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클의 소년들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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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밟혀도 다시 돋아나고 푸르름을 잃지 않는 풀 같았고, 짓이겨져도 향기를 더 강하게 내뿜는 꽃 같았던 소년. 그리고 바람에 유연하게 몸을 맡기며 살아남는 풀 같았던 소년.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들을 짓밟고 꺾으려는 힘을 이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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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설공찬전
이서영 지음, 신중철 그림, 채수 원작 / 솔아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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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설공찬이』, 『다시 쓰는 설공찬전』스포일러 포함


  두 달 전 도서관에서 『다시 쓰는 설공찬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조선 전기의 문신 채수蔡壽, 1449-1515가 쓴 공포 소설 <설공찬전>을 현대 작가가 다시 쓴 소설이다. <설공찬전>은 당대의 베스트셀러로 한문뿐만 아니라 한글로도 필사되어 평범한 백성들 사이에서도 많이 읽혔다. 그러나 당나라에 반역해 후량이라는 나라를 창건했던 장군 주전충이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이유로 논란에 휩싸였다. 당시 국왕이었던 중종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는데, 주전충에 중종을 빗대어 비판했다는 의심을 받은 것이다. 그 밖에도 "저승에서는 여자여도 글을 알면 좋은 벼슬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대목, 명나라 성화제가 총애하는 신하의 수명을 늘려달라고 했다가 오히려 염라대왕에게 노여움만 샀다는 대목이 성리학적 세계관에 갇혀 있던 유학자들에게 노여움을 샀다. 사헌부에서는 저자인 채수를 처형하고 간언했지만, 중종은 너무 과한 처사라며 채수를 파직하는 데 그쳤다. 


  금서가 되어 사라진 줄 알았던 이 소설의 한글 필사본이 1996년 발견되었다. 최초의 한글 소설로 알려진 <홍길동전>보다 100여 년 앞선 소설이었다. 젊은 나이에 죽은 선비 설공찬이 사촌동생 설공침의 몸에 빙의되어 저승 이야기를 한다는 이 소설은 결말 부분이 필사되지 않아 미완성 형태로 남았다. 그럼에도 빙의와 저승 세계라는 환상적인 소재를 다룬 덕분인지 설공찬전을 원작으로 연극도 만들어졌고, 설공찬전을 모티브로 한 웹툰, 웹소설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소설의 배경이 된 순창 지역에서는 설공찬전을 재해석해 다시 쓰는 프로젝트 두 가지를 진행했다.


  그 중 김재석 작가가 쓴 『다시 쓰는 설공찬이』는 전문 작가가 쓴 소설답게 소설 자체의 퀄리티는 괜찮은 편이다. 홍보용 소설답게 우리나라, 특히 순창 지역의 자연과 민속, 저승관을 최대한 자세하게 보여주려는 의도가 보이지만 꽤 자연스럽게 소설에 녹여냈다. 무엇보다 원작에서는 설공찬이 빙의되기 전 잠깐 설공침의 몸에 깃들었다 박수무당 김석산에게 쫓겨나는 부분에서만 등장하는 설공찬의 누이에게 '초희'라는 이름과 그녀만의 서사를 준 것이 흥미로웠다.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고 깊이 이해했지만 세상이 정해 놓은 한계에 부딪쳐야 했던 공찬과 초희 남매의 모습을 애틋하게 그려냈다. 그래서 설공찬은 인간으로 환생하고 설초희는 저승에서 명부를 담당하는 관리가 되었다는 결말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설공찬은 원작에서 사촌동생 설공침을 괴롭히지만, 김재석 작가는 그런 공찬의 행동이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재해석했다. 공찬은 당시 사회의 틀에 갇힌 사람들이 그 틀에서 벗어나 좀 더 자연스럽고 인간적으로 살아가길, 더 선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 때문에 공침의 입을 빌어 이야기한 것이었다. 자신과 동갑내기지만 훨씬 더 총명한 사촌 공찬을 질투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사촌누이 초희를 무시하던 공침은 다소 단순한 악역처럼 보였지만, 공찬의 혼이 빙의되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 초희는 '여자도 능력이 있으면 중용된다'는 원작의 구절을 스스로 증명했다. 원작의 권선징악적인 교훈을 넘어서 두 남매가 새로운 삶을 찾고, 남은 사람들도 그들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돌아보는 결말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다시 쓰는 설공찬이』가 설공찬과 설초희 남매에 집중한 반면, 이서영 작가의 『다시 쓰는 설공찬전』은 이들의 영혼이 빙의되는 설공침에게 집중한다. 『다시 쓰는 설공찬이』에서 설공침이 다소 단순한 악역으로 나왔던 것과 달리(이 소설에서도 나중에는 설공침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만) 『다시 쓰는 설공찬전』에서 설공침은 악하다기보다는 아무것에도 의욕이 없어 아무렇게나 사는 인물로 묘사된다. 설공찬과 설공심(『다시 쓰는 설공찬전』에서는 설공찬의 누이가 '설공심'이라는 이름으로 설정되어 있다) 남매의 빙의는 설공침이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된다. 빙의가 풀리고 나서 그는 자신의 몸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 일인지 깨닫고, 설공찬의 저승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아 있을 때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원작과 『다시 쓰는 설공찬이』에서 설공찬이 저승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통로로만 활용되었던 설공침을, 빙의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주인공으로 해석한 것이 신선하다. 빙의가 풀린 뒤 설공찬이 오랜만에 제정신으로 느끼는 자신의 몸과, 그 몸에 닿는 부드러운 이불 같은 작은 것들에서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새롭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심리 묘사가 특히 섬세하다. 


