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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22년 3월
평점 :

요즘 들어 거울을 볼 때마다 나의 전성기가 지나간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푸석해지는 피부, 늘어가는 주름, 머리카락을 들추면 보이는 새치. 이런 것들이 자꾸만 내 나이를 의식하게 하고, 이 나이 먹도록 이룬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다 리베카 솔닛의 자전적 에세이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을 읽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비롯해 다수의 명저를 남긴 작가이자 활동가인 그에게도 슬럼프란 것이 있었을까.
놀랍게도 거의 늘 그랬던 것 같다. 53세에 낸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가 베스트셀러가 되기 전까지 그는 열몇 권의 책을 썼음에도 크게 주목받지 못한 작가였다. 사적으로도 크고 작은 고통과 불안에 내내 시달렸다. 이 책은 리베카 솔닛이 유명해지기 전까지 어떤 궤적을 지나왔는지를 자세히 보여준다. 노동계급 출신 학생들이 대부분인 주립대학에 다니며 월세 200달러짜리 방에 살던 열아홉 살 청년 리베카 솔닛은 어떻게 지금의 그가 되었을까.
어른이라는 말은 법적 성년에 도달한 사람들은 모두 단일한 한 범주에 속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변해가는 땅을 여행하면서 스스로 변해가는 여행자들이다. (25쪽)
저자는 어릴 때부터 여자들에게 주어진 가장 기본적인 이야기를 거부하고 이야기를 다루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야기들이 누군가에 의해 창작된 결과물임을 알게 된 후로는 직접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 졸업 후 저널리즘 대학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전문적인 글쓰기 교육을 받았다. 생계를 위해 샌프란시스코 시립미술관에서 일했는데, 덕분에 근현대 미술 공부를 제대로 했고 논문도 썼다.
대학원 졸업 후 그는 미술잡지를 만드는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다. 미술평론을 써볼 생각도 잠깐 했지만, 그보다는 훨씬 적극적으로 사회와 연결되고 소통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기사나 리뷰보다는 자신의 주관과 경험이 더 많이 반영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프리랜서 작가로 독립, 직접 글감을 찾아가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국 서부에서 주로 활동하는 예술가들을 취재하는 글을 쓰다가, 나중에는 반전, 비폭력, 환경, 노동 등으로 주제의 범위를 넓혔다.
성장은 크는 거라고,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마치 우리가 나무인 것처럼, 높이를 키우면 다 되는 것처럼. 하지만 성장이란 작은 조각들을 모으고 그것들이 그리는 그림을 읽어냄으로써 차츰 완전해지는 과정일 때가 많다. (238쪽)
그랬던 저자가 지금은 여성에 관한 글을 쓰는 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억압과 폭력을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 자신의 주변 여성들이 가까운 남성들로부터 끊임없는 괴롭힘, 가스라이팅, 강간, 폭력 등에 시달리는 것과, 여성을 식모나 하녀, 아기 주머니, 출산 기계로 보거나 또는 남성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물체 정도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가 무관하지 않음을 간파했다.
저자가 처음부터 여성이 이 사회에서 겪는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바로 말하는 사람이었던 건 아니다. 가장인 아버지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던 가정에서 자란 그는 자신을 무시하거나 깎아내리고 방해하거나 공격하는 남자들에게 오랫동안 바로 맞대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크고 작은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데 성공한 경험이 쌓이면서 그는 여성이 말하는 것, 이야기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보다 적극적으로 글 쓰고 말하는 자리에 나서게 되었다.
폭력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영향을 받은 여자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남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8쪽)
저자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쓴 서문에 이런 문장을 썼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의 원래 의미는 "이 구조는 개개인의 개별적 삶보다 훨씬 더 큰 것이며, 여기에 대해 개인적 해법은 있을 수 없다."라는 것이라고. (9쪽) 저자가 개인적, 개별적으로 겪은 억압과 폭력은 저자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돈을 더 많이 벌고, 부자 동네로 이사 간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분명 굴레이고 족쇄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소수자의 시선으로 다수자를, 주변부의 위치에서 중심부를 관찰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저자에게 지난 삶은 바로 그러한 소수자-주변부의 관점을 익히고 벼리는 과정이었고, 그 과정이 있었기에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비롯한 다수의 책들을 쓸 수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도 저자의 나이가 되었을 때, 지난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작가-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