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和! 일본 - 응집하는 일본인의 의식구조 해부
성호철 지음 / 나남출판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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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일본인의 의식 구조를 본심인 '혼네'와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인 '다테마에'로 설명한다. 일본인은 겉과 속이 다른 민족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설명에서 벗어나 일본을 '눈이 지배하는 사회'로 정의한다. '눈이 지배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저자는 일본인이 세계를 '안'과 '밖'으로 나눈다고 말한다. 밖은 자신과 무관한 세상이기에 어떤 무례를 저질러도 자신이 속한 안에서 이를 용인하면 괜찮다. 하지만 안은 와(和), 즉 다른 이들과의 조화를 지향하는 세계이고, 와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안의 구성원들 하나 하나는 서로를 감시하는 눈이 된다. 안의 세계의 모든 구성원은 남을 바라보는 시선이자 남의 시선의 대상이다. 이 시선들은 와의 질서를 깨는 이를 찾아 그들을 와의 세계에서 배제한다. 서로를 감시하는 안의 시선은 구성원 개인의 주관적인 시선이 아닌, 그 집단의 입장에서 보는 시선이다. 자신의 입장이 아닌 다른 주체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는 시선을 메센(目線)이라고 하는데, 일본인들은 자신이 속한 세계의 메센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안의 세계에서 한 번 정해진 메센은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고, 그에 대한 반대 의견을 말하지 않아야 배제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일본인들은 다른 구성원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메센에 어긋나지 않도록 개인의 욕망을 억제한다. 눈 때문에 개인의 욕망을 억제하는 극단적인 예로 2011년 여름 열사병으로 숨진 일본 노인들을 들 수 있다. 그해 동일본 대지진으로 원전 가동이 중단되어 정부에서 절전을 요구하자, 절전 목표 설정 지역이 아닌 곳에서도 에어컨과 선풍기를 틀지 않다 열사병으로 숨지는 노인들이 생겼다. 일본인들은 노인들의 사망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들의 행동을 납득했다. 전체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희생되는 것도 감내하는 것이다. 전체를 위해 구성원이 얼마든지 희생될 수 있다는 집단주의는 누구라도 그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개인적인 감정조차 안의 질서보다 우선시될 수는 없다. 고베 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은 가족들이 시신으로 발견되어도 그에 대한 슬픔을 표시하지 않고, 구조대원들에 대한 감사와 미안함을 표시했다. IS의 인질이 된 일본인 저널리스트 고토 겐지의 어머니는 기자회견에서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나라에 폐를 끼친 아들을 위해 또 나라에 폐를 끼치는 행동이라며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나라를 위해 고토 겐지가 자살하는 편이 좋지 않겠냐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또, 도서관의 어린이 코너에는 낙서가 있는 동화책이 단 한 권도 없다. 도서관의 이용자들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저자는 어린 아이들조차 어린 아이다운 성정을 누르고 안의 질서에 순응하는 모습에 숨막혀한다.  


 폐쇄적인 사회였던 일본에서 서로 갈등하다 자멸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메센이라는 기준을 세운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안의 세계의 메센을 따르기 위해 한 것이라면 어떤 행동이든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 일본 사회의 위험성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일본인은 절대적인 기준으로서의 옳고 그름의 규범에 어긋난 행위를 했을 때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안의 세계의 메센을 어겼을 때 죄의식을 느낀다.  다른 나라와 달리 죄의식의 기준이 상대적인 것이다. 이들은 안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에 저지른 학살에 대해서 죄의식을 갖지 못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의 포스터. 미야자키 하야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기 개발자였던 주인공이 단지 열심히 시대에 따라 살아갔다고 말했지만, 그가 만든 무기가 전쟁에서 한 역할을 생각하면 그도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이 책은 일본 안의 세계에는 일본 국민들 스스로를 진정한 전쟁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메센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일본 내 보수와 진보를 가릴 것 없이 일본인이 피해자라는 안의 메센을 따르는 일본인들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답답하게 한다.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는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무기 개발자들도 자기가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바람이 분다' 같은 애니메이션을 만든 것이다. 그는 전쟁을 위한 무기를 만든 일본인들도, 군대에 간 일본인들도, 전쟁 결정을 내린 일본인들도 절대적인 악이 아니라 전승국 쪽에서 본 상대적인 악일 뿐이라고 인식한다.


