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보뱅. 종교적인 글도 그가 쓰면 예술이 된다.






















잉크로 쓰인 모든 길을 웃음으로 해방시킨 지슬렌 마리옹에게

‘아이는 천사와 함께 떠났고, 개가 그 뒤를 따라갔다.‘

이 문장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에게 딱 들어맞는다. 우린 그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지만,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누군가에 대해 안다고 하는 것이 그 사람을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리니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고 믿으며 그 사람에 대해 말함으로써 그의 참 모습을 놓치기 일쑤니까. - P12

아이와 천사는 아시시에서 멀어져 갔지만 아무도 그걸 눈치 채지 못한다. 개가 그들을 쫓고 있었다. 세 발자국 뒤에서. - P20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여자를 기다린다고 하자. 그녀는 올 것이다. 그렇게 말했으니까. 약속했으니까. 이 길을 따라 올 것이다. 우리는 지평선에 눈을 고정하고 그 풍경을 바라본다. (그녀는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이미 여기 와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풍경 속에는 다양한 규모의 대상들(숲, 집, 도로)이 있다. 마침내 그녀가 나타나는 순간 그것들이 풍경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길 끝에 보이는 가느다란 실루엣이 대번 숲과 집들과 도로보다 더 커다랗게 보인다. 측량기사의 눈에는 먼 곳의 한 작은 점에 불과한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는 온 우주보다 더 큰 무엇이 된다. 우리는 바라는 것을 보기 마련이다. 우리의 희망에 상응하여 보기 마련이다. - P44

우린 이런저런 도시에서 이런저런 직업을 갖고, 이런저런 가정에 산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곳은 사실은 어떤 장소가 아니다. 우리가 정말로 살고 있는 곳은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곳이 아니라, 무얼 희망하는지도 모르면서 우리가 희망하는 그곳이며, 무엇이 노래하게 만드는지도 모르면서 우리가 노래하는 그곳이다. - P58

그는 가슴이 뜨겁고 두 뺨이 상기된 채 그곳을 나온다. 아니, 나오지 않는다. 더 이상 그곳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주인이 계시는 집을 찾았으니까. ‘지 극히 낮으신 분‘이 어디에 거하는지 이제 그는 알고 있 다. 세속의 빛이 가까스로 닿는 곳, 삶에 모든 것이 결핍되어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삶은 꾸밈없는 원시적 생명에 불과하며, 단순한 경이요 조촐한 기적이다. - P73

예언자들은 사람들을 상대로 하느님을 이야기한 다. 그러느라 쉬어 버린 그들의 목소리엔 야수의 우울함이 감돈다. 반면 프란체스코는 하느님을 상대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마다 자신의 삶을 통해 - 오로지 자신의 삶을 시간 속에 지탱함으로써 풀어놓는 음, 그 순수한 음이 먼 하느님의 귀에 울려 퍼지도록 말이다. 가늘고 희미한 음이다. 이 음을 덮어 버리지 않으려면 가능한 한 낮은 소리로 이야기해야 한다. - P101

남자와 여자 간에 차이가 있다면 성이 아닌 자리의 차이이다. 남자는 남자의 자리를 지키는 자며, 무겁고 진지한 모습으로 두려움 속에 안전하게 자리 잡는 다. 여자는 어떤 자리에도, 심지어 그녀 자신의 자리에도 머무르지 않는 자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부르는 사랑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녀가 부르고, 부르고, 또 부르는 사랑 속으로 이 차이는 매순간 극복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절망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 P124

여자를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느끼며 여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일지언정 여자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멜랑콜리에 젖고, 무사태평으로 환히 빛나는 어떤 얼굴을 보며 주체할 수 없는 향수를 느낀다. 그 순간 그는 빛을 감지하기 시작하며 하느님의 일부를 엿 본다. 남자가 여자들의 진영과 하느님의 웃음에 가 닿는 건 언제나 가능하다. 한 번의 동작으로 족하다. 온 힘을 다해 몸을 내던지는 아이들처럼, 단 한 번의 동작이면 된다. 넘어지거나 죽는 것을 겁내지 않는 세상의 무게를 잊은 동작. 이렇게 남자는 과거가 가해 오는 진 지함의 부담을 등한시하면서 자기 자신과 두려움에서 해방된다. 이런 남자는 이제 제자리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다. - P124

