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설공찬전
이서영 지음, 신중철 그림, 채수 원작 / 솔아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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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설공찬이』, 『다시 쓰는 설공찬전』스포일러 포함


  두 달 전 도서관에서 『다시 쓰는 설공찬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조선 전기의 문신 채수蔡壽, 1449-1515가 쓴 공포 소설 <설공찬전>을 현대 작가가 다시 쓴 소설이다. <설공찬전>은 당대의 베스트셀러로 한문뿐만 아니라 한글로도 필사되어 평범한 백성들 사이에서도 많이 읽혔다. 그러나 당나라에 반역해 후량이라는 나라를 창건했던 장군 주전충이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이유로 논란에 휩싸였다. 당시 국왕이었던 중종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는데, 주전충에 중종을 빗대어 비판했다는 의심을 받은 것이다. 그 밖에도 "저승에서는 여자여도 글을 알면 좋은 벼슬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대목, 명나라 성화제가 총애하는 신하의 수명을 늘려달라고 했다가 오히려 염라대왕에게 노여움만 샀다는 대목이 성리학적 세계관에 갇혀 있던 유학자들에게 노여움을 샀다. 사헌부에서는 저자인 채수를 처형하고 간언했지만, 중종은 너무 과한 처사라며 채수를 파직하는 데 그쳤다. 


  금서가 되어 사라진 줄 알았던 이 소설의 한글 필사본이 1996년 발견되었다. 최초의 한글 소설로 알려진 <홍길동전>보다 100여 년 앞선 소설이었다. 젊은 나이에 죽은 선비 설공찬이 사촌동생 설공침의 몸에 빙의되어 저승 이야기를 한다는 이 소설은 결말 부분이 필사되지 않아 미완성 형태로 남았다. 그럼에도 빙의와 저승 세계라는 환상적인 소재를 다룬 덕분인지 설공찬전을 원작으로 연극도 만들어졌고, 설공찬전을 모티브로 한 웹툰, 웹소설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소설의 배경이 된 순창 지역에서는 설공찬전을 재해석해 다시 쓰는 프로젝트 두 가지를 진행했다.


  그 중 김재석 작가가 쓴 『다시 쓰는 설공찬이』는 전문 작가가 쓴 소설답게 소설 자체의 퀄리티는 괜찮은 편이다. 홍보용 소설답게 우리나라, 특히 순창 지역의 자연과 민속, 저승관을 최대한 자세하게 보여주려는 의도가 보이지만 꽤 자연스럽게 소설에 녹여냈다. 무엇보다 원작에서는 설공찬이 빙의되기 전 잠깐 설공침의 몸에 깃들었다 박수무당 김석산에게 쫓겨나는 부분에서만 등장하는 설공찬의 누이에게 '초희'라는 이름과 그녀만의 서사를 준 것이 흥미로웠다.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고 깊이 이해했지만 세상이 정해 놓은 한계에 부딪쳐야 했던 공찬과 초희 남매의 모습을 애틋하게 그려냈다. 그래서 설공찬은 인간으로 환생하고 설초희는 저승에서 명부를 담당하는 관리가 되었다는 결말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설공찬은 원작에서 사촌동생 설공침을 괴롭히지만, 김재석 작가는 그런 공찬의 행동이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재해석했다. 공찬은 당시 사회의 틀에 갇힌 사람들이 그 틀에서 벗어나 좀 더 자연스럽고 인간적으로 살아가길, 더 선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 때문에 공침의 입을 빌어 이야기한 것이었다. 자신과 동갑내기지만 훨씬 더 총명한 사촌 공찬을 질투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사촌누이 초희를 무시하던 공침은 다소 단순한 악역처럼 보였지만, 공찬의 혼이 빙의되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 초희는 '여자도 능력이 있으면 중용된다'는 원작의 구절을 스스로 증명했다. 원작의 권선징악적인 교훈을 넘어서 두 남매가 새로운 삶을 찾고, 남은 사람들도 그들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돌아보는 결말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다시 쓰는 설공찬이』가 설공찬과 설초희 남매에 집중한 반면, 이서영 작가의 『다시 쓰는 설공찬전』은 이들의 영혼이 빙의되는 설공침에게 집중한다. 『다시 쓰는 설공찬이』에서 설공침이 다소 단순한 악역으로 나왔던 것과 달리(이 소설에서도 나중에는 설공침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만) 『다시 쓰는 설공찬전』에서 설공침은 악하다기보다는 아무것에도 의욕이 없어 아무렇게나 사는 인물로 묘사된다. 설공찬과 설공심(『다시 쓰는 설공찬전』에서는 설공찬의 누이가 '설공심'이라는 이름으로 설정되어 있다) 남매의 빙의는 설공침이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된다. 빙의가 풀리고 나서 그는 자신의 몸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 일인지 깨닫고, 설공찬의 저승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아 있을 때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원작과 『다시 쓰는 설공찬이』에서 설공찬이 저승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통로로만 활용되었던 설공침을, 빙의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주인공으로 해석한 것이 신선하다. 빙의가 풀린 뒤 설공찬이 오랜만에 제정신으로 느끼는 자신의 몸과, 그 몸에 닿는 부드러운 이불 같은 작은 것들에서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새롭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심리 묘사가 특히 섬세하다. 


