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
오인칸 브레이스웨이트 지음, 강승희 옮김 / 천문장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외 여행을 갈 수는 없으니 대신 책으로라도 외국을 느껴보자고 도서관 해외 문학 코너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런데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표지와 제목의 책이 있었다. 샛노란 색 표지 위에 '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라는 제목이라니. 서가에서 책을 꺼내 뒤 표지를 보니 '연쇄살인범 동생을 둔 주인공이 동생이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뒷수습해 주는 이야기'라고 한다. 설정도 특이한데 나이지리아 스릴러라고 한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스릴러의 대부분은 일본이나 영미권 스릴러였다. 이래저래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조합이라 빌려왔다.


평범한 간호사인 주인공 코레드가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이유가 딱 하나 있으니, 바로 동생이었다. 엄마를 닮아 평범한 외모인 코레드와 달리 동생 아율라는 미남이었던 아빠를 닮아 인형처럼 예쁘다. 그런데 아율라가 도무지 고치지 못하는 악습관이 있다. 매번 실수인 듯 고의인 듯 남자친구를 죽여버리는 것이다. 그 때문에 코레드는 밥을 먹으려다가도 동생이 호출하면 달려가, 자신의 의학 기술과 청소 기술을 총동원해 시체를 처리해야 한다. 게다가 아율라는 남자친구를 죽인 지 며칠도 되지 않아 엄마와 즐겁게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려고 할 정도로 죄책감도 생각도 없다. 동생이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숨겨주고 수습해 주느라 벅찬데, 그에 대한 보상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보상은커녕 엄마의 사랑과 남자들의 관심, 심지어 짝사랑하는 동료 의사 선생님의 마음까지 아율라가 독차지한다. 이런 줄거리 소개를 읽어보면, 스릴러 쪽으로도 드라마 쪽으로도 흥미로운 소설일 것 같다.


문제는 이 소설이 스릴러로서는 스릴이 없고 드라마로서는 여운이 없다는 것이다. 한 챕터의 길이가 매우 짧아 호흡이 짧은 것이 이 소설의 특징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 전개에 속도감이 붙는 것이 아니라 뚝뚝 이야기가 끊어지는 느낌이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의 전개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릴이나 긴장감, 뒤통수를 치는 듯한 반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복잡하고 정교한 트릭이 있는 것도 아니다.


  드라마로서 여운을 줄 수 있는 요소가 없지는 않다. 처음에는 예쁘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다 가진 아율라가 언니를 마냥 이용하기만 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어린 자신을 중년 남자와 조혼시키려 했던 아버지에게서 지켜줬던 언니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었다. 코레드도 짝사랑하는 사람까지 빼앗아가고 늘 뒤치다꺼리를 떠넘기는 동생을 원망하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동생을 지키려고 한다. 사실 두 자매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것은 남자들이 아니라 서로다. 이런 서사가 뭉클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소설이 진행되면서 쌓여 온 감정선이 빈약하니 감정의 여운이 남지 않는다.


물론 시나 시처럼 짧은 소설이 그 안에 함축된 것으로 여운을 주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 소설의 간략한 서술은 함축적이라기보다는 빈약하다. 그 빈약한 서술 중에서도 앞에서는 아율라가 다른 곳은 몰라도 코레드 자신과 눈이 닮았다고 하다가, 뒷부분에서는 (코레드는 눈이 작다고 했는데) 아율라는 얼굴의 반은 될 정도로 눈이 크다는 묘사가 나오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속도감이 있고 경쾌하고 단순명료하다는 평도 있지만, 이야기에 몰입하게 할 만한 요소가 적다.


