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60년을 연애했습니다
라오 핑루 글.그림, 남혜선 옮김 / 윌북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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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있을 때는 월병을 같이 먹고 떨어져 있을 때는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상이 곧 사랑이었다. 이렇게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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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에는 국어사전과 영어사전을 옆에 끼고 공부했고, 지금은 책을 읽다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사전 앱을 켠다. 하지만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수십만 개나 되는 단어의 뜻을 일일이 사람이 정리하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은 몇 번 해 봤지만. 명성 높은 영어사전인 메리엄 웹스터 사전의 편찬자 코리 스탬퍼가 쓴 에세이『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를 읽으면서 짐작만 했었던 사전 편찬자들의 고충과 보람을 알게 되었다. 영어사전을 만드는 영어 원어민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국어사전을 만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졌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 웹사전 기획자 정철의 대담집『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이다. 미국과 한국의 사전 편찬자들은 서로 언어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이 다른 만큼 서로 다른 고충을 겪고 있지만, 사전 편찬자로서 공통된 고민을 품고 있었다. 


영어 VS 한국어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를 읽으면서 내내, 내가 아는 영어는 전체 영어의 아주 작은 일부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hella(캘리포니아에서 '아주'라는 뜻으로 쓰이는 부사)', 'irregardless(앞에 부정접두사 'ir'이 붙어 있어서 정반대의 뜻일 것 같지만 regardless(무관한)와 동의어이다.)' 등등 이 책에서 난생 처음 본 영단어들 때문만은 아니다.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영어 문법이 영어 교재에 정리되어 있는 문법들처럼 질서정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they(그들)'가 3인칭 복수라고 배웠지만, they는 단수로도 쓰일 수 있다고 한다. "The crowd are loving it(사람들은 그걸 좋아한다)'이 미국 영어에서는 비문이지만 영국 영어에서는 비문이 아니다. 집합명사인 'crowd(군중)'는 미국 영어에서 단수로 취급되지만, 영국 영어에서는 단수로도, 복수로도 쓰이기 때문이다. 


  저자를 비롯한 웹스터 사전 편찬자들조차 예외와 불규칙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영어 문법의 늪에 빠져 혼란스러워한다. 그래서 저자는 영어를 사랑스럽지만 통제불능인 아이에 비유한다. 수십 년간 영어사전을 만들어온 원어민조차 영어를 완전히 정복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 영어 원어민이 아닌 한국인 독자인 나는 어떻겠는가. 머릿속 한쪽에 묻혀 있던 영어 문법 지식을 끌어올려도 저자가 말하는 영어에서의 미묘한 어감 차이와 문법상의 혼란들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한국인이 쓴 국어사전 이야기를 읽으면서 공감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은 국어사전뿐만 아니라 백과사전, 한국어-외국어사전 등 다양한 사전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국어사전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전 세계 수십여 개 국가 수십 억 명이 사용하는 영어는 어느 한 국가 한 지역을 기준으로 표준을 정하지는 않는다. 반면 한국어는 국가가 어문 정책과 사전 편찬에 깊이 개입해 표준어 규범을 제시한다. 저자는 언어의 사회성을 위해 일관성 있는 규정이 제시되어야 하지만, 그 규정이 언어의 유동성을 막아서는 안 되고, 국어사전은 규범보다는 모범을 제시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다. 영어 사전에 대한 고민은 아무래도 남의 이야기이지만, 한국어와 국어사전에 대한 고민은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지나칠 수 없는 고민이다. 또한『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에서는 번역자가 친절하게 번역해도 포착할 수 없었던 미묘한 어감 차이를 이 책에서 포착할 수 있다. '딱 부러지다'는 결단력을 뜻하는 쪽에 가깝고 '똑 부러지다'는 정확하다는 뜻에 가깝다. '만들다'와 '짓다'는 동의어지만 '친구를 만들다'는 자연스러워도 '친구를 짓다'는 어색하다. 한국어 원어민만이 포착할 수 있는 어감 차이다. 물론『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를 통해 영어에 담긴 영미권의 역사, 문화를 알게 되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우리말에 대한 고민과 우리말 속 미묘한 어감의 차이들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이 내 몸에 맞는 옷처럼 편하게 느껴졌다. 


