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에 충실한 나라, 독일에서 배운다
양돈선 지음 / 미래의창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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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국정농단 사태가 드러났을 때, 사람들은 "이게 나라냐"고 한탄했다. 그리고 새 정부는 "나라다운 나라"를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개혁에 나섰다. 하지만 여전히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 깊이 뿌리내린 적폐를 청산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게다가 우리 머리 위에는 북한이라는 큰 위험 요소가 있다. 최근 들어 남북간의 긴장이 조금은 풀렸지만 통일까지 가는 길은 아직도 멀다. 적폐를 청산하고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며, 통일까지 이루어내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기본에 충실한 나라 독일이 우리에게 좋은 지침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정치적인 면에서 독일에게서 본받을 만한 점은, 독일 정치인이 전문성과 리더십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독일의 정치인들은 20대 시절부터 오랜 기간 동안 정치 교육을 받으며 전문성과 리더십을 기른다. 그리고 중앙정부로 진출하기 전 주 의회 의원, 주지사 등 지역에서 정치 활동을 하며 현장 감각을 기른다. 그 덕분에 독일 정치인들은 독일 공영방송에서 선정하는 '최고의 독일인 100인'의 상위권 순위에 들 정도로 독일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또한 집권 정당이 바뀌더라도 지난 정권의 정책들을 유지하며, 좌우와 보수, 진보의 틀에 갇히지 않고 포용과 수용의 정치를 펼친다.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이 갑자기 정치인의 길에 들어서고, 여야 갈등 속에 좋은 정책들도 통과하지 못하는 사태가 빈번한 우리의 모습과 대조된다.


  우리는 미국식 신자유주의 체제를 답습하면서 경제적 불균형이라는 신자유주의의 폐해 또한 답습하고 있다. 반면 독일은 경쟁에 기반을 둔 시장 경제와 사회적 균등성 두 가지를 원칙으로 사회적 시장 경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독일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1930년대 세계대공황으로 인해 실업난과 빈곤,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그리고 나치 정권의 계획 경제로 시장이 위축되는 실패도 경험했다. 대기업이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독일에서는 중소기업들이 자신이 전문으로 하는 분야에서 활약하며 대기업 못지않게 국가 경제에 기여한다. 또한 지역 간의 균형 발전도 이루어져 지역간, 동서독간 경제력 격차도 크지 않다. 자유경쟁과 형평성 모두 해내고 있는 것이다. 


 경제에서 사회적 균등성을 원칙으로 하는 만큼 사회 보장 제도도 잘 구축되어 있다. 실업 급여와 연금 등 복지 안전망이 잘 작동되고 있고, 실업 상태일 때도 최소한의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TV 시청료 면제, 연간 2회 오페라 관람, 4회 박물관 관람을 보장하는 정책적 배려까지 갖추고 있다. 주택 정책은 주택을 소유해 이익을 내는 것보다 임차인 보호에 맞춰져 있어, 임차료 상승률이 연간 3퍼센트를 넘지 않는다. 사회 보장 정책이 포퓰리즘으로 치부되기 일쑤이고, 재계약을 할 때마다 집주인이 50%, 100%, 200%까지도 임차료를 올릴 수 있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 보면 부럽게 느껴진다. 


 통일에 있어 우리가 독일에서 배워야 할 점은, 독일이 통일을 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는 것이다. 독일은 적국이었던 다른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통일되면 독일이 다시 유럽의 평화를 해칠 것이다'라는 유럽 국가들의 불안을 불식시켰다. 그리고 소련,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과도 적극적으로 관계를 개선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동독과의 교류를 꾸준히 추진하며, 동독 경제를 일으키기 위한 경제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준비들 덕분에 통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통일 이후 드는 엄청난 통일 비용 때문에 경제적인 타격을 입었을 때는, 사회 복지 지출을 줄이는 경제 개혁을 단행했다. 경제 개혁의 효과는 시간이 지나면서 드러나, 통일로 인해 타격을 입었던 독일 경제의 경쟁력이 회복되었다. 통일 전과 통일 후의 치밀한 대비책은, 통일을 중요한 과제로 두고 있는 우리들이 참고할 만하다. 