그리스도만큼 여자들을 향해 얼굴을 돌린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뭇잎 하나를 보려고 얼굴을 돌리듯, 여정을 계속할 힘과 의욕을 얻기 위해 강물 위로 몸을 숙이듯 말이다. 성서 속엔 새들만큼이나 많은 여 자들이 등장한다. 처음에도 마지막에도, 여자들이 있 다. 여자들은 하느님을 낳아, 그가 자라고 뛰어놀고 죽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미친 듯한 사랑의 단순한 몸 짓으로 그를 부활시킨다. 산과 병동의 후텁지근한 방에서든 선사시대의 동굴 속에서든, 태초부터 취해 온 똑같은 몸짓이다. - P125

그가 그녀보다 먼저 죽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사랑은 처음 시작되는 순간, 첫 전율을 느끼는 순간 이미 시간에 대한 오래된 관념을 파괴하니까. 전과 후의 구별이 사라지고, 살아 있는 자들의 영원한 오늘이 지속될 뿐이다. 사랑으로 충만한 오늘뿐이다. - P129

누군가 프란체스코의 말들을 얇은 책 속에 모아 두었다. 진짜 가난한 사람의 말을 담은 책이다. 아름다울 것도 없는 편지들, 우아하지도 않은 기도 너무 자주 빨고 기운, 가난한 사람의 닳은 옷 같다. 성서에서 빌려와 짜 맞춘 것들. 여기에 시편 한 편, 저기에 또 한 편, 그것으로 충분하다. 기도하기, 허공이 우리의 말을 씻어 내도록 허공에 대고 말하기, 라는 의도한 바가 달성 된다. 너를 사랑해. 하느님을 향해 쏘아진 이 말은 불화 살처럼 어둠을 뚫고 들어가선 미처 과녁에 닿기 전에 꺼지고 만다. 너를 사랑해. 이것이 그가 하려는 말 전부이다. 거기서 어떤 독창적인 책, 작가의 책이 탄생할 수는 없다. 사랑은 전혀 독창적이지 않으니까. 사랑은 작가의 발명품이 아니니까 - P138

사랑을 하는 그는 공을 들고 벽 앞에 선 아이 같다. 그는 자신의 말을 던진다. 빛을 발하는 말의 공 ‘너를 사랑해‘는 혼자서 둘둘 감긴다. 그는 그 공을 벽에 대고 던지지만, 남은 세월 내내 벽은 그에게서 날마다 멀어져 간다. 되돌아오기를 기대하며 수천 개의 공을 던지지만 돌아오는 공은 하나도 없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는다. 언제나 미소 띤 얼굴이며, 믿음을 잃지 않는다. 그에게는 놀이 자체가 보상이다. 사랑하는 것 자체가 보상이다. - P139

그렇긴 해도 그에겐 할 말이 조금 더 남아 있다. 그가 말한다. 너를 사랑한다고. 너를 그렇게 조금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너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해서, 사랑할 줄 몰라서 미안하다고, 빛에 다가갈수록 어둠으로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사랑을 할수록 자신이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사랑에선 진전도, 언젠가 도달할 수 있는 완벽의 지점도 없기 때문이다. 어른스럽고 성숙하며 이성적인 사랑이란 있을 수 없다. 사랑 앞에선 어른이 없으며 누구나 아이가 된다. 완전한 신뢰와 무사태평을 특징으로 하는 아이의 마음, 영혼의 방치가 있을 뿐. 나이는 합산을 하고, 경험은 축적을 하며, 이성은 무언가를 구축한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마음은 아무 계산도 하지 않고, 축적 하지도 구축하지도 않는다. - P139

