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의 고전 - 심청은 보았으나 길동은 끝내 보지 못한 것
이진경 지음 / 글항아리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권선징악에서 벗어나 우리 고전을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이정원의 ‘전을 범하다‘와 비교해서 읽어보면 흥미롭다. 인문학, 생태학, 심리학, 경제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펼치는 재해석은 흥미롭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년 3월 우리 고전 소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책 『파격의 고전』이 출간되었다. 익숙한 해석의 틀에서 벗어나 우리 고전을 새롭게 바라보자는 취지에서 나온 책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6년 전에 이미 권선징악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우리 고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책『전을 범하다』가 출간되었다. 두 책 모두 기존의 해석과 권선징악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시선으로 고전을 바라본다.  두 책이 각각 어떤 방식으로 우리 고전을 재해석하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작품별 분석 VS 주제별 분석


우선 『전을 범하다』는 한 챕터에 한 작품씩 작품별로 고전 작품들을 분석하고 있다. 「장화홍련전」 에서는 체제 자체의 문제점을 계모 한 사람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가부장제의 실상을,  「적벽가」에서는 국가 권력의 폭력 앞에 선 개인들의 다양한 대응을 파헤치는 등 한 작품 당 하나의 주제를 깊이 파고든다. 이런 분석 방식은 독자들 또한 차례차례 각 작품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반면 『파격의 고전』 은 주제별로 고전 작품들을 분석하고 있다. 따라서 한 주제 안에서 여러 작품이 언급되기도 하고, 한 작품이 여러 개의 주제에서 언급되기도 한다.  가부장제 안의 모순이라는 주제 안에서 「사씨남정기」, 「김씨열행록」, 「장화홍련전」 등 여러 점의 고전 작품이 분석되고, 「심청전」이 효라는 윤리적 이념에 대한 도전과 공동체의 경제라는 두 가지 주제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그 예이다. 이런 분석 방식은 한 작품을 다양한 측면에서 탐구해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한 작품이 다루어지는 여러 개의 주제나 서로 연관성이 있는 주제들을 묶어 소단원으로 만들었다면 독자들이 더 유기적인 흐름으로 책을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 개의 작품 두 개의 해석

 『파격의 고전』 의 서문에서 저자는 2004년에 처음 이 책을 구상했다고 밝힌다. 그러니 『파격의 고전』 이 2010년에 출간된 『전을 범하다』의 아이디어에 편승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비슷한 주제의 작품이 먼저 나왔을 때 나중에 나온 작품은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에 편승한 아류로 취급당하기 쉽다. 이런 선입견을 극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먼저 나온 작품의 의견을 뒤집거나, 먼저 나온 작품 못지않게 좋은 퀄리티를 보여주는 것. 『파격의 고전』은 두 가지 전략을 모두 사용하고 있다.  『파격의 고전』은 『전을 범하다』의 고전 해석을 반박하거나 『전을 범하다』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측면들을 다룬다. 『파격의 고전』의 전체 페이지 수(517페이지)가 『전을 범하다』의 전체 페이지 수(285페이지)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두 책의 해석이 가장 뚜렷하게 갈라지는 작품은 「심청전」이다. 『전을 범하다』에서는 심청의 죽음을 '효라는 윤리적 이념을 위한 공동체의 희생 제의'로 보고 있다. 자신이 죽으면 눈먼 아버지는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하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심청은 인당수에 뛰어들면서도 아버지가 자신의 희생으로 눈을 뜰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하지만 심 봉사도, 마을 사람들도, 심청을 친딸처럼 아끼던 장 승상댁 부인도 심청의 희생을 슬퍼하지만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않는다. 아비를 위해 딸이 죽을 수 있다는 희생의 당위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전을 범하다』 의 저자는 심청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마을) 사람들이 믿고 있는 효라는 이념, 희생의 당위성에 저항하지 못하고 희생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파격의 고전』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은 공동체의 목적이 아니라 심 봉사 개인의 목적이기에 심청의 죽음을 공동체의 희생 제의로 볼 수 없다고 반박한다. 공양미 3백 석은 상인들이 이익을 내기 위해 모은 거대한 잉여분이고, 심청이 속한 공동체로서는 이러한 막대한 물자를 대신 감당해줄 수 없었기 때문에 심청이 죽음으로써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심청의 죽음을 통해, 전통적인 공동체 내부로 침입한 상업 경제가 공동체의 구성원을 죽음으로 내몰 만큼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렇게 같은 작품을 두고도 두 책의 재해석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도발적이고 발랄한 재해석 VS 인문학적 깊이를 지닌 재해석


