문화'가 '폴리스' 와 양립할 수 없다는 반증이다.

철학사조의 변화를 살펴봐도 폴리스의 붕괴를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이점은 원인과 결과의 위치를 두고 다른 접근을 할 수도 있을 법하다. 테모스테네스의 시대는 견유학파와 키레네학파가 두각을 나타낸다. 이들은 '선에 대한 질문'을 한다. 과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절대선'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상정해 놓은데 반해 이들은 상대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이는 과거 '폴리스'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다. 과거 '폴리스'는 '절대선'을 상정해 두고 그에 대한 열정과 노력을 노래했다. 반면 새로운 시대는 세계관의 변화를 요구한다. 이들은 이제 '폴리스'라는 개념대신에 '코스모폴리스'라는 제국의 시대에 어울리는 윤리관을 갖는다. 지혜로움을 사랑하는 이들이 이룬 공동체는 지역적 한계를 넘어 인류라는 공동체로 대체되는 것이다.

키토는 그리스적인 것에 대해 책 말미에 정리한다. 풍부한 내용이지만 관심을 자극하는 차원에서 몇 가지 단어만을 열거하자. '사물의 전체성에 대한 감각', '건전한 균형', '이성에 대한 굳은 믿음', '실용적인 단순성', 규칙성과 균형에 대한 강한 감각' '수학의 발견' '변하지 않는 실재와 정신의 위대함' 등이다.

<The Greeks>가 나온 것은 앞서 말했듯이 이미 50년을 넘겼다. 키토가 이 책을 낸 이후에 더 많은 인류학적 발견과 그리스에 대한 학문적 성과들이 축적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키토의 책 중 어떤 부분은 미흡하거나 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 상당히 있을 것이다. 경제적 토대로서의 노예문제나 여성들의 문제 등에 대해서 키토는 비교적 친그리스적인 태도를 취한다. 가끔은 현대와 비교하면서 그리스에 면죄부를 주기도 한다. 이 지점들은 다분히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제들이다. 맑스주의 미학자인 하우저같은 이들은 그리스 예술과 민주주의가 노예들의 물적 기반 위에 있음을-물론 그가 상부구조의 자율성을 외면한 것은 아니지만- 상기시킨다. 키토는 이보다는 오히려 삶에 그리스인들의 청빈한 태도와 여가에 대한 욕구등을 강조한다. 그 외에도 키토의 시각들에는 그리스에 대한 많은 애정과 서구 우월주의와도 같은 성격들이 간간히 들어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역자의 말처럼 그리스 전문가의 그리스에 대한 깊은 애정의 흠결정도로 봐줄 수 있을 만한 수준이다. 그런 꼬투리로 이 책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역시나 품격 낮은 짓이다. 

'그리스' 하면 무너진 신전의 모래기둥이 떠오르고, '철학의 고향' 같아서 딱딱한 부리의 앞머리를 만지는 느낌을 갖는 이들에게 키토는 말한다.

"그리스인은 남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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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은 없다 - 마거릿 대처의 생애와 정치
박지향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마거릿 대처의 생애와 정치에 대해 읽은 것은 사실 다른 목적에서이다. 실은 스튜어트 홀의 <대처리즘의 문화정치>를 읽기 위한 정지작업이다. 스튜어트 홀의 책을 사두고 서가에서 잠시 대기시켜놓고 있었던 어느날, 우연히 동아TV에서 하는 <세기의 위대한 여성-대처>편을 보게되었다. 프로그램을 보다가 문득 '대처리즘'에 대해  상식적인 몇 가지 외에 별반 아는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다 아는 '작은 정부, 민영화, 노조 탄압, 포클랜드 전쟁' 정도가 내가 떠올리는 단어들의 전부였다. 결국 그 프로그램은 책 읽기의 순서를 살짝 바꾸었다. 스튜어트 홀의 <대처리즘의 문화정치>- 원제목은 The Hard to Road to Renewal: Thatcherism and the Crisis of the Left-를 읽고 뭔가 새롭게 하려면 '대처리즘' 을 꼴보기 싫다고 통과시켜버려서는 곤란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실 나는 시간에 덜 쫓긴다면 프리드먼이나 하이에크가 쓴 주요 저작들도 보고 싶다. 당신같은 좌파 끄트머리가 왠 하이에크냐구 ? ^^  웃어야지 뭔 말이 필요하겠냐.)

'대처리즘'의 그림자 처럼 따라다니는 말이' 뉴 라이트'다.(한국의 뉴라이트도 결국 그 연원을 거기서 찾을 수 있다.) 또한 '대처리즘'을 '신자유주의'의 킥 오프 사인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나는 가끔 '신자유주의 절망론'을 겪는 사람들 중에 의외로 '신자유주의'가 마른 하늘에 날벼락 치듯 뚝 하고 떨어져서 앞으로도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공포의 괴물처럼 생각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아니면 그 반대로 '신자유주의'에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공개화형 시키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을 보거나 말이다. 나는 두가지 생각 모두에 동의할 수 없다. 그건 대중적인 경제학 책 몇 권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대처는 '대안은 없다'라고 말했지만, 불행히도 그 담론 역시 시대의 산물이고 역사와 함께 변해가는 무엇일 뿐이다. 좌파 학자인 마샬 버먼이 자주 인용하는 마르크스의 말을 떠올려보자. .... "모든 굳어진 것들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 미국발 금융 위기를 두고 신자유주의의 몰락이니 뭐니 호들갑이다. 나는 그렇게 금융자본주의가 쉽사리 꼬리를 내릴 것이라고 생각치는 않는다. 하지만 단 한가지 'There is no alternative' 라는 지배담론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희망의 단초쯤은 주리라고 생각한다.

대처리즘이 착종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전후 영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합의의 정치'시대가 있었기때문이다. 그 시대는 경제 사상으로 보자면 '케인즈주의의 시대' 이고 정치적으로 보자면 '변혁의 시대'였다. 대처가 이 시대에 축적된 모순들을 일거에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것이 '대처리즘'이고 '신자유주의'의 시작이다.

