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미술 Art & Ideas 11
조너선 블룸 외 지음, 강주헌 옮김 / 한길아트 / 200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멀고 낯선 나라의 이야기가 담긴 책, 예쁜 이미지가 많이 실린 책을 읽고 싶어진다. 도서관에서 그런 책을 찾다 문득 몇 년 전에 읽었던 『이슬람 미술』이 떠올랐다. 이슬람교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근대까지 이슬람 미술사 전체를 훑어보는, 두껍고 사진이 많았던 책. 그때는 호기심에 읽었다가 생각보다 지루해 꾸역꾸역 읽었는데, 그때보다 공부 양이 많이 쌓였고 딱딱한 책에 대한 인내심도 더 많아진 지금이라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확실히 몇 년 전보다는 재미있게 읽혔다. 더 이상 역사와 미술사를 전공 과목으로 공부하지 않게 된 이후로 역사와 미술사 공부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깨달았으니까. 이 책은 미술사와 그 정치적, 사회적 배경이 되는 역사를 잘 설명하고 있고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다. 하지만 서술이 딱딱하다는 평에는 공감했다. 알함브라 궁전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부분처럼("햇살이 볼트 천장의 드럼에 설치된 창문으로 스며들 때 생기는 그림자의 움직임은 별이 총총한 하늘이 회전하는 듯한 효과를 자아낸다.") 서정적인 문장들도 종종 보이지만, 대부분은 사실 그 자체만 나열하는 서술이라 종종 지루하게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그만큼 정보량이 많다. 이슬람 미술에 대해 이렇게 풍부한 내용을 담은 책이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없으니 정보량이 많은 건 분명히 장점이다.


13세기의 서예가 야쿠트 알 무스타심이 필사한 쿠란. 16세기 중반 오스만 제국(지금의 터키)에서 이 쿠란을 복원했다.

이미지 출처: https://www.donttakepictures.com/dtp-blog/2016/3/7/bookmarks-islamic-arts-museum-of-malaysias-quran-collection


딱딱한 서술에 지루해지다가도,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나오는 아름다운 이슬람 미술 작품들에 마음을 사로잡힌다. 이슬람 문화권 사람들은 책을 신의 계시가 담긴 것, 문화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책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만들었다. 각지게 쓰거나 물 흐르듯이 부드럽게 흘려쓰거나, 굵기를 일정하게 하거나 강약을 주는 등, 글의 목적과 성격에 맞추어 다양하게 써내려간 아랍 문자들은 그 자체로 예술이다. 거기에 각 장의 제목, 본문의 첫머리, 한 문장 한 문장이 끝나는 곳, 모음 부호까지 금박과 은박, 화려한 색색의 물감들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비흐자드, <유수프의 유혹>, 1488. 유수프(요셉의 이슬람식 발음)가 이집트 노예로 지내던 시절,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해 오자 도망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책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건 삽화로 실린 세밀화들이다. 옷과 머리 모양만 바꾸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전형적으로 그려진 인물들과 달리, 그들이 입은 옷과 그들을 둘러싼 배경은 더 없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스크린톤 없이 어떻게 저렇게 자잘한 무늬를 다 그려냈을까, 어떻게 저런 색감을 만들어냈을까 신기하다. 각각의 색들이 보석처럼 빛난다. 



아르다빌의 카펫, 이란, 1539~1540. 가로 10m, 세로 5m에 달하며 장식매듭이 수천만 개나 되는 정교한 작품이다. 이미지 출처: https://ardabilcarpetanalysis.wordpress.com/2017/11/16/formal-and-contextual-analysis-of-the-ardabil-carpet/ 이슬람 문화권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카펫. 수 세기 동안 직물은 이슬람 경제의 근간이었고 경제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중시되었다. 이 책에도 이슬람 직물들의 도판이 많이 실려 있는데, 그 중에서도 카펫은 다른 문화권의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화려하다. 길이가 10m가 넘는데다 장식매듭이 수천만 개나 된다니 얼마나 정교한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샤 자한의 백옥으로 만든 포도주잔, 인도, 1656~1657. 조롱박 형태는 중국에서, 염소 머리 모양 손잡이는 유럽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무굴 제국은 실크로드 도시인 호탄이나 중국에서 옥을 수입해 정교한 옥 공예품을 만들었다. 이미지 출처: https://www.pinterest.co.kr/pin/335940453438363473/ 우아한 공예품들도 눈길을 끈다. 대부분 여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공예품들이지만, 샤 자한의 백옥 포도주잔은 간결하면서 단아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많지 않은 선으로도 잔의 우아한 형태를 만들어냈고, 티 없는 하얀색이 깨끗한 느낌을 더한다. 꼭 필요한 형태와 선만으로 우아함을 만들어낸 장인의 솜씨가 감탄스럽다.


이스파한의 샤 모스크, 이란, 1611~1616.

