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믿고 읽는 한강 작가의 작품.

나는 당신에게 왜 그토록 어리석은 연인이었을까요. 당신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지 않았으나 내가 어리석었으므로, 그 어리석음이 사랑까지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 걸까요. 나는 그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어리석은 속성이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 마침내 모든 것을 부숴버린 걸까요. - P44

그녀는 숨을 참았다가 천천히 뱉는다. 자신의 어머니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지막 열세 시간 동안 어머니는 눈과 입을 반쯤 벌린 채 느린 숨을 쉬었다. 십여 년 전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떠난 오빠 부부는 로스앤젤레스를 경유해 태평양을 건너오는 중이었다. 쉬지 않고 그녀는 어머니의 귀에 속삭였다. 의식을 잃은 것 같아도 청각만은 살아 있으니 뭐든 이야기를 들려주라는 호스피스의 충고 때문이었다. - P145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잠길 수 있다는 건. - P161

나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다.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인다.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이 조용히, 빠르게 뒤치럭거린다.
두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비비는 겹날개처럼.
금세 다시 말라버린 입술을 연다.
끈질기게, 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다.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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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디테일을 알기에 가장 적합한 작품.


다른 존재가 우리의 내부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존재를 따라 살지 않을 수 없다.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순간 사랑은 문득 당신 속으로 들어오고, 그러면 당신은 도리 없이 사랑을 품은 자가 된다. 사랑과 함께 사랑을 따라 사는 자가 된다. 사랑이 시키고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된다. 그러니까 사랑에 빠졌다는 식으로 말하지 말라. - P15

현재의 무지는 앞으로의 앞의 과정을 위한 동기로 작용한다. 누구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알려고
시도하지는 않는다.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기 때문에 알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해야 한다. - P63

사랑하는 자는 알아가야 하는 숙제를 떠안는
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할 때 그 누군가는 앞으로 알아갈, 모르는
사람이어야 한다. 잘 알던(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사랑이 숙주 안에 깃들어 생애를
시작하려고 할 때 일어나는 신비스러운 일이다 - P63

아무것도 더 넣을 수 없을 정도로 그 사람으로 충만한데도 왜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것처럼 허전한가. 왜 외로운가 가득 차기 전보다 더 비어 있는 것 같고 그 어느 때보다 외로운가. 공허한가 - P75

네가 어떤 대상에게 예배 드린다는 걸 알고서, 나 역시 그 대상에게 예배를 드리는 건, 바로 그 안에서 너를 발견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어 - P314

사랑이 최고의 선이고 유일한 원동력이기
때문에, 사랑을 제외하고 무엇이든 바뀔 수 있고, 바꿀 수 있다. 사랑을 위한 것이라면 어떤 변신도 용납된다. 사랑을 위해 한 것이라면 어떤 비순수도 비순수가 아니고 어떤 배반도 배반이 아니다. 모든 규범을 부정하는 상황윤리주의자들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의 동기에 의해 행해진 행동은 선이라고, 그것만이 선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 P319

행복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행복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행복한 상태가 어떤 것인지 모르고,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행복한 상태를 동경하고, 그렇지만 행복한 상태가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행복한 상태에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자각하지 못한다. 행복해도 행복한 걸 모르고 행복하지 않아도 행복하지 않은 걸 모른다. 그러면서도 행복을 갈구하는 것은 행복이 있다는 것을 여러 경로의 풍문을 통해 들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사실은 자기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무엇을 추구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더 간절하고, 간절하지만,
간절하기만 할 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어떻게 하지 못한다. - P376

그녀를 만지는 것이 단순한 사랑의 표현만은 아니라는 것을. 여성의 신체가 아니라 자기를 살아 있게 하는 존재인 사랑에게 닿으려는 안타까운 몸짓이라는 것을. 사랑으로부터 내쳐질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것을. - P507

만지지 않을 때 그는 불안해했다. 만지면서는 안타까워했다. 불안한 것보다는 안타까운 쪽이 나았다. 불안은 정신을 위협하지만 안타까움은 감각을 고양시킨다. 불안할 때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하지만 안타까울 때 사람은 어느 때보다 예민해져서 안타까움을 제공한 대상에, 그것이 관념이든 사물이든 사람이든, 몰두한다. 불안한 사람의 불안은 대상과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자신도 모르고 다른 사람도 모른다. 안타까운 사람의 안타까움은, 대상과 방향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만일 이 사람이 무슨 일을 한다면, 그 무슨 일이 무엇일지 모를 수 없다. 자신도 모를 수 없고 다른 사람도 모를 수 없다. - P509