 이 책은 우리와 독일의 역사와 체제가 다르기에, 독일의 제도를 우리가 그대로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독일을 무조건 예찬하지만 하지 않고, 독일에게서 배울 점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한다. 미국식 정치, 사회, 경제 체제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독일은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하는 좋은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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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에 충실한 나라, 독일에서 배운다
양돈선 지음 / 미래의창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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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을 무조건 예찬하지만 하지 않고, 독일에게서 배울 점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한다. 우리가 안고 있는 정치, 사회,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독일이 좋은 지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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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식인 - 서구의 야만 신화에 대한 라틴아메리카의 유쾌한 응수 서울대 인문 강의 시리즈 7
임호준 지음 / 민음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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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운 식인'이라니, 제목만 들으면 고어물 같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식인'은 문자 그대로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외래 문물이라도 좋은 것들은 집어삼켜서 흡수하고, 나쁜 것들은 배설해 버리겠다는 주의다. 이런 '식인주의'는 20세기 브라질 문화의 토대를 이루었고, 지금까지도 문학, 영화, 음악, 미술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브라질 대중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왜 굳이 '식인'이라는 섬뜩한 이름을 붙였을까?


 '식인주의'라는 말을 붙인 이유를 알아보려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왔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유럽이 아메리카를 정복하던 시절의 기록들 중에는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식인을 했다는 기록이 많다. 하지만 그런 기록들을 검증해 보면 하나같이 자신이 직접 목격한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이다. 스페인은 1507년에, 포르투갈은 1570년에 아메리카 원주민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그러나 식인종만은 노예로 삼아도 된다는 예외조항을 두었다. 이러니 유럽 정복자들이 식인종이 아닌 원주민들까지 식인종으로 몰아 노예로 삼는 일은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인들은 유럽인들의 '원주민 식인종설'이 허위라고 반박하기는커녕, 이렇게 응수한다. 그래, 우리는 식인종이라고. 너희들을 집어삼켜서 너희들의 좋은 점은 다 흡수하고 나쁜 점은 배설해버릴 거라고. 저자는 1920년대 브라질 모더니즘 운동부터 1990년대의 브라질 대중문화까지 문학과 음악, 영화를 중심으로 식인주의가 라틴아메리카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을 설명한다. 


  1928년 식인주의자들이 선포한 「식인선언」은 서양 문명을 '먹어 삼키고자 하되' 경외하지 않는다. 또한 브라질의 민중 문화를 부흥시키려 하되 폐쇄적인 민족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식인주의의 영향을 받은 소설에는 설화, 편지, 노래, 기도문 등 다양한 종류의 텍스트가 섞여 있다. 심지어 표절도 이들에게는 훌륭한 창작의 원천이다. 식인주의를 주창한 인물 중 하나인 마리우 지 안드라지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어떤 종류의 작품이든 표절에 반대하지 않네. 표절도 훌륭한 자질이 있으니까. 그건 우리를 훌륭하게 만들고, 지적인 설명이 붙은 지나친 각주를 덜어주고, 좋긴 하지만 허접하게 표현된 남의 생각을 개선시킬 수도 있게 해 주지. 하지만 표절은, 도둑질한 것을 개선시켜야 한다는 자각을 가져야 하네."(p. 135-136.)

  표절이 원본을 개선시켜 원본보다 더 뛰어날 수도 있다는 뻔뻔함에서 식인주의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문학뿐만 아니라 식인주의는 대중음악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메리카, 아프리카, 유럽 등 다양한 문화와 삼바, 보사노바, 록까지 다양한 장르가 혼합된 브라질의 열대주의 음악은 새로운 브라질 음악을 탄생시켰다. 1960년대 브라질의 군부 독재 아래서 진보적인 영화인들이 펼친 브라질의 신영화 운동인 '시네마 노부'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은, 주변으로 밀려났던 여성, 원주민,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옮겨 와 브라질의 국가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하려고 한다. 


이 책에서 식인주의의 대표소설로 소개되고 분석되는 『마쿠나이마』는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었다. 그리고 유튜브에서 검색해 보면 브라질 열대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명곡들을 들을 수 있다. 직접 식인주의를 대표하는 문학 작품과 음악을 감상한다면, 식인주의 특유의 다채롭고 신선한 매력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열대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노래 '트로피칼리아'의 라이브 영상과 가사를 아래에 넣는다. 

