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는 무섭지만 - 코로나 시대 일상의 작가들
오은 외 지음 / 보스토크프레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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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이전에도 혼자서 일하고 혼자서 생활하는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팬데믹 이후의 사회적 거리 두기가 크게 새롭거나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따금 참석했던 모임이나 일상의 쉼표로서 발을 옮겼던 전시회나 콘서트, 북토크 같은 행사들이 갑자기 생각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곳의 분위기나 소리, 향기, 온도 같은 것들이 떠오르고, 그곳에서 만나 인사를 나눴던 사람들의 얼굴이나 목소리 같은 것이 그리워진다. 그 때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사회적 인간이구나,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 ​ 


<혼자서는 무섭지만>은 오은, 조해주, 송지현, 유계영, 이주란, 임승유, 황예지, 이민지, 홍종원, 김정선, 이렇게 10인의 작가가 참여한 앤솔로지 형태의 책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전부 팬데믹 이후에 변화한 일상과 그로 인해 달라진(혹은 달라지지 않은) 감정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어떤 글은 소설 같고 어떤 글은 에세이 같아서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논픽션인지 헷갈렸는데, 책 소개 글을 보니 '에세이와 소설의 결합을 꾀했'다고 나와 있다. 내 느낌으로는 맨 처음에 실린 오은 시인님의 글은 소설 같았고, 다른 글들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소설의 형태를 띤 에세이 같았다. ​ 


오은 시인의 글 <모여서 먹는 것 '같은'>은 팬데믹 이후 재택근무가 일상이 된 직장인의 모습을 그린다. 장소가 집이라도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일하면 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메신저를 켜고 회사 사람들의 상태를 체크하면 함께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화상회의에 접속해 각자 준비한 음식을 먹으면 회식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때의 '같은' 느낌은 원래의 행위를 할 때의 느낌과 얼마나 같거나 다를까. 팬데믹 시기가 지속될 경우 팬데믹 이전의 경험과 이후의 경험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어떻게 달라질까. ​ 


송지현 작가의 글 <한낮의 잠>은 p라는 애인과 보내는 일상을 묘사한다. 팬데믹 때문에 일이 많이 줄어든 '나'는 애인인 p가 직장에서 퇴근하는 시간만을 기다린다. 퇴근한 p와 가까운 공원에서 산책을 하거나 넷플릭스를 보면서 맥주를 마시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되어간다. ​ 이주란 작가의 글 <만약 내 삶에서>는 급증하는 확진자 수 때문에 원치 않게 학원 문을 닫고 장래를 막막해 하는 '나'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 두 편의 글을 비롯해 다른 작가들의 글도 왠지 작가 자신의 이야기처럼 읽혀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 참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군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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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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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책들을 열심히 찾아 읽었지만 요즘은 남들이 많이 읽는다는 이유로 일부러 책을 읽는 일이 거의 없다. 그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저자의 책을 읽거나 믿을 만한 독자가 권해주는 책을 읽는 편이 만족도가 훨씬 높아서, 잘 모르는 다수의 취향보다는 잘 아는 소수의 취향을 따르고 있다. 


이 책은 여러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순위 1위를 찍기 전에, 좋아하는 저자이자 믿을 만한 독자인 유튜브 '겨울서점'의 운영자 김겨울 작가님의 추천 영상을 보고 알게 되었다. 과학 교양서 같아서 읽을지 말지 고민이 되었는데, '무조건 끝까지 읽어야 하는 책', '스포일러에 주의하세요' 등 다른 독자들의 후기를 읽고 단순한 과학 교양서가 아닌 것 같다는 '촉'이 왔다. 그리하여 읽게 된 이 책... 정말 대단했다. 


