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정 - 20세기의 스무 가지 교훈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조행복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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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째, 한나 아렌트의 책을 읽고 있다. 대학 시절부터 한 번은 정독을 하고 싶었는데 이런저런 핑계로 미뤘다. 그러다 최근 한길사에서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묶은 세트를 출간했기에 이 때다 싶어 읽기 시작했다. 분량도 많고 내용도 어렵지만, 발췌로만 접해온 문장을 앞뒤 맥락을 알고 온전하게 읽으니 감동마저 느껴진다. 


한나 아렌트는 대표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권위에 순응하는 다수의 태도가 독재를 가능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흉악한 살인마나 반사회적 인격장애자가 아닌 상부의 명령에 저항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악이 자행된다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도 이 책에서 나왔다. 


미국의 대표적인 홀로코스트 연구자이자 2013년 한나 아렌트상 수상자인 티머시 스나이더가 쓴 <폭정 : 20세기의 스무 가지 교훈>의 메시지도 다르지 않다. 163쪽밖에 안 되는 이 책에서 저자는 20세기 역사를 통해 인류가 배워야 할 교훈을 20가지로 추려 제시한다. 그중 핵심은 민주주의가 결코 자동적으로 폭정을 방지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니며, 시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극적 또는 중립적인 태도로는 악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세기 유럽의 역사를 통해 인류가 얻어야 할 교훈은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강력한 독재자가 출현했다는 사실보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손에 총을 그러쥐고 이웃을 무참히 살해했다는 사실이다. 1938년 초,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했을 때 오스트리아 나치가 유대인을 학대하는 동안 나치도 유대인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은 즐겁게 이 상황을 지켜봤다. 소련과 동유럽에서 공산 정권이 악행을 저지를 때 대다수 민중은 저항 대신 동조나 침묵을 택했다. 


홀로코스트를 생각할 때면, 우리는 아우슈비츠와 기계화된 비인격적 죽음을 떠올린다. 이것이 독일인들이 홀로코스트를 떠올리는 편리한 방식이다. (중략) 본질적으로 친위대 지휘관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명령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전부 살인자였다. (64쪽) 


저자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암약하는 폭정의 가능성을 막기 위해 일반 시민들이 할 수 있는 노력도 소개한다. 미리 복종하지 말라, 제도를 보호하라, 일당 국가를 조심하라, 세상의 얼굴에 책임을 져라 같은 정치적 구호가 있는가 하면, 어법에 공을 들여라, 진실을 믿어라, 직접 조사하라, 시선을 마주하고 작은 대화를 나누어라 같은 일상생활에 밀접한 조언들도 있다. 


저자는 영국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조지 오웰을 인용해 국가를 내세워 인권을 억압하는 국가주의자들은 "끝없이 권력과 승리, 패배, 복수에 관해 생각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한" 경향이 있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정치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이나 이념이 아니다. 정치는 삶이며 개인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하는 사소한 선택들은 그 자체로 일종의 투표 행위다. 그런 선택 하나하나가 장래에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치러질 가능성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2016년 저자는 설마 했던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민주주의가 얼마나 불완전한 제도인지 다시 확인했다. 2017년 3월 10일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2년 대선에서 51.6퍼센트라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선되었다. 민주주의는 불완전하고 국민은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 이를 경계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적극적인 관심과 행동, 저항과 투쟁이다. "선거가 끝나는 곳에서 폭정이 시작된다"라는 저자의 말이 마음에 깊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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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파시스트들은 의지의 이름으로 이성을 거부했다. 그들은 국민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지도자들이 내세운 영광의 신화에 열광하며 객관적 진실을 부정했다. 그들은 세계화에 맞서, 세계화가 만들어 내는 복잡한 문제들이 국가에 대한 음모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23. 1938년 초, 독일에서 권력을 확고히 장악한 아돌프 히틀러는 이웃 나라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겠다고 위협했다. 오스트리아 총리가 협박에 굴복한 뒤, 오스트리아 유대인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바로 오스트리아인들의 예측복종이었다. 현지의 오스트리아 나치는 유대인들을 붙잡아 거리에 새겨진 독립국 오스트리아의 상징을 문질러 지우게 했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나치가 아니었던 평범한 사람들이 이 광경을 흥미롭게 그리고 즐겁게 지켜봤다는 사실이다.


