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웃어주지 않기로 했다 - 친절함과 상냥함이 여성의 디폴트가 아닌 세상을 위해
최지미 지음 / 카시오페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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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장소에서 예절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지적을 할 때마다, 특히 나이 지긋한 사람에게 지적할 때 두렵다. '젊은 여자가 감히 어른한테 지적을 한다'고 고까워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별 미친년을 다 보겠네"라고 욕을 먹은 적도 있다. 반면 아버지나 건장한 남자 동기와 같이 있을 때는 상대방이 언짢은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도 심한 욕설은 하지 못했다. 동아리 모임에서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 회원들이 성차별적인 말을 할 때 지적하면 나만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든 눈치 없는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이 책은 이렇게 젊은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책이었다.


내가, 아니 우리 사회의 여성들이 당하는 일이 사소하고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라고 이 책은 지적한다. 사회는 여성이 공격적이지 않고 사무적이지 않고, 늘 상냥하고 밝게 웃으면서 친절하게 대하기를 요구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여성은 '여자답지 못하고 감정적인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무례한 말과 행동에 '그 말, 행동 때문에 기분이 나쁘다'고 정확히 의사 표현을 하면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예민하냐'고 예민한 사람 취급을 하거나, 오히려 화를 내기까지 한다. 그러니 무례한 일을 당해도 내 감정과 의사를 밝히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저자는 그래도 목소리를 내라고 격려한다. 당신이 참으면 상대는 용기를 얻고, 자신의 무례함을 합리화한다고. 목소리를 내고 정면으로 대응해야 세상이 바뀐다고.


저자는 여성을 옭아매는 사회의 편견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반박한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흔히 남자는 이성적이지만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여자는 감성적이고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그러나 오리건 대학교의 크리스틴 클레인과 사라 호지스 교수가 '남녀 사이의 공감 능력 차이'를 알아보기 위해 수행한 실험 결과는 이런 통념과 다르다. 연구진은 감정적 공감을 정확하게 수행했을 때 한 그룹에는 아무것도 보상하지 않고 다른 한 그룹에는 보상을 했는데, 돈을 받기로 한 그룹의 경우 남성과 여성 사이의 유의미한 공감 능력 차이가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하버드 대학교의 사라 스노드그라스 교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여성 리더가 남성 하급자의 감정을 파악하는 것보다 남성 하급자가 여성 리더의 감정과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고 한다. '남자는 원래 공감 능력이 떨어지니 네가 이해해'라고 여자친구에게 말하는 남자들도 회사 상사나 군대 선임 앞에서는 눈치 빠르게 행동하며 뛰어난 공감 능력을 보인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에세이지만 사회과학 도서 같은 면모도 지니고 있다. 여러 실험과 논문, 실제 사건을 근거로 들기에 더 신뢰가 간다.


온갖 편견과 폭력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세상이 강요할 때가 아닌 내가 원할 때에 웃으면서 살아갈 수 있으려면 나 자신이라는 성을 단단히 다져야 한다. 어떻게 세상이 웃으라고 강요하고 내게 무례하게 굴 때 대응해야 하는지, 세상이 어떻게 살라고 정해진 삶의 방식을 강요해도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도 조언한다. 여기에서는 자기계발 도서 같은 느낌이 들지만,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젊은 비혼주의자 여성으로서 자신이 직접 겪었던 사회의 부조리함을 이야기하고, 철없지만 멋진 이모로 살겠다면서 자신의 인생 계획을 솔직히 털어놓아 같은 여성으로서 깊이 공감하게 한다.