 


트로피칼리아 - 카에타노 벨로주


Sobre a cabeça os aviões

머리 위로 비행기가

Sob os meus pés os caminhões

발 아래론 트럭이

Aponta contra os chapadões

대평원을 가리키는

Meu nariz

나의 코

Eu organizo o movimento

나는 운동을 조직하고

Eu oriento o carnaval 

카니발을 지휘하고

Eu inauguro o monumento

기념비를 개막하네

No planalto central do país

이 나라의 중앙 평원에서

Viva a bossa, sa, sa

보사노바 만세 

Viva a palhoça, ça, ça, ça, ça

초가집 만세

Viva a bossa, sa, sa

보사노바 만세 

Viva a palhoça, ça, ça, ça, ça

초가집 만세


O monumento é de papel crepom e prata

기념비는 크레퐁 종이와 은으로 만들어졌네

Os olhos verdes da mulata

물라토 소녀의 초록색 눈

A cabeleira esconde atrás da verde mata

그녀의 머리카락은 초록빛 숲 뒤로 숨어 버리고

O luar do sertão

황무지의 달빛

O monumento não tem porta

기념비에는 문이 없고
A entrada é uma rua antiga, estreita e torta

입구는 좁고 구부러진 오래된 길이네

E no joelho uma criança sorridente, feia e morta

그녀의 무릎 위에는 한 못생긴 아이가 웃는 표정으로 죽어 있네 

Estende a mão

손을 내밀며......

Viva a mata, ta, ta

밀림 만세 

Viva a mulata, ta, ta, ta, ta

물라토 소녀 만세

Viva a mata, ta, ta

밀림 만세 

Viva a mulata, ta, ta, ta, ta

물라토 소녀 만세


No pátio interno há uma piscina

안뜰에는 수영장이 있다네 

Com água azul de Amaralina

아마라우리나의 파란색 물로 채워진

Coqueiro, brisa e fala nordestina e faróis 

코코넛 나무, 잔잔한 바람 , 그리고 북동부 억양, 그리고 불빛들

Na mão direita tem uma roseira

오른손에 장미꽃

Autenticando eterna primavera

영원한 봄을 확인시켜 주는

E no jardim os urubus passeiam 

정원에는 콘도르가 산책하네 

a tarde inteira entre os girassóis

오후 내내 해바라기 사이로

Viva Maria, ia, ia

마리아 만세 

Viva a Bahia, ia, ia, ia, ia

바이아 만세

Viva Maria, ia, ia

마리아 만세 

Viva a Bahia, ia, ia, ia, ia

바이아 만세


No pulso esquerdo o bang-bang

왼쪽 손목에는 총알 자국

Em suas veias corre muito pouco sangue

정맥을 타고 흐르는 아주 적은 피

Mas seu coração balança um samba de tamborim

하지만 심장에는 삼바의 탬버린이 요동치네

Emite acordes dissonantes Pelos cinco mil alto-falantes

오천 개의 시끄러운 스피커로 불협화음이 쏟아지네

Senhoras e senhores

신사 숙녀 여러분

Ele põe os olhos grandes sobre mim

그는 큰 눈으로 내게 시선을 보내네

Viva Iracema, ma, ma

이라세마 만세

Viva Ipanema, ma, ma, ma, ma

이파네마 만세

Viva Iracema, ma, ma

이라세마 만세

Viva Ipanema, ma, ma, ma, ma

이파네마 만세


Domingo é o fino-da-bossa

일요일엔 최고의 보사노바

Segunda-feira está na fossa

월요일엔 블루스

Terça-feira vai à roça

화요일엔 전원으로 나가자

Porém

하지만! 

O monumento é bem moderno

기념비는 꽤 현대적이네

Não disse nada do modelo do meu terno

내 옷의 디자인에 대해선 아무 말 하지 말게

Que tudo mais vá pro inferno, meu bem

다른 모든 것은 지옥에나 가, 제발!

Que tudo mais vá pro inferno, meu bem

다른 모든 것은 지옥에나 가, 제발!

Viva a banda, da, da

밴드 만세! 