대처리즘의 핵심은 '시장 자유주의'와 '복고적 도덕주의' 이다. 그녀는 영국에서 사회주의의 잔재를 없애는 것에 정치인생을 걸었다.세계의 제국이던 영국이 전후 2등 국가가 된 것은 전적으로 노동당의 사회주의적 정책과 그에 기본적으로 동의를 해 준 보수당의 태도때문이라는 것이다. 사회주의적 잔재를 없애는 데 대처가 쓴 처방은 '자유방임주의'였다. 이를 통해 대처는 너덜 너덜 해진 '유니언 잭'을 다시 당당히 세우고자 했다. 대처는 기본적으로 금욕적인 사람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자수성가한 사람이였고, '확신의 정치가'였다. 대처가 사회이념적으로 '빅토리아 시대로 돌아가자'라고 외쳤던 것은 근면,성실, 자존과 같은 영국적 보수가치를 회복하는 것 만이 국가의 보호아래 타락와 우유부단함으로 추락하고 있는 영국을 살리는 길이었다고 본 것이다. 

 그녀는 급진적인 보수이념을 가지고 영국 재건에 나선다. 그녀가 주창했던 것들은 '대처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이제 상식책에도 나올 만큼 유명한 것들이다. 그리고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MB정권 하에서 하나씩 보여지고 있어서 신문을 펴기만 하면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너무 똑같은 것들이어서 따로 적기가 귀찮을 정도다.

대처는 일단 시장의 복원을 외친다. 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국가는 그런 기회만 제공하면 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작은 정부를 지향했고  이어서 규모의 민영화 작업이 벌어진다.  물론 국영기업의 방만한 경영과 비효율성은 어떤 형태로든 관리되어야 한다. 대처는 과감한 매각과 통폐합을 감행한다. (이 과정에서 실업자수는 대폭으로 증가한다.) 대처는 흔히 말하는 기본적인 공공재의 개념조차 무너뜨릴 만큼 과감한 민영화를 시도했다. 수돗물의 민영화도 대처시대에 나온말이다. 철도 민영화는 대처 시기에 토대를 닦고 메이어 시대에 이루어졌다. 대처에게 '노조'는 '무찔러야할 적'이었다. 대처 집권기에 중대한 싸움이었던 광산노조와의 싸움에서 대처는 '철의 여인'의 이미지를 확실히 보여준다. 그녀는 기마경찰까지 동원해서 광산노조를 제압한다. 사석에서 '어떻게 세금을 내는 국민에게 기마경찰을 보낼 수 있소이까? 라는 질문에 대처는 더 당당히 '다음번에는 탱크를 보내려고 했습니다.'라고 맞선 일화는 유명하다. 대처는 대학 교수들과 공영방송 BBC를 무척이나 싫어했다고 한다. 객관성의 이름으로 자신의 정책에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MB정권이 한국의 공영방송에 대해 갖고 있는 시각과 유사하다.)

대처의 혁명적 목표는 단지 시장에 있지 않다는 것을 저자는 말한다. 대처는 기본적으로 의식혁명까지를 염두에 두었다. 좌편향적인 영국의 전통을 우향우 시키는 것말이다. 대처는 여기에 대중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섞는다. 임대 주택의 판매, 민영화한 공기업 주식에 대한 참여, 소득세의 감면등을 통해 '계급'의 개념을 '소비'의 개념으로 바꾸어 버린다. 즉 모두가 쁘띠 브루주아가 되게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노동계급 중 다수가 주식을 소유하고, 경기 회복과 더불어 생활수준이 나아진다. 대처 임기 말기에는 전통적인 계급 투표가 상당시 약화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여전히 비율상으로는 계급투표율이 높기는 하지만 유의미한 변화인 것은 사실이다.

이 책에는 대처의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언급을 한다. 개인적으로 대처가 임기말로 갈 수록 제왕적이고 독선적인 성격상의 특성을 보였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결국 대처를 보수당 내부에서 내치게된 결과를 낳았다는 것 등을 말한다. 또한 소득세의 감면등으로 상징되는-현재 종부세 인하를 떠올리는- 대처의 경제정책들이 빈부격차가 벌어지게 되었다는 점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이 지점에 시선을 하나만 꼽아 넣어도 책 몇 권이 나올만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비판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이 극심한 빈부격차의 발생 아니던가? 저자는 물론 간략하게 이부분을 짚고 넘어간다. (처음부터 이 저자의 이념적 지향을 알고 있기때문에 길게 말할 필요는 없을 성 싶다.) 이런 부분들은 자주 등장한다. 포틀랜드 전쟁 부분을 살펴보자. 포클랜드 전쟁은 보수당 내에서도 반대하는 이가 많았던 사건이다. (우리나라 독도의 주권문제와는 엄청나게 다르다.) 아르헨티나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으로 영국 함대가 출동한다. 이 섬은 영국에서 1만3천 KM떨어져 있고 아르헨티나로부터는 480KM 떨어져 있는 영국인들도 잘 모르는 그런 섬이었다. 영국 정부는 전통적으로 그 섬의 영국계 주민들에게 아르헨티나와의 동화책을 권장하기도 했다. 영국 정부의 군비절감 목적으로 남대서양 함선이 물러남에 따라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국내 정치적 목적의 침공을 감행한다. 외교적 채널을 더 가동해보자는 일각의 의견은 뒤로 하고 대처는 함대를 급파하고  압도적인 승리를 챙취한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그것은 '영웅적인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평가한다. 그 전쟁에서 255명이 죽고 777명이 부상당했다.또 아르헨티나 측은 650명이 죽었다. 대처의 '영웅적인 행동' 때문에 말이다. '철의 여인' '전사 여왕' 대처를 만들기 위해서 그들이 죽었어야 할 지는 의문으로 남겨두자. 저자는  결과적으로 대처의 '가장 멋진 순간'으로 평가한다. 과연 그것이 '가장 멋진 순간'일 수 있을까? 

책의 저자는 마지막에 '우리에게 대처는 언제나타날 것인가?' 라며 한국판 대처의 출현을 염원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대처는 필요하지 않다. 대처의 영국과 현재의 한국은 억지로 짜맞추고 싶겠지만 두 나라는 논의의 출발점부터가 다르다. 한국의 뉴라이트는 지난 시절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한다.마치 대처가 '합의의 시대'를 척결해야할 사회주의 시대라고 말하며 칼을 간 건 처럼 말이다. 당시 영국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케인즈-베버리지 모델이 공론으로 모아져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상황인가? 노조 가입률이 10%수준인 나라가 노조가 정치를 좌우하는 나라라고 말한 과거 영국과 비교될 수 있을까? 계급 정당의 역사가 수백년이 된 나라와 이제 꼬리를 감추며 계급정당임을 말할 수 있는 나라가 동일선상에서 비교될 수 있을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주의 종주국'과 아직도 식민지의 영향력이 잔존하는 나라가 같은 나라일까? 거기에 또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대처가 주장하는 '도덕' 조차 없다. 아마 한국의 보수주의자가 먼자 도래를 기대해야 할 것은 '대처'라기 보다는 '도덕'일지도 모른다.