어린아이의 마음은 언제나 새롭고, 언제나 태초에서 다시 출발해 사랑의 첫발을 떼어 놓는다. 이성적인 사람은 축적되고, 쌓이고, 구축된 사람이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닌 사람은 이런 합산의 결과물인 사람과는 반대된다. 그는 자신 에게서 벗어나 있으며, 만물의 탄생과 더불어 매번 다시 태어난다. 공을 갖고 노는 바보, 혹은 자신의 하느님 에게 이야기하는 성인이다. 동시에 둘 다거나. - P140

당신들은 자신들의 사막 같은 영혼 속에서 완벽을 찾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들에게 완벽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둘은 결코 같지 않으며,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 P147

사랑은 충만한 상태라기보다 우선 결핍이니까요. 사랑은 결핍의 충만함입니다. 맞아요, 이해하기 힘든 일이죠. 하지만 이해 불가능한 일도 그 실천은 참으로 단순합니다.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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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다자이 오사무의 최고의 작품은 단연 <사양>이다.












‘사랑‘이라 썼다가, 그 다음은 쓰지 못했다. - P30

"어머니, 전 요즘 생각하는 게 있어요. 인간이 다른 동물과 전혀 다른 점이 뭘까. 언어도 지혜도 생각도 사회 질서도 각각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동물도 모두 갖고 있잖아요? 신앙도 갖고 있을지 몰라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으스대지만, 다른 동물과 본질적인 차이가 하나도 없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런데 어머니, 딱 한 가지 있어요. 모르실테죠? 다른 생물들에게는 절대로 없고 인간에게만 있는 것. 그건 바로 비밀 이라는 거죠. 어때요?" - P52

아무래도 이젠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초조감. 이런게 바로 불안이라는 감정일까? 가슴에 고통스러운 파도가 몰아쳐 마치 소나기가 그친 하늘에 허둥지둥 흰 구름이 잇달아 질주해 나가듯 내 심장을 옥죄었다 풀었다 하고, 맥박과 호흡이 흔들리면서 눈앞이 가물가물 어두워졌다. 온몸의 힘이 손가락 끝에서 쑤욱 빠져나가는 느낌에, 더 이상 뜨개질을 하고 있을 수 없었다. - P54

불량하지 않은 인간이 있을까?‘라고 그 공책에 쓰여 있었는데, 그러고 보면 나도 불량, 삼촌도 불량, 어머니조차 불량하게 여겨진다. 불량하다는 건 상냥하다는 뜻이 아닐까 - P76

사랑에 이유는 없습니다. 다소 변명같은 말을 많이 했습니다. 동생의 입버릇을 그대로 흉내 냈다는 느낌도 듭니다. 오시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한 번 더 뵙고 싶습니다. 그뿐이에요. 기다림. 아아, 인간의 생활에는 기뻐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미워하는 여러 가지 감정이 있지만, 그래도 그런건 인간 생활 에서 겨우 1퍼센트를 차지할 뿐인 감정이고 나머지 99퍼센트는 그저 기다리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행복의 발소리가 복도에 들리기를 이제나저제나 가슴 저미는 그리움으로 기다리다, 텅 빈 공허감. 아아, 인간의 생활이란 얼마나 비참한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겠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이 현실. 그리고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헛되이 뭔가를 기다려요. 너무 비참해요. 태어나길 잘했다고, 아아, 목숨을, 인간을, 세상을 기꺼워해 보고 싶습니다. - P95

도대체 나는 그동안 무얼 하고 있었던 걸까? 혁명을 동경한 적도 없고 사랑조차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 세상의 어른들은 혁명과 사랑, 이 두 가지를 가장 어리석고 께름칙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전쟁 전에도 전쟁 중에도 우리는 그런줄로만 믿었으나, 패전 후 우리는 세상의 어른들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무엇이건 그들이 말하는 것과 반대쪽에 진정한 살 길이 있는 것 같았고, 혁명도 사랑도 실은 이 세상에서 제일 좋고 달콤한 일이며, 너무 좋은 것이다 보니 심술궂은 어른들이 우리에게 포도가 시다며 거짓을 가르친 게 틀림없다고 여기게 되었다. 나는 확신하련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 - P109

