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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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든 것을 온전히 이해해 주는 사람‘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관계에서 적당한 거리 두기를 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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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일인입니다 - 전쟁과 역사와 죄의식에 대하여
노라 크루크 지음, 권진아 옮김 / 엘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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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 포함


  방현석 작가의 단편 소설 랍스터를 먹는 시간에서 주인공은 베트남인 부하 직원의 고향 마을에 가게 된다그날 밤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하필이면 그날은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이 그 마을 사람들을 학살한 날이었던 것이다. 1년 중에서도 한국인이 방문하면 안 될 바로 그날에 그곳을 방문한 주인공은 형용할 수 없는 중압감을 느낀다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내가 가해국 국민의 입장에 설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분명 내가 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속죄해야 할 과거를 물려받는다는 것나를 살게 했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나라가 다른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것그 무게를 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독일계 미국인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노라 크루크는 평생 동안 과거의 독일이 저지른 짓에 대한 죄의식을 안고 살아왔다어린 시절 나치의 강제수용소 기념관들에 견학을 가서 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을 기록한 흑백 사진들을 봤고학교 역사 시간에 독일에 나치 정권이 들어서고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가게 된 과정 하나하나를 꼼꼼히 공부했다또다시 극우 민족주의에 빠지게 될까 독일의 전통이니 애국심이니 하는 것들은 기피하게 되었다하지만 나라가 아니라 바로 내 가족내 조상이 당시에 어떤 일을 했는지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그래서 친가와 외가의 가족들이 나치 통치 시기에 무슨 일을 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추적하게 되었고그 과정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알게 된 것들을 그래픽노블로 기록한 책이 나는 독일인입니다이다.


  나치 통치 시기를 살아간 가족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그 시절을 살아간 가족 중 그나마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은 너무 어린 시절에 겪은 일들이라 온전히 기억하지 못한다손주인 작가 자신에게는 조부모이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는 그분들이 자기 부모이기에객관적으로 그들의 행적을 기억하고 평가하기 더더욱 어렵다작가가 가장 먼저 찾은 과거의 흔적은 집 안 서랍장 한켠에 들어 있던 큰아버지의 옛날 사진들과 그가 초등학생 때 썼던 공책들이다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헨젤과 그레텔이 빵 부스러기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듯작가는 과거의 파편들을 따라 자신이 몰랐던 과거를 더듬어간다.


페이지마다 작가가 그린 일러스트와 가족사를 조사하면서 모은 사진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은 가려졌던 과거를 따라가는 여정에서 얻은 것들을 모아놓은 스크랩북과 같다그래픽노블로 분류되지만 만화라기보다는 그림책또는 그림일기에 가까운 저자의 기록에 가족들이 간직하고 있던 사진과 편지들도서관에서 구한 사진 자료들아버지의 고향과 어머니의 고향에 찾아가 직접 찾아본 공문서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다한 권의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작가에게는 자신의 핏줄들이 살아간 흔적들의 박물관이고먼 나라의 독자들에게는 나치 정권 시기 평범한 독일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박물관이다.


  하지만 파편들은 파편들일 뿐이다아무리 과거의 파편들을 그러모아도 그들의 진짜 삶진짜 모습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작가는 알고 있다작가는 가족들의 기억과 증언에서 비어 있거나 모순되는 부분을 상상하거나 추론해 보고그들 자신이 남긴 서류들의 행간을 읽는다그 과정에서 작가는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나치당에 가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외할아버지는 전쟁 이후 자신이 생계를 위해 나치당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고 당에서 어떤 직책도 맡은 적이 없었으며 자신이 나치의 국가사회주의와 거리가 멀었다는 증언들까지 내놓았다외할아버지의 말은 진실일까정말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까작가 자신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다.


  외할아버지가 나치주의 신봉자가 아님을 증언해 준 증인 중 한 명의 아들과 연락이 닿았을 때그는 작가에게 죄의식을 갖지 말라고 말한다작가는 그의 말에서 따뜻함을 느끼지만 그것으로 쉽게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개인의 속죄는 수백만 명의 고통을 지울 수 없고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다만 어떤 것이든 모든 과거를 끌어안고 앞으로 자신을 이어갈 새로운 세대인 아이를 품은 채 계속 나아갈 뿐이다.

 

