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
계승범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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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사극에서 본 선비들은 멋있고 존경스러운 사람들이었다.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게 대항한 사육신들, 개혁을 추진하지만 훈구파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한 조광조는 내 어린 시절의 영웅이었다. 그런 내게 국사 선생님이 물었었다. "사육신이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해 난을 일으킨 게 과연 옳은 일이었을까? 그 사람들이 성공했다면 조선이 더 나아졌을까?" 어린 시절에는 그 사람들의 진정성이 의심받는 거 같아 내가 다 분했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니 나도 그 점이 의문이다. 또, 조광조가 누구를 위해서 개혁을 추진했는지, 그 개혁이 조선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것이었는지 따져보면 그의 개혁이 실효성이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이 책은 그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시작한다. "선비가 권력을 잡으면 과연 나라가 좋아질까?"


사극 '여인천하(2001)' 속 중종(최종환)과 조광조(차광수)의 모습. 조광조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관청 소격서를 철폐하라고 강력히 주장하고, 결국 뜻을 이루어낸다. 하지만 소격서 혁파가 조선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저자는 유교 정치 이념의 근간인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이론 자체의 가치는 인정한다. 수신(身), 즉 개인의 도덕적 수양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인류가 추구한 지고의 가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수신과 제가, 치국을 모두 제대로 이룬 선비는 얼마나 될까다. 수신도 제가도 이루지 못한 채 치국에는 더더욱 무능했던 반례가 더 많다고 저자는 꼬집는다. 

 또한 저자는 덕치와 교화라는 유교 정치의 이상의 허구성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유교 정치는 힘이 아닌 덕으로 다스리는 정치, 덕치(德治)를 추구한다. 선비들은 먼저 덕을 쌓은 뒤 자신의 덕으로 백성들을 교화함으로써 사회를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개인의 모범적인 행동을 통해 사회를 교화하는 것은 고도의 국가 체제에서는 현실성이 전혀 없는 일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유교에서 말하는 덕의 개념은 현실 정치에서 적용되기에는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2010)'에서 정약용(안내상)은 여자도 제자로 인정하고, 제자들에게 편견에 갇혀 있지 말라고 가르치는 개방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나 실제 역사 속에서 그는 공노비 해방이 국가 기강을 무너뜨리는 조치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서 저자는 선비들이 나라를 이끈 결과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낱낱이 폭로한다. 18세기 후반부터 노비 제도는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해, 마침내 1894년 갑오개혁으로 완전히 폐지된다. 그러나 노비 제도가 폐지되는 데 선비들은 어떤 기여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우리에게 선구자라는 긍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정약용조차 1801년의 공노비 해방이 국가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조치였다며 비판했다. 선비들은 노비들에게 측은지심을 보이기는 했지만 노비제도를 포함한 신분 질서는 끝까지 고수했던 것이다. 양반도 군포(軍布, 군역 대신 세금으로 나라에 바치는 베)를 내는 호포제(戶布制)는 양반들의 반대에 부딪쳐 결국 실행되지 못했고, 정약용조차 호포제 실시를 주장했을 뿐 양반들도 군복무를 해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기득권, 자신들이 살아가는 시대 의식을 넘어서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하지만 국가의 지배층인 선비들 중에 그런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는 것이 조선의 문제였다. 

 또한 우리가 국사 시간에 견제와 균형의 정치로 배웠던 붕당 정치에 대해서도 저자는 회의적이다. 당쟁의 폐해는 일본 학자들이 악의적으로 언급하기 전에 이미 조선 내부에서도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고 개탄하는 문제였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려면 상대에 대한 존중과 공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조선의 붕당들에는 그러한 자세가 없었다. 오히려 한쪽이 권력을 독점하고 한쪽은 몰락하는 치열한 정권 쟁탈전만이 계속됐다. 그 쟁탈전을 통해 더 건설적인 의견이 나와 조선 사회를 발전시키는 일도 없었다. 