35. 아마도 토머스 제퍼슨이 <영원한 경계는 자유의 대가이다>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대에 이 같이 말한 미국인들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말을 외부를 향한 바람직한 경계, 즉 그릇된 생각을 가진 외부의 적들을 끝없이 경계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중략) 그러나 이 격언의 참뜻은 완전히 다르다. 그 뜻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자유를 갉아먹고 기어코 끝장낼 <미국인들>을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는 것으로, 여기서 경계의 대상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본성이다.


37. 모든 선거는 마지막 선거가 될 수 있다. 아니면 적어도 표를 던진 사람의 생애에서 마지막 선거일 수 있다.


39. 모든 시민이 동등한 한 표를 행사하도록, 각각의 표를 동료 시민이 쉽게 집계할 수 있도록 불공정한 선거 제도를 고치려면 많은 일을 해야 한다. 우리에겐 종이 투표지가 필요하다. 멀리서 조작할 수 없고 언제라도 다시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43. 삶은 정치적이다. 세상이 우리의 기분을 살피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사소한 선택들은 그 자체로 일종의 투표 행위다. 그런 선택 하나하나가 장래에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치러질 가능성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일상의 정치에서 우리의 말과 행동은, 또는 말과 행동의 부재는 대단히 중요하다.


46. 1978년, 반체제 사상가 바츨라프 하벨이 <무력한 자들의 권력>이라는 글을 썼다. 이 글에서 그는 체제의 목적과 이데올로기를 믿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도 사람들을 억압하는 체제가 유지되는 이유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는 가게 유리창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글귀를 붙여 둔 한 채소 장수를 예로 들었다.

  <공산당 선언>에 나오는 이 인용구의 의미를 채소 장수가 실제로 지지한 것은 아니다. 그가 유리창에 그 구절을 써 붙인 이유는 그래야만 당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일상 생활로 물러나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같은 논리를 따를 때, 공적 영역은 충성의 상징으로 뒤덮이고, 저항은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된다.


47. 말하자면 채소 장수는 사실상 그의 진심이 무엇이건 간에 정권이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자신의 충성을 선언한 것이다. 즉 미리 정해져 있는 의례를 받아들임으로써, 겉모습을 현실로 받아들임으로써, 주어진 게임의 규칙을 받아들임으로써, 결과적으로 그 게임이 계속 지속될 수 있게 했고, 무엇보다도 일단 그 게임이 존재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하벨은 물었다. <아무도 그 게임을 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64. 홀로코스트를 생각할 때면, 우리는 아우슈비츠와 기계화된 비인격적 죽음을 떠올린다. 이것이 독일인들이 홀로코스트를 떠올리는 편리한 방식이다. (중략) 본질적으로 친위대 지휘관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명령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전부 살인자였다. 


65. 일부는 신념을 가지고 살인에 임했다. 그러나 다수는 단지 자기만 발을 빼는 것이 두려웠을 뿐이다. 순응주의 말고도 다른 요인들은 있었다. 그러나 순응주의자들이 없었다면 그 엄청난 잔혹 행위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121. 자유에 관해 생각할 때, 우리는 보통 일개 개인과 강력한 힘을 가진 정부 사이의 다툼을 떠올린다. 우리는 개인에게 권한이 부여되어야 하고, 정부가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다 좋다. 그러나 자유의 한 가지 요소는 누구와 함께할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또 자유를 방어하는 수단 가운데 하나는 구성원을 유지하기 위한 집단 활동이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친구, 우리의 가족에 이익이 되는 활동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다. 이러한 활동이 명시적으로 정치적일 필요는 없다. 이를테면, 체코의 반체제 사상가였던 바츨라프 하벨은 좋은 맥주를 빚는 예를 들었다.  


133. 자유와 안전을 맞바꾸는 건 전혀 불필요한 거래다. 경우에 따라 하나를 얻으려면 다른 하나를 잃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잇다. 자유를 대가로 치러야만 안전을 얻을 수 있다고 단언하는 자들은 대개 자유도 안전도 줄 생각이 없다.


144. 제국의회 화재 사건이 독재자들에게 주는 교훈은 한순간의 충격이 영원한 복종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본능적인 공포와 슬픔이 제도를 파괴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용기란 두려워하지 않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용기는 테러 경영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것이다. 공격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즉 저항하는 것이 가장 어려워 보이는 바로 그 순간부터 저항해야 한다.