  그러나 한 작품을 둘러싼 두 개의 해석 중 한 쪽만이 타당하다고 볼 수는 없다. 두 해석 모두 서로가 보지 못한 면들을 발견하면서 독자들에게 더 풍부한 해석을 제공한다. 각 저자의 서로 다른 해석 방향은 두 책에 각각 다른 매력을 부여한다. 

『전을 범하다』 의 고전 재해석은 도발적이고 발랄하다. 『전을 범하다』의 저자는 아비의 눈을 뜨게 하려고 어린 소녀가 목숨을 잃는 것이 선이라면 권선징악이라는 주제는 폭력적인 것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장화홍련전」 에서 악역으로 몰린 계모를 통해 우리의 문제를 어느 한 대상에게 전가함으로써 위안을 얻으려는 심리를 포착하고, 「춘향전」에서 춘향을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이 순수한 사랑, 열녀라는 자긍심이라는 허울 아래 이기심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찾아낸다. 권선징악이라는 해석의 틀 안에 '선'으로 규정되어 왔던 것의 실상을 폭로함으로써 기존의 권선징악적 해석에 도전하는 것이다. 또한 알의 형상으로 태어났지만 알이라는 허물을 벗고 성장하는 주인공의 이야기 「김원전」과, 인기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하찮은 악역 박명수의 캐릭터에서 하찮고 못난 자신에 대한 연민과 동질감이라는 공통점을 찾아내는 재해석은 신선하다 못해 발랄하기까지 하다. 

 반면 『파격의 고전』은 인문학적 깊이를 지닌 고전의 재해석을 추구한다. 저자는 집을 나가서 의적 활동을 하면서도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로, 왕의 신하로 인정 받으려 몸부림치는 홍길동의 모습에서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라캉의 '인정욕망' 개념을 발견한다. 지금까지 기존 사회에 대한 반항아로 해석되어 왔던 것과 달리, 홍길동은 자신의 욕망를 규정하는 부모, 권위자, 법, 사회적 규범 같은 타자의 인정을 구하려는 욕망, 자신의 욕망으로 오인한 타자의 욕망인 인정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인문학적 개념뿐 아니라  「심청전」과  「흥부전」 속 공동체 경제와 상품 경제의 대립,  「왕수재전」과  「전우치전」의 변신술이 보여주는 인간 세계의 질서와 그 질서 밖에 있는 외부 세계까지 저자는 경제학, 생태학,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넘나드는 재해석을 시도한다. 그러한 재해석을 통해, 저자는 기존의 고전 해석보다 더 풍부한 의미들을 고전에서 이끌어내어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이러한 각각의 매력과 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전을 범하다』와 『파격의 고전』 중 어느 한 쪽이 우월하다거나 타당하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각각의 해석에서 우리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고전의 새로운 의미들을 하나씩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쪽에서 다루어진 작품이 다른 한 쪽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경우들도 있다. 또한 권선징악이라는 틀에 거침없이 도발하는 『전을 범하다』을 읽으면서 통쾌함을 느낀다면, 다양한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풍부한 의미들을 찾아내는 『파격의 고전』 을 읽으면서는 인문학적 지식과 함께 고전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만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책이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할 수 있고, 두 책을 함께 읽으면서 우리 고전에 대한 우리의 해석의 폭을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어느 한 쪽만을 추천하기보다는 두 책 모두를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을 범하다 - 서늘하고 매혹적인 우리 고전 다시 읽기
이정원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권선징악에서 벗어나 우리 고전 속에 숨겨진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파헤치는 재기발랄한 재해석. 도발적이면서 신랄하고 때로는 서늘하고 때로는 유쾌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
석영중 지음 / 예담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재작년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푹 빠지면서 러시아 문학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대륙 국가의 문학답게 러시아 문학에서는 웅장함과 다듬어지지 않은 야성, 깊은 사색이 느껴진다. 그해 내내 집안에 틀어박혀 논문만 써야 했던 내게 러시아는 언젠가는 꼭 가고 싶은 광대한 세상이었다. 게다가 먹을 것뿐만 아니라 음식 이야기도 좋아하는 나에게는 이 책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가 맞춤형 책처럼 느껴졌다. 이 책에 소개된 러시아 문학과 러시아 음식들을 통해 내가 알지 못했던 러시아의 다채로운 면들을 만날 수 있어 즐겁고 흥미진진했다. 대중 교양서로도 학술 서적으로도 볼 수 있는 책이라 문체가 딱딱하다는 평도 있지만전공자들만 읽어야 할 정도로 전문적이고 어려운 책은 아니다여기에 소개된 문학 작품 중 읽어본 작품은 몇 편 안 되고러시아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은 나도 소설책 읽듯이 술술 읽었다. 아쉽게도 책에는 러시아 음식들의 사진이 한 점도 실리지 않아서, 음식 사진들은 따로 검색해 봐야 했다. 