 이렇게 기존의 질서와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난 선비들이 개혁을 제대로 이루어낼 리는 없었다. 조선 후기 청과 일본이 상공업의 발달로 부를 쌓아가고 있을 때, 선비들은 근검절약만을 강조하며 국가의 부를 키울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들이 신경쓴 것은 새로운 부의 창출이 아닌 한정된 부의 분배 문제였다. 선비들이 권력을 잡은 16세기 후반부터 조선과 일본의 경제적 격차는 급격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선비들이 만든 나라의 실상이었다.

 책의 논조가 너무 과격해 반박하고 싶기도 했지만, 하나 하나 따져 보면 다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 없었다. 나는 역사 지식이 짧아 저자에게 반론을 제기할 만한 반례를 알지 못한다. 존경하고 우러러봤던 선비들과, 그들이 만든 나라의 한계를 보니 씁쓸했고, 부디 저자에게 반박할 수 있는 반례 하나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 자신과 시대의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했던 선비들도 있지 않았을까, 환상을 깨고 본 선비들의 실상이 우리들의 반면교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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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이성형 지음 / 까치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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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나는 마드리드, 파리,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 나폴리, 아테네를 발견했다. 이미 1947년에 나는 뉴욕을 발견한 바 있었다. 1956년에는 런던, 안트베르펜, 브뤼셀을 발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쓴 시와 엽서 몇 편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흥미로운 발견을 이야기하고 있는 텍스트를 보지 못했다. 아마도 내가 이 유명한 도시들을 처음 방문했을 당시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숙연한 침묵으로 이끄나보다.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태어났고 살고 있는 대륙에 몇몇 유럽인들이 도착한 것을 우쭐대며 부르는 소위 '아메리카의 발견'이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구나.

 

  쿠바의 작가 레타마르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이렇게 비꼬았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와 문명을 세우고 살아가고 있는 대륙을 자신이 '발견'했다고 주장한 콜럼버스. 이 '발견'이라는 말 자체가 폭력의 언어였다. 이 말이 아메리카 대륙에 살고 있던 사람들과 그들이 세운 문명의 존재 자체를 은폐하고 지워버렸다. 아메리카 대륙은 실제로는 수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인도로 둔갑했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은 정복되고 교화되어야 할 야만인이 되었다. 


 콜럼버스의 '발견'은 유럽인들에게 눈부신 발전의 시작이었지만 아메리카인들에게는 거대한 비극의 시작이었다. 콜럼버스 이후 유럽을 세계 체제의 중심, 그 밖의 지역을 주변으로 규정하는 유럽 중심의 세계사에 맞서 이 책은 "정치적으로, 지정학적으로 좀 더 공정한 역사"를  이야기하려 한다. 중심도 주변도 없는 역사, 중심에서 주변으로 뻗어나가는 역사가 아닌 각 지역의 역사가 화음을 만들며 진행되는 역사를.

 유럽은 콜럼버스 이후 자신들만이 경제적 발전을 거듭하고 아시아는 경제적으로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던 것처럼 주장해 왔다. 그런 유럽의 주장과 달리, 아시아 또한 아메리카에서 유출된 은괴의 수혜자였다고 이 책은 밝히고 있다. 은의 유입으로 상업화는 더 빠르게 진행되었고, 생산성도 인구도 증가했다. 중국 남부와 인도의 벵골은 세계 시장의 일부가 되어, 그곳에서 활발한 무역 활동이 이루어졌다. 1750년 당시 세계 GNP의 80퍼센트를 생산한 곳은 아시아였다. 


아이티의 독립 영웅 투생 루베르튀르 장군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투생 루베르튀르(2011)'의 한 장면. 말을 타고 있는 루베르튀르의 모습이다.