  하지만 서사 전개에서는 역시 중견 작가인 김재석 작가가 더 노련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서영 작가가 원작의 서사를 그대로 풀어 쓰면서 설공찬과 설공심, 설공찬은 이런 사람이라고 직접 설명하는 반면, 김재석 작가는 원작에 없는 사건들을 만들어내 설공찬, 설초희 남매의 서사를 엮어나가고 둘의 말과 행동을 통해 둘이 어떤 인물인지 보여준다. 이서영 작가는 살구나무에 내려앉는 공심 혼령의 옷자락에서 살구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무시무시하면서도 아름다운 장면으로 완성하지만, 설공침에게 빙의된 설공찬이 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설공침의 아버지 설충수를 농락하는 장면에서의 공포감은 김재석 작가가 더욱 더 스릴 있게 그려낸다. 모든 인물이 표준어를 쓰는『다시 쓰는 설공찬이』와 달리『다시 쓰는 설공찬전』은 순창 토박이 주민의 감수를 받아서 순창 방언을 쓴 정성이 돋보이지만, 설공찬 남매, 설공침은 순창 방언을 쓰는데 주인공들의 부모 세대는 표준어를 쓰고 있어 일관성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부모 세대가 한양에서 살다 온 것도 아니다. 설씨 일가는 몇 대째 순창에서 살아 왔으니 순창 방언을 쓰려면 부모 세대도 쓰는 것으로 설정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내가 드라마를 만든다면 김재석 작가 버전을 원작으로 하거나 두 작가 버전을 모두 활용하되 이서영 작가 버전에서는 설공침의 내면 부분을 가져올 것이다. 


  관에서 시작한 프로젝트답게 두 책의 만듦새 모두 투박하다. 문제집만큼 큰 판형에 동화책만큼 여백이 넓고 글씨가 커 소설이라기보다는 동화책 같은 느낌이다. 『다시 쓰는 설공찬전』은 서문에 영어 번역을 병기했는데, 영어 실력이 좋지 않은 나도 서문의 영문 번역이 딱딱한 직역이라고 느껴졌다. 그리고 영문 텍스트에서 단행본 제목은 보통 이탤릭체로 표기하는데 영문 버전에서도 단행본 제목을 중괄호([]) 안에 넣어 영문 텍스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좀 더 경험이 많은 출판사에 맡겨서 세련된 편집과 디자인으로 나왔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고전의 재해석 자체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재해석 작품들이 양적으로도 많이 늘어나고 질적으로도 더 발전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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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설공찬전
이서영 지음, 신중철 그림, 채수 원작 / 솔아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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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공찬 남매에게 몸만 빌려주는 역할만 하던 설공침의 내면에 집중하려는 시도는 신선했지만, 다소 주입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느낌이 든다. 교정교열이나 서문의 영어 번역이나 엉성하고, 순창 방언을 등장인물의 대화에서 살리려는 의도는 좋았지만 등장인물 중 일부는 서울말을 써 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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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독본 - 〈아Q정전〉부터 〈희망〉까지, 루쉰 소설·산문집
루쉰 지음, 이욱연 옮김 / 휴머니스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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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고향」스포일러 포함


희망이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다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고향

 

  좋아하는 드라마의 명대사가 루쉰의 이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부터 이 구절을 좋아했다지금까지도 책상 앞에 써 붙여 놓았을 정도로 좋아하지만 이 구절이 루쉰의 단편 소설 고향속 한 구절이라는 것을 알 뿐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는 몰랐었다십여 년이 지난 지금 고향을 처음으로 읽게 되면서 내가 사랑하는 이 구절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알게 되었다.


  「고향의 주인공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대대로 살아오던 고향집을 다른 사람에게 팔게 되었다고향집을 처분하러 20여 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어린 시절의 정겨운 모습이 아니었다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황량하고 쓸쓸했다기와 사이에는 풀이 돋아나 있을 정도로 고향집은 낡아버렸고일가친척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나 늙은 어머니와 어린 조카만 남아 있다어린 시절 함께 놀던 친구는 흉년과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며 겉늙어 예전의 생기를 모두 잃어버렸다위의 구절은 주인공이 어머니조카와 타향으로 떠나는 배에서 희망에 대해 생각하다 하는 말로이 소설의 마지막 구절이다.

