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아 옷장에 갇힌 인도 고행자의 신기한 여행
로맹 퓌에르톨라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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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화 <이케아 옷장에서 시작된 특별난 여행>를 함께 보고 이야기하는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원작이 있는 영화니 원작을 미리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 같아 도서관에서 원작을 빌려 읽었다. 절판된 책이라 도서관에서 빌릴 수밖에 없었고, 도서관에 간 날 이 책이 제 자리에 꽂혀 있지 않아 사서 분이 서가들을 뒤져 책을 겨우 찾아냈다. 모임을 갖기 전에 가까스로 원작 소설을 구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내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이케아 옷장'에 '인도 고행자', 거기에 '신기한' '여행'이라니. 제목만 들으면 엉뚱하면서도 독특한 여행기일 거라는 기대감이 든다. 스웨덴의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처럼 엉뚱한 주인공의 별난 모험담으로 독자들을 즐겁게 하지 않을까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창문 넘어...』에 비하면 이야기는 훨씬 빈약하고 구성은 엉성하다. 한국어 번역판 기준으로 『이케아...』(280페이지)가 『창문 넘어...』(512페이지)의 거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굳이 『창문 넘어 ...』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세계 곳곳을 누비면서 일어나는 갖가지 이야기들을 기대했던 독자들에게 300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은 빈약한 편이다. 게다가 주인공은 단 4개국만 여행하고, 원한을 산 사람들에게 쫓겨다니느라 제대로 된 관광도 하지 못하니, 다채로운 세계 풍경을 기대한 독자라면 아쉬울 것이다. 생각지 못한 아주 사소한 계기들로 인해 이야기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점에서도 이 소설은『창문 넘어...』와 닮아 있지만, 『창문 넘어...』가 길고 험난한 코스의 롤러코스터라면 『이케아...』는 짧고 평탄한 코스의 어린이용 롤러코스터 같다. 짧은 만큼 즐길 것도 적다. 


주인공을 인도인으로 설정했으면서도 인도에 대한 작가의 이해가 피상적인 것도 큰 단점이다. 한국어판 제목에서 '인도 고행자'로 번역된 '파키르(fakir)'는 원래 무슬림 수행자를 일컫는 말이었지만 인도에서는 의미가 더 넓어져서 힌두교도 고행자들도 '파키르'에 포함된다. 주인공 아자의 고향인 자이푸르는 주민의 대부분이 힌두교도인 지역이기 때문에 아자는 힌두교도 고행자일 가능성이 90퍼센트다. 그런데도 아자는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힌두교 신이 아닌 부처를 찾는다. 힌두교에서도 부처를 힌두교의 주요 신인 비슈누 신의 화신 중 하나로 여기긴 하지만, 힌두교도 고행자라면 부처보다는 힌두교 신을 찾았을 것이다.(정작 이 작품 속에서 아자는 딱 한 번 힌두교 신인 시바를 부른다.) 


또 소설 속에서 아자는 인도 안의 어느 작은 왕국 궁정에서 광대로 일하면서 음식을 훔쳐먹다 들킨다. 오른손을 잘릴지, 아이들에게 비행 예방 교육을 할지 선택하라는 왕의 말에 아자는 선생이 되는 쪽을 선택한다. 인도에는 수많은 지방 왕국들이 있었지만 1947년 인도가 독립하고 인도 정부가 세워진 이후 모두 인도 공화국 정부에 흡수됐다. 인도 사법 체계가 아주 훌륭하게 운영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방 왕국 군주가 인도 정부의 사법 체계를 무시하고 도둑질을 했다는 이유로 신체를 절단하는 형벌을 집행하는 일은 20세기 초까지나 가능했던 일이다.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2010년대인데도 이 소설 속 인도는 여전히 신체 절단형을 집행하는 야만적이고 미개한 국가다. 