이성에게 어필할 매력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언제든 질투에 빠질 잠재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편파적이지 않다. 나이, 용모, 경제력, 건강, 사회적 위치와 평판 같은 조건들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사실을 의식할 때 이런 사람을 질투 속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먹이는 것만큼이나 쉽다는 사실을 ‘오셀로‘는 알려준다. - P578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보다 경쟁자와
더 가깝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다. 자기가
확보하지 못한 연인과의 어떤 동질성의 흔적이 경쟁자에게서 발견될 때 그는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워하고, 자기가 발견한 것을 부정하려 하고,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고, 그리하여 마침내 혼란과 모순의 감정 속에서 두 사람을 싸잡아 비난함으로써 이 언짢은 상황을 돌파하려 한다. 이 비난의 과정에서 이 질투자는 한사코 부정하길 바라지만 부정되지 않는 두 사람의 동질성을 불가피하게 전제해야 한다. - P607

그러나 당신이 만나기 전의, 당신이 알지 못하는 과거의 그 사람의 스토리에 대해서는 책임도 권한도 없다. 당신은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할 수 있을 뿐이다. 즉, 당신과 상관없이 이루어진 그 스토리에 참여해서 그것을
이어가거나 말거나 해야 한다. 질투는 불가능한 옵션이다.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 형성된 세계인 그 사람의 과거를 질투하는 것은 부당하고 비합리적이고 무엇보다 불가능하다. - P627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는 사람은 사랑하기 때문에 파멸에 이르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자기는
물론 연인(사랑하는 ‘사람‘)의 파멸조차 감내하는 극한의 이기심을 사랑은 요구한다. 그, 또는
그녀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사랑이 이기적인 것이다. - P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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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2-15 0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승우는 저의 패이버릿 작가입니다. 훗.

새파랑 2024-02-16 16:57   좋아요 0 | URL
역시 소설천재 이부장님~!! 이 책 너무 디테일해서 어지러웠습니다 ㅋ
 

이렇게 공감이 되는 단편들이라니 ㅜㅜ 최근 읽은 단편중 가장 최고였다.





나는 잔을 내려놓고 마야를 바라보았다. 벌써 마야가 떠나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빛이 어딘가 달랐다. 아마도 그 때가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 그런 감정을 느낀-이미 가버 린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낀-내 인생의 유일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 P58

그리고 내게서는 무엇을 원했을까? 라이어널에게서 원했 던 것과 같은 것일까? 마야와 나는 우리 인생의 두 해에 가까운 나날을 밤마다 나란히 누워 함께 잤는데 지금도 나는 내가 마야를 진정으로 알았는지 궁금하다. 혹은 마야가 나를 진정으로 알았는지. - P65

지금까지 여러 달을 지나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 기다려온 것만 같았다. 이 회 색 지대를 부유하면서 어떤 미래가 올지 모르는 채로 모든 결과를 조마조마 걱정하고, 혼자 있는 순간에는 요즘 우리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는 어떤 느낌을 견디면서 기다리고 있 었다. 그것은 우리의 몸이 엄청나게 허약하며, 갑작스럽고 불가해한 방식으로 우리를 배반할 수도 있다는 느낌이었다 - P92

어쨌든 예전에는 우리가 젊음의 어떤 절정 에 도달했다는 감각, 우리가 여전히 젊다는 게 아니라 아직 은 그런 척할 수 있다는 더 젊은 자아로 슬쩍 되돌아가 다시대학 시절의 그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감각이 있었다. 그건 속임수이자 가장 놀이였고, 우리는 그 놀이를 자주는 아니어도 그게 가능하다는 사실을 되새길 수 있을 만큼은 이어갔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멈춰버렸다. 왜 그랬는지는 정말로 모르겠다. - P111

그 사진의 재미있는 점은 맥두걸 스 트리트의 그 오래된 아파트가 겨울에 얼마나 추웠는지는 기억이 나지만ㅡ난방장치가 늘 고장났다-그날이 언제였는 지, 그 사진을 누가 찍어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 다. 그래서 나는 궁금해진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많 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을지, 그런 사소한 기억들이 얼마나 많이 지워져버렸을지. - P126