 대처가 실업자 수의 폭동임계점 수준까지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변혁을 위한 성장통이라고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그 사회에 축적되어 있는 사회안전망의 덕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사회적 안전망은 멸치잡은 그물처럼 촘촘한 것은 기대하지도 않는다.최소한 고래정도는 막아야 하지 않아야 그물 아닌가? 그런데 한국의 앞바다에는 널널한 그물 피해 떠다니는 고래들이 물반 고래반이라고 한다. 대처가 '이제는 개인이 개인을 구제해야한다' 라고 말할 때 한국은 해방 이후 부터 계속 '개인이 개인이나 가족이 구제'해 왔다. 오죽하면 아이들까지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고 노래하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대처'를 염원하는 것은 도대체 앞뒤를 제고 하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하기사 대처 역시 '살놈 살고 죽는 놈이야 어쩔 수 있나' 하는 식이었으니 별로 신경쓰일게 없을 것이다. 그런 걸 '시장 자유주의'라고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야만적 자본주의' 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다. 

 언젠가는 우리 역사에도 대처같은 이가 필요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역설적이게도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진정 더 필요한 것은 먼 훗날 말을 타고 나올 대처 같은 이가 비판해야할  '대처의 적들' 아니겠는가? 비루한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실업자들을 구제하고, 비정규직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고,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억압을 제도적으로 방어하고, 노인이나 장애인들에게 삶을 이어갈 복지서비스를 제공하고, 시장이라는 무한경쟁에 진입하지 못하거나 낙오한 사람들을 품어낼 수 있는 그런 지도자 말이다.   

이 책에서 -아마 스튜어트 홀도 그런 의미였겠지만- 내가 읽고 싶었던 것은 대처리즘 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 한국이 처한 현실이 흘러가는 방향을 미루어 짐작하고 그에 대한 좌파진영의 대처를 생각해보기 위해서이다. 대처가 적들을 어떻게 자신의 상승요인으로 활용하는지, 그리고  선거 과정에서의 전술, 대중 정서의 어떤 맥락들을 짚어내는지 하는 점들은 한국의 진보진영도 타산지석해야할 부분이 많다. 한가지 책에서 좀 아쉬운 것은 포틀랜드나 광부노조파업,인두세,유럽연합 문제등에 대해 좀 더 깊은 이야기까지 들어갔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대처리즘의 몇 가지 기본 아이템을 반복하는 것보다는 그런 고찰들이 더 책을 풍부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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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0-08 16:54   좋아요 0 | URL
박지향의 대처 전기를 드디어 읽으셨군요.스튜어트 홀의 책이 어려울 것 같아서 제가 대신 읽은 것은 레이건과 대처의 시대 때의 역사 쓰기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하비 케이<과거의 힘_ 역사의식,기억과 상상력>이었습니다.그다지 두툼하지 않은 책이니 한 번 참고해 보세요.

드팀전 2008-10-08 17:27   좋아요 0 | URL
네...강유원의 소개로 알게된 책이었습니다.관련 페이퍼도 한 장 올렸더랫지요.책에 관련된 건 아니었구요..지금도 보관함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아요.감사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09 16:40   좋아요 0 | URL
강유원 씨가 교수가 되기 전에 추천하던가요? 개인적으로도 아는 분인지요?

드팀전 2008-10-09 18:23   좋아요 0 | URL
전 강유원씨의 얼굴도 잘 모릅니다.^^ 지금 교수인가요? 그 분이 <미디어 오늘>에 고정적으로 글을 올리는데 책소개를 겸해서 말이지요. 그 기사에서 본 책이 노이에님이 말하신 하비 케어의 <과거의 힘>이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10 15:20   좋아요 0 | URL
예...한동안 회사원으로 지내다가 교수자리가 나서 이제 제도권으로 갔다네요.하비 케이의 그 책에 나오는 레이건의 사고방식에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더군요.얼마전 대처도 칠레의 피노체트 구명운동 나서고 그랬죠.얼마 안 있어서 피노체트는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지만...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전망
박호성 지음 / 책세상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자본주의의 쓰디쓴 바다에 사회 개량적인 레몬을 한 병씩 부어서 사회주의의 달콤한 바다로 변화시키려는 환상적 노력일 뿐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민주주의는 동네 아이들이 발로 차는 깡통같다. 우파는 ' 기회주의적 빨갱이'라고 해드락을 하고 좌파는 '개량주의적 변절자'라고 암바를 건다. 그 역사적 기원도 깊다. 앞에 인용한 로쟈 룩셈부르크가 직접적인 예이다. 좌파의 '백가쟁명' 시대라고 할 만한 제 2인터내셔널 시기,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 개혁인가? 혁명인가 ?> 에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와 카우츠키의 '개량주의적 중도파'에 대해 파워슬램(로프반동을 이용하여 아래에서 들어 360도 던지는 기술)을 시도한다.

링 위에서의 난투극, 그리고 그 승부의 결과는?  20세기를 어떤 형태로든 변형된 자유민주주의, 현실사회주의(스탈린주의), 그리고 사회민주주의로 한 지붕 세 가족을 만들었다. (여기서 한 지붕은 유럽의 지붕이다.)

