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을 마치고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애거서 크리스티 푸아로 셀렉션 9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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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 마니아를 자처하면서 정작 추리소설의 대가인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도 많이 읽지 못한 게 부끄러워 뒤늦게 애거서 크리스티의 책들을 구입해 읽고 있는 요즘이다. 이 책은 황금가지에서 나온 애거서 크리스티 푸아로 셀렉션 총 열 권 중 한 권으로, 부모로부터 엄청난 부를 상속받은 갑부이자 형제 중 유일하게 살아있는 장남이기도 한 리처드 애버네티의 유언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뭐니 뭐니 해도 결말이다. 결말 전까지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여느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전개를 따른다. 한 사람이 죽고, 그가 남긴 유산을 둘러싸고 유족들 간에 갈등이 생긴다. 이 과정에서 죽은 자의 사인이 자연사가 아니라 타살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이 나오고, 공교롭게도 이 사람에게 끔찍한 일이 벌어지면서 의혹이 더욱 깊어진다. 결국 푸아로 탐정이 등장해 범인을 찾고 사건을 해결하는데, 이 작품은 범인을 잡아도 잡은 것 같지 않은 찜찜함이 남는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이전 작품들 중에 비슷한 작품이 있었던가. 없다면, 이 작품이 왜 50년대 황금기의 걸작으로 불리는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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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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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들의 기록이고 어떤 사람의 사사로운 기록이기도 해서, 그것이 궁금하지 않은 독자들이 잘 피해 갈 수 있도록 '일기(日記)'라는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라는 '작가의 말' 속 문장을 읽고 참 황정은 작가답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한 권이라도 더 팔기 위해 독자를 '낚는' 제목을 짓기보다, 이 책을 원했고 이 책이 꼭 필요한 독자에게 정확하게 도착할 가능성이 높은 제목을 짓는 성실함, 엄정함... 이런 면이 황정은 작가의 매력이고 미덕이지 않나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이 더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기를 바란다. 책을 펼치면 과연 <일기>라는 제목 그대로 '어떤 날들의 기록'이거나 '어떤 사람의 사사로운 기록'으로 읽힐 만한 글들이 이어진다. 팬데믹 이전과 이후 어떤 날들을 보내고 있는지, 평소에 어떤 식으로 글을 읽고 책을 읽는지, 주로 누구와 만나고 어떤 일상을 보내는지 등 소소한 일상 이야기가 주로 나온다. 그러다 틈틈이 등장하는 세월호 사건, 용산 참사,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사고, 직장 내 갑질, 가정 폭력 등의 이야기를 읽으면, 역시 황정은 작가는 고요하고 안온한 일상을 보내는 동안에도 한국 사회의 사각지대, 역사의 이면에 대한 관심을 놓고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이토록 깊고 넓게 세상을 바라보고 고통에 대해 사유하는 작가가 앞으로 어떤 글을 쓸지 더욱 궁금해지고.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글은 <흔>이다. 나도 살면서 성인 남성에게 성희롱 또는 성추행을 당한 적이 몇 번인가 있는데, 어릴 때 그것도 가까운 친족에게 이 글에 묘사된 것과 같은 일을 당했다면 큰 상처가 되었을 것 같다. 이 글을 읽으니 황정은 작가님이 왜 최은미 작가님의 소설집 <눈으로 만든 사람>의 추천사를 썼는지 알 것 같고,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여성 작가들이 글로서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 물론 가장 좋은 건 이런 범죄가 완전히 사라져서 가해자도 없고 피해자도 없는 세상이 되는 것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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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런웨이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6
윤고은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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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이후로 더 이상 드나들지 못하게 된 장소가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가 도서관이다. 팬데믹 이전에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집에서 가까운 도서관에 들러서 서가를 둘러보고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을 살펴보는 것이 취미였는데, 팬데믹 이후로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면 안 하는 쪽으로 선택을 하다 보니 취미였던 도서관 가기가 더 이상 취미가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윤고은 작가님의 신작 제목이 <도서관 런웨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반갑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고, 도서관이 주 무대인 소설은 아니고 주인공이 도서관 서가 사이를 런웨이하는 취미(?)를 가진 인플루언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역시 윤고은 작가님답게 기발하고 재치 있는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여행사 직원인 안나는 도서관 서가 사이를 패션쇼에서 모델이 런웨이하듯 걸어가는 장면을 SNS에 올리는 것으로 소소하게 화제를 모으는 북스타그래머이다. 그런 안나가 미국 여행길에 만난 남자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사라지고, 안나와 함께 북클럽을 하던 지인이 안나를 찾기 위해 안나의 대학 시절 친구인 유리에게 연락을 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유리는 안나의 행방을 추적하다가 안나가 사라지기 전 도서관에서 <AS안심결혼보험>이라는 제목의 책을 대출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평범한 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보험상품의 약관집이며, 시중에서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리는 안나가 심상치 않은 일에 말려들었을지(또는 스스로 뛰어들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과연 안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소설은 유리가 <AS안심결혼보험>을 단서로 안나의 흔적을 따라가는 과정과 <AS안심결혼보험>의 내용이 교차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처음에는 결혼을 보험 대상으로 본다는 발상이 코믹하게 느껴졌는데, 보험금 환급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보험에 가입하지 않았으면 관성적으로 했을) 예단이나 예식을 생략하거나 얼굴도 모르는 친척의 관혼상제에는 참석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작금의 결혼식 및 결혼 생활이야말로 웃기는(이라고 썼지만 사실은 웃기지도 않는) 요소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웃기는 건, '결혼'보험이지만 가입 기간이 만료될 때까지 한 번도 결혼하지 않으면 원금의 130퍼센트를 보장해 준다는 것. 이걸 노리고 결혼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 결혼보험에 가입하는 경우도 있다니. 실제로 있다면, 가입하고 싶을지도? 


