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 (전면개정판) -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조지 리처 지음, 김종덕 옮김 / 시유시 / 200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1.맥도날드는 어디에..

십여년 전 이야기다. 6시간의 비행은 계절을 바꾸어 놓았다. 시드니 공항은 드꺼운 여름의 열기 아래 있었다.나의 양 손은 이미 무거웠다. 거대한 슈트 케이스에 빼았겨 버렸기 때문이다.한국에서 입고 있던 네이비 코트는 어깨에 걸칠 수 밖에 없었다. 필리핀 인으로 보이는 택시 기사가 운전한 차를 타고 처음 가는 목적지로 향했다.제대로 영어학원 한 번 다녀본 적이 없었지만 메모해온 주소 덕에 목적지를 알리는데 어려움은 없었다.그러나 낯선 곳에서는 예상에 없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빌어먹을 택시 기사는 나를 목적지에서 20여 분 떨어진 곳에 떨어뜨려주었다.나는 이국의 폭염 아래서 양손에 슈트케이스를 끌고 코트는 어깨에 두르고 언덕길 즐비한 곳을 헤메기 시작했다.정작 문제는 배고픔이었다.그런데 걱정이 밀려왔다.도대체 어떤 음식을, 어떤 식당에 가서, 어떻게 주문하고 먹어야 할 것인가?  영어로 물어보는 종업원 앞에서 어리둥절하고 있을 나를 생각하니 미리 얼굴이 붉어졌다.그 때 갑자기 택시를 타고 오다가 본 '황금아치'가 생각이 났다.그렇다 나를 이 배고픔과 쪽팔림에서 해방시켜 줄 곳은 '맥아저씨'였다.나는 오던 길을 되돌아가면서 전단지를 돌리고 있는 청년에게 용기를 내어 물었다.

 "where is 맥도날드? "

나는 무려 그 청년에게 5분 여간 설명했으나 그 센스 없는 청년은 알아 듣질 못했다.내가 썻던 단어들....'햄버거.치즈버거...헝그리.코카 콜라".나는 나의 식민지 발음을 탓하며 이리저리 혀를 굴렸지만 그는 감을 못잡았다.결국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고 아무길이나 찾아갔다.그리고 바닷가 근처에서 '황금아치'를 만났다.죽으라는 법은 없는거다.

나는 뒤에 알았다.'맥도날드'가 이곳에서는 3음절이라는 것을...일본 애들은 6음절로 한다.

2.막스 베버와 맥도날드

패스트 푸드점 맥도날드와 맥도날드화는 비슷하지만 다른말이다.맥도날드화는 베버가 말하는 '근대적 합리성'과 유사하다.저자인 조지 리처는 '맥도날드화는 패스트푸드점의 원리가 미국사회를 비롯해서 세계의 더 많은 부분을 지배하는 과정' 이라고 말한다.맥도날드는 관료제의 원리와 자동차 조립라인의 원리를 결합시켜서 맥도날드화를 이루어낸 대표적인 상징이다.

맥도날화의 특징은 베버의 이론에서 차용된다.즉 베버가 근대적인 합리성의 특징으로 본 효율성,계산가능성,예측가능성,그리고 자동화를 통한 통제가 그것이다.거기에 저자는 맥도날드화가 갖고 있는 내재적 한계를 5번째의 특성이라고 말한다.그것이 '합리성의 불합리성'이다.

그렇지만 맥도날드화가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진 것은 아니다.또한 맥도날드나 포드때문 갑자기 생겨난 것도 아니다.조지 리처는 근대를 규정하는 관료제화,테일러의 과학적 관리,포드식 조립라인 등에서 패스트푸드 체인의 기반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맥도날드의 첫번째 특징 '효율성'은 빨라진 생활 속도와 가장 빈번하게 연결된다.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맥도날드는 메뉴를 간소화하고 주방을 공장으로 만들었다.즉 맥도날드가서 햄버거에 들어가는 고지를 미디엄으로 구워달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재료들은 모두 규격화되어서 자동차 공장 부품처럼 하나의 완성된 햄버거를 위한 조립라인을 흘러다닌다.소비자들도 먹는 즐거움 대신 빠른 효율성을 택한다.그 완벽한 부합으로 제시되는 것이 '드라이브인'같은 써비스이다.맥도날드 세계에서 효율성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고객에게 일시키는 것도 허용된다.우리가 '셀프 서비스'라고 하는 것들이 모든 자본의 이익을 위한 효율성에만 복무하는 것들이다.맥도날드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편리하고 효율적이라는 듯 말한다.그러나 실제 그 몫이 돌아가는 자들의 말일뿐이다.

맥도날드 세계의 두번째 특징인 '계산가능성'은 모든 것을 수량화하고 질보다는 양에 대한 강조를 부각하는 것이다.즉 속도,수량,크기가 맥월드의 이념이다.패스트푸드 말고 다른 예를 들어보자.가장 대표적인것이 '패키지 여행'이다.관광의 질은 중요치 않다.방문자 수와 몇 장의 사진을 건지느냐,몇 개국을 돌아다니느냐가 중심고려사항이다.'여행의 맥도날드화'라는 것이다.

'예측가능성'이란 것은 통일성과 표준화를 말한다.내가 글 첫머리에 낯선 곳에서 '황금아치'를 보고 반가왔던 것이 바로 소비자의 '예측가능성' 선호의 좋은 예이다.문제는 사람들의 본능적인 보수성향,안전 지향이 아니다.이것을 상업적인 환경이 이용한다는 것이다.예를 들어 '예측가능한' 놀이 동산 같은 것이다.안전요원,안전한 장비 등등의 이름으로 안과 밖을 구분한다.바깥은 범죄와 불안이 난무하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소비자들에게 보여줌으로서 안심시킨다.

'통제'는 말 그대로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을 기계로 대체하려는 자동화의 지향을 말한다.닭을 닭으로 키우지 않고 닭고기로 키우는 '공장형 농장' ,아이들을 쇼핑하는 좀비로 만드는 쇼핑몰,들여놓은 의료기계에 점점 종속되어가는 의료진...

조지 리처는 맥도날드화된 세계가 나쁜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또한 이것이 일순간 투쟁으로 없어질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맥도날드의 효율성은 분명 필요한 것이고 또한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사용되기도 하였다.그렇지만 이 안에 문제점이 있으니 이것이 '합리성의 불합리성'이다.맥도날드의 예를 들면 일반 식당보다 더 기다려야하는 줄서기 같은 것들이다.사실 맥도날드가 늘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것 만은 아니다.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맥도날드가 심어주는 환상을 그대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저자는 여기서 맥도날드 세계가 소비자들의 '오락에 대한 집착'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또 선도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엔터테인먼튼 사업이나 놀이공원화된 즐거운 먹거리,개인정보를 이용한 거짓 친근감 같은 것들이 예로 제시된다.이런 시뮬라시옹을 통해 맥도날드가 현실에서 없애버린 것은 바로 '마법'이다.마법은 예측불가능성이고 세계의 질적 소중함이었다.맥도날드의 애리한 현미경은 이를 산산히 파괴한다.이것은 세계의 동질화와 비인간화를 초래한다.