 또한 저자는 정치적으로도 유럽은 계몽 사상을 토대로 한 민주주의가 발전했고, 그 외의 지역은 전제군주제나 봉건제도에 머물러 있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고 말한다. 프랑스 혁명의 인권 선언에 영향을 받은 흑인 지도자들은 수 년간의 독립전쟁 끝에 1804년 독립국 아이티를 건설했다. 하지만 백인이 아닌 인종이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던 유럽인들은 아이티 혁명을 철저히 외면했다. 미국 남부의 백인 노예주들은 그들이 일으킨 혁명이 전파될까 두려워했고, 그들의 두려움은 아이티의 이미지를 좀비와 흑마술, 미신이 창궐하는 나라로 왜곡시켰다.


커피 원두를 고르고 있는 멕시코 농민들. 멕시코를 포함한 라틴아메리카 지역은 세계 최대의 커피 생산지이다.


  유럽이 아닌 각자의 지역에서 발전을 이루어낸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지역의 발전 아래 희생된 사람들도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자기 손으로 자기 땅에서 나는 은을 캐서 아무 대가 없이 유럽 정복자들에게 바쳐야 했다. 그들의 희생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경제는 은 중심으로 바뀌었다. 아프리카 대륙의 흑인들은 갑자기 고향에서 머나먼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와 사탕수수 농장에서 강제노동을 했다. 그들 덕분에 유럽인들은 달콤한 설탕으로 만든 디저트와 초콜릿을 즐길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세계는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 멕시코 농민들은 생산비용의 반에도 못 미치는 낮은 커피 수매 가격(물건을 사들이는 가격. 여기에서는 농민들에게서 커피 회사들이 커피 원두를 사들이는 가격.) 때문에 게릴라 세력이 되거나 그들을 지원하는 불만세력이 된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 위에서 커피를 즐기고 있다. 

  이 책은 콜럼버스 이후 아메리카의 역사뿐만 아니라, 15세기에서 21세기, 아메리카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까지 다양한 시간과 공간을 오가면서 좀 더 다양한 역사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독자들은 수만 킬로미터의 거리와 수백 년의 시간을 넘나들며 여행하는 듯한 즐거움을 느낄뿐만 아니라, 전에는 듣지 못했던 좀 더 다양한 역사 이야기를 듣게 된다. 13년 전에 나온 책이기 때문에 수정되고 보완되어야 할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 유럽 중심의 세계사 속에 묻혀 있던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의 역사, 정복자의 이야기 아래 묻혀 있던 정복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귀를 기울이고 기억할 가치가 있다.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때 "지리적으로 공정한 세계사"가 완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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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 한국사 : 18세기, 왕의 귀환 - 조선 4 민음 한국사 4
김백철 외 지음, 강응천.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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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표지는 우리에게 익숙한 노년의 영조 어진이 아닌, 20대 초 연잉군 시절의 초상이다. 노년 시절의 어진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선 모습이다. 연잉군 시절의 초상처럼, 이 책은 영조와 정조, 그리고 그들이 이끌어갔던 18세기 조선의 낯선 모습을 보여준다. 사도세자, 탕평책, 개혁 군주 같은 몇 개의 단어로만 압축하기에는 영조와 정조, 그리고 그들의 시대는 모순적이고 복합적이었다. 이 책은 정치사와 경제사, 문화사 등 다양한 측면에서 그 복잡하고 모순적인 시대를 복원해 간다. 


