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ep the sunshine. 햇살을 간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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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모네이드 할머니
현이랑 지음 / 황금가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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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추리 소설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가 창조한 탐정 '미스 마플(제인 마플)'은 평범한 할머니의 모습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으면서 사건 현장을 조사하고 용의자들을 심문하며 범인을 찾아낸다. 현이랑 작가의 소설 <레모네이드 할머니>의 주인공도 바로 그런 할머니 탐정이다. 소설의 배경은 거액의 돈을 낸 노인들만 입소할 수 있는 최고급 치매 노인 요양병원이다. 주인공 레모네이드 할머니는 요양병원의 땅 주인이라는 소문이 파다한, 괴팍한 성격의 초기 치매 환자다. 


'모든 일이 매끄럽게 처리되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이곳에서 어느 날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상주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노인인 이곳에서 갓 태어난 아기의 시체가 비닐에 싸여 버려진 상태로 발견된 것이다. 병원 측은 병원의 이미지가 훼손될 것을 염려해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는데, 우연히 그 현장을 목격한 레모네이드 할머니가 범인 찾기에 나선다. 때마침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는 엄마를 보러 온 여섯 살 소년 '꼬마'가 할머니의 범인 찾기에 합세한다. 과연 할머니와 꼬마는 무사히 범인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이 작품은 초기 치매 환자인 할머니와 어린 소년이 콤비를 이루어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 소설인 한편, 비단 요양병원뿐 아니라 한국 사회 곳곳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고발, 폭로하는 성격의 사회 소설이기도 하다. 같은 노인이라도 돈이 있어야 대접받고, 돈 있으면 돈만 믿고 사람들한테 갑질하고, 갑질 당해도 돈 때문에 항의 한 번 못하고, 항의하면 직장에서 쫓겨나고, 겉으로는 착한 척 깨끗한 척하는 사람이 뒤로는 아랫사람들에게 갑질하고 범죄와도 연결되어 있는 모습까지 한국 사회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나서 오랫동안 뒷맛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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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섬 사비의 기묘한 탄도학 Untold Originals (언톨드 오리지널스)
배명훈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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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 작가의 <타워>를 읽었을 때 인상적이었던 것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국가가 647층의 초고층 빌딩이라는 것이었다. 국가의 형태가 수평이 아닌 수직일 때 벌어질 법한 일을 상상하다니. 발상이 기발하고 놀랍다는 생각을 하면서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배명훈 작가의 신작 <우주섬 사비의 기묘한 탄도학>도 비슷하다. 


소설의 배경은 화성 인근의 스페이스 콜로니 '사비'다. 사비는 휴지심 모양을 닮은 원통형의 행성으로, 사람들은 휴지심 바깥쪽이 아니라 안쪽에서 산다. 당연히 지구와 다르게 중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총을 쏘면 총알이 포물선을 그리지 않고 휘어지며 떨어진다. 이런 사비에 '이초록'이 온다. 사비예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친구 '김구름'의 꿈을 훔쳐서 사비에 온 초록은, (대구대학교가 대구에 없듯이) 사비예술대학은 사비에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좌절한다.


이후 이초록은 사비에서 '서운관'이라는 일종의 점집을 운영하는 고모가 '뒤를 봐줘서' 주소국장에 취임한다. 그 대가로 공직에서 얻는 정보를 고모에게 제공하기로 한 초록은, 일견 평화로운 신생 국가처럼 보이는 사비가 실은 국가 초기에 주인 없는 이권을 노리고 모여든 각종 세력들이 암약 중인 상태라는 걸 알게 된다. 그러다 거리 곳곳에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기이한 과녁을 발견하는데, 전술했듯이 사비는 원통형 모양의 행성이기 때문에 표적을 정확히 조준해서 제대로 총을 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도 과감히 총을 겨누는 이 자(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휴지심 모양의 행성이라니. <타워>의 설정만큼이나 기발하고 강렬한 발상에 혹하지 않을 수 없었고, 혹한 만큼 빠른 속도로 즐겁게 읽어내려갔다. 무법 상태나 마찬가지인 신생 국가에서 군대, 경찰, 폭력 조직 등 다양한 세력들이 갈등을 빚고 충돌하는 이야기가 좀 더 구체적으로 전개되었어도 재미있을 것 같다. <대부>의 스페이스 오페라 버전이랄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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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은퇴합니다 소설Q
박서련 지음 / 창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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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때문에 일자리를 잃는 바람에 신용카드 빚을 갚을 수 없게 된 '나'는 죽기로 결심하고 한강 다리 위에 선다. 그런 '나' 앞에 천사처럼 하얀 옷을 입은 한 여성이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마법소녀가 될 운명이에요." 자신을 '예언의 마법소녀'라고 밝힌 여자의 이름은 아로아. 아로아에 따르면 '나'는 지구 멸망을 막기 위해 꼭 필요한 사상 최강의 마법소녀 - '시간의 마법소녀'라는데... 