  하지만 서사 전개에서는 역시 중견 작가인 김재석 작가가 더 노련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서영 작가가 원작의 서사를 그대로 풀어 쓰면서 설공찬과 설공심, 설공찬은 이런 사람이라고 직접 설명하는 반면, 김재석 작가는 원작에 없는 사건들을 만들어내 설공찬, 설초희 남매의 서사를 엮어나가고 둘의 말과 행동을 통해 둘이 어떤 인물인지 보여준다. 이서영 작가는 살구나무에 내려앉는 공심 혼령의 옷자락에서 살구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무시무시하면서도 아름다운 장면으로 완성하지만, 설공침에게 빙의된 설공찬이 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설공침의 아버지 설충수를 농락하는 장면에서의 공포감은 김재석 작가가 더욱 더 스릴 있게 그려낸다. 모든 인물이 표준어를 쓰는『다시 쓰는 설공찬이』와 달리『다시 쓰는 설공찬전』은 순창 토박이 주민의 감수를 받아서 순창 방언을 쓴 정성이 돋보이지만, 설공찬 남매, 설공침은 순창 방언을 쓰는데 주인공들의 부모 세대는 표준어를 쓰고 있어 일관성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부모 세대가 한양에서 살다 온 것도 아니다. 설씨 일가는 몇 대째 순창에서 살아 왔으니 순창 방언을 쓰려면 부모 세대도 쓰는 것으로 설정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내가 드라마를 만든다면 김재석 작가 버전을 원작으로 하거나 두 작가 버전을 모두 활용하되 이서영 작가 버전에서는 설공침의 내면 부분을 가져올 것이다. 


  관에서 시작한 프로젝트답게 두 책의 만듦새 모두 투박하다. 문제집만큼 큰 판형에 동화책만큼 여백이 넓고 글씨가 커 소설이라기보다는 동화책 같은 느낌이다. 『다시 쓰는 설공찬전』은 서문에 영어 번역을 병기했는데, 영어 실력이 좋지 않은 나도 서문의 영문 번역이 딱딱한 직역이라고 느껴졌다. 그리고 영문 텍스트에서 단행본 제목은 보통 이탤릭체로 표기하는데 영문 버전에서도 단행본 제목을 중괄호([]) 안에 넣어 영문 텍스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좀 더 경험이 많은 출판사에 맡겨서 세련된 편집과 디자인으로 나왔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고전의 재해석 자체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재해석 작품들이 양적으로도 많이 늘어나고 질적으로도 더 발전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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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독본 - 〈아Q정전〉부터 〈희망〉까지, 루쉰 소설·산문집
루쉰 지음, 이욱연 옮김 / 휴머니스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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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고향」스포일러 포함


희망이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다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고향

 

  좋아하는 드라마의 명대사가 루쉰의 이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부터 이 구절을 좋아했다지금까지도 책상 앞에 써 붙여 놓았을 정도로 좋아하지만 이 구절이 루쉰의 단편 소설 고향속 한 구절이라는 것을 알 뿐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는 몰랐었다십여 년이 지난 지금 고향을 처음으로 읽게 되면서 내가 사랑하는 이 구절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알게 되었다.


