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도 정말 좋다.




"떠나는 사람도 돌아오는 사람도, 아는 사람도 낯선 사람도 헤어지면 다시 만나고, 만나면 다시 헤어진다"는 말도 있잖아...….." - P14

도모에는 눈을 감고 예전에 역사책에서 보았던 나폴레옹의 초상을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흰 조끼를 입고, 그 흰 조끼에 한 손을 넣은 채 가슴을 펴고 있는 모습을……………그런 모습의 남자일까…………?! 어쨌든 나폴레옹은 키가 매우 작고 못생긴 남자였다고 한다. - P33

육지에는 사람들의 슬픔이 너무 많단 말이야. 항구라는 항구는 꽤‘가보았지만, 거기 사는 사람들의 얼굴은 어둡고 외롭기만 하지. 하지만 바다에만 나오면 금빛 바닷바람이 그런 모습들을 지워버리니까 말이야...... - P40

어두운 선창의 둥근 창에서 흘러들어 오는 흰색의 광선을 등으로 받으며, 온몸 가득히 기쁨을 드러내면서 다카모리에게 손을 내민 이 남자의 얼굴은 백인인지 동양인인지 모를 정도로 햇빛에 그을렸고, 더욱이 정말 말처럼 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굴만 긴 것이 아니라 코도 길었다. 그리고 잇몸을 슬쩍 드러내면서 씩 웃을 때 벌리는 큰 입까지………… 정말 말상도 보통 말상이 아니었다. - P54

구경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얼굴을 돌리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윗도리를 어깨에 걸치고 있던 불량배 두목도 휙 뒤로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모두의 마음속에는 무언가 뒷맛이 쓴 굴욕감이 가득했다. 왠지는 잘 모르겠지만,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쓸쓸함이라고나 할까, 후회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 자기들 마음을 내리누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 P92

그 눈이 그야말로 슬픈 표정으로 자신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호소하는 것 같았다……… 가스통은 허리를 굽혀서 큰 손바닥으로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늙은 개의 슬픈 듯한 눈을 보고 있자니, 자기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길러줄 주인도 없고, 보기도 흉하고, 나이도 들어서………… 이렇게 기침까지 해대는…마치 자신을 꼭 닮은 듯한 외톨이였다. 가스통은 아직 젊지만, 덩치만 클 뿐 무기력하기 짝이 없으니… - P101

"나는 말이지, 사람이 가엾다고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 아니, 사람이 불쌍하다 어떻다라는 생각은 버린 지 오래야. 그러니까 이런 장사를 시작했던 거고 말이야." "왜, 당신, 사람을 믿지 않지?" "내가 믿지 않는 게 아니야. 다른 놈들이 나로 하여금 사람들을 믿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린 거지." - P165

"당신 버리지 않는 것... 따라가는 것."
모기가 우는 것 같은 가냘픈 소리였지만, 엔도는 가스통의 서툰 일본어를 분명히 들었다. 당신을 버리지 않는 것, 따라가는 것- 엔도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한 손으로 콜트를 고쳐 잡았다. 일체의 인간적인 감정이나 감상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온 살인청부업자에게 지금 가스통이 한 말처럼 모욕적인 말은 없었다. 그는 무심코‘가스통의 멱살을 잡았다. - P217

"무섭다. "모기만 한 소리로 가스통은 대답했다. "무섭다."‘"무섭다면서 왜 가는데요...가스통씨?‘ 그러고서‘도모에는 무심코 이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오던 것을 분명하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바보아니에요?" 바보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 악취가 가득 찬‘ 베트남호의 사등 선실에서 그를 발견했을 때부터, 도모에는 가스통이 바보가 아닐까 생각할 때가 많았다. - P242

"산다는 것, 정말 어려워요. 도모에 씨, 나 겁쟁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평생 열심히 살지 않으면 안 돼요. 참 힘들어요." - P250

처음으로 도모에는 바보와 위대한 바보라는 두가지 말이 어떻게 다른지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꾸밈없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꾸밈없이 모든 사람을 믿으며, 비록 자기가 속고 배반을 당해도 그 신뢰와 애정의 등불을 계속해서 지켜나가는 사람, 그 사람은 요즘세상에서 바보로 보일지도 모른다. - P254

