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롭, 드롭, 드롭
설재인 지음 / 슬로우리드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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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이 뭘까. 진정한 종말은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니라 진작에 다 끝났는데 끝난 줄도 모르고 있는 것 아닐까. 이대로 환경 파괴가 지속되면 매년 기후 위기는 더욱 심각해지고 해수면 상승, 농작물 생산량 감소, 신종 바이러스 출현 같은 부작용이 생길 거라는 걸 알면서도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현실처럼. 뜬금없이 종말에 대해 생각한 건, 최근에 읽은 설재인 작가의 단편 소설집 <드롭, 드롭, 드롭>에 실린 소설이 전부 종말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세상은 망할 예정이거나 이미 망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대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에 관한 책이라고 나는 느꼈다.


이 책에는 모두 네 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는데, 하나같이 설정이 기발하고 신선하다. 첫 번째 소설 <미림 한 스푼>은 어느 날 갑자기 외계인이 나타나 한 달 후에 지구를 멸망시키겠다고 선언하는 상황으로 시작한다. 근데 이 외계인이 지독한 K 콘텐츠 중독자라서, 어차피 멸망시킬 지구를 그냥 멸망시키는 대신 한국의 내로라하는 글쟁이들을 섭외해 세상 종말의 방식을 쓰게 하여 그걸 후보로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만들겠다고 한다. 사람들은 한 달 후에 죽음이 예고된 상황이고, 자신들이 어떻게 죽게 될지를 정하는 내용인데도 이 지상 최후의 초거대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열광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현실에서 아직 일어난 적 없는 일이지만 친숙한 기분이 드는 건 나뿐일까.


두 번째 소설 <드롭, 드롭, 드롭>은 어른이 아이가 되고 아이가 어른이 되는 식으로 한국에 사는 사람들의 연령층이 반전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저출생 고령화 문제로 고심하던 정부와 전문가들은 유소년층 인구가 늘고 노년층 인구가 줄어들었다고 기뻐하지만, 개개인의 삶에서 이는 엄청난 문제와 변화를 초래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세 번째 소설 <쓰리 코드>는 서울까지 시외버스로 세 시간 걸리는 지방의 한 도시가 어느 날 갑자기 수도가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세 소설 모두 사회적 약자, 소수자 또는 비정상으로 분류되는 젊은 여성들이 주인공인데, 이들의 주변 사람들은 이들이 대학에 가거나 취업을 하거나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거나 서울로 이사를 가면 - 정상성을 획득하면 -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식으로 이들을 회유하거나 협박한다. 하지만 당장 한 달 후에 지구가 멸망하는 상황에는 강자도 약자도, 다수자도 소수자도, 정상도 비정상도 없다. 사람들의 연령층이 반전되어도 미성숙한 인간들은 미성숙한 행동을 한다. 수도가 바뀌어도 지역 차별은 계속된다. 그렇다면 종말이란 외부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이나 현상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그 자체의 속성 아닐까.


이런 식의 사유가 느껴지는 작품이 네 번째 소설 <멸종의 자국>이다. 이 소설은 빛기둥이 주기적으로 내려오는 땅에 사는 리안과 해랑의 이야기를 통해 삶과 죽음, 인연과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삶은 결국 죽음과 맞닿아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은 언젠가 끝이 나기 마련이라고 해도, 찰나를 믿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인 동시에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주는 내용이라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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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 프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7
이디스 워튼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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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다는 건 뭘까. 이디스 워튼의 소설 <이선 프롬>을 읽으며 떠올린 질문이다. 주인공 이선 프롬은 누구라도 착하다고 할 만한 삶을 살았다. 미국 뉴잉글랜드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일 년 남짓 큰 도시에 있는 대학에 다니며 엔지니어의 꿈을 품기도 했지만 부모님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간병과 장례로 젊은 시절을 보낸 그는 자신을 도우러 와준 사촌 누나 지나와 결혼했는데, 지나마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서 또 다시 가족의 병수발을 드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내 쪽 친척 조카인 매티가 이선을 도우러 오는데, 이 매티라는 아가씨는 살림 솜씨는 엉망이지만 성격이 밝고 감수성이 풍부해 이선과 말이 잘 통한다. 젊은 시절 내내 가족들의 간병을 하느라 연애다운 연애를 해본 적이 없고, 아내 지나와는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을 지속하고 있었던 이선은 순식간에 매티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비록 아프기는 해도 아내 지나가 엄연히 살아 있고 이선과 매티의 관계는 친척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두 사람이 맺어진다면 주변 사람들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혼이라도 한다면 법적, 경제적 곤궁에 처할 수도 있다.