결혼보험이 도입됨으로써 기존의 결혼 제도가 흔들리고, 팬데믹이 퍼짐으로써 팬데믹 이전 생활에 대한 회의가 늘어나고.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의 도입 혹은 발발로 인해 변화하고 붕괴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솜씨 또한 훌륭하다. 조금 전까지 이름도 몰랐던 남녀와,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친구와,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도서관을 생각해낸 것도 대단하다. 여행지에서 일부러 도서관에 갈 정도로 도서관이라는 공간에 애정이 있고,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는 수천, 수만 권의 책 중에 똑같은 한 권의 책을 고른 사람들이라면, 사랑이든 사건이든 뭔가가 시작되기에 충분한 조건 아닐까. 우연이 운명이 될 수도 있는 곳. 도서관에 가보고 싶다, 오랜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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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세계의 아이덴티티 5
오시키리 렌스케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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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션 판타지의 형식을 빌려 만화 업계의 어두운 실상을 고발하는 만화 <좁은 세계의 아이덴티티> 5권이 나왔다. 주제도 내용도 형식도 워낙 기발하고 파격적이라서 4권을 읽고 얼른 다음 권을 읽고 싶었는데 약 1년 반 만에 5권이 나왔다. 아쉽게도 5권이 완결이라고... 


5권은 만화 제작 공장에 갇혀서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하고 원고를 하는 만화가들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만화가가 24시간 내내 만화를 그리도록 하기 위해 만화가 전용 강제 깁스를 입히는 식의 연출은 과장이겠지만, 데뷔를 못한 작가들은 데뷔를 못했다고, 데뷔를 한 작가들은 안 팔린다고 구박을 한다거나 재미가 없다고 압박을 주는 식의 일은 실제로 있을 것 같아서 함부로 웃을 수가 없었다. 만화가가 아닌 나도 이런데 만화가인 분들이 보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워낙 어두운 내용이라서 어떤 결말이 날지 궁금했는데 결말은 생각보다 훈훈(?)했다. 결말보다 5권 마지막 장에 실린 작가 후기가 더 인상적이었는데, 만화 업계가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만화를 한다는 게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만화를 하고 싶다고. 작가 후기를 읽고 만화를 다시 보니 절망만 느껴지던 작품 속에 약간의 희망이 보이는 듯도 했다. (작가님 그리고 모든 만화가분들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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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힐러, 귀찮아 2
탄넨 니 핫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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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지만 치유 능력 제로인 카라와 신출내기 전사 앨빈의 모험을 그린 코믹 판타지 만화. 전사답게 모험을 전개하려고 하는 앨빈 옆에서 힐러로서 도움을 주기는커녕 분위기 파악 못한 말이나 행동으로 딴죽을 거는 카라와 그런 카라에게 핀잔을 주는 앨빈의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는 만화다. 


2권에서도 카라의 활약(?)이 대단하다. 적에게 맞서는 앨빈을 응원하기는커녕 "승산 없는 싸움에 도전하다니 분수를 알아!" 같은 말로 전의를 꺾지 않나, 소환술을 쓰겠다더니 악마의 기술을 보이지 않나, 아무리 봐도 힐러 같지 않은 엉뚱한 말과 행동들을 한다. 그 결과 적과의 싸움은 뒷전이 되고 카라와 다투는 일에만 집중하는 앨빈... 과연 카라와 앨빈은 무사히 모험을 마치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유머 코드가 잘 맞아서 다음 권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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