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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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나를 만드는 것일까, 내가 삶을 만드는 것일까.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디디에 에리봉의 책 <랭스로 되돌아가다>를 읽으며 떠올린 질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노동자 계급 출신인 자신이 어떤 과정을 통해 그가 속해 있던 노동자 계급이 혐오하는 지식인 계급에 속하게 되었으며 동성애자임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는지를 서술하고 이를 학문의 차원에서 분석, 탐구한다. 


저자는 1953년 파리 교외 랭스의 노동 계급 가정에서 태어났다. 학력이 짧은 그의 부모는 공장 노동자와 가정부로 일하며 그를 키우고 가정을 건사했다. 그의 부모는 열심히 일했지만 내내 빈곤했고, 자식들을 아꼈지만 애정에 걸맞은 교육을 시켜줄 형편이 못 되었다. 그의 부모는 그가 하루빨리 학교를 졸업해 취직해서 번 돈을 집으로 가져오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공부에 대한 열망이 컸고, 결국 고향을 탈출해 파리에서 자수성가했다. 


"내게는 사회적 수치에 관해 쓰는 것보다 성적 수치에 관해 쓰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었다." (23쪽) 저자는 일찍부터 커밍아웃하고 자신이 게이인 것에 관해 글을 썼지만 노동자 계급 출신이라는 것에 관해서는 좀처럼 쓰지 않았다. 그가 속한 지식인 사회에는 노동자 계급 출신이 거의 없고, 그 자신이 더 이상 노동자 계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나면서, 저자는 자신이 게이인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자 계급 출신이라는 사실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자각했다. 나아가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 외할머니, 형의 삶을 돌아보면서, 그들이 왜 노동자 계급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는지, 한때는 좌파 정당을 옹호했던 그들이 현재는 열렬한 우파 지지자로 돌아섰는지, 그들이 왜 외국인 혐오, 성소수자 혐오 등을 하는지 등을 분석, 탐구한다. 


저자는 노동자 계급 출신이었기 때문에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사회관계자본(이른바 '아빠 찬스', '엄마 찬스')의 덕을 보지 못하고 진학과 취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 마침내 게이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사람들을 통해 언론사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저널리스트로서 경력을 쌓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노동자 계급 출신인 것보다 게이인 것이 자신의 인생에 더 큰 도움이 되었다고 오랫동안 믿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오랜만에 돌아간 고향 랭스에서, 저자는 자신을 거부했고 자신 또한 버렸던 과거의 유산이 결국 자신을 만들었음을 인정한다. 비록 그의 부모는 그가 원했던 계급과 계급적 자산을 그에게 주지 못했지만, 그가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 있도록 그에게 생명을 주고, 보살핌을 주고, 교육의 기회를 줬다. 부모로부터 받은 것은 무시하고 받지 못한 것만 헤아리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그는 통한의 눈물을 흘린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왜 그를 이해해보려고 하지 않았던가. 과거에 나는 왜 그와 대화해보려고 하지 않았던가. 사회세계의 폭력이 그를 이겼던 것처럼, 나를 이기도록 내버려두었던 것을 후회했다." (279쪽) 너무 늦기 전에 이해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라는 그의 메시지가 마음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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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싱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9
넬라 라슨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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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인의 삶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지난 주말 넷플릭스 영화 <패싱>을 보면서 나는 내가 흑인 여성의 삶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의 배경은 1920년대 뉴욕과 시카고. 백인과 유색 인종의 분리를 명시한 '짐 크로우 법'이 1960년대까지 효력을 발휘했다는 걸 알기에,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1920년대의 흑인들은 백인들보다 열악한 조건의 삶을 살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에선 달랐다. 물론 이 시대의 흑인들 다수가 백인들보다 열악한 조건의 삶을 살았던 건 맞다. 흑인들이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백인에게 폭행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것도 맞다. 하지만 극소수의 흑인들은 일부 백인들보다 안락한 삶을 살았다. <패싱>의 화자 아이린의 남편 브라이언처럼 의사, 변호사 같은 전문직 종사자가 되거나, 아이린의 옛 친구 클레어처럼 백인으로 '패싱'되는 경우에 그랬다. 


영화의 여운이 너무도 강렬해서 원작 소설을 읽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그래서 읽게 된 소설은 영화 그 이상이었다. 주인공 아이린은 인종적으로는 흑인이지만 계급적으로는 중산층에 속한다. 의사인 남편 브라이언은 아이린으로 하여금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고 안락한 생활을 하게 해준다. 아이린 역시 남편과 두 아들을 보살피고 이따금 흑인 인권 단체를 위해 봉사활동을 하는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어느 날 친정인 시카고를 방문한 아이린은 더위를 피해 들어간 호텔 카페에서 옛 친구 클레어를 만난다. 백인 남자와 흑인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클레어는 백인으로 보일 만큼 흰 피부와 누구라도 반할 만한 미모의 소유자다. 아이린은 클레어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백인 남자와 결혼했다는 말을 듣고 모순적인 감정을 느낀다. 친구이자 같은 여성으로서 클레어가 무사히 결혼 생활을 영위하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흑인 혐오자인 남편에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클레어에게 분노를 느낀다. 


그로부터 2년 후 클레어가 뉴욕으로 찾아오면서 아이린의 평온한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흑인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을 내비치는 클레어에게 아이린은 같은 흑인으로서 연민을 느끼면서도, 혹시라도 흑인 혐오자인 클레어의 남편이 클레어가 흑인들과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될까 봐 - 결국에는 클레어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들킬까 봐 - 걱정한다. 또한 누가 봐도 매력적인 클레어가 자신의 남편과 가까워질까 봐 경계하는 마음도 든다. 