한국이라고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80년대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고민한 '좌파' 들은 마르크스주의 학습에 열기를 보였다. (이 열기의 문제점은 이 책에도 지적되고 있다. 학문적 조급증에 대한 비판이다.)  90년대 스탈린주의의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그 비판과 대안으로 '사회민주주의' 에 대한 관심이 잠깐 일었다. 하지만 역시 '깡통' 취급 받았다. 윤건차는 <한국 현대 사상의 흐름>에서 사회민주주의자로 '?' 를 쳐놓았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법하다. '사회민주주의'의 '개량주의' 에 대한 '좌파'내의 공격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한국 좌파 내의 '이념적 선명성'에 대한 강조와 그에 따른 분위기는 '개량'에 대해 날끗을 세웠다. 그래서 '개량주의=변절자' 라는 도식으로 공격하기 용이하다. 이 책의 저자 역시 현실에서 '개량주의'가 그런 의미로 이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최근 몇 년전 부터 '사회민주주의'의 연대도 생겨나고 숨어 있던 '사민주의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일종의 '징후' 같다. 패배를 모르는 신자유주의의 광풍과 그 전도사(아니..장로던가) MB정권이 오히려 '사민주의' 에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다. 다른 말로 하면 '더이상 대안이 없어보인다'는 절망적인 현실인식이  '사민주의'라는 '개량'에 대해 한 번쯤 더 관심을 갖게 한다. 그리고 이런 추세는 앞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 좀 지나치게 나아가는 사람들은 'MB만 아니라면'주의자가 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사민주의'를 현실적 대안으로 생각 하게끔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혁명적 변혁'에 대해 현실적으로 정리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민주의' 를 비판하는 하나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사민주의'는 이미 '자본주의의 패배불가능성'에 대해 인정한 것, 즉 '대안부재론'을 받아들인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사회민주주의'는 국정 교과서에서도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의 하나로 그려진 적이 있다. 물론 국정 교과서는 '사회민주주의' 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들이 애용한 말은 '복지국가'였다. 그래서 지금도 진보적인 대중들에게 '복지국가'는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우리가 도달해야할 목표쯤으로 여겨진다. 이 말은 다시금 정리해 보면, (정치적으로 엄밀하게 분석하기 힘든) 한국의 진보대중들은 '사회민주주의'에 '친화적'이다. 독일 사민당의 사민주의 전형이 된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살펴보자. 대략적으로 이 책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전망>에 나온 부분을 정리하면

1) 결정론적 사고,세계관적 동질성의 폐기  2) '혁명'을 거부하는 개량주의  3) 부르주아 질서 안에서의 가치 실현 4) 의회주의와 사회적 법치국가에 대한 신봉  4) 사회적 전 영역의 민주화 5) 사회적 국가 추진 5) 사회적 다원주의 6) 혼합경제

듣고 보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진보적 대중들은 '그래. 나는 이제부터 사회민주주의자 내지는 사회민주주의적 지향'이라고 말할 수 도 있을 것 같다. (궁금하면 이 강령을 가지고 "예/아니오" 테스트를 해보시라..^^...재밌는건 어느 정당의 '강령'을 가지고도 예스가 많게 나온다.^^ 강령이란게 중요한 부분이지만 신학적이기도 하기 때문에 )

사민주의에 대한 논쟁을 여기서 다 하는 것은 무리다. 이 책은 주로 제 2인터내셔널기를 중심으로 사민주의의 탄생과 논쟁의 역사를 설명한다. 이런 논쟁은 따지고 보면 그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현재도 인터넷 등에는 그런 논쟁이 치열하다. 진보신당 내에서 평등파 그룹의 도발적 문제제기와 주대환의 '구좌파 척결론' 등이 그런 것이다.  나는 그동안 여러 번 한국 정당운동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이 '진보정당의 대중화'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의 한 자릿수 득표율은 한국정치의 기형적인 보수화의 영향이 크다.  하지만 그걸 욕만 한다고 아침이 오는가?  내 개인적 생각이지만 과거 운동권중심의 강철대오는  '진보정당의 대중화'에 저해가 된다. 정당은 하나의 정파가 아니다. 한 정당의 강령은 중요하지만 한 정당 안에는 다양한 이념그룹이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해야만 한다. 내가 민주노동당을 또는 진보신당을 지지한다고 집행부나 당의 어떤 방향에 반드시 박수를 보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물론 그 차이의 임계점이 오면 갈라 설 수 도 있다. 반대로 당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안고 가야하는 의무도 있다.  1891년 게오르크 폰 폴마의 개량주의적인 '엘도라도선언'에서 당에 대한 부분을 나는 현실정치적 입장에서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종파와 학파는 절대성과 함께 일하며, 그들의 요구를 실행가능성과 상관없이 내세우기만 하면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일하는 정당은 그렇게 행동할 수 없다...."

이 말에 동의하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종파와 학파의 비판도 겸허히 수용되어야 한다. 민주노동당의 분당과정에서 회사의 한 직원이 내게 물었다. "어...진보신당 지지하시나 봐요. 그러면 PD파인가 보네"  "...^^;"  무식한 친구가 신문 보고 웃자고 한 이야기였지만 발끈 해서 '아...무슨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에는 전부 NLPD만 있는 줄 알아요." 라고 대답했다. 거기에는 사민주의자, 자율주의자, 생태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진보적 자유주의자, 반 한나당주의자 ...별별 사람이 다 있는거에요"  난 지금도 이 생각이 맞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종의 도가니탕 같은 민주적인 '당'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보정당이 성공하려면 '사회민주주의당'을 선언해야하는 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진보정당의 대중화' 에 분명히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꼭 그래야하는 가에서는 아직 고민 중이다. 왜냐하면 당 강령이나 지향때문에 진보정당 대중화가 느려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가 라는 문제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진보정당들이 대중화에 성공하려면 분명히 좀 더 '대중적인 시각'과 '대중적인 정치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2002년 <사회비평>이 주도한 대담에서 진중권은 '진보정당의 대중화'라는 측면에서 과감히 '사민주의정당론'을 이야기했다. 당시 진중권은 '민노당이 당당히 사민주의 강령'을 내걸야야 된다는 쪽이었다. 역사 속에서 유일하게 현실 정치에서 성공한 '좌파' 이념이 '사회민주주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진중권= 사회민주주의자' 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어떤 이념에 사람이나 현실을 맞춘다는 것은 그리 권장할 만한 일은 아니다. 대충 이 정도 이야기하면 진보적 인사라면 '사회민주주의'를 해야할 것 같다. 그렇다. 야만적 자본주의 하에서 그리고 사회적 안전망이라고는 부실한 한국에서 공공성의 확보와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데 반대할 이유가 뭐가 있나 싶다. 이 책의 저자도 말하는 '이념적 과격성'은 주머니에 넣어두고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념적 과격성'에 대해서는 나도 참 할 말이 많다. 

 사회주의와 사민주의 사이에 '국가'문제는 중심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었었다. 이걸 좀 빌려오자.  진보적인 사람들 중에 의외로 '국가 폐지론자'가 꽤나 있다. 지난 시절 '국가폭력'에 대한 '상흔' 때문이다. 또 '국가주의/국가'를 구분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좌파의 경우 마르크스의 '국가폐기론'(그는 국가를 부르주아 지배도구로 보았으니) 과 '포스트주의'의 영향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장 많은 것은, 이것 저것 다 떠나서  존 레논의 '이메진' 에 영향을 받은 ' 무정부주의적 낭만주의자'이다. 그런데 여기에 자신의  '진보'를 물리적으로 결합시킨다. 그러면 이제 완전히 이론상 모순적이 된다. '현재 폭력적인 자본주의 하에서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공공성을 높이기 위해 국가의 기능이 강화되어야 한다.'( 차원은 다르지만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나온 것 역시 독일 사민당 내의 '이론적 과격성'과 '현실적 개량' 사이의 이론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베른슈타인은 후자의 이론적 통일성을 모색해 낸 것이다.)