이 책을 쓴 룰루 밀러는 '방송계의 퓰리처상'으로 불리는 '피버디상'을 수상한 과학 전문기자로, 15년 넘게 미국 공영라디오방송국(NPR)에서 일하고 있다. 이 책은 그의 논픽션 데뷔작이자 전기, 회고록, 과학적 모험담이다. 저자는 과학자인 아버지로부터 "넌 이 세상에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거대한 우주에 비하면 너는 먼지와 같고, 장대한 인류의 역사에 비하면 너의 삶은 찰나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담은 말이었지만, 그 의미를 알기에는 당시 저자가 너무 어렸다. 


청소년기에 저자는 집단 따돌림, 우울증, 자살 시도 같은 일들을 겪으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언니의 장애와 그로 인한 가정 폭력 등의 문제도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성인이 된 후 한 남자와 연애를 하면서 비로소 안정을 찾은 듯 보였지만, 저자의 잘못으로 그와 헤어지고 그 후 몇 년을 자책하며 은둔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자는 한 권의 책을 만났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회고록 <한 남자의 나날들>이라는 책이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한국에선 널리 알려진 이름이 아니지만, 미국에선 스탠퍼드대학교 전 총장이자 저명한 생물분류학자로서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라고 한다. 물고기에 관심이 많았던 조던은 전 세계를 누비며 어류 표본을 모았는데, 당시 그가 발견해 이름을 붙인 물고기 수는 그때까지 인류에게 알려진 어류의 약 5분의 1에 달했다고 한다. 


조던이 가족의 죽음과 화재, 중상모략 등 그의 삶에 찾아온 숱한 고난들에도 불구하고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연구를 이어간 이유가 궁금했던 저자는 책을 열심히 읽었다. 책 이외의 자료를 조사하거나 관련 인물들을 찾아 인터뷰하는 일도 불사했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그동안 전혀 몰랐고 예상조차 못 했던 어떤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통해 자신이 알고 있던 기존 과학의 한계와 미국 사회의 진실을 깨닫게 된다. 나아가 어릴 적 아버지가 들려준 말의 의미와 자신이 그토록 찾아헤맨 삶의 이유도 찾게 된다. 


이 책의 마지막에 전혀 몰랐던 사람의 이름과 그의 업적이 나오는데, 그에 관한 책이나 기사 등등이 (적어도 한국에는) 아직 별로 없는 것 같아서 아쉬웠다. 미국에 그의 저작이 있다면 하루빨리 한국에 번역되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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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세상의 기쁜 말 - 당신을 살아 있게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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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힘이 세다. 우리는 학교에서 배운 수학 공식이나 영어 단어 같은 건 잊어버려도, 어릴 때 부모님이 들려준 옛날이야기나 친구가 말해준 비밀 이야기 같은 건 웬만해선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니 평소에 어떤 이야기를 듣고 읽고 말하는지가 중요하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의 이야기이다. 내가 나를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말하는지가 그 사람의 인상을 만들고 인생을 결정한다.


정혜윤의 책 <슬픈 세상의 기쁜 말>은 가난, 질병, 사고, 재난 같은 슬픈 일을 겪은 후 인생의 이야기를 새롭게 쓴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라디오 PD인 저자는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많다. 하루는 남도의 외딴 항구에서 어부를 만나 인생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하루는 뒤늦게 글자를 깨친 할머니를 만나기도 하고, 하루는 시장에서 야채를 파는 아주머니에게 인생의 교훈을 배우기도 한다. ​ 


