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도 최고다. 사랑을 할 줄 아는 인간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다.

우리의 생각은 연기처럼 올라가 하늘을 흐리게 만듭니다. 나는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하늘이 내 손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미 저녁이지만, 당신에게 오늘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전하지 않은 채로 하루를 흘려보내고 싶지 않네요. - P17

나는 페이지마다 하늘의 푸르름이 스며든 책만을 좋아합니다. 죽음의 어두움을 이미 경험한 푸름 말이에요 나의 문장이 미소 짓고 있다면, 바로 이러한 어둠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를 한없이 끌어당기는 우울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왔습니다. 많은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이 미소를 얻었어요. 당신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금화와 갈은 이 하늘의 푸르름을 나는 글을 쓰며 당신에게 돌려드리고 있답니다. 이
장엄한 푸름이 절망의 끌을 알려주며 당신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 P21

"마리아예요." 이 말이야말로 삶에서 생각해야 할 전부다. 자신의 목소리, 자신이 뱉은 말 그리고 강렬한 침묵 속에서 불쑥 나타나는 인간 외에 다른 수수께끼는 없다. - P30

우리는 말을 할 때 바로 그 말속에 머물며, 침묵할 때면 바로 그 침묵 속에 머문다. 하지만 음악을 연주할 때는 그 자리를 정리하고 벗어나, 말과 침묵의 고역에서 해방된 희미한 선율 속으로 멀어져 간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멀어져 가는 한 젊은 남자처럼, 우리도 멀어져 간다. 목적지를 안다면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음악 안에 있다는 건 사랑 안에 있는 것과 같다. 연약한 인생의 오솔길에 들어선 것이다. 우리는 A라는 점에서 B라는 점으로, 한쪽 빛에서 다른 쪽 빛으로 건너간다.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며 그사이 어디쯤에 우리가 있다. 불확실함을 견디고 주저함에 미소지으며, 다른 모든 것은 잊은 채로 우리 안의 희미한 생의 움직임에 주의하면서 말이다. - P54

그래도 인젠가 끝은 찾아온다. - P57

단 한 번의 봄이 일생의 모든 봄이었고, 단 한 순간의 삶이 모든 순간을 살아낸 삶과 같았다. 사랑은 누군가가 강처럼 별처럼, 금은화처럼 당신에게 말을 건네는 순간 시작된다. 그 꽃의 향기는 나를 취하게 하고 어제는 그녀를 취하게 했다. 더는 이 곳에 있지 않고 땅속에 머물다 이제는 이름을 알게 된 천사들 곁에 있는 그녀를. - P68

두 눈은 영원에 둘러싸인 채 나는 신비로운 대기를 삼킨다. 그리고 나는 쓴다. 이것이 대답 없음에 대한 나의 대답이요, 함께 일어나는 선율이며, 시간의 잎사귀에서 들려오는 날갯짓 소리다. 당신이 더는 이 세상에 없기에, 나는 당신에게 미모사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는 없지만 미모사는 당신에 대해 아주 잘 알려준다. 모든 고결한 것은 죽은 자들의 나라를 건너 우리에게 이르는 것이라고. - P70

각 페이지에 쓰인 모든 단어들이 너에 관한 것임을 너와 너를 향한 나의 사랑 사이. 너와 너에게 전할 나의 단어들 사이, 그리고 너와 밤에 잉태된 단어들 사이의 황홀한 우연의 일치에 관한 것임을. 그 단어들은 너를 따라 내 영혼에 들어와 나를 평화롭게 만드는 무질서가 낳은 것이었다. - P76

내가 글을 쓸 때 네가 방해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너만을 위해서 글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너를 알기 전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가 만나기 전 어두웠던 무한한 시간 속에서조차 나 는 너를 위해 글을 썼다. 이 메마른 사막 속에서 난 사랑을 기다리며 글을 썼다. 사랑이 올 수 없는 불가능 속에서 사랑이 오는 것을 기다리며 글을 썼다. 밤보다 더 격렬한 단어로, 밤보다 더 어두운 단어로 글을 썼다. 밤이 지나가길 바라면서, 더 깊은 어두움으로 밤이 흩어 지기를 바라면서. 그러던 내가 지금은 사랑 안에서, 밝 은 빛 안에서 글을 쓴다. 빚을 지나기 위해, 더는 이지러지지 않는 빛에 도달하기 위해, 세월의 더딘 윤회에도 길을 잃지 않는 빛을 얻기 위해 빛보다 더 환한 단어들로 글을 쓴다. - P76