  제국의회 의사당 화재 이후, 해나 아렌트는 <누구든 한낱 방관자로 머물 수 있다는 생각을 나는 더 이상 갖지 않게 되었다>고 썼다.


148. 트럼프 대통령은 국가주의자인데, 국가주의자란 애국자와 같은 것이 전혀 아니다. 국가주의자는 우리에게 최악의 존재가 되라고 권장하는 동시에, 우리가 최고라고 말한다. 조지 오웰에 따르면 국가주의자는 <끝없이 권력과 승리, 패배, 복수에 관해 생각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한> 경향이 있다. 국가주의는 상대주의적이다. 유일한 진실은 우리가 다른 이들을 생각할 때 느끼는 분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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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제국주의  



5.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해방


271. 정치의 영원한 최상 목적인 팽창은 제국주의의 중심적인 정치 이념이다. 팽창은 일시적인 약탈 행위도 정복을 통한 지속적인 동화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사상과 행위의 유구한 역사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개념이다. (중략) 이 영역에서 팽창은 19세기의 특징인 산업 생산과 경제 거래의 영속적인 확장을 의미힌다. (중략) 생산이 극히 다른 정치 체제로 조직된 다양한 민족에게 의존하고 그 생산품이 공유되는 한, 생산과 경제 성장이 저하될 때의 한계는 경제 문제인 동시에 정치 문제가 된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생산을 지배하는 계급이 국가의 한계를 뛰어넘어 경제적으로 팽창하려 할 때 탄생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경제적 필요에서 정치로 뛰어들었다. 영구적 경제 성장을 고유의 법칙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계를 포기하지 않으려면, 이 법칙을 모국의 정부에 강요하여 팽창을 외교 정책의 궁극 목표로 천명하도록 해야 했기 때문이다.


272. 경제 구조와 달리 정치 구조는 무한히 확장될 수 없다. 정치 구조는 인간의 무한한 생산성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형태의 정부와 조직체 가운데 국민국가는 무한 성장에 가장 부적합하다. 그 토대에 대한 진정한 동의가 무한히 확장될 수 없고 또 피정복 민족들에게서 진정한 동의를 얻어내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279. 팽창을 위한 팽창 운동이 국민국가에서, 즉 어떤 다른 정치 체제보다 국경을 그리고 정복 가능성의 제한을 특징으로 하는 국민국가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은 원인과 결과의 불합리한 불일치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289. 제국주의 시대에 사업가는 정치가가 되고 정치인으로서 갈채를 받는 반면, 정치인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그들이 성공한 사업가의 언어로 말하고 '대륙적으로 사고할' 때뿐이다. 


294. 권력은 본질상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기 때문에 권력에 기반을 둔 공동체는 질서와 안정의 고요함 속에서 부식할 수밖에 없다.


299. 가장 극단적이고 유일하게 안전한 형태의 재산은 파괴인데, 그것은 우리가 파괴하는 것만이 확실하게, 영원히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 소비하지 않고 소유물을 확대하려고만 하는 재산 임자는 불편한 한계, 즉 인간은 죽어야만 하는 불행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죽음은 재산과 획득이 결코 진정한 정치 원칙이 될 수 없는 진정한 이유이다. 본질적으로 재산에 토대를 둔 사회 체계는 오로지 모든 재산의 궁극적인 파괴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


306. 할일이 없어 늘 한가한 사람들은 잉여 재산의 소유자만큼이나 공동체에 무용지물이었다. 이들이 사회에 실질적인 위협이 된다는 사실은 19세기 내내 인식되었고 이들의 수출은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영토뿐만 아니라 미국의 영토에 사람들을 거주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사실은 남아도는 이 두 세력, 잉여 자본과 잉여 인력이 손을 잡고 함께 나라를 떠났다는 것이다. 통치권력을 수출하고 또 국가가 재산과 노동을 투자한 지역을 합병하는 팽창은 부와 인구의 측면에서 증가하는 손실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처럼 보였다.