본문의 마지막 챕터에서 저자는 요즘 여성들이 자주 듣는 질문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로 "너, 페미니스트야?"라는 질문. 인종 차별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문화 시민의 도리가 된 지금은 "너 인종 차별에 반대하니"라고 묻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남성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여성도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페미니즘이고 그것이 당연한 일인데, 마치 그것이 잘못된 일인 양 '너 페미니스트냐'고 사상 검증을 한다. 그 질문 자체가 그런 질문을 받지 않을 수 있는 남성으로서 권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여성들 중에서도 페미니즘은 세상에 분란을 일으킬 뿐이며, 우리나라의 페미니즘은 너무 과격하고 남성들을 혐오하며 그들보다 우위에 서려 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힘이 빠진다. 하지만 저자는 페미니즘에 반대하고 당당히 여성 혐오를 표현하는 이들이 과거의 노예주나 KKK단처럼 과거의 부끄러운 유산으로 남게 될 것이며, 여성이 두려움 없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세상이 꼭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세상이 올 때까지 자기 자신을 좀 더 사랑하고 챙기라고, 함께하면 더 강해진다고 저자는 여성들을 응원한다. 아직도 세상에는 두려운 것투성이지만 그 응원이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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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웃어주지 않기로 했다 - 친절함과 상냥함이 여성의 디폴트가 아닌 세상을 위해
최지미 지음 / 카시오페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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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이라는 성을 단단히 다져서 세상이 강요할 때가 아닌 내가 원할 때에 웃으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조언하고 응원하고 지지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한 개인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을 모두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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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
오인칸 브레이스웨이트 지음, 강승희 옮김 / 천문장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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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외 여행을 갈 수는 없으니 대신 책으로라도 외국을 느껴보자고 도서관 해외 문학 코너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런데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표지와 제목의 책이 있었다. 샛노란 색 표지 위에 '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라는 제목이라니. 서가에서 책을 꺼내 뒤 표지를 보니 '연쇄살인범 동생을 둔 주인공이 동생이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뒷수습해 주는 이야기'라고 한다. 설정도 특이한데 나이지리아 스릴러라고 한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스릴러의 대부분은 일본이나 영미권 스릴러였다. 이래저래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조합이라 빌려왔다.


평범한 간호사인 주인공 코레드가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이유가 딱 하나 있으니, 바로 동생이었다. 엄마를 닮아 평범한 외모인 코레드와 달리 동생 아율라는 미남이었던 아빠를 닮아 인형처럼 예쁘다. 그런데 아율라가 도무지 고치지 못하는 악습관이 있다. 매번 실수인 듯 고의인 듯 남자친구를 죽여버리는 것이다. 그 때문에 코레드는 밥을 먹으려다가도 동생이 호출하면 달려가, 자신의 의학 기술과 청소 기술을 총동원해 시체를 처리해야 한다. 게다가 아율라는 남자친구를 죽인 지 며칠도 되지 않아 엄마와 즐겁게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려고 할 정도로 죄책감도 생각도 없다. 동생이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숨겨주고 수습해 주느라 벅찬데, 그에 대한 보상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보상은커녕 엄마의 사랑과 남자들의 관심, 심지어 짝사랑하는 동료 의사 선생님의 마음까지 아율라가 독차지한다. 이런 줄거리 소개를 읽어보면, 스릴러 쪽으로도 드라마 쪽으로도 흥미로운 소설일 것 같다.


문제는 이 소설이 스릴러로서는 스릴이 없고 드라마로서는 여운이 없다는 것이다. 한 챕터의 길이가 매우 짧아 호흡이 짧은 것이 이 소설의 특징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 전개에 속도감이 붙는 것이 아니라 뚝뚝 이야기가 끊어지는 느낌이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의 전개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릴이나 긴장감, 뒤통수를 치는 듯한 반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복잡하고 정교한 트릭이 있는 것도 아니다.


  드라마로서 여운을 줄 수 있는 요소가 없지는 않다. 처음에는 예쁘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다 가진 아율라가 언니를 마냥 이용하기만 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어린 자신을 중년 남자와 조혼시키려 했던 아버지에게서 지켜줬던 언니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었다. 코레드도 짝사랑하는 사람까지 빼앗아가고 늘 뒤치다꺼리를 떠넘기는 동생을 원망하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동생을 지키려고 한다. 사실 두 자매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것은 남자들이 아니라 서로다. 이런 서사가 뭉클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소설이 진행되면서 쌓여 온 감정선이 빈약하니 감정의 여운이 남지 않는다.


물론 시나 시처럼 짧은 소설이 그 안에 함축된 것으로 여운을 주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 소설의 간략한 서술은 함축적이라기보다는 빈약하다. 그 빈약한 서술 중에서도 앞에서는 아율라가 다른 곳은 몰라도 코레드 자신과 눈이 닮았다고 하다가, 뒷부분에서는 (코레드는 눈이 작다고 했는데) 아율라는 얼굴의 반은 될 정도로 눈이 크다는 묘사가 나오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속도감이 있고 경쾌하고 단순명료하다는 평도 있지만, 이야기에 몰입하게 할 만한 요소가 적다.


