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범 1 - 개정판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5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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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추리소설계의 대표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대표작 <모방범>은 2001년 일본에서 출간되어 300만부라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기록했으며,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등 6개 상을 석권했다. 국내에서도 '지난 10년을 빛낸 장르소설 1위(알라딘)'로 선정될 만큼 일본소설로는 드물게 큰 인기를 끌었다. 나는 2002년에 만들어진 영화 <모방범>으로 이 작품을 먼저 만났는데, 이번에 원작 소설로 읽어보니 영화는 원작의 10분의 1, 아니 100분의 1도 담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설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분을 각색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영화 <모방범>은 유난히 생략된 부분이 많다. 소설은 범죄를 낳은 사회적 배경과 피해자의 심리, 피해자 및 가해자 가족들의 고통, 범죄를 보는 남녀의 시각 차이, 매스컴의 보도 태도와 대중의 인식 등 다양한 주제를 담은 데 반해, 영화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살인을 저지르는 범죄자의 심리와 그것을 다루는 매스컴 문제에만 포커스를 맞췄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볼 때는 그저 무섭다, 섬뜩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는데, 소설을 읽으면서는 하룻밤 사이에 피해자 또는 가해자의 가족이 되어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사람들의 문제를 비롯해 다양한 문제들을 두루두루 생각해 볼 수 있어서 무섭기만 한 것이 아니라 따뜻하고 감동적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또한 영화와 달리 소설은 범인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과 매스컴, 사회에도 책임을 묻는다. 어린 시절 피스와 구리하시를 불행 속에 몰아넣은 부모와 주위 어른들의 죄는 부인하기 어렵고, 성장 과정에서 그들을 바로잡지 못한 교사들의 죄 또한 무시하기 힘들다. 피해자가 범죄에 말려들도록 내버려둔 사람들의 책임도 묻지 않을 수 없다. 피해 여성들 대부분이 가정이나 사회에서 충분한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두 젊은 남자의 달콤한 유혹을 물리치기엔 너무나 약했다. 가해자로 몰렸다가 후에 피해자임이 밝혀진 다카이 가즈아키는 어떤가. 그의 장애를 부모나 교사들이 일찍 눈치를 채고 조치를 해주었더라면 구리하시 히로미가 그를 멍청하고 둔하다고 놀리며 하인 부리듯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며, 성실하고 단란했던 다카이가(家)가 무너지는 일도 없었으리라. 매스컴, 대중들은 어떤가. 말로는 가해자를 비난하고 피해자를 위로하지만, 실상 그들은 한 편의 쇼를 연출하고 구경하는 관람객에 지나지 않으며, 자기 일이 아니면 무관심하고, 타인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할 줄 모른다. 그러한 방관적인 태도가 또 다른 범죄를 낳는다는 것은 모른 채 말이다.


영화에선 사건을 추적하는 저널리스트 무라하타 시게코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지 않았으나 소설에서는 달랐다. 소설에서 사건을 진행하고 등장 인물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시게코는 같은 스토리텔러라는 점에서 주범인 '피스'와 대립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피스는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과도하게 몰입한 나머지 타인의 목숨이나 사회적 파장 같은 것은 등한시한 반면, 시게코는 처음부터 자기 자신이 스토리텔러로서 자격이 있는지 끊임없이 의식했고, 제3자인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피해자 가족에게 미칠 수 있는 고통이나 사회적 영향에 민감했다는 것이다. 시게코는 때때로 틀린 이야기를 믿기도 했고,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고, 한 글자도 쓰지 못해 애를 먹기도 했다. 하지만 진실을 추구하는 자세만큼은 관철했으며 결국엔 피스를 이겼다. 스토리텔러로서 자신의 능력에 도취되거나 자기가 만든 스토리를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일은 얼마나 위험한지를,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만든 이야기가 그 무엇도 '모방'하지 않았다고 자신한 피스의 몰락을 보며 뼈저리게 느꼈다. 