에세이 VS 대담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는 저자가 사전 편찬자로서 수십 년 동안 살아오면서 느낀 고충과 보람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에세이다.  어린 시절부터 활자 중독이었으며 언어, 특히 모국어인 영어와 사랑에 빠진 저자에게도 사전 편찬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get', 'take' 같은 간단한 단어에 수십 가지 뜻과 용법이 담겨 있어 'take' 항목 하나를 수정하는 데만 한 달 가량이 걸렸다. 하이픈을 단어에 넣을지 말지, 넣는다면 어느 위치에 넣을지 같은 사소한 문제들 앞에서도 언어 감각을 발휘해야 한다. 단어의 정의를 정확한 언어로 설명하기 위해 매일 엄청난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다. 사람을 녹초로 만들어버리는 이런 고충들조차도 저자는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유쾌하게 그려낸다. 반쯤 자포자기한 사람의 자조적인 농담이긴 하지만, 그 속에는 자기 직업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은『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보다 좀 더 무게감 있는 대담집이다. 저자는 다음Daum 어학사전을 담당하고 있는 웹사전 기획자로서, 어느새 보호해야 할 대상이 되어버린 사전과 사전 편찬자들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이 책을 기획했다. 저자는 수십 년 동안 사전을 만들어 온 편찬자 여섯 명과의 대담을 통해 우리나라 사전이 걸어온 역사를 돌아보고, 사전의 현재를 진단하고 사전의 미래를 꿈꾼다. 편찬자들의 사생활도 이야기하고 농담도 주고받긴 하지만 사전에 대한 좀 더 깊은 고민을 담고 있다. 


아날로그 시대를 살았던 종이사전 편찬자 VS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웹사전 기획자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의 원서와『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은 같은 해(2017)에 출간되었다. 그러나 둘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시대는 다르다.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의 저자 코리 스탬퍼는 수십년 간 종이사전을 만들어 온 사람이고, 이 책에서도 종이사전을 만들고 개정하면서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주로 이야기한다. 책 마지막에 인터넷의 발달로 사람들이 무료로 웹사전을 찾아보게 되면서 사전 편찬자들이 겪는 위기를 이야기하지만,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아날로그 시대에 종이사전을 만들던 이야기다. 


『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은 아날로그 시대부터 수십 년간 사전을 만들어 오던 사람들과의 대화이지만,『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보다 디지털 시대 사전이 맞게 된 미래와 위기에 좀 더 많은 비중을 쏟는다. 인터넷과 데이터베이스 관련 기술이 발달하면서 웹으로 예문을 수집할 수 있게 되었고, 단어가 어느 연령대, 어느 분야에서 얼마만큼 쓰이는지도 정확히 통계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웹사전은 종이사전에 비해 분량의 제약을 덜 받고, 언제든지 수정 가능하다. 남북 공동 국어사전을 만든다면 웹사전에서는 '북한 모드'와 '남한 모드'를 각각 만들어 변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 종이사전을 옮겨받은 포털 사이트들은 웹사전의 내용을 채우고 수정하는 데 시간과 돈을 들이지 않는다. 웹사전 편찬자인 저자는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수정을 할 뿐이다. 그러니 수십년 간 종이사전을 만들어 온 사람들의 경험은 전수되지 않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웹사전 기획자는 아날로그 시대의 종이사전 편찬자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디지털 시대에 사전이 나아갈 길에 대해 고민한다. 

 

사전 편찬자들 모두의 고민

 

  두 책은 영어와 한국어, 미국과 한국의 차이만큼 서로 다른 고민과 이야기를 품고 있지만, 사전을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고민을 공유하고 있다. 웹스터 사전의 편찬자들이 문법에 어긋난다고 여겨지는 단어들, 비속어들을 사전에 넣었다고 항의를 받을 때 한국의 사전 편찬자들은 어떤 신조어를 넣고 넣지 않을지 고민한다. 사전에 실렸다는 것은 그 단어가 언어 속의 한 단어로 인정 받았다는 뜻이니까. 사전은 독자들에게 하나의 규범으로 여겨지기에, 영미권의 사전 편찬자들이나 한국의 사전 편찬자들이나 그에 따른 책임감을 질 수밖에 없다. 


