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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욕 - 바른 욕망
아사이 료 지음, 민경욱 옮김 / 리드비 / 2024년 3월
평점 :

욕망에 정답이 있을까. 없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그런지는 의문이다. 가까운 예로 식욕에 대해서만 생각해 봐도 어떤 사람은 한 끼에 몇십 인분을 먹어 치우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기껏 먹은 음식을 살찐다고 토한다. 같은 음식을 여러 번 먹어도 질리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맛있어도 한 번 이상은 안 먹는 사람도 있다. 아사이 료의 장편소설 <정욕>은 제목 때문에 성욕과 관련해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성욕보다 훨씬 더 넓은 개념의 욕망을 아우르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크게 세 사람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검사인 히로키에게는 등교 거부 중인 초등학생 아들이 있다. 아내는 아들을 억지로 학교에 보내는 게 옳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하지만, "인간에게는 당연히 걸어야 할 평범한 길이 있다."라는 교육을 받아 온 히로키는 아직 초등학생인데 벌써부터 '평범한 길'에서 벗어나 있는 아들이 걱정스럽고 못마땅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침구 전문점에서 일하는 나쓰키는 함께 사는 부모님은 물론이고 동네에서 마주치는 동창들이나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다른 가게 직원들이 자신을 볼 때마다 연애하는 사람은 있는지, 결혼 생각은 없는지 물어오는 것이 불쾌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또래의 이성을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그들에게 위화감을 느낄수록 나쓰키는 오랫동안 감춰온 자기 안의 욕망이 커지는 것을 느낀다.
대학생인 야에코는 어떤 사건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남자와 몸이 닿기만 해도 거부 반응이 일어난다. 당연하게도 이제까지 남자와 연애를 해본 적 없고 남자 연예인에게 호감을 느껴본 적조차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다이야의 퍼포먼스를 보고 첫눈에 반해 살면서 처음으로 남자에게 안기고 싶다는 감정을 느낀다. 결국 야에코는 다이야가 참가하는 공연의 스태프가 되어 그에게 접근할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다이야는 야에코를 비롯해 어느 누구에게도 쉽게 곁을 주지 않는다.
히로키, 나쓰키, 야에코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설이지만, 이 소설의 핵심에 있는 어떤 욕망을 지닌 인물들은 이들이 아니라 다른 인물들이다. 문제의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도 되었을 텐데, 그들의 주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히로키, 나쓰키, 야에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 이유는 뭘까. 내 생각에 작가가 궁극적으로 독자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문제가 된 욕망 그 자체가 아니라 욕망을 둘러싼 또 다른 욕망(들)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직접적인 근거는 나쓰키와 야에코다. 훗날 나쓰키의 남편이 되는 요시미치와 야에코가 좋아하는 다이야는 비슷한 욕망을 지니고 있다. 그런 남자들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나쓰키와 야에코는 같은 처지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나쓰키는 요시미치에게 성적인 욕망을 느끼지는 않고 야에코는 다이야에게 성적인 욕망을 느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나쓰키와 야에코 모두 요시미치와 다이야를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그들의 편이 되어 주고 싶은 욕망이 있다. 각각 서로 간에 성욕을 느끼지 않아도 부부일 수 있고, 남자와 여자 사이에 성욕 아닌 다른 욕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 소설은 현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정답으로 여겨지는 욕망[正欲]'이 과연 정답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가령 이 소설에는 성관계를 원치 않는 아내에게 억지로 성관계를 요구하는 남편도 나오고, 여동생의 몸을 음란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오빠도 나오고, 친교 활동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연애나 결혼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직장 동료도 나온다. 이들은 자신의 행동이 남편으로서 남성으로서 성인 여성 간에 으레 할 수 있는 행동이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지만, 이는 이 사회가 이성애적 욕망을 당연시해서 예외적으로 허용된 것일 뿐 자신의 성욕을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전시해도 되는 건 아니다.
이 소설은 2024년 이나가키 고로, 아라가키 유이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나는 소설을 읽기 전에 영화를 먼저 봤는데 영화의 완성도도 좋다. 각 인물의 세부적인 사항은 소설에 훨씬 더 자세히 나와 있기 때문에 영화를 본 사람은 소설도 읽어보길 권한다. 소설과 영화의 결말이 약간 다른데, 영화에는 없는 결말이 소설에는 있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독서 체험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