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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판 유리가면 1
미우치 스즈에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6년 1월
평점 :

만화 팬은 물론이고 만화 팬이 아닌 사람도 제목 정도는 들어보았을 전설의 명작 만화 <유리가면>이 특별판으로 정식 출간되었다. 나 역시 오랜 만화 팬으로서 <유리가면>의 명성을 익히 들어 왔지만, (내가 태어나기 10년 전인) 1976년에 연재가 시작된 작품인 데다가, 총 49권인데 아직도 완결이 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동안 좀처럼 읽어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 이번에 대원씨아이에서 특별판으로 출간되어 읽어 볼 마음이 들었는데, 읽어보니 과연 명작답게 재미있다. 왜 그동안 일본뿐 아니라 한국의 수많은 만화, 영화, 드라마 등등이 이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는지 알겠다.
주인공 키타지마 마야는 평범한 정도가 아니라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어릴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중국집에서 더부살이 종업원으로 일하며 혼자서 마야를 키웠다. 중학교 3학년이 되는 마야는 엄마 일을 도와야 하기 때문에 공부도 잘 못하고 친구도 못 사귄다. 그런 마야의 유일한 낙은 영화나 드라마 속 화려한 배우들의 멋진 연기를 보는 것인데, 엄마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정신 차리고 일이나 거들라며 마야를 비웃거나 야단친다.
그러던 어느 날 마야는 어렵게 손에 넣은 티켓으로 현재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배우인 히메카와 우타코가 주연을 맡은 연극 <춘희>를 보러 간다. 공연장에서 마야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왕년에는 천재 배우였고 현재는 극단 <츠키카게>의 설립을 준비 중인 츠키카게 치구사의 눈에 든다. 츠키카게는 전설의 연극 <홍천녀>의 공연권을 가지고 있는 인물인데, 자신의 제자이기도 한 우타코보다도 마야의 재능을 높이 사 마야를 배우로 키우고 싶어 한다. 하지만 가난해서 입에 풀칠도 겨우 하는 데다가 유일한 자식인 마야와 떨어지고 싶지 않은 엄마의 반대가 거센데...
설정이나 줄거리는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만화, 영화, 드라마 등등을 숱하게 봐서 새롭지는 않았다. 요즘 만화에는 잘 나오지 않는 폭력적인 장면이나 가정 내 학대, 집단 괴롭힘, 미성년자의 가출 등 심각한 소재를 이때는 참 쉽게 사용했구나 싶은 대목들도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명작은 명작이다 싶었는데, 일단 작화가 너무 좋고, 대사가 유려하면서도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는 마야에게 츠키카게 선생이 "재능이란 자기 자신을 믿는 거"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나이가 들어 보니 알겠다.
연기의 세계를 만화로 구현한 솜씨도 훌륭하다. 연기에 대한 재능과 열정만 있을 뿐 정식 훈련을 받은 경험은 전무한 마야는 츠키카게 선생이 이끄는 극단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연기 수업을 받게 된다. 마야가 수업을 받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독자 역시 자연스럽게 연기의 기본이라든가 좋은 연기란 무엇인지에 대해 배우게 되는데, 아마 이 만화를 보기 전에 비해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관점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괴로운 경험을 한 마야에게 츠키카게 선생이 "하나하나의 경험이 그대로 연기로 이어진다"며, 너(마야)는 천 개의 가면,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가 될 거라고 격려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좋은 예술가, 창작자가 되기 위해 안 해도 되는 경험을 일부러 할 필요는 없지만, 어떤 일들은 겪으면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그 경험이 예술이나 창작 활동에 반영되기는 하는 것 같다. 예술가가 괴로운 일을 겪고 그걸 표현한 작품을 보고 관객이 감동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하면 잔인한 것 같지만, 그걸 통해 누군가는 위로를 받거나 삶을 이어갈 기운을 내기도 한다고 생각하면 예술 또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