지나칠 정도로 공손하게 머리숙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을 맞으며 전투, 개시. 사랑해, 좋아해, 그리워, 진짜 사랑해, 진짜 좋아해, 진짜 그리워. 보고 싶으니까 어쩔 수 없어,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어, 그리우니까 어쩔 수 없어. 그 부인은 분명 보기 드물게 좋은 분. 딸도 예뻤어. 하지만 나는 신의 심판대에 세워진다 한들 조금도 자신을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아.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거야, 신이 벌 하실 리가 없어. 난 털끝만큼도 잘못한 게 없어. 진짜 좋아하니까 대놓고 당당하게, 그 사람을 한 번 만날 때까지 이틀 밤 이건 사흘 밤이건 들판에서 지새우더라도, 기필코. - P128

"죽을 작정으로 마시고 있어. 살아 있다는 게 슬퍼서 견딜 수 없어. 외롭다느니 쓸쓸하다느니 그런 한가로운 게 아니고 슬퍼. 음침한 탄식의 한숨이 사방 벽에서 들려올 때, 자신들만의 행복 따위 있을리가 없잖아? 자신의 행복도 영광도 살아 있는 동안엔 결코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노력. 그런 건 그저 굶주린 야수의 먹잇감이 될 뿐이지. 비참한 사람이 너무 많아 거슬리나?" - P143

나는 언젠가 부인과 손을 맞잡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부인도 오래전부터 나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꿈에서 깨 어나서도 내 손바닥에 부인의 손가락 온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이제 그것만으로 만족했고, 단념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도덕이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나는 그 반쪽 미치광이 아니 거의 미치광이나 다름없는 그 서양화가가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단념하자고 마음먹고 가슴의 불길을 딴 데로 돌리려고 닥치는 대로, 심지어 그 화가도 어느 날 밤 인상을 찌푸렸을 정도로 볼썽사납게 미친 듯이 여러 여자들과 놀아났습니다. 어떻게 해서 든 부인의 환상에서 벗어나 잊어버리고, 아무것도 아니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실패. 나는 결국 한 여자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입니다.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부인 이외 의 다른 여자 친구를 한 번도 아름답다거나 안쓰럽게 느낀 적이 없습니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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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슈사쿠 ㅜㅜ 비참한곳에서도 신을 찾는다, 사랑을 알게 된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구다. - P30

‘이자들은 정말로 신이 있다고 믿는 걸까?‘
지금 같은 세상에서 신을 믿다니, 그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오노는 생각했다. 그는 자기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 믿는 일본인 중의 한 명이었다. 신도, 천국도, 모두 현세의 모순이나 죽음의 불안에서 도피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 낸 공상의 산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특별 고등경찰 형사인 오노는 마르크시즘을 싫어하긴 했지만 ‘종교 는 아편이다‘라는 마르크스의 말에는 동감하고 있었다. 이들은 공상에 불과한 신을 위해서 일생을 헛되게 보내려 한다! - P60

마주 보고 앉아있는 그대와 나
그대는 눈부신 듯 서쪽 산을 바라보고
나는 황홀하게 동쪽 바다를 살피지만
두 사람은 여기서 똑같은 생각을 즐기고 있지 - P122

멀리 헤어져 만나기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는 날에는
나는 마음에서 나오는 참된 사랑을 배울 수 있기를 바라노라
그 사랑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랑
그 사랑은
깊은 믿음을 지닌 소녀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날에도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손을 모으는 마음이리니 - P124

