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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
석영중 지음 / 예담 / 2013년 3월
평점 :
재작년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푹 빠지면서 러시아 문학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대륙 국가의 문학답게 러시아 문학에서는 웅장함과 다듬어지지 않은 야성, 깊은 사색이 느껴진다. 그해 내내 집안에 틀어박혀 논문만 써야 했던 내게 러시아는 언젠가는 꼭 가고 싶은 광대한 세상이었다. 게다가 먹을 것뿐만 아니라 음식 이야기도 좋아하는 나에게는 이 책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가 맞춤형 책처럼 느껴졌다. 이 책에 소개된 러시아 문학과 러시아 음식들을 통해 내가 알지 못했던 러시아의 다채로운 면들을 만날 수 있어 즐겁고 흥미진진했다. 대중 교양서로도 학술 서적으로도 볼 수 있는 책이라 문체가 딱딱하다는 평도 있지만, 전공자들만 읽어야 할 정도로 전문적이고 어려운 책은 아니다. 여기에 소개된 문학 작품 중 읽어본 작품은 몇 편 안 되고, 러시아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은 나도 소설책 읽듯이 술술 읽었다. 아쉽게도 책에는 러시아 음식들의 사진이 한 점도 실리지 않아서, 음식 사진들은 따로 검색해 봐야 했다.
남의 음식 나의 음식



19세기 초 러시아에 초빙되었던 프랑스 셰프들이 만들어낸 퓨전 요리. (위) 오를로프 공작의 송아지 등심 구이 (가운데) 수바로프 꿩고기 (아래) 디저트의 일종인 샤를로트 뤼스
『전쟁과 평화』 를 읽으면서 충격적이었던 것은 19세기 러시아의 귀족들이 일상생활에서도 모국어인 러시아어 대신 프랑스어를 사용했고, 심지어 프랑스어는 잘하는데 러시아어를 잘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19세기 러시아의 귀족들은 자국의 것을 낙후한 것으로 보고 서유럽, 특히 프랑스의 문물들을 선망했다. 이미 18세기부터 개혁군주 표트르 대제(1672-1725)가 행정과 군사, 산업, 교육, 문화, 종교까지 러시아의 모든 것을 서유럽식으로 바꾸며, 서유럽에 비해 아직 낙후한 러시아를 개화시키는 데 온 힘을 쏟았었다. 이러한 서구화 정책으로 인해 러시아 문화에서는 ‘나의 것’과 ‘남의 것’이 충돌하고 융합하며 흥미로운 혼성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 책은 음식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음식의 맛보다 양에 집착하고, 돼지처럼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던 러시아인들은 음식의 맛에 눈을 뜨게 되었고, 서유럽식 식사 에티켓도 익히게 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서 러시아인들은 오히려 서유럽 식문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세기 초 러시아에 초빙되었던 프랑스 셰프들은 프랑스식과 러시아식이 혼합된 퓨전 요리들을 만들어냈고, 모든 음식을 한꺼번에 식탁 위에 차리던 프랑스식 서빙 방법은 요리가 차례로 나오는 러시아식 코스 요리로 바뀌게 되었다. 저자는 러시아식 코스 요리에 뜨거운 음식이 식지 않도록 그때그때 내오는 실용성과, 차례대로 하나씩 나오는 음식들에 기대감을 갖게 하는 심리적인 면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코스 요리는 유럽에서도 식문화가 가장 발달했던 프랑스에서 기원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러시아에서 기원한 것이었다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위) 러시아식 국수 (가운데) 서유럽의 마카로니 (아래) 러시아 서민들의 음식인 양배추 수프
하지만 '남의 것'과 '나의 것'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생각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두 갈래로 갈리게되었다. 문학, 예술, 사상에 있어서 서구 문물에 물들지 않은 러시아적인 것을 지키자는 슬라브파와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러시아를 진보시켜야 한다는 서구파가 대립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슬라브파와 서구파의 전신이 '러시아국수파'와 '마카로니파'라고 이야기한다. 주로 닭고기 육수나 양배추 수프에 면발을 넣고 끓여 먹는 러시아 국수는 고급 레스토랑 메뉴에는 오르지 못하고 싸구려 음식점, 시골 여인숙에 딸린 식당에서만 취급되었다. 반면 표트르 대제의 개혁 이후 들어온 이탈리아 국수들은 파스타 대신 마카로니로 통칭되며 고급 레스토랑의 메뉴가 되었다. 19세기 내내 러시아 문학에서 러시아 국수처럼 농부들이 먹는 소박한 전통 음식과 마카로니처럼 세련된 서구 음식은 서로 대립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부도덕한 인간으로 나오는 스티바가 레스토랑에서 온갖 사치스러운 프랑스 요리를 주문할 때, 도덕적인 인물의 대표로 나오는 레빈은 농민들이나 먹는 음식인 양배추 수프를 주문하는 것이 그 예이다. 『전쟁과 평화』에서 이미 프랑스적인 것을 추종하느라 모국어조차 잊어버린 귀족들을 풍자했던 톨스토이에게 프랑스 요리는 타락과 부도덕의 상징이었다.
러시아 문학의 거장들에게 음식이 지니는 의미
이 책에서는 또한 러시아 문학 속 거장들에게 음식이 지니는 의미를 탐색한다. 우선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 파리의 유명한 레스토랑들을 두루 섭렵하고, 나이 마흔에 과식 때문에 치아를 다 잃을 정도로 미식가이자 대식가였다. 그러면서도 톨스토이는 자신의 에세이와 소설들에서 미식과 탐식을 비판하고, 소박한 빵, 물, 야채처럼 생존에 꼭 필요한 기본적인 음식 이상의 것을 바랄 때 타락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소박한 음식은 생존의 필요조건이었고, 세련된 음식은 부도덕의 상징이었다. 톨스토이는 왕성한 성욕을 지녔으면서도 금욕과 도덕을 외쳤는데, 음식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위) 러시아식 사워크림인 스메타나. (아래) 스메타나를 넣은 러시아식 수프 보르쉬. 스메타나는 러시아 음식 어디에나 들어가는 만능 양념이다.
한편 체호프는 음식들을 통해 평범하고 지루하고 진부한 일상을 이야기한다. 그의 단편소설「국어 선생」에서 평범하고 진부한 일상을 보여주는 음식은 러시아식 사워크림인 스메타나이다. 중학교 국어 선생인 주인공 니키틴은 사랑하는 마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막상 마냐와 결혼하고 안정적이고 평온한 삶을 살게 되자, 니키틴은 그런 삶이 하찮고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된다. 니키틴은 스메타나가 담긴 단지들을 보면서 일상의 답답함과 지루함을 느낀다. 스메타나는 수프, 샐러드, 만두, 팬케이크까지 어떤 러시아 요리에도 사용될 수 있는 만능 양념이다. 러시아 사람들에게는 스메타나가 우리의 된장, 고추장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하니, 스메타나를 된장, 고추장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스메타나가 왜 지루한 일상의 상징이 됐는지 분명해진다. 누구나 매일 먹는 흔한 음식처럼, 자신의 삶도 특별한 줄 알았는데 남들과 다를 것 없는 흔한 인생이었던 것이다. 일상적인 음식에서 참을 수 없는 일상의 평범함을 포착하는 체호프의 예리함을 엿볼 수 있다.