  「고향의 주인공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대대로 살아오던 고향집을 다른 사람에게 팔게 되었다고향집을 처분하러 20여 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어린 시절의 정겨운 모습이 아니었다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황량하고 쓸쓸했다기와 사이에는 풀이 돋아나 있을 정도로 고향집은 낡아버렸고일가친척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나 늙은 어머니와 어린 조카만 남아 있다어린 시절 함께 놀던 친구는 흉년과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며 겉늙어 예전의 생기를 모두 잃어버렸다위의 구절은 주인공이 어머니조카와 타향으로 떠나는 배에서 희망에 대해 생각하다 하는 말로이 소설의 마지막 구절이다.

 

  이렇게 결코 희망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주인공은 어떻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주인공은 조카를 비롯한 미래 세대들에게서 희망을 본다자신과 고향 친구는 성인이 되어 재회했을 때 계급 차이(주인공은 지주의 아들이고 친구는 소작농의 아들이다)로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지만아직 어리고 순수한 조카와 친구의 아들은 계급 차이는 신경 쓰지 않고 스스럼없이 서로를 대한다주인공은 그 아이들이 자신과 친구가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살기를 바란다고향의 주인공처럼 루쉰은 지금 세대보다 미래의 세대가지금의 세상보다 미래의 세상이 더 발전하고 진화하기를 바랐다.

 

  그는 중국인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역사가 노예가 되고 싶어도 되지 못한 시대와 노예가 되어 잠시 안정적으로 살았던 시대가 교차해 온 역사였을 뿐이라고 말한다이민족 정복자나 권력자가 사람들을 노예로도 삼지 않고 개나 소를 죽이듯이 쉽게 죽였던 시대와노예가 되어 착취당하더라도 그나마 목숨은 부지했던 시대루쉰은 권력자와 부자들을 위해 힘없는 사람들가난한 사람들이 희생되어 왔던 중국의 역사를 인육의 잔치라고까지 한다그의 또 다른 단편 소설 광인일기에서 피해망상증에 걸린 주인공은 주변 사람들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생각하고 공포에 사로잡히는데그저 정신병자의 망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일말의 진실이 들어 있다실제로 인육을 먹는 것은 아니라 해도 사람이 자신을 위해 동족을 해치는 세상은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 왔으니.


  「광인일기의 주인공이 미쳐 있는 동안 쓴 일기는 식인해 보지 않은 아이가 혹시 아직도 있을까아이들을 구하라는 구절로 끝난다루쉰은 아무도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새로운 시대를 꿈꾸었고그 시대를 만드는 것이 청년들의 사명이라고 말한다그는 청년들이 인육의 잔치판을 치워버리고 생존하고 발전하기를 바란다자신이 길을 안다고 그럴 듯한 간판만 내세우는 자칭 지도자들을 따르기보다는친구들을 찾고 그들과 단결해 생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근대 이전의 낡은 관습과 근대의 새로운 사상이 서로 충돌하고외세의 간섭과 침략이 계속되는 혼란스러운 당시의 중국 사회에서그는 자신조차 어떤 길을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솔직히 털어놓으며 청년들 스스로 길을 찾아가기를 바랐다.


  100여 년 전 중국 작가 루쉰이 동포들에게 외쳤던 이 이야기들이 왜 시간과 국경을 뛰어넘어 지금의 우리에게도 생생하게 다가오는 걸까죽임당하거나 노예가 되어 착취당해 왔던 식인의 역사는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계속되고 있는 역사이기 때문이다지금의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을의 위치에서 착취당하거나 을이 될 기회조차 없어 내일의 생계를 걱정한다수많은 사람들이 청년들의 멘토를 자처하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공허한 소리만 늘어놓거나 근거 없이 희망을 이야기할 뿐이다오히려 자신은 누군가에게 길을 가르쳐주고 이끌어줄 입장이 못 된다고 말하는 루쉰이 더 믿음직스럽게 느껴진다그저 다 잘 될 거라는 말보다희망이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닐지 의심하면서도 끝까지 절망과 싸우려 했던 루쉰의 절박함이 더 와 닿는다.