시게코와 피스의 대립은 텍스트와 이미지의 대립으로도 볼 수 있다. 저널리스트인 시게코는 사건을 철저히 텍스트의 관점에서 접근한 반면, 한 편의 '쇼'를 연출한 '연출자' 피스는 오로지 대중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에만 급급했다. 한 자 한 자 텍스트를 써내려가는 것과 한 컷 한 컷 이미지를 찍어내는 것은 비슷한 듯 다르다. 텍스트는 그 자체로 오롯이 이야기를 전해야 하기 때문에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에 엄청난 무게가 실리는 반면, 이미지는 색상과 명도, 채도, 피사체와 그 구도 등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조작하거나 왜곡할 수 있을 뿐더러 대량복제 및 제2, 제3의 대체물을 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가볍게 치부되기 쉽다. 대중과 매스컴은 피스가 만들어낸, 자극적이고 수용하기 쉬운 이미지에 열광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에 시종일관 열세였던 시게코는 몇 개의 단어로 피스의 이미지를 압도했다. 화려한 출연진과 엄청난 자본이 투입된 영화 <모방범>이 돈 몇 푼만 내면 읽을 수 있는 원작 소설을 이기지 못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텍스트는 이미지보다 우월하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모방범>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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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
구로사와 아키라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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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는 한 번 받기도 어려운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라쇼몽>, <데루수 우자라>로 두 번이나 수상한 세계적인 영화감독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은 그가 만 예순여덟이 되던 1978년에 쓴 자서전 '비슷한 것'으로, 출생부터 <라쇼몽>이 전세계의 주목을 받기까지에 이르는 생애 전반(前半)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의 자서전에서 '우리가 늘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개성이란 것은, 실은 유치원에서 만났던 소꿉친구나, 처음 읽었던 소설 속 주인공이나, 또는 사촌 누이가 기르던 사냥개에 이르기까지 온갖 자잘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절대 자기 혼자만 사는 게 아니다. (중략) 그래서 나는 내 기억 속에서,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사람이나 사건에 관한 추억을 뽑아보았다'라는 문장을 읽고 자서전을 쓰기로 했다는 그는, 바람대로 희미한 기억부터 청소년기의 소소한 추억, 청년기의 질풍노도와 같은 심경 등을 자세하고 생생하게 그려냈다. 덕분에 이제까지 그의 영화를 한 편도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일본 버전을 읽는 듯한 기분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었지 않나 싶다. 

 
1910년 도쿄에서 4남 4녀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군인 출신의 아버지를 두었기 때문에 비교적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어린 시절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손윗 누나 모모요와 형 헤이고로, 모모요는 어린 나이에 병사해 어린 구로사와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고,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모두 뛰어난 수재였던 헤이고는 문학, 미술 등 예술에 조예가 깊어 훗날 구로사와가 영화 감독이 되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이 책은 또한 메이지 시대 후반부터 다이쇼, 쇼와 초기 도쿄의 모습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상을 짐작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1923년에 있었던 관동대지진은 저자의 집은 물론 도쿄 전체를 파괴하다시피 한 무시무시한 사건이었다. 그 때 저자의 나이는 고작 만 열세 살. 중학교 2학년이었다. 동네의 집과 가게들이 모두 무너진 것은 물론, 학교가 부서지고, 건물들이 파괴되면서 피어오른 흙먼지가 일식처럼 태양을 가려서 낮에도 어두웠으며, 대화재 때문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것 같은 정경이 오랫동안 이어졌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피해가 얼마나 심각했을지 상상이 된다.


그 때의 아픈 기억들 중에는 조선인 학살 사건도 있었다.


"관동대지진 때 발생한 조선인 학살 사건은 이런 어둠에 겁먹은 사람들을 교묘하게 이용한 선동자의 소행이다. (중략) 화재로 집을 잃은 친척을 찾아서 우리 가족이 우에노에 갔을 때, 아버지는 단지 수염이 길다는 이유로 조선인으로 몰려 몽둥이를 든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나는 조마조마해서 함께 있던 형을 쳐다보았다. 형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한심한 놈들!" 하고 버럭 호통을 쳤다. 그러자 둘러싸고 있던 패거리가 슬금슬금 흩어졌다. (중략) 동네에서 어느 집의 우물물은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우물 바깥 담장에 백묵으로 쓴 수상한 기호가 있는데, 그게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표시라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이실직고하자면 그 수상한 기호라는 건 내가 쓴 낙서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어른들을 보면서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다." (pp.95-6)


학생이 보기에도 어이없고 황당한 일이 만연했던 걸 보면 당시 일본 사회가 얼마나 미쳐 돌아가고 있었는지를 어렴풋이 알겠다. 이 뿐만 아니라 학교 교사가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했던 구로사와를 대놓고 괴롭혔던 일이라든가, 육군 대위가 직접 중학교 군사 훈련을 시킨 일 등 저자의 경험으로 미루어 알 수 있는 당시 일본 사회의 폐단이 한둘이 아니다. 이 때의 경험들 때문인지 저자는 평생 일본 사회, 특히 주류 권력층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고, 제 한 몸 건사하려고 시류에 편승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대중과 타협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 제국주의의 반작용으로 그의 명작들이 탄생했다니,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다.


