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서 거장의 클래식 5
천쉐 지음, 김태성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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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고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내어주라고 하면서 어떤 사랑은 금지된다는 것이 나에게는 모순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금지된 사랑에 기어코 몸과 마음을 내어주는 사람들을 볼 때 나는 저들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대만 작가 천쉐의 소설집 <악녀서>는 그러한 사랑의 집합체와도 같은 책이다. 이 책은 1995년 초판 출간 당시 여성들 사이의 정욕 묘사가 지나치다는 이유로 논란을 빚고 절판되었다. 그러다 2019년 아시아 최초로 대만에서 동성 결혼이 인정되면서 이 책이 복간되었고 한국에도 소개되었다(천쉐는 대만에서 첫 동성 결혼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역사적, 사회적 의미가 깊은 책이지만, 아무래도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1995년에, 동성애가 아직 금기시되는 분위기 속에서 나온 책이다 보니, 책에 실린 소설의 주제나 내용, 표현이나 분위기 등이 요즘 나오는 레즈비언 소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인물들 스스로 자신들의 감정이나 행위를 일탈이나 타락으로 여기며 심한 죄책감을 느끼는 점, 죄의식의 결과로 죽음에 대한 충동에 사로잡혀 있는 점, 레즈비언 성애의 근원을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것에서 찾는 점 등이 그렇다(요즘에는 이런 식으로 쓰는 작가도 거의 없고, 이런 식으로 쓰면 독자들도 안 읽을 듯). 


거친 묘사나 표현도 많고, 현실과 환상이 뒤섞여 있는 듯한 대목도 많지만 완독이 어렵지는 않았다. 남편이 죽은 후 난잡한 성생활을 즐겼던 어머니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품은 여자(<천사가 잃어버린 날개를 찾아서>), 사랑에 빠진 여자를 위해 이야기를 지으면서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랑을 하는 여자(<이상한 집>), 아이를 잃은 후 섹스리스 상태인 남편과 공통의 여자를 좋아하게 되면서 기묘한 삼각관계에 빠진 여자(<밤의 미궁>), 키우던 고양이가 죽고 나서 우연히 어릴 때 자신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여자를 떠올리게 된 여자(<고양이가 죽은 뒤>) 등 다양한 처지, 상황에 놓인 여자들과 그들의 사랑 그리고 욕망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져 즐겁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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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자주 반하는 마음
이에니 지음 / 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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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쉽게 반하고, 사랑에 빠지고, 동경했던 것 같은데 나이가 들수록 그런 일이 별로 없다. 반했던 마음이 식고, 사랑 때문에 다치거나 다치게 하거나, 동경이 실망으로 변하는 경험이 쌓이면서 나도 모르게 말랑말랑했던 마음이 단단함을 넘어 딱딱해진 것 같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남은 인생이 긴데. 앞으로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반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살고 싶은데.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만난 책이 이에니 작가의 산문집 <쉽게 자주 반하는 마음>이다. 


이에니 작가는 이제니 시인의 쌍둥이 자매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미술을 전공했고 현재는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 중이다. 미국계 기업에서 비서로 일할 때 만난 외국인 남편과 결혼해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살다가 현재는 앙골라에서 살고 있다. 원가족과 자주 볼 수도 없고 다음엔 어디서 살게 될지 예측하기 힘든 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건,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자주 '반하는 마음' 덕분이다. 


언젠가 갑작스러운 겨울 폭풍에 물과 전기가 끊어져 당황했지만, 남편과 침낭에서 자면서 집 안에서 캠핑을 하고 촛불 빛에 그림자 만들기 놀이를 했던 일은 더없이 소중한 추억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외국어를 배워야 하는 건 피곤한 일이지만, 같은 나라에 태어나서 같은 언어로 말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누리지 못했을 즐거움도 있다.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른다는 건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것. 누구를 만날지 모른다는 건 누구와도 만날 수 있다는 것.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저자에게는 정해진 게 없고 정할 수도 없는 이런 생활이 오히려 기쁘다. 