 그나마 2000년 이전까지는 패전세대가 정치와 경제를 이끄는 주체였기에 침략 전쟁을 부정하고 전후 민주주의 체제를 지지하는 것이 일본의 메센이었다. 이들은 패전을 직접 경험했고 황폐해진 일본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기에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침략 전쟁을 비판하고 군국주의를 배격하며 민주주의 체제를 지지하는 아사히신문의 태도, 즉 아사히적 사고는 2000년까지 일본 사회를 이끈 메센이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정치와 경제 분야의 주체가 이후 세대로 넘어오게 되면서 반(反)아사히적 사고는 수면 위로 떠올라 아사히적 사고와 부딪치게 되었다. 역사에 대한 반성을 자학이라고 하면서 일본의 잘못을 부정하는 반(反)아사히적 사고가 메센의 흐름을 바꾸고 있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무조건 적대적인 태도로 대하기보다는 일본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그들과의 화(和, 조화)를 지키자는 신숙주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혼네'와 '다테마에'라는 공식에서 벗어나 일본을 '눈이 지배하는 사회'로 보고, 일본 안의 '시선을 의식하는 문화'가 일본 안팎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까지 살펴보는 저자의 분석은 날카롭고 치밀하다. 최근에 나온 책답게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같은 최근의 소설부터 '나루토', '프리큐어' 같은 인기 애니메이션, '한자와 나오키' 같은 최근의 인기 드라마까지 분석의 예로 들어,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하면서 더 쉽게 일본 사회의 구조와 질서를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다만 일본에서의 패전 이후 세대의 아사히에 대한 공격과 한국 네티즌들의 조선일보 비판을 단순비교한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네티즌들의 조선일보 비판을 아사히에 대한 일본 네티즌들의 공격과 같은, 기존 질서를 상징하는 권력 언론기관에 대한 '화풀이'로 치부한다. 네티즌들에게는 이들 언론사에 대항하는 것 자체가 '본인이 깨어 있음을 증명한다'고 믿는 경향이 없잖아 있다는 것이다. 군국주의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아사히신문에 대한 공격과 민주주의 질서를 지키려는 행동조차 매도하는 조선일보에 대한 비판을 같은 선에 두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조선일보에 몸 담은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이 책의 가장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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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和! 일본 - 응집하는 일본인의 의식구조 해부
성호철 지음 / 나남출판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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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을 설명할 때 흔히 써 오던 ‘다테마에(겉치레)‘와 ‘혼네(속마음)‘라는 틀을 넘어 시선이라는 측면에서 일본인과 일본 사회를 탐구한다. 최근의 애니메이션, 소설, 사례들이 풍부하게 담겨 있어 시의성 있는 관찰을 하고 있다. 다만 조선일보를 아사히 신문에 빗대어 옹호하는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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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 한국사 : 18세기, 왕의 귀환 - 조선 4 민음 한국사 4
김백철 외 지음, 강응천.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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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표지는 우리에게 익숙한 노년의 영조 어진이 아닌, 20대 초 연잉군 시절의 초상이다. 노년 시절의 어진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선 모습이다. 연잉군 시절의 초상처럼, 이 책은 영조와 정조, 그리고 그들이 이끌어갔던 18세기 조선의 낯선 모습을 보여준다. 사도세자, 탕평책, 개혁 군주 같은 몇 개의 단어로만 압축하기에는 영조와 정조, 그리고 그들의 시대는 모순적이고 복합적이었다. 이 책은 정치사와 경제사, 문화사 등 다양한 측면에서 그 복잡하고 모순적인 시대를 복원해 간다. 