이미지 출처: https://www.anciens-stmarc-lyon.fr/vie-de-lassociation/photos-iran/ispahan-la-mosquee-du-shah/image_view_fullscreen 

예배를 드리는 모스크와 군주들이 생활하고 정무를 보는 궁전, 군주와 그의 가족들이 묻힌 영묘는 처음에는 단순한 모습이었지만, 필요에 따라, 각 지역의 특성에 따라 독특한 건축 양식이 발전하게 되었다. 기독교의 성당에서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장식들이 이슬람교의 모스크와 궁전, 영묘에서는 주된 요소로 사용된다. 돔과 주변의 미나레트(첨탑), 뽀족 아치가 만들어내는 우아한 선과 건물 표면을 뒤덮고 있는 화려한 아라베스크 무늬가 어우러져 이슬람 문화권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다시 읽는 책인데도 새삼 느꼈다. 세상은 넓고 아름다운 것은 많구나. 그리고 내가 잘 모르는 역사와 미술사가 너무 많구나. 고등학생 때 공부한 세계사에서도 이슬람권의 역사가 나왔는데 까맣게 잊어버렸다. 우리와 가까운 중국, 일본사나 근대에 들어 세계사를 주도한 서구의 역사보다 세계사 교과서에서 비중도 훨씬 적었고, 고등학생 때 이후로 접할 일도 거의 없었으니까. 대학교에서도 이슬람 역사만 따로 공부하는 과목은 없었고. 또한 서양미술사를 다룬 책은 정말 많은데 이슬람 미술만을 다룬 한국어 책은 몇 권 되지 않는다. 이 책이 출간되고 17년이 지났는데도 같은 주제를 다루었거나 최근의 연구 동향을 반영해서 업데이트한 책이 거의 없다시피하다. 우리가 책을 통해 접하는 세상도 좀 더 넓어졌으면 좋겠다.


* 책에 실린 작품 사진들은 저작권 때문에 사용하기 어려워 책에 실린 작품들을 검색해 찾은 이미지로 대체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슬람 미술 Art & Ideas 11
조너선 블룸 외 지음, 강주헌 옮김 / 한길아트 / 200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각 시대의 정치, 종교, 문화적 상황에 따라 어떤 미술이 발달하게 되었는지 연대순으로 잘 정리했다. 화려한 도판들이 이슬람 미술에 대한 이해를 도우면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구기담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단편집에 실린 단편 중 한 편인 「특별 요리」가 스탠리 엘린의 특별 요리」(*스탠리 엘린의 특별 요리」서평 https://blog.aladin.co.kr/797871198/11830161)를 오마주한 작품이라고 해서 빌려 봤는데흔한 일본 괴기소설일 뿐이다스탠리 엘린의 특별 요리」가 날카로운 풍자와 통찰력촌철살인인 문장을 갖추고 있는 반면, 이 단편집 속 단편들에는 음습함과 중2병 정서끈적끈적하고 뒤틀린 에로티시즘만 있다.

 

재생 

근친 성폭력의 피해자인 유이가 사실은 본인도 아버지와의 변태적인 성관계를 즐기고 있었고남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봤기 때문에 남편을 선택했다는 설정이 찜찜하다성폭력 가해자들을 정당화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상대도 같이 즐겼다이니까유이의 잘린 머리에서도 새 몸이 나오고머리 없는 몸에서도 새 머리가 나와서 주인공을 당황하게 하는 설정이었다면 더 섬뜩하지 않았을까 싶다.

 

 요부코 연못의 괴어

전 지구급 재앙이라도 불러올 것 같은 괴생명체의 최종 진화 형태가 겨우 예쁜 새였다니 김이 빠진다그나마 중2음습함이 덜하고 밝은 내용의 단편이다.

 

 특별 요리 

스탠리 엘린은 음식에 개똥철학을 부여하는 사람들을 풍자했는데주인공은 아내를 설득하기 위해 개똥철학을 늘어놓고아내는 또 거기에 넘어간다이것도 나름의 풍자라고 할 수 있지만결국 낳자마자 잡아먹기 위해 아이를 가지자고까지 하게 되는 주인공. 엘린의  특별 요리」가  미식에 탐닉하는 사람들을 풍자한 반면 이 소설은 내가 이렇게까지 기괴하고 엽기적으로 쓸 수 있다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더 강한 것 같다.

 

 생일 선물

주인공이 남자친구를 죽이고 기억을 잃었던 것까지는 알겠다하지만 주인공이 왜 남자친구를 죽였는지동아리 사람들이 주인공에게 준 토막시신의 정체는 무엇인지동아리 사람들은 왜 토막시신을 주인공에게 생일 선물로 주었는지는 전혀 밝혀지지 않는다그냥 생시인지 꿈인지 알 수 없는 몽환적인 분위기와 상자를 열어볼 때마다 동아리 사람들이 주문처럼 뇌까리는 섬뜩한 문장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철교

괴담에서 일어난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흔한 설정어떤 때는 지어낸 이야기라도 그 이야기 자체가 실제와 같은 힘을 얻는 것 같다.