  제3세계나 이민 2세 작가들은 자기 나라 음식이나 언어를 중간중간에 삽입해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키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런 이국적인 요소를 찾아보는 재미도 없다. 다른 나라의 문학을 이국적인 것으로만 소비한다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아모스 오즈의 『유다』가 겨울날의 예루살렘 거리의 스산함을, 오르한 파묵의 『내 마음의 낯섦』이 새벽녘 이스탄불 골목의 차가운 공기까지 느껴주게 해주는 것처럼 우리는 책을 통해 낯선 세계를 간접적으로 여행하게 된다. 이 소설에도 젤레 같은 전통 장신구나 아직까지 남아 있는 조혼 풍습, 교통 단속을 하면서 시민들에게 뇌물을 받고 봐주는 교통경찰 같은 나이지리아의 모습이 조금 드러나지만, 그곳의 공기를 생생하게 느끼게 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니 가볍게 한번 읽을 정도지, 곁에 두고 오래 볼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혜성처럼 등장한 천재 작가'라는 찬사를 듣는데 그 정도의 찬사가 어울리지는 않아 보인다. 책을 읽고 나서까지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연쇄살인범 내 동생My Sister the Serial Killer』라는 평범한 원제를 더 인상 깊게 바꾼 제목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다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인답지 못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가룟 유다에게 연민을 느낀다. 수천 년 동안 그 이름이 배신자의 대명사로 불렸던 사람. 온 세상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구원한 예수에게도 구원받지 못했던 사람. 그가 예수를 팔지 않았다면 십자가도 부활도 기독교도 없었을 텐데, 그는 구원의 도구로 사용되었어도 영원히 저주받는 운명에 놓였다. 그래서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부터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소설  「직소」까지 가룟 유다를 재해석하는 작품들에 끌리곤 했다. 이스라엘의 작가 아모스 오즈의 마지막 장편소설  『유다』도 같은 맥락에서 호기심이 생겼다.


  예상과 다르게 유다의 재해석만이 이 소설의 중심축은 아니었다. 1959년에서 196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대학원생 슈무엘이 예루살렘의 어느 외딴 집에서 몸이 불편한 노인 게르숌 발드의 말벗이 되어주는 이야기가 액자 역할을 하고, 발드와 그의 며느리 아탈리야, 아탈리야의 친정아버지 쉐알티엘 아브라바넬이 겪은 비극과 유다의 재해석이 그 안에서 얽히며 소설을 구성한다. 발드와 아브라바넬 가족의 비극과 유다의 재해석을 통해 작가가 돌아보려는 것은 '배신자'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저명한 정치가였던 쉐알티엘 아브라바넬은 유대인만을 위한 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끝없는 전쟁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국가라는 제도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기에 이스라엘 건국을 반대했다. 이스라엘이라는 유대인만의 국가 대신 유대인과 아랍인이 공존하는 공동체를 꿈꾸었지만, 이스라엘 건국을 도모하고 있던 동료 정치인 벤구리온 때문에 정계에서 쫓겨나고 같은 민족인 이스라엘인들에게 매국노 취급을 당했다.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배신자였다.

  또 다른 '배신자' 유다는 이 작품에서 예수를 가장 사랑했던 제자로 재해석된다. 그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면 신의 권능으로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올 것이고, 그 즉시 천국이 이 땅에 임하고 사랑만이 넘쳐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예수는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오기는커녕 어린애처럼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으며 울부짖다 힘없이 죽어갔다.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 사랑했던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인 데다, 세상의 구원이라는 일생의 목적이 산산조각 났으니 그에게는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배신자로 손가락질 받았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아모스 오즈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배신자로 불리는 사람들 중에는 정말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거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신을 믿고 사랑했던 사람들, 뜻을 함께했던 동지들, 심지어 나라까지 배신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를 너무 앞서 태어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바람직하다고 여기고 기대하는 방향으로는 다른 방향으로 갔던 사람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꾸지 못한 꿈을 꾼 사람들도 있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재평가될 기회도 얻을 수 없었던 것이 그들의 비극이었다.

  그들 중에는 아모스 오즈 자신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쉐알티엘처럼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자체의 존재를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평화롭게 공존하기를 바라며 자신의 작품으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저지른 폭력을 비판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아랍 국가들과 공존하자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이스라엘 극우 단체들은 그를 배신자로 몰아갔다. 그는 쉐알티엘, 유다와 같은 처지에 있으면서 그들의 다음 세대인 청년 슈무엘의 눈으로 오랫동안 매도당하고 잊혔던 그들의 꿈과 절망, 슬픔을 헤아려본다. 슈무엘의 성찰이 작품 속에서는 그들의 운명을 바꾸거나 그들의 재평가를 이끌어내지는 못하지만, 독자들에게 역사 속에 배신자로 남았던 이들과 그들을 배신자로 몰아갔던 역사, 세상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권한다.