뭐 어쩌라는 것인가? 나올 수 있는 궁색한 답변은 '장기적으로 국가를 없애고 그 전까지는 이윤에 눈 먼 사기업을 통제하기 위해 국가의 기능을 강화한다.'  차라리 사민주의처럼 '국가=중립' (이것도 말도 안되는 접근이다.) 하는게 낫지 않을까 싶다. 공상적 사회주의는 맑스가 비판한 것이기도 하다. 책의 저자는 '이념적 과격성'이 좌파 내에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주로 '골방좌파'들을 타깃으로 하였지만 이것이 꼭 '골방' 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가장 혁명적인 사람들은 술자리에 있다. 그들은 가끔 '전쟁으로 전 인민의 절반'을 죽이기도 하고, '청와대에 확 불질러서 MB를 쥐포'로 만들기도 한다. 뭘 못하겠는가?   

잠시 삼천포로 갔다 왔다. 다시 '사민주의'로 가자. 그럼 복지국가를 만들 '사민주의'에 대한 확신이 들었는가? 그렇다면 ....그런 확신에 찬물을 끼얹자.

책의 저자 역시 사민주의의 자체 모순에 대해 스스로 누차에 걸쳐 말한다. 여러번에 걸 등장한다. 사민주의자가 스스로 '자기모순'이 있다고 강조한다면 이건 그냥 겸손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자본주의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을까?', '사회적 분배를 위해 자본주의 소수에 호소해야하는데 그것이 가능한가?'  저자 역시 사회민주주의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제3의 길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사회민주적 개량주의는 '사회주의의 탈을 쓴 자본주의'에 가깝다고 말한다. 물론 사회민주주의 내부에도 우파와 급진파가 나뉠 수는 있지만 기본적인 모순은 동일하다. 전통적인 사민주의에 대한 지적처럼 사민주의는 '분배' 차원에만 집중하고 있다. '복지' 라는 개념 자체가 '평등한 분배'이다. 그러면 여기서 잊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코헨은 이렇게 말한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중에 대한 착취의 결과에 대해서는 민감하지만 착취의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사민주의를 주장하는 저자 역시 이 말이 사회민주주의의 실체를 정확히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사민주의자들도 공장내에서의 노동자들의 의사결정권 확충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자본가의 양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 결국 자본주의와의 대결을 최소화하려는 사회민주주의의 모습 말이다.

그외에도 현실적 사민주의적 성취를 이루어냈던 역사적 상황에 대한 분석도 들어 둘 만하다. 사민주의는 경제적으로 보자면 케인즈주의적 실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정성진의 <케인즈주의인가? 21세기 사회주의인가?> 에서는 '사민주의'가 유럽에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세계경제의 호황기'에 두고 있다. 그러나 70년대 석유파동이후 세계 경제는 불황의 그래프를 따라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민주의의 중심이 될 '노사의 평화로운 조합주의'가 이루어지기 쉽지 않다. 또한 그 경제 활성화 시기는 영구전쟁경제(냉전)에 힘입은 바 크다. 다시 재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금융자본주의의 세계화에서 일국내의 사회민주주의적 실천 역시 예전만큼 편안하지 못하다. 스웨덴 모델같은 경우도 이미 절정을 지나간 것이고 그것이 다시 반복될 수 있는 정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스웨덴 모델에 대한 사이크의 분석은 재미있는 사실을 보여준다. 스웨덴의 순사회적 임금이 '제로'에 가까왔다는 것이다. 즉 벌어서 세금내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합의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뜻하는 바는 또 있다. 바로 사회복지정책의 재원이 실제 노동자의 지갑에서 전부 나왔다는 것이다. 자본/노동의 계급적 소득재분배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 내부의 분배라는 점이다.  

하여간 우리 사회에서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를 논하는 것은 다분히 이론적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의미가 없지는 않겠으나 현실 정치와 정세 그리고 변화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  그런면에서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어도 사회민주주의적 실천은 꾸준히 이루어지는데 동의해야만 한다. 홍세화는 사회주의/사민주의의 논쟁에 대해 쓸모없는 짓이라고 말한다. '서울에서 부산 가는데, 대구 쯤 가서 어디로 갈라질 지 이야기해도 되는데 미리 창원갈지 마산갈지 가지고 싸운다.'라고 말이다. 다시금 말하지만 이념적인 틀이 현실을 먼저 재단해서 준비해 놓을 수는 없다.  

책에 대한 이야기 하자. 책 제목이 책의 중요한 두 부분을 나누어서 이야기 해준다.<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전망>. 즉 하나는 사회민주주의의가 역사적으로 걸어온 길(배경, 태동, 성장, 논쟁, 실패, 재도약, 국가간 비교 등) 을 보여준다. 그리고 후반부는 우리나라에서 사민주의의 전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책 서문에서 '저널리스틱한 접근'과 '아카데믹한 접근'을 병행하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이론의 상아탑 주의대신 이론의 '공설시장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취지에 얼마나 충실했는가는 독자의 몫이지만 비교적 쉽게 쉽게 씌여진 것은 사실이다. 특히 전반부 '사민주의의 역사'는 간략하면서도 이론적 쟁점들을 일목요연하게 쓰고 있다. 이 점은 책의 후반부에 대해서도 기대를 갖게 한다. 그렇지만 책 후반부는 바람빠진 풍선 같다. 이 글들이 '민노당의 의회진출'이라는 지지난 총선의 흥분된 분위기를 바탕으로 씌여진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보다는 글이 주목하고 있는 부분이  '사회민주주의적 실천'이라는 것에 이르지 못하는데 궁극적 한계가 있다. 저자는 결론에서 '제 2의 민주화 운동'이나 '국가보안법 폐지' '복지국가 체계와 3생의 정치' 등을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회교과서의 마지막 장같은 모습이다. '이래 저래 하여 밝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자."라는 식이다. 전반부의 거대한 이론적 영역을 일괄적으로 요약하는 것이-이미 나와 있는 사실들이니까- 학자가 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사회민주주의의 역사 부분만 요약할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 전반부만 읽도록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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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8-09-22 16:43   좋아요 0 | URL
'로자 룩셈부르크'인데요.^^

