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식당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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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곧바로 재료를 넣은 스테인리스 볼을 얼음물 안에 넣고, 그 안에서 거품기를 있는 힘껏 재빨리 돌렸다. 올려다본 하늘에는 크고 작은 별들이 잔뜩 떠서 말없이 반짝이고 있다. 행복했다. 너무 행복해서 가슴이 메어오고, 금방이라도 호흡 곤란으로 죽어버릴 것 같을 만큼 행복했다. 이런 식으로 넓은 하늘 아래에서 누군가를 위해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자신의 모습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었다. 더욱이나 이렇게 빨리, 오랜 세월 품어왔던 꿈이 이루어질 줄이야...... 거품기를 움직이는 소리가 사각사각 음악처럼 어둠 속에 울렸다. 도중에 넣은 럼주의 좋은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p.93)

  

가쿠타 미쓰요의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읽은지 얼마 안 되어 연이어서 일본소설을 읽게 되었다. 일본소설이 요즘 나와 파장이 잘 맞나보다. 요리, 음식 이야기를 좋아하는 동생이 꼭 읽어보라고 '강추'한 책답게 음식 냄새가 폴폴 풍기는 귀엽고 상큼한 소설이었다. 딱 요즘처럼 봄바람 살살 부는 계절에 읽으면 좋겠다.

 

<달팽이 식당>에는 린코라는 이름의, 내 또래의 젊은 여자가 나온다. 인도인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유일하게 의지했던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그 충격 때문인지 말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 무엇하나 되는 일이 없으니 가출하고 십여년을 산 도쿄를 벗어나 잠깐 고향에 다녀와야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잠깐' 다녀올 예정이었던 고향에서 린코는 새로운 인생을 찾는다. 엄마의 집 창고를 빌리고,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고향 땅에서 나고 자란 식재료를 요리하여 하루 단 한 팀을 위한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는 '달팽이 식당'을 열게 된 것이다. 게다가 린코가 만든 음식을 먹으면 꿈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퍼져 식당은 대성황을 이룬다. 

 

 
린코에게는 아주 소중한 장점이 있다. 고향을 떠나 십 여년 동안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배우고, 사랑하는 할머니로부터 전수받은 요리 실력과 열정, 그리고 자신의 음식을 먹은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기원하는 따뜻한 마음이다. 린코가 메뉴를 구상하고 신나게 음식을 만드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그녀의 열정에 내 몸까지 들썩들썩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고향에 돌아와 요리사의 꿈을 이뤘으니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한 순간, 린코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신은 얄궂게도 인간의 행복이 정점에 달했을 때 다른 곳에 불행을 예비하시는 것 같다. 린코에게도 신은 공평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린코는 달팽이처럼 천천히 슬픔을 꾸역꾸역 씹고 삼키고 소화했다. 그리고 다시 달팽이 식당을 오픈했다.

 


<달팽이 식당>은 일본에서 20대 여성들로부터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시바사키 코우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다. 린코처럼 세상의 압력에 눌리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린코는 내성적인 인간의 전형과도 같다. 주변 사람은 가족과 연인, 이웃뿐이고, 생각은 많지만 표현은 잘 못한다. 실연을 당하자마자 말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 달팽이처럼 자기 만의 공간으로 칩거한 것만 봐도 성격을 알 수 있다. 괜히 린코가 식당 이름을 '달팽이'라고 지은 것이 아니다. 달팽이는 세상의 속도에 맞추지 못해 꾸물꾸물 움직이고, 여차하면 자기만의 집으로 숨는 녀석이 아닌가.

 

하지만 달팽이는 천천히, 여유롭게 세상을 즐기고, 고집스럽게 자기 목적을 달성해나가는 은근한 야심가다. 린코도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손수 만든 세상에서 사람들은 그녀의 뜻대로 행복해졌다. (내성적인 사람을 조심하라!) 외향적인 사람들은 다른 이가 만든 행복을 취함으로써 행복해지지만, 내성적인 사람들은 직접 행복을 만든다. 나답게 사는 것, 부정하고 싶은 것으로부터 도망치지 말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것. 그것이 린코, 달팽이, 그리고 나처럼 내성적인 사람들의 좋은점이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인 린코가 만든 음식이니 맛있는게 당연하다. 석류 카레, 쥬뗌므 수프, 옥돔과 가리비 요리... 아, 군침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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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 지금 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는 87가지 - 어쩌다보니 절반을 살아버린 나에게
오모이 도오루 지음, 양영철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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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전에는  선배라는 이유로 버젓이 후배를 폭행하는 모 대학 모 학과에 관한 보도가 나왔고, 어느 조간 신문에는 취업 면접이나 맞선을 볼 때 겪는 연령 차별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조선일보, "스물일곱이시네… 뭐 했어요? 이 나이 먹도록"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4/25/2011042500060.html?news_Head2) 선배, 후배 연령차별... 나이의 무게가 우리나라만큼 크게 느껴지는 나라가 또 있을까? (없어도, 있어도 불행한 일이다) 