 

  이렇게 결코 희망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주인공은 어떻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주인공은 조카를 비롯한 미래 세대들에게서 희망을 본다자신과 고향 친구는 성인이 되어 재회했을 때 계급 차이(주인공은 지주의 아들이고 친구는 소작농의 아들이다)로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지만아직 어리고 순수한 조카와 친구의 아들은 계급 차이는 신경 쓰지 않고 스스럼없이 서로를 대한다주인공은 그 아이들이 자신과 친구가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살기를 바란다고향의 주인공처럼 루쉰은 지금 세대보다 미래의 세대가지금의 세상보다 미래의 세상이 더 발전하고 진화하기를 바랐다.

 

  그는 중국인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역사가 노예가 되고 싶어도 되지 못한 시대와 노예가 되어 잠시 안정적으로 살았던 시대가 교차해 온 역사였을 뿐이라고 말한다이민족 정복자나 권력자가 사람들을 노예로도 삼지 않고 개나 소를 죽이듯이 쉽게 죽였던 시대와노예가 되어 착취당하더라도 그나마 목숨은 부지했던 시대루쉰은 권력자와 부자들을 위해 힘없는 사람들가난한 사람들이 희생되어 왔던 중국의 역사를 인육의 잔치라고까지 한다그의 또 다른 단편 소설 광인일기에서 피해망상증에 걸린 주인공은 주변 사람들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생각하고 공포에 사로잡히는데그저 정신병자의 망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일말의 진실이 들어 있다실제로 인육을 먹는 것은 아니라 해도 사람이 자신을 위해 동족을 해치는 세상은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 왔으니.


  「광인일기의 주인공이 미쳐 있는 동안 쓴 일기는 식인해 보지 않은 아이가 혹시 아직도 있을까아이들을 구하라는 구절로 끝난다루쉰은 아무도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새로운 시대를 꿈꾸었고그 시대를 만드는 것이 청년들의 사명이라고 말한다그는 청년들이 인육의 잔치판을 치워버리고 생존하고 발전하기를 바란다자신이 길을 안다고 그럴 듯한 간판만 내세우는 자칭 지도자들을 따르기보다는친구들을 찾고 그들과 단결해 생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근대 이전의 낡은 관습과 근대의 새로운 사상이 서로 충돌하고외세의 간섭과 침략이 계속되는 혼란스러운 당시의 중국 사회에서그는 자신조차 어떤 길을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솔직히 털어놓으며 청년들 스스로 길을 찾아가기를 바랐다.


  100여 년 전 중국 작가 루쉰이 동포들에게 외쳤던 이 이야기들이 왜 시간과 국경을 뛰어넘어 지금의 우리에게도 생생하게 다가오는 걸까죽임당하거나 노예가 되어 착취당해 왔던 식인의 역사는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계속되고 있는 역사이기 때문이다지금의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을의 위치에서 착취당하거나 을이 될 기회조차 없어 내일의 생계를 걱정한다수많은 사람들이 청년들의 멘토를 자처하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공허한 소리만 늘어놓거나 근거 없이 희망을 이야기할 뿐이다오히려 자신은 누군가에게 길을 가르쳐주고 이끌어줄 입장이 못 된다고 말하는 루쉰이 더 믿음직스럽게 느껴진다그저 다 잘 될 거라는 말보다희망이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닐지 의심하면서도 끝까지 절망과 싸우려 했던 루쉰의 절박함이 더 와 닿는다.

 

  루쉰이 끝까지 놓지 못한 희망은 이루어졌을까그가 자신이 살던 시대의 어두움을 뚫고 희망을 보려던 그때로부터 100여 년 뒤의 미래 세상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루쉰이 살던 세상보다 나아졌을까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상은 지금도 계속되니 어떤 면에서는 정체되어 있고그의 조국에서는 이제 그처럼 쓴소리를 하는 사람은 발을 붙일 수 없으니 어떤 면에서는 더 후퇴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세상을 더 발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자기 자신조차 냉정하게 평가하는 그의 비판 정신은 숫돌처럼 우리의 정신을 날카롭게 만든다헛된 희망이 사람들을 더 고통스럽게 할까 경계하면서도청년들이 자신이 겪었던 공허함과 적막함을 다시 느끼지 않도록 위로하려는 그의 따뜻한 마음은 100여 년 뒤의 우리에게도 와 닿는다희망이 있다고 섣불리 낙관하지도없다고 섣불리 비관하지도 않고 다른 이들과 손을 잡고 함께 희망을 만들어 가길 바랐던 마음고향의 마지막 구절을 늘 보면서도 알지 못했던 그 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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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독본 - 〈아Q정전〉부터 〈희망〉까지, 루쉰 소설·산문집
루쉰 지음, 이욱연 옮김 / 휴머니스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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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세상이 오는 것을 막는 모든 것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까지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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