Carmen Miranda, da, da, da, da

카르멘 미란다 만세!

Viva a banda, da, da

밴드 만세! 

Carmen Miranda, da, da, da, da

카르멘 미란다 만세!


 이 곡의 가사는 이 책에 실려 있고, 저자가 직접 번역한 것이다.(일부 가사는 내가 번역을 수정했다.) 근대화의 상징으로 행정수도 브라질리아가 건설되고 기념비가 세워졌지만, 그 이면에서는 한 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통해 정권이 추진한 근대화 작업의 어두운 면을 풍자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물라토(백인과 흑인의 혼혈) 소녀, 이라세마, 이파네마 등 브라질을 대표하는 인종, 자연환경, 고전 등을 나열하며 브라질적인 것을 칭송하는 노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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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식인 - 서구의 야만 신화에 대한 라틴아메리카의 유쾌한 응수 서울대 인문 강의 시리즈 7
임호준 지음 / 민음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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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을 식인종 야만인으로 규정하는 서구를 향한 라틴아메리카의 발랄한 응수. 책에 나오는 음악들을 찾아서 책을 읽으며 들으면, 모든 것을 집어삼켜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라틴아메리카 문화의 매력을 더욱 더 실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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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뒤에서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서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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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포함


   문학동네 블로그를 둘러보다 우연히 루이자 메이 올컷의 단편소설  「가면 뒤에서」 를 소개하는 카드뉴스를 발견했다. 겉으로는 수수하고 단정해 보이는 가정교사가 알고 보니 음침한 본모습을 지녔다는 이야기인데, 적절한 데서 끊은데다 흥미로운 지점만 잘 집어내서 호기심을 유발했다. 「가면 뒤에서」 의 결말이 궁금해서 결국 책을 빌렸다. 가히 도서계의 김경식이라 할 만하다. 

   김경식에게 낚여서 본 영화들이 그렇듯, 이 책도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올컷의 대표작인 『작은 아씨들』 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작은 아씨들』 과는 정반대로 어두운 분위기의 단편들이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어둡고 위험한 분위기는 매력적이었지만, 스릴 있게 읽기에 19세기의 소설은 너무 낡은 느낌이다. 그래도 당시 사회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각 단편에 대한 감상은 이렇다.

-------------- 스포일러 ----------------------------------------





* 가면 뒤에서: 표제작이고, 카드뉴스 덕분에 기대했지만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던 단편이다. 진 뮤어의 어두운 모습이 일찌감치 드러나고, 진 뮤어의 속내도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에 스릴감이 떨어진다. 뭔가 더 거대하거나 심오한 것이 숨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진 뮤어가 귀족들에게 큰 원한을 품을 정도로 슬픈 사연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다는 게 오히려 반전이었다. 다만 가정교사 일을 하면서 대놓고, 또는 미묘하게 차별하는 귀족들을 많이 겪어 왔다는 점은 감안할 만하다. 

  이 소설은 신분을 뛰어넘는 낭만적인 로맨스에 대한 환상을 산산이 부순다. 가정교사임에도 귀족 고용주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되는 주인공을 그린 소설  『제인 에어』 를 비틀어 버린 것 같은 소설이다. '진 뮤어'라는 이름 자체도 제인 에어의 패러디처럼 느껴진다. 진 뮤어에게 빠지는 남자 셋(형, 동생, 숙부) 모두 나름대로 진 뮤어에게 순정을 바치지만, 이들 또한 진 뮤어와 자신의 신분 차이는 절대 잊지 않는다. 이들이 진지하게 진 뮤어를 결혼 상대로 생각하는 건 진 뮤어의 어머니가 귀족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뒤이다.(이 귀족 출신 어머니는 진 뮤어의 친어머니가 아니라 새어머니, 즉 진 뮤어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였다는 게 나중에 밝혀진다.) 고고하고 품위 있는 척 하던 이들은 진 뮤어에게 완전히 농락당하고, 진 뮤어의 정체를 밝혀냈는데도 진 뮤어의 마지막 반격에 허무하게 당한다. 이것이 로맨스 소설 속 남주인공인 귀족 도련님, 나리들의 실체다. 