  단어를 선정하고 난 다음에는 단어의 뜻풀이에 대한 고민이 이어진다. 얼마나 자세히 써야 할까. 백과사전만큼 자세히 써야 할까, 백과사전이 있으니 간단한 정의만 적으면 될까. 단어의 이 뜻은 단어의 저 뜻과 사실상 같은 말이 아닐까. 나는 이 단어의 뜻이 너무 자세하게 분류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편찬자는 그렇게 자세하게 분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단어를 정확한 단어로 표현했을까? 개는 개과에 속하는 동물이다, 개과는 개를 비롯한 동물들을 포함하는 생물 분류다, 이런 식으로 돌고 도는 뜻풀이를 한 것은 아닐까? 사전 편찬자들은 수십 만 개 단어 하나하나의 뜻풀이를 놓고 매일 고민한다. 


  단어의 뜻풀이로 한 항목이 완성되는 건 아니다. 그 단어가 실제 언어 생활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보여주려면 예문을 넣어야 한다. 사전 편찬자들은 직접 예문을 만들기도 하고, 단행본과 신문, 잡지에서 모은 예문들 중에서 예문을 고르기도 한다. 요즈음에는 웹으로 예문을 수집할 수 있어 한결 일이 수월해졌다. 하지만 그 예문이 적절한지는 웹이나 인공지능이 판단할 수 없으니, 사전 편찬자들은 오늘도 적절한 예문을 찾아 헤맨다. 


  두 책을 통해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언어생활과 지식을 더 풍요롭게 만든 사람들의 뒷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혼자 최초의 영어사전을 만든 새뮤얼 존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척박한 땅에서 따분한 일을 계속하는 무해한 노역자"들은 종이사전, 아니 사전의 위기 앞에서도 묵묵히 자기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이 아날로그 시대에 쌓아온 경험과 노하우가 디지털 시대에도 이어지면서 우리의 언어와 지식에 든든한 토대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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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사전 편찬자들
정철 지음 / 사계절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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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언어와 지식을 풍요롭게 했던 사람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디지털 시대의 장점을 살려서 아날로그 시대의 유산이 사라지지 않고 더욱 풍성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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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코리 스탬퍼 지음, 박다솜 옮김 / 윌북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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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의 애환과 함께 영어 단어에 담긴 역사와 문화까지 엿볼 수 있는 에세이. 한국인 독자로서 영어 원어민만큼 영어 단어의 미묘한 어감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번역자가 그것을 최대한 전달하려고 노력한 것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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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의 비밀 - 아시아 베스트 컬렉션 아시아 문학선 15
바오 닌 외 지음, 구수정 외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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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알게 되는 경로는 참 다양하다. 이웃 블로거 분이 작년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되었던 <만토>라는 영화 이야기를 했었다. <만토>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작가인 사다트 하산 만토Saadat Hassan Manto, 1912-1955라는 인물의 삶을 그린 영화인데, 그의 작품 중 단편소설 「모젤」이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소설이 담긴 단편집 『물결의 비밀』을 언급했다. 인터넷에서 좀 더 정보를 찾아보니, 『물결의 비밀』 은 사다트 하산 만토뿐만 아니라 아시아 여러 국가의 작가들이 쓴 단편들을 모은 책이었다. 일본과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지역의 문학은 접하기 어렵기 때문에 다른 작가들의 단편도 모두 읽고 싶어졌다. 「모젤」 덕분에 나머지 열한 편의 단편도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책을 만나게 한 단편 「모젤」은 인도에서 일어나는 종교 간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인도는 1947년 힌두교를 믿는 인도와 이슬람교를 믿는 파키스탄으로 분리되었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학살, 폭행, 강간을 저지르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이후로도 종교 간의 갈등으로 인한 폭력사태와 학살은 인도에서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작가는 종교 간의 갈등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문제도 작품에서 다루었다고 한다. 이 작품도 그러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주인공 티얼로천은 무슬림들이 폭력 사태를 일으키고 있는 동네에서 사는 약혼녀 키르팔을 걱정한다. 시크교도인 키르팔은 언제라도 무슬림의 희생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티얼로천이 고민만 하고 있을 때 티얼로천의 전 연인 모젤은 키르팔을 구하러 나선다. 종교 간의 갈등이 폭력을 낳는 상황에서 소수자인 유대인인데도 주눅들지 않고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행동하는 모젤의 용기가 빛난다.(그런데 모젤만 티얼로천에게 존대를 하고 티얼로천은 모젤에게 반말을 하는 것으로 번역된 것이 아쉬웠다. 둘은 동등한 연인 관계이고, 모젤은 당당한 여자인데. 그래서 머릿속으로는 모젤이 반말을 하는 것으로 바꿔 읽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지만 약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쓰는 모젤은, 만토가 활동했던 시기 인도 여성들의 위치를 생각해 볼 때 파격적인 여성 캐릭터다. 만토는 이 작품 외에도 파격적인 작품들로 논란을 몰고 다녔다는데 그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졌다.