 영조와 정조는 우리에게 익숙해진 사극 속 이미지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인물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라면 1, 2년도 견뎌낼 수 없는 정신적 압박감을 수십 년 동안 견디면서 조선을 통치했다. 영조는 연잉군 시절부터 쉴새없이 변화하는 정국을 살펴보며 그 속에서 살아남았다. 즉위한 뒤에도 수십 년 동안 그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붕당들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정국을 이끌어간다. 정조 또한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둘러싼 정쟁들을 지켜보며 그 속에서 살아남고 즉위하는 데 성공한다. 자신이 옳다고(義) 믿는 것일 뿐 아니라 하늘의 이치(天理)에도 부합하는 의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때로는 의리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을 유도하기도 한다. 그는 공론 대결에 의한 합의를 중시했고,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모든 세력의 합의를 이끌어내려 했다. 이 책은 노론과 소론, 시파와 벽파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시각에서 벗어나 더욱 더 복합적이고 변화무쌍했던 당시의 정치사를 보여준다. 부록에 실린 선조 때부터 정조 때까지 붕당의 세력 변화를 정리한 그래프는 복잡했던 조선의 붕당사를 머릿속에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이 책은 영조와 정조가 탕평을 통해 정치력을 모으려고 한 것이 단지 절대군주로서의 권력욕 때문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16세기 들어 안으로 시장이 발달하고 밖으로는 조선 경제가 은 본위 세계 경제 체제에 편입되면서 조세 제도도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조세 제도의 해묵은 문제점들을 해결해야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충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었다. 조세 제도 개혁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려면 정치력의 결집이 필요했다. 영조는 신료들뿐 아니라 직접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도 자문을 구하는 순문(詢問)을 재위기간 동안 200번이 넘게 열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개혁안을 놓고 수많은 반대와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조세 개혁을 실시한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조는 "백성을 위해 군주가 있는 것이지, 군주를 위해 백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고 한다. 영조는 백성을 단순한 통치 대상이 아닌 국정의 동반자로 보았던 군주였다. 정조는 북학과 서학의 최신 성과까지 두루 활용해 새로운 유형의 성 화성을 쌓았고, 그곳에 각종 도시 시설과 상업 시설을 마련했다. 정조는 화성에서 각종 개혁을 실험하며, 그곳에서 입증된 성과를 전국으로 확산시켜 국가 개혁의 모범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으로 그의 개혁을 향한 꿈은 좌절된다. 


 또한 이 책은 18세기는 두 왕뿐만 아니라 양반들도, 중인들도 백성들도 새로운 꿈을 꾸는 시대였다고 이야기한다. 북학파는 조선의 낙후한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이용후생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오랑캐로 여겨졌던 청의 문물도 받아들였다. 북학파 학자들은 청의 문물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대부들에게 의식의 전환을 촉구하면서 새로운 조선을 꿈꿨다. 서얼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개선하기 위해 벼슬길을 열어달라는 통청 운동을 꾸준히 진행했고, 중인들은 자신의 전문 능력을 활용해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양반 문화의 모방이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자신들만의 문학 모임인 시사(詩社)를 결성해 자신들을 표현하기도 했다. 백성들도 자신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제시했다. 정조가 재위 기간 동안 능행 때 접수한 상언은 3232건에 달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궁정의 공연 문화가 쇠퇴하자 광대들은 폐쇄적인 궁 안이 아닌 개방적인 장터로 나가게 되었다. 공연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광대들은 이 지역과 저 지역, 이 종목과 저 종목의 공연들을 섞으면서 다양한 실험을 시도했고, 제한 없이 욕망을 표출했다. 18세기는 이렇게 다양한 꿈과 욕망, 가능성이 뒤엉켜 있던 시대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시기 조선은 바로 앞 세기인 18세기가 화려하게 빛났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쇠락한다. 세도 정치로 정치 세력간의 균형은 깨졌고, 정치, 경제 개혁들은 원점으로 돌아가거나 해묵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조선은 근대화에 실패하고 20세기의 더 큰 몰락을 향해 걸어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선의 마지막 절정이었던 18세기가 품고 있었던 '잃어버린 가능성'을 찾고 싶어하지만, 이 책은 잘라 말한다. 18세기는 18세기일 뿐이라고. 18세기는 결코 이후의 시대에 종속되지 않은 그들만의 시대였고, 그들의 삶, 그들의 꿈을 현대의 꿈으로 굴절시키는 일 없이 되살려내려 한다고. 그 말처럼 이 책은 있는 모습 그대로의 18세기 조선을 다양한 측면에서 재구성한다. 하지만 그들이 꾸었던 꿈과 열망, 가능성은 지금의 우리가 꾸는 꿈과 열망, 가능성과도 통하는 면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우리를 이루고 있는 것들 중에는 그들이 남긴 것들도 분명 있으니까. 