마흔세 살이 되었는데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다니, 삶의 어느 시점에 잘못된 기차에 올라타 정신을 차려보니 젊을 때는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곳에 와버렸다는 걸 깨닫다니 꿈에서 깨어났는데 그 꿈을 꾼 사람이 자신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것과 비슷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 P127

대화는 한참을 그런 식으로ㅡ어색하게 띄엄띄엄ㅡ뚜렷한 방향도 목표도 없이 계속되었다. 분명 폴과 개릿은 어떤 화제를 피하고 있었다. 예컨대 내가 심리학과에서 일하던 시절, 폴의 연구 주제, 개릿이 이룬 업적을 비롯해 내가 예민하 게 반응할 거라고 판단되는 모든 것들을 건드리지 않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공통의 관심사 없이는, 애초에 오래전 우리 사이에 유대감을 형성했던 그런 주제들 없이는, 할 얘기가 별로 없다는 점이었다. - P178

그때 나는 갑자기 깨달았다. 우리가 다른 단계로, 좀더 깊은 단계로, 끝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저멀리 마당 끝자락은 이제 완전히 어두워졌지만 그곳 어둠 속 어딘가로 그들이 돌아왔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세탁실 벽 주위를 느린 동작으로 선회하며 아마도 그 숫자를 점점 불려가고 있을 그들이. - P230

"가끔은 과거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생각에 매달려 너무 애쓰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가 있어, 알아? 그걸 놓아버리기가 너무 힘들어." - P287

"정말로 네가 예전과 그렇게 다르다고 생각해?"

"모르겠어. 어쩌면 참을성이 더 많아졌겠지. 나 자신에게 거는 기대는 확실히 낮아졌고."

"자신에게 더 관대해졌다고 생각해?"

"아니. 그냥 기대가 낮아진 것뿐이야.‘ - P288

마침내 눈을 뜨고 앙투아네트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있었다. 미소를 짓지는 않았지만 슬퍼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나를 바라보기만 했고, 그래서 나는 그녀도 아마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우리는 아주 이상한 이틀을 함께 보냈다고, 그리고 내가 떠난 뒤 우리는 아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어쨌든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할 이유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에겐 아직 반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이 순간이 계속되는 척할 반시간, 어둠 속에서 고요히, 하지만 둘이서 함께 물에 뜬 채로 누워있을 반시간, 해가 뜨고 어둠이 걷히면서 이젠 떠나야 한다는 것을, 거의 두려움에 가까운 무언가를 느끼며 깨닫기 전까지의 반시간. - P325

최근에는 이런 일이 의례처럼 되어버렸다. 밤중에 자다가 깨어 뒷마당을, 세탁실을, 차고를 확인하는 일, 이상한 소음의 정체를 알아보는 일, 창문을 단속하고 잠금장치를 더 단단히 채우는 이런 일. 이것이 우리가 들어온 새로운 세상, 우리가 꾸기 시작한 새로운 꿈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데도 가끔은 그 꿈에 균열이 생기는 때가 있었다. 과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는, 그 다른 삶이 살짝 윙크를 보내는 때가 있었다. 내 휴대전화에서 여전히 희미하게 빛나는 미치의 문자처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친구? 연한 파란색 문자칸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너 어디로 간 거야?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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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사는것 자체가 모순이다. 처음부터 다 모순이다.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 P9

솔직히 말해서 내가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우울해하는 것은 내 인생에 양감(量感)이 없다는 것이다.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깊이도 없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 P15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 P21

그랬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내 삶에 대해 졸렬했다는 것, 나는 이제 인정한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생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되어가는 대로 놓아두지 않고 적절한 순간, 내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릴 것이다.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고라도 탐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엇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 P22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말을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표현으로 길게 하는 사람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아주 특별한 말이었다. 그런 말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만이었다. - P51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부득불 해가면서 살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아껴서 좋은 것은 돈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돈보다 더 아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이었다. - P75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 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 P127

나는 몹시 궁금했다. 그가 나영규이든 김장우이든 아니면 전혀다른 사람이든 간에, 이 사람과 결혼하고야 말겠어, 라는 결심은 언제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지금 결혼하여 살고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 - P164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 고 있는 것일까. - P173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 P188