  제3세계나 이민 2세 작가들은 자기 나라 음식이나 언어를 중간중간에 삽입해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키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런 이국적인 요소를 찾아보는 재미도 없다. 다른 나라의 문학을 이국적인 것으로만 소비한다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아모스 오즈의 『유다』가 겨울날의 예루살렘 거리의 스산함을, 오르한 파묵의 『내 마음의 낯섦』이 새벽녘 이스탄불 골목의 차가운 공기까지 느껴주게 해주는 것처럼 우리는 책을 통해 낯선 세계를 간접적으로 여행하게 된다. 이 소설에도 젤레 같은 전통 장신구나 아직까지 남아 있는 조혼 풍습, 교통 단속을 하면서 시민들에게 뇌물을 받고 봐주는 교통경찰 같은 나이지리아의 모습이 조금 드러나지만, 그곳의 공기를 생생하게 느끼게 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니 가볍게 한번 읽을 정도지, 곁에 두고 오래 볼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혜성처럼 등장한 천재 작가'라는 찬사를 듣는데 그 정도의 찬사가 어울리지는 않아 보인다. 책을 읽고 나서까지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연쇄살인범 내 동생My Sister the Serial Killer』라는 평범한 원제를 더 인상 깊게 바꾼 제목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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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
오인칸 브레이스웨이트 지음, 강승희 옮김 / 천문장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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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러로서는 사건 전개가 흥미롭지 않고, 드라마로서는 이야기가 주는 여운도 없다. 낯선 나이지리아 문물을 만나는 즐거움도 없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번역 제목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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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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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인답지 못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가룟 유다에게 연민을 느낀다. 수천 년 동안 그 이름이 배신자의 대명사로 불렸던 사람. 온 세상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구원한 예수에게도 구원받지 못했던 사람. 그가 예수를 팔지 않았다면 십자가도 부활도 기독교도 없었을 텐데, 그는 구원의 도구로 사용되었어도 영원히 저주받는 운명에 놓였다. 그래서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부터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소설  「직소」까지 가룟 유다를 재해석하는 작품들에 끌리곤 했다. 이스라엘의 작가 아모스 오즈의 마지막 장편소설  『유다』도 같은 맥락에서 호기심이 생겼다.


  예상과 다르게 유다의 재해석만이 이 소설의 중심축은 아니었다. 1959년에서 196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대학원생 슈무엘이 예루살렘의 어느 외딴 집에서 몸이 불편한 노인 게르숌 발드의 말벗이 되어주는 이야기가 액자 역할을 하고, 발드와 그의 며느리 아탈리야, 아탈리야의 친정아버지 쉐알티엘 아브라바넬이 겪은 비극과 유다의 재해석이 그 안에서 얽히며 소설을 구성한다. 발드와 아브라바넬 가족의 비극과 유다의 재해석을 통해 작가가 돌아보려는 것은 '배신자'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저명한 정치가였던 쉐알티엘 아브라바넬은 유대인만을 위한 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끝없는 전쟁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국가라는 제도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기에 이스라엘 건국을 반대했다. 이스라엘이라는 유대인만의 국가 대신 유대인과 아랍인이 공존하는 공동체를 꿈꾸었지만, 이스라엘 건국을 도모하고 있던 동료 정치인 벤구리온 때문에 정계에서 쫓겨나고 같은 민족인 이스라엘인들에게 매국노 취급을 당했다.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배신자였다.

  또 다른 '배신자' 유다는 이 작품에서 예수를 가장 사랑했던 제자로 재해석된다. 그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면 신의 권능으로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올 것이고, 그 즉시 천국이 이 땅에 임하고 사랑만이 넘쳐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예수는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오기는커녕 어린애처럼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으며 울부짖다 힘없이 죽어갔다.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 사랑했던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인 데다, 세상의 구원이라는 일생의 목적이 산산조각 났으니 그에게는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배신자로 손가락질 받았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아모스 오즈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배신자로 불리는 사람들 중에는 정말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거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신을 믿고 사랑했던 사람들, 뜻을 함께했던 동지들, 심지어 나라까지 배신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를 너무 앞서 태어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바람직하다고 여기고 기대하는 방향으로는 다른 방향으로 갔던 사람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꾸지 못한 꿈을 꾼 사람들도 있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재평가될 기회도 얻을 수 없었던 것이 그들의 비극이었다.