3.그 많은 맥도날드는 어디로 가나?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에서 베버의 합리화론에 기대어 설명하는 장면은 흥미진진하지만 조금 길다.구체적인 예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분량이 늘어났다.이것도 맥도날드적 속성인지 모르겠지만 조금 더 압축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개인적으로 책 후반부쪽에 배치된 '변화하는 세계속에서의 맥도날드' 장이 즐거웠다.'맥도날드화가 어떻게 구현되어 왔는가 보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맥도날드가 진화 하는지..앞으로 어떻게 될지' 가 더 현실적인 고민거리를 주기때문이다.'고품질화한 패스트푸드' '토착화된 맥도날드'같은 것들이다.조지 리처는 포드주의,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시대에 맥도날드가 어떤 위상을 갖고 어떻게 자기 변신과정을 취하는지 보여준다.또한 바뀐 세상에서 맥도날드가 어떻게 될는지도 예상한다.조지 리처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인가 아니면 후기 자본주의 문화>를 인용하여 맥도날드가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말한다.즉 모너니티와 포스트 모너니티의 연속성을 강조한다.조지 리처의 경우 조금 더 모더니즘의 입장에서 지난 세기를 주도했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근본적 변화가 없다라고 강조한다.개인적으로 이 뒷부분에 대한 분량이 조금 더 많았으면 하지만 한 권의 책에서 모든걸 얻을 수는 없는 법이다.

4.맥도날드는 감옥인가?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맥도날드에 대한 점진적이고 온건한 대응책들을 제시한다.그중에서 실천적 과제로 나오는 것들은 아주 귀엽기까지 하다."제목 뒤에 숫자 적힌 영화들은 보지 말자" "백화점에서 점원이 깜짝 놀라게 신용카드를 주지말고 현금을 내자" "돔구장이나 인조잔디 야구장에 가지말자.대신 보스턴 팬웨이파크나 시카고 리글리 필드 구장에 가자" (뭔말인가 할 수도 있겠다.이 책을 보지 않았고 미국 메이저 리그를 본 적이 없으면 당연하다.) 저자는 맥도날드화에 대응하는 세가지 형태를 말한다.맥도날드 문화를 즐기는 '벨벳 감옥' ,맥도날드를 디스토피아로 보는 '쇠감옥'그리고 얼마든지 진출입이 가능한 '고무 감옥'이다.저자가 제안하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실천 영역 안에서 맥도날드를 접하자는 것이다.맥도날드가 전세계적인 현상이라는 것과 그것외엔 답이 없다고 패배주의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다른 문제다.물론 조지 리처의 현실 설정에 대해서도 딴지를 걸 수있다.조지 리처는 현세계를  결국 '감옥'이라고 쓰고 있다.근대성의 대전제가 부정적인 세계로 귀결된다.결국 우리 모두는 맥도날드 매트릭스 안에 있을 수 밖에 없다.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혁명을 팝니다>의 저자들은 일부 좌파와 반소비주의자들이 전제하고 있는 '억압으로서의 세계'에 대해 부정적이다.60년대 이후 서구에서 근대화에 대한 반성으로 시작된 반문화적 가치가 세계를 부정과 탈출의 대상으로만 파악하고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그들은 반문화가 사실 사기라는 극언을 취하기도 한다.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극단적 반문화자는 아닐지라도-조지 리처도 그런 세계관의 토대 위에 있는 것이다.

저자는 맥도날드화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고 말한다.그렇지만 그에 대한 저항과 투쟁이 무가치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나 역시 동의할 수 밖에 없다.나는 다행히도 결혼 이후  점점 맥도날드로부터 멀어지고 있다.와이프의 덕분이다.와이프는 이론적이진 않지만 나보다 더 패스트푸드를 못 먹고 나보다 현대 의료 쳬계에 대해 부정적이다.우리는 '아이 출산' 과정에 있어서 맥도날드의 지침을 따르지 않았다.또한 언제부터인가 집에서는 제철에 난 것들만 먹고 있다.또한 나름대로 관례화된 업무를 빨리 끝내버리고 글쓰기라는 비합리적인 짓들을 할 시간도 만들고 있다.다행이고 행운이고 감사할 일이다.  저자는 현재 나와 아내가 고민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제안한다."아무런 대책이 없다면 아이들을 구하라" 아이들을 맥월드로 부터 구하려면 부모가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 TV 드라마에 눈을 꽂고 있으며 아이에게 TV보지 말고 책보라고 해봐야 먹히지 않는다.

이 책은 사회학의 고전적 이론을 가지고 세계의 숨은 속살을 대중적인 시각으로 드러내 놓았다.책 후반부의 재기도 이 책을 더욱 빛낸다.그리고 저자가 마지막으로 인용한 딜런 토마스의 싯구는 여기저기 마구 마구 인용하고 싶어진다.

"그 깊은 밤 속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말라.........빛의 소멸에 분노,또 분노하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본인과 천황
카리야 테츠 지음, 슈가 사토 그림, 김원식 옮김 / 길찾기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왜 일본인들을 만나서 '천황제'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을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가 한번도 일본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왜 그랬을까? 서로의 언어에 서툴다는 것이 한가지 변명이 될 듯 하다.일본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또 영어를 하더라도 생활영어 수준이니 거창한 담론에 대해 물어보기 저어했을 것이다.또한 사교의 성격상 그런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도 조금 가렸을 듯 하다.그렇지만 위의 이유는 결과론적 해답찾기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진짜 이유는 우리 의식 속에는 '왕의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왕은 우리에게 현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의식 속 어디에도 왕을 위한 공간은 없다.한국에서 왕은 TV 드라마속에서 신하들이니 내전의 비들과 아옹다옹하고 있는 것이지 실제 있는 존재는 아니다.그렇다보니 일본의 정체 속에 '천황'이라는 존재가 있음에도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우리는 뉴스를 보면서 일본 내각의 우경화 움직임에 분노를 한다.어제는 총리가 오늘은 관방장관이 내일은 참의원이... 결국 생각은 자민당 우파와 일본 우익들에 대한 적개심 정도에서 멈추곤 한다.