<이선 프롬>은 착하게만 살아온 남자 이선 프롬이 '의무' 또는 '안정'을 상징하는 아내 지나와 '자유' 또는 '변화'를 상징하는 매티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의무를 중시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온 이선은 매티와의 만남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자기 뜻대로 해본 일은 아무것도 없고, 이대로 산다면 더 이상 자기 삶에 아무런 변화나 자극이 없을 거라는 걸 깨닫는다. 그러나 매티를 택한다면 그동안 자기 자신의 욕망보다 남들의 시선이나 요구를 중시하는 삶을 살면서 쌓은 (한 줌도 안 되는) 명예와 돈을 포기해야 할 것이고, 그 또한 큰 손해라고 느낀다.


이선이 지나를 선택하는 게 옳은지, 매티를 선택하는 게 옳은지에 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것 같은데, 이 소설의 결말이 이선과 지나, 매티 모두에게 최악이라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 같다. 아내에게는 착한 남편이고 싶고 내연녀에게는 착한 애인이고 싶었던 이선의 욕심이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다. 차라리 누구 한 사람에게는 나쁜 사람으로 남을 용기를 냈더라면 모두가 불행해지는 결말로 치닫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그러고도 여전히 불쌍한 사람, 근본은 착한 사람인 척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결국 이선의 '착함'은 자기 자신을 위한 착함이 아니었을까. 


이선과 매티 사이에 오가는 감정이 과연 사랑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 이선이 일방적으로 매티를 사랑한 게 아니고 매티도 이선을 사랑했다고 판단할 만한 근거가 되는 장면이 몇 개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선의 입장에서 쓰인 이선의 진술(회고) 아닌가. 더군다나 매티가 의지할 데 없는 고아이고 지나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매티가 이선에게 보인 호의적인 태도는 연인 간의 애정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연기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것도 모르는 어리석고 우유부단한 남자의 태도를 비꼬듯 보여준다는 점에서 과연 이디스 워튼의 작품답고 오랫동안 사랑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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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리버 1~2 세트 - 전2권
오쿠다 히데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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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범죄 소설을 열심히 읽었는데, 사람 죽는 이야기 그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동안 손을 놓았다가 최근에 다시 범죄 소설을 야금야금 읽기 시작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봤는데, 일단 날씨가 더워서 인간에 대해 사유하거나 세계에 대해 통찰하는 차분한 분위기의 진지한 소설보다는 쫓는 사람도 쫓기는 사람도 다들 미쳐 있는 듯한 분위기의 도파민 터지는 자극적인 소설을 읽고 싶은 것 같다. 어제 읽은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리버>가 정확히 후자다. 


일본 간토 지방의 한가로운 농촌 지역인 군마현과 도치기현. 두 현의 경계를 가르는 와타라세강에서 한 노인이 개를 산책시키다가 젊은 여성의 시체 한 구를 발견한다. 얼마 후 비슷한 범행 수법으로 죽은 젊은 여성의 시체 한 구가 또다시 발견되고, 10년 전에 일어난 미제 사건과 정확히 동일한 수법 및 과정으로 범행이 일어나자 군마현과 도치기현 경찰은 경악한다. 10년 전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은 군마현과 도치기현 경찰은 서둘러 수사본부를 세우고 범인으로 의심 가는 인물들을 찾아 나선다. 10년 전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은 현직 경찰만이 아니다. 


10년 전 사건을 담당했고 현재는 은퇴한 전(前) 형사, 10년 전 사건으로 딸을 잃고 직접 범인을 추적해 왔던 피해자의 아버지가 경찰 못지않은 정보와 열정으로 수사에 관여한다. 여기에 살인 사건 기사를 처음 맡는 신입 여성 기자, 자문 역으로 초대를 받고 온 괴짜 심리학자 등이 개입한다. 용의자는 총 세 명인데, 세 명의 캐릭터가 다 달라서 각각의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있다. 범죄자의 동기나 수법보다는 범죄자를 쫓는 경찰 조직의 생리나 언론의 역할 등을 다루는 데 더 집중한다는 점에서 요코야마 히데오의 <64>가 떠오르기도 했다. 