 

  루쉰이 끝까지 놓지 못한 희망은 이루어졌을까그가 자신이 살던 시대의 어두움을 뚫고 희망을 보려던 그때로부터 100여 년 뒤의 미래 세상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루쉰이 살던 세상보다 나아졌을까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상은 지금도 계속되니 어떤 면에서는 정체되어 있고그의 조국에서는 이제 그처럼 쓴소리를 하는 사람은 발을 붙일 수 없으니 어떤 면에서는 더 후퇴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세상을 더 발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자기 자신조차 냉정하게 평가하는 그의 비판 정신은 숫돌처럼 우리의 정신을 날카롭게 만든다헛된 희망이 사람들을 더 고통스럽게 할까 경계하면서도청년들이 자신이 겪었던 공허함과 적막함을 다시 느끼지 않도록 위로하려는 그의 따뜻한 마음은 100여 년 뒤의 우리에게도 와 닿는다희망이 있다고 섣불리 낙관하지도없다고 섣불리 비관하지도 않고 다른 이들과 손을 잡고 함께 희망을 만들어 가길 바랐던 마음고향의 마지막 구절을 늘 보면서도 알지 못했던 그 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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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온 더 트레인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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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른다섯 살의 영국 여성 레이첼은 남편의 외도로 이혼한 뒤, 알콜 중독이 심해져 직장에서도 해고되었다. 오갈 데 없어진 그녀는 친구 집에 얹혀 살면서, 친구에게는 실직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매일 아침 출근을 하는 척 런던행 기차를 탄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어느 완벽해 보이는 젊은 부부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이런저런 상상을 하는 것이 레이첼의 유일한 낙이다. 그러던 어느 날, 부부 중 아내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면서 레이첼은 생각지 못한 사건에 휘말린다.


  영국의 작가 폴라 호킨스의 소설 『걸 온 더 트레인』은 알콜 중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주인공이 차창 너머로 지켜봐 왔던 여성의 실종 사건과 얽히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리고 있다. 스릴러로서의 재미를 갖추었으면서 여성이 겪는 폭력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뛰어난 대중성 덕분에 할리우드와 발리우드에서 영화화되었다.


 이 소설은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특성을 살려서, 독자들이 끝까지 사건의 진상을 알 수 없게 한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지적 수준이 낮거나 객관성이 떨어지는 화자의 시점에서 서술하는 기법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레이첼은 중증 알콜 중독인데다 남편에 대한 집착과 남편의 후처에 대한 증오가 심해 객관적으로 사건을 바라보지 못하기에 '신뢰할 수 없는 화자'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레이첼과 실종된 여성 메건, 레이첼의 남편과 불륜을 저지르다 결국 후처가 된 애나, 세 명의 시점을 오가며, 메건은 과거의 시점에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로서는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레이첼과 애나는 둘의 (전/현) 남편 톰이라는 연결고리가 있지만, 그 둘과 메건은 도대체 무슨 관계인지.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세 사람의 관계와 사건의 진상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독자들은 충격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소설 내내 긴장감을 잃지 않기 때문에, 직장도 가정도 잃고 술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주인공의 우울한 심리 묘사가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도 늘어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들이 자신이 레이첼인 것처럼 몰입해서 혼란스러워지게 만든다. 가장 우울한 장면에서마저도 독자들이 이입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분명 장점이다.

 