하지만 그는 단순한 바보가 아니다. 위대한 바보인 것이다. 자신의 몸을 태우면서 발산하는 작은 빛을 사람들의 인생에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비추는 위대한 바보이다. - P254

"그래도 도모에, 사람들 모두가 아름답고 강한 존재라고는 할 수 없어. 태어날 때부터 겁쟁이인 사람도 있지. 성격이 약한 사람도 있고 말이야. 여자처럼 걸핏하면 울어대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어………… 하지만 그렇게 약하고 겁쟁이인 남자가 자신의 약함을 짊어지고서 열심히 아름답게 살려고 하는 건 훌륭하지 않을까?"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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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2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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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좋은 작가가 있다. 그 중 한명이 다자이 오사무다. 이 작품 역시 좋았다. 초기 단편집인데 그만의 우울함이 한가득이다. ‘사물의 이름이란 그게 어울리는 이름이라면 굳이 묻지 않더라도 절로 알게 되는 법이다...여러 번 들어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던 이름도 있다. 예를 들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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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7-19 13: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사람이야말로 이해하기 힘든 존재지요^^; 그냥 좋은 작가라... 저는 그런 작가가 있나 싶네요. 그런 출판사는 있는 듯한데요~ㅎㅎㅎ

새파랑 2022-07-19 14:41   좋아요 4 | URL
우울한게 왠지 저랑 비슷해서 정이 갑니다. 자매품으로 소세키도 있어요 ^^

페넬로페 2022-07-19 13: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책은 구비되어 있습니다.
언젠가는 읽겠죠^^
그냥 좋은 작가가 우리에게 넘 많아요~~

새파랑 2022-07-19 14:42   좋아요 4 | URL
다자이 오사무는 그냥 좋더라구요 ^^ 페넬로페님 좋아하실듯 합니다 ~!!

페크pek0501 2022-07-19 13:3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의 <사양>을 좋아합니다. 여기에도 고향을 떠나는 장면에서 우울함이 가득하죠.^^

새파랑 2022-07-19 14:43   좋아요 5 | URL
저도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을 제일 좋아합니다 ^^

mini74 2022-07-19 14:3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앗 페크님 저도 사양 좋아해요. 우울하고 쓸쓸한데 좋은 문장들 *^^* 새파랑님 그냥 좋은 작가라시니 나는 그런 작가가 누구지? 생각하게 됩니다 *^^*

새파랑 2022-07-19 14:48   좋아요 3 | URL
저도 <사양> 좋아합니다. <인간실격> 보다 더 좋더라구요. 호불호가 좀 갈리긴 한거 같지만 ^^

그레이스 2022-07-19 18:1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인용 문장 좋아서 읽고 싶네요.

새파랑 2022-07-19 18:11   좋아요 4 | URL
전 이런 다자이 오사무의 문장이 너무 좋더라구요^^

오거서 2022-07-19 20: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자이 오사무. 만년. 새파랑님이 좋다고 하시니 저도 관심이 생깁니다. ^^;

새파랑 2022-07-19 23:16   좋아요 3 | URL
데뷔작이니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시고 읽으시면 좋으실거라 생각합니다~!!

희선 2022-07-20 02:2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만년은 사람이 죽을 때가 가까운 때를 나타내는데... 다자이 오사무는 늘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군요 만년을 유언으로 여기고 썼다는 말을 어디선가 본 듯도 하네요


희선

새파랑 2022-07-20 06:52   좋아요 3 | URL
저도 그 말을 들었던것 같아요. 그냥 우울을 장착하고 살아간 다자이 오사무의 글은 늘 우울합니다. 그의 밝은 단편도 밝게만 느껴지지는 않더라구요~!!

scott 2022-07-22 23: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찌찔하지만
오사무의 재능은 인정 합니다
방대한 작품 속에 다양한 목소리 색채가 담긴(한국 작가들이 가장 많이 따라 하고 있는 작가 중 한명) ㅎㅎ


새파랑 2022-07-23 07:14   좋아요 1 | URL
저도 좀 찌질해서 그런지 오사무가 정겹더라구요 ^^ 요책 22주 100자평 이벤트로 쓴건데 이제 담주면 드디어 마지막 22주네요 ^^ 좋았던 책만 골라서 100자평 쓰고 있는데 재미있네요~!!
 