사치코가 슈헤이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남매 사이의 우애와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빠가 없는 그녀는 지금 까지 다른 누구에게 느끼지 못했던 친밀감과 연대감을 자기보다 나이가 위인 슈헤이에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사치코의 첫사랑이라고 말한다면 그 역시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른바 연인들이 주고받는 사랑 고백 같은 것은 한 번도 없었지만, 슈헤이가 도쿄로 돌아가고 난 다음부터 사치코는 마 음속으로 끊임없이 그를 의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P156

신부님은 정말 신이 있다고 믿는 겁니까? 만일 있다면 나에게 신이 있다는 걸 보여주시오. 난… 저 검은 연기를 보고 나서는 신도 사람도 믿을 수 없게 되었소. - P190

사랑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일본에서 동료들에게 엄격한 수도 생활을 요구했지만, 자신의 선의가 오히려 몇몇 젊은 수사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사랑하기 위해 했던 일이 상대방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 을 그때 깨달았다. ‘내가 이런 곳에 있다는 것을…‘콜베 신부도 역시 다른 죄수들과 똑같은 생각을 했다. ‘나가사키의 일본인들은 알고 있을까?‘ - P208

모두가 아무말도 없었다. 아, 어째서 이 세상은 이다지도 아름다운가. 어제까지 이 세상에는 사랑도 없고 기쁨도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공포와 비참, 고문과 죽음뿐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 세상은 어째서 이다지도 아름다운가. 그들은 이 세상을 바꾸어 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사랑이 없는 세상에 사랑을 주고 간 사람을…. - P300

적이라 해도 그 역시 사람이다. 오늘까지 그의 삶을 살아온 인간이다. 그 인생을 한순간에 지운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서운 일이었다. - P342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짧은 날들의 한순간 한순간을 후회없이살자. 그래서 그날들을 삶의 마지막 증거로 남기자. 그것이 슈헤이에게도 사치코에게도… 그렇다. 이 전쟁의 한복판에서 청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유일한 삶의 방식처럼 여겨졌다. - P428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렇습니다, 우리 세대의 사랑은 이제 이것으로 끝난 것이겠지요. 그렇다고 해도 그 사랑은 다른 세대가 알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P464

사랑하는 이여,
생각해 보아요, 저 나라를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즐거움
거기서 우리 한가롭게 사랑하고
사랑하다 죽으리 - P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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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30 2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엔도 슈사쿠 작품도 전작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대단하십니다! 그러다 모든 작가 섭렵하시겠어요.ㅎ
12월에도 열렬한 독서 응원합니다. 새파랑님.^^

서니데이 2023-12-01 2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엔도슈샤쿠의 책이라서 그런지 출판사가 바오로딸이네요.
표지의 책제목 글씨가 좋아보입니다.
새파랑님, 오늘부터 12월입니다.
좋은 일들 가득한 연말 보내세요.
즐거운 주말 되세요.^^

새파랑 2023-12-02 11:14   좋아요 1 | URL
벌써 12월입니다. 연말이어서 그런지 시간이 잘안나고 바쁘네요 ㅜㅜ
바오로딸 출판사 마음에듭니다~!!
서니데이님도 즐거운 12원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yamoo 2023-12-02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슈사쿠 책은 이미 갖춰놓고 있는데 아직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페이퍼를 통해 깊은강을 얼른 읽어야 겠다는 사명감이 발동합니다..ㅎㅎ

새파랑 2023-12-02 12:58   좋아요 0 | URL
슈사쿠는 그래도 침묵하고 깊은강이 가장 좋은것 같습니다~!!
 

책 전체에다가 밑줄을 긋고 싶었다.