너와 함께 글을 쓴다. 밤과 낮의 단어들, 사랑의 기다림과 사랑의 단어들, 절망과 희망의 단어들. 나는 너와 함께 이 단어들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본다. 우리만이 알고 있는 이 깨달음 속에서 글을 쓴다. - P77

너에게 쓴다. 이 수첩뿐만이 아니라 내가 쓰는 모든 것 안에 네가 있다. 몽펠리에로 보내는 이 글의 처음 부터 끝까지 네가 있다. 단지 상황에 따른 것만은 아닌, 당신에 대해 말한다는 내가 처한 그 불가능성 안에 네가 있다. 네가 내 안에 있는 이 밤에, 단어들에서 비롯 된 밤과 뒤섞인 네가 있는 빛나는 밤에 나는 글을 쓴다. 너에게 쓴다. - P77

너를 불러본다. 이 페이지 위에서 너를 부른다. 이 숲에서, 이 연못 근처에서, 이 길 위에서, 우리의 발걸음이 영원으로 닿던 이 땅 위에서 너를 부른다. - P77

"나는 책에 속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이 말이 이렇게 들린다.
"책이나 세상 그 무엇으로 인해 그녀에게서 단 일 초라도 멀어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들이 끝내 허무의 입에 삼켜지고 대리석처럼 단단한 이에 찢어 발겨지는 것을 바라보는 걸 방해받고 싶지 않아요." - P81

나에게 이상적인 삶이란 책이 있는 삶이며 이상적인 책은 어느 여름날 쥐라‘의 길에서 마주친 사자상 분수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던 차가운 물과도 같다. - P93

아름다움에는 부활의 힘이 있다.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천국에 들어서지 못하는 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오직 그 이유 때문이다. - P129

세상은 성인들로 넘쳐난다. 순교자들 말이다. 나는 저 두 단어를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는 날마다 늘고 있는 그들을 ‘알츠하이머‘라 부른다. 점점 더 늘어나는 그 병이 우리에게 기본으로 축소된 삶을 선물한다. 고단하고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일들, 물건을 사고 타인을 질투하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전부인 현대 생활의 모든 질서에서 우리를 해방한다. 이들에게는 삶이 아닌 삶, 한 번도 삶이었던 적이 없는 삶은 끝이 난 것 이다. 그들의 눈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해 두려울 정도로 열려있다. 그들이야말로 세상을 허물어 뜨리는 형이상학적 질병의 먹잇감이다. 우리는 그들을 살아있는 보물처럼 여겨야 한다. - P133

그들은 떨리는 손으로 천사의 손을 찾는다. 천사가 존재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가끔 그들은 한 때 그들과 가까웠던 죽은 이들에게도 말을 건넨다. 모든 것을 잊은 그들이지만 오래전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들은 잊지 않는다. - P134

사람들은 그들이 우리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알아본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원초적인 것이다. 비록 아버지는 나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었음에도 내가 누군지 여전히 알고 계셨고, 나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직접 경험하고 느끼는 것들은 과학이 우리에게 말하는 모든 것들보다 훨씬 커다랗다.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질문들에 교묘히 돌려 답했다. 내가 누군지 물으면 ‘우리가 잊지 않은 녀석‘이라 하셨고, 어머니에게는 ‘최고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쉽게 기억을 잊는 이 사람들은 중요한 것은 절대 잊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와 다른 점이다. - P134

나는 하늘의 푸르름을 바라본다. 문은 없다. 아니면 오래전부터 문은 이미 열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끔 이 푸르름 안에서 꽃의 웃음과 같은 웃음소리를 듣는다. 곧장 나누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소리를, 그 푸르름을, 당신을 위해 여기 이 책 속에 담는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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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최진영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독보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우리 사이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가까웠다면...
어린 나무는 말을 잇지 못하고 맞은편의 나무를 가만히 바라봤다.
좋았을까?
맞은편 나무가 나뭇잎을 마주쳐 바스락 소리를 내며 물었다.
둘 중 하나는 죽었을 거야 - P8