흰 눈 속 붉은 마가목 열매
반면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는 러시아 특유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음식도 있다. 추운 겨울에도 붉은색을 발하며 열리는 마가목 열매이다. 마가목은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운 한겨울에 러시아인들에게 마가목 열매 잼, 마가목 열매 술과 같은 음식을 제공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소설 『닥터 지바고』에서 추위에도 꿋꿋이 열매를 맺는 마가목의 생명력과 풍요로움, 아름다움과 아름답고 강인한 여주인공 라라를 연결시킨다. 소비에트 혁명의 광풍 속에서 파르티잔의 포로가 된 지바고는 흰 눈 속 붉은 마가목 나무 열매를 보면서 사랑하는 라라를 떠올린다. 라라의 기억으로 힘을 얻은 지바고는 파르티잔 부대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러시아 문학의 거장들은 음식을 통해 러시아와 인생 속의 다채로운 면들을 포착하고 있다.
혁명 이후의 음식

소비에트의 음식 포스터. 소비에트 정부는 소련에 기근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포스터에 풍성한 음식들을 넣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식량난으로 인해 수백만 명의 국민들이 죽어갔다.
이 책은 19세기의 러시아 문학과 음식을 지나 1917년 소비에트 혁명 이후의 음식 또한 이야기한다. 소비에트 혁명은 '전 국민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지만, 지독한 가뭄과 경제 붕괴, 식량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극심한 식량난으로 인해 무려 5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국민들의 식사를 공동화하려 했다. 1917년 이후 국가가 운영하는 공동 식당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과학자들은 인조 고기, 합성 지방, 합성 단백질 같은 대체식량을 개발하는 데 힘썼다. 하지만 유리 올레샤의 1927년 소설 『질투』는 이러한 소비에트 정부의 식량 계획이 실패로 끝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인공 안드레이는 값싸고 맛있고 영양 많은 식사를 전 국민에게 제공하는 대형 국영 식당을 기획하지만, 국영 식당의 현실은 비전문가들이 싸구려 식재료로 만든 맛없는 음식과 비위생적인 시설이었다. 안드레이에게 반대하는 인물인 카발레로프는 값싸고 상하지 않는 이상한 합성 소시지를 미심쩍어한다. 실제로도 대체 식량 개발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사람들은 콩 단백질로 만든 맛없는 대체 식량을 외면했다.
평범한 인민들이 굶주리거나 형편없는 공동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 권력자들은 혁명 이전 부르주아들이 즐겨먹었던 화려한 음식들을 먹었다. 미하일 불가코프는 장편소설 『거장과 마르가리타』와 중편소설 『개의 심장』에서 이러한 권력자들의 모습을 가차없이 풍자한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문단의 권력을 쥐고 있는 문인들은 문학보다는 맛있는 고급 요리에 더 관심이 많고 먹는 것에 집착한다. 『개의 심장』에서 러시아의 미래를 바꿀 과학자로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프라오브라젠스키 박사도 끼니 때마다 혁명 이전 귀족들이 먹었던 것과 같은 진수성찬을 만끽한다. 모든 국민의 평등을 추구했던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도 계급과 불평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것은 음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의 러시아 문학과 거기에서 묘사된 음식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서유럽의 선진 문물과 러시아의 전통 사이의 갈등, 미식과 탐식에 대한 경계, 러시아다운 강인한 생명력, 그리고 혁명으로 인해 달라진 식생활까지 음식을 통해 우리는 파란만장하고 다채로운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에 언급된 러시아 문학 작품들을 찾아 읽으면서 예전이라면 지나쳤을 작품 속 음식이 지닌 의미들을 되새겨 본다면, 러시아의 문학과 문화, 역사를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