또 다른 인도 작가 마하스웨타 데비의 단편 「곡쟁이」는 인도의 밑바닥 인생들을 그린 블랙코미디다. 주인공 사니차리는 남편이 죽었을 때도, 아들이 죽었을 때도 울지 않았다. 그러나 장례식에 가서 곡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게 되자, 생판 모르는 남을 위해 친가족보다 서럽게 통곡한다.

"슬퍼서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독한 재난을 당한 뒤에도 사람들은 차츰 목욕을 하고 밥을 먹고, 마당에서 고추를 물어뜯고 있는 염소를 쫓아낸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먹지 못하면 죽는다. (...) 사니차리는 슬픔에 넋을 잃었지만 울지는 않을 것이다. 돈, 쌀, 새 옷, 이런 것들을 대가로 얻지 않는다면, 눈물은 쓸모없는 사치다."

사니차리는 낮은 카스트의 가난한 하층민이고, 의지할 가족 한 명 없는 과부다. 살기 위해서는 눈물이나 감정조차 상품으로 팔 수밖에 없다. 사니차리의 눈물을 사는 부자, 고위층들은 정작 가족이 살아 있을 때는 병상에 방치해 두면서 죽고 난 뒤에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룬다. 순전히 체면치레 때문에. 진심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을 곡쟁이들의 통곡도 장례식을 빛내는 수단으로 여기고 기꺼이 돈을 내어준다. 이렇게 비정한 현실을 입담 좋게 풀어내 읽는 재미가 있지만, 읽고 나면 씁쓸함이 남는다.

읽는 재미로는 이 단편집에 실린 단편들 중 「곡쟁이」와 투 톱을 이루는 작품이 중국 작가 츠쯔젠의 소설 「돼지기름 한 항아리」이다. 주인공은 세 아이를 둔 엄마이고, 남편은 헤이룽장성의 임업 작업장에서 일하느라 주인공과 아이들과 떨어져서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관리소에서 가족들과 살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며, 살고 있던 집을 팔고 아이들을 데리고 오라고 편지를 보낸다. 주인공은 집을 판 돈으로 산 돼지기름 한 항아리와 세 아이를 데리고 남편에게 간다. 무거운 돼지기름 항아리와 세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이끌고 가는 여정이나, 이사 간 임업 작업소에서의 삶이나 만만치 않지만 그 안에 따뜻한 정과 나름대로의 행복이 있다. 단편이다 보니 몇 문장만에 수 년, 수십 년이 훅훅 지나는 게 아쉬웠다. 살을 좀 더 붙여 장편으로 만들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 글에서는 가장 마지막으로 이야기하지만, 가장 먼저 독자들을 맞는 작품은 표제작 「물결의 비밀」이다. 베트남 작가 바오 닌이 쓴 이 작품은, 베트남 전쟁 당시 어느 마을의 어느 강이 품고 있는 비극을 이야기한다. 모든 비극을 보고도 묵묵히 흐르는 강물처럼, 주인공도 자신만이 알고 있는 슬픈 비밀을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 전체 분량은 4페이지밖에 안 되지만, 작품이 남기는 여운은 그보다 수십, 수백 배 길다.

표제작처럼 다른 작품들도 아시아 곳곳의 물결들이 품고 있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어떤 부분은 우리와 닮아서 공감하게 되고, 어떤 부분은 우리와 달라서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의 모습들을 보게 된다. 편집 후기에서 미처 다 담지 못해 아쉽다고 했던 단편들도, 이 단편집에 실린 작품을 쓴 작가들의 다른 작품들도 이어서 만나고 싶다. 우리가 만나지 못한 이야기들이 너무나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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