만화책인 <일본인과 천황>은 두가지 면에서 생각의 꼬리를 조금 더 길게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첫번째는 일본 우경화의 중심에 '천황제'가 자리잡고 있다는 교과서적이지만 대개는 간과했던 생각이다.두번째는 만화에 등장하는 도토대학 축구부의 분열 속에 보여지는 천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군사주의와 국가주의의 결합이다.축구부의 모습은 불행히도 한국 사회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일상적 조직의 모습이기도 하다.그런 의미에서 '천황'은 일본인의 무의식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뱀처럼 살아있는 동시에 식민지적 근대를 경험한 한국인의 의식에도 숨어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저자인 가리야 데쓰는 일본인들 다수가 믿고 있고 일본 우익이 지키고자 하는 일본 천황제가 '만들어진 신화' 일뿐이라고  비판한다.일본 천황을 신성화 한다거나 일본이 신의 나라라거나 하는 것은 순수하게 신화일뿐이다.그럼에도 일본인들은 천황을 살아 있는 신으로 국체와 동일시 해왔다.저자는 이것이 근대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로 생각한다.일본의 근대화라함은 메이지 유신을 뜻하는데 실제 일본 천황의 지위가 지금과 같은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이 모두 그 덕분이다.그리고 이 정점이 바로 쇼와 천황의 대동아 전쟁이었다.일본에서 천황은 애초부터 신적인 존재는 아니었다.역사적으로 천황이 집권을 한 시기도 있었으나 이는 상당히 짧은 시기였다.천황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일본 역사의 중심이 된 것은 지배 엘리트들의 역할이 크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저자는 과거 일본 사회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천황-신하-백성'이라는 도식을 이용한다.일본의 봉건제에서 실제 헤게모니는 신하라고 하는 막부나 번주들이 가지고 있었다.이들에게 천황은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즉 자신들은 천황의 신하라는 위치에 두고 실권을 유지하면서 천황을 대신하여 나라를 통치한다는 논리로 헤게모니를 장악한 것이다.저자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실제로 일본을 지배한 것은 재계와 군부였다고 말한다.물론 이것이 천황의 전쟁 책임론에 대한 탈출 도구로 이용되는 것은 아니다.저자는 이런 우려에 대해 천황이 직접적으로 전쟁책임이 있다는 점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천황의 전쟁책임론이 희석된 것은 모두들 잘 알고 있다시피 전후 일본복구를 맡았던 맥아더 사령부에 있다.맥아더는 천황을 탈권력화하면서 인간화하는 작업을 추진했다.법적으로는 일본 헌법 1조에 해당하는 '상징천황제'의 규정을 만들기도 한다.저자는 '상징천황제'가 미군정에 의해 1주일 사이에 만들어진 졸속적인것이라고 말한다.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과거 천황제의 악습을 그대로 세대 전승하여 일본을 활력없게 만드는 규정이라고 보고 폐기를 주장한다.저자는 '히노마루-기미가요'가 실제 일본을 상징하지도 천황을 상징하지도 않는다고 역사를 통해 지적한다.정작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징을 통해 근대 천황제 복귀를 꿈꾸는 세력들의 불온함이다.그들은 과거에 메이지 유신과 이후 군국주의 일본이 그러했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일본 천황제의 강조를 통해 사회 지배력을 강화하려하고 있는 것 뿐이다.

<일본인과 천황>에서 주인공인 도토대학 축구부의 주장 스미카와는 히노마루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면서 축구부에서 쫓겨나게 된다.도토대학의 선배들은 기강의 해이를 내세우며 폭력으로 군기를 잡고 스미카와는 이에 맞선다.선배들의 의식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상명하복이며 절대복종이다.또한 축구부의 천황이라고 할만한 기타카미 선배에 대한 숭배와 그의 충복으로서의 정체성이다.저자는 도토대학 내부 문제를 보여주면서 일본사회 조직문화에 '천황의 군대 내의 권위주의'가 내재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한다.이는 한국 조직문화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다.

특히 한국은 일본과 달리 국민의무병제도가 있다.이미 많은 학자들이 '한국은 군대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한국 사회와 군사문화는 이미 찰떡처럼 융화되어 있다.군대에서 어느 정도 규율과 제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그렇지만 세상의 모든 군대들이 한국 군대처럼 강압적이고 폭력적이지는 않다.군대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가치에 그다지 저항하지 않고 저항하기도 힘든 10대후반-20대초반의 아이들에게 교육기관으로서 작용한다.군대에서 배우고 몸에 익혔던 상명하복의 정신은 그대로 사회에서도 적용된다.합리화가 이루어진 조직이라고 할지라도 사석이나 비공식적 자리에서는 분명 군사주의적 문화가 존재할 것이다.이 문화에서는 위로 올라갈 수 록 무한 자유가 보장된다.그러다 보니 '억울하면 성공하거나, 억울하면 군대 빨리와야'되는 것이다.이 말은 현재의 권위주의적 상태는 자연적인 것이므로 잘못된 것이거나 인위적인 것은 없다는 투이다.그래서 나오는 말이 '고참이 까라면 까는 것이다' 여기에서 '까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다수를 위하는 것인가,양심에 바른 것인가를 묻는 다면 돌아오는 답은 군대였으면 '이 빠진 새끼가 어디서 말대답이야'이고 회사에서 라면 "아주 잘난척을 하는군" 이다.그 정도 차이가 있다.때리지 않으니 다행이라고....그러나 사실 살펴보면 직장 내의 폭력이 생각보다 많다.이는 언어적 폭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리적 폭력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천황'이 없다.그러나 일본의 천황제가 근대국가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에 주의한다면 우리에게도 천황은 아니지만 이와 유사하게 작용한 장치들이 있었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한국은 식민지적 근대화의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우리가 원하지 않았지만 일본 군국주의는 우리의식의 저류에 자신들이 씨앗을 뿌려놓았다.해방 이후 우리 역사는 불행히도 일본과의 절연과정을 거치지 못했다.친일파들은 친미파로 변신하여 다시 권력의 상층부를 차지했다.또 미워하면서 배운다고 그들이 심어놓은 근대성의 밝은 면을 일본의 우월함으로 치환시키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우리에게는 '천황'은 없었지만 '반공'이나 '친미'라는  실제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소리 없는 '천황'이 있었다.근대국가의 형성을 위해 소환된 '국민'은 막강한 이름으로 '개인'을 부정했다.애국심의 이름으로 일치단결이 요구되었고 다수의 발전을 위해 권위주의와 폭력은 조직내부에서 잊혀졌다.식민지적 근대화와 반공,그리고 적자생존의 시장법칙은 한국을 정글로 만들어 놓은 보이지 않는 '천황'이 되어 있다.실제 우리 사회가 많이 깨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아직도 보이지 않는 '천황'의 깃발 아래 사람들을 세우고자 하는 세력들이 여전히 준동한다.또한 이들에 부하뇌동하거나 부분적으로 또는 비판적 수용이라는 이름으로 보이지 않는 '천황'의 세력 구도 속에서 자족하려는 사람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다.(유감스럽게도 내 책상 중심으로 4분의 3이 그렇다.) 설마 그렇게 많으려고 물을 수 있다.이런 질문을 주변에 던져보자.

 "제국주의가 나쁜 거야 ? 아니면 우리가 제국주의가 되서 혜택받는 나라가 되지 못한게 나쁜거야?".....질문을 할때 '제국주의'란 말은 알지도 못하면서 양심상 거부해야한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기때문에 '강한 나라' 뭐 이런 단어로 물어보면 훨씬 적확한 대답을 얻을 수 있다.여러 대답이 나오겠지만 가장 어리석고 무식하고 상종하기 싫은 자들이 하는 답변이 이런 거다.'우리가 강대국이 되면 다른 나라처럼 그렇게 하지는 않지...우리는 백의민족이고 한번도 다른 나라를 침략한적 없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니까"

<일본인과 천황>의 책제목 처럼 '천황'문제가 우리랑 무슨 상관이 있겠냐 싶어 관심 목록에서 빠질 수도 있는 책이다.그렇지만 이 만화는 우리를 성찰할 수 있게 하며 또한 우리와도 밀접하게 관련있는 이웃나라 사람들의 의식 세계의 한 단면을 읽을 수도 있는 유용한 책이다.

이 책을 소개해준 사람은 '바람구두'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07-11-26 23:42   좋아요 0 | URL
3분의 1쯤 보다가 당장 내일로 닥친 그놈의 연구수업 때문에 잠시 밀쳐둔 책이군요. 예전에 일본사 공부하다가 일본의 천황제와 천황에 대한 의식이 도저히 이해가 안가서 헤맷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 책이 있었으면 좀 쉽게 이해할 수있었을걸 싶더라구요. ㅎㅎ
근데 앞부분 읽으면서 생각되는건 결국 근대 자본주의의 제국주의화나 팽창에서는 굳이 천황제가 아니더라도 이런 기제는 어디든 만들어냈던 거고 그게 일본에서는 천황제라는 기제를 선택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던데요. 만약 천황제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 비슷한 다른 수단과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겠죠? 요즘 우리나라가 강한나라 신드롬에 빠져있는 것도 결국 같은 맥락일거고.... 천황제의 역사적 맥락을 찾아내고 비판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우경화의 문제가 해결되어지는 것은 아닐테고, 옆나라나 이나라나 갑갑한 시대입니다.