왜 모두 다를까. 다른 삶을 살다가 결국 죽을까. 생명은 어째서 태어날까. 탄생이 없다면 두려워할 죽음도 없을 텐데. - P153

한편으로 정원은 목화가 선물한 라일락 나무를 매일 아침 해가 드는 곳으로 옮기고 비 예보가 있으면 창밖에 내놓는 사람이었다. 목화의 출퇴근길을 걱정하는 사람. 양말과 속웃을 살 때 목화 것까지 사고, 자기는 김밥만 먹으면서도
목화가 끼니를 대충 때우려고 하면 염려하는 사람. 어딘가에 부뒷히거나 베여서 목화의 몸에 상처가 생기면 바로 알아보는 사람. 모두 정원의 사랑이었고 그와 같은 다양함에는 충돌이 없였다. - P184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신에게 구걸할 일이 늘어난다는 것. 목화는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 P187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건 아니라고 - P222

어떤 사랑은 끝난 뒤에야 사랑이 아니었음을 안다.

어떤 사랑은 끝이 없어서 사랑이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떤 사랑은 너무 멀리 있어 끝이 없다.

어떤 사랑은 너무 가까이 있어 시작이 없다. - P233

젊은 시절 자기가 살리던 단 한 명들처럼 자기 또한 누군가의 단 한 명이었을 가능성에 대하여. 그렇게 살아났기에 사람을 살리는 일을 맡았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 P241

인간만이 목적이나 의미를 생각하고 뒷에 걸린다. 굴레에 같힌다. 고통을 느끼고 죄책감에 빠지며 괴로워한다. - P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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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도 정말 좋다. 두번 읽었다. 세번 읽어야 겠다.














이렇게 세상의 첫 막이 내리면 다른 무언가가 시작된다. 대개는 따분한 무언가다. 글을 읽게 되면서부터 우리는 자신에게 무가치한 희생만을 요구하는 것들을 사게 된다. 말하자면 교실에 앉을 자리 하나, 혹은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떠맡는 직책 하나. 그러고 나면 우리는 단념한다. 우리는 꼭 읽어야 하는 것만 의무적으로 읽는다. 거기에 기쁨은 없으며 즐거움조차 누릴 수 없다. 복종이 있을 따름이다. 학업을 마칠 때까지, 사막의 입구에 다다를 때까지 중요한 건 오직 복종이다. 그다음에 우리는 아무것도 읽지 않는다. 신문조차도 우리는 집에 책이 한 권도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된다. 작가들에게는 참으로 수수께끼 같은 사람들이다. 모래 속에 묻힌 집들이랄지, 마귀든 책이든 세상 무엇도 침투할 수 없는 삶들이다. 그들에게도 간혹 사전은 한 권 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약삭빠른 영업사원이 팔고 간 백과사전도 있다. 하지만 읽기 위한 책은 아니다. 아이들을 위해, 미래를 위해, 궂은날을 위해 예비해 둔, 가구나 다름없는 책. 참나무로도 소나무로도 만들어지지 않은 좀 이상한 가구다. 손도 대지 않을, 월부로 구입한 스무 권짜리 작은 종이 가구. - P13

책을 읽지 않는 삶은 우리를 잠시도 놓아주지 않는 삶이다. 신문에 나오는 이야기들처럼 온갖 잡다한 것들의 축적으로 질식할 듯한 삶이다. - P16

사랑은 아무 데도 없다. 전시에 부족한 식량처럼, 죽어가는 사람의 짧은 호흡처럼, 사랑도 모자란다. 놀이에 몰두해 있는 아이에게 시간이 모자라듯 사랑도 그렇게 부족하다. 사랑을 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정말로 많은 시간이 필요해서, 우리 안에 자리한 사랑의 욕구를 채워주기엔 시간은 늘 역부족이다. 우리 안에 자리한 목소리와 피의 요구, 창공 같은 그 목소리에 흐르는 우윳빛 피의 요구를 채워주기에는 말이다. - P35

오랫동안, 오랫동안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사랑의 본성이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 이 사실 이야말로 사랑이 갖춘 위엄이자, 사랑의 놀라운 특성 이다. 소음과 부산함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온갖 발작으로부터도 훌쩍 떨어져,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 사랑은, 그리고 사랑의 가볍고 경쾌한 자각이자 더없이 겸허한 형상이며 각성한 얼굴인 시(詩)는, 심오한 기다림이고 달콤한 기다림이다. 부드럽고도 오묘하게 반짝이는 희망이다. - P36