  이렇게 이 소설은 스릴러로서의 완성도도 뛰어나지만, 메시지도 갖추고 있다. 레이첼과 메건, 애나는 가정에서 보이지 않는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레이첼은 전 남편 톰에게 자신이 구제불능 알콜 중독자라는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가스라이팅당해 왔다. 메건은 겉보기에는 더 없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직업을 잃고 무기력해진데다, 남편의 도를 넘은 집착과 과거의 상처 때문에 괴로워한다. 애나는 자신이 레이첼에게서 톰을 쟁취해냈고 완벽하게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고 생각하지만, 남편의 은밀한 통제에 갇혀 있고 자신이 배신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보이지 않는 폭력은 이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목을 조여 오고 있다. 현실에서 여성이 가정 안에서 겪는 보이지 않는 폭력이 바로 내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러면서 단순히 폭력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들이 서로 유대하면서 폭력을 이겨내고 새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토록 서로를 미워하고 경계했던 레이첼과 애나는 톰이 자신들에게 저지른 폭력을 깨닫게 된 뒤, 절체절명의 순간에 힘을 합쳐 톰을 응징한다. 레이첼은 자신이 구제 불능의 알콜 중독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준비를 한다. 애나에게도 남편의 통제를 벗어나 자신이 주체가 되어 살아갈 기회가 주어졌다. 소설 내내 드리워졌던 어두운 구름과 짙은 안개는 걷히고 희망적인 결말이 독자를 맞으면서, 스스로의 의지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타인과의 연대로 폭력과 억압을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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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오늘의 젊은 작가 26
김병운 지음 / 민음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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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의도로 쓰인 작품을 좋게 평가하지 못할 때는 죄책감이 든다.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을 평가할 때 이런 죄책감을 느꼈다. 이 소설은 공상표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는 배우 강은성이 진짜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동성애자라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세상에 드러내는 이야기이다. 그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겠다는 마음 하나로 세상의 온갖 편견과 몰이해, 폭력에 맞서 분투하는 인간의 이야기. 정말 좋은 주제이고 내가 마음 깊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소설에 온전히 몰입하지 못했을까?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우선 이 소설은 메인플롯인 공상표의 커밍아웃과 사랑 이야기가 아닌 서브플롯인 공상표의 어머니 김미승과 그녀의 전 연인 양병진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배우인 아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연예계에서 일해 오던 김미승은 동료인 양병진과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양병진의 말처럼 김미승은 아들에게 줄 사랑이 너무 많아 아들을 도무지 떠나지 못했고, 양병진에게 온전한 사랑을 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은 헤어졌다. 아들이 갑자기 사라지자 김미승은 양병진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양병진은 다른 사람과 결혼했으면서도 김미승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고 종종 그녀와 만나며 옛 감정을 떠올린다. 그는 아들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느라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들에게만큼 애정을 쏟지 못하는 김미승의 모습을 보여주는 관찰자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결혼한 상태에서 배우자 몰래 옛 연인을 만나면서 애틋한 감정을 떠올리는 것 자체에 공감할 수 없었고, 메인플롯인 공상표의 이야기와 겉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공상표와 김영우의 사랑 이야기가 기대했던 것만큼 마음을 크게 움직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우선, 김영우의 구애 방식은 다소 폭력적이다. 김영우는 공상표가 게이임을 직감하고 그에게 너는 정말 게이가 아니냐, 섹스 경험은 있느냐, 이상형은 어떤 사람이냐고 집요하게 캐묻는다. 공상표 본인은 그것이 추파고 작업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그 과정에서 둘 사이에 흐르던 긴장감이 싫지 않았다고 말한다. 공상표 본인에게는 나쁘지 않았다지만 게이이든 이성애자든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고 싶은 사람에게는 굉장히 무례하고 폭력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겪는 갈등들이 너무 전형적이며, 두 사람의 사랑을 와 닿게 하는 디테일이 더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김미승이 양병진과 헤어진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그가 등 푸르고 비린 생선을 싫어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정어리와 고등어 초밥을 대신 먹어주는 것 같은 사소한 것. 그런 사소한 것들이 모여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더 생생하고 개성 있게 만드는데, 작가는 그런 디테일을 보여주기보다는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열등감과 세상의 편견 때문에 헤어지게 되었는지 일일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몰입을 방해했던 것 중 하나는 게이는 여성적이다라는 편견이 이 소설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공상표는 어린 시절 소꿉장난이나 인형놀이에 관심이 많았고, 김미승은 아들의 이런 여성스러운행동을 경계해 아들의 인형을 모두 버렸다. 김영우의 단편영화에서 생애 처음으로 게이인 캐릭터를 연기한 공상표는, 영화 속 자신의 모습이 게이 같은 것, 말투, 몸짓, 목소리가 남자답지 못한 것이 싫었다고 말한다.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이 따로 있을까? 그리고 세상에는 수많은 게이들이 있고, 그들은 그저 각각의 개성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이 소설은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를 비판하는 작품인데도 한편으로는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쉬웠다.