명작이다. 정말 재미있고, 몰입해서 읽었고, 글이 세련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 ‘나오미‘라는 이름이 무척이나 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참 예쁜 이름이구나, ‘NAOMI‘라고 쓰면 서양 사람 같다고 생각한 것이 시작이었고, 그때부터 차츰‘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름이 하이칼라면 얼굴 모습도 어딘가 서양 사람 냄새를 풍기고 아주 영리해 보여서, ‘이런 곳의 여급으로 놔두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P5

나오미 같은 소녀를 집에 데려와 그 성장하는 모습을 천천히 지켜본 뒤, 마음에 들면 아내로 맞아들이는 방법이 가장 좋다. 어쨌든 나는 부잣집 딸이나 교육을 받은 훌륭한 여자를 원하는 건 아니니까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 P14

"나오미야 배안고파?" 하고 물으면, "아뇨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요" 하고 말할 때도 있지만, 배가 고플 때는 조금도 거리낌 없이 "네!" 하고 대답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래서 뭘 먹고 싶으냐고 물어보면, 양식이면 양식, 국수면 국수라고 먹고 싶은 것을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 P16

"그럼 나오미는 무슨 꽃이 제일 좋아?" 하고 언젠가 물어봤더니,‘"난 튤립이 제일 좋아요" 하고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 P25

나오미를 ‘훌륭하게 만드는 것‘과 ‘인형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것‘, 이 두 가지가 과연 양립할 수 있는 것일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바보 같은 이야기지만, 그녀의 사랑에 현혹되어 눈이 어두워져 있던 나는 그렇게 뻔한 이치조차 전혀 분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 P60

나는 지금도 그때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에 떠올리며, 모든 학생들과 함께 낄낄대고 웃었던 내 모습을 떠올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회상할 때마다, 이제 와서는 웃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이유로 로마의 영웅이 바보가 되었는지, 안토니우스쯤 되는 자가 무엇 때문에 요부의 농간에 칠칠치 못하게 휘말려들었는지, 그 마음을 이제 와서는 확실히 납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대해 동정마저 금할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 P75

흔히 세상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속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이것은 결코 처음부터 ‘속이는 게 아닙니다. 처음에는 남자가 자진해서 ‘속는 것‘을 기뻐합니다. 어떤‘여자에게 반해버리면 그 여자가 하는 말이 거짓이든 진실이든 남자 귀에는 모두 귀엽고 사랑스럽게 들립니다. - P75

나는 생각합니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한테 정복당한 것도 결국에는 이런 식으로 해서 차츰 저항력을 빼앗기고‘구슬림에 넘어가고 말았을 거라고. 사랑하는 여자에게 자신감을 갖게 해주는 것은 좋지만, 그 결과 이번에는 이쪽이 자신감을 잃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쉽사리 여자의 우월감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생각지도 않았던 재앙이 거기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 P80

그도 그럴 것이 어릴 때는 일품요리인 비프스테이크로 만족했던 나오미가 어느새 점점 입이 고급스러워져서, 하루 세끼 식사할 때마다 "이런 게 먹고 싶다" "저런 게 먹고 싶다"고 나이에 맞지 않는 사치스러운 말을 합니다. 게다가 재료를 사서 직접 요리하는 귀찮은 일은 싫어하기 때문에, 대개는 가까운 식당에 주문을 합니다. - P106

도대체 나는 이 여자의 어디가 좋아서 이렇게까지 반해버렸을까? 저 코일까? 저 눈일까?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열거하자, 이상하게도 언제나 나한테 그렇게 매력적이었던 얼굴이 오늘 밤에는 참으로 보잘것없고 하찮게 여겨졌습니다. 그러자 내 기억의 밑바닥에는 이 여자를 처음 만났을 무렵 그 다이아몬드 카페 시절의 나오미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비하면 그 시절이 훨씬 좋았어. 천진하고 귀엽고 내성적이고 우울한 데가 있고, 이렇게 거칠고 건방진 여자와는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 여자였지. 나는 그 무렵의 나오미에게 반했기 때문에, 그 타성이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왔겠지만, 생각해보면 모르는 사이에 이 여자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싫은 계집이 되어버렸어. - P149

