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스토브 - 오시로 고가니 단편집
오시로 고가니 지음, 김진희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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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고 궁금증이 일었다. <해변의 스토브>라니. 해변에 스토브가 왜 있지. 있다 해도 작동이 가능할까. 만화를 보고 바로 이해가 되었다. 오시로 고가니가 그린 일곱 편의 단편이 담겨 있는 이 책. 맨 처음에 실려 있는 표제작 <해변의 스토브>는 1년간 동거한 여자친구 엣짱과 헤어진 스미오의 이야기를 스토브의 시선으로 그린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 시간은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끝났고, 이제 두 사람은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한겨울에는 둘도 없이 소중한 존재였지만 봄이 오면 쓸모를 잃는 스토브처럼, 인생의 어떤 시기에는 중요했지만 그 시기가 지나면 끝을 맺어야 하는 인연이 있는 것이다. 


시절인연.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뜻을 지닌 이 말은 물론 이별뿐 아니라 만남에도 적용된다. 여름 축제를 보고 싶어 하는 설녀의 소원은 그를 측은하게 여긴 배달 기사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이루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설녀의 여름>). 폭설로 얼어붙은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임신부(<눈을 껴안다>), 대학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뜻밖의 인물과 만난 여자(<눈 내린 마을>) 등도 그렇다. 일부러 만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어떤 인연은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고, 그것이 잠깐 스쳐 지나가는 짧은 만남에 불과하더라도 어떤 이의 인생에 진한 무늬를 남기기도 한다. 


이 책에는 사고로 투명 인간이 된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의 사연(<당신이 투명해지기 전에>)처럼 환상적인 이야기도 있고, 글을 쓰고 싶은 마음과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회사원(<바다 밑바닥에서>)이나 권태를 느끼는 3년 차 직장인의 사연(<소중한 일>)처럼 현실적인 이야기도 있다. 작가의 화풍이나 서사는 간결하고 담백한데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다채로워서, 막상 읽을 때에는 단조롭거나 지루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고 오히려 풍성하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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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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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작가의 책을 많이 읽어본 편은 아닌데 읽은 책 전부 재미있었다. 이 책이 528쪽이나 되지만 선뜻 구입해 읽어본 것도 바로 그 재미있다는 인상 내지는 기억 때문이다. 읽어보니 과연 재미있다. 인물도 많이 나오고, 배경도 다양하고(광주, 서울, 용인, 파리), 서사도 드라마, 로맨스, 미스터리, 스릴러, 호러(!) 등 다양한 장르를 포괄한다.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면 좋겠지만, 과연 어떤 개가 '이시봉'을 연기할 수 있을까. CG나 AI로 만들어진 영상은 별로인데...


소설은 광주에 사는 강아지 이시봉이 위험에 빠진 고양이를 구하는 영상이 SNS에서 화제가 되면서 시작된다. 이시봉의 보호자인 20대 백수 청년 '이시습'은 어느 날 SNS에 올라온 영상을 봤다며 이시봉을 찾아온 사람들의 방문을 받고 고민에 빠진다. 브리딩 업체 '앙시앙 하우스'의 직원인 이들은 이시봉이 그들의 대표인 정채민이 오랫동안 찾아온 프랑스 출신의 품종견 비숑 프리제 중 하나라며, 이시봉을 넘기면 거액의 돈을 주겠다고 한다. 이시습은 친동생처럼 귀여워한 이시봉을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건 상상도 안 해본 일이었지만, 치킨집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가족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였고, 돈 때문이 아니라 이시봉을 위해서도 전문 업체의 보살핌을 받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린다.