드팀전 2008-09-22 17:32   좋아요 0 | URL
뭐 별로 차이를 모르겠는데요.^^ 그렇게 쓴다면이야..ㅋㅋ

로쟈 2008-09-22 21:26   좋아요 0 | URL
'로자(Rosa)'와 '로쟈(Rodya)'이니까 차이가 없는 건 아니죠. 안 그래도 제가 오해를 많이 받아서...^^;

드팀전 2008-09-23 09:14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그런 의중인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라스콜리니코프님

노이에자이트 2008-09-27 15:40   좋아요 0 | URL
사회민주주의 논쟁은 19세기말 20세기 초엔 일급의 논쟁가들이 가담했기 때문에 그 때를 다루면 박력이 있지만 최근의 지나치게 개량화된 뒤의 역사는 다소 맥이 빠지니까 저자로서도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저도 말은 많이 들었지만 북구 사민주의는 아직 책을 안 사 놨거든요.계급과 민족문제를 다룬 책들도 룩셈부르크-베른슈타인-카우츠키 논쟁,레닌-카우츠키 논쟁,그 뒤에 반파시즘을 둘러싼 코민테른 논쟁 이런 식으로 다루지 현대사민주의를 다루진 않아서 따로 전후 사민주의에 관한 책은 사지 않았어요.유용한 글 잘 읽었습니다.

드팀전 2008-09-29 09:11   좋아요 0 | URL
^^ 주요한 논쟁의 근거들은 그 시기에 거의 다 다루어진 듯 합니다.그나마 대처리즘에서 어떻게든 살겠다고 나온 '제3의길'논쟁이 -친자본경향에 더 가까와진 지평에서 나온- 최근의 사민논쟁이 아닐까 싶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2 12:37   좋아요 0 | URL
최근에 트로츠키 주의자인 토니 클리프 부자가 영국노동당,특히 블레어를 엄청나게 비판하는 영국노동당사를 펴냈더라구요.굳이 좌익이 아니라 해도 블레어같은 사람이 노동당 출신이라니 이상하죠.대처의 아류인 것 같은데...

드팀전 2008-10-02 15:28   좋아요 0 | URL
사민주의 역사에서 보면 영국 노동당 역시 기본적으로 비마르크스주의 의회주의에 뿌리를 두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대안이 없다'는 담론적 지배상황에서는 '대처리즘'과 '노동당 내 우파담론' 사이에 그런 친화성도 나올 수 있을 법합니다. 결국 '연속적 개량'은 소실점에서 그들이 싸우려는 대상과 동일해질 수도 있다는 교훈을 주는 것 같기도 하구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3 00:39   좋아요 0 | URL
40-50년대의 영국 노동당 브레인이던 토니,라스키 등의 책을 읽으면 노동당 냄새가 꽤 났는데 제3의 길인가 그런 것은 통 노동당스럽지가 않아서 뭐 저래...하는 생각만 들죠.대처가 요즘은 망령이 들었다네요.상태가 점점 심각해져가고 있답니다.철의 여인도 세월엔 어쩔 도리가 없나봐요.

드팀전 2008-10-03 21:03   좋아요 0 | URL
^^ 대처는 집권할때부터 망령이있던것 같아요. MB정권의 기본적정서는 대처리즘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물론 당시 영국과 현재의 한국이 '공공성'에 대한 정치권의 인식, 세계 경제의 상황,사회영역의 발전정도등에서 현격히 차이가 나기 때문에 같은 취급을 할 수는 없지만요.
그런 점에서 MB와 현정권실제들은 더 골때리는 거지요. 전 개인적으로 진보의 연속 패배를이해하기 위해 대처리즘(레이거니즘)의 당시의 성공-물론 그 실패가 지금 드러나고있는 금융 시장의 붕괴지요-을 살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의외로 신자유주의가 어느날 갑자기 떨어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변하지 않을 경험이라고 절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역사 속에서 힘들의 작용에 의해 특정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한시적 경향이라는 점을 알게되면 '영원한 절망'같은 것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텐데...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 역사가 주는 교훈에 대해 늘 민감해야 할 듯 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03 22:21   좋아요 0 | URL
뉴라이트가 대처리즘을 숭배하면서 대처 전기도 새로 나오고 하더군요.이 방면엔 박지향 씨가 앞장서더군요.박 씨도 한때 대처를 싫어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런 게 아니라면서 대처리즘을 옹호하는 선두에 섰죠.이 양반이 노동운동과 영국사를 전공해서인지 상당히 치밀한 논리를 전개하죠.대처리즘의 기본적인 경제정책을 알아보려고 맥아더 점령 당시 일본에 실시한 덧지라인을 공부하고 있어요.대략 재정과 세금정책을 알기 위해서입니다.덧지는 트루먼의 전권위임을 받고 일본에 파견되어 강력한 자유주의 정책을 실시하는데 대처리즘과 유사한 것 같아요.

드팀전 2008-10-04 16:01   좋아요 0 | URL
^^ 안그래도 제가 지금 기파랑에서 나온 박지향의 책을 보고 있습니다. 스튜어트 홀의 책을 보기 위한 앞 단계로 보는 성격이 강하지요. 몇 달 전에 동아TV에서 하는 <세기의 위대한 여성>중 대처편도 관심을 가지고 봤었지요.대처와 관련 있는 사람들의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박지향의 책 서문에도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예전에 자기는 영국좌파에 영향을 받았지만 지금은 아니다..그리고 젊은 날 믿었던 진실을 아직도 믿는 다는 건 철부지들이나 하는 짓이다..라는 식으로 '좌파유아론'같은 뉴라이트들의 상투적 글을 서문에 쓰고 있습니다.
뉴라이트의 어머니로서 대처를 다루고 있지만 대처의 한계에 대해서도 살짝씩 언급합니다. 박지향이 칭찬하는 특징들은 다른 측에서 보면 공격할 수 있는 대목이 되기도 하구요.