나오미가 굉장한 핫텐카라고? 학생들을 가지고 논다고? ......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있을 수도 있겠지.‘분명히 있을 수 있어. 요즘 나오미의 태도를 보면 그렇게 생각지 않는 게이상할 정도야. 실은 나도 내심 걱정하고는 있었지만, 그녀 주위에 남자친구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오히려 안심하고 있었던것이다. 나오미는 어린애다. 그리고 활발하다. "난 남자야" 하고 그녀 자신이 말하는 대로다. 그래서 남자들을 잔뜩 모아놓고 천진하게, 떠들썩하게 야단법석을 떠는 것을 좋아할 뿐이다. 설령 그녀에게 다른 속셈이 있다 해도, 이렇게 많은 사람의 눈이 있으면 남몰래 딴 짓을 할 수는 없을 테고, 설마 나오미가… 하고 생각한 이 ‘설마‘가 잘못이었던 것이다. - P169

그녀가 나를 속이고 있었다는 게 분명해지면, 나는‘그녀를 용서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제 그녀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녀가 타락한 죄의 절반은 물론 나한테도 있으니까, 나오미가 순순히 잘못을뉘우치고 사과만 해준다면,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나무라고 싶지도 않고, 또 나무랄 자격도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렇게 고집이 세고 특히 나에 대해서는 한층 더 강경해지고 싶어 하는 그녀가 설령 증거를 들이댄다 해도 그렇게 호락호락 나에게 고개를 숙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 P171

나를 만만하게 얕보고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게 되지는 않을까? 그리고 결국 두 사람이 서로 오기를 부리다가 헤어지게 되면? 그것이 내게는 무엇보다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그녀의 정조 자체보다 이쪽이 훨씬 골칫거리였습니다. 그녀의 잘못을 밝혀내고 또는 감독한다 해도, 그때에 대처할 내 생각을 미리 결정해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녀가 "그럼 나는 나가겠어요" 하고 말했을 때, "마음대로 나가버려"하고 말할 수 있을 만한 각오가 되어 있다면 모르지만. - P172

"그건 그 비오는 밤에 여기서 여럿이 뒤섞여 잔 적이 있었지요. 그날 밤에 눈치챘습니다. 그날 밤 나는 정말 당신을 동정했습니다. 그때 두 사람의 뻔뻔스러운 태도는 아무리 봐도 보통 사이는 아니라고 여겨졌으니까요. 나는 질투를 느끼면 느낄수록 당신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 P216

그녀의 살‘이라는 귀중한 성지에는 두 도둑놈의 진흙투성이 발자국이 영원히 찍히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나오미가 미운 게 아니라 그 사건 자체가 미워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 P229

그렇다면 왜 이런 부정하고 더럽혀진 여자에게 아직 미련이 남아 있는가 하면, 그녀가 가진 육체의 매력, 오직 거기에만 질질 끌려가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나오미의 타락인 동시에 나의 타락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남자로서의 절조와 결벽과 순정을 버리고, 지난날의 자존심도 내팽개쳐버린 채, 창녀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굴복하면서도 그것을 수치라고도 생각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때로는 마땅히 경멸해야 할 그 창녀의 모습을 마치 여신이라도 우러러보듯 숭배하기까지 했으니까요. - P232

"그럼 안녕히 계세요. 오랫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떠날 때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인사는 지극히 담담한 것이었습니다. - P242

불과 한 시간 전만 하더라도 그녀를 그렇게 귀찮게 여기고 그녀의 존재를 저주했던 내가 지금은 반대로 나 자신을 저주하고 그 경솔함을 후회하게 되다니? 그렇게 미웠던 여자가 이렇게 그리워지다니? 이 급격한 마음의 변화는 나 자신도 설명할 수 없고, 아마 사랑의 신만이 알고 있는 수수께끼일 것입니다. 나는 어느새 일어나서 방 안을 오락가락하면서, 어떻게 하면이 연모의 정을 달랠 수 있을까 하고 오랫동안 생각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을 달랠 길은 보이지 않고, 그저 그녀가 아름다웠던 일만 생각나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5년동안 계속된 동거생활의 장면들이 되살아나, 아, 그때는 이런 얘기를 했지, 그런 표정을 지었지, 그런 눈을 했지 하는 식으로 계속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데, 그 가운데 미련의 씨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 P246

