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1
정소현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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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현 작가의 책들을 열심히 읽고 있는 요즘이다. '책들'이라고 해도 세 권뿐이라서(소설집 두 권과 중편 한 권), 한 권만 더 읽으면 전작을 다 읽게 되니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슬프다) 


2020년 현대문학 핀 시리즈로 출간된 <가해자들>은 아파트 주민들 간의 층간 소음 문제를 다룬다. 정소현 작가의 소설답게,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면서도 그 방식이 매우 공포스럽다. 전업주부인 '나'는 언제부터인가 층간 소음에 시달린다. 텔레비전을 크게 틀어 놓거나 노래를 부르며 소음을 떨쳐보려고 해도 소용없고, 남편과 딸에게 시끄럽지 않느냐고 물으면 너무 민감한 거 아니냐는 타박이 돌아올 뿐이다.


'나'는 참다 못해 소음의 진원지로 추측되는 위층에 사는 사람들에게 항의한다. 하지만 위층 사람들은 그 시간에 집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층간 소음을 막기 위해 바닥에 매트를 깔고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등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나'는 믿지 않고, 이웃들은 계속해서 분란을 일으키는 '나'를 점점 더 미워한다. '나'의 위층, 아래층에 이어 옆집 사람까지. 종국에는 '나'의 딸조차 '나' 때문에 이웃들로부터 배척당하고 고립되었다며 '나'를 미워한다. 


조금씩 드러나는 '나'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나'를 괴롭히는 건 층간 소음이 아니라 층간 소음에 의해 후벼파지는 '나'의 상처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이혼한 전적이 있고 아이까지 딸린 남자와 결혼했는데도 그 시어머니로부터 '나는 너 안 믿는다'라는 말을 들은 여자. 산후조리를 잘 못해서 산후풍에 걸렸는데도 남편에게 꾀병 환자 취급 당하는 여자. 그런 여자가 앓고 있는 마음의 병이, 층간 소음이라는 형태로 나타나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주변 이웃들을 힘들게 한 건 아닐까.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도 종종 층간 소음 문제가 일어나는데, 그 때마다 이 소설이 생각날 것 같다. 층간 소음을 들었다는 사람의 귀에 들린 게 정말 층간 소음이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남성과 여성이 함께 거주하는 공간인데도 주로 여성들이 가해자/피해자라는 점에서, 남성보다 여성에게 훨씬 더 가혹한 사회와 그렇기에 더욱 예민할 수 밖에 없는 여성들의 현실을 은유했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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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
정세랑 외 지음 / 창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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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인십색(十人十色). 생각이나 취향이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는 뜻의 한자성어다. 생각이나 취향이 사람마다 얼마나 다른지,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느꼈다. "나이와 국적, 시대를 뛰어넘어 당신이 '언니'로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에 20명의 여성 창작자가 답했는데, 대상인 언니가 속한 시대와 국적은 물론이고, 편지의 형식과 내용, 편지가 담고 있는 문제 의식과 메시지가 다양하고 다채롭다.


가령 뮤지션이자 영화감독, 소설가인 이랑은 재일조선인 예술가 한동현에게 편지를 쓰면서, '언니' 덕분에 '조선적'이 무엇인지 처음 알게 되었고,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국적을 바꿔야 하는 삶이 있다는 것과 국적을 바꾸지 않아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찾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식물세밀화가 이소영은 100여 년 전 <한국의 들꽃과 전설>이라는 책을 쓴 플로렌스 헤들스톤 크레인에게 편지를 쓰면서, 한국의 식물학계에 끼치는 영향력이 상당한데도 그가 여자라는 이유로 '선생'이 아니라 '여사'라고 불리는 현실을 전한다. 


언니라는 말이 낯간지러우니 '형님'으로 부르겠다는 이반지하, 그동안 수많은 언니들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이제 자신이 좋은 언니가 될 차례라고 말하는 오지은, '남자의 적은 남자'인 세상이 지겨우니 '여자의 적이 여자'인 세상을 만들자는 정희진의 글에서도 각각의 캐릭터가 여실히 드러나 재미있었다. 이토록 개성 있고 똑똑하고 재미있는 여성들이 만들어갈 세계가 궁금하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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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 비용 데버라 리비 자전적 에세이 3부작
데버라 리비 지음, 이예원 옮김, 백수린 후기 / 플레이타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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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도 활발하게 활동 중인 모 뮤지션이 팬으로부터 "왜 매문을 하세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매문이라. 그의 음악을 너무 사랑해서, 그가 글쓰기보다 음악에 집중해 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런 말을 했으리라고 짐작하지만,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들을 동경하는 나로서는 그 말이 좋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매문이 어때서, 글을 써서 먹고 사는 게 뭐가 나빠, 라고 항변하고 싶은 마음이었달까. 