드팀전 2007-11-27 09:17   좋아요 0 | URL
그런 말이 있다고 들었는데요....모든 근대는 근대국가를 상정한다.자본주의가 제국주의화되는 것은 필연이라고 말한 것은 레닌이었을겁니다.자본주의의 가장 궁극적 형태라고 하는데 역사적으로 제국주의 시대가 외형을 바꾼 상황에서는 제국주의가 근대 자본주의의 시초라고 보는 문제의식이 더 많은 생각거리를 줄 듯 합니다.특히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나라이거나 또는 근대화가 외세에 의해 이루어진 나라에서는 '근대국가'의 특징으로 표현되는 '부국강병'에 더 목숨을 거는 것이 일반적입니다.그래서 대개 후발국들이 민족주의를 성장론과 결합시키는 방식을 택하게 되더군요.이 둘의 결합 속에서 처벌받아야하는 반민족행태마저 묻혀가기도 하고...성장지상주의에 매몰되기도 합니다.우리 역사에서 그런 예는 많이 찾아집니다.
저자 역시 천황제가 우경화의 가장 근원적 문제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천황제가 우경화 세력들의 디딤돌로 적재적소에서 이용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겠지요.

글샘 2007-11-27 15:17   좋아요 0 | URL
축구!란 욕을 아세요?
운동 종목 이름으로 '야, 이 바보 축구 온달아!'하고 부르는 종목은 이 운동밖에 없을 듯 싶네요.
그만큼 축구가 '개인을 잃게 하는 구속'이며 '맹목'이어설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월드컵 할 때요. 2002년에... 13일날 두 소녀가 죽었는데... 다들 축구가 된 그 때...
한국에서 '천황'보다 더욱 '단결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은 '눈치'아닐까요?
사람들을 다 태음인처럼 만들어버리는, 모난 돌이 정맞는다는 눈치보는 사람들...
최근까지 노예와도 같은 양반 상놈 의식이 있었고, 아직도 '신분'이 욕설이 되는 거니까요. 거기다가 남녀 차별이 더 심해서, 상년은 더 큰 욕 같은...
어쩌다 보니,.. 욕설의 사회학이 되었습니다 그려...

드팀전 2007-11-27 22:55   좋아요 0 | URL
저도 축구보기를 좋아하지만 지나치게 열광하는 모습에는 심사가 뒤틀립니다.^^ 그런데 더 근본적으로 묻기 시작하고 직접 대비시키기 시작하면 아무도 빠져 나갈 수 없습니다...무사안일한 저의 오늘이었는데 제가 모르는 곳에서는 가난때문에 목숨을 끊고자한 소년 노동자가 있을 수도 있지요.마음이 불편하지요.그 때마다 철퇴를 내리칠 수도 없고...축구에 대한 열광의 반만큼만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합니다만 '합니다만'하는 바람만으로는 언제나 허공에 빈 주먹 휘두르기인 셈입니다.그래도 알면서 가끔 휘두르긴 합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신은 죽었다.' 라고 100여년 전 사람 니체는 말했다.

그는 '신의 사망선고'에 자필로 서명함으로써 역사에 과분한 칭송과 또 그에 상응하는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그는 '신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외로와도 슬퍼도 울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긍정성을 믿었다.하지만 그것만으로 니체는 불안했나 보다.그래서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고 백척간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는 심정으로 새로운 '초샤이언인'을 상정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니체는 틀렸다.신은 죽지 않았다.잠시 이웃 동네 김영감네 마실 다녀왔을 뿐이다.'신이 여전히 건재하다'고 말하는 유명한 종교학자가 있다.<세속도시>의 하비 콕스이다.그가 말하는 세속화되고 더 업그레이드 된 신은 누구인가? 새롭게 경배받고 있는 신.부지불식간 세계 최대의 종교의 우상이 된 신.....하비콕스는 말한다.

"시장, 곧 신으로서의 시장이 우리시대와 우리 사회에서 확보한 듯한 강력한 힘에 도전할 종교운동이나 그 밖의 운동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저는 시장이 단지 은유로서 신이라고 제시한게 아닙니다.시장이 이 세상 많은 곳에서 믿음으로 기능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현상학적으로 그동안 종교가 가장 흔하게 하던 걸 지금 시장이 하고 있습니다.시장은 이야기,은유,상징,의식,신화,가치,그리고 종교가 제공해온 의미를 제공합니다.종교로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그러니 사실은 종교들 사이의 다툼인 겁니다.이건 신들의 전투입니다."

어떤가? 당신은 '시장교의 광신도'는 아닌가?

하비 콕스의 비유를 역으로 예를 들면 <나쁜 사마리아인>의 저자 장하준 교수는 '시장교의 배덕자'이자 '적 시장교 전도사'이다.그는 세계를 뒤덮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근본주의적 종파'에 적극적으로 도전한다.또한 전도사로서의 역할에 맞게끔 그는 학술적인 글로, 때로는 대중적인 논설을 통해 사람들이 신자유주의 복음에 현혹되지 말 것을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다.경제학자라는 딱딱한 명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는 책들은 하나 같이 미디어와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그는 지난 3년동안 <사다리걷어차기>,<쾌도난마 한국경제>,<국가의 역할>등 6권의 책을 통해 일관된 주장을 펼쳐왔다. 이 책 <나쁜 사마리아인> 역시 동일한 선상에 있는 '반신자유주의 삐라책'이다.

<나쁜 사마리아인>에서 장하준 교수는 시장에 대한 제도주의적 접근방식과 개발도상국의 유치산업옹호론을 대중적인 필치로 선보인다.이전에 나왔던 <국가의 역할>에서 했던 것과 거의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대신 <나쁜 사마리아인>은 동일한 내용을 부드러운 필치로 옮기고 있는 것이 장점이다.물론 좀 더 학술적인 책인 <국가의 역할>에 비해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각개전투식 비판은 뒤로 조금 물러 난다.그렇지만 신자유주의자들의 기본적인 사상과 그들의 논리가 가지고 있는 일방성,편재성등에 대한 공격날이 무뎌진 것은 아니다.

시장은 사실 전능한 신이 아니다.역사적으로도 시장이 전능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것이라는 믿음은 사실 자본주의 태동기에 몇 몇 상인집단을 중심으로 해서 만들어진 이상적인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그렇지만 이런 신화에 가까운 이데올로기가 최근 세상을 구성하는 역사적 진리인 양 거만한 그림자를 세계에 드리우고 있다.장하준 교수의 지속적인 주장 먼저 '시장이 전능하다'라는 믿음에서부터 벗어나라는 것이다.그것은 거짓말이다.먼저 그는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하에서 경제성장이 어떤 패턴으로 이루어져 왔는지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시장만능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를 강요하는 선진국가들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현재 위치에 왔는지를 그들이 현재 입 싹 닥고 있는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한마디로 하면 그들은 '닭잡아 먹고 오리발 내밀고 있는 것이다.' 선진국들은 역사적 시기에 맞추어 국가별 산업 전략을 택해왔다.세계 자본주의의 형님들이라고 자처하는 영국이나 미국 역시 역사적으로 보면 무역보호주의와 자국 산업보호를 위한 보조금,외국인 투자에 대한 제제등 국가가 시장에 개입했던 사례들이 수두룩 하다.그런데 이제 이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다른 소리를 한다.그들은 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뻔뻔한 것이다.프리드리히 리스트를 인용해서 장하준 교수가 말하는 '사다리 걷어차기'가 바로 그것이다.