<패싱>은 이런 식으로 인종 차별이 어떤 식으로 개인들의 삶을 힘들게 했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인 동시에, 같은 인종 안에서도 젠더, 계급, 섹슈얼리티 등의 면에서 때로는 다수자 또는 소수자성을 가질 수 있음을 섬세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나아가 한 사람의 인종, 젠더, 계급, 섹슈얼리티 등의 요소를 모두 제거했을 때 그는 과연 무엇인가(혹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 소설로도 읽혔다. 아이린과 클레어가 다른 입장, 다른 상황에서 만났어도 그와 같은 우정(혹은 애증)의 관계를 맺었을까. 무엇이 우리를 우리가 되게(혹은 될 수 없게) 만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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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메노양에게 사랑은 아직 일러 5
유즈치리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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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시기는 개인마다 성장 속도가 달라서, 어떤 아이는 또래보다 월등히 키도 크고 행동도 어른스러운 데 반해, 어떤 아이는 고학년이 되어도 저학년처럼 어린 티가 났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겉모습은 다 달라도 속마음은 아직 그 나이 또래 아이였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만화를 읽을 때마다 그 생각을 하게 된다. 


유즈치리의 만화 <히메노양에게 사랑은 아직 일러>는 또래보다 조숙한 초등학생 '히메노'의 짝사랑을 그린 만화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언니가 있어서 또래보다 일찍 어른들의 연애를 접하고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게 된 히메노. 그런 히메노는 같은 반 남자아이 '오우지'를 짝사랑하는데, 오우지는 히메노의 마음을 전혀 모른다. 


5학년이 된 히메노는 여전히 오우지를 짝사랑하고 있다. 5권에서 히메노는 자신의 생일 파티에 오우지를 초대하는데, 파티 당일 히메노의 집으로 간 오우지는 파티에 초대된 아이들 중에 남자는 자신뿐이라는 걸 깨닫고 당황한다. 그런 오우지의 속도 모르고, 그저 오우지가 자신의 생일 파티에 와주었다는 사실에 감격하는 히메노 ㅎㅎ 


만화의 주된 내용은 히메노의 짝사랑이지만, 히메노가 아직 초등학생인 관계로 본격 연애 만화, 로맨스 만화 같은 느낌은 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초등학생들의 학교 생활과 일상 이야기가 주로 나오는데, 5권에는 임간학교(한국으로 치면 수련회) 에피소드가 나온다. 일본 초등학생들의 학교 생활을 알 수 있다는 점도 이 만화의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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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힐러, 귀찮아 3
탄넨 니 핫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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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물에서 힐러는 주로 용사가 부상을 당하거나 위기에 빠졌을 때 구원자처럼 나타나 상처를 치유해주고 꼭 필요한 도움을 주는 존재로 그려진다. 탄넨 니 핫코의 만화 <이 힐러, 귀찮아>의 힐러는 조금, 아니 매우 다르다.


주인공 '앨빈'은 모험 중인 용사인데, 우연히 만난 골칫덩어리 힐러 '카라' 때문에 더 큰 위험에 처할 때가 자주 있다. 힐러라면 상처도 치유해주고 위기에 빠졌을 때 도와줘야 하는데, 카라는 힐러라면서 치유 능력은 전혀 없고 앨빈이 적과 싸울 때 도움을 주기는커녕 엉뚱한 짓을 해서 앨빈의 속을 뒤집는다. 3권에서도 앨빈은 카라 때문에 여러 번 곤욕을 치른다. 


3권에서 앨빈은 검사의 필수품이자 생명과도 같은 검을 잃어버리는 대실수를 저지른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힐러' 카라는 앨빈을 위로하기는커녕, 너는 어떻게 검사가 되어가지고 그토록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릴 수 있느냐며 앨빈을 놀린다 ㅋㅋㅋ 그래도 힐러라고 수정구를 꺼내서 검의 행방을 알아보겠다고 하는데, 카라가 하는 일이 언제나 그렇듯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일이 꼬이고 만다. 이후 앨빈과 카라는 숲속에서 메두사와 나무의 정령 드리아드의 싸움에 휘말리는데, 이 에피소드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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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만화 주인공X라이벌 1
KUU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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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만화 하면 떠오르는 일종의 공식 같은 것들이 있다. 수수하고 평범한 여자 주인공과 잘생기고 인기 많은 남자 주인공. 그리고 그런 남자 주인공 옆에는 꼭 여자 주인공과 정반대의 예쁘고 당찬 성격의 여자가 있어서 평범하고 소심한 여자 주인공과 라이벌 구도를 이룬다... 


이런 식의 클리셰를 살짝 비틀어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는 만화를 만났다. 바로 쿠우 작가의 신간 <순정만화 주인공X라이벌>이다. 주인공 키무라 호노카는 수수하고 평범한 고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로, 잘생기고 인기 많은 미즈시마 아오이라는 남학생을 짝사랑하는 중이다. 그런 미즈시마의 곁에는 예쁘고 당찬 성격의 히야마 유리나가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일반적인 순정만화의 공식과 별로 다르지 않은데, 갑자기 의외의 반전이 등장한다. 미즈시마를 바라보는 키무라의 곁으로 다가오는 히야마. '저 남자는 내 남자다'라고 선전포고를 할 줄 알았더니, 웬걸 "그 녀석이 뭐가 그렇게 좋아?! 내가 훨씬 더 행복하게 해준다고. 날 선택해!!"라며 키무라에게 매달린다 ㅋㅋㅋ 


뻔하디 뻔한 순정만화인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가 이어져서 놀랍고, 미즈시마만 바라보는 키무라에게 맹렬 대시하는 히야마가 재미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편견을 내포하고 있는 기존의 만화들과 달라서 좋았고, 여자와 여자가 (남자를 사이에 두고) 갈등하고 대립하는 것 외에 다른 관계성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줘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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