저자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돈이 많거나 유명한 사람이 거의 없다. 오히려 태어나서 부모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나, 평생 가난에 시달리며 노동을 해왔거나, 뜻하지 않은 사고로 자식을 잃는 등 결코 유복하다고 하기 힘든 삶을 산 사람들이 더 많다. 대구 지하철 참사, 세월호 사고, 컬럼바인 총기사건, 9.11 테러 등으로 하루아침에 삶이 뒤집힌 사람들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은 이들을 잊지만, 고통은 이들을 잊지 않고 계속해서 괴롭힌다. ​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불행에 침잠하는 대신 불행으로부터 의미를 찾고 더는 불행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외로운 어부는 편지를 쓰고, 까막눈이었던 할머니는 글을 배운다. 야채 장수 아주머니는 일기를 쓰고 동화를 읽는다. 대구 지하철 참사로 딸을 잃은 엄마는 해바라기를 수놓으며 딸이 당한 일을 세상에 알린다. 이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내가 겪은 슬픔을 당신은 겪지 않기를 바랍니다." 혐오와 복수가 환영받는 시대에, 참 귀한 마음이다. ​ 


이들이 불행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불행해서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결코 불행과 그로 인한 슬픔이 자신의 삶을 대신 쓰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컬럼바인 총기사건의 가해자 딜런의 어머니 수 클리볼드는 자신의 아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상황에서도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는 알게 되었었다. "사랑만으론 부족합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야기가 이토록 넘치는 시대에, 이 책에서 읽은 이야기들만큼 좋은 이야기를 찾기 힘들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그만큼 좋은 이야기가 될 만한 삶을 사는 사람이 많지 않은 걸까. 아니면 그만큼 좋은 이야기를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은 걸까. 어느 쪽이든 나의 죄인 것 같아 마음이 괴롭다. 이 괴로움을 원동력 삼아 계속해서 이야기를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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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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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나를 만드는 것일까, 내가 삶을 만드는 것일까.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디디에 에리봉의 책 <랭스로 되돌아가다>를 읽으며 떠올린 질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노동자 계급 출신인 자신이 어떤 과정을 통해 그가 속해 있던 노동자 계급이 혐오하는 지식인 계급에 속하게 되었으며 동성애자임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는지를 서술하고 이를 학문의 차원에서 분석, 탐구한다. 


저자는 1953년 파리 교외 랭스의 노동 계급 가정에서 태어났다. 학력이 짧은 그의 부모는 공장 노동자와 가정부로 일하며 그를 키우고 가정을 건사했다. 그의 부모는 열심히 일했지만 내내 빈곤했고, 자식들을 아꼈지만 애정에 걸맞은 교육을 시켜줄 형편이 못 되었다. 그의 부모는 그가 하루빨리 학교를 졸업해 취직해서 번 돈을 집으로 가져오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공부에 대한 열망이 컸고, 결국 고향을 탈출해 파리에서 자수성가했다. 


"내게는 사회적 수치에 관해 쓰는 것보다 성적 수치에 관해 쓰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었다." (23쪽) 저자는 일찍부터 커밍아웃하고 자신이 게이인 것에 관해 글을 썼지만 노동자 계급 출신이라는 것에 관해서는 좀처럼 쓰지 않았다. 그가 속한 지식인 사회에는 노동자 계급 출신이 거의 없고, 그 자신이 더 이상 노동자 계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나면서, 저자는 자신이 게이인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자 계급 출신이라는 사실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자각했다. 나아가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 외할머니, 형의 삶을 돌아보면서, 그들이 왜 노동자 계급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는지, 한때는 좌파 정당을 옹호했던 그들이 현재는 열렬한 우파 지지자로 돌아섰는지, 그들이 왜 외국인 혐오, 성소수자 혐오 등을 하는지 등을 분석, 탐구한다. 