국가 개입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알레르기 반응은 유명하다.그들은 국가가 개입하면 잘 되던 밥도 죽이 된다고 주장한다.그러니 국가는 그냥 정치나 하고 경제에는 개입하지 말하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이건 '물에 빠진 사람 건져내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그것도 아니면 건져 주었더니 날강도로 변하는 것이거나.지오반니 아리기의 자본주의 축적과정을 인용해 보자. 15-16세기 헤게모니국가는 네덜란드였다.그들이 어떻게 부를 축적했을까? 아리기는 '비용의 내부화'라는 말로 설명한다.즉 원거리 해외무역을 부의 축적기반으로 삼았던 자본가들은 국가가 강한 해군력으로 이를 뒷받침해주기를 요구했다.결국 '보호비용의 내부화'를 통해 성장할 수 있었다.그렇게 멀리까지갈 필요도 없다.한국이 경제적 성장을 거둔 것은 '국가의 개입'없이는 불가능했다.한국은 중앙정부가 자본을 통제하고 유치산업 성장을 지원했다.물론 박정희의 개발 독재형 방식이 옳았던 것은 아니다.그는 경제 개발을 목표로 또다른 미래의 사회비용을 당겨썻으며 정치,사회적 부채를 많이 남겨놓았다.그러나 어쨋거나 국가의 개입이 없었다면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지금같은 정도의 성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장하준 교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정치와 경제를 구분해 버리는  즉 '경제의 탈정치화'를 주도한다고 말한다.그는 이것은 거짓말일 뿐이며 모든 시장은 정치적 산물이라고 말한다.(지극히 당연한 말인데도 이 말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신바보주의자들이 많다.현재 대선정국을 봐도 경제와 정치가 분리된 무엇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장하준의 결론은 단순하면서도 명쾌하다.그는 '세계를 평평하게'라는 구호대신에 '경기장을 기울이자'라고 말한다.브라질 축구팀과 한국 초등학교팀이 같은 경기장에서 똑같은 조건으로 경기를 하면 결과는 뻔하다.'자신 없을때는 자신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군인정신을 가지고 '하면 한다'로 부딪혀봐야 죽어나는 것은 서민들일 뿐이다.장교수는 개별국가별로 선택적으로 유치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말한다.그는 진정한 산업발전은 제조업에서 승부가 난다는 입장이다.그렇게 하기 위해서 일단 국가는 자국 생산자들을 보호하고 외국인 투자에 대해 제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또한 기술발전을 위해 기득권자들의 이익만 보호하고 있는 지적 재산권 문제에 대해서도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따라 그에 대한 세계적 저항운동도 거세다.흔히들 반세계화운동이라고 일컽는 것이 그것이다.이 그룹 안에는 여러 다른 계파들이 존재한다.이 계파 안에는 서로 상충되는 부분들도 존재한다.그러나 신자유주의가 몰고오는 거대한 구름 앞에서 이들은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장하준 교수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노엄촘스키나 조셉 스티글리츠등 거장이 칭찬할 만큼 명료하고 적절하다.그렇지만 그의 주장 중 어떤 부분은 상당히 논쟁거리가 되기도 한다.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그의 '제도중심'접근법이다.그의 책 어느 구석을 살펴도 사람은 그다지 나오지 않는다.여기서 사람이라는 것은 '노동'이다.그의 분석에는 '노동'과 관련해서 어떠한 테제와 안티테제도 등장하지 않는다.결국 제도를 만들고 제도가 운행되어가는 시스템을 분석하고 있을 뿐 그 시스템의 뿌리이면서 또한 희생양이고 또 움직일 수도 있는 주체들과의 관계성을 무시되고 있다.그가 한국경제를 분석하면서 나왔던-이 책에는 나오지 않는다- '재벌 경영권 유지와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것 역시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그는 1920년대 스웨덴식의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경제발전과 복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고 하는 듯하다.그렇지만 이 부분에서 그는 한국형 재벌의 형성과 강고한 사회적 네트워크를 너무 쉽게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신자유주의는 재벌들에게 합리적 경영을 요구하기도 한다.그러나 결국 신자유주의의 이해관계는 재벌이라는 국내 지배블록을 통해 실현된다.재벌은 그런 측면에서 한국 사회의 가장 중심된 기득권이며 신자유주의의적 재편의 수혜자다.한국에서 재벌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전도사 아닌가? 재벌은 사회의 담론을 신자유화하는데 가장 큰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 활약하고 있다.

이런 접근은 -일반론의 오류를 범할 수 도 있지만- 박정희시대의 개발독재에 대한 나이브한  태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2차 대전 이후 선진국들이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활동한 역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역사적으로 나이브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남미와 아프리카,중동 등에 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이며 또한 경제적 개입을 '좋았던 시절'정도로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아쉬움이다.(물론 미국의 외교사에 있어서 70년대는 윌슨의 이상주의를 실현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그러나 그것도 결국 악어가 잠시 졸릴때 뿐이었다.)그는 전후 선진국들의 선의에 대해  '냉전 역할론' 보다는 '장기적 자국이익론'에 힘을 싣는다.그래서 그가  현재 나쁜 사마리아인들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이라고는 이기적 동기라도 발휘해서 지금 잠깐 양보하고 '키워서 잡아먹어라' 라는 식의 주문밖에 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는 신자유주의의 첨병 IMF로부터도 '브레이크 좀 밟고 가라' 고 조언을 받을 정도로 신자유주의의 터보엔진을 부착하고 있다.앞으로 한국의 미래를 옅볼 수 있는 현재 대선 상황을 보면 암담하다.마치 보드카에 취한 기관사들이 귀를 막고 운전하는 폭주 기관차 3등칸에 올라탄 심정이다.기관실 밖에서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불콰해진 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뛰어 내릴 것인가 아니면 요행을 바랄 것인가?

건축가이자 미술 공예운동의 주창자였던 윌리엄 R 레서비의 글로 마친다.

 "역사를 쓰는 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이고, 철학을 쓰는 것은 부자들이다.

  .....죽은 자와 가난한 자는 경험한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07-12-14 14:32   좋아요 0 | URL
리뷰대회 수상하셨어요~ 작년의 영광을 이어가십니다. 축하해요^^

드팀전 2007-12-14 18:02   좋아요 0 | URL
저한테까지 줄 필요는 없었는데...참가상이겠지요.^^

멜기세덱 2007-12-14 14:44   좋아요 0 | URL
축하드립니다. 사실 드팀전님께 감사 드릴 게 많아요. ㅎㅎ

드팀전 2007-12-14 17:52   좋아요 0 | URL
또 축하해요...제가 도와 드린게 아무것도 없는게 감사 인사를 받으니 왠일일까요???