 

인형

진짜 주인공이 소멸되고 인형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인형은 자신이 진짜 주인공인 줄 알다가 또 다른 인형에게 소멸당하는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을까지금의 자신과 과거의 자신이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분열된 자아 사이에서 헤매는 이야기.

 

안구기담

주인공이 진짜 후배 아버지의 눈을 희생해서 눈을 뜨게 된 소녀였는지아니면 후배가 그저 주인공을 놀리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었는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는다그래서 더 찜찜함이 남는 이야기후배 아버지로 추정되는 액자 속 주인공이 겪는 끈적끈적한 에로티시즘과 유이의 어머니가 벌이는 행각의 기괴함은 강렬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구기담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신비롭고 무게 있는 척하지만 얄팍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할머니의 팡도르
안나마리아 고치 지음, 비올레타 로피즈 그림, 정원정.박서영 옮김 / 오후의소묘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나오려다 신착 도서 서가를 한 번 더 돌아봤다. 맨 위 칸에 눈에 띄는 그림책이 있었다. 눈 덮인 벌판 위에서 빨간색의 무언가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있는 할머니와 검은 형체. 도대체 저 검은 형체의 정체는 무엇이고, 둘은 추운 겨울에 밖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제목으로 책의 내용을 짐작해 보려고 해도 '팡도르'라는 단어에서 막힌다. 무슨 책인지 잠깐 앉아서 읽다 가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책 한 권을 다 읽는 데 길어야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을 테니까.


크리스마스에 먹는 이탈리아의 전통 빵, 팡도르

이미지 출처: https://www.insidetherustickitchen.com/pandoro-christmas-cake/


내 호기심을 자극했던 단어 '팡도르'는 정확히 발음하자면 '판도로(pandoro)'이고, 크리스마스에 먹는 이탈리아의 전통 빵의 이름이라고 한다. 강가에 있는 어느 시골 마을 외딴 집에 살고 있던 할머니는 '죽음도 나를 잊어버렸다'고 할 정도로 오랜 세월 혼자 외롭게 살아왔다. 직접 빵을 만들어 마을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할머니의 낙이다. 크리스마스를 몇 주 앞둔 어느 겨울, 할머니를 잊어버린 줄 알았던 사신(死神)이 할머니를 데리러 찾아왔다. 할머니는 크리스마스 때 마을 아이들에게 나눠줄 팡도르를 만들어야 하는데, 빵 반죽을 숙성시키고 빵 안에 들어갈 소를 준비하려면 일주일이 걸리니 일주일만 기다려 달라고 한다. 단칼에 거절하려던 사신의 입에 할머니는 빵에 들어갈 달콤한 과일 소를 쏙 넣어주고, 처음 보는 달콤한 맛에 당황한 사신은 할머니를 데려가지 못한다. 그렇게 할머니는 아이들에게 줄 팡도르를 준비해야 한다며 몇 번이나 죽음을 미룬다. 사신은 과연 할머니를 저승으로 데려갈 수 있을까?


기지를 발휘해서 저승에 끌려가는 것을 피한 사람은 우리 옛 이야기에도 나온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 할머니는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직 사람들에게 나눌 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시간을 달라고 한 것이다. 할머니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이웃뿐만 아니라 사신에게까지 달콤한 빵을 나누어준다. 외딴 집에서 홀로 사는 할머니의 처지와 추운 겨울날은 마음을 쓸쓸하게 하지만, 그 속에는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 


그림은 오직 하얀색, 검은색, 빨간색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하얀 눈밭과 대비되는 검은 사신, 빨간 불빛. 잘 구워져 황금빛이 된 빵과 상큼한 귤 소, 달콤한 밤 절임은 빨간색 동그라미로만 표현되지만, 이 동화 속 따뜻함을 전달하기에는 충분하다. 글에서 사신은 검은 망토 대신 할머니가 준 숄을 둘렀더니 우아한 인간 여성처럼 보였다고 묘사되지만, 그림에서는 커다란 검은 자루로 보인다. 그래서 사신이 인간이 아닌 존재라는 것이 더 직접적으로 와 닿고, 그런 존재와도 소통하고 정을 나눌 수 있는 할머니의 따뜻함이 더 크게 느껴진다. 


그림책이지만 아이보다는 어른, 그것도 인생의 황혼을 맞고 있는 어른이 더 공감할 수 있는 책이다. 어린 시절이었으면 할머니의 쓸쓸함과 그 속에서도 따뜻한 정을 나누고 싶어하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 속 할머니만큼 나이가 들면 할머니에게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인터넷 서점에서 이 책이 '어른을 위한 그림책'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는데, 생각해 보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이보다는 인생의 쓴 맛 단 맛을 다 겪고 조용히 삶을 관조할 줄 알게 된 어른에게 더 맞는 책이다. 


눈 오는 겨울날에 읽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한여름에 읽게 되었다. 한여름에 하얀 눈밭과 그 위에서 빛을 발하는 빨간색 빵들과 불빛을 보면서 잠시 겨울을 느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겨울에 다시 읽으면 난로에 손을 쬐듯이 마음에 온기가 퍼져나갈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