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가는 마음
윤성희 지음 / 창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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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에 비해 세상이 변하는 속도가 몇십 배는 빨라졌다고 느낀다. 예전 같으면 한두 달은 화제가 되었을 뉴스가 한 주, 짧게는 며칠이면 옛 이야기가 된다. 긴 동영상을 보는 게 힘들어서 몇배속으로 본다는 사람도 많다. 영화, 드라마 대신 숏츠에 중독된 사람도 허다하다. 책도 느리게 천천히 읽히는 것보다 빠르게 술술 읽히는 것이 선호된다. 나 또한 이른바 '페이지 터너'라고 불리는 책장이 빠르게 넘어가는 책이 끌릴 때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호흡보다 천천히 읽게 되고 한 문장 한 문장에 눈이 오래 머무는 책을 선호한다. 윤성희의 소설집 <느리게 가는 마음>이 그렇다.


이 책에는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평범하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는 학교에 가기 싫고, 직장에 나가는 어른은 직장에 가기 싫다. 식당 주인은 식당이 망하면 손님들은 어디서 밥을 먹을지 걱정이고, 식당 손님들은 식당이 망하면 사장은 어떻게 먹고 살지 걱정이다. 평범한 사람들이다 보니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 봤자 크게 특별하지 않다. 기껏해야 양말의 왼쪽 오른쪽을 바꿔 신거나, 평소에는 먹지 않았던 메뉴에 도전해 보는 정도. 호기롭게 가출을 감행하고는 예전에 살았던 집에 가보거나, 사람들이 묻어 놓고 잊어버린 타임캡슐을 찾아주는 정도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죽음까지 대수롭지 않은 건 아니다.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에는 모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데, 그래서 무겁고 어둡고 슬프고 절망적인 분위기인 건 아니고 오히려 가볍고 환하고 담담하고 어떻게 보면 희망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과 대칭을 이루듯, 생일에 관한 이야기도 빈번하게 나온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생일이란, 뭔가 대단한 일을 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태어난 날이니까 다른 날과는 다르게 보내고 싶은 날 아닌가. 딱 그 정도의 마음이 사람으로 하여금 오늘을 살게 하고 내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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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집 2 - 11개의 평면도 우케쓰 이상한 시리즈
우케쓰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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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보다 나은 속편은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우케쓰의 소설 <이상한 집>은 예외다. <이상한 집> 1권이 그럭저럭 읽어볼 만하다면 <이상한 집> 2권은 무조건 읽어야 한다. 근데 <이상한 집> 1권을 읽어야 <이상한 집> 2권이 왜,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기 때문에 <이상한 집> 1권도 읽어야 한다. 요는 두 권 다 읽어보시라는 거... (광고 아님. 광고면 좋겠다.)


오컬트 전문 작가 우케쓰는 2년 전 출간한 <이상한 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전국의 독자들로부터 각지의 이상한 집에 관한 제보를 받는다. 초반에는 1권과 마찬가지로 제보를 한 사람을 만나서 사연을 듣고 집에 관해 추리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몇 개의 이야기가 나온 다음에는 겹치는 인물이나 지명, 사건 등이 보이고, 최종적으로는 총 열한 개의 이야기가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독립된 것처럼 보였던 이야기들이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연결된다는 점은 개별적인 공간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실은 연결된 하나의 공간이기도 한 집이라는 개념과 닮았다. 


소설의 중심에 있는 사건의 전모를 알고 나면, 집이란 단순히 사람들이 먹고 자는 공간이 아니라 작게는 개인이나 가족, 크게는 한 사회 또는 한 국가의 목표나 의지, 욕망이나 원념이 투영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읽은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관하여>에서도 아파트, 요양원, 종교 시설 같은 공간이 사건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는데, 이런 장소들은 한국에서도 (여러 의미로) 무섭고 이상한 공간 아닌가. 한국판 <이상한 집>이 나온다면 이 공간들이 빠지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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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집 우케쓰 이상한 시리즈
우케쓰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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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초 일본 베스트셀러 2관왕을 차지한 작품이라고 한다. 사실 나는 이런 문구에 혹해서 이 소설을 읽은 건 아니고, 매주 월요일마다 즐겨 듣고 있는 팟캐스트 <이다혜의 리딩 케미스트리>에서 언젠가 이 소설에 대한 소개를 들었는데 안 읽고는 배길 수 없었다(역시 다혜리님 영업력 최고!). 읽어보니 과연 재미있었는데 분량이 적어서 아쉽다고 생각하다 2권도 있기에 읽었는데 2권이 끝내준다. 개인적으로 이제까지 읽은 호러 미스터리 장르 소설 중에 최고였다. 근데 그 책을 읽으려면 1권도 읽어보는 것이 좋으니 1권부터 읽고 2권을 읽으시라...


소설은 오컬트 전문 작가 우케쓰가 도쿄에 집을 마련하려는 지인에게 상담을 요청 받으면서 시작된다(소설의 화자=저자인 소설이 요즘 일본 호러 미스터리 장르에서 인기인가 보다. 최근에 읽은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관하여>도 그렇고.). 지인은 매입하려고 하는 이층집의 평면도를 보여주면서 이상한 점을 지적한다. 일리 있는 지적이라고 생각한 우케쓰는 건축설계사로 일하는 지인 구리하라에게 평면도를 보여주며 전문적인 소견을 청한다. 그러자 구리하라는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이상한 점을 더 지적하며 일련의 가설을 내놓는데...