  가해국의 후손 세대들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라며 이전 세대들이 남긴 과거들을 회피하기 쉽다과거는 아예 잊어버려야 새 삶을 살 수 있다며 왜 이렇게 과거에 집착하냐고 하기까지 한다하지만 가장 강력한 접착제로도 갈라진 틈 자체는 없애지 못하듯과거의 상처는 완전히 지울 수 없다자신의 전 세대들이 남긴 죄와 상처까지 모두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가는 저자의 태도는 우리의 마음속에 큰 울림을 남긴다. 과거를 제대로 돌아보지 않는 나라를 이웃으로 둔 사람으로서는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역사에 깊은 상처가 남은 피해국이자 또 다른 나라에게는 가해국인(이것을 인정하고 문장으로 쓰는 것조차 내게는 아직 쉽지 않다. 분명 누군가는 이 말에 반발할 것이다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어떻게 직시하고 끌어안아야 할까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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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일인입니다 - 전쟁과 역사와 죄의식에 대하여
노라 크루크 지음, 권진아 옮김 / 엘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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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살게 했던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을 직시하고, 그 무게를 짊어진다는 것. 그 무게감을 손에 닿을 듯이 보여주는 기억의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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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아트 쿡북 - 고흐의 수프부터 피카소의 디저트까지
메리 앤 코즈 지음, 황근하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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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을 먹을 때 그 음식과 관련된 맛깔난 글을 읽으면 더 맛있게 느껴진다. 나는 따뜻한 국물이 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한 블로거 분이 쓴 '우하'에 대한 글을 읽는다. 우하는 러시아식 생선 수프인데, 그 글에서 주인공이 추운 겨울날 새벽 친구 집에 찾아가자 친구는 냄비에 남아 있는 우하를 데워준다. 이건 크림이 든 우하라고, 크림 없는 맑은 우하를 달라고 툴툴대던 주인공은 한 번 맛보더니 열심히 우하를 먹는다. 나는 우하를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지만 무심한 듯하면서도 따뜻한 그 글의 분위기가 따뜻한 국물이 있는 음식과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그 글을 처음 본 이후로 나는 수프뿐만 아니라 국, 라면, 라멘 등 따뜻한 국물이 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그 글을 읽곤 한다.


  이 책도 그런 방식으로 읽었다. 엄마가 끓여준 따끈한 수프를 읽을 때면 수프 챕터를, 도톰한 계란말이를 먹을 때면 달걀 챕터를,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산 케이크와 와인을 먹을 때는 디저트 챕터와 음료 챕터를. 이 책은 애피타이저, 수프, 달걀, 생선, 육류, 야채, 곁들임 요리, 빵과 치즈, 과일, 디저트, 음료, 이렇게 서양 식사의 순서대로 챕터를 나누고 각 챕터에 관련된 서양 문학 작품과 명화, 서양 작가들과 화가들이 사랑했던 음식의 레시피들을 모아놓았다. 레스트랑에서 코스의 순서를 따라 식사를 하는 것처럼 책의 순서에 따라 책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만, 자기가 읽고 싶은 부분부터 읽어도 상관은 없다. 기승전결에 따른 구성도 아니고, 그 챕터에서 다루는 음식과 관련된 글과 그림, 요리법을 무작위로 모아놨기 때문이다. 성의 없고 엉성한 구성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구성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졌다.


 따뜻한 감자 수프를 먹으면서 (책에서는 두 번째 챕터지만) 수프 챕터부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해스는 수프를 먹는 온전한 경험을 이렇게 시로 표현했다고 한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야 한다.

따뜻한 곳에 옹송그리고 앉아

한 숟가락 듬뿍 뜬다. 먹는다. 


늦은 아침으로 나 혼자 수프를 먹으면서 이 구절을 읽었지만, 마지막 구절처럼 한 숟가락씩 듬뿍 뜨면서 맛있게 먹었다. 혼자 먹어도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것처럼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한편 그가 알려주는 양파 수프 조리법은 읽는 것만으로 맛과 냄새가 상상된다. 감자 수프를 먹고 있는데 치즈가 듬뿍 든 양파 수프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올리브 오일과 버터를 두른 두툼한 팬에 채 썬 양파를 넣고 볶다가 달콤한 포트와인과 소고기 육수를 넣고 뭉근한 불에 끓인 다음, 그뤼에르 치즈 다진 것을 뿌리고 그 위에 구운 빵과 잘게 채를 친 삼소 치즈를 수북하게 올리고, 다시 그 위에 녹인 버터를 뚝뚝 떨어뜨려 황금빛이 돌 때까지 오븐에 익힌다.


제프 쿤스, <케이크>, 1995-1997.


  달콤한 분홍색으로 가득 차 있고 케이크 시트의 결이 느껴지는 제프 쿤스의 그림을 바라보며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먹었고(내가 먹은 케이크는 갈색으로 덮여 있었지만) 피카소가 사랑했다는 '고양이 네 마리 식당'의 상그리아 레시피, 마티니(진에 베르무트를 섞고 올리브로 장식한 칵테일)와 압생트(향쑥을 주 재료로 해서 만든 초록색 술)를 찬양하는 시들을 읽으며 크리스마스 와인을 마셨다. 8월에 크리스마스 풍경들을 떠올리는 로버트 해스의 시 <8월의 크리스마스>(영화 제목은 이 시에서 따온 걸까.)에서 정성스럽게 크리스마스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을 만났다. 때로는 이미 읽은 부분이어도 그 부분과 관련된 음식을 먹고 있기에 다시 읽기도 했다. 빵을 구울 때 겉에 계란 물을 발라 더 반짝이게 하는 것처럼 건조한 일상이 글과 그림으로 윤기를 입는 것 같았다.


백석은 시 <선우사>에서 혼자 쓸쓸히 저녁밥을 먹을 때 흰밥과 가재미가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반찬도 밥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데 책이 밥 친구가 못 될 이유가 없다. 음식 국물이나 소스가 책에 튀는 것만 조심한다면 이 책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밥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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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아트 쿡북 - 고흐의 수프부터 피카소의 디저트까지
메리 앤 코즈 지음, 황근하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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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있는 음식과 관련된 페이지를 골라서, 아니면 읽고 싶은 페이지 아무 데나 펼쳐서 글 한 구절을 읽거나 그림 하나를 편안히 바라보면 된다(단, 음식 국물이 책에 튀지 않게 조심할 것). 밥친구로 삼기 딱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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