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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훔친 미술 - 그림으로 보는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
이진숙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평점 :
예술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인간의 가장 진한 체취를 담아내게 된다. 특히 미술은 사진이 없던 시대에서부터 인간사를 기록해 왔고, 사진이 발명된 이후에도 사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사를 기록해 왔다. 그래서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미술 작품에 담긴 격변의 역사도 함께 만나게 된다. 이 책은 인간의 삶과 욕망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던 중세 후기부터 사람들이 인간성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던 1, 2차 세계대전까지의 역사를, 그 시대를 표현하는 미술 작품들과 함께 살펴보고 있다.
랭부르 형제, <베리 공작의 기도서> 중 5월. 귀족들이 사냥하러 떠나는 장면이다.
이 책에서 처음 등장하는 작품은 중세 후기인 15세기의 네덜란드 출신 화가들인 랭부르 형제(Limbourg, Herman,Paul, Johan)의 <베리 공작의 기도서>이다. 기도서는 달력과 함께 시간과 계절에 어울리는 기도문과 화려한 채색 삽화를 담은 책으로, 종교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당대 사람들의 세시풍속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베리 공작의 기도서>는 종교의 영향 아래 엄격하고 금욕적이었던 중세 초기 미술과는 달리 세속적 취향, 세속적인 삶의 즐거움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림 속 맛있는 음식과 세련되고 화려한 옷, 즐거운 파티를 즐기면서 살아가는 귀족들과 농사를 지으면서 평화롭게 만족하며 사는 농민들의 모습은 당시 사람들이 꿈꾸던 삶의 모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인간이 자신의 욕망에 눈을 뜨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증표인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베누아의 성모>, 1478.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 시대, 누구보다도 자신들의 욕망을 치열하게 추구해 왔던 메디치 가문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후원해 문화적 발전을 이끌어냈다. 건축가 브루넬레스키는 메디치 가의 후원을 기반으로 산타마리아 대성당의 거대한 돔을 건축하는 데 성공한다. 돔을 건설하면서 브루넬레스키는 원근법을 발견해, 지금 우리에게 보이는 그대로 자연을 재현한다는 미술의 과제에 시작점을 마련했다. 또 그의 후배인 파올로 토스카넬리는 산타마리아 대성당의 돔에서 태양의 운동을 관측하는 실험을 했다. 인간이 자연을 호기심과 관찰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거기에서 자연의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는 이성과 과학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이성과 과학에 눈을 뜬 당대를 보여주는 그림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베누아의 성모>를 든다. 그림 속 아기 예수는 자신이 들고 있는 꽃을 유심히 바라본다. 신인 예수가 자신의 피조물을 호기심을 품고 바라볼 리 없다. 그림 속 아기 예수는 자연을 관찰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을 상징하는 것이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1818.
세상 모든 것을 의문을 품고 바라보는 이성은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사는 세상도 관찰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신이 내렸다는 절대적인 왕권에도, 몇몇 상류 계급만이 부를 독점하는 현실에도 서서히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계몽주의자들은 이런 의문을 품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했고, 그들의 사상을 바탕으로 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나 혁명 이후에는 더 큰 혼란이 일어났고, 혁명 세력 내부에는 분열이 생겼다. 혁명에 반대하는 보수 세력들이 다시 권력을 잡고 혁명이 바꾸어 놓은 것들을 원상복구했다, 다시 혁명으로 쫓겨나고, 다시 보수 세력이 집권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수없이 회의와 좌절을 겪으면서도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을 위해 끊임없이 싸웠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민주주의이다. 19세기 독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작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자유와 평등을 열망하는 인간의 초상이다. 이 그림 속 남자는 1817년 자유주의적 이상을 품고 결성된 독일의 대학생 단체 '부르셴샤프트'의 단복을 입고 있다. 당시는 오스트리아의 수상 메테르니히를 비롯한 보수 세력의 억압으로 자유주의 운동이 전 유럽에서 후퇴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부르셴샤프트의 자유주의적 이상은 독일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자욱한 안개 바다 앞에 두려움 없이 홀로 서 있는 청년의 모습은 현실 질서에 저항하며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케테 콜비츠,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 1938.
그러나 인간의 이성과 그를 통한 진보를 믿었던 사람들은 20세기에 들어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발달한 과학 문명을 통해 부강해진 나라들은 팽창하며 서로 충돌했다. 이성에 근거한 과학 문명은 처절한 전쟁을 불러오게 되었다. 전쟁이 사회의 모든 모순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열광했던 예술가들조차 전쟁의 희생양이 되었다. 예술가들은 인간의 이성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고, 이성에 기반한 서구 문화 전반을 부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인간 자신과 전쟁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했다. 실제로 아들과 손자를 전쟁으로 잃었던 독일의 예술가 케테 콜비츠는 조각 작품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를 통해 한 인간 어머니, 아들의 죽음에 사회적, 역사적 책임을 느끼는 지상의 여인을 보여준다. 이런 예술가들이 있기에 인간은 역사와 과거의 잘못을 잊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중세부터 현대까지 그 시대가 낳은 미술 작품들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의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볼 수 있다.종교의 영향 아래에서 살다 자신의 욕망에 눈을 뜨고, 권력자들의 억압 아래에서 살다 스스로의 권리와 자유를 찾아가고, 때로는 인간이 저지른 잔혹한 행동에 회의를 느껴온 사람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를 만들어냈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추구하고,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누리면서 때로는 자신을 돌아보는 현대의 사람들을. 지금은 그런 것들이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이 책은 그런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싸우고 피 흘리면서 지금 우리의 삶을 만들었다. 그 사람들의 삶과 역사가 담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만들어온 역사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것이 이 책의 의의가 아닐까.
*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도판들의 화질이다. 미술사 책이라기에는 도판의 화질이 아주 좋지는 않아, 작품의 디테일이 뭉개져서 보일 때가 있다.(특히 베네치오 고촐리의 <동방박사의 예배>의 경우가 심하다.) 작품을 더 자세히 살펴보려면 구글에서 다시 작품 이미지 검색을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역사서인 <민음 한국사> 시리즈의 도판들이 오히려 더 화질이 좋다. 미술사 책이니만큼 도판의 화질에 대해 더 신경 써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