  그들 중에는 아모스 오즈 자신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쉐알티엘처럼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자체의 존재를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평화롭게 공존하기를 바라며 자신의 작품으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저지른 폭력을 비판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아랍 국가들과 공존하자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이스라엘 극우 단체들은 그를 배신자로 몰아갔다. 그는 쉐알티엘, 유다와 같은 처지에 있으면서 그들의 다음 세대인 청년 슈무엘의 눈으로 오랫동안 매도당하고 잊혔던 그들의 꿈과 절망, 슬픔을 헤아려본다. 슈무엘의 성찰이 작품 속에서는 그들의 운명을 바꾸거나 그들의 재평가를 이끌어내지는 못하지만, 독자들에게 역사 속에 배신자로 남았던 이들과 그들을 배신자로 몰아갔던 역사, 세상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권한다.

  배신자라는 소재는 자극적일 수 있지만 이 소설은 읽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천천히 담담하게 흘러간다. 아모스 오즈 자신이 인터뷰에서 이 책은 "추운 겨울 세 명이 한 방에 앉아 차를 마시며 서로 논쟁하는 이야기"라고 할 정도로 이 소설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등장인물들 사이의 대화다. 이상주의자 슈무엘과 현실주의자 발드의 대화, 이스라엘이 아랍인들에게 자행하는 폭력에 비판적이지만 이스라엘 국가라는 생각의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슈무엘과, 유대인들이 이 땅에 있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말하며 어리석은 전쟁을 거듭하는 남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아탈리야의 대화. 이들의 대화를 통해 오즈는 한 치도 물러서거나 주저하지 않고 고국 이스라엘이 지금까지도 자행하고 있는 폭력을 비판한다. 소설로 자신의 정치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한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와 가룟 유다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나름대로 연구해 온 슈무엘과, 해박한 지식에 기초해 자신의 견해를 풀어놓는 발드의 대화를 통해, 신학적, 철학적 고찰의 깊이를 드러낸다. 인문 연구서가 아니라 소설인데 번역자가 단 역주가 거의 300개는 될 정도로, 슈무엘과 발드는 수많은 성경 구절과 유대 경전 구절을 인용한다. 기독교인으로서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예수의 이미지와 오즈의 가룟 유다 재해석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 소설은 정치적이고 지적이며 전반적으로 건조하지만, 곱씹어 읽어보면 묘한 정취와 서정이 느껴진다. 딱딱한 빵을 씹다 보면 느껴지는 고소한 맛처럼. 책 전체에는 겨울날 예루살렘의 적막하고 황폐한 분위기가 드리워져 있다. 여러 해 전 겨울에 예루살렘에 갔을 때 느꼈던, 깊은 밤 어두운 골목의 정취가 다시 느껴졌다. 오즈가 여기서 묘사하는 예루살렘은 내가 갔을 때로부터도 수십 년 전의 예루살렘이지만, 그때부터 변하지 않는 쓸쓸함이 있다. 겨울의 어느 도시가 쓸쓸하지 않겠냐만은, 수천 년 동안 험난한 역사와 온갖 비극을 겪으면서 슬픔이 쌓여왔고, 지금도 어디서 유혈극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있어서일 것이다. 유다의 심리를 그린 47장은 이 부분만 단편소설로 따로 떼어내도 좋을 만큼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을 크게 움직이는 부분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직소처럼 휘몰아치지는 않지만 담담해서 더 여운이 남는다. 번역자는 47장을 번역하고 이틀을 울었다고 하는데, 나는 울지는 않았지만 유다의 사랑과 꿈, 희망과 절망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서사 전개가 빠르고 흥미로운 소설을 더 좋아하는 편이라 이 소설을 보름에 걸쳐서 읽었다.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언제 다시 갈지 모르는 예루살렘의 공기를 책으로나마 다시 느꼈고, 수많은 성경과 유대 경전 이야기를 통해 지식욕을 채웠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배신자로 불리는 사람들을 다시 돌아보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되었으니까. 누군가의 진심과 꿈이 다른 한 사람에게라도 기억된다면 그의 삶이 완전히 헛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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