그해 여름, 7월 마지막 주와 8월 내내, 그리고 9월의 3일간 난 평생 그 여름을 사랑해왔다 - P165

나는 우리가 걷고 또 걷는 동안 당신이 격식을 차리느라 지루하다는 말을 못 한 건 아닌지, 그게 궁금했다. "우리는 킬네이에 갈 수도 있어요." 내가 제안했다. "당신에게 킬네이를 보여주면 좋을 텐데." 당신은 미소 지으며 그러고 싶지만 당신에게 너무 슬프지 않을까요, 라고 말했다. 당신과 함께면 슬플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 P168

"놓치지 마, 윌리."
"뭐를요?"
"너의 사랑. 선물 같은 거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근데 메리앤이 날 좋아하는지조차 모르겠어요. 그녀가 좋아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잖아요."
"당연히 널 좋아하지. 편지를 써, 윌리. 제발, 얼른." 그녀는 다급하게 말하더니 잠시 내 팔에 손을 얹었다. 조니 레이시 앞에서 드러낸 만족감과 그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낸 미소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어떤 슬픔이 그곳에 있었다. 시카고로 내쫓긴 소녀를 다시 생각나게 하는 내밀하고 외로운 슬픔이었다. - P182

당신 방 앞에 선 나는 아주 가볍게라도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그저 문을 열었다. 모든 두려움과 도덕이, 세상의 모든 잣대가 내게서 사라졌다. 난 아무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당신이 알아야 한다는 것 말고는,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면 당신이 적어도 약간의 위안을 얻을지 모른다는 것 말고는. 난 램프를 화장대에 올려놓고 당신 이름을 불렀다. - P198

"내 말은, 이멜다, 일이 그렇게 된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일은 우연히 일어난단다." - P291

그는 사진속의 미소를 짓고 그가 사랑하는 소녀는 밀짚모자 띠에 조화 장미를 달고 있다. 그들은 딸의 미친 상념 속 짧은 서사시에서 자신들이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이 끝에 볼로냐 소녀의 머리 위를 떠돌던 성체만큼이나 놀라운 기적이 있음을 안다. 그들은 오늘같은 날이 허락된 것에 감사하고, 추함이라곤 없는 딸의 고요한 세계의 은총에 감사한다.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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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cutta 2023-11-18 2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마크 카와이^^

새파랑 2023-11-19 08:43   좋아요 1 | URL
ㅋ 친구가 개띠라고 🐕 북마크를 줬습니다 ㅋㅋ
 

뭔가 10퍼센트 부족했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고독이 나를 짓누른다. 친구가 그립다. 진실한 친구가………… - P37

이런 나의 탄식을 곁에서 들어줄 사람이라면 아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하루 종일 그 누구하고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은 채 거리를 헤매다 밤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면 녹초가 된다. 손톱만큼밖에 안 되는 우정과 사랑이라도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을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놓을 것이다. - P37

보통은 죽음에 대해 곧 잊어버리지만, 누군가와 기약없이 헤어진다거나 하면 나도 모르게 ‘나는 외톨이로 살다가 이대로 죽겠지‘라는 생각이 들어 견딜 수가 없다. 나는 슬픈 마음으로 비야르를 쳐다보았다. - P46

늘 그렇다. 아무도 나의 애정에 대답해 주지 않는다. 내가 바라는 건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저 몇 명의 친구를 갖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그럼에도 늘 나는 외톨이다. 다들 나를 기대하게 만들고, 그렇게 박절하게 떠나가 버린다. 나는 정말 운도 없다. - P50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잠이 오지 않아, 군대에서의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생각해보기로 했다. 고통스러운 경험을 했던 장소도 기억 속에서는 아름다운 장소로 바뀌었다. 이율배반적인 이야기다. 어렸을 적에 배운 노래는 되도록 부르지 않으려고 한다. 너무 자주 불러대면 추억이 퇴색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군대에서의 일들도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되도록 회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추억은 머릿속에 소중히 간직해 두는걸로 족하다. 내 머릿속에는 추억의 서랍이 있다. 나에게 그런 추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P86

고독, 얼마나 아름답고 또 슬픈 일인가. 스스로 선택한 고독은 더할 나위 없이 숭고하지만, 내 뜻과 상관없는 오랜 세월의 고독은 한없이 서글프다. 강한 사람은 고독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친구가 없으면 외롭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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