남의 음식 나의 음식


19세기 초 러시아에 초빙되었던 프랑스 셰프들이 만들어낸 퓨전 요리. (위) 오를로프 공작의 송아지 등심 구이 (가운데) 수바로프 꿩고기 (아래) 디저트의 일종인 샤를로트 뤼스


 『전쟁과 평화』 를 읽으면서 충격적이었던 것은 19세기 러시아의 귀족들이 일상생활에서도 모국어인 러시아어 대신 프랑스어를 사용했고심지어 프랑스어는 잘하는데 러시아어를 잘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19세기 러시아의 귀족들은 자국의 것을 낙후한 것으로 보고 서유럽특히 프랑스의 문물들을 선망했다. 이미 18세기부터 개혁군주 표트르 대제(1672-1725)가 행정과 군사산업교육화, 종교까지 러시아의 모든 것을 서유럽식으로 바꾸며서유럽에 비해 아직 낙후한 러시아를 개화시키는 데 온 힘을 쏟았었다이러한 서구화 정책으로 인해 러시아 문화에서는 나의 것과 남의 것이 충돌하고 융합하며 흥미로운 혼성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 책은 음식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음식의 맛보다 양에 집착하고, 돼지처럼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던 러시아인들은 음식의 맛에 눈을 뜨게 되었고, 서유럽식 식사 에티켓도 익히게 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서 러시아인들은 오히려 서유럽 식문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세기 초 러시아에 초빙되었던 프랑스 셰프들은 프랑스식과 러시아식이 혼합된 퓨전 요리들을 만들어냈고, 모든 음식을 한꺼번에 식탁 위에 차리던 프랑스식 서빙 방법은 요리가 차례로 나오는 러시아식 코스 요리로 바뀌게 되었다. 저자는 러시아식 코스 요리에 뜨거운 음식이 식지 않도록 그때그때 내오는 실용성과, 차례대로 하나씩 나오는 음식들에 기대감을 갖게 하는 심리적인 면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코스 요리는 유럽에서도 식문화가 가장 발달했던 프랑스에서 기원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러시아에서 기원한 것이었다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위) 러시아식 국수 (가운데) 서유럽의 마카로니 (아래) 러시아 서민들의 음식인 양배추 수프