  배신자라는 소재는 자극적일 수 있지만 이 소설은 읽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천천히 담담하게 흘러간다. 아모스 오즈 자신이 인터뷰에서 이 책은 "추운 겨울 세 명이 한 방에 앉아 차를 마시며 서로 논쟁하는 이야기"라고 할 정도로 이 소설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등장인물들 사이의 대화다. 이상주의자 슈무엘과 현실주의자 발드의 대화, 이스라엘이 아랍인들에게 자행하는 폭력에 비판적이지만 이스라엘 국가라는 생각의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슈무엘과, 유대인들이 이 땅에 있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말하며 어리석은 전쟁을 거듭하는 남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아탈리야의 대화. 이들의 대화를 통해 오즈는 한 치도 물러서거나 주저하지 않고 고국 이스라엘이 지금까지도 자행하고 있는 폭력을 비판한다. 소설로 자신의 정치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한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와 가룟 유다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나름대로 연구해 온 슈무엘과, 해박한 지식에 기초해 자신의 견해를 풀어놓는 발드의 대화를 통해, 신학적, 철학적 고찰의 깊이를 드러낸다. 인문 연구서가 아니라 소설인데 번역자가 단 역주가 거의 300개는 될 정도로, 슈무엘과 발드는 수많은 성경 구절과 유대 경전 구절을 인용한다. 기독교인으로서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예수의 이미지와 오즈의 가룟 유다 재해석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 소설은 정치적이고 지적이며 전반적으로 건조하지만, 곱씹어 읽어보면 묘한 정취와 서정이 느껴진다. 딱딱한 빵을 씹다 보면 느껴지는 고소한 맛처럼. 책 전체에는 겨울날 예루살렘의 적막하고 황폐한 분위기가 드리워져 있다. 여러 해 전 겨울에 예루살렘에 갔을 때 느꼈던, 깊은 밤 어두운 골목의 정취가 다시 느껴졌다. 오즈가 여기서 묘사하는 예루살렘은 내가 갔을 때로부터도 수십 년 전의 예루살렘이지만, 그때부터 변하지 않는 쓸쓸함이 있다. 겨울의 어느 도시가 쓸쓸하지 않겠냐만은, 수천 년 동안 험난한 역사와 온갖 비극을 겪으면서 슬픔이 쌓여왔고, 지금도 어디서 유혈극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있어서일 것이다. 유다의 심리를 그린 47장은 이 부분만 단편소설로 따로 떼어내도 좋을 만큼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을 크게 움직이는 부분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직소처럼 휘몰아치지는 않지만 담담해서 더 여운이 남는다. 번역자는 47장을 번역하고 이틀을 울었다고 하는데, 나는 울지는 않았지만 유다의 사랑과 꿈, 희망과 절망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서사 전개가 빠르고 흥미로운 소설을 더 좋아하는 편이라 이 소설을 보름에 걸쳐서 읽었다.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언제 다시 갈지 모르는 예루살렘의 공기를 책으로나마 다시 느꼈고, 수많은 성경과 유대 경전 이야기를 통해 지식욕을 채웠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배신자로 불리는 사람들을 다시 돌아보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되었으니까. 누군가의 진심과 꿈이 다른 한 사람에게라도 기억된다면 그의 삶이 완전히 헛되지는 않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면 : 지금 물 올리러 갑니다 띵 시리즈 9
윤이나 지음 / 세미콜론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라면 1인분을 끓이는 과정의 기록이면서동시에 나에게 가장 맛있고 간편한 한 끼를 먹이는 일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는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 이렇게 선언한다라면을 제대로 된 한 끼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만 작가는 라면이야말로 가장 저렴하고 간편한 한 끼이며제대로 끓이면 맛도 보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영양 균형은 다른 끼니에 좀 더 건강한 음식을 먹어서 맞추면 된다며라면을 어엿한 한 끼로 대우하는 작가의 패기가 엿보인다.


  책의 주제에 대해 쓴 여러 글들을 아무렇게나 모아둔 같은 시리즈의 다른 책들과 달리논문처럼 라면의 A부터 Z까지 차근차근 정리한 목차 구성도 돋보인다라면을 끓이기 전 라면을 낱개로 구매할지 번들로 구매할지부터 고민하고라면을 고른 뒤라면을 끓이는 데 필요한 도구들을 점검한다라면 조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 조절과 끓이는 시간그 두 가지를 잘 해내서 맛있게 먹고 나면앞으로도 계속 라면을 먹을 수 있도록 건강관리를 꾸준히 한다이런 체계적인 구성만 봐도 작가가 라면에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가.


  책에 실린 열두 편의 글이 라면을 제대로 고르고 맛있게 끓여먹는 실질적인 팁으로 시작한다이 실용적인 도입부를 지나면 라면 이야기인 듯 라면 이야기가 아닌 듯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풀어놓는다하지만 결국에는 라면으로 돌아오니 기승전라면수미쌍라면인 글이라고 할 수 있다입맛이 없다고 누워 있다가도 라면을 끓인다고 하면 슬그머니 일어날 정도로 라면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작가와 닮은 아빠이제는 라면도 먹을 수 있다고 씩씩하게 대답하는 조카와의 추억이 있는가 하면매일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워킹홀리데이 시절의 기억이 있다한강공원 수영장의 라면 자판기에서 친구와 끓여 먹던 계란이 잠영하는 라면은 코로나로 수영장이 폐쇄되면서 다시 오지 않을 여름날의 추억이 되었다삶의 여러 순간에 라면을 먹었을 우리는 작가가 라면과 함께한 순간들에 깊이 공감할 수 있다.