나이에 집착(!)하는 것은 서점가도 마찬가지다. 10대, 20대, 30대, 스무살, 서른살, 서른다섯살, 마흔살... 몇 살이 되기 전까지 해야 하는 일에 관한 책이 참 많다. 오죽하면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한국인은 이런 책들에 매여 '숙제하듯이' 산다는 말이 나올까. 그래서 이 책을 보고 읽기도 전에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들었다. 서른다섯살이나 되서 이 책에 실린 87가지 일을 못하면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조급해져야 하는 걸까? 서른다섯살에도 자신의 기준이나 규칙 없이 남들 눈에 맞춰 사는 삶이라면 과연 멋진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서른다섯살에 나는 어떤 모습일까? 이런 책을 쓰는 사람이 되어 있을까? 이런 책을 읽는 사람이 되어 있을까?

 

이 책의 저자 모모이 도오루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바로 NHK에 입사했다. 모두가 동경하는 직장에 다녔지만, 조직 내의 권위적이고 안일한 분위기에 질리고 자기발전이 없는 동료들을 보며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하는 생각에 학업을 병행하여 25세에 외국계 의약품 리서치사 IMS로 이직했다. 이 때부터 승승장구하여 35세에 자회사 사장이 되었으며, 45세에 외국계 인재파견 회사의 일본 법인 경영자가 되었다. 현재는 외국계 인재파견 회사의 회장을 맡아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졸 학력으로 NHK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출세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서 만족하고 발전을 멈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만족하지 않고 자기계발을 하여 법인의 경영자, 회장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NHK에 계속 있었다면 과연 가능했을까?

 

이 책은 그의 경험과 노하우의 결정체라고도 할 수 있는 책이다. '지금 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는' 일이라고 해서 인생이나 연인, 가족, 취미 등에 관한 일반적인 얘기도 나올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회사생활, 인간관계, 리더십, 자기계발, 판매법 등 '경영자의 입장에서 쓴' 직장생활에 관한 내용의 비중이 많다. 아무래도 서른다섯살이면 '업'으로 삼고 있는 분야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때이기 때문인 것 같다. 언젠가 무슨 특강에서 20대는 이것저것 경험하고 실패하면서 배우는 때이고, 30대 중반에 가서 본격적으로 승부를 던져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서른다섯은 그만큼 직업인으로서 중요한 나이인가보다.

 

현재 직장인이 아니라서 직장생활이나 업무에 관한 얘기는 마음에 크게 와닿지 않았지만, 인간관계에 관한 내용은 공감이 되었다. 직장인들이 가장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은 가족이나 연인, 직장, 돈도 아닌 '인간관계'라는 조사 결과를 본 적이 있는데, 저자 역시 인간관계가 서른다섯살의 직장인들에게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나보다. 제법 많은 분량이 할애되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저자는 특히 자기보다 주변을 먼저 신경쓰는 '베이컨 같은 사람'을 강조한다. 조화, 즉 '와[和]'를 강조하는 일본인 다운 생각이다. 개인을 존중하고 개성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이고, 남과 다르게, 차별화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대세라지만, 막상 조직에 들어가고 나면 나의 개성보다 집단, 조직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인 것 같다. 개인의 입장에서도 내 개성만 중시하는 것보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아우르는 능력을 갖춘다면 더 성공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어느 곳에서나 리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위를 살펴보면 베이컨 같은 사람이 있다. 사람을 사귈 때 상대가 누구라도 장점을 잘 끌어내는 사람이다. 자신은 메인 재료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의 맛을 돋보이게 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자연스럽게 이런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진정 멋진 사람이다. 메인 재료의 맛을 끌어내면서 자신의 맛도 조심스럽지만 확실하게 내는 베이컨 같은 사람 말이다. (pp. 141-2)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해주면, 이미 알고 있는 당연한 말이라며 짜증 섞인 표정으로 흘려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당연한 일'을 당연히 실행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그 당연한 일을 정말로 하고 있는가?"라고 다시 한 번 물어보면 대개 고개를 젓는다. (중략) 일찍 일어난다, 매일 1시간씩 영어 공부를 한다, 일주일에 네 권 이상 책을 읽는다... 등 이처럼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실행할 때 비로소 당연하지 않은 삶이 펼쳐진다. (pp.27-8)