마법이나 지구 멸망 같은 건 모르지만, 나에게 숨겨진 능력이 있고 그 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감동한 '나'는 자신의 운명을 아로아에게 맡겨 보기로 한다. 마법소녀라는 사실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주목하고 잘하면 돈도 벌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나'는, 마치 하룻밤 사이에 스타가 된 사람처럼 얼떨떨하면서도 우쭐한 기분을 느낀다. 그런 '나'가 마법소녀로서 승승장구하는 이야기, 일 줄 알았는데 '반전'이 있으니 꼭 직접 읽어보시길.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 놓인 20대 여성이 주인공인 한국 소설은 전에도 많았지만, 이를 마법소녀라는 장르물로 풀어낸 경우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보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각성이나 마법 도구, 변신 주문 등 마법소녀물에서 흔하게 나오는 소재들을 재치 있게 활용한 점도 좋았다. 전체적으로 발랄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중간중간에 마법소녀물의 의의와 한계 등을 짚고 넘어가는 점이 좋았다. 가령 이런 대목. "가장 약한 존재들에게 가장 필요한 힘이 부여되기 때문에 소녀들에게만 마법의 힘이 부여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 그게 내 생각이에요." (120쪽) 


마법소녀물이라는 장르를 차용해 여성의 노동과 연대, 협력에 대해 이야기한 점도 좋았다. 마법소녀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라도 할 수 있고, 여성이 독점하며, 미성년인 마법소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전마협(전국마법소녀협동조합)이 생겼다는 설정은, 현실의 여성들이 연령 제한, 성별 제한 때문에 취업은 물론이고 아르바이트조차 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며, 미성년자들 중에는 아무런 법적, 사회적 보호 없이 일하는 경우가 아직도 허다하다는 것을 풍자,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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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력 시대 - 재야생화되는 지구에서 생존을 다시 상상하다
제러미 리프킨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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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것은 없다. 누구나 알고 있는 진리이지만, 최근 몇 년 동안 팬데믹을 겪으면서 이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을 깨달은 사람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팬데믹을 단순한 전염병이 아니라, 이제까지 인류가 성장 혹은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배출해온 쓰레기를 비롯한 각종 오염원들을 지구 생태계가 스스로 정화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신호로 바라보는 관점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인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경제 사회 사상가 제러미 리프킨의 신간 <회복력 시대>는 팬데믹 이후 인류의 목표가 무엇이 되어야 할지를 숙고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2022년에 출간되었지만, 저자 후기에 따르면 2013년에 이 책의 주요 주제에 대한 조사를 시작해 총 8년에 걸쳐 집필했다고 한다. 이제까지 <소유의 종말>, <한계비용 제로 사회>, <글로벌 그린 뉴딜> 등을 발표하며 기존 경제 모델의 한계와 새로운 발전 모델의 필요성을 주창해온 저자의 예측력이 이번 책에서도 발휘된 것으로 보인다. 


"진보의 시대는 사실상 이미 끝났고 적절한 사후 평가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모든 곳에서 더욱 결연한 목소리로 점점 크게 울려 펴지는 새로운 내러티브는 우리 인간 종이 우리의 세계관에서부터 경제에 대한 이해, 거버넌스의 유형,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지구라는 행성과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11쪽) 


저자에 따르면 그동안의 경제 성장 모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이제 '회복력(resilience)'을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삼아야 한다. 기존의 산업 문명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가치는 '효율성'이었다. 효율성을 중시하는 산업 문명은 인류에게 유례가 없는 번영과 풍요를 가져다 주었지만, 자원 고갈과 환경 오염이라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고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영속해야 할 생명체라는 사고방식은, 수많은 다른 생물종의 멸종과 그로 인한 생태계 파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인류의 능력은 무한하며 인류가 자연을 완전히 정복했다는 생각은 착각이라는 것이 이번 팬데믹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이제 인류는 정복이 아닌 '적응'의 패러다임으로 다음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다행히 적응은 인간에게 아주 낯선 개념이 아니다. 인간의 몸은 수많은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유생생물, 고세균, 균류 등이 공존하는 하나의 생태계와도 같다. 인간의 몸은 섭취하는 음식이나 약물 외에도 24시간, 태음, 계절, 265일 등의 주기 리듬으로부터 영향받는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인간의 몸을 하나의 생태계, 하나의 행성, 하나의 우주로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사람의 몸, 다른 생명체, 다른 생태계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확장된다면, 인류의 미래가 지금보다 밝을 거라고 예측한다. 사회적, 정치적으로는 일국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이익만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인접 국가들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이익, 멀리는 우주 전체와 미래 세대를 포함하는 정책 결정과 판단이 이루어진다면 분쟁 가능성이 줄어들고 분쟁으로 인한 자원 고갈 및 생태계 파괴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몸에 대한 저자의 사유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문제들을 풀 수 있는 열쇠로도 보인다. 공교롭게도 이태원 참사, 봉화 광산 붕괴 사고, 제조업 노동자 사망 사고 등 최근 한국의 언론 매체를 장식하고 있는 사건 사고들의 중심에는 몸이 있다. 만약 정부와 기업이 국민과 노동자의 몸을 자신들의 몸처럼 여기고 소중히 대했다면 과연 이런 일들이 벌어졌을까. (다른) "생명에 대한 심오한 공감적 공명의 느낌" 없이는 인류 앞에 놓인 거대한 투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저자의 말이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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