아아, 나는 도대체 어쩔 셈으로 이런 정밀한 사진을 찍어두었을까요? 이것이 언젠가는 슬픈 추억이 된다는 것을 예감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 P249

"무슨 이유라뇨? 그건 도리를 벗어난 일이니까요.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인데, 이젠 나오미 씨를 깨끗이 잊어버리는게 어떻습니까?" - P265

"나오미 씨한테 걸려들면 어떤 남자라도 그렇게 되게 마련입니다."

"그 계집한테는 불가사의한 매력이 있어."

"확실히 그건 마력입니다! 나도 그걸 느꼈기 때문에, 더이상 그 여자한테 가까이 가면 안 된다고, 가까이 가면 내가 위험하다고 깨달은 겁니다." - P278

그녀의 바람기와 방자함은 옛날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고, 그 결점을 없애버리면 그녀의 가치도 없어져버립니다. 바람기가 있는 계집이다. 제멋대로 하는 방자한 계집이다 하고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귀여워져 그녀의 함정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나는 화를 내면 낼수록 내가 지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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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7-18 07: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글이 세련적‘^^ 새파랑님의 강렬한 한줄평! 제목도 단순한듯 강렬해요^^

새파랑 2022-07-18 09:20   좋아요 3 | URL
리뷰를 어제 썼어야 하는데 밑줄을 너무 많이 그어서 옮기다가 지쳐서 일단 오늘로 미뤘습니다 😆 당시 시대를 봤을때는 파격적인거 같아요 ㅋ

yamoo 2022-07-18 08: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음....이 책 있는데....이 책 시리즈를 처분할가 생각중인데, 생각을 고쳐먹게 만드는 글이네요..^^

새파랑 2022-07-18 09:21   좋아요 3 | URL
다니자키 준이치로 작품 저도 이제 네편? 읽었는데 작품마다 편차도 좀 있고 호불호가 갈리는거 같아요 😅
요 책도 호불호가 있더라구요 ㅋ

모나리자 2022-07-18 14: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표지의 빨강이 정말 강렬하네요. 너무 예쁜데요.
다니자키 작품을 벌써 네편이나 읽으셨네요. 대단하세요~새파랑님.^^
이번주도 화이팅 하세요.^^

새파랑 2022-07-18 16:39   좋아요 3 | URL
이제 네편입니다 ^^ 요책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뉠거 같아요~!!

scott 2022-07-18 16: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준이치로옹!
의 섬세함(약간은 변태적인 ㅎㅎㅎ)과 미문이 뛰어나서
영어로 번역되어 영미권 독자들 마음까지 사로 잡았죠 ^^

새파랑 2022-07-18 16:41   좋아요 2 | URL
이 책 재미는 보장인데, 약간 문학사적 가치? 이런건 좀 갸우뚱 하게 되더라구요 ㅋ 그래도 재미있으면 장땡~!!

서니데이 2022-07-18 17:5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제목 그대로 썼다면 ˝치인˝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들렸을 것 같은데, 번역하신 분이 제목을 잘 쓰신 것 같아요.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유명한 작가라서, 아마 하루키 선생도 다니자키 상을 받았을 거예요.
새파랑님, 더운 하루 시원하게 보내세요.^^

새파랑 2022-07-18 18:58   좋아요 4 | URL
원제가 치인의 사랑이던데, 이 제목도 딱 맞는거 같아요. 만약 제가 출판사였다면 ‘미친(놈)의 사랑‘ 이라 했을거 같아요 😆

미미 2022-07-18 21: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저번에 재밌다고 하셔서 리뷰 고대하고 있습니다ㅎㅎ
몰입하셨다니 기대감 상승😄

새파랑 2022-07-19 06:02   좋아요 2 | URL
아 ㅋ 읽고 바로 썼어야 하는데 ~!! 오늘 써야겠어요~!! 어제 일이 있어서 휴업했습니다 😅

mini74 2022-07-19 10: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궁금해요 새파랑님 ! 새파랑님의 마성의 100자평 *^^*