오쿠다 히데오는 <무코다 이발소>를 비롯한 전작들을 통해 일본의 지방 소멸, 초고령화, 인구 감소 등의 문제를 다루어 왔는데 이 소설에도 그런 면이 드러난다. 조용하고 한적한 농촌 지역에 대기업 공장이 들어서면서 외국인 노동자 및 계절노동자가 늘어나고, 이들을 겨냥한 유흥업소가 줄줄이 생기면서 성매매, 마약 범죄가 증가한다. 철도, 도로망이 확대되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지역 범죄의 규모가 커지고 지역 경찰의 업무 부담이 늘어난다. 한국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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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츠먼의 변호인 묘보설림 17
탕푸루이 지음, 강초아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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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역사를 배우다 보면 이주민이 원주민(선주민)을 차별하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본다. 미국, 캐나다, 호주, 일본 등이 그렇고, 중국 대륙에서 한족이 넘어와 인구의 다수를 점유하고 있는 만(타이완)에서도 그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탕푸루이의 소설 <바츠먼의 변호인>은 대만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로 알려져 있는 원주민 차별 문제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퉁바오쥐는 대만의 원주민 중에서도 가장 인구가 많은(20만 명) 아미족 출신이다. 퉁바오쥐의 아버지를 비롯해 그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인 '바츠먼' 출신 사람들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면서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산다. 살인미수를 저질러 감옥 신세를 지게 된 아버지를 대신해 생계를 책임지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가엾게 여긴 퉁바오쥐는 열심히 공부해서 바츠먼 출신으로는 드물게 명문대에 진학하고 국선변호인이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얻는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어느덧 20년. 퉁바오쥐는 비록 한족 출신 판검사나 변호사들만큼 성공한 건 아니지만, 고향에서 어부로 일하는 친구들에 비하면 자신은 잘 살아 왔다고 자부한다.


그런 퉁바오쥐에게 어느 날 사건 하나가 배정된다. 인도네시아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 압둘아들이 대만인 선장 일가족을 잔인하게 살해한 것이다. 변호인 측은 범행 당시 압둘아들의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검사 측이 이를 감안하지 않았다고 항변했지만, 1심의 판사는 압둘아들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비협조적인 태도로 수사에 응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구형했다. 퉁바오쥐는 대체복무요원으로 국선변호실에 와 있는 예비판사 롄진핑을 파트너로 삼고 인도네시아 출신 간병인 리나를 통역사로 고용해 사건 해결에 임하지만, 상황은 점점 더 그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주인공 퉁바오쥐의 캐릭터이다. 퉁바오쥐는 흔히 법정 소설의 주인공 하면 떠올리는 정의롭고 성실한 법조인 캐릭터와 거리가 멀다. 일보다는 놀기를 좋아하고, 돈 욕심도 많고,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음담패설도 많이 한다.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아버지를 원수 보듯 하고, 가난하고 학력이 낮은 고향 사람들 무시도 숱하게 한다. 이는 퉁바오쥐가 살아온 이력과 그가 현재 살고 있는 세계와 관련이 깊다.


퉁바오쥐는 아버지처럼 힘든 노동을 하다가 살인미수로 감옥에 가는 신세를 면하려면 어떻게든 바츠먼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해 명문대에 진학했고 국선변호인이라는 남들이 알아주는 직업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운이나 원주민 가산점 제도 같은 특혜가 작용하지 않았느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같은 환경에서 자란 동네 친구들 중에 자신처럼 성공한 사람은 없다는 이유를 들며 반박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맡고 대만으로 일하러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선박 회사로부터 어떤 가혹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를 자세히 알게 되면서, 퉁바오쥐는 자신의 아버지도 과거에 비슷한 환경에서 일했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되고, 만약 아버지가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품고 그것이 비록 사회가 범죄로 규정하는 일일지라도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저항하는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퉁바오쥐 자신이 또래보다 일찍 철이 들어 공부에 매진하는 일도 없어서 현재와 같은 삶을 살지는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걸 자각하게 된다. 


퉁바오쥐가 국선변호인이라는 사회적 위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불성실하고 탐욕스럽고 부도덕한 언행이나 행동을 하는 것은 그가 속한 법조계의 문화와 관련이 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 롄진핑의 아버지 롄정이다. 현직 판사인 롄정이는 사회적으로 보나 경제적으로 보나 큰 성공을 거둔 인물이지만, 그가 외아들 롄진핑을 출세시키기 위해 저지르는 짓들을 보면 이기적인 속물 그 자체다. 자신의 권력 또는 영향력을 이용해 아들의 보직이나 혼사를 좌지우지하는 정도는 예상할 수 있는 전개였는데, 기독교 신자 모임이라는 명목으로 법조인들끼리 서로 뒤를 봐주는 이너 서클을 만들어 운영한다든지, 재판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 조항을 법관들끼리 이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낸다든지 하는 디테일한 묘사가 놀라웠다. 