  이 책의 편집자는 서문에서 누구의 간섭도 없이 오로지 나의 의지로 재미있고 맛있는 하루하루를 채워가는 인생은 마치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1인분의 라면과 닮아 있다고 말한다. 정찬이 아니라 라면 한 그릇에도 끓이는 사람만의 비법과 정성, 의지가 들어 있다. 나를 위해 1인분의 라면을 정성껏 끓여내고, 1인분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의 가치를 생각해 보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훠궈 : 내가 사랑하는 빨강 띵 시리즈 8
허윤선 지음 / 세미콜론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태어나서 훠궈를 먹어본 적은 딱 한 번이다아직까지는점심시간에 동료들과 함께 회사 근처의 훠궈 식당에 갔었는데동료들은 초심자인 나를 위해 제일 순한 맛으로 주문했다그래서인지 마른 두부가 많이 들어 있다는 것 외에는 순두부찌개와 다를 것이 없는 맛이었다처음 먹은 훠궈는 내게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했고 그 이후로도 일부러 훠궈를 찾아 먹은 적은 없는데도 이 책을 읽었다책 소개 글에서부터 작가의 훠궈 사랑이 강렬하게 느껴졌고훠궈에 읽힌 중국어권 이야기도 듣고 싶어졌기 때문이다나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신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끌리고코로나 때문에 어느 나라로도 떠나기 어려운 지금이라 다른 나라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니까.


  이 책에 실린 첫 글은 훠궈 재료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조리 시간에 대한 글이다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주문한 훠궈 재료가 나오고 냄비의 육수가 끓기 시작하면 채소의 반을 쏟아 넣고그다음에 고기를 넣는데이렇게 하면 먼저 집어넣은 재료가 냄비 바닥에서 곤죽이 되어버린다고 한다이런 훠궈를 생각하면 슬퍼서 도무지 견딜 수 없다며작가는 어떤 재료를 먼저 넣어야 하는지오래 끓여도 되는 재료는 무엇이고 오래 끓이면 안 되는 재료는 무엇인지 설명해 나간다이 첫 글에서부터 자신이 사랑하는 훠궈를 다른 사람들도 맛있게 먹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느껴진다그 뒤로도 맛있는 소스들을 찾고 내 입맛에 딱 맞게 배합하는 법작가가 좋아하는 훠궈 식당과 메뉴집에서 혼자 훠궈 만드는 법 등 훠궈를 즐기는 데 도움이 되는 팁들이 이어진다훠궈를 먹는 즐거움을 나누고 싶어 견딜 수 없어 하는 작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작가는 왜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고 싶어할 정도로 훠궈를 사랑하는 걸까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에도추위가 점점 깊어지는 겨울에도혼자 집에서 만들어 먹을 때도사람들과 여럿이 둘러앉아 먹을 때도 위장이온몸의 세포들이 훠궈의 얼큰하고 매운 맛을 요구하니까잡지 마감 날 새벽 모든 일을 마치고 새벽에 조용히 먹는 따뜻한 훠궈도 좋고각자의 개성과 입맛에 따라 다양한 소스와 재료를 넣어 먹는 훠궈도 좋으니까훠궈를 사랑하면서 쌓아간 작가의 추억들은 작가의 마음뿐만 아니라 독자의 마음속에서도 따뜻한 온도로 다가온다.

 