  이런 점들 때문에 온전히 이 소설에 몰입하지 못했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마음이 먹먹해졌다. 몇 시간 뒤에 자신이 방화 사건으로 죽는다는 것을 모른 채 김영우가 마지막으로 공상표에게 문자를 보내는 장면이다. 몇 년 동안 공상표에게 다시 다가갈 용기를 내지 못하다 공상표가 커밍아웃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몇 번이나 문자를 썼다 지웠다 커밍아웃을 축하한다는 문자를 보낸다. 그러고 나서 어쩌면 공상표를 다시 만나고 그와 함께 만들지도 모를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다는 기대를 품는다. 독자들은 그의 기대가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죽은 김영우뿐 아니라 만들어질 수 있었지만 앞으로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 그들의 영화에게 애도를 보낸다. 그리고 자신에게 씌워질 온갖 편견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짜 자신으로 살기로 선택한 공상표에게 응원을 보내고, 그가 앞으로 만들어갈 작품들을 기대한다.

 

P.S. 부록으로 실려 있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는 꽤 알차고 디테일하다. 시놉시스를 읽어 보니 흥미로운 것들도 여러 개 보여 실제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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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썰록
김성희 외 지음 / 시공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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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위가 약한 편이라 좀비물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관동별곡>부터 <만복사저포기>, <사랑 손님과 어머니>, <운수 좋은 날>, <소나기>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우리 문학 작품들을 좀비물로 다시 썼다는 책 소개에 궁금해졌다. 대체 저 작품들에 어떻게 좀비라는 소재를 넣을 수 있을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책에 실린 다섯 편의 패러디 소설 모두 아이디어도 기발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필력도 좋았다. 각 소설에 대한 감상을 간단하게 적으려고 한다.

관동행: Gama to Gwandong (원작: 정철-관동별곡)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 중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다. 현대물보다는 사극을 더 좋아하기도 하고,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무서운 얘기를 해 달라는 학생들에게 <관동별곡>의 뒷이야기를 들려주는 서사 방식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너희 반이 진도 꼴찌다'라는 선생님들의 단골 레퍼토리에 누구나 <관동별곡>을 공부할 때 느꼈을 심정("폭포가 멋지군, 하면 될 걸 갖다가 용의 꼬리가 어떻고, 오바는 또 얼마나 심한지. 그래서 500년 뒤에 니들은 읽기 싫다고 난리를 치고")을 솔직하게 내뱉으니 고등학교 때 국어 시간의 추억들이 떠올랐다. 게다가 <부산행: Train to Busan>을 패러디한 제목의 재기발랄함까지. 잔혹하지만 제목만큼이나 유쾌한 분위기를 끝까지 이끌어가 즐겁게 읽었다.

시골에서 유배 생활을 해다 갑자기 왕의 부름을 받고 강원도 관찰사가 됐는데, 왜 정철은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몇 마디로 압축하고 폭포 얘기나 줄줄이 늘어놓고 있을까? <관동행>은 이런 의문에서 시작된 단편이다. <관동별곡>의 저자 송강 정철을 모델로 한 우리의 주인공 정 대감은 학식이 풍부하고 유능한 관료였다. 그러나 문제는 누구한테나 쓴소리를 필터 없이 퍼붓는 고지식한 성격. 어린 딸이 처음 만든 물김치를 자랑하는 친구에게 그 물김치가 어째서 못 만든 건지 정 대감이 한 페이지 가득 품평을 늘어놓는 장면에서는 빵 터졌다. 그렇게 지나치게 강직한 성품 탓에 조정 대소 신료들은 물론 왕에게 미움을 산 정 대감은 파직되고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벼슬 잘리고 지방으로 내려와 백수가 된 상황을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라는 시 구절로 미화하며 정신승리하던 정 대감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왕이 정 대감을 강원도 관찰사로 제수했다는 것이다. 아내과 종복들에게 모처럼 위엄 있는 모습을 보일 수 있어 들뜬 마음에 성대하게 관찰사 부임 행차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웬 미친놈이 정 대감에게 뛰어든다. 그런데 그 미친놈이 그냥 미친놈이 아니라 희뿌옇게 썩은 눈알에 구더기가 끓고 있는 좀비였다. 왕과 조정 신료들은 도성을 제외한 전국에 좀비로 변하는 전염병이 퍼지자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강원도 관찰사에 정 대감을 임명한 것이다. 정 대감 일행의 관동행은 꽃길이 아니라 저승길이었다.