나는 '각자 저마다의 방향과 속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왠지 좋다. 누구도 같은 길에 서 있지 않다는 사실에 어쩐지 안심이 된다. 멈추거나 걷고, 때로는 속도를 높이며 자유롭게 흘러가는 상태. 빛이 이미 우리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문득 자각하게 되는 순간들. 그런 열린 시간들을 자주 만나고 싶다. (7쪽) 


모두가 하나의 속도로 살 필요는 없다, 각자의 속도로 살면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나를 반하게 만드는 풍경을 더 많이 마주칠 수 있다. 전보다 누군가에게 반하고 뭔가에 설레는 일이 줄었다면, 혹시 지금 내가 '나의 속도'가 아니라 '남의 속도'로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의심해 보는 건 어떨까. 앞만 보고 갈 때는 앞만 보인다, 나의 속도로 갈 때 비로소 주변이 보인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준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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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궤적 1
오쿠다 히데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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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오쿠다 히데오라고 하면 '닥터 이라부'가 나오는 <공중그네>, <인 더 풀> 같은 휴먼 드라마풍의 소설을 떠올렸다(사실 이 소설들도 읽은 지 너무 오래되어 내용이 가물가물하다). 그러다 작년에 오쿠다 히데오가 쓴 본격 범죄 소설 <리버>를 읽고 그가 범죄 소설도 매우 잘 쓴다는 걸 알게 되었고, <리버>보다 먼저 발표한 범죄 소설 <죄의 궤적>을 구입해 읽어 보았다. 읽어보니 과연 기대한 대로 재미있다. 다양한 인물이 나와서 몰입하기 힘든 면이 없지 않았으나, 각 인물의 캐릭터를 파악하고 서사의 줄기를 이해하고 난 후에는 다음 전개가 궁금해 잠을 잊을 정도로 정신없이 읽었다(그래서 지금 좀 피곤함...).


이야기의 배경은 도쿄 올림픽 준비가 한창인 1963년의 일본. 도쿄 아사쿠사의 한 저택에서 전직 시계상인 남성이 죽은 채로 발견된다. 수사에 투입된 경시청 형사 오치아이 마사오는 주변 탐문을 통해 얼마 전 이 동네에 홋카이도 방언을 쓰는 남성이 나타났으며, 그 남성은 동네 아이들에게 바보라고 불릴 만큼 지능이 낮아 보인다는 정보를 얻는다. 한편 아사쿠사에서 멀지 않은 산야라는 지역에서 여관을 운영하는 어머니를 돕고 있는 마치이 미키코는 야쿠자인 남동생 아키오가 얼마 전 데려온 우노라는 청년이 신경 쓰인다. 재일조선인 출신으로 온갖 차별을 당하며 살아온 미키코는 아키오가 데려온 청년이 자신의 가족을 위험에 빠뜨릴까 봐 불안하다. 