멜기세덱 2007-12-15 02:28   좋아요 0 | URL
사실, 제가 드팀전님 리뷰보고 읽은 거거든요....ㅎㅎㅎ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 김상봉 철학이야기
김상봉 지음 / 한길사 / 200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김상봉의 '정치적 올바름'이 좋다.그의 '정치적 올바름'은 책 서문에 띄우는 인삿말부터 확인할 수 있다.'사랑하는 소녀에게 바치는 감사의 편지'에서 이 책의 심연을 흐르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사회적 부채감'을 고백한다.

나 어릴 때 남들처럼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어보는 것이 꿈이던 소녀가 있었다.내가 학교의 책상 앞에 앉아 있었을 때 그 소녀는 전태일과 평화시장 미싱 앞에 앉아 있었다.

저자가 말하는 '부채감'이란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 바탕을 둔 것이다.하지만 그 '부채감'은 조금 더 보편성을 띈다.저자는 여러번에 걸쳐 '내 존재를 지탱하는 것은 타인의 눈물이다' 라는 말을 한다.저자가 '그리스 비극'을 이해하고 사유하는 방식 또한 이런 존재 규정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

비극이 수행하는 것은 삶을 규정하는 다양한 대립상들을 드러내 보이고 하나의 대립항으로부터 다른 대립항으로 건너가게 함으로써 삶의 전체상을 우리 스스로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일입니다.그렇게 삶을 전체로서 볼 수 있을 때 각자는 고립된 자기 세계에서 벗어나 만남의 자리에 설 수도 있습니다.

르네 지라르는 인류의 문화적 기원이 '희생양'에 대한 '만장일치의 폭력'위에 이루어진다고 말한다.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폭력'을 '희생양'의 정수리에 꼽고 있는 '전체'가 스스로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 인지하지 못해야만 한다는 것이다.만약 이것에 눈을 뜨게 되면 윤리의식이 발생하게되어 이 시스템은 붕괴된다는 주장이다.이런 생각에 동의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그렇다면 질곡의 우리 역사에 기대어서 잠시 생각해보자.

나는 '아무런 부채감도 없다.그들은 그들만의 싸움을 한 것 뿐이다'라고 말한다면'의식의 척박성'을 드러내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존재가 타인의 눈물' 위에 서 있다는 말에서 저자가 그리스 비극을 읽으며 주목하는 것은 '타인'과 '눈물'이다.

비극은 슬픔의 자기반성이라고 한다.인간은 슬픔과 고통 통해 깊어지고 정신과 교통할 수 있다.하지만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슬픔이 있다.사랑하는 사람에게 차여서 슬플 수도 있고 명품 핸드백을 가지고 다니지 못해서 슬플 수 도 있다.시험 성적이 오르지 않아서 슬플 수 있고 하루 종일 돌깨는 9살 짜리 아이를 보고도 슬플 수 있다.어떤 슬픔과 고통이 인간 정신의 깊이를 만들어 줄 것인가? 먼저 좌절된 욕망이 주는 슬픔은 슬픔이 아니다.또한 자기를 투사하는 형식의 자기 연민 역시 온전한 슬픔이 아니다.그리스 비극시인들은 인간이 어찌 할 수 없는 존재론적 슬픔과 고통을 보여준다.이를 통해 고통의 의미를 묻고 고통에 대해 반성한다.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타인'을 이해하는 초석이 된다는 것이다.저자는 슬픔에의 참여를 통해 참된 만남을 이룬다라고 말한다.즉 타인의 고통을 같이 나눔으로써 나와 네가 서로 이행한다는 것이다.초기 그리스 서사시는 슬픔과 고통이라는 한계상황을 뛰어넘는 정신의 숭고를 보여준다. 반면 비극은 고통을 둘러싼 대립을 전시함과 대립을 건너가게 함으로써 비극적 상황을 통해 '만남과 나눔'의 시민적 이상을 심는다.

 그리스시대의 문학은 크게 서사시,서정시,비극으로 나뉜다.서사시는 영웅의 시대이며 총체성의 시대였다.반면 서정시의 시대는 순수한 내면의 정신세계를 반성하는 주체성의 시대이다.비극은 이런 총체성과 주체성을 공공시민이라는 이상하에 수렴하려는 장르였다

그리스 비극은 이미 자기를 주체로 자각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총체성을 실현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입니다.그리고 이것은 아직도 서정시의 시대,분열과 소외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타산지석이 되는 것입니다.그리스 비극의 미덕은 총체성을 추구하되 그것을 위하여 주체성을 희생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김상봉 교수는 비극이 공연예술이라는 형식에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소통을 목표로하는 예술이었다고 파악했다.즉 고립된 주체를 공동체 속의 시민으로 도야하기 위한 예술이었다는 것이다. 김상봉 교수는 근대 서구 주체 철학의 한계를 말하며 '주체'와 '타인'의 만남, 그리고 소통에 대한 -즉 '서로 주체성'에 대한 담론을 넌지시 꺼낸다.그가 처음에 말한 '부채감'과 그리스 비극을 통해 이해된 인간의 자기반성과 타자에 대한 이해는 '서로 주체성'이라는 바다에서 만나게 된다.저자는 그리스 비극이 만남 자체를 목적으로 갖는 것이지 공공시민적 총체성이라는 고정된 사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이것이 책 초반부터 지속적으로 나오는 '하나이면서 모두' -김상봉 교수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서로주체성'-의 성격이다.

비극의 힘은 자기 자신의 고통에 관한 연민과 공포의 정념들을 자기 중심적인 구심운동으로부터 해방시켜 그것을 타인의 고통 아니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같이 겪을 수 밖에 없는 보편적 고통에 대한 연민과 공감으로 이행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의 유려한 흐름과 장면마다 담겨 있는 이야기들을 지나치게 한가지 주제로만 환원시켜서 말한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책 자체는 상당히 잘 쓰여졌고 또한 친절하다.톱니바퀴가 다음 톱니를 기다리듯이 그리스 비극을 매개로 우리가 해야만 하는 철학적 문제들을 한단계 한단계 진척시켜나간다.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은 거기에 있다.그러나 몇 가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부분도 있다.먼저 저자가 '타인의 눈물' '부채감'을 그리스에 적용하면서 그리스적 생산양식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물론 저자도 아주 짧게 이야기하기는 한다.'그리스의 노예제와 외국인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정도이다.고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는 왈가왈부하는 듯 하다.김상봉 교수는 아르놀트 하우저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의 그리스적 생산양식문제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접근을 몇 마디 말로 부정하고 지나간다.물론 하우저가 그리스 비극을 단순히 정치적 예술의 한 형식으로 접근한 것에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그것은 자칫 모든 예술을 정치/비정치로 나눌 수 있는 위험이 있다.저자 역시 그리스 문화라는 것이 '시민'중심의 문화라는 것을 인정한다.그런데 그 '시민'의 성격과 그 '시민'이 물적 토대를 외면함으로써 스스로 그 문화를 만드는데 기여한 이름없는 '타인'들의 존재를 외면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본다.또한 귀족과 시민의 구분 자체에 대해 그다지 성실하게 접근하지 않는다.김상봉 교수의 그리스 문화 주체로서의 시민에 대한 분석 결여는 당연히 '시민'을 탈역사화 시켜버린다.전체적으로 보면 그리스의 시민은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서구 문화사의 영원한 이상향인 '민주주의' 폴리스를  이룩한 현인들처럼 그려져 버린다.르네 지라르 역시 그리스 역사가 노예와 이방인이라는 희생양 위에 만들어져 있다고 말하며 숨겨진 희생양을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참고 삼아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하우저의 주장을 인용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많은 인간 중의 일부가 자율적인,다시 말해서 '무익'하고 '비생산적'인 형식을 창조하기 위해 다른 의무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은 그 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잉여노동력과 여가시간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를 오리엔트의 전제정치와 비교해보면 민주제라고 불러도 좋겠지만 근대 민주국가에 비하면 오히려 귀족제의 아성이라는 인상을 준다....기껏해야 혈통위주의 귀족에 대신하여 재산에 의한 귀족이 등장한 것,씨족 단위로 구성돼 있던 귀족국가가 금리생활자가 지배하는 화폐경제 중심의 국가로 이행한 것이 지나지 않았다.게다가 아테네는 제죽주의적 기반 위에 서 있었음으로 전쟁 정책을 수행하고 있었고 자유시민과 자본가들은 여기서 나오는 이익을 노예나 전쟁이익을 분배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희생시켜 자기들 수중에 넣고 있었다.