  좀비가 근처에만 나타나도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면서 재채기가 나는 증상 때문에 좀비 감지기가 된 정 대감. 정 대감은 자신의 좀비 감지기 기능과 풍부한 지식을 활용해 백성들과 함께 좀비에 맞서 싸운다. 가족들과 종복들에게 생계를 맡기고 하염없이 때만 기다렸던 잉여인간 정 대감이 자기 재능을 활용해 진정한 리더로 변화해 가는 모습이 나름 감동적이었다. 남편을 지키기 위해 비녀 하나 들고 좀비에게 달려드는 유씨 부인의 용기와 사랑에 뭉클해지기도 했고. 나름대로의 사연과 잘생긴 외모, 뛰어난 무예 능력을 갖춰 조력자로 활약할 줄 알았던 마을 청년이, 결국은 좀비 치료제만 들고 도망가 버리는 대목은 클리셰를 깨서 신선하게 느껴졌다. <관동별곡>의 구절들과 기근으로 인해 백성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까지 삽입해 역사물로서의 무게감도 살짝 넣었다. 작가 후기에서는 "단점 몇 개는 발휘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하지만 독자인 내가 보기에는 장점이 많았던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만복사 좀비기(원작: 김만중-『금오신화』 중 <만복사 저포기>)

<관동행>과 같은 역사물이지만 판소리 한 마당을 하듯 유쾌하게 입담을 펼치는 <관동행>과 달리 서정적으로 <만복사 저포기>를 재해석하고 있다. 작가는 왜 <만복사 저포기>의 주인공 양생이 젊은 나이에 가족들과 떨어져 만복사에서 혼자 지내게 됐을까, 라는 의문에서 이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왜구가 쳐들어온데다(고려시대가 배경이기 때문에 임진왜란은 아니다) 왜구에게 죽은 마을 사람들이 좀비로 변하면서 양생을 포함한 생존자들은 만복사로 피신하게 된다. 언제 좀비에게 습격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양생은 혼인을 하고 손주를 낳아 어머니께 효도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다, 원작처럼 부처님과 저포 내기를 해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스님들과 절에 함께 숨어 있던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좀비일 거라 의심하고, 양생 본인도 그런 의문을 품지만 그녀가 부처님이 보내주신 배필이라는 생각에 그녀를 감싼다.

맹목적으로 아가씨를 지키려는 양생의 모습이 순정남으로 보일 수 있지만, 정작 그녀도 자신을 사랑하는지는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는 것이 찜찜하게 느껴졌다. 결국 양생은 이미 좀비에게 물려 감염되어 좀비가 되었고, 양생 때문에 절 안의 모든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 있었다는 반전이 밝혀진다. 양생은 그녀가 좀비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목숨을 기꺼이 내어주지만, 좀비 소탕 대원인 그녀에게 양생은 가엽지만 생존자들을 위해서 퇴치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이런 엇갈림이 안타깝고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양생뿐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던 절 안의 모든 사람들까지 안타까웠다. 그들에게서 좀비가 됐을 리는 없지만 전쟁과 기근 등 온갖 환란으로 소리 없이 사라져 갔을 역사 속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사랑 손님과 어머니, 그리고 죽은 아버지(원작: 주요섭-<사랑 손님과 어머니>)

원작의 문장까지 하나하나 비틀어 원작과 한 문장 한 문장 비교하며 읽는 재미가 있었다. 원작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옥희의 아버지 경선이 살아 있다는 것. 그러나 심한 병에 걸려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처지고, 옥희의 친할머니는 아들의 병을 며느리 탓으로 돌리며 옥희 어머니를 심하게 구박한다. 스물네 살의 나이에 여섯 살짜리 아이의 어머니이자 며느리, 아내로 살면서 시어머니와 시댁 식구들에게 근거 없는 미움을 받고 가사 노동에 시달리는 옥희 어머니. 가부장제의 억압 아래서 그녀는 기독교 신앙에 의지하며 이 지옥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매일 밤 기도한다.