사랑이라는 몽상 속에는 현실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아련한 유혹이 담겨있다. 끝까지 달려가고 싶은 무엇, 부딪쳐 깨지더라서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엇, 그렇게 죽어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장렬한 무엇. 그 무엇으로 나를 데려가려고 하는 힘이 사랑이라면,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서 나는 처음으로 사랑의 손을 잡았다. - P195

나는 그날 아침 마침내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아주 많이 사랑했다는 것을. 어머니를 사랑했으므로 나와 진모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또한 절대적이었을 것임을. 우리 모두를 한없이 사랑했으므로, 그러므로 내 아버지는 세 겹의 쇠창살문에 갇힌 것이었다. 아버지가 탈출을 꿈꾸며 길고 긴 투쟁을 벌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 P206

사랑은 그 혹은 그녀에게 보다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으로 시작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보다 이랬으면 좋았을 나‘로 스스로를 향상시키는 노력과 함께 사랑은 시작된다. 솔직함보다 더 사랑에 위험한 극약은 없다. 죽는 날까지 사랑이 지속된 다면 죽는날까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지 못하며 살게 될 것이다. 사랑은 나를 미화시키고 나를 왜곡시킨다. 사랑은 거짓말의 유혹을 극대화시키는 감정이다. - P218

사랑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자에게는 스스럼없이 누추한 현실을 보일 수 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사랑 앞에서는 그 일이 쉽지 않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자존심이었다. - P219

한 번 더 강조하는 말이지만 이모부는 심심한 사람일지는 몰라도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돌출을 못견뎌하고 파격을 혐오 한다고 해서 비난받아야 한다는 근거가 어디 있는가. 어쩌면 나는 이모의 넘쳐나는 낭만에의 동경을 은근히 비난하는 쪽을 더 쉽게 선택하는 부류의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이모부 같은 사람을 비난 하는 것보다는 이모의 낭만성을 나무라는 것이 내게는 훨씬 쉽다. 그러나 내 어머니보다 이모를 더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그 낭만성 에 있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랑을 시작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미워하게 된다는, 인간이란 존재의 한없는 모순… - P232

그러나 나는 그런 김장우의 얼굴에서 문득 아버지의 얼굴을 읽었다. 너무 특별한 사랑은 위험한 법이었다. 너무 특별한 사랑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만 다른 길로 달아나버린 내 아버지처럼. 김장우에게도 알지 못하는 생의 다른 길이 운명적으로 예비되어 있 을지 몰랐다. 지금은 아무도 알지못하지만, 알아도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 사랑조차도 넘쳐버리면 차라리 모자란 것보다 못한 일인 것을. - P277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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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2-26 09: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양귀자의 모순이네요!! 이거 군생활하면서 하얀색 하드커버로 읽었던 게 엇그제 같은데..ㅎㅎ
판을 몇 번 갈았는지 몰루겠을 정도로 표지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 판본이 가장 세련됐네요. 이제 하두 오래되어서 내용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지만..
당시 짚에서 엄청 집중해서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만큼은 생생합니다.
우리나라 소설가 중 양귀자만큼 재밌게 글을 쓰는 작가도 드물긴 합니다~~

새파랑 2023-12-26 11:15   좋아요 2 | URL
역시 yamoo님은 군대서 읽으셨군요! 전 좋다고 해서 읽었는데 역시 좋았습니다~!! 진짜 재미있게 글을 잘 쓰시는거 같아요 ^^

페크pek0501 2023-12-26 15: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가 예전에 읽은 책 모순을 여기서 만나네요. 제가 읽을 당시 양귀자 님이 인기 작가였어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 도 읽었답니다. 제목이 생각 안 나 검색해서 알았어요. 하하~~

새파랑 2023-12-30 10:54   좋아요 1 | URL
예전에 읽으셨군요~! 전 친구가 좋다고 해서 읽어봤는데 너무 좋더라구요~!!!

2023-12-29 1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30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23-12-30 1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우 예전에 읽고 그 제대로 된 맛을 못느꼈던 소설인데 이제 다시 읽으면 저도 새파랑님처럼 [모순] ˝좋다˝라고 다시 리뷰 쓰게 될지 ^^


그런 책이 한두권이 아닐 것 같아서 문제지만요! 시간이 흘러 다시 읽으면 재발견하는 책들, 요즘 고전을 다시 읽는데 놀라고 있어요. [빨강머리 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데미안] [프랑켄 슈타인]....초딩 중딩 때 읽었던 책들을 어른 되어 읽으니 놀라워요^^

새파랑 2023-12-31 11:14   좋아요 0 | URL
역시 책도 자신에게 맞는 시기가 있는거 같아요 ㅋ 고전도 한번 보다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읽어야 더 와닿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괜히 고전, 명작이 아닌것 같습니다~!!!