결말도 좋았다. 사실 이런 법정 소설은 주인공이 원하던 목표를 이루는 것으로 끝이 나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주인공 퉁바오쥐가 안티 히어로에 가까운 인물이라서 그런지 그가 원하던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소설의 결말에서의 퉁바오쥐의 모습을 보고 그가 불행해졌다고,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실패한 건 퉁바오쥐 같은 인재를 주류로부터 놓친, 원주민, 이민자 같은 소수자, 약자를 통합하지 못한 대만 사회가 아닌가. 이는 비단 대만의 문제만은 아니고 한국과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넷플릭스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도 어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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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자은, 불꽃을 쫓다 설자은 시리즈 2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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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늦게 태어난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일이 좀처럼 없는데, <설자은, 불꽃을 쫓다> 작가 후기에 이 시리즈를 초등학생, 중학생 독자들도 많이 읽는다는 대목을 읽고 엄청난 부러움을 느꼈다. 내가 초등학생, 중학생일 때는 <용의 눈물>을 보고 <소년 탐정 김전일>을 읽었는데, 요즘 초등학생, 중학생들은 정세랑 작가가 쓴 설자은 시리즈를 읽는구나. 이런 시리즈를 인생 첫 역사물, 추리물로 접하는 어린 독자들이 너무 부럽다. (나 다시 태어날래 ㅠㅠ)


설자은 시리즈는 소설가 정세랑이 처음 도전하는 역사소설이자 추리소설, 시리즈물이다. 배경은 통일신라의 수도 금성(지금의 경주)이며, 육두품 집안 설씨 가문의 딸 미은이 세상을 떠난 오빠 자은을 대신해 남자 행세를 한다는 설정이다. 시리즈 1편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에서 자은(미은)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금성으로 돌아왔다.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백제 유민 목인곤과 알게 된 자은은 그를 식객으로 들여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해결하다 왕의 눈에 띄어 집사부 대사로 임명된다. 


시리즈 2편 <설자은, 불꽃을 쫓다>는 삼국 통일 후 영토가 넓어지고 백성 수도 늘어났지만 그만큼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나 사건이 끊이지 않는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더러운 금성을 깨끗하게 정화시킬 불귀신 지귀가 온다는 소문이 돌기가 무섭게 일어난 연속 화재 사건의 배후를 좇는 <화마의 고삐>, 흥률사에서 탑돌이를 하던 자은의 동생 도은에게 의문의 돌멩이가 날아들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탑돌이의 밤>, 오(5)소경에서 일어난 연쇄 도난 사건의 실체를 조사하는 <용왕의 아들들> 등 한 편 한 편이 흥미롭고 잘 읽힌다.


1편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를 읽을 때에도 느꼈지만, 설자은 시리즈는 그동안 조선이나 고려 등에 비해 덜 다뤄진 감이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역사와 정치, 사회상과 문화를 배우는 데 있어 좋은 교재가 될 것 같다. 신라 통일기에 중앙에 배치된 9개 군부대를 일컫는 '구서당'에 신라인뿐 아니라 백제, 고구려, 말갈인 등 피정복민이 포함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신라시대에 지방에 설치한 작은 서울을 이르는 5개 특수 행정 구역을 일컫는 오소경이 어떤 식으로 기능했는지 등 교과서로 배울 때에는 관념적, 추상적이었던 개념을 소설에서 다시 보니 더욱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상상이 된다. (어린 독자들이 부럽다22)


여성이지만 남자 행세를 하며 살고 있는 설자은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젠더가 일종의 역할극임을 보여주는 점도 흥미롭다. 자은의 오빠인 호은은 자은보다 나이가 많은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자은에게 의지할 존재가 되기는커녕 자은에게 신세 지는 일이 더 많다. 산아의 남편 진오룡은 자은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산아와 자은의 관계를 의심하는데, 그 의심이 헛된 것으로 밝혀질지 아닐지는 시리즈가 더 진행되어 봐야 알 것 같다(뜻밖의 백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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