남편이 아직 살아 있는데도 어머니가 사랑 손님에게 미묘한 감정을 드러내면서 긴장감이 조금씩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평소에는 순한데 이상하게 사랑 손님만 보면 맹렬하게 짖던 개가 갑자기 죽으면서,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이상한 증세가 나타나면서 긴장감은 더욱 증폭되고, 결국 어머니와 사랑 손님의 관계, 그들이 아버지에게 한 짓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피비린내 나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자신이 해방되기 위해서 남편도 시어머니도 마을 사람들도 망설임 없이 좀비로 만들고 살육해 버린 어머니가, 마침내 기차에 올라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에서는 희열이 느껴진다. 아직 스물네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옥희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던 원작 속 어머니와 달리, 이 작품 속 어머니는 좀비라는 수단을 이용해 스스로 해방을 쟁취한다. 후반으로 갈수록 잔혹해지는 전개가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옥희 어머니의 이런 반란이 통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운수 좋은 날(원작: 현진건-운수 좋은 날)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들 중 가장 원작과 거리가 멀다. 잘 나가는 모델이자 추리소설 작가였던 주인공은 남편과의 이혼과 슬럼프로 망가져 간다. 전 남편의 재혼 소식을 들은 그녀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대리 기사를 불러 전 남편의 결혼식장으로 쳐들어가는데, 이것이 <운수 좋은 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런데 이 대리 기사의 성이 김씨라는 점에서 아, 설마 싶었다. 그런데 이 김씨가 정말 김 첨지였다. 그것도 좀비가 된 김 첨지.

좀비가 되는 전염병에 걸려 아내와 아들마저 죽은 뒤 김 첨지도 그 전염병에 걸렸지만 그는 죽지도, 이성을 잃지도 않았다. 좀비가 된 게 분명한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결국 설렁탕 한 숟가락 먹이지 못하고 아내를 떠나보낸 이후로 김 첨지는 고기를 입에 댈 수 없었다. 슬럼프에 빠지면서 고기에 집착하며 날씬했던 몸무게가 이전의 두 배로 늘어났던 주인공은 김 첨지 때문에 채식밖에 할 수 없는 좀비가 된다. 그녀는 좀비가 되면서 날씬하고 아름다웠던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만, 인육에 대한 갈망이 불쑥불쑥 치밀어 올라올라 주체할 수 없게 된다. 외모가 아름다웠을 때는 주인공을 칭송하고 욕망하던 사람들이, 주인공의 외모가 망가지자 그녀를 꺼리고 비웃는 모습이 씁쓸했다. 그래도 다른 단편들에서 무수히 썰리고 죽어 나가던 다른 좀비들에 비하면 주인공은 훨씬 나은 처지다. 채식만 하면서 살면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으니.

피, 소나기(원작: 황순원-소나기)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주인공 그녀는 <소나기>의 소녀가 진흙이 묻은 스웨터와 함께 소년까지 같이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면서 원작을 잔혹하게 변주했다. 이 단편 속 소녀는 소년과 함께 무덤에 묻히는 대신 무덤에서 깨어난다. 좀비가 된 채로. 소년은 소녀가 좀비가 된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지키다가, 결국 소녀가 살인과 식인을 하는 것까지 돕게 된다.

작가는 <사랑 손님과 어머니, 그리고 죽은 아버지>처럼 원작의 문장들을 그대로 빌려오거나 살짝 변주하는 방식으로 원작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이어간다. 그러나 하얗고 화사했던 소녀의 피부는 혼자 흑백사진에 들어 있는 것처럼 잿빛으로 변했고, 소년과 소녀에게 한 마디 건넸던 이웃 아저씨는 소녀에게 처참하게 죽임당한다.  슬프게도 소년에 대한 순수한 감정이 아닌, 자기 친할아버지까지 속이면서 살아남으려는 생존본능이 소녀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도 소년은 끝까지 소녀를 지키려 한다. 김 선생이 소녀를 죽이지 않았다면 소년은 그 자신이 희생양이 될 때까지도 소녀의 곁을 지켰을 것이다. 이렇게 맹목적일 정도로 순수해서 더 잔혹한 소년 소녀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렛미인』을 떠올리게 했다. 평범한 인간인 소년이, 다른 사람을 죽여야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소녀를 사랑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서 원작과는 또 다른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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