영국의 작가 데버라 리비의 산문집 <살림 비용>은 제목부터 저자가 먹고 살기 위해 이 글을 썼음을 드러낸다. 계기는 이혼이다. 이혼 전에도 저자는 작가였지만, 결혼을 했고 생계를 책임지는 남편이 있기 때문에 글쓰기로 먹고 산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20년 간의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두 딸과 함께 허름한 아파트로 이사한 후, 저자는 생계를 위해 전보다 긴 시간을 글쓰기 노동에 할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쓰는 글이 곧 가족의 '살림 비용'이 되었기 때문이다. 


혼자서 조용히 집필에만 몰두할 공간이 없어서 남의 집 헛간을 빌려야 할 정도의 형편이었지만, 결혼했을 때에 비하면 훨씬 여유롭고 자유로워서 좋았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 정확히는 '가부장제'를 지키기 위해 - 원하지 않는 역할을 "연기"하고 "손수 짓고 꾸린 가정집에서 정작 스스로는 겉도는 느낌과 대면"했던 시절에 비하면, 가난하고 초라해도 누구누구의 아내나 엄마로 불리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고, 원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지금이 훨씬 낫다고 느꼈다.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어머니의 병환과 죽음이라는 대사건을 겪는다. 평생 좋은 아내였고 엄마였던 어머니. 하지만 그는 과연 행복했을까. 여자이기 전에 인간으로서, 스스로 살고 싶었던 삶을 마음껏 살다 갔을까. 함께 실린 백수린 작가의 에세이도 좋다. 여자 혼자 산다는 이유로 멸시하는 이웃 남자와, 그와 대비되는 따뜻하고 친절한 이웃 여자들. 착한 남자들은 너무 적고 착한 여자들은 너무 많은 이 불균형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이 비용은 대체 누가 치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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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적 힘의 비밀 - 여성 운동 초월
앨리슨 벡델 지음, 안서진 옮김 / 움직씨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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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슨 벡델의 책을 읽을 때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무슨 용기? 나의 과거, 나의 상처, 나의 단점, 나의 불안, 나의 우울, 나의 실패, 나의 오만, 나의 모든 것과 대면할 용기. 


<펀 홈>, <당신 엄마 맞아?>의 뒤를 잇는 이 책은 저자가 60여 년 동안 해왔던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려서부터 '여자애' 답지 않게 활달했던 저자는 십 대 시절 혼자서도 달리기, 스키, 등산 등을 즐겨 했고, 성인이 된 후에는 무술, 요가, 사이클링 등에 빠져 살았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운동에 빠져 살게 했을까. 표면적인 이유는 건강해지기 위해서, 보기 좋은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였지만, 근원적인 이유는 살아있다고 느끼고 싶어서,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잊고 싶어서였다. 


이 사실을 깨달은 후에는 육체적 단련뿐만 아니라 정신적 수련도 병행했다.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와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를 읽고, 초월주의자 마거릿 풀러와 랄프 왈도 에머슨, 소로우를 공부했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 <다르마 행려>를 탐독하고, 케루악이 심취했던 동양 철학과 불교의 세계에도 발을 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과 우울이 떠나지 않고, 불면과 일 중독이 심해져서 술에 의존하거나 관계를 망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육십을 넘긴 지금, 저자는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초인적 힘의 비밀'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다고 고백한다. 초월할 것은 '초월할 것이 있다'는 생각뿐이다. 인간은 결코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죽음이 야기하는 고통과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하지만 자연을 사랑하고, 우리 자신이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과정이 죽음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삶이 한결 가벼워지고 편안해진다. 이걸 깨닫기까지의 과정을 끈질기게 회상하고 멋진 만화로 표현해 준 저자의 노고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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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6-23 1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뭔가 당연한 결론으로 나아가는데 그 결론을 내는 과정이 특별할것 같다는 느낌이네요. 저도 보고싶은 책입니다. ^^
 
방금 떠나온 세계
김초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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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즐겨 듣는 팟캐스트 진행자가 "영혼은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영혼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 또한 영혼의 존재를 눈으로 직접 본 적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영혼이 없다면 우리가 부모로부터 유전되지 않은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이성으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나 육감 등의 정신작용을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고 덧붙였다. 과연 어떨까. 


마침 지난 밤에 읽은 김초엽 작가의 소설집 <방금 떠나온 세계>에 비슷한 내용의 소설이 있었다. <캐빈 방정식>이라는 제목의 단편인데, 화자인 '현지'는 전도유망한 물리학자인 언니 '현화'로부터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고 과학적, 합리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다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그랬던 언니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살게 되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더니 현지에게 대뜸 '울산 관람차 귀신'에 대해 조사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귀신 이야기는 전부 가짜라며 듣는 것도 싫어했던 언니가 귀신에 대해 조사해달라고 하다니. 현지는 의아해 하면서도 하나뿐인 언니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어서 열심히 조사한다. 과연 관람차 귀신은 진짜일까 아닐까... 자매가 힘을 합쳐 괴담의 진상을 파헤치는 이야기라서 좋기도 했지만,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믿었던 언니와 그런 언니를 '이해할 수 없었던' 동생이 귀신이라는 '이해하기 힘든' 존재를 통해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기묘하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결국 영혼이나 귀신 같은 건, (이해하기 힘든)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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