게다가 아자의 정식 이름인 '아자타샤트루'를 가지고 비슷한 발음의 우스꽝스러운 프랑스어 단어들로 몇 번이나 말장난을 하는데, 전혀 웃기지 않고 인종차별적으로 느껴진다. 작품 속에서 아자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이상한 프랑스어 단어로 말하는 사람들이 모두 유럽 백인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작가는 국경 담당 경찰로 일하고 있는 사람답게 이민자 문제에 관심이 많고, 이 작품에서도 이민자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단지 가난하고 전쟁이 많은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고국을 떠나 떠돌아다녀야 하고 가는 곳마다 문전박대당하는 이민자들에 대한 연민이 이 작품에서 짙게 드러난다. 그런데 이민자들과 같은 이방인 아자와, 그가 자라온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다소 무신경하게 느껴진다. (원작을 읽었던 지인 분은 유럽 안의 또 다른 이방인인 집시들(주인공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택시 운전사 귀스타브로 대표되는)이 희화화된 것도 지적했다.) 이런 작가의 무신경함이 이민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서로 선을 베풀며 살자는 작품의 메시지를 희석시킨다.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는 알겠고, 작품 자체도 몇 시간 안에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긴 하다. 아마추어가 직장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쓴 것이니 너그럽게 봐 줘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을 출간한 순간부터는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이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프로 작가다운 작품을 쓴 작가들도 많다. 선한 마음을 갖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며 살아가면 꿈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메시지, 마음 편하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대중성 덕분에 36개국에서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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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아 옷장에 갇힌 인도 고행자의 신기한 여행
로맹 퓌에르톨라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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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엉뚱한 주인공의 독특한 여행기를 그린다는 점에서『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과 성격이 비슷하지만, 그보다 이야기는 빈약하고 구성은 엉성하다. 인도인을 주인공으로 삼았으면서도 인도에 대한 이해는 피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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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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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항상 낯선 나라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바로 옆 나라들의 이야기나 가장 흔하게 보고 듣는 영미권의 이야기가 아니라 더 먼 곳, 더 낯선 곳의 이야기들. 그래서 읽을 소설을 찾다 눈에 띈 것이 나이지리아의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였다. 


이 책을 사기 전 인터넷 서점의 미리보기를 읽을 때부터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나이지리아의 낯선 자연과 문화, 풍속이었다. 주인공네 집 정원에 피어 있는 온갖 낯선 식물들, 재료부터 낯설어 무슨 맛일지 상상도 안 되는 나이지리아 전통 음식들, 주인공의 할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이 치르는 나이지리아 전통 종교의식. 이보어(나이지리아의 주요 언어 중 하나) 단어들이 대화 중간 중간에 번역되지 않은 채로 끼어 있어 낯선 느낌이 더 강해졌다. 


하지만 깊이 없는 이해 없이 낯선 것들의 매력만 즐기는 데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 이 책에서 깊은 이해와 공감을 이끌어낸 건 낯익은 이야기였다. 주인공들이 겪는 가부장제, 유일신교, 독재정권의 억압은 우리가 겪었거나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이다. 왜 지금 여기에서 낯익은 이야기를 찾지 않고 먼 나이지리아에서 낯익은 이야기를 찾느냐고 한다면, 나는 더 넓은 세상의 이야기가 궁금하고, 그 사람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동질감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주인공 캄빌리와 오빠 자자는 가부장제, 유일신교, 독재정권이라는 3중의 억압을 겪고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그들을 속박하는 것은 가부장제와 유일신교였다. 가부장제와 유일신교의 권위로 아버지가 그들의 삶을 좌지우지했기 때문이다. 남들은 부유한데다 정의로운 민주화 투사인 아버지를 존경하고, 그런 아버지의 자식으로 태어난 두 남매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집안에서 아버지는 가장의 권위를 내세우며 아내와 자식들에게 자신의 규칙과 가톨릭 신앙을 강요하는 폭군이다. 아내와 자식들이 자신의 뜻을 조금이라도 거스르면 아버지는 무자비하게 그들을 폭행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 아버지의 규율과 통제에 얽매어 있었던 두 남매는 그것이 폭력이고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그런 두 남매가 자신들의 억압적인 상황을 깨닫고 변화하기 시작하게 한 것은 이페오마 고모였다. 이페오마 고모는 국립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 지식인이고, 가부장제와 유일신교, 독재정권의 폭력과 억압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자식들이 자신을 거역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아버지와 대조적으로, 이페오마 고모는 항상 자기 아이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아이들이 자유롭게 행동하게 한다. 이페오마 고모 덕분에 방학 동안 고모 댁에 머물던 캄빌리 남매는 스스로 생각하고, 생각한 대로 말하는 것을 점차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아버지의 억압과 폭력으로 숨 막히게 만드는 이 소설에서 이페오마 고모는 두 남매뿐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숨 쉴 틈을 만들어준다. 