이후의 내용은 우케쓰가 이 집에 관한 사정을 조사하면서 구리하라의 가설을 확인하는 과정으로 채워진다. 우케쓰는 직접 집을 방문하거나 집이 있는 동네를 조사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운영하는 동영상 채널과 웹사이트 등을 통해 제보를 받기도 하는데, 이런 식으로 소설 속 '탐정'이 인터넷, SNS라는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점이 요즘 일본 호러 미스터리 장르의 트렌드인가 싶다. 소설의 결말, 즉 사건의 실체를 알고 나면 새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사건의 내용보다는 구성, 전개 방식의 기발함, 신선함을 겨루는(?) 것 또한 최근에 주목 받는 일본 호러 미스터리 장르 작가들의 특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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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세스지 지음, 전선영 옮김 / 반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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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조와 박쥐>를 읽으려고 밀리의 서재에 가입한 김에, 전부터 읽고 싶었던 세스지의 소설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를 읽었다. 이 소설은 일본의 소설 창작 사이트 연재 당시 SNS에서 큰 화제를 불러 일으키며 만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읽어보니 과연 화제를 모을 만하다. 호러 소설답게 내용이 무서운 건 당연하고, 소설의 구성이나 전개 방식이 SNS에 친숙한 요즘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 당기기에 적합하다.


소설은 세스지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남자는 오컬트 잡지와 괴담 잡지에 글을 쓰거나, 라디오나 지방 방송의 괴담 프로그램의 구성을 맡기도 하면서 먹고 살고 있다. 그에게는 출판사에서 오컬트 잡지 편집자로 일하는 오자와라는 지인이 있는데, 이 오자와가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와 관련된 괴담을 수집, 조사하다가 행방불명 된다. 소설은 오자와가 수집, 조사 중이던 괴담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각각의 괴담이 날것 그대로의 투고나 자료의 형태로 제시되어 마치 이 모든 이야기가 허구가 아니라 실제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식으로 허구의 이야기를 실제처럼 보이게 연출하는 것을 페이크 다큐멘터리 또는 모큐멘터리라고 부른다고.)


문제의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가 배경인 괴담 하나하나도 무섭다. 여자가 사라졌다, 사라진 여자가 어두운 밤길에 나타났다, 이사간 집에 귀신이 나온다, 윗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거리 곳곳에 수상한 스티커가 붙어 있다 등등 각각의 괴담을 요약하면 별것 아닌 것 같고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 같은데, 이 모든 이야기의 배후에 있는 '어떤 사건'에 대해 알고 나면 별것 아닌 이야기가 별것 아닌 게 아니고, 이런 이야기를 어디서 많이 봤다는 사실이 충격적으로 느껴진다.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만화와 영화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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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와 박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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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공범>의 주인공 고다이 형사가 <백조의 박쥐>에도 나온다고 해서 뒤늦게 읽기 시작했다. <가공범>과 마찬가지로 초반 전개가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도쿄의 공사 중인 도로변에서 시체 한 구가 발견된다. 피해자는 변호사 시라이시 겐스케. 그의 죽음을 알리자 그의 가족과 의뢰인들은 그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리가 없다고 말한다. 사건을 맡은 고다이 형사는 범인을 잡기가 쉽지 않겠다고 예상하는데, 얼마 안 있어 한 남자가 자신이 시라이시 겐스케를 죽인 범인이라고 자백한다. 언론에 공개하지 않은 사건의 세부 사항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경찰은 그를 진범으로 보지만 고다이의 생각은 다르다. 


시라이시를 죽인 범인이라고 자백한 남자 구라기 다쓰로의 아들인 가즈마는 은퇴 후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는 줄 알았던 아버지가 살인을 저질렀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피해자인 시라이시의 외동딸 미레이 또한 언론이 보도하는 사건 속 아버지의 모습과 자신이 오랫동안 알고 지낸 아버지의 모습이 다르다고 느낀다. 가즈마와 미레이는 각자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이유로 이 사건에 휘말려 한 사람은 살인자, 다른 한 사람은 피해자가 되었는지 알아내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가즈마와 미레이, 그리고 고다이는 이 사건과 33년 전 아이치 현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다.


<백조와 박쥐>를 읽기 전에 <가공범>과 <숙명>을 읽어서 그런지 두 소설과의 유사점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일단 세 소설 모두 현재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단서가 과거에 있고, 과거의 사건에 중심에는 출생의 비밀이 있다. 세 소설 모두 남성 캐릭터들이 (모르는 사람의 죄를 덮어줄 정도로) 인정도 많고 자식 사랑이 대단하다. 비슷한 연배의 다른 일본 작가들에 비해 '핏줄'이나 '혈통' 같은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점도 인상적이다. 가족 간에도 개인주의가 강한 일본 소설답지 않은 느낌이, 한국에서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 많은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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