새파랑 2022-07-19 10:17   좋아요 2 | URL
오늘 어떻게든 리뷰를 써보겠습니다 ㅋ 안되면 100자평? ^^
 
왼손잡이 여인 범우문고 74
패터 한트케 지음, 홍경호 옮김 / 범우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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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2091

"밝은 대낮에 여인은 나무 한 그루 없는 밋밋하고 얼어붙은 곧바른 길을 걸어갔다. 그녀는 계속 똑바로 걸었다. 어두워질 때까지 여인은 그렇게 걸어갔다."


사람의 마음이 한결같을수는 없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변한다. 다른사람이 변한 걸 느꼈을때는 '갑자기 애가 왜이래?' 이렇게 황당해 할 수도 있지만 그건 갑자기가 아니다. 조금씩이다.


페터 한트케의 <왼손잡이 여인>의 여인 '마리안느'도 마찬가지다. 남편인 '부르노'는 갑작스런 이별통보에 아마 황당했을 것이다. 자신의 별 대수롭지도 않은 말 때문에 갑자기 부인이 헤어지자고 말한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헤어짐이 잠깐일거라 오판하게 된다.

["당신이 나를 떠나리라는 것, 당신이 나를 혼자 버려 두리라는 깨달음이었어요. 바로 그거예요. 부르노, 가세요. 나를 혼자 내버려 두고요."] P.32



하지만 그녀에게 헤어짐은 잠깐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생각하고, 꿈꿔왔고, 권태에 따른 새로운 시작이었던 것이다. 왜 그녀가 그런 헤어짐을 선택했는지 페터 한트케는 정확히 말해주지 않는다. 단지 3인칭 관찰자로서 그녀를 바라보고 차분히 그릴 뿐이다. 그럼에도 독자는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작가가 의도한 생각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프란치스카가 당신을 뭐라고 불렀는지 알아? 개인적인 신비주의자라는 거야. 맞아, 당신은 신비주의자야. 신비주의자! 제기랄! 당신, 병이야. 그래서 나는 프란치스카에게 한두 번 전기치료만 하면 당신은 다시 이성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해 주었어."] P.45



갑자기 남편과 헤어져서 아들과 단둘이 살게된 '마리안느'의 앞날은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다. 아들은 더럽게 말도 안듣고 자신의 번역일을 방해하기만 하며, 남편인 '부르노'는 자주 찾아와 그녀를 협박하기도 하고 회유하기도 하며, 주변 남자들은 그녀에게 추근거리기만 한다.

["없어, 난 행복하고 싶지가 않아. 기껏 만족할 뿐이야, 난 행복이 두려워. 난 행복을 견뎌 내지 못할 것만 같아. 머릿속에서 말이야. 난 영원히 미치거나 죽고 말 거야.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를 살해할지도 모르지."] P.88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고독을 그대로 밀고 나간다. 누구와도 가까워지는걸 원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해나간다. 미래에 또 어떻게 마음이 바뀔지는 모르지만, 현재의 선택을 만족해 한다. 뭐 그게 인생이지, 한결같이 산다는게 어디 쉬운일인가.

[그렇게 모든 사람들은 함께 모여 제나름의 방식대로 일상의 삶을 계속한다. 생각을 하기도 안 하기도 하면서 비록 모든 것이 노름에 걸린 엄청난 경우에도 사람들은 제각기 일상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화젯거리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는 양 그렇게 계속 살아간다.] P.137





긴 이별이었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이후 사년(?)만에 페터 한트케의 <완손잡이 여인>을 접했다. 내가 읽은 그의 두번째 작품. <왼손잡이 여인>은 <긴 이별...> 만큼 어렵지는 않았다. 약간 한트케가 힘을 빼고 쓴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한트케가 써내려가는 담담한 문장들은 대단히 매력적이었고, 순간순간을 포착해 써내려간 장면은 영화처럼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긴 이별...>을 재독해 봐야겠다 ^^