이후 이시습은 이시봉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지 고민하면서 직접 서울에 있는 앙시앙 하우스에 방문해 보기도 하고, 용인에 있는 정채민의 자택을 찾아가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정채민이 여러 견종 중에서도 비숑 프리제에 유난히 집착하게 된 사연을 듣기도 하고, 그 사연이 자신의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게 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이시습은 이시봉 덕분에 자기 자신과 아버지의 삶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부분을 보게 되는데, 그것을 보게 된 후의 삶은 그 전의 삶과 같아도 같지 않을 것이다. 나로만 살면 볼 수 없는 것을 보기 위해, 어떤 사람은 소설을 읽고 어떤 사람은 개를 키우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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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서 거장의 클래식 5
천쉐 지음, 김태성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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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고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내어주라고 하면서 어떤 사랑은 금지된다는 것이 나에게는 모순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금지된 사랑에 기어코 몸과 마음을 내어주는 사람들을 볼 때 나는 저들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대만 작가 천쉐의 소설집 <악녀서>는 그러한 사랑의 집합체와도 같은 책이다. 이 책은 1995년 초판 출간 당시 여성들 사이의 정욕 묘사가 지나치다는 이유로 논란을 빚고 절판되었다. 그러다 2019년 아시아 최초로 대만에서 동성 결혼이 인정되면서 이 책이 복간되었고 한국에도 소개되었다(천쉐는 대만에서 첫 동성 결혼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역사적, 사회적 의미가 깊은 책이지만, 아무래도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1995년에, 동성애가 아직 금기시되는 분위기 속에서 나온 책이다 보니, 책에 실린 소설의 주제나 내용, 표현이나 분위기 등이 요즘 나오는 레즈비언 소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인물들 스스로 자신들의 감정이나 행위를 일탈이나 타락으로 여기며 심한 죄책감을 느끼는 점, 죄의식의 결과로 죽음에 대한 충동에 사로잡혀 있는 점, 레즈비언 성애의 근원을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것에서 찾는 점 등이 그렇다(요즘에는 이런 식으로 쓰는 작가도 거의 없고, 이런 식으로 쓰면 독자들도 안 읽을 듯). 


거친 묘사나 표현도 많고, 현실과 환상이 뒤섞여 있는 듯한 대목도 많지만 완독이 어렵지는 않았다. 남편이 죽은 후 난잡한 성생활을 즐겼던 어머니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품은 여자(<천사가 잃어버린 날개를 찾아서>), 사랑에 빠진 여자를 위해 이야기를 지으면서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랑을 하는 여자(<이상한 집>), 아이를 잃은 후 섹스리스 상태인 남편과 공통의 여자를 좋아하게 되면서 기묘한 삼각관계에 빠진 여자(<밤의 미궁>), 키우던 고양이가 죽고 나서 우연히 어릴 때 자신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여자를 떠올리게 된 여자(<고양이가 죽은 뒤>) 등 다양한 처지, 상황에 놓인 여자들과 그들의 사랑 그리고 욕망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져 즐겁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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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자주 반하는 마음
이에니 지음 / 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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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쉽게 반하고, 사랑에 빠지고, 동경했던 것 같은데 나이가 들수록 그런 일이 별로 없다. 반했던 마음이 식고, 사랑 때문에 다치거나 다치게 하거나, 동경이 실망으로 변하는 경험이 쌓이면서 나도 모르게 말랑말랑했던 마음이 단단함을 넘어 딱딱해진 것 같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남은 인생이 긴데. 앞으로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반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살고 싶은데.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만난 책이 이에니 작가의 산문집 <쉽게 자주 반하는 마음>이다. 


이에니 작가는 이제니 시인의 쌍둥이 자매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미술을 전공했고 현재는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 중이다. 미국계 기업에서 비서로 일할 때 만난 외국인 남편과 결혼해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살다가 현재는 앙골라에서 살고 있다. 원가족과 자주 볼 수도 없고 다음엔 어디서 살게 될지 예측하기 힘든 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건,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자주 '반하는 마음' 덕분이다. 


언젠가 갑작스러운 겨울 폭풍에 물과 전기가 끊어져 당황했지만, 남편과 침낭에서 자면서 집 안에서 캠핑을 하고 촛불 빛에 그림자 만들기 놀이를 했던 일은 더없이 소중한 추억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외국어를 배워야 하는 건 피곤한 일이지만, 같은 나라에 태어나서 같은 언어로 말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누리지 못했을 즐거움도 있다.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른다는 건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것. 누구를 만날지 모른다는 건 누구와도 만날 수 있다는 것.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저자에게는 정해진 게 없고 정할 수도 없는 이런 생활이 오히려 기쁘다. 