313, 너무 부자인 사람들과 너무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새로운 동맹



6.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해방



7. 인종과 관료 정치


394. 남아프리카의 인종 사회는 폭민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었다. (중략) 즉 혜택받지 못한 집단은 순전히 폭력을 통해 자신보다 더 낮은 계급을 만들어낼 수 있고, 이런 목적을 위해 혁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배 계급 집단과 단결이 필요하며, 이민족이나 뒤떨어진 민족들이 그런 전술에 최고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8. 대륙의 제국주의 : 범민족 운동


449. 그(히틀러)는 '가장 나쁜' 민족이 존재한다는 반유대주의 주장을 이용하여 '가장 훌륭한 민족'과 '가장 나쁜 민족' 사이에 피정복, 피지배 민족들을 조직할 줄 알았고, 범민족 운동의 우월 콤플렉스를 일반화하여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민족이 자신들보다 더 나쁜 한 민족을 내려다볼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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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반유대주의



1. 상식에 대한 만행


86. 인간은 권력이 모종의 기능을 하며 일반적으로 유용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아는 까닭에 실질적 권력에 복종하거나 견디는 한편, 권력 없이 부만 가진 사람들을 증오한다. 착취와 억압조차도 사회가 돌아가게 만들고 나름의 질서를 확립시킨다. 단지 권력을 상실한 부와 정책적 대안 없는 냉소만이 기생충 같고 무용하며 역겨운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이런 조건이 사람들을 서로 묶어주는 끈을 모두 잘라버리기 때문이다. 착취하지 않는 부에는 흔히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마저 결여되어 있다. 정책 없는 냉소에는 착취자가 피착취자에 대해 통상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관심조차 있지 않다.


87. 유대인은 언제나 희생양이라는 이론은 그밖의 누구라도 유대인처럼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중략) 이른바 희생양은 이제, 세상이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그 대신 처벌을 면하고자 하는 무고한 희생자가 아니다. 세상사에 관여하는 여러 집단 중 한 집단의 사람들이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집단이 세상의 불의와 잔혹함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공동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87. 근대의 독재정치가 과거의 다른 모든 전제정치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테러가 예전처럼 정적 제거나 위협의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고 이제 완전히 순종적인 인민 대중을 지배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테러는 아무런 예고 없이 발생하며, 테러범의 관점에서도 희생자는 무고하다. 이는 나치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 유대인, 국민국가 그리고 반유대주의의 발생


101. 집단으로 보면 서구 유대인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수십 년 동안 국민국가와 함께 해체의 길을 걸어왔다. 전후 유럽이 급속히 몰락하면서 유대인 역시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을 박탈당하고 한 무리의 부유한 개인들로 원자화된다. 제국주의 시대에 유대인의 부는 그 중요성을 상실했던 것이다. 국가들 간에 권력의 균형 감각이나 유대성이 없던 유럽에서 범유럽적 유대인이란 요소는 그들의 무익한 부로 인해 일반적인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권력의 결여로 인해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113. 유대 민족은 모든 유럽 민족 가운데 국가 없는 유일한 민족이었고, 바로 이 때문에 정부나 국가가 무엇을 대변하든 상관없이 이들과 동맹을 맺는 데 가장 열성적이고 적합한 민족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유대인은 정치적 전통이나 경험이 없었고 그들의 새 역할이 안고 있는 명백한 위험과 권력 가능성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 간의 긴장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116. 반유대주의는 100여 년 동안 점진적으로 거의 모든 유럽 국가의 거의 모든 사회 계층으로 퍼져갔고 결국 다른 문제에서는 절망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여론을 하룻밤 사이에 일치시킬 수 있는 이슈로 갑자기 부상했던 것이다. 이 과정의 발전 법칙은 간단하다. 국가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사회집단은 바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국가 자체와 갈등에 빠지게 된 사회 계급은 반유대적이 된다. 


121. 유대인은 국가에 근원을 둔 권력과의 밀접한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권력과 동일시되었으며,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가까운 가족끼리 모여 지냈던 관계로 피할 수 없이 모든 사회 구조의 파괴를 위해 일한다는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3. 유대인과 사회


162. 근대가 안고 있는 독특한 위험이자 가장 큰 도전은, 이때 처음으로 인간이 인간을 상이한 환경과 조건의 보호막 없이 마주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새로운 평등 개념이 근대의 인종 관계를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인종 관계란 뚜렷한 조건의 변화를 통해서도 약화될 수 없는 자연적 차이가 문제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178. '보통' 유대인을 차별하고 동시에 교육받은 유대인이 상류사회의 사교계에 진입하기가 유사한 비유대인보다 더 쉬웠던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유대인은 스스로를 '일반 유대인'과 분명하게 구분해야만 했으며 또한 자신들이 유대인이라는 표시도 분명하게 들어내야만 했다. (중략) 이것은 실제로 유대인이기 때문에 거리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느낌, 그리고 '보통의 유대인' 같지 않기 때문에 집에서도 다른 유대인들과 다르다는 느낌으로 귀결된다.