내가 책을 읽는건, 보기 위해서예요. 삶의 반짝이는 고통을, 현실에서보다 더 잘 보기 위해서예요. 위안을 받자고 책을 읽는 게 아닙니다. 난 위로받을 길 없는 사람이니까.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책을 읽는 것도 아니에요. 이해해야 할 건 하나도 없으니까. 내가 책을 읽는 건 내 삶 속에서 괴로워하는 생명을 보기 위해섭니다. 그저 보려는 겁니다. - P88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의 없다. 가난한 삶만 있으면 된다. 너무 가난해 아무도 원치 않는 삶, 신 혹은 사물들을 피난처로 삼는 삶이다. 그곳에는 무가 차고 넘친다. 왁자지껄한 소음과 수많은 문들로 이루어진, 자체의 풍문들로 길을 잃은 삶과는 반대되는 삶이다. 그런 삶들을 가지고는 제대로 글을 쓸 수 없다. 그런 삶에서는 말할 거리가 하나도 없으니까. 우리는 오로지 부재 속에서만 제대로 볼 수 있고, 결핍 속에서만 제대로 말할 수 있다. 구걸하는 이 여인의 순결한 얼굴을 보려면 노트를 한 장 한 장 넘겨볼 수밖에 없다. 저녁 시간 차곡차곡 쌓이는 그 글들을 바라볼밖에. 어린아이의 잠 속에서 불어나는 엄청난 유산이다. - P91

우리 안엔 아무것도 없다. 아무도 없다. 색깔도 형태도 없는 기다림이 있을 뿐.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이 기다림은 공기와 공기가 섞이듯 우리 안에 존재한다. 그 무엇과도 닮지 않은, 지루함의 절정이라고나 할 수 있는 기다림. 이 기다림이 그곳에 항시 존재 했던 건 아니다. 우리가 항시 무였던 것도, 그 누구도 아닌 사람이었던 것도 아니다. 유년기의 우리는 전부였고, 신은 우리 영역의 미미한 일부에 불과했었 다. 풀밭 속의 풀잎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 P119

유년기가 끝나면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우리 자신이 죽은 이후로 우리는 기다리기 시작했다. - P119

내 고독의 물방앗간에 당신은 새벽처럼 들어와 불길처럼 나아갔다. 당신은 내 영혼 속에 범람하는 강물처럼 들어왔고, 당신의 웃음이 내 영토를 흠뻑 적셨다. 내 안으로 돌아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암흑천지에 큰 태양 하나가 돌고 있었다. 만물이 죽은 땅에 옹달샘 하나가 춤추고 있었다. 그토록 가녀린 여자가 그렇게나 큰 자리를 차지하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 P121

사랑 밖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사랑 안에는 알 수 없는 것들뿐이다. - P121

시간이 흘렀다. 세월이 불타버린 문턱에 재 한 줌 남지 않았다. 우린 태초의 해맑은 나뭇잎들 곁에 그대로 남아있다. 당신은 그 작은 파티 드레스를 한 번도 벗지 않았다는 듯이, 나는 거기서 만물의 순진성을, 이 땅 위에 실현된 어느 성탄의 기적을 끊임없이 예감했 다는 듯이. 사랑은 언제나 우리의 얼굴에서 어둠을 걷어내고 순결한 아이의 얼굴을 되돌려준다.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사랑이 전부라는 듯이. - P122

그런 다음 당신은 떠나버렸다. 배신을 한 건 아니었다. 당신 안에 나 있는, 굴곡이 단순한 같은 길을 따라간 것일 뿐. 당신은 눈처럼 하얀 작은 드레스도 가지고 가버렸다. 이 드레스는 더 이상 내 삶에서 춤추지 않았고 내 꿈속에서 맴돌지도 않았다. 내가 잠을 청하며 눈을 감은 순간 눈꺼풀 밑에서 펄럭였을 뿐. 눈과 세상 사이, 바로 그곳에서. 세월의 바람을 맞으며 열에 들떠 펄럭였다. 비애의 뇌우가 그것을 가슴 위로 내리쳤다. 금 간 유리창 위로 내려지는 덧문처럼. - P122

부재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부재를 경험한 사람은 자신이 무(無)임을 자각한다. 임박한 죽음 앞에서 몸을 떠는 짐승의 막연한 자각이다. - P123

당신이 내 고독의 원인은 아니다. 고독은 당신보다 훨씬 앞서 내 안에서 잠자고 있었다. 당신은, 그것을 깨어나게 한 당신은 그 고독을 가장 닮은 여자일 뿐. - P124

사랑이 끝나는 순간 세 동방박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우수와 침묵과 기쁨. 그들이 푸른 대기 속을 천천히 나아간다. 어둠의 왕관과 황금눈물을 가지고서. 유년기에서 걸어 나온 이들이다. 그들은 영혼 속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천천히. 날마다 조금씩. 우수와 침묵과 기쁨. 언제나 같은 순서다. 침묵이 한복판에, 중심에 있다. 침묵의 희고 작은 드레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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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문장에 밑줄을 긋고 싶었다. 완벽한 책을 발견했다.