 역사 서술의 객관성에 있어서나, 책의 편집과 구성에 있어서나 흠 잡을 데가 없다. 책의 크기상 자세히 보기 어려운 지도를 크게 확대해 별도의 첨부자료로 넣고, 다양한 도판과 도표를 활용해 직관적인 이해를 도운 세심함이 돋보인다. 도판의 화질도 선명해 세부까지 살펴보기 좋다. 18세기 당대의 한양과 파리를 비교해 보고 18세기 세계사 속 주요 사건과 주요 인물을 함께 살펴보며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18세기 조선을 보려는 폭넓은 시각도 돋보인다. 한국사 중 한 시대를 복합적으로 바라보기에 더 없이 좋은 통사서이다. 이 책은 각 세기를 통합적으로 살펴보는 민음 한국사 시리즈 중 한 권이라는데, 같은 시리즈의 앞으로 나올 책들도 기대하게 만든다. 이 시리즈가 지금의 좋은 퀄리티를 유지하며, 계획한 대로 고조선에서부터 20세기 현대까지의 한국사를 종합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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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 한국사 : 18세기, 왕의 귀환 - 조선 4 민음 한국사 4
김백철 외 지음, 강응천.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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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적인 역사 해석에서 벗어난 객관적인 역사 서술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잇게 돕는 풍부한 도판, 당시의 세계사까지 살펴보는 폭넓은 시각까지 흠잡을 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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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훔친 미술 - 그림으로 보는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
이진숙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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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인간의 가장 진한 체취를 담아내게 된다. 특히 미술은 사진이 없던 시대에서부터 인간사를 기록해 왔고, 사진이 발명된 이후에도 사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사를 기록해 왔다. 그래서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미술 작품에 담긴 격변의 역사도 함께 만나게 된다. 이 책은 인간의 삶과 욕망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던 중세 후기부터 사람들이 인간성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던 1, 2차 세계대전까지의 역사를, 그 시대를 표현하는 미술 작품들과 함께 살펴보고 있다.



랭부르 형제, <베리 공작의 기도서> 중 5월. 귀족들이 사냥하러 떠나는 장면이다.


 이 책에서 처음 등장하는 작품은 중세 후기인 15세기의 네덜란드 출신 화가들인 랭부르 형제(Limbourg, Herman,PaulJohan)의 <베리 공작의 기도서>이다. 기도서는 달력과 함께 시간과 계절에 어울리는 기도문과 화려한 채색 삽화를 담은 책으로, 종교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당대 사람들의 세시풍속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베리 공작의 기도서>는 종교의 영향 아래 엄격하고 금욕적이었던 중세 초기 미술과는 달리 세속적 취향, 세속적인 삶의 즐거움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림 속 맛있는 음식과 세련되고 화려한 옷, 즐거운 파티를 즐기면서 살아가는 귀족들과 농사를 지으면서 평화롭게 만족하며 사는 농민들의 모습은 당시 사람들이 꿈꾸던 삶의 모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인간이 자신의 욕망에 눈을 뜨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증표인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베누아의 성모>, 1478.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 시대, 누구보다도 자신들의 욕망을 치열하게 추구해 왔던 메디치 가문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후원해 문화적 발전을 이끌어냈다. 건축가 브루넬레스키는 메디치 가의 후원을 기반으로 산타마리아 대성당의 거대한 돔을 건축하는 데 성공한다. 돔을 건설하면서 브루넬레스키는 원근법을 발견해, 지금 우리에게 보이는 그대로 자연을 재현한다는 미술의 과제에 시작점을 마련했다. 또 그의 후배인 파올로 토스카넬리는 산타마리아 대성당의 돔에서 태양의 운동을 관측하는 실험을 했다. 인간이 자연을 호기심과 관찰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거기에서 자연의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는 이성과 과학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이성과 과학에 눈을 뜬 당대를 보여주는 그림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베누아의 성모>를 든다. 그림 속 아기 예수는 자신이 들고 있는 꽃을 유심히 바라본다. 신인 예수가 자신의 피조물을 호기심을 품고 바라볼 리 없다. 그림 속 아기 예수는 자연을 관찰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을 상징하는 것이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1818.