  진 뮤어가 악녀이기는 하지만, 그녀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는 노력은 오늘날 우리 자신들도 하고 있지 않나 싶다. 상대방이 무의식적으로 하는 차별에 상처를 받아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상냥하게 상대방을 대한다. 그리고 매력적이고 유능해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 자신도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하는 감정노동이 아닌가. 신분제 사회에서 낮은 신분인데다 여성인 진 뮤어는 지금의 우리보다 더 큰 압박감을 느끼고 감정노동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30살밖에 되지 않은 진 뮤어의 본모습을 이 빠지고 머리 벗겨진 노파처럼 묘사한 것은 부당하다. 매력적인 악녀 캐릭터를 만든 작가 자신에게도 나이 든 여자에 대한 편견과 혐오가 있었던 건 아닐까 싶다. 

* 어둠 속의 속삭임: 이 단편도 생각만큼 엄청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피가 섞이지 않은 조카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삼촌 캐릭터의 묘사, 삼촌과 주인공 사이의 묘한 긴장감, 주인공과 약혼자 기 사이의 풋풋한 로맨스는 잘 쓰여졌다고 본다. 주인공이 강제로 오두막에 갇혀 미쳐가는 과정도 생생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마지막에 주인공이 너무도 쉽게 해방되어 긴장감이 떨어진다. 뒷표지의 '남자보다 완벽한 남장여자'라는 홍보 문구를 보고 처음에는 기가 남장여자인 줄 알았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주인공을 속이기 싫다고 한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잘못 짚은 거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기가 남장여자인 이야기로 가는 게 오히려 더 재밌었겠다 싶다. 

* 수수께끼: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단편들 중에서 제일 매력적인 단편이었다. 표제작인 「가면 뒤에서」보다 더 흥미롭게 다가왔다. 뒷표지에 적힌 '남자보다 완벽한 남장여자'라는 문구 덕분에 버나드가 여자라는 건 처음부터 눈치챘지만. 여자임에도 완벽하게 남자 역할을 소화하는 모니카(버나드의 진짜 정체)의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모니카가 여자로 돌아온 후 '남자 역할을 했던 것을 부끄러워했다'는 건 당시의 한계로 보이지만, 남성과 여성의 경계라는 게 그렇게 뚜렷하고 확고한 건 아니라는 메시지는 확실히 시대를 앞서간다. 클라이드와 모니카가 맺어지지 못한 건 안타깝지만, 당연히 클라이드가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하고 모니카가 사랑에 연연하지 않아 신선한 결말이었다. 그나저나 친언니와 연인 연기를 한 모니카는 정말 대단하다. 악동뮤지션의 이수현은 자기 오빠와 듀엣으로 사랑 노래 부르기가 징그러웠다는데. 

* 위험한 놀이: 솔직히 제1세계 금수저들이 마약 하고 노는 이야기를 내가 왜 읽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자 해설에서 올컷이 지병인 루푸스 때문에 아편, 해시시, 모르핀 같은 약물을 상습적으로 복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은 이해가 가긴 한다. 올컷은 약물에 의존하지 않으려 했지만, 약물이나 최면을 통해 통제되지 않은 자아와 조우하는 데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금욕을 강조하는 아버지의 교육과 통제에 반발했다고 한다. 그래서 해시시에 취해 평소의 자기통제를 버리고 서로 감정을 털어놓으며 맺어지는 연인들의 이야기를 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둘 다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거지 해시시에 취해 요트 운전도 제대로 못하고 둘 다 죽었을 확률이 더 높았다. 작가의 창작 배경까지는 이해하겠지만 '해시시가 억눌려 있던 감정을 해방시켜 준다'는 메시지에는 절대 동의 못하겠다.

 『작은 아씨들』 을 읽지 않아 올컷의 밝고 사랑스러운 면모를 잘 모르니, 이 어두운 단편에 충격을 받거나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번역자는 올컷의 작품 세계를 밝고 사랑스러운 『작은 아씨들』 과  어둡고 위험한 『가면 속에서』 로 나누는 이분법적 해석을 거부한다. 어느 작품에나 인권 운동가이자 대중 소설가였던 올컷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면모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소개되어 있지 않았지만 인권 운동가로서의 올컷의 면모가 드러난 단편들도 언젠가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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