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루됨 - 인류학자의 세상 읽기
조문영 지음 / 글항아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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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했지만 졸업 후 전공과 무관한 직업을 가지게 되면서 사회과학 책을 읽는 일이 뜸해졌다. 끽해야 여성학 책을 읽는 정도이고 그 외 분야는 좀처럼 안 읽는다. 그래서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조문영의 책 <연루됨>을 읽는 동안 내용을 받아들이는 한편으로 내가 만약 대학원에 가서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상상을 했다. 계속해서 이런 책을 대량으로 읽고 분석하고 이런 글을 쓰고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다른 머리로 세상을 이해했을까. 아니면 지금의 내가 그때와는 다른 존재일지도.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 사회의 빈민, 노동자, 청년, 노인, 여성, 장애인, 원주민, 이주민, 지방, 비인간 문제에 대해 총 64편의 글을 통해 소개한다. 제목의 '연루'라는 단어는 '잇닿고, 인연을 맺으며, 묶어내는 감각'을 의미한다. 이는 권력자들이 통치를 쉽게 하기 위해 각각의 사회 집단을 분리하고 배제하고 차별하고 거부하는 것을 대중이 어떻게 저항하거나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해 저자가 내린 일종의 답이자 대안이다. 저자와 같은 학자, 연구자들이 하는 비판 역시 통치 권력에 대한 저항 및 탈예속화의 실천이 될 수 있으며, 비판이 그저 비판을 위한 비판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조언이 인상적이었다.


오랫동안 중국에서 유학한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이 직접 경험한 중국 이야기도 많이 들려둔다. 저자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소위 말하는 명문대에 다니는데도 불구하고 중국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고, 그나마 가진 지식도 언론이나 인터넷을 통해 얻은 왜곡, 편향된 정보뿐이라 안타깝다고 토로한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중국에 대해 잘 아는 저자도 최근 중국 정부의 행태를 보면서 분통이 터질 때가 많지만, 중국 정부가 싫다고 중국 전체를 싫어하는 건 (한국과도 관련이 깊은) 중국의 오랜 역사와 문화, 예술 등에 대해 알 기회를 포기하는 일이다. 일부러라도 중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을 가져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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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머니는 맑고 강풍
최진영 지음 / 핀드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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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머니는 맑고 강풍>은 소설가 최진영이 쓴 99편의 일기를 엮은 책이다. 일기의 시작 지점에서 저자는 장편 소설 집필을 멈춘 상태이고, 아직 제주에 살고 있으며, 응원하는 야구 팀의 경기를 보는 즐거움에 푹 빠져 있다. 하루빨리 집필을 재개해 원고를 넘기고 독자들을 만나고 싶지만, 마감이 임박한 다른 원고들을 써내느라 바쁘고, 제주와 서울을 오가느라 몸도 힘들고, 응원하는 야구 팀의 경기 결과에 따라 마음이 요동쳐 집필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일견 반성문 같기도 한 일기가 한동안 이어지다 조금씩 변화가 생긴다. 그동안 열심히 마감을 쳐낸 단편 소설과 교정을 본 개정판 책들이 세상에 나오고, 제주에서 육지로 이사하고, 응원하는 야구 팀이 역대급 성적을 낸다. 장편 소설 집필에도 속도가 붙는데, 그렇게 완성된 책이 2023년에 나온 <단 한 사람>이다. 저자처럼 오랫동안 글을 써온 작가에게도 글 쓰는 일은 늘 어렵고, 어려워도 계속 쓰다 보면 어떻게든 끝이 난다는 걸 여실히 알 수 있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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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공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60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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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람과 스몰토크를 잘하는 사람이 부럽다. 날씨 같은 가벼운 주제에 관해서라면 낯선 사람과도 얼마든지 대화를 나눌 수 있지만, 상대가 조금이라도 사적인 영역에 발을 들이는 듯한 기분이 들면 대화를 이어나가기가 어렵다. 나는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은 스몰토크를 잘하고 심지어 즐기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에게는 털어놓기 힘든 이야기를 일부러 버스나 지하철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들려주고 그걸로 기분을 풀거나 마음의 짐을 더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안다(어차피 다시는 안 볼 사이이기에 속마음을 들려줘도 걱정이나 부담이 없는 것이다). 


프랑스의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1955년에 발표한 소설 <동네 공원>은 어느 봄날 오후 동네 공원에서 우연히 같은 벤치에 앉게 된 젊은 여성과 중년 남성의 대화를 그린다. 여자는 스무 살의 가사도우미로 매일 아이를 돌보고 과체중의 노인을 씻기고 먹이는 노동을 하며 몸과 마음 모두 지쳐 있는 상태다. 불행한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결혼뿐이라고 여긴 여자는 댄스 클럽에 나가서 춤을 추며 자신과 결혼해 줄 남자를 물색하지만 쉽지 않다. 남자는 가방 하나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것으로 생계를 잇고 있는 행상이다. 가난한 육체노동자이고, 매일 열심히 일하지만 장래가 막막하다는 공통점이 있는 이들은 잠시 쉬어 가려고 들른 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상대와 대화를 나누며 각자의 인생의 의미를 곱씹는다. 