소설은 형사인 오치아이와 여관 집 딸 미키코, 그리고 문제의 청년 우노 간지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우노 간지는 일본 최북단에 위치한 홋카이도에서도 북쪽으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레분토라는 지역에서 온 청년이다. 어릴 때 계부에게 심한 학대를 당했고 물장사를 하는 친모에게는 방치 당했으며, 빈집털이로 소년원을 들락날락하다가 방화 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도망치듯 도쿄로 왔다. 도쿄에서도 빈집털이로 연명하던 그는 도둑질을 하러 들어간 집에서 야쿠자의 소동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불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점점 더 큰 범죄에 연루된다. 아마도 우노를 통해 작가는 범죄 피해자인 사람이 범죄 가해자가 되는 '궤적'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은데, 범죄 피해자여도 가해자가 되지 않고 바르게 잘 사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나로서는 이 소설에 나오는 범죄자의 변명 또는 입장을 이해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보다 이 소설에서 재미있었던 부분은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준비가 한창인 1963년 일본의 풍경과 그 시절 범죄 수사 과정에 대한 묘사다. 당시 일본은 휴대폰, 인터넷이 없는 건 당연하고 텔레비전, 집 전화도 널리 보급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경찰 간에 연락을 주고받을 때에도 공중전화를 이용해야 했다. 시즈오카나 홋카이도 같은 먼 지역에 있는 경찰과 문서라도 주고받을 때에는 편지를 쓰거나 일일이 사람을 보내야 했다. 인터넷이 보편화된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다. 정확하기로 유명한 일본의 기차 시간표를 이용해 범인을 추리하거나 체포하는 과정은 마츠모토 세이초의 소설 <점과 선>을 연상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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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를 예방하는 뇌활동 창작 종이접기 - 뇌를 깨워 100세까지 활기차게!
다테 히로미츠 지음, 니시 타케유키 감수 / 이은북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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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접기가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니 처음 알았어요! 가족들과 해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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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개, 그리고 죽도록 쓰기
앤 패칫 지음, 정소영 옮김 / 복복서가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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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 앤 패칫이다. 1992년 첫 소설 <거짓말쟁이들의 수호성인>으로 데뷔했고, 2001년 출간한 소설 <벨칸토>가 미국에서만 백만 부 이상 판매되고 전 세계 서른 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2012년에는 <타임>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렇게 대단한 이력을 가진 작가인데, 부끄럽게도 나는 이번에 이 책을 읽고 앤 패칫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저자가 어떤 이력을 가진 작가인지, 얼마나 유명한 작가인지 몰랐고, 이 책 한 권으로 저자의 팬이 될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국내에 출간된 앤 패칫의 책 전부를 주문했거나, 주문하려고 장바구니에 넣어둔 상태다. 에세이가 이렇게 좋은데 소설은 얼마나 좋을까.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앤 패칫을 알았던 사람은 당연하고, 나처럼 앤 패칫에 대해 몰랐던 사람이라도 이 책을 읽으면 앤 패칫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되고, 좀 더 알고 싶어질 것이다. 저자는 현재 미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작품이 널리 읽히는 작가이지만, 여섯 살 때부터 장래희망이었던 작가가 되기 위해 경력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소설로는 생계를 해결할 수 없어서 잡지사로부터 청탁 받은 온갖 글을 썼다. 그는 이 시절을 매문을 해야 했던 불행한 기억이 아닌, 돈을 받으면서 (돈 주고도 못 받을) 글쓰기 훈련을 한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한다. 그 시절이 없었다면, 부모의 이혼과 가난으로 순탄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이나 자립과 창작, 연애와 결혼(그리고 이혼) 문제로 분주했던 청년 시절, 우여곡절 끝에 작가로 성공하고 완벽한 반려자까지 얻었으나 가족과 친구, 반려견을 잃는 과정에서 느낀 심적 고통을 글에 담을 용기를 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저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나는 내가 사랑했던 이런저런 사람들과 오랜 기간 떨어져 살았다. 언쟁과 실망이 생겼고, 그중 대부분은 사소하고 쉽게 화해할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서로를 향한 사랑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멀어지기 마련이다.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타인과의 관계를 정의하는 것은 바로 갈라섬과 화해를 통해서, 사랑과 사랑에 대한 의심을 통해서, 섣부른 판단과 재회를 통해서인 것이다." (457쪽)


이 책에는 저자의 엄마쪽 할머니와 사별한 이야기도 나오고, 열여섯 해를 함께 산 반려견 로즈를 무지개 다리 너머로 떠나 보낸 이야기도 나온다.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데, 저자의 초기 경력이었던 논픽션 작가로 사는 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어린 시절 저자를 매혹했던 이야기, 대학 시절 자신에게 영향을 준 스승들과 식당에서 일하며 소설을 구상한 이야기, 작가를 위한 보조금을 받아서 마침내 첫 장편 소설을 완성하고, 첫 책을 출간하고 북투어를 다니고 독자를 만나고 직접 독립서점을 차린 이야기 등등이 다채롭게 실려 있다. 글쓰기 또는 작가 되기에 관심이 있는 독자를 위한 실용적인 정보 사이에 저자의 사적인 이야기 - 가족, 친구, 연애, 결혼, 이혼 등 - 가 적절하게 담겨 있어서, 마치 앤 패칫이라는 미국인 여성의 일생을 담은 미국 드라마 시리즈를 보는 것 같았다. 문장도 좋아서, 오래 곁에 두고 다시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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