제가 걱정하는 것은 MB정권의 연속집권입니다.대처의 보수당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들은 비판하고 '타산지석'하지 않으면 한국에서 그럴 가능성이 짙어보입니다.어쩌면 이 정권 말기에 발생할 사회적 혼란을 더 강력한 '대처리즘'으로 돌파하려는 세력들도 나올 수 있겠구요. 대처가 계급적 갈등을 '애국주의'와 '전통적 도덕관'으로 돌파했던 것 처럼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4 23:35   좋아요 0 | URL
홀이 이데올로기론을 다루는 학자라 좀 어렵더라구요.그가 쓴 대처리즘의 승리를 다룬 책도 저는 못보고 그런 건 계급배반 투표로 생각해서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정도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박지향 씨의 제국주의라는 책을 보면 영국의 최근 제국주의론이 소개되어 있는데 간단히 말하면 제국주의가 착취했다는 학설은 잘못된 것이다...제국주의 노선을 걸었다고 영국이 이득본 것도 없다...그런 식이더군요.하여튼 영국인들도 제국주의 정당화하는 기질을 아직도 못버렸어요.존 키건의 2차대전사를 보면 용감한 전투는 다 영국군이 하고,영국은 침략전쟁을 안 했다나...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노골적으로 하더라구요.

드팀전 2008-10-05 23:27   좋아요 0 | URL
이모티콘으로 비웃음은 어떻게 그려야하는지...^^
대처가 이용한 것이 '대영제국'에 대한 향수를 북돋는 '애국주의' 였잖아요. 보수당 내부에서도 반대하던 '포틀랜드 전쟁'같은 것에 국민여론은 흔쾌히 동의를 했지요. 뉴라이트들의 전술은 '우기다 보면 언젠가는 진실이 된다' 라는 장기적 계획인 것 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07 16:58   좋아요 0 | URL
뉴라이트 계간지 시대정신 여름호에 박지향 씨가 대처의 경제정책에 대해 논문을 썼는데 결론은 우리나라에도 그와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했더군요.외모와는 달리 영 과격한 주장을 하더라구요.

드팀전 2008-10-07 18:13   좋아요 0 | URL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지는군요.^^ <해방전후사 재인식>을 비롯해서 교과서포럼까지 역사를 중심으로 한 뉴라이트의 난동이 시끄럽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8 16:34   좋아요 0 | URL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은 직접적인 뉴라이트 냄새는 안 나는 논문도 많아요.탈 민족주의 계열의 논문들도 있구요.<시대정신>은 좀 더 우파 이데올로기 냄새가 강한 글이 많이 실리죠.
 
고양이 대학살 - 프랑스 문화사 속의 다른 이야기들 현대의 지성 94
로버트 단턴 지음, 조한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좋은 역사가는 전설 속의 식인귀를 닮았다. 인간 육체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이라면 그는 자신의 제물을 그곳에서 발견할 것임을 알고 있다."    .... 마르크 블로크, <역사를 위한 변명>.

 서재에서 오랫동안 숙성된 책이다. 예상했겠지만 오크향이 묻어나지는 않는다. 향 싼 종이에선 향 냄새가 난다는데 서재에 꽂혀있던 책에서는 그냥 책 냄새만 난다. 그래도 생활의 향기가 묻어서인지 새 책 냄새는 사라졌다.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은 편안하게 추천할 만한 책은 아니다. 이 책의 방법론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상업적으로 활용된 각 종 <조선의 0000>,<기담00> 시리즈들에 비하면 말이다. 이런 류의 역사책은 서점가에서 인기다. 하나의 트랜드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이 책들은 조선시대나 근대화 초기의 기담이나 일상사들, 또는 숨겨진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를 통해 '태종태세'의 조선이 조금 더 화사한 색깔로 다가온다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이다. 그렇지만 그런 트랜드에서는 결코 로버트 단턴의 진지함과 깊이 있는 성찰을 만나기 쉽지 않다. 대중적인 역사서와 역사학계에 한 획을 그은 저작을 단순비교하는 것 부터가 사실 잘못일 지도 모른다. 더우기 18세기 프랑스의 문화사, 그 중에서도 망텔리테의 역사를 거내들기 때문에 녹녹치가 않은 것이다. 

로버트 단턴의 역사적인 방법론은 일종의 고전적 아날학파 비판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숫자와 통계, 구조와 장기분석에 치중하는 전대의 방법론에 그는 돋보기를 들고 들어간다. 일종의 미시사로 이야기할 수 있다. 역자 서문은 단턴의 방법론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1) 밑으로부터의 역사, 2) 민속학과 인류학의 결합 ,3) 문화 흐름의 쌍방향성이 그것이다. 쉽게 말하면, 갑돌이, 갑순이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 사료로서 가치가 없어보이는 자료들로 부터 그 시대와 그 이상을 읽는다는 것. 한 시대의 문화가 지배/피지배의 일방통행이 아니라 그 안에 문화적 소통이 있었다는 것이다. <고양이 대학살>의 첫번째 이야기 '마더 구스 이야기' 에서 마지막 '문화적 소통'의 적절할 예를 찾을 수 있다.

 '마더 구스 이야기'는 동화책에 나오는 '빨간 모자 소녀'의 원텍스트이다. 늑대가 집에 있는 할머니를 잡아먹고 빨간 모자를 기다린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것은 원래 구술전통 속의 민담이다. 이것이 '마더 구스'라는 형태로 기록된다. 이 와중에 텍스트는 변형된다. 원래 구술 전통의 민담들은 '잔혹극'에 가깝다. 로버트 단턴은 이 책들이 귀족들이 글로 쓰고 향유하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작가들은 어디서 이 이야기를 들었을까? 로버트 단턴의 탁월한 점은 이렇게 소실점으로 향해 치밀하게 돋보기를 밀어서 어떤 결론을 끌어낸다는 것이다. 그 귀족작가들은 어린 시절 유모들 손에 컸다. 그 유모들은 평민이거나 하인출신이다. 그녀들은 그녀의 할머니로 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다. 이것이 단턴이 말하는 문화적 교류의 한 예이다. 조금 차원을 달리하지만 부르주아들의 생활문화에 귀족들이 동화되어 가는 과정도 그런 엘리트들 속에서 일어나는 교류의 한 예가 된다.

이 책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2장 '노동자들은 폭동한다: 생 세브랭 가의 고양이 학살', 4장 '한 경찰 수사관은 그의 명부를 분류한다: 문필 공화국의 해부' ,6장 '독자들은 루소에 반응한다: 낭만적 감수성 만들기를 흥미롭게 읽었다.

