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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나 - 사랑의 여신
무라트 툰젤 지음, 오은경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 스포일러 포함(<살모사의 눈부심> 스포일러도 포함됨)
- 이 책을 읽고 있으면 터키 북동부의 고원이 눈앞에 보인다. 산 속의 맑고 서늘한 공기가 느껴지고, 초원 위를 흘러가는 개울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옷차림들이 눈앞에 보이고, 다양한 언어들이 귓가에 들린다. 이렇게 책 속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묘사가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이다.
- 이렇게 묘사가 섬세한 반면 서사는 그리 뛰어나지 않다. 제밀과 빌랄 두 주인공의 시점을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서사 방식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 이야기는 압축하면 한 줌밖에 되지 않고, 비슷한 시대를 그린 소설인 <내 이름은 빨강>이나 <살무사의 눈부심>에 비해 이야기의 깊이도 이야기가 남기는 여운도 한참 떨어진다. <내 이름은 빨강>에서 변해가는 시대 속에서도 전통적인 미술의 아름다움을 지켜가고, 그 아름다움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자기 눈까지 찌르는 세밀화 장인들과 <살무사의 눈부심>에서 황위와 목숨을 포기하고 자기 자식의 목숨을 살림으로써 마지막으로 인간성을 회복하는 미치광이 술탄의 이야기는 당시의 시대상과 함께 여운과 먹먹함을 안겨준다. 하지만 나약한 영주의 아들 제밀과 평범한 예니체리 빌랄은 어떤 감동도 주지 못한다.
- 작가는 이난나를 '헌신적이고 강인하고 지혜로운 여성'의 표상으로 생각하고 이 작품 안의 여인들을 이난나에 빗대어 이 소설의 제목을 '이난나'라고 지었을 것이다. 작가가 생각한 이난나는 저승으로 끌려간 남편 두무지를 찾아 목숨을 걸고 저승으로 찾아간 여신이다. 하지만 실제 이난나는 지상에서의 권력만으로 모자라 지하 세계의 권력까지 차지하려 저승에 내려갔다 지하세계의 지배자인 여신 에레슈키갈에게 붙잡혀, 자신이 살기 위해 남편 두무지를 지하 세계로 대신 끌려가게 한 여신이다. 작가가 생각하는 헌신적인 여성상에 가까운 여신은 오히려 남동생을 위해 매년 반년씩 대신 지하 세계에 있기로 한 두무지의 누나 게슈티난나다. 작가가 신화를 잘못 안 것인지 이난나와 두무지 이야기의 또 다른 버전을 접한 것인지 모르겠다.
- 그리고 작가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이난나, 헌신적이고 강인하고 지혜로운 여성은 남편의 바람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남편이 사랑하는 다른 여자까지 이해하고 사랑하는 고전적인 여성인가? 작가가 나이가 많은 이슬람권 남성이어서 그런 여성을 이상적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 속의 이난나들은 내게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 제밀은 이 책의 주인공이지만 이야기의 한 축을 이끌어갈 만한 카리스마나 매력은 없다. 유럽에서 신식 공부를 하고 돌아온 지식인이지만 작품 속에서 하는 일은 전혀 없다. 문제가 생길 때 해결에 나서는 것은 제밀의 아버지와의 친분으로 제밀을 도와주고 돌봐주는 이웃의 영주들이나 제밀의 유능하고 충직한 수하들일 뿐이다. 게다가 바람기도 많아, 애꿎은 본처 술타나를 비롯한 식솔들까지 추방되게 만든 아르메니아 여인 쉬메이라를 두고 또 다른 여인 아시아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 뒤에도 이제 막 소녀티를 벗은 젊다기보다 어리고 예쁘장한 여인들만 보면 상사병에 빠져 버린다. 이런 캐릭터에게서 무슨 매력을 느끼란 말인가.
- 작품 안에서는 설명이 불친절하게 되어 있지만, 빙판 위에서의 말 썰매 경주를 하다 빙판이 깨지는 바람에 물에 빠져 실종되었던 빌랄이 겨우 목숨을 건지고, 그 사이에 다른 영주에게 잡혀간 제밀을 구하러 간다는 것이 결말인 듯하다. 일종의 열린 결말이지만 열린 결말이 주는 여운도 없고, 호기심을 유발하지도 않는다.
- 예니체리의 병영 분위기와 제복, 사냥개의 종류와 특성, 길들이는 법은 무척이나 구체적으로 나와, 예니체리와 시대적인 분위기, 사냥개에 대해서는 공부를 많이 하고 썼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 덕분에 당시의 예니체리가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은 이 작품의 또 다른 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