  하지만 '남의 것'과 '나의 것'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생각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두 갈래로 갈리게되었다. 문학, 예술, 사상에 있어서 서구 문물에 물들지 않은 러시아적인 것을 지키자 슬라브파와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러시아를 진보시켜야 한다는 서구파가 대립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슬라브파와 서구파의 전신이 '러시아국수파'와 '마카로니파'라고 이야기한다. 주로 닭고기 육수나 양배추 수프에 면발을 넣고 끓여 먹는 러시아 국수는 고급 레스토랑 메뉴에는 오르지 못하고 싸구려 음식점, 시골 여인숙에 딸린 식당에서만 취급되었다. 반면 표트르 대제의 개혁 이후 들어온 이탈리아 국수들은 파스타 대신 마카로니로 통칭되며 고급 레스토랑의 메뉴가 되었다. 19세기 내내 러시아 문학에서 러시아 국수처럼 농부들이 먹는 소박한 전통 음식과 마카로니처럼 세련된 서구 음식은 서로 대립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부도덕한 인간으로 나오는 스티바가 레스토랑에서 온갖 사치스러운 프랑스 요리를 주문할 때, 도덕적인 인물의 대표로 나오는 레빈은 농민들이나 먹는 음식인 양배추 수프를 주문하는 것이 그 예이다. 『전쟁과 평화』에서 이미 프랑스적인 것을 추종하느라 모국어조차 잊어버린 귀족들을 풍자했던 톨스토이에게 프랑스 요리는 타락과 부도덕의 상징이었다.


러시아 문학의 거장들에게 음식이 지니는 의미


  이 책에서는 또한 러시아 문학 속 거장들에게 음식이 지니는 의미를 탐색한다. 우선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 파리의 유명한 레스토랑들을 두루 섭렵하고, 나이 마흔에 과식 때문에 치아를 다 잃을 정도로 미식가이자 대식가였다. 그러면서도 톨스토이는 자신의 에세이와 소설들에서 미식과 탐식을 비판하고, 소박한 빵, 물, 야채처럼 생존에 꼭 필요한 기본적인 음식 이상의 것을 바랄 때 타락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소박한 음식은 생존의 필요조건이었고, 세련된 음식은 부도덕의 상징이었다. 톨스토이는 왕성한 성욕을 지녔으면서도 금욕과 도덕을 외쳤는데, 음식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위) 러시아식 사워크림인 스메타나. (아래) 스메타나를 넣은 러시아식 수프 보르쉬. 스메타나는 러시아 음식 어디에나 들어가는 만능 양념이다.


  한편 체호프는 음식들을 통해 평범하고 지루하고 진부한 일상을 이야기한다. 그의 단편소설「국어 선생」에서 평범하고 진부한 일상을 보여주는 음식은 러시아식 사워크림인 스메타나이다. 중학교 국어 선생인 주인공 니키틴은 사랑하는 마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막상 마냐와 결혼하고 안정적이고 평온한 삶을 살게 되자, 니키틴은 그런 삶이 하찮고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된다. 니키틴은 스메타나가 담긴 단지들을 보면서 일상의 답답함과 지루함을 느낀다. 스메타나는 수프, 샐러드, 만두, 팬케이크까지 어떤 러시아 요리에도 사용될 수 있는 만능 양념이다. 러시아 사람들에게는 스메타나가 우리의 된장, 고추장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하니, 스메타나를 된장, 고추장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스메타나가 왜 지루한 일상의 상징이 됐는지 분명해진다. 누구나 매일 먹는 흔한 음식처럼, 자신의 삶도 특별한 줄 알았는데 남들과 다를 것 없는 흔한 인생이었던 것이다. 일상적인 음식에서 참을 수 없는 일상의 평범함을 포착하는 체호프의 예리함을 엿볼 수 있다. 