  작가가 진짜 로컬 훠궈 맛집을 찾아다녔던 홍콩의 뒷골목 이야기는 여행이 그리운 마음을 달래준다동네 칼국수집처럼 친숙한 홍콩의 가게들음식 사진 하나 없이 온통 한자로만 쓰여 있어 한자알못인 관광객들을 당황하게 하는 메뉴판낯선 식재료와 디저트들이 즐비한 골목, “왜 이렇게 뜸했어한국에 간 줄 알았잖아.”라고 인사하는 단골 식당 사장님(오죽 자주 갔으면 한국에서 오는 건데 한국에 갔다 온 거라고 생각했을까.)까지 낯선 풍경인데 친숙한 정이 느껴진다작가도 나도 마음 놓고 그 풍경들에 발을 다시 들여놓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훠궈는 내가 사랑하는 빨강이 아니고 앞으로도 계속 아닐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빨강’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좋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사랑스러우니까혼자든 함께든 훠궈를 사랑하면서 즐거움을 누리는 날이 그녀에게 계속되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마 박완서의 부엌 :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 띵 시리즈 7
호원숙 지음 / 세미콜론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박완서 작가의 큰딸이 썼다는 것, ‘엄마 박완서의 부엌이라는 제목박완서 작가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한 편집자 서문으로 볼 때 엄마 박완서에 대한 기억이 중심이 되는 책일 줄 알았다하지만 막상 본문을 읽으니 이 책이 엄마 박완서의 부엌’ 이야기라기보다 엄마 박완서와 할머니로부터 이어받은 나 호원숙의 부엌’ 이야기로 느껴졌다이 책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엄마 박완서가 아니라 나 호원숙이다. ‘박완서 문학의 코멘터리도 종종 등장하지만 박완서 작가가 없는 나 호원숙만의 이야기도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박완서 작가의 이야기를 좀 더 많이 듣고 싶었던 독자라면 아쉬워할 수 있겠지만, ‘나 호원숙의 부엌’ 이야기에도 박완서 작가와 그 윗세대가 남겨준 유산이 스며들어 있다그들의 유산과 작가 자신이 꾸려온 것들로 이루어진 음식 세계는 정갈하면서도 따뜻하다매일 정성을 들여 음식을 준비하고 만들어 나 자신과 가족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것늘 반복되는 고된 일이지만그 일을 매일 쉬지 않고 하기에 더 품위 있고 풍성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준다매일의 밥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의 근면함과 정성사랑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더 풍성하고 따뜻하게 만든다그 근면함과 정성사랑은 엄마와 할머니그 윗대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작가는 내 부모님과 같은 세대이니작가의 어머니 박완서 작가는 조부모님 세대작가의 할머니는 증조부모님 세대인 셈이다내가 태어나기 전이라 접해 보지 못한 옛 세대들의 일상지금은 사라져 가거나 이미 사라져 작가의 기억과 기록에만 남아 있는 사람들과 삶의 모습을 이 책으로 만날 수 있었다음력 10월에는 하얀 쌀가루를 체에 걸러 카스텔라처럼 부드러운 고사떡을 만들고시골에 가서 첫 손주에게 첫 미역국을 지어줄 해산 바가지를 구해 왔다는 할머니만두 꺼풀을 얇게 밀어 직접 만두피를 빚고만두소도 직접 만들어 식구들과 함께 만두를 빚었던 어머니어머니가 만들던 방식대로 만두를 빚는 작가이런 정겨운 풍경들을 책으로나마 만난다앞서 외국 음식에 관한 에세이들을 읽다 이 책을 읽으니 여행을 하다 우리나라친척들이 모여 사는 시골 마을로 돌아온 기분이다. '해걸이', '엽엽하다', '꾸리살', '수굿하다', '배틀하다' 등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단어들이 그 시절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더해준다.


  ‘엄마 박완서의 부엌이라기보다 나 호원숙의 부엌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지도 모르지만부제는 책 내용과 딱 맞아떨어진다할머니에게서 엄마로엄마에게서 작가 자신으로 이어져 온 사랑의 기억이 있다늘 정확한 시간에 퇴근해 도넛이나 고로케를 안겨주던 아버지의 사랑과 그런 아버지의 퇴근 시간에 맞춰 음식을 준비하던 엄마의 사랑에 대한 기억도 있다그들 가족의 사랑 이야기이지만험하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따뜻하고 정성 가득한 음식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이어진 사랑이 있기에 마음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P. S. 이 책의 부제가 된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은 작가의 아버지가 늘 정확한 시간에 퇴근해 가족들에게 돌아오던 시기에 느꼈던 사랑과 행복감을 말한다작가는 어머니의 단편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에서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를 맞이하는 장면을 인용한다. “늙은 얼굴에 걸맞지 않은 갓난아기 같은 민둥머리를 하고 있을망정 그는 매일매일 멋있어졌다너무 멋있어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황홀할 적도 있었다일찍이 연애할 때도 신혼 시절에도 느껴보지 못한 느낌이었다그건 순전히 살아 있음에 대한 매혹이었다.” 이 장면이 마음에 남아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을 찾아보니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작품이었다박완서 작가의 남편은 항암 치료 때문에 머리카락이 다 빠져 모자를 쓰고 다닌 것이었다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병들고 노쇠해져도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설레어하고 감사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