나는 '각자 저마다의 방향과 속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왠지 좋다. 누구도 같은 길에 서 있지 않다는 사실에 어쩐지 안심이 된다. 멈추거나 걷고, 때로는 속도를 높이며 자유롭게 흘러가는 상태. 빛이 이미 우리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문득 자각하게 되는 순간들. 그런 열린 시간들을 자주 만나고 싶다. (7쪽) 


모두가 하나의 속도로 살 필요는 없다, 각자의 속도로 살면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나를 반하게 만드는 풍경을 더 많이 마주칠 수 있다. 전보다 누군가에게 반하고 뭔가에 설레는 일이 줄었다면, 혹시 지금 내가 '나의 속도'가 아니라 '남의 속도'로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의심해 보는 건 어떨까. 앞만 보고 갈 때는 앞만 보인다, 나의 속도로 갈 때 비로소 주변이 보인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준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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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궤적 1
오쿠다 히데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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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오쿠다 히데오라고 하면 '닥터 이라부'가 나오는 <공중그네>, <인 더 풀> 같은 휴먼 드라마풍의 소설을 떠올렸다(사실 이 소설들도 읽은 지 너무 오래되어 내용이 가물가물하다). 그러다 작년에 오쿠다 히데오가 쓴 본격 범죄 소설 <리버>를 읽고 그가 범죄 소설도 매우 잘 쓴다는 걸 알게 되었고, <리버>보다 먼저 발표한 범죄 소설 <죄의 궤적>을 구입해 읽어 보았다. 읽어보니 과연 기대한 대로 재미있다. 다양한 인물이 나와서 몰입하기 힘든 면이 없지 않았으나, 각 인물의 캐릭터를 파악하고 서사의 줄기를 이해하고 난 후에는 다음 전개가 궁금해 잠을 잊을 정도로 정신없이 읽었다(그래서 지금 좀 피곤함...).


이야기의 배경은 도쿄 올림픽 준비가 한창인 1963년의 일본. 도쿄 아사쿠사의 한 저택에서 전직 시계상인 남성이 죽은 채로 발견된다. 수사에 투입된 경시청 형사 오치아이 마사오는 주변 탐문을 통해 얼마 전 이 동네에 홋카이도 방언을 쓰는 남성이 나타났으며, 그 남성은 동네 아이들에게 바보라고 불릴 만큼 지능이 낮아 보인다는 정보를 얻는다. 한편 아사쿠사에서 멀지 않은 산야라는 지역에서 여관을 운영하는 어머니를 돕고 있는 마치이 미키코는 야쿠자인 남동생 아키오가 얼마 전 데려온 우노라는 청년이 신경 쓰인다. 재일조선인 출신으로 온갖 차별을 당하며 살아온 미키코는 아키오가 데려온 청년이 자신의 가족을 위험에 빠뜨릴까 봐 불안하다. 


소설은 형사인 오치아이와 여관 집 딸 미키코, 그리고 문제의 청년 우노 간지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우노 간지는 일본 최북단에 위치한 홋카이도에서도 북쪽으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레분토라는 지역에서 온 청년이다. 어릴 때 계부에게 심한 학대를 당했고 물장사를 하는 친모에게는 방치 당했으며, 빈집털이로 소년원을 들락날락하다가 방화 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도망치듯 도쿄로 왔다. 도쿄에서도 빈집털이로 연명하던 그는 도둑질을 하러 들어간 집에서 야쿠자의 소동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불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점점 더 큰 범죄에 연루된다. 아마도 우노를 통해 작가는 범죄 피해자인 사람이 범죄 가해자가 되는 '궤적'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은데, 범죄 피해자여도 가해자가 되지 않고 바르게 잘 사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나로서는 이 소설에 나오는 범죄자의 변명 또는 입장을 이해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보다 이 소설에서 재미있었던 부분은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준비가 한창인 1963년 일본의 풍경과 그 시절 범죄 수사 과정에 대한 묘사다. 당시 일본은 휴대폰, 인터넷이 없는 건 당연하고 텔레비전, 집 전화도 널리 보급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경찰 간에 연락을 주고받을 때에도 공중전화를 이용해야 했다. 시즈오카나 홋카이도 같은 먼 지역에 있는 경찰과 문서라도 주고받을 때에는 편지를 쓰거나 일일이 사람을 보내야 했다. 인터넷이 보편화된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다. 정확하기로 유명한 일본의 기차 시간표를 이용해 범인을 추리하거나 체포하는 과정은 마츠모토 세이초의 소설 <점과 선>을 연상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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