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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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는 거기 살라고 하면서 내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어. 돌아오지 말라고. 너 살기 좋은 데 있으라고. 나는 늘 그것을 묻고 싶었는데.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 한영진은 오래전에 그 말을 들었고 중요한 선택을 할 때마다 그 말을 지침으로 여겼다. (81-2) 


가족이란 무엇일까. 모녀관계란 무엇일까. 황정은의 <연년세세>는 이순일과 한영진, 한세진 세 모녀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큰딸 영진은 고등학교 때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백화점에 취업해 현재는 남편과 딸 하나를 둔 워킹맘이다. 작은딸 세진은 대학교 1학년 때 집을 나와 현재는 연극을 하면서 살고 있다.


두 딸 밑으로 아들 하나가 있는데, 이 아들은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다가 현재는 뉴질랜드로 옮겨가 영주권을 딸 생각을 하고 있다. 영진은 동생이 낯선 외국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건 기특하지만, 동생에게 한국으로 돌아오지 말고 영영 외국에서 살라고 말하는 엄마한테 서운함을 느낀다. 같은 자식인데 왜 나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대학도 안 보내고 가장 노릇 시킨 것으로 모자라 결혼 후에도 자신의 집에 살면서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엄마가 원망스럽다. 


이런 식으로 애증이 교차하는 엄마와 딸들의 이야기인데, 딸로서 K-장녀로서 읽는 내내 공감 가는 대목이 많았다. 세진이 가족 중 유일하게 순일의 성묘를 돕는 것처럼, 엄마가 벌이는 일을 누구보다 탐탁지 않게 여기면서 막상 엄마 혼자 그 일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속에서 열불이 나서 그 일을 돕게 되는 나. 남편은 늙어가고 아들은 없으니 큰딸에게 의지하고 싶어 하는 엄마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그 마음에 보답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러다 영진처럼 엄마와 가족들 뒤치다꺼리하다가 내 삶을 다 홀랑 까먹을까 봐 두려운 나. 이런 나의 모습을 여러 번 마주할 수 있었던 소설이다. 


딸이라서, 같은 여자라서, 엄마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알아서, 누구보다 엄마를 더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미워할 수 없으면서 사랑할 수도 없는 복잡한 감정까지 너무나 잘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언제쯤 엄마에 관한 소설을 마음 편히 읽을 수 있을까. 아마 그런 날은 평생 오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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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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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인터스텔라>를 처음 보았을 때 받은 충격을 기억한다. 인류의 무분별한 자원 개발과 환경 파괴의 결과로 지구의 온도가 급속도로 상승하고, 그로 인해 식물종의 대부분이 멸종되어 인류가 구할 수 있는 식량이라고는 옥수수 정도만이 남은 세계. 아무리 밝은 쪽으로 생각해 보려고 노력해도 가까운 미래의 일 같아서, 영화를 보는 내내 괴로웠고 보고 난 후에도 울적했다. 인류의 미래는 대체 어떤 모습일까. 인류는 지구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김초엽 작가의 장편 소설 <지구 끝의 온실>은 <인터스텔라>를 연상케 하는 멸망 직전의 지구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더스트'로 인해 기후가 변화하면서 지구 생태계에 큰 변화가 생긴다. '더스트'에 강한 '내성종'이라고 불리는 인간들이 아니면 살아가기 힘들어진 지구. 벌레 한 마리조차 보기 힘들어진 지구에서, 아마라와 나오미 자매는 소문으로만 들은 도피처를 찾아 나선다. 그곳에는 더스트 이전의 지구에 있던 식물들이 있고, 예전처럼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산다는데... 


한편 더스트 생태연구센터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식물생태학자 아영은 오래전 더스트로 인해 폐허가 된 도시 해월에서 덩굴식물 모스바나가 기이한 속도로 빠르게 증식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다. 아영은 어릴 때 동네 노인 이희수의 정원에서 보았던 푸른빛을 내는 식물과 비슷하다는 걸 깨닫고 이희수를 찾아 나서지만 행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마침 학회 참가를 위해 외국에 가게 된 아영은 그곳에 모스바나 전문가로 알려진 노인이 있다는 걸 떠올리고 그를 만나기 위해 약속을 잡는다. 


이 소설에 묘사된 미래의 모습은 결코 밝지도 희망적이지도 않다. 인류는 여전히 지구에 존재하지만, 더스트 이후 폐허가 된 지구를 복구하면서 겨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아영이 연구소에 취직할 즈음에는 형편이 많이 나아져서 더스트 시기를 잊는(또는 잊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나타나지만, 더스트 시기의 일들이 여전히 논쟁의 중심이 된다는 점에서 더스트의 영향을 완전히 극복한 상태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인류가 멸망 직전까지 갔을 정도만 엄청난 사건임이 분명한데도 이를 잊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위기에서 인류를 구한 사람들이 명백히 존재하는데도 이들의 존재를 지우고, 마녀라고 부르며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게 끔찍했다. 다행히 아영에게는 과학에 대한 믿음과, 마찬가지로 과학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세계 각지의 동료들이 있다. 아영은 동료들이 수집해 준 자료를 참고해 나오미의 주장이 진실임을 입증하고, 누가 어떻게 멸망 직전의 인류를 구했는지를 밝혀낸다. 