흰 눈 속 붉은 마가목 열매


  반면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는 러시아 특유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음식도 있다. 추운 겨울에도 붉은색을 발하며 열리는 마가목 열매이다. 마가목은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운 한겨울에 러시아인들에게 마가목 열매 잼, 마가목 열매 술과 같은 음식을 제공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소설 『닥터 지바고』에서 추위에도 꿋꿋이 열매를 맺는 마가목의 생명력과 풍요로움, 아름다움과 아름답고 강인한 여주인공 라라를 연결시킨다. 소비에트 혁명의 광풍 속에서 파르티잔의 포로가 된 지바고는 흰 눈 속 붉은 마가목 나무 열매를 보면서 사랑하는 라라를 떠올린다. 라라의 기억으로 힘을 얻은 지바고는 파르티잔 부대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러시아 문학의 거장들은 음식을 통해 러시아와 인생 속의 다채로운 면들을 포착하고 있다. 


혁명 이후의 음식


소비에트의 음식 포스터. 소비에트 정부는 소련에 기근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포스터에 풍성한 음식들을 넣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식량난으로 인해 수백만 명의 국민들이 죽어갔다.


  이 책은 19세기의 러시아 문학과 음식을 지나 1917년 소비에트 혁명 이후의 음식 또한 이야기한다. 소비에트 혁명은 '전 국민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지만, 지독한 가뭄과 경제 붕괴, 식량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극심한 식량난으로 인해 무려 5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국민들의 식사를 공동화하려 했다. 1917년 이후 국가가 운영하는 공동 식당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과학자들은 인조 고기, 합성 지방, 합성 단백질 같은 대체식량을 개발하는 데 힘썼다. 하지만 유리 올레샤의 1927년 소설 『질투』는 이러한 소비에트 정부의 식량 계획이 실패로 끝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인공 안드레이는 값싸고 맛있고 영양 많은 식사를 전 국민에게 제공하는 대형 국영 식당을 기획하지만, 국영 식당의 현실은 비전문가들이 싸구려 식재료로 만든 맛없는 음식과 비위생적인 시설이었다. 안드레이에게 반대하는 인물인 카발레로프는 값싸고 상하지 않는 이상한 합성 소시지를 미심쩍어한다. 실제로도 대체 식량 개발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사람들은 콩 단백질로 만든 맛없는 대체 식량을 외면했다. 

  평범한 인민들이 굶주리거나 형편없는 공동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 권력자들은 혁명 이전 부르주아들이 즐겨먹었던 화려한 음식들을 먹었다. 미하일 불가코프는 장편소설 『거장과 마르가리타』와 중편소설 『개의 심장』에서 이러한 권력자들의 모습을 가차없이 풍자한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문단의 권력을 쥐고 있는 문인들은 문학보다는 맛있는 고급 요리에 더 관심이 많고 먹는 것에 집착한다. 『개의 심장』에서 러시아의 미래를 바꿀 과학자로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프라오브라젠스키 박사도 끼니 때마다 혁명 이전 귀족들이 먹었던 것과 같은 진수성찬을 만끽한다. 모든 국민의 평등을 추구했던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도 계급과 불평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것은 음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의 러시아 문학과 거기에서 묘사된 음식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서유럽의 선진 문물과 러시아의 전통 사이의 갈등, 미식과 탐식에 대한 경계, 러시아다운 강인한 생명력, 그리고 혁명으로 인해 달라진 식생활까지 음식을 통해 우리는 파란만장하고 다채로운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에 언급된 러시아 문학 작품들을 찾아 읽으면서 예전이라면 지나쳤을 작품 속 음식이 지닌 의미들을 되새겨 본다면, 러시아의 문학과 문화, 역사를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
석영중 지음 / 예담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러시아 문학 속 음식들을 통해 러시아인들의 다채롭고 역동적인 역사와 문화, 정신세계를 만난다. 책에 언급된 작품들을 읽지 않았어도 즐겁게 읽을 수 있다. 다만 음식 사진이 한 장도 없어 독자 스스로 검색해 봐야 한다는 것이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