희선 2023-12-31 0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파랑 님 2023년 마지막 날이에요 한해 마지막 날이라니... 마지막 날은 보내겠지만, 새해가 와도 그렇게 좋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래도 새해니 기분은 새롭게...

새파랑 님 2023년 마지막 날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새파랑 2023-12-31 11:16   좋아요 0 | URL
매년 새해가 오면 반성하고 내년을 기약해보는데...

이것도 매년 반복인거 같습니다. 후회하고 다짐하고, 후회하고 다짐하고 ㅋㅋㅋ

희선님도 마지막날 마무리 잘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서니데이 2023-12-31 17: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양귀자 작가의 모순은 아마 오래전 출간된 책인데 최근에 다시 출간된 책도 읽는 분이 많으신 모양이네요. 이전에 나온 책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재출간 되지 않으면 다시 만나기 어려운데 새로 출간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새파랑님, 따뜻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에도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파랑 2024-01-01 10:56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모순> 최근작처럼 세련된 느낌이 들더라구요~!!
서니데이님 2024년에도 즐겁고 행복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역시 피츠제럴드란 생각이 들었다.


관계를 끊고자 하는 사람들 목록에는 지난 2년을 그들과 함께 보낸 사람의 4분의3이 포함되었다. 그렇게 한 것은 속물적인 태도 때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러다가 인간관계가 영원히 끊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약간의 두려움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 P43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우리 인생에 끼어들었어." 넬슨이 말했다. "우리가 그들에게 저항할 수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끼어든 사람이 아무도 없던 첫해에 우린 정말 행복했었잖아." 니콜도 동의했다. "우리가 계속 단둘이 있을 수 있었다면ㅡ진실로 단둘이 있을 수 있었다면 우린 뭔가 우리 자신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거야. 이젠 그렇게 해보자. 그럴 거지, 넬슨?" - P55

"그녀는 멋진 여자였어. 최고의 여자였지. 그녀에겐 인간성이 라는 게 있었어." 그는 자신이 이 모든 것을 초래했으며, 거기에는 어떤 보상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뼈에 사무치게 깨 달았다. 그는 또, 이렇게 혼자 떠남으로써 자신이 다시 그녀만큼이나 좋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마침내 모든 것이 균형을 찾고 동등해진 것이다. - P108

마일스는 손을 대는 모든 것에 뭔가 마법을 걸었어. 조언은 생각했다. 심지어 저 근본 없는 여자에게도 생명을 불어넣어서 일종의 걸작으로 만들었잖아.
그러고 나서 생각했다.
‘그는 이 끔찍한 황야에 큰 구멍을 남겼다. 이미 헤아릴 수 없이 큰 구멍을!‘
그런 다음 어떤 씁쓸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아, 그래, 난 돌아올 거야. 돌아오고말고!‘ - P152

문득 자신이 얼마나 인생을 사랑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직 외출할 상태가 아닌데 너무 일찍 외출을 강행한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 P208

"그것은 우리가 싸울 수 있는 어떤 것과도 차원이 달라요.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이길 수 없는 것이에요. 그 사람은 제 손목을 심하게 비틀어서 접질리게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해도 저에겐 크게 문제되지 않을 거예요. 진짜 문제는 어떻게 해도 그런 사람을 도울 수 없다는 것이고, 저로서는 그 사실이 몹 시 괴롭고 낙담스러워요.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거 말이에요"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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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12-25 0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이 책은 스콧 피츠제럴드보다 하루키가 더 생각나기도 하네요 읽지는 않았지만... 새파랑 님 성탄절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새파랑 2023-12-26 08:17   좋아요 1 | URL
희선님 크리스마스 잘 보내셨나요? ㅋ 이제 올해가 얼마 안남았습니다. 마무리 잘하세요~!!

페크pek0501 2023-12-26 15: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같은 책이 있어 헷갈렸어요. ㅋㅋ 이건 재밌나 봅니다.

새파랑 2023-12-30 10:59   좋아요 0 | URL
피터 한트케의 작품명이랑 똑같더라구요 ㅋ 재미있게 읽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서 내용이 잘 기억이 안납니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