 

20대, 30대 등 '몇십대 시리즈'가 대개 그러하듯이, 저자가 강조하는 87가지는 누구나 잘 알고 있고, 어디선가 읽은 적도 있고, 선배나 직장 상사에게 귀가 따갑게 들었던 얘기들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또 이 얘기야'하는 생각으로 대강 넘겨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가 강조하듯이 그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실행하는 것이 성공의 핵심이고, 이런 자기계발서를 읽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다. 서른다섯이면 인생의 절반을 산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평균수명이 여든을 넘어가는 요즘 같은 때에는 아직 반환점도 못 돈 것이고, 누가 먼저 죽는지는 순서가 없다는 말처럼 서른다섯살이라고 해서 아직 젊고 팔팔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이에 상관없이, 아무리 당연하게 여겨지더라도 일단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먼저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조차도 너무나 당연한 말같고, 아직도 이 책이 '숙제'처럼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숙제할 생각만 하고 미루다가 결국 못하는 것보다는 숙제를 먼저 해치우고 노는 게 훨씬 마음 편하고 즐겁다는, 이런 '초딩'들도 다 아는 진리를 어른들이 모르면, 나이 더 먹어서 정말 후회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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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의 셰프 - 영화 [남극의 셰프] 원작 에세이
니시무라 준 지음, 고재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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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하여 2박 3일 냄비 요리. 다양한 냄비 요리로 3인간 계속되는 엄청난 계획이다. 첫째 날은 냄비에 술을 넣고 양배추와 돼지 삼겹살을 재료로 한다. 양배추에서 나오는 수분과 술만으로 잽싸게 익혀 폰스로 간을 해서 먹는, 요리라고도 할 수 없는 요리이지만 소박하면서도 좋은 맛을 낸다. 돼지고기의 기름이 미묘하게 양배추에 휘감겨 절묘한 맛을 이룬다. 어떤 요리치가 만들어도 실패할 여지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것으로 첫째 날을 보내고 남은 국물에 물을 더해둔다. 다음 날 저녁 식사는 듬뿍 우러난 국물에, 뼈째 토막 친 닭고기를 집어넣고 마찬가지로 폰스를 써서 이번에는 닭백숙으로 기분을 낸다. (중략)... 그런데 결국 이 계획은 이틀째 되던 날에 좌절되었다. 숙성된 스프에 경탄을 금치 못한 대원들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먹어 치워, 결국 박사 카레는 늘 해오던 대로 처음부터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무튼 맛있었으니 다행이라고 할 수 밖에. (pp.233-4)
 

 

한국인도 먹는 것으로는 빠지지 않는 민족이지만, 일본인도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유행한지 얼마 안 되는 맛집 탐방, 미식가 문화가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널리 퍼져있어서, 방송만 해도 '구루메'(미식가를 뜻하는 gourmet의 일본식 표현) 리포트를 잘해도 밥만 먹고 사는 연예인이 수두룩하고, 국민적인 아이돌그룹이 셰프가 되어 게스트에게 음식을 대접한다든가(SMAP X SMAP 의 'Bistro SMAP'), 좋아하는 음식 사이에 숨겨진 싫어하는 음식을 맞추는 코너가(톤네루즈의 '여러분 덕분입니다'의 '쿠와즈키라이왕 결정전') 프라임 타임에 방송되며 오랫동안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내가 먹는걸 좋아해서 이 프로그램도 즐겨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일본인들이 음식을 얼마나 사랑하면, 오죽하면 남극에서까지 음식 타령일까? <남극의 셰프>는 저자 니시무라 준이 총 4년간 남극관측대에 요리사로 파견되어 월동 생활을 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남극'이 배경이라는 것만 해도 충분히 화제성있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데, 게다가 '셰프'라니 일본사람들이 열광한 이유를 알겠다.