책의 뒷부분은 그가 영화계에 입문하여 영화감독으로 커리어를 쌓고 <라쇼몽>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기까지의 일들이 나온다. 그의 어린 시절만 해도 영화가 지금처럼 대중적인 장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영화 감독은커녕 영화계에서 일하겠다는 꿈조차 꿔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형 헤이고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문학과 음악, 연극 등에 심취했고, 미술은 전문 학교를 다닐 만큼 잘했다. "나는 탐욕스럽게 미술, 문학, 연극, 음악 등의 예술에 몰두하긴 했지만, 장차 내 앞에 그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는 영화라는 길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알지 못했다"(p.164) 라는 그의 말대로, 그는 어떤 영화감독이 되겠다든가, 어떤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이나 목표가 없었고, 그저 그때그때 눈에 보이고 가슴에 느껴지는 것에 충실했다. 그리고 그 결과 미술, 문학, 음악 등 모든 면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영화들을 만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故스티브 잡스의 'connecting the dots'가 그의 삶에서도 실현된 셈이다.   


언젠가 그의 영화를 꼭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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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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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먼저 봤는데 원작 소설의 100분의 1도 못 담은 것 같다. 역시 소설은 책으로 읽어야 제맛. 한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으니 시간 넉넉할 때 읽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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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정치이론과 좀비
대니얼 W. 드레즈너 지음, 유지연 옮김 / 어젠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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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자로서 보기에 정치외교학은 경제학, 사회학 등 타 사회과학 학문에 비해 다른 학문과 연계하거나 대중이 흥미를 가지게끔 어필하는 노력이 부족한 것 같다. 그야 정치외교학이 타 사회과학 학문과 비교할 때 방법론상 특징이 뚜렷하지 않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정치외교학과 가까운 사회학이 최근 인문학, 예술, 대중문화 등과 활발히 융합 내지는 협업을 시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관심과 노력이 부족하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국제정치이론과 좀비>이 나왔을 때 참 반가웠다. 국제정치학과 좀비라니. 이보다 신선한 조합이 또 있을까? 최근 몇 년 동안 미국에서 가장 '핫'하게 떠오른 테마 중 하나인 좀비를 이용해 현실주의, 자유주의, 구성주의, 신보수주의, 관료정치 등 국제정치학 교과서의 주요 개념들을 소개하는 구성도 흥미로웠다. 미소 냉전이 끝나고, 테러와의 전쟁, 민족 갈등, 종교 분쟁 등을 제외하면 사실상 세계전은 사라지고 국지전만 남은 상황에서, 인권, 환경 등을 빼고 국제정치학계가 관심을 가질 만한 카드는 별로 남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냉전을 전제로 쓰인 국제정치학 교과서들이 사실상 폐기될 위기에 놓인 것처럼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으며, 국제정치학 주류인 현실주의가 상정하는 '공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좀비라는 소재를 택한 저자의 발상이 참으로 놀랍다. 이런 게 진짜 크리에이티브가 아닐까.


아쉬운 점은 내가 국제정치학만 배웠지 좀비 영화는 본 적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아서 이 책 내용 절반은 아예 이해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좀비를 모르니 어쩔 수 없이 국제정치학에 대한 설명 부분만 자세히 읽고 나머지는 그 내용을 좀비와 어떻게 연결하여 서술했는가를 확인하는 정도로만 읽었다. 시도만큼은 인상적이나 좀비를 모르거나 국제정치학을 모른다면 반쪽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물론 국제정치학과 좀비에 모두 해박한 사람이라면 다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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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정치이론과 좀비
대니얼 W. 드레즈너 지음, 유지연 옮김 / 어젠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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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학과 좀비의 만남이라니, 상상력과 창의성에는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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