"넌 너를 드러내지 않았어. 그리고 아무도 너를 비굴하게 하지는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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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7-15 22:0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긴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가 아마 제일 읽기 힘들지 않았나싶습니다.
한트케는 <패널티킥...>이 제일 좋았어요 ^^

새파랑 2022-07-15 22:19   좋아요 3 | URL
아하 그렇군요~!! 일단 <패널티킥>을 읽어야 겠습니다 ^^

미미 2022-07-15 22:1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역시 새파랑님!! 이 리뷰 이전에 써주신 글들과 조금 다른 느낌이네요. 덕분에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

새파랑 2022-07-15 22:27   좋아요 3 | URL
미미님과 폴스타프님 덕에 읽은 책입니다 ㅋ 제가 요즘 여름을 타서 완전 주관적으로 리뷰를 막 써봤습니다. 쓰는데 30분 걸렸어요 😅 <미친 사랑> 읽고 있는데 완전 잼있네요~!!

서곡 2022-07-15 22: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여기 ‘소망 없는 불행‘이 실려 있죠. 엄마에 대해 쓴 인상적인 산문.

새파랑 2022-07-15 22:32   좋아요 3 | URL
제가 가진 책은 <소망 없는 불행> 이 안들어 있더라구요. 딱 <왼손잡이 여인> 하나만 들어있더라구요. 잘못출판된걸까요? 😅 그 단편도 읽어보고 싶습니다~!!

서곡 2022-07-15 22:41   좋아요 4 | URL
아 그래서 위 리뷰에 ‘소망 없는 불행‘ 에 대해 안 쓰셨구나...제가 갖고 있는 범우문고 <왼손잡이 여인>은 미색 바탕에 붉은 선이 들어간 표지인데요. 저 푸른 표지본과 다른가 봅니다. ‘소망 없는 불행‘이 민음사전집에 있으니 참고하시길요. 아니 에르노가 부모에 대해 썼듯이 페터 한트케의 절절한 엄마 이야기가 들어 있어요.

새파랑 2022-07-15 22:53   좋아요 3 | URL
절절한 엄마 이야기라니 읽어봐야 겠습니다. 한트케의 절절함이 어떤건지 궁금하네요~!!

페넬로페 2022-07-15 22:33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담담하게 그려진 이 소설을 꼭 읽어봐야겠어요.
조금 고독한 느낌도 받습니다.
저는 소망없는 불행 읽었는데 자전적 이야기라서 좋았어요^^

새파랑 2022-07-15 22:56   좋아요 5 | URL
페넬로페님도 이 책 좋아하실거 같아요. 가격도 착하고 얇아서 금방 읽을수 있어요. 소망없는 불행 꼭 읽어야 겠습니다~!!

mini74 2022-07-15 23:3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갑작스럽지않다. 조금씩이다 이 말 와닿습니다. 왼손잡이여인 본인이 영화화하기도 했다고 들었어요. 베를린천사의 시 시나리오고 쓰고~ 저도 읽어보고싶네요. 미님 폴스타프님 새파랑님까지 ㅎㅎ

새파랑 2022-07-16 07:32   좋아요 3 | URL
이 책 보고 제가 떠올린 말 입니다 ㅋ 이 책 영화화 하기도 했군요. 잼있을거 같아요 ~! 미니님 집에 이미 있을수도 있습니다~!!

alummii 2022-07-15 23:5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거 좀 쉽다니 한번 도전해 보고파요 ㅎㅎ

새파랑 2022-07-16 07:33   좋아요 4 | URL
<긴이별...> 보다는 확실히 잘읽히더라구요~!! 추천드립니다~!!

희선 2022-07-17 23: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들이 말을 더럽게 안 듣는다는 말 보니, 왜 슬픈지... 엄마 혼자 아이 기르기 힘들겠지요 아들이 지금은 그래도 자란 다음엔 좀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니... 누군가 방해하지 않으면 앞으로 죽 비슷하게 살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어요 다른 건 바라지 않고...


희선

새파랑 2022-07-18 05:57   좋아요 1 | URL
생각해보니 신기하게도 고독을 선택했으면서도 자식은 포기하지 않고 함께 사는 모습은 좀 의외이긴 합니다 🤔 그나마 아들이 없었다면 집이 너무 썰렁했을거 같아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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