아영이 구명한 영웅들은 결코 인류를 구하겠다는 거창한 대의 때문에 움직이지 않았다. 이들은 그저 사랑하는 자매, 친구, 동료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지식과 힘, 시간을 내주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나를 구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하는 에너지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힘이 세다. 작가는 이를 식물의 생명력에 빗댄다. "식물은 뭐든 될 수 있다."라고. 그렇다면 식물이 내뿜는 산소를 마시고 사는 우리도 식물처럼 뭐든 될 수 있지 않을까.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면서도 마침내 그것을 재건하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에 대해'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 오래오래 잊지 않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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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센 뤼팽 넷플릭스 오리지널 에디션 1 (고급 벨벳양장본) -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 외 감수 / 코너스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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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넷플릭스 드라마 <뤼팽>을 보고 원작이 궁금해져서 구입한 책이다. 실제 원작은 60편에 달하며, 총 9편이 실린 이 책은 드라마 <뤼팽>에서 주인공 뤼팽이 읽는 <뤼팽> 책을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워낙 오래전에 발표된 작품이라서 재미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첫 번째 에피소드부터 예상치 못한 트릭이 나와서 마음에 들었다. <왕비의 목걸이>, <아르센 뤼팽, 탈옥하다> 등 드라마 내용과 관련이 있는 에피소드들은 구체적인 설정을 비교, 대조하며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마지막에 나오는 (셜록 홈즈 아니고) '헐록 숌즈'와의 에피소드도 뭔가 B급 느낌 나면서 재미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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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단어 - 생활견 키키와 반려인 진아의
임진아 지음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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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해 마지않는 임진아 작가님의 본격 만화 에세이집이다. 임진아 작가님의 글도 좋아하지만 그림을 워낙 좋아해서 그림이 많이 실린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임진아 작가님의 글도 그림도 풍성하게 실려 있어서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고, 보면 기분이 더 좋다. ^^ 


이 책의 주인공은 임진아 작가와 반려견 키키다. 특이한 점은 글과 그림 모두 임진아 작가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글은 임진아 작가의 시점, 그림은 반려견 키키의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점이다. 여름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가을과 겨울을 지나 봄에서 끝이 난다. 여름 하면 생각나는 커피와 장마, 물, 과일 등의 단어에 대해 임진아 작가가 쓴 글과 키키의 시점으로 그려진 만화를 보다 보면, 어느새 가을의 차, 노랑, 화분, 겨울의 주머니, 낙엽, 목도리, 봄의 아직, 스트레칭, 동네 등의 단어를 만나게 된다. 


임진아 작가가 좋아하는 빵과 커피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서, 같은 빵 덕후, 커피 덕후로서 자주 공감했다. 반려견은 없지만, 하루 일과를 마치고 산책할 때 느끼는 즐거움, 후련함이라든가, 집 근처 서점을 구경할 때 느끼는 한가로움 너무 알지... 매일 비슷해 보이는 일상에서 색다른 기쁨을 찾을 줄 알고 스스로 만들 줄 아는 임진아 작가의 태도를 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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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살인자 쿠르트 발란데르 경감
헨닝 만켈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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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작가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애정하는 독자로서 오래전부터 꼭 읽고 싶었던 작품이다. '발란데르 시리즈'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두 시리즈 모두 스웨덴 작가가 썼고, 경찰이 주인공이며, 복지 국가로 유명한 스웨덴의 어두운 실상을 고발하는 성격을 지닌다는 공통점이 있다. (<얼굴 없는 살인자>에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 중 하나인 <웃는 경관>을 언급하는 대목도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배경은 1960-70년대이고 '발란데르 시리즈'의 배경은 1990년대라는 것이다. 아직 스마트폰도 없고 컴퓨터도 겨우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에 경찰은 어떻게 일했을까. 전산화가 안 되어서 자료 하나 찾으려면 대량의 종이 장부를 뒤져야 했고, 휴대전화도 없어서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면 일일이 전화를 돌려야 했다. 이 소설의 범인도 피해자의 집 주변에 CCTV 몇 대만 있었어도 금방 잡혔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 소설이 안 쓰였겠지만...) 


발란데르의 개인사에서도 시대상이 느껴진다. 90년대는 스웨덴에서 이민 정책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한 때로, 이전까지 스웨덴 내에선 백인 우월주의, 타인종 혐오 정서가 우세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란데르 역시 자신의 외동딸이 흑인 남자와 사귀는 것을 알고 불만족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정작 자신은 꿈에서 흑인 여자와 자니 아이러니하다. 치매 증세를 보이는 아버지를 돌볼 사람이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에선 복지국가의 사각지대를 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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