비극은 일반대중을 위해 공연되었다는 점에서는 민주적이지만 그 내용에서는 소재가 된 영웅전설이나 영웅적 비극적 생활감정이라는 점에서는 귀족적이었다 ...기원전 4.5세기의 주요한 철학자나 시인은 소피스트나 에우리피테스를 예외로 하면 모두가 귀족제와 반동측에 서 있었다.판타로스,아이스킬로스.헤라클레이토스,파르메니데스...등등은 스스로가 귀족이었고 시민계층 출신의 소포클레스와 플라톤도 철저히 귀족주의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김상봉 교수는 니체를 완전히 작살낸다.니체를 고통마저도 즐기라고 말한 허무주의자의 원흉정도로 취급한다.니체가 말한 명랑성을 그리스적 명랑성의 건강함을 잃고 고통도 두려워하지 않는 무감각으로 취급한다. 니체가 고립된 주체의 자기반성을 주로 이야기하기때문에 작살나는 것이다.김상봉교수는 니체의 권력의지를 자기 자신의 생명력으로 강해진 초인의 의지정도로 설명한다.그러면서 내가 극복할 수 없는 고통이 나를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묻고 있다.김상봉 교수가 나보다 니체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그런데 이 책에서는 과감한 생략과 자기목적형 전술로 인해 니체를 의도적으로 훼손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니체의 강함은 오히려 김상봉 교수가  몇 장 앞에서 '자기연민의 약함으로부터 탈출'을 요구하는 것과 유사한 측면이 있지 않을까 싶다.또한 니체가 고통을 긍정하라고 한 것이 단순히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그처럼 '고통을 그냥 받아라'라고 이해하고 비판을 한다면 지나친 단순화는 아닐까 싶다.

니체는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스스로도 형이상학의 틀거리로 들어가버렸다.김상봉 교수는 니체를 비판하면서 당위를 당위로 말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확잘라 말한다.그런데 이 문제는 '서로주체성'문제에도 똑같은 형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이건 어쩌면 윤리학이 스스로 윤리학을 설명할 수 없는 한계와도 유사한 딜레마일지도 모른다.우선 이런 의문들이 떠오른다.그가 설정하고 있는 '주체'의 문제다.쉽게 말해서 그가 상정하는 '주체'가 어떻게 구성되어지고 어떻게 '소통불능'상태에 들어서는 지 하는 문제다.여기서 '주체'가 훼손되는 방식을 고민하지 않거나 이를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한다면 '소통'을 해야한다는 '당위'만 남게된다.어떤 글에서 '모든 소통은 단절이다'라고 했을때 그것은 소통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을 이루려는 '주체'의 조각난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르페브르의 <현대 세계의 일상성>에서 그는 현재의 역사적 단계를 욕구와 일상성이 프로그램화되고 집단으로 매개되는 상태라고 말했다.특히 이 문제는 일상성의 매뉴얼이라고 할 만한 중산층에게 눈을 돌리게 만든다.르페브르는 현대 세계의 일상성이 '반복'을 통해서 '죽음의 공포'를 잊게 한다고 말한다.김상봉 교수가 이 책에서 근원적 고통의 기원으로 말하는 것이 '죽음'이다.현대는 이 죽음을 잊게 한다.어떻게? '반복'이 그 답이다.르페브르는 삶의 비극성이 전면적으로 망각될 수 있는 것이 이 반복성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비극성의 망각이 제도로서 일상성이 거둔 큰 성과라고 지적한다.이것은 두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우선 하나는 세계의 비극성을 이해해야만 주체와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또 다른 하나는 자족적 공동체나 도시국가를 벗어난 현대에서 주체들의 현존은 '비극성의 망각'위에 수립되어 있다는 것이다.이렇게 '비극성'을 망각한 주체들 사이에 '소통'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리스 인들이 원형극장에 모여있다면 현대인들은 TV 앞에 모여있다.그것도 개별화된 방식으로 말이다.(역설적이게도 결국 예술의 역할이 현대에 있어서 다시금 중요해지는 것도 이때문일 것이다.) 현대인들에겐 슬픔을 이해하는 방식 역시 이미지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수잔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포토저널리즘이 타인의 고통을 이중적으로 소비시켜 버린다고 지적했던 바가 그것이다.현대의 주체들은 타인의 고통을 보며 아파한다.그렇지만 이것은 작은 연민과 자기가 그 고통에 빠지지 않았다는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이미지가 된 고통은 그렇게 실제계를 떠나 버린다.주체는 여러가지 형태로 파편화되고 부관참시된 시체처럼 훼손되었다.물론 이것을 어떻게 복원시키것인 가가 바로 김상봉 교수의 문제의식이다.그러나 이것은 뫼비우스의 띠같다.철학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고 총체성을 찾기 위해 소통하자는 것이 당위론적으로 맞는 말이다.그렇지만 이것이 유토피아 없는 세상에서 유토피아를 위한 염원에서 나온 것이라면 또한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이 조각난 세계와 분열된 주체들을 어떻게 소통시킬 수 있을 것인가? 심란한 주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7-11-01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7-11-01 16:0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그건 정말 몰랐는걸요.고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글을 쓸 수 있을까??? 가 뭐가 의문점일까요??
 
HOW TO READ 니체 How To Read 시리즈
키스 안셀 피어슨 지음, 서정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내 가슴 속의 죽은 우표들, 날카로운 유리로 된 우표들은 내 가슴에 상처를 내고 곪게 한다.

                                                                     마누엘 푸익 <거미여인의 키스> 중에서

<HOW TO READ>시리즈 중 두 권을 샀다.이런 류의 책은 '지도'다.흔히들 '입문서'라고 많이 한다.그런데 나는 '입문서'라는 말에 약간의 떫은 맛을 느낀다.소림사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어디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일까 ? '입문'이라는 말은 일주문 앞에 서 있는 중 공부하려는 행자를 떠올리게 한다.왠지 그 문에 발을 담그면 죽비를 들고선 장년의 스님들이 늘어서 있을 것 같다.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일단 들어 왔지.푸후후...중 되는게 쉬운지 아나 본데..그럼 한 번 죽어봐.당장 짐 내려놓고 빗자루 안 들어.이게 벌써 빠져가지고.."