 영조와 정조는 우리에게 익숙해진 사극 속 이미지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인물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라면 1, 2년도 견뎌낼 수 없는 정신적 압박감을 수십 년 동안 견디면서 조선을 통치했다. 영조는 연잉군 시절부터 쉴새없이 변화하는 정국을 살펴보며 그 속에서 살아남았다. 즉위한 뒤에도 수십 년 동안 그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붕당들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정국을 이끌어간다. 정조 또한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둘러싼 정쟁들을 지켜보며 그 속에서 살아남고 즉위하는 데 성공한다. 자신이 옳다고(義) 믿는 것일 뿐 아니라 하늘의 이치(天理)에도 부합하는 의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때로는 의리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을 유도하기도 한다. 그는 공론 대결에 의한 합의를 중시했고,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모든 세력의 합의를 이끌어내려 했다. 이 책은 노론과 소론, 시파와 벽파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시각에서 벗어나 더욱 더 복합적이고 변화무쌍했던 당시의 정치사를 보여준다. 부록에 실린 선조 때부터 정조 때까지 붕당의 세력 변화를 정리한 그래프는 복잡했던 조선의 붕당사를 머릿속에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이 책은 영조와 정조가 탕평을 통해 정치력을 모으려고 한 것이 단지 절대군주로서의 권력욕 때문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16세기 들어 안으로 시장이 발달하고 밖으로는 조선 경제가 은 본위 세계 경제 체제에 편입되면서 조세 제도도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조세 제도의 해묵은 문제점들을 해결해야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충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었다. 조세 제도 개혁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려면 정치력의 결집이 필요했다. 영조는 신료들뿐 아니라 직접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도 자문을 구하는 순문(詢問)을 재위기간 동안 200번이 넘게 열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개혁안을 놓고 수많은 반대와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조세 개혁을 실시한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조는 "백성을 위해 군주가 있는 것이지, 군주를 위해 백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고 한다. 영조는 백성을 단순한 통치 대상이 아닌 국정의 동반자로 보았던 군주였다. 정조는 북학과 서학의 최신 성과까지 두루 활용해 새로운 유형의 성 화성을 쌓았고, 그곳에 각종 도시 시설과 상업 시설을 마련했다. 정조는 화성에서 각종 개혁을 실험하며, 그곳에서 입증된 성과를 전국으로 확산시켜 국가 개혁의 모범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으로 그의 개혁을 향한 꿈은 좌절된다. 


 또한 이 책은 18세기는 두 왕뿐만 아니라 양반들도, 중인들도 백성들도 새로운 꿈을 꾸는 시대였다고 이야기한다. 북학파는 조선의 낙후한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이용후생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오랑캐로 여겨졌던 청의 문물도 받아들였다. 북학파 학자들은 청의 문물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대부들에게 의식의 전환을 촉구하면서 새로운 조선을 꿈꿨다. 서얼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개선하기 위해 벼슬길을 열어달라는 통청 운동을 꾸준히 진행했고, 중인들은 자신의 전문 능력을 활용해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양반 문화의 모방이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자신들만의 문학 모임인 시사(詩社)를 결성해 자신들을 표현하기도 했다. 백성들도 자신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제시했다. 정조가 재위 기간 동안 능행 때 접수한 상언은 3232건에 달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궁정의 공연 문화가 쇠퇴하자 광대들은 폐쇄적인 궁 안이 아닌 개방적인 장터로 나가게 되었다. 공연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광대들은 이 지역과 저 지역, 이 종목과 저 종목의 공연들을 섞으면서 다양한 실험을 시도했고, 제한 없이 욕망을 표출했다. 18세기는 이렇게 다양한 꿈과 욕망, 가능성이 뒤엉켜 있던 시대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시기 조선은 바로 앞 세기인 18세기가 화려하게 빛났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쇠락한다. 세도 정치로 정치 세력간의 균형은 깨졌고, 정치, 경제 개혁들은 원점으로 돌아가거나 해묵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조선은 근대화에 실패하고 20세기의 더 큰 몰락을 향해 걸어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선의 마지막 절정이었던 18세기가 품고 있었던 '잃어버린 가능성'을 찾고 싶어하지만, 이 책은 잘라 말한다. 18세기는 18세기일 뿐이라고. 18세기는 결코 이후의 시대에 종속되지 않은 그들만의 시대였고, 그들의 삶, 그들의 꿈을 현대의 꿈으로 굴절시키는 일 없이 되살려내려 한다고. 그 말처럼 이 책은 있는 모습 그대로의 18세기 조선을 다양한 측면에서 재구성한다. 하지만 그들이 꾸었던 꿈과 열망, 가능성은 지금의 우리가 꾸는 꿈과 열망, 가능성과도 통하는 면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우리를 이루고 있는 것들 중에는 그들이 남긴 것들도 분명 있으니까. 