214.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 지위를 잃은 모든 계급은 결국 그들 자신의 폭민 조직을 통합하고 확립한다. 폭민 조직의 선전과 매력은 다음의 가정을 기초로 한다. 즉 악덕의 형태를 띤 범죄를 기꺼이 자신의 구조 안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사회는 이제 공개적으로 범죄자를 허용하고 공적으로 범죄를 자행하면서 악덕을 청소할 차비를 갖출 것이라는 가정 말이다.

 


4. 드레퓌스 사건


242, 폭민은 일차적으로 각 계급의 낙오자들을 대표하는 집단이다. 이 때문에 폭민을 국민과 혼동하기 쉽다. 국민 역시 사회의 모든 계층을 아우르기 때문이다. 국민이 모든 혁명에서 진정한 대의제를 위해 투쟁했다면, 폭민은 항상 '강한 자', '위대한 지도자'를 소리 높여 외친다. 폭민은 자신을 소외시킨 사회를 증오하며, 자신을 대변해주지 않는 의회 역시 증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민의 지도자들이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 있던 수단인 국민 투표제는 폭민에 의존하는 정치가들의 낡은 개념이다.


261. 드레퓌스 드라마가 희극이었다는 사실은 오로지 그 마지막 장에서 분명해진다. 분열된 국가를 일치단결시키고 의회를 재심 찬성의 방향으로 변화시켰으며 결국 극우에서 사회주의자에 이르는 완전히 이질적인 집단을 화해시키도록 도와준 신은 바로 1990년의 파리 박람회였다.


263. 시온운동은 반유대주의에 대항하여 유대인이 발견할 수 있었던 유일한 대답이었고, 자신들을 세계적 사건의 중심에 세웠던 적대감을 심각하게 고려한 유일한 이데올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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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술사 1 - 기억을 지우는 사람 아르테 미스터리 10
오리가미 교야 지음, 서혜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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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결국 기억의 총합일지도 모른다. 오리가미 교야의 <기억술사>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학생 '료이치'는 잊고 싶은 기억을 지워주는 '기억술사'가 있다는 도시전설에 관심이 많다. 어려서부터 남매처럼 지낸 세 살 아래 소꿉친구 '마키'와 대학에서 만나 짝사랑하게 된 선배 '교코'가 기억술사에게 기억이 지워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료이치는 커뮤니케이션 개론 과목의 과제 리포트를 쓴다는 핑계로 기억술사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다. 료이치의 조사에 따르면 기억술사는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괴인이다. 기억술사를 불러내는 방법이 몇 가지 있는데 기본적으로 기억술사는 자신이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 앞에 스스로 나타난다. 료이치는 기억술사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렵다. 괴로운 기억조차 그 사람의 일부이고, 기억 속에 있던 사람들에겐 상처가 된다고 생각한다.


처음엔 나도 기억술사를 만나고 싶었다. 잊고 싶은 기억을 잊게 해주는 기억술사가 있으면 편리할 것 같았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기억술사에게 기억이 지워져 고통받는 료이치를 보며 기억이란 쉽게 지울 수 없고 지워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고 싶은 기억도 나의 소중한 일부다. 잊고 싶은 기억이 있기 때문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되는 효과도 있다. 잊고 싶다고 모조리 잊어버리면 반성도 교훈도 함께 사라져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고 또다시 잊고 싶은 기억을 만들게 된다. 그런 도돌이표 같은 삶은 살고 싶지 않다. 


<기억술사>는 '감성 미스터리'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장르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젊은이들의 사랑과 우정을 다룬 감성 소설이면서 호러, 판타지가 결합된 미스터리라는 점이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는 듯하다. 이 책은 2015년 제22회 일본 호러소설 대상 독자상을 수상하고 2017년 현재 일본 누계 판매 부수 25만 부를 돌파하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총 3부작이며, 1권 후반에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어 이어지는 2,3권도 얼른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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