'입문서'라는 말은 은근히 '지식 권력의 위계'가 작동하는 말이다.즉 '이 바닥에 신고하려면 겁없이 깝치지 말고 네 정도면 이 수준에서 해'라는 식이다.'어디 함부로 덥썩 달려들려고..겁대가리 없이.' '입문서'의 효용에 대해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세상사의 모든 일이 그렇듯이 걷지도 못하면서 뛸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런면에서 이런 류의 '입문서'는 필요하고 또 효과적이다.그저 '입문서'라는 단어를 생각해보다가 그 의미속에 '위계'적 요소가 강하지는 않을까 현실에 빗대어 생각해 봤다.'입문'이라는 말이 '초보','미숙함','무지'와 연관되는 이미지가 강하다보니 대개 사람들은 '입문서'를 들고 다니는 것 보다는 두꺼운 저작을 들고 다니는 것을 선호한다.니체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니체의 가장 유명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고등학교 필수도서 목록에도 들어있다.나는 솔직히 아주 명민한-이건 공부를 잘하는이란 뜻과는 관계가 없다-몇 명의 고등학생외에는 전혀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리라이팅 시리즈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저자 고병권도 서문에서 그런 말을 한다. '사람들이 대개 중고등학교 때 니체의 책 한 권 쯤은 읽는다...그러나 정작 나는 대학원들어와서야 니체를 처음 접했다'

중고등학교 필수도서 목록을 선정하는 무대포 정신때문인지 아니면 '입문서'에 대한 이미지 때문인지 아직도 사람들은 니체를 읽기 위해 <차라투스트라>로 곧바로 다이빙한다.그리고는 1분간 숨을 참다가 익사한다.

<HOW TO READ 니체>의 경우 밤눈으로 찾아가본 적이 있는 길을 다시 찾아가는데 필요한 정도의 지도책이다.과거에 니체의 집을 기웃 기웃 거렸던 사람이라면 평이한 지도를 따라 '그래 여기에 이런 건물 있었지'라고 하면서 따라갈 만하다.저자인 키스 안셀 피어슨은 니체의 철학적 연대기를 세 단계로 나눈다.(일반화된 방식이다) <비극의 탄생>으로 시작되는 '예술가의 형이상학'문제,그리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으로 부터 발전하는 중기 니체 철학,저자는 '긍정의 시대''자유정신의 시대'라고 말한다.그리고 이후 '거부의 시대'로 전화해가는 후기 니체다.우리들이 가장 많이 읽는 <차라투스트라>는 사실 니체 저작 중 대표작도 아니고 니체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부분일 수 밖에 없다.저자는 <비극의 탄생>부터 시작해서 시기별 니체 철학의 주요 개념들과 철학적 투쟁 대상.그리고 그가 만들고 싶었던 세계에 대해 중요 저작의 특정 대목을 중심으로 설명한다.예를 들어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한 설명으로 그는 <즐거운 학문>의 한 아포리즘을 이용해서 개념풀이에 들어간다.

"너는 이 삶을 다시 한 번,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    <즐거운 학문>

이 개념에서 니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한바는 "삶의 긍정'이다. 내세나 천국과 대비되는 '영원회귀'(어떤 학자는 영원반복이란 말을 쓴다.)는 형이상학이 만들어놓은 도망갈 구멍을 원천차단시킨다.구원이니 천국이니 하는 것은 전부 개풀뜯어 먹는 소리다.그걸 찾아보려고 어디부터 시작되었느니 그것의 끝은 어디니 하는 형이상학과 종교적 짓거리는 이제 종말처리장으로 들어가야된다는 것이다.신의 죽음을 선언한 니체는 이제 신 없는 시대에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해 나가야하는지 말한다. "너 스스로를 사랑하고 너 스스로를 창조하라"는 것이 핵심이다.(자기계발서에 나오는 이야기 같군 ^^) 쉽게 말하자.

스팅의 노래 <English man in Newyork>이란 노래가 있다.거기 가사 중에 보면

'I'm a alain I'm a legal alain .. be yourself no matter what they say"  하는 부분이 있다.니체의 개념을 적용하면-성공할경우-그 에일리언은 위버멘쉬가 된다. 열나게 짖는 그들은 모두 중력의 영의 은유이다.그리고 니체는 이런 작업이 춤추듯 명랑한것이라고 말한다.그러나 절대로 절대로 오해해서는 안되는 것이 니체가 말하는게 '소아론적 자아찾기'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저자는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에서 니체가 성급한 사상가와 상투적 작가를 비판하는 내용을 싣고 있다.이 말은 니체가 '너 자신이 되라'라고 한 것을 '소아적 자아찾가'수준으로 해석하는 것이 완전 본말전도하고 있는 것이라는 예로도 적절할 듯 하다.

세계를 실재보다 더 쉽고 편한 것으로 믿도록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우리는 이들의 명랑함이 지닌 천박함을 폭로해야만 한다.우리에게 필요한 명랑성은 가장 깊이 사유할 수 있는 자들과 가장 생생한 현실을 사랑할 수 있는 자들로부터 온 것이어야만 한다.(거의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주변에 하도 자아찾기에 목매인 20대 여성들이 많아서,주로 자아를 일본소설이나 명품짝퉁이나 영화나공연 보기에서 찾는다-노파심 삼아쓴다.)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는 영어로 하면 'over man' 즉 '넘어선 자'이다.습관,제도,상투적 관념,금욕주의적 도덕,허무주의적 형이상학 등등 넘어야 할 것은 지천으로 깔렸다.세계에는 중력의 작용점 만큼이나 많은 넘어야할 무언가가 있다.이걸 춤추면서 넘는다는 것...

"내 형제들이여,그대들의 가슴을 펴라.활짝,더 활짝! 그리고 다리도 잊지마라. 너희들의 다리도 올려라.그대들 훌륭한 무용가여....무용가 차라투스트라,날개짓으로 아는 체 하는 경쾌한 차라투스트라,온갖 새들에게 눈짓을 하며 날 준비를 마치고 각오하는 자,행복하고 마음이 가벼운자,웃고 있는 예언자 차라투스트라..."  .......................  <비극의 탄생>서문

니체에 대한 책과 연구서는 니체가 올라섰다던 6천피트 산맥보다 더 많다.그런데 '니체'를 '학문'하는 것과 '니체'의 말귀를 알아 듯는 것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오히려 니체를 학문하는 사람들은 니체를 체험하는 것과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부류중에 하나 일 것이다.<이 사람을 보라>에서 니체는 너무 많은 책을 읽지 말고,책만 들척이다 사유능력을 잃지 말고,도서관에 짱박히지 말고,가급적 엉덩이를 의자바닥에 붙이고 있지말고,나가서 놀라고 한다.나가서 상쾌한 공기를 맡으며 떠오르는 생각외에는 믿지 말라고 한다.그러므로 니체를 학문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니체를 체험할 수는 없다.(물론 니체 역시 그의 언어가 표현해낸것에 스스로를 일치시킬 수도 없었다.)그들은 그저 니체를 학문해서 밥벌이하거나 여흥삼거나 전문가가 될 뿐이다.

그렇다.카잔찬키스의 조르바다.조르바가 니체가 말한 차라투스트라이다.춤추는 조르바...상대국의 도망병과 모래사장 위에서 춤으로 서로의 역사와 아픔을 소통하는 조르바...따딴 따딴 ..부주키에 실린 테오도라키스의 테마가 귓가를 멤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