 역사 서술의 객관성에 있어서나, 책의 편집과 구성에 있어서나 흠 잡을 데가 없다. 책의 크기상 자세히 보기 어려운 지도를 크게 확대해 별도의 첨부자료로 넣고, 다양한 도판과 도표를 활용해 직관적인 이해를 도운 세심함이 돋보인다. 도판의 화질도 선명해 세부까지 살펴보기 좋다. 18세기 당대의 한양과 파리를 비교해 보고 18세기 세계사 속 주요 사건과 주요 인물을 함께 살펴보며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18세기 조선을 보려는 폭넓은 시각도 돋보인다. 한국사 중 한 시대를 복합적으로 바라보기에 더 없이 좋은 통사서이다. 이 책은 각 세기를 통합적으로 살펴보는 민음 한국사 시리즈 중 한 권이라는데, 같은 시리즈의 앞으로 나올 책들도 기대하게 만든다. 이 시리즈가 지금의 좋은 퀄리티를 유지하며, 계획한 대로 고조선에서부터 20세기 현대까지의 한국사를 종합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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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 - 145년의 유랑, 20년의 협상
유복렬 지음 / 눌와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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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1년 마침내, 병인양요 때(1866년) 프랑스에 빼앗겼던 외규장각 의궤가 145년만에 우리나라에 돌아왔다하지만 반환이 아닌 영구임대라는 형식으로 돌아왔다이 점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하지만 왜 외규장각 의궤가 영구임대라는 형식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지그런 형식으로라도 돌아오게 하기 위해 누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자세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이 책은 그 두 가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준다.

 

 저자는 외규장각 의궤 반환 협상에 직접 참여했던 외교관답게 반환 협상 과정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전해준다반환 협상 과정에서 일어났던 한국과 프랑스 사이의 치열한 신경전은 직접 그 과정을 지켜보았던 저자가 아니었다면 그만큼 생생하게 전하지 못했을 것이다올곧은 학자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고 강경하게 반환을 주장했던 한상진 교수와 그에 팽팽하게 맞섰던 자크 살루아 위원다른 한국 유물과 의궤의 등가교환을 고집하는 프랑스 측에 대담하게 대가 없는 반환을 요구했던 박흥신 대사외규장각 의궤가 반환되는 순간까지 의궤에 대한 애착을 놓지 않았던 자클린 상송 프랑스국립도서관 사무장까지 다양한 개성과 신념을 지닌 인물들이 부딪치고 협상하면서 만들어내는 드라마는 흥미진진하다또 외규장각 의궤가 병인양요 당시 불타 없어지지 않고 프랑스에 남아 있다는 것을 최초로 발견한 박병선 박사프랑스의 배신자라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약탈한 문화재는 돌려주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의궤의 반환을 도운 자크 랑 전 프랑스 문화부장관과 뱅상 베르제 교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그들의 헌신과 노고에 감사하게 된다.

 

 하지만 제목을 읽고 독자들이 기대하는 것과 저자가 의도한 것이 어긋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단점이다.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라는 제목을 보고 독자들이 기대하는 것은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의 의궤 반환 협상이야기이다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의도하는 것은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으로서의 나의 삶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저자는 외교관으로서 살아오면서 가장 많은 땀과 눈물을 바친 외규장각 의궤 반환 협상 이야기를 하면서자신의 외교관으로서의 삶 이야기를 함께 풀어나가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저자의 외교관으로서의 삶을 이야기하겠다는 의도를 감안하더라도외규장각 의궤 반환 협상 이야기가 주요 내용인 다른 장들과 달리외규장각 의궤 이야기가 전혀 없는 2장은 책의 전체 흐름을 끊어놓는 느낌이다.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가 이야기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독자로서는 저자의 외교관으로서의 개인적인 삶 이야기가 생각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당황할 수도 있다. 