네 죽음은 내 안의 모든 걸 산산이 부서뜨렸다.
마음만 남기고.
네가 만들었던 나의 마음. 사라진 네 두 손으로 여 전히 빚고 있고, 사라진 네 목소리로 잠잠해지고, 사라진 네 웃음으로 환히 켜지는 마음을.
사랑한다. 그것 외에 무슨 말을 쓸 수 있을까. - P13

우리는 잠깐 살기 위해, 찰나에 불과한 삶을 살기 위해 두 번 태어나야 한다. 육신으로 먼저 태어나고 이어서 영혼으로 태어나야 한다. - P17

나는 너에 대한 험담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결코 참을 수 없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네게 상처 주는 말, 아무리 조심스러운 비난도. 그런 말을 들으면 난 잊지 않고 마음에 담아둔다. 그렇다고 앙심을 품는 건 아니지만 한 번이라도 너에 대해 의혹을 발설하는 자들과 나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깊은 심연이 생긴다.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방식이며,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랑법 이다. - P38

자유와 지혜와 사랑은 세 단어이나 똑같은 말이다. 각 단어가 다른 두 단어와 유리되면 알맹이도 의미도 없는 텅 빈 언어가 되어버리므로. - P44

짧지 않았다. ‘단‘ 5분뿐이었어도 전혀 지슬렌, 산책은 완벽했다. 완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웃으며 거기 있었으니까. - P65

10년 후, 너는 어디에 있을까. 변함없이 이 침묵 속에 있을까. 일상의 시간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서도 그 시간들에 스며든 부드러움 속에 변함없이 있을까. 일상의 시간들과 함께 하지 않고서도, 그 시간들과 함께 흐르지 않고서도. - P83

아뇨,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내게 했던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내겐 모두 똑같답니다.
아무것도 아니고, 별것도 아니에요.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내 삶, 내 기쁨은 오늘 당신과 함께 시작하니까요. - P91

지슬렌, 너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너로 인한 그리움과 공허와 고통마저도 내 안으로 들어와 나의 가장 큰 기쁨이 된다. 그리움, 공허, 고통 그리고 기쁨은 네가 내게 남긴 보물이다. 이런 보물은 결코 고갈되지 않는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죽음의 시간이 올 때까지, ‘지금‘에서 ‘지금‘으로 가는 것뿐 이다. - P110

1995년 여름, 나는 일을 잃고, 뼛속까지 사무치는 한기에 떨고 있다. 온종일 내가 하던 진짜 일은 너를 바라보고 너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16년 동안, 그늘에 앉아 길에서 춤추는 너를 바라보았고, 그 일만으로도 나는 세상에서 가장 바쁜 남자였다. - P114

무덤에서 돌아오는 길에 불현듯 깨달음에 이른다. 광활하게 펼쳐진 풍경속에, 땅과 드넓은 하늘의 한결같은 아름다움 속에, 지평선 어디에나 네가 있다는 것을 나는 그곳에서 너를 본다. 네 무덤에서 등을 돌리고 나서야 비로소 너를 본다. - P118

지슬렌, 이제는 안다. 이제야 네 뜻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네가 없는 삶을 여전히 축복하고, 계속해서 사랑할 것이다. 나는 점점 더 깊이 이 삶을 사랑한다. 그러한 사랑이 맑은 샘가에서, 궁전 계단에서 노래가 되어 흘러나온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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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명작을 이제서야 읽다니 아쉽다~~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 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 P9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쉬게 할 수 없어. - P61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그런 순간에, 이따금 그녀는 자신에게 묻는다.
언제부터 이 모든 일들이 시작되었을까. 아니, 무너지기 시작했을까.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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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11-01 1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완독하셨잖아요 저는 아직인데요 ㅎㅎ 오늘 새 달의 첫 날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새파랑 2023-11-01 17:15   좋아요 1 | URL
아 아직 이시군요~ 요즘 책도 못읽고 북플도 잘 못들어오고 있습니다 ㅜㅜ

11월 첫날을 즐겁게 시작하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