이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불행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쩌면 더 불행해질지도 모르는) 결혼이라는 관습적인 길을 가려고 하는 여자를 오히려 남자가 말린다는 것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인간에게는 먹고 자는 욕구만 있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도 있으며, 행상으로 일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자유로웠던 여행의 추억을 들려주며 결혼(이라는 예속)을 유일한 정답으로 간주하지 말라고 한다. 남자의 말이 여자의 마음에 얼마나 가닿았는지는 모르지만, 마침내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늘 동경하며 찾아다니는 (떠나지 못한) 나의 마음에는 충분히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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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 자서전
마리-헐린 버티노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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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좋은 점은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다른 인간으로 살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소설은 다른 인간이 아니라 다른 동물이나 다른 식물, 다른 존재로도 스스로를 상상해 볼 수 있게 도와준다. 마리 헐린 버티노의 장편 소설 <외계인 자서전>이 그렇다. 소설의 주인공 '아디나'는 1977년 미국에서 태어난 인간 여자 아이지만 스스로를 외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보이저 1호가 우주로 향하고 <스타워즈>가 탄생한 기념비적인 해에 자신이 태어날 리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평범한 팩스 기계로 외계 동료에게 지구 관찰 일기를 보내고 답변을 받는 일이 가능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디나는 언젠가 외계인들이 지구로 와서 자신을 데려갈 거라고 믿지만, 현실은 외계인 이야기가 끼어들 틈조차 없다. 아디나의 엄마 테레즈는 장애인 시설에서 일하며 혼자 힘으로 외동딸인 아디나를 키운다. 아디나는 엄마가 얼마나 힘들게 일하면서 자신을 키우고 있는지 잘 알기에 좋은 딸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자신이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가난하고 불우한 형편에 놓여 있다는 걸 모르지 않고 그 때문에 종종 괴롭고 외롭다. 다행히 아디나에게는 좋은 이웃들과 친구들이 있어서 늘 괴롭고 외롭지만은 않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아디나가 외계인과 팩스를 주고받는 일은 점점 줄어들지만, 빈자리를 아디나가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과 아디나가 좋아한 책, 음악, 영화, 연극 등이 채우며 아디나의 인생은 점점 더 넓어지고 깊어진다.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아디나가 외계인이라고 믿는 존재, 그러니까 아디나가 팩스로 지구 관찰 일기를 보내면 답변을 해주는 존재가 따로 있으며 소설 후반부에 나올 줄 알았다(아디나의 친부라든가 아니면 잘못 도착한 팩스에 진심으로 답해준 마음 좋은 어른이라든가...). 그런데 끝까지 그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정말 외계인이었던 걸까...? 그도 외계인이고 아디나도 (인간 여자아이가 아니라) 외계인이라면, 평생을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들과 어울려 살아야 했던 아디나는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쩌면 이 소설의 외계인은 지구 바깥의 천체에서 온 우주인이라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같은 인간이지만 사회적으로 힘이 없고 다수가 아니라는 이유로 힘 있고 다수인 사람들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약자, 소수자들을 뜻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소설뿐 아니라 다른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만화 등에 나오는 외계인들도 전과 다른 시선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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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결정
오가와 요코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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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끝없는 소멸과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일본 작가 오가와 요코가 1994년에 발표한 장편 소설 <은밀한 결정>은 소멸과 상실이 극단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을 전제한다. 


어떤 섬이 있다. 이 섬에선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주기적으로 어떤 단어가 소멸된다. 그러면 얼마 후 사람들은 소멸된 단어는 물론 그 단어와 관련된 기억까지 잊게 된다. 잊지 않았다는 것을 비밀경찰에게 들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다. 소설가인 '나'는 어머니를 그렇게 잃었고 연이어 아버지도 잃었다. 자신처럼 가족을 잃고 페리마저 잃은 할아버지와 의지하며 지내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나'가 살아가는 이유는 현재 작업 중인 소설을 마치는 것인데, 어느 날 자신의 소설을 가장 먼저 읽고 평가해 주는 편집자 R씨가 기억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R씨마저 잃을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의 집 안에 은신처를 만들고 R씨를 그곳에 살게 한다. 식량과 물자가 부족하고 이동이 제한되는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언젠가 R씨가 원래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지만 단어의 소멸은 계속되고 기억을 잃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비밀경찰들의 추적과 탄압은 점점 더 심해진다. 하루라도 빨리 소설을 완성하고 싶지만 단어가 사라지고 그에 관한 기억도 사라지면서 완성은 점점 더 요원한 일이 된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단어와 기억이 사라진다는, SF 같기도 하고 판타지 소설 같기도 한 설정이지만, 실제로 외세에 의해 모국어 사용을 금지 당하고 역사라는 공적 기억을 제거 당한 이력이 있는 나라의 일원으로서 소설 속 상황이 허황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외세가 아니어도 요즘 보면 유행이나 기술의 변화 등의 이유로 원래 쓰던 단어를 다른 단어로 대체하거나 단어 자체가 사어(死語)가 되는 경우가 흔해서 '나'가 겪는 불안이나 혼란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이를테면 두쫀쿠가 그렇다. 한동안 하루에도 몇십 번씩 그 이름을 들었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 이야기를 안 한다. 사실상 소멸 아닌가...) 


이 소설은 지금으로부터 30년도 훨씬 전인 1994년에 일본에서 처음 출간되었고 2019년 영문판이 출간되면서 국제적으로 재조명을 받았다고 한다. 아마도 영문판 출간 이후 공교롭게도 전 지구적으로 팬데믹이 발생하면서 그전에는 자유롭게 했던 활동들을 제한 또는 금지 당하는 상황을 겪으며 많은 독자들이 소설 속 상황에 더욱 깊이 공감할 수 있었던 덕분이 아닐까 싶다. 오히려 저자는 미래를 예상하고 쓴 소설이 아니라 자신이 겪은 과거를 그린 것이라고 하는데, 역시 미래는 과거와 연결되어 있고 사건은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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