 세상 모든 것을 의문을 품고 바라보는 이성은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사는 세상도 관찰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신이 내렸다는 절대적인 왕권에도, 몇몇 상류 계급만이 부를 독점하는 현실에도 서서히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계몽주의자들은 이런 의문을 품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했고, 그들의 사상을 바탕으로 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나 혁명 이후에는 더 큰 혼란이 일어났고, 혁명 세력 내부에는 분열이 생겼다. 혁명에 반대하는 보수 세력들이 다시 권력을 잡고 혁명이 바꾸어 놓은 것들을 원상복구했다, 다시 혁명으로 쫓겨나고, 다시 보수 세력이 집권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수없이 회의와 좌절을 겪으면서도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을 위해 끊임없이 싸웠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민주주의이다. 19세기 독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작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자유와 평등을 열망하는 인간의 초상이다. 이 그림 속 남자는 1817년 자유주의적 이상을 품고 결성된 독일의 대학생 단체 '부르셴샤프트'의 단복을 입고 있다. 당시는 오스트리아의 수상 메테르니히를 비롯한 보수 세력의 억압으로 자유주의 운동이 전 유럽에서 후퇴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부르셴샤프트의 자유주의적 이상은 독일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자욱한 안개 바다 앞에 두려움 없이 홀로 서 있는 청년의 모습은 현실 질서에 저항하며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케테 콜비츠,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 1938.


 그러나 인간의 이성과 그를 통한 진보를 믿었던 사람들은 20세기에 들어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발달한 과학 문명을 통해 부강해진 나라들은 팽창하며 서로 충돌했다. 이성에 근거한 과학 문명은 처절한 전쟁을 불러오게 되었다. 전쟁이 사회의 모든 모순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열광했던 예술가들조차 전쟁의 희생양이 되었다. 예술가들은 인간의 이성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고, 이성에 기반한 서구 문화 전반을 부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인간 자신과 전쟁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했다. 실제로 아들과 손자를 전쟁으로 잃었던 독일의 예술가 케테 콜비츠는 조각 작품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를 통해 한 인간 어머니, 아들의 죽음에 사회적, 역사적 책임을 느끼는 지상의 여인을 보여준다. 이런 예술가들이 있기에 인간은 역사와 과거의 잘못을 잊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중세부터 현대까지 그 시대가 낳은 미술 작품들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의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볼 수 있다.종교의 영향 아래에서 살다 자신의 욕망에 눈을 뜨고, 권력자들의 억압 아래에서 살다 스스로의 권리와 자유를 찾아가고, 때로는 인간이 저지른 잔혹한 행동에 회의를 느껴온 사람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를 만들어냈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추구하고,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누리면서 때로는 자신을 돌아보는 현대의 사람들을. 지금은 그런 것들이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이 책은 그런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싸우고 피 흘리면서 지금 우리의 삶을 만들었다. 그 사람들의 삶과 역사가 담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만들어온 역사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것이 이 책의 의의가 아닐까.

 

*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도판들의 화질이다. 미술사 책이라기에는 도판의 화질이 아주 좋지는 않아, 작품의 디테일이 뭉개져서 보일 때가 있다.(특히 베네치오 고촐리의 <동방박사의 예배>의 경우가 심하다.) 작품을 더 자세히 살펴보려면 구글에서 다시 작품 이미지 검색을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역사서인 <민음 한국사> 시리즈의 도판들이 오히려 더 화질이 좋다. 미술사 책이니만큼 도판의 화질에 대해 더 신경 써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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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18-05-10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도판의 화질‘부분은 절대 공감이요.^^ 그래서 저는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 도판들을 참고하곤 해요. 좋은 리뷰 잘 보고 갑니다~

바스티안 2018-05-10 17:44   좋아요 0 | URL
제가 미술사책에서 중요하게 보는 부분이 도판의 화질이에요. 저는 구글에서 화질 좋은 도판들을 검색해 봐요.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정말 도판들 화질이 좋더라고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