2장 '고양이 학살'은 인쇄소 직공들이 부르주아에 대한 불만을 그들의 애완고양이를 죽이고 이를 공연하며-그들의 용어로는 '복사'하며 -즐기는 모습을 그린다. 일종의 민중저항의 극장판 형식을 보여준다. 로버트 단턴은 '이것을 '민중저항의 현명한 예'이다.' 라고 승리에 가뿐 목소리로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축하연만 즐기는 것은 얼마나 얄팍한 일인다. 단턴의 텍스트에 대한 질문은 더 다양하다. 그는 텍스트를 통해 가내수공업이 공장제로 바뀌어가던 시기의 장인과 도제의 사회정치적 상황에 대해 읽어낸다. 임금노동자들의 발생과 함께 장인들의 위상이 흔들리는 과정도 그린다. 또한 임금 노동자들이 상당히 유동성을 갖고 있다는 것도 읽어낸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고양이를 죽였을까에도 질문을 던진다. 단턴은 이것이 '보수적 안정성과 체제 유지'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을 말한다. 카니발의 사육제와 순종의 사순절의 배치를 통해서 말이다. 또한 직인들이 부르주아를 공격했던 방식이 '명예훼손'이었다는 점도 의미있게 짚는다. 그들은 부르주아에게 보복당하지 않을 선을 경험적으로 파악하고 그 안에서 문화적 저항을 실천한다. 거기에는 박장대소의 웃음이 있다. 그리고 이 웃음은 결정적인 봉기의 순간까지 상징적 단계로 국한된다. 로버트 단턴은 직인들의 이 상징적 저항의 소재인 이 잊혀진 웃음이 저 멀리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까지 이어질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4장 '문필공화국의 해부'는  요즘말로 하면 한 정보과 형사의 목록을 분석한 글이다. 조세프 데므리라는 사람은 문필가들에 대한 정보동향을 파악한다. 그 안에는 현재 우리에게도 익숙한 디드로, 몽테스키외, 루소, 볼테르 등도 포함된다.1750년 당시 30대 중반의 작가들이 프랑스의 문필계를 쥐고 흔들었다. 또한 이들은 파리와 프랑스 북부쪽에 주로 거주했다. 그들 중 대다수는 관료들이나 하급관리들의 자제들이었다. 농민 출신은 거의 없었다. 단턴은 대충 이런식으로 통계적으로 당시 지식인들을 그려낸다. 그리고 또 하나 씩 더들어가기 시작한다. 데므리의 자료는 건조한 보고서 형식이 아니라 자기만을 위한 목록이었다. 그렇기때문에 데므리의 개인적 평가나 주변 평가등 비객관적 요소들이 들어있다. 그 만큼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지식인층에 대해 다층적인 접근이 가능하게 되었다. 데므리는 마치 영화<타인의 취향>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문필가들과 어느 정도 세계관을 공유하기도 하고 그들을 비판하기도 또 동정하기도 한다. 데므리의 자료를 통해 우리는 당시 문필가들의 경제적 토대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또 그들이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경찰의 목록은 이후 계몽주의라는 혁명을 주도할 새로운 계층인 지식인층을 바라보는 당대의 어떤 시각을 읽을 수 있게 한다. 마치 지식인의 출범을 알리는 '서막'같은 인상말이다. 책을 읽고 있으면 이런 움직임들 속에서 계몽주의가 시작되는구나..혁명이 시작되는 구나..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6장은 긴즈부르크의 <치즈와 구더기>처럼 상인  장 랑송의 독서주문 목록을 분석하는 글이다. 그는 종교,문학,아동교육 등등 다양한 장르의 책을 구매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이 아동 교육책이다. 처음에는 '자상한 아버지였군'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점차 읽다보면 이것이 어떤 한 세계관과 동화된 주문목록이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부르주아 상인 장랑송이 동화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장 자크 루소'였다. 그의 도서목록에는 루소의 책들이 많다.그리고 단턴은 랑송의 개인적 편지글을 공개한다. 그 안에서 랑송은 끊임없이 '루소'에 대해 묻고 그 소식을 궁금해한다. 요즘말로 하면 일종의 '루소 팬'이다. 이걸 밝히기 위해 단턴이 이 글을 쓴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단턴은 루소의 소설<신엘로이즈>를 둘러싼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루소가 보여주고자 했던 '작가-독자'의 관계( 이것은 일종의 루소의 세계관이기도 하다.)의 새로운 지평을 말한다. 루소는 일부 식자층과 귀족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신엘로이즈>를 통해 도덕적 이상에 대한 동화를 독자에 요구했다. 그는 그만의 수사학적 방법을 통해 독자와 직접 소통한다. 마치 프로메테우스처럼 말이다. 그는 추상적 도덕성을 넘어서 일상에서 경험해야하는 도덕성의 터널로 독자를 빠뜨린다. 랑송과 이 책에 등장하는 수 많은 <신엘로이즈>에 대한 편지들은 이 책이 당시 폭발적인 명성을 누렸고 사람들의 삶에 어떤 자극을 도모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소설은 이것이 사실인가의 여부를 묻는 질문이 대다수를 차지할 만큼의 강력한 흡입력을 갖었다. 장 랑송은 '루소'의 열혈팬들 중 하나였고, 그는 루소의 메시지를 그대로 실천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그의 주문목록에 교육분야가 늘어난 것은 결국 루소의 '작가-독자'의 직접적 관계 맺음의 한 예가 된다. 루소가 글을 통해 그의 영혼을 열어놓고 독자들 역시 그것을 읽고 일상적 존재의 불완전성을 넘는 것이다.

로버트 단턴<고양이 대학살>의 결론에서 그의 역사방법론에 대해 언급한다. 앞에 말했던 아날학파에 대한 성찰로부터 시작된 길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그 한계에 대해서도 말한다. 하나는 증거의 문제, 또다른 하나는 표본성의 문제이다. 학자적 솔직함이다. 미시사에 대한 비판의 가장 큰 틀도 아마 이 정도 선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더 덧붙일 설명이 필요없을 듯 하다. 어떤 길을 진지하게 걷는다는 것은 그 길이 가진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다른 누구보다 더 성찰하면서 간다는 것이다. '나는 이 길을 가고, 이 길이 진리이니 그 외에 나는 모른다.' 는 학자이든 일반인이든 지양해야 되는 방식이다. 설령 내가 이 길을 가더라도 나는 길 위에 있으므로 계속 질문할 수 있다. 로버트 단턴은 그가 앞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이 '텍스트와 컨텍스트'사이를 오고가는 것이라고 솔직히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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