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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과 마법사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5년 5월
평점 :

조지 R.R. 마틴의 소설이 원작인 드라마 <왕좌의 게임>은 한 치 앞을 예상하기 힘든 이야기 전개와 영화 같은 스케일, 압도적인 비주얼로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나 또한 이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았는데, 이 드라마에서 좋았던 점 하나는 멋진 여성 캐릭터들이 대거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캐릭터는 아리아와 브리엔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여성은 기사가 될 수 없다는 편견에 굴하지 않고 어려서부터 기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수행해 스스로 운명을 개척했다는 점이다. <왕좌의 게임> 같은 서양 중세 판타지 소설 외에 다른 장르에서도 이렇게 멋진 여성 캐릭터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마침내 그런 소설을 만났다. 배명훈 작가의 신작 장편 소설 <기병과 마법사>이다.
<기병과 마법사>는 한반도에 실제로 있었던 건 아니지만 있었음직한 가상의 국가 사라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영윤해는 폭정을 일삼고 있는 왕의 조카로, 왕의 눈에 띄면 안 된다는 아버지의 엄명에 따라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아 왔다. 더 이상 혼인을 미룰 수 없는 나이가 된 윤해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종마금이라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기로 하는데, 윤해가 마음에 들지 않은 종마금은 윤해를 살해해 혼인을 없던 일로 만들려고 한다. 종마금이 윤해를 살해하려는 순간 윤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그 일을 계기로 윤해는 수도인 소라울에서 쫓겨나 북방 지역 술름으로 사실상 유배를 가게 된다. 술름에서 윤해는 이제까지 만나온 남자들과 전혀 다른 초원의 기병 다르나킨을 만나고, 그와 함께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로 결심한다.
소설 초반에 윤해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인 상황에 놓여 있다. 숙부인 왕은 하루가 멀다 하고 피바람을 일으키고, 왕의 형인 아버지는 동생인 왕을 말리기는커녕 자기 몸 지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눈에 띄면 안 된다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십몇 년째 외출도 삼가고 집에서 책만 읽어서 머리는 똑똑한데 쓸 곳은 없다. 이 와중에 혼담이 들어왔는데 혼인 상대인 남자는 요즘 말로 하면 사이코패스에 여성혐오자이고, 급기야 윤해는 불안한 심리를 반영한 악몽에 시달린다. 윤해의 불운은 종마금에게 살해를 당할 상황에 놓이면서 정점을 찍는데, 이때 윤해는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힘을 발견하게 되고 이후 윤해의 인생은 그 힘의 정체를 밝히고 의미를 알아내 세상을 구하고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까지 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윤해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한 비결 중 하나가 마법이라면, 다른 하나는 어릴 때부터 익힌 전쟁술이다. 소설 초반에 윤해는 아버지로부터 판과 기물 없이 말[言]로만 두는 장기를 배운다. 이 과정에서 윤해는 자기도 모르게 진법, 축성술, 둔전, 병기 등 전쟁을 지휘하는 장군이 배워야 할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익혔다. 이렇게 익힌 지식과 기술은 훗날 술름으로 가게 된 윤해가 그곳의 기병들과 거문담을 비롯한 지형지물을 이용해 적을 막고 전쟁에서 이기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된다. <왕좌의 게임>의 아리아와 브리엔은 기사로서 전투를 수행해도 장군이나 지휘관 역할을 하지는 못했는데, 윤해는 스스로 잔 다르크도 되고 제갈공명도 되고 선덕여왕도 되니 너무 멋있다. 이후의 이야기도 읽고 싶은 건 나만의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