고모 덕분에 변화한 두 남매가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스스로 자유를 찾길 바랐던 내 기대를 저버리고, 이 소설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아버지의 권위에 흠집이 가고 무너지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아버지는 죽고 나서도 두 남매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남긴다. 군사 정권의 원수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이지리아의 모든 문제가 갑자기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부패와 불의, 억압이 가득한 나이지리아를 떠나 미국에 간 이페오마 고모네 가족도 인종차별과 가난에 시달릴 것이다. 실질적으로 문제들이 해결된 것도 아니고, 캄빌리가 눈에 띄는 성장을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두 남매의 마음속에는 “이페오마 고모의 실험적인 보라색 히비스커스처럼 느껴지는”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것을 할 자유.”가 주어졌다. 적어도 자유의 씨앗은 둘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렸다. 진정한 자유는 마음속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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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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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 자체도 자각하지 못했던 두 남매가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것을 할 자유를 찾기까지의 고통스러운 성장기. 변화와 성장이 아무리 느리고 고통스럽다고 해도, 자유를 찾아도 그 다음에 짊어져야 할 것들이 많다 해도 자유와 변화, 성장을 향한 갈망은 막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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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설의 시대 1 백탑파 시리즈 5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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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끔 소설을 쓰곤 한다. 내가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일기 대신 소설의 형식으로 쓴다. 일기도 매일 쓰긴 하지만, 일기를 쓸 때보다 좀 더 거리를 두고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나와 그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어가는 것이 흥미롭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큰 흐름도 잡아놓지 않고, 가끔씩 소설이 쓰고 싶어질 때마다 마음 가는 대로 몇 문단씩 써 놓는다. 나 자신을 제외한 어느 누구에게도 읽힐 만한 소설은 못 되지만 소설을 쓰는 행위에서도, 써 놓은 소설에서도 위안을 얻는다.


김탁환 작가의 『대소설의 시대』를 읽으면서, 18세기 조선에도 나처럼 소설을 읽고 쓰는 것을 즐겼던 여성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근 전체 180권이나 되는 『완월회맹연』등의 대소설이 여성들의 손으로 쓰여진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고, 김탁환 작가는 그 연구 결과를 토대로 『대소설의 시대』를 썼다고 한다. 조선 후기 여성들이 한글 소설을 즐겨 읽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소설을 직접 창작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것도 100권이 넘는 길고 긴 소설이라니. 조선 후기 여성 작가들이 이런 대작을 쓸 수 있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김탁환 작가는 지금까지 나온 연구 결과에 상상을 섞어 ‘임두’라는 필명의 조선 후기 여성 작가를 만들어냈다. 임두는 23년 동안 199권에 이르는 소설 『산해인연록』을 써 왔다. 그녀가 23년 동안 소설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소설을 좋아했던 혜경궁 홍씨와 의빈 성씨가 그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후원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그녀의 소설을 독자들이 읽기 쉽도록 깔끔하게 필사해 주는 궁녀들의 도움이 있었다. 이렇게 대소설을 만드는 여자 뒤에는 소설을 사랑하는 여자들의 연대가 있었다.


그녀들 이전에는 임두가 처음 작가로서 발을 내딛게 해준 여자들의 연대가 있었다. 시부모는 스물네 살의 임두에게 오랜만에 친정에 온 시누이를 위해 소설들을 필사하라고 했다. 임두는 단순히 필사만 한 게 아니라 자신이 보기에 필요 없는 내용을 빼고 내용을 더 지어서 넣었다, 시어머니는 임두가 더 넣거나 뺀 내용을 보고 임두의 글 쓰는 재능을 알아보았다. 그 이후로 임두는 시댁 여인들의 소설 쓰기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고, 소설을 쓰는 즐거움에서 평생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임두 같은 대작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소설을 놓았다 하더라도, 그녀들이 있었기에 임두는 작가가 될 수 있었다. 소설에 자신들이 겪는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고통을 담았던 그녀들에 대한 기억이 임두가 대소설을 수십 년 동안 계속해서 쓸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이 되었다.


그녀들과 임두가 그토록 소설을 사랑했던 것은, 그 시절 그녀들이 꿈을 꾸고 욕망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소설뿐이었기 때문이다. 작은 조선의 한 집안 안에 갇혀 지내지만 그녀들은 소설 속에서 광활한 대륙과 천상의 세계, 지하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수백 명의 인물들이 그 안에서 살아 숨 쉬게 만든다. 단지 이야기일 뿐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때로는 살아갈 힘을 준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에게도, 그 이야기를 읽거나 들으며 즐기는 사람들에게도.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꿈을 꾸고 욕망하고 그것을 펼쳐낼 방법이 많아진 시대를 살고 있지만, 나는 수백 년의 그녀들에게 깊이 공감한다. 내게는 그녀들이 겪었던 것과는 또 다른 현실과 제약들이 있고, 그런 답답한 현실에서 내가 버틸 수 있게 하고, 꿈꿀 수 있게 하는 건 이야기들을 읽고 쓰는 것이다. 대소설의 시대는 이야기를 만드는 여자들의 시대였고, 그 시대는 끝나지 않고 내 안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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