 

 또 2005년부터 2009년까지의 반환 협상 과정이 거의 생략된 것도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저자가 2006년부터 2008년까지 튀니지에 부임해 그 기간 동안은 협상 과정을 직접 지켜보지 못했던 것, 2008년에서 2009년까지는 협상이 소강상태에 놓였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부록의 ‘2006년 9한국-프랑스 정상회담외규장각 의궤 문제 해결을 위해 양측이 모두 만족할 만한 방안을 모색하자는 입장을 재확인이라는 한 줄 문장만으로는 그 5년이 요약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그 시기 동안 MBC 프로그램 느낌표’ 제작진이 외규장각 의궤 환수 캠페인을 벌이고민간단체인 문화연대가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던 일도 언급될 만한 일이었는데거기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은 것이 아쉽다국제법과 외교에 능통한 외교관으로서 저자가 그들의 활동의 의의와 한계를 정확히 짚어줄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아쉬운 부분이다.

 

 이러한 아쉬운 점들이 있지만길고도 치열했던 외규장각 의궤 반환 협상과의궤가 돌아오게 하기 위해 분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한다는 것만으로 이 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뜨거운 열정과 차가운 이성신랄한 유머감각을 갖춘 저자의 필력 덕분에 협상 과정이 펼쳐내는 드라마는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20여 년에 걸친 협상 끝에 마침내 모든 외규장각 의궤가 한국에 돌아오는 마지막 장면은 독자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저자를 포함한그 순간이 오기까지 애쓴 모든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게 된다그리고 영구임대에서 더 나아가 언젠가는 완전한 반환이 되길그리고 아직 돌아오지 못한 우리 문화유산들이 우리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길 꿈꾸게 된다기나긴 협상의 종착점이었던 외규장각 의궤의 귀환이 더 많은 우리 문화유산들이 돌아오는 길의 시작점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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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 - 서연문답
김도환 지음 / 책세상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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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의 선구자인 홍대용과 개혁군주 정조두 사람이 만났다그 결과는 어땠을까그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줄 책이 이 책 정조와 홍대용생각을 겨루다이다홍대용은 왕세자의 수업인 서연(書筵)에 참여하는 관직에 있으면서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와 자신다른 서연관들이 9개월 동안의 서연에서 나눈 대화를 계방일기(桂坊日記)라는 책으로 남겼다이 책은 계방일기를 번역하고 저자의 해설과 논평을 함께 넣어한 편의 사극처럼 재구성했다.

서연이 진행되면서 정조는 홍대용의 깊은 학식을홍대용은 정조의 영민함을 알게 되고 두 사람의 대화는 깊어진다깊은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두 사람이 펼치는 논의는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과 지성들이 학문과 정치에서 어떤 것들을 고민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두 사람이 지향하는 바는 근본적으로 달랐다홍대용이 급선무로 생각한 것은 이용후생(利用厚生), 즉 학문에서 배운 것을 실천해 백성들의 현실의 삶을 이롭게 하는 것이었다반면 정조가 급선무로 생각한 것은 왕 스스로가 군자가 되어 보편타당한 의리를 세우고그에 따라 나라가 잘 다스려지는 것이었다이 지점에서 홍대용은 정조와 자신이 갈 길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시대에 동참하기를 포기한다

이 책은 개혁군주로 널리 알려졌던 정조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그로 인해 홍대용과 정조가 엇갈리는 과정을 생생하고도 흥미진진하게 펼쳐내고 있다홍대용과의 논쟁에서 의견이 엇갈릴 때마다 자기 권위를 내세우며 미묘한 신경전을 펼치고이용후생에 대한 홍대용의 간언을 주의 깊게 듣기보다는 흥밋거리로 여기는 정조의 모습은 그의 개혁군주로서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정조와의 근본적인 관점 차이로 새로운 세상을 향한 홍대용의 꿈이 좌절되는 모습은 독자에게 안타까움을 남긴다하지만 저자는 그의 실학이 여전히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며 그의 꿈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실마리를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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