저자는 노동자 계급 출신이었기 때문에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사회관계자본(이른바 '아빠 찬스', '엄마 찬스')의 덕을 보지 못하고 진학과 취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 마침내 게이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사람들을 통해 언론사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저널리스트로서 경력을 쌓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노동자 계급 출신인 것보다 게이인 것이 자신의 인생에 더 큰 도움이 되었다고 오랫동안 믿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오랜만에 돌아간 고향 랭스에서, 저자는 자신을 거부했고 자신 또한 버렸던 과거의 유산이 결국 자신을 만들었음을 인정한다. 비록 그의 부모는 그가 원했던 계급과 계급적 자산을 그에게 주지 못했지만, 그가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 있도록 그에게 생명을 주고, 보살핌을 주고, 교육의 기회를 줬다. 부모로부터 받은 것은 무시하고 받지 못한 것만 헤아리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그는 통한의 눈물을 흘린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왜 그를 이해해보려고 하지 않았던가. 과거에 나는 왜 그와 대화해보려고 하지 않았던가. 사회세계의 폭력이 그를 이겼던 것처럼, 나를 이기도록 내버려두었던 것을 후회했다." (279쪽) 너무 늦기 전에 이해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라는 그의 메시지가 마음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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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싱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9
넬라 라슨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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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인의 삶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지난 주말 넷플릭스 영화 <패싱>을 보면서 나는 내가 흑인 여성의 삶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의 배경은 1920년대 뉴욕과 시카고. 백인과 유색 인종의 분리를 명시한 '짐 크로우 법'이 1960년대까지 효력을 발휘했다는 걸 알기에,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1920년대의 흑인들은 백인들보다 열악한 조건의 삶을 살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에선 달랐다. 물론 이 시대의 흑인들 다수가 백인들보다 열악한 조건의 삶을 살았던 건 맞다. 흑인들이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백인에게 폭행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것도 맞다. 하지만 극소수의 흑인들은 일부 백인들보다 안락한 삶을 살았다. <패싱>의 화자 아이린의 남편 브라이언처럼 의사, 변호사 같은 전문직 종사자가 되거나, 아이린의 옛 친구 클레어처럼 백인으로 '패싱'되는 경우에 그랬다. 


영화의 여운이 너무도 강렬해서 원작 소설을 읽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그래서 읽게 된 소설은 영화 그 이상이었다. 주인공 아이린은 인종적으로는 흑인이지만 계급적으로는 중산층에 속한다. 의사인 남편 브라이언은 아이린으로 하여금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고 안락한 생활을 하게 해준다. 아이린 역시 남편과 두 아들을 보살피고 이따금 흑인 인권 단체를 위해 봉사활동을 하는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어느 날 친정인 시카고를 방문한 아이린은 더위를 피해 들어간 호텔 카페에서 옛 친구 클레어를 만난다. 백인 남자와 흑인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클레어는 백인으로 보일 만큼 흰 피부와 누구라도 반할 만한 미모의 소유자다. 아이린은 클레어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백인 남자와 결혼했다는 말을 듣고 모순적인 감정을 느낀다. 친구이자 같은 여성으로서 클레어가 무사히 결혼 생활을 영위하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흑인 혐오자인 남편에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클레어에게 분노를 느낀다. 


그로부터 2년 후 클레어가 뉴욕으로 찾아오면서 아이린의 평온한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흑인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을 내비치는 클레어에게 아이린은 같은 흑인으로서 연민을 느끼면서도, 혹시라도 흑인 혐오자인 클레어의 남편이 클레어가 흑인들과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될까 봐 - 결국에는 클레어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들킬까 봐 - 걱정한다. 또한 누가 봐도 매력적인 클레어가 자신의 남편과 가까워질까 봐 경계하는 마음도 든다. 


<패싱>은 이런 식으로 인종 차별이 어떤 식으로 개인들의 삶을 힘들게 했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인 동시에, 같은 인종 안에서도 젠더, 계급, 섹슈얼리티 등의 면에서 때로는 다수자 또는 소수자성을 가질 수 있음을 섬세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나아가 한 사람의 인종, 젠더, 계급, 섹슈얼리티 등의 요소를 모두 제거했을 때 그는 과연 무엇인가(혹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 소설로도 읽혔다. 아이린과 클레어가 다른 입장, 다른 상황에서 만났어도 그와 같은 우정(혹은 애증)의 관계를 맺었을까. 무엇이 우리를 우리가 되게(혹은 될 수 없게) 만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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