 

육지에서 공수해온 제한된 물자로만 음식을 마련해야 하는 열악한 상황. 더군다나 니시무라 준는 전, 현직 요리사도 아니고, 해상보안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일 뿐이다. 그러나 임기응변과 재치, 그리고 '음식을 만들어 누군가와 함께 먹는 것이야말로 인간 생활의 기본'이라는 뜨거운 열정으로 니시무라는 하루하루 웬만한 오성급 호텔이나 고급 요리점 셰프 못지 않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냈다. (가끔 실패하기도 했다 ^^) 얼마나 맛있어보이는지, '사실 이 사람들 있는 곳이 홋카이도 어디쯤인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아, 속세에 사는 나는 왜 이렇게 못 먹고 살고 있는 걸까ㅠㅠ)

 

하지만 음식 이야기가 이 책의 전부는 아니다. 대원들은 관측대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실패하기도 하고, 열악한 환경에 성인 남자 여럿이 모여 있다보니 성격차이나 의견차이로 부딪치는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인간의 나약함을 느끼기도 하고, 속세에서는 맛보기 힘들었던 유대감이나 우정을 발견하기도 했다. 큭큭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들 정도로 웃긴 얘기가 많지만(아니 거의 전부지만), 임무를 마치고 대원들이 남극을 떠나는 장면에서는 왠지모르게 가슴이 찡하고 감동이 벅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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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가쿠타 미쓰요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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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일본소설. 고등학교 때 참 열심히도 읽었다.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 츠지 히토나리, 무라카미 하루키... 특히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 같은 여성 작가들이 쓴 소설을 좋아했다. 연애나 결혼,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일상을 배경으로 담담하게 쓴, 지극히 '일본 소설'스러운 느낌이 좋았다. 하지만 대학 이후로는 그리 즐겨 읽지 않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고등학교 당시에는 대학 입시와 수험 공부로 인해 생활이 팍팍해서 일본 소설의 말랑말랑한 느낌이 멋지고 신선하고 여유롭게 느껴져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싶다.  

 

참으로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일본소설 한 권을 읽었다. 제목은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책에 관한 특별한 에피소드나 추억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 조르르 등장하는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하나하나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가슴 뭉클해지는 이야기들이라서 책장을 덮자마자 동생을 불러 얼른 읽으라고 강요(!)했다. 읽다보니 나만의 책에 얽힌 추억들도 줄줄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책을 참 많이 읽었었다. 그 친구가 읽는 책을 같이 읽고, 책 얘기를 하는게 참 좋았다.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로 그 친구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학교 생활, 취업 준비, 그리고 취업... 생활이 바빠서 예전만큼 여유가 없다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책을 함께 읽고 감상을 공유하던 친구가 없어졌다는게 못내 서운했다. 언제쯤 친구가 다시 책 읽기를 즐길만큼 여유를 가지게 될까? 아니 책 읽기는 그저 나만의 취미로 남겨진 것일까?   

 

변한 것은 책이 아니라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케이크 사먹을 돈을 절약했던 소녀는 집을 떠나 사랑을 알고, 그 후에 이어진 아름답지 못한 결말도 배우고, 친구를 잃고 또 새롭게 얻고, 예전에 알던 것보다 더 깊은 절망과 끝없는 희망을 알고, 잘되지 않는 것과 바라는 바를 간절히 기원하는 방법도 배우고, 하지만 어떤 노력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게 있다는 사실을 매일 확인하고, 그렇게 내 안에서 조금씩 늘어나거나 줄어든 무언가가 바뀔 때마다 마주한 이 책의 의미가 완전히 바뀌었던 것이다. (p.19)  

 

저자는 어린 시절에 읽고 무척 재미없다고 생각한 책을 커서 다시 읽고 엄청난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 책은 다름아닌 '어린 왕자'다!) 그 경험으로 인해 세상에는 나와 '맞는 책'. '안 맞는 책'만이 있을뿐 '시시한 책'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세상에 나와 맞는 인간, 안 맞는 인간은 있어도 '시시한 인간'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생각은 (비록 취미지만) 서평을 쓰는 사람으로서도 명심해야 할 점이다. 책을 읽고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그 책은 시시하고 재미 없는 책이 아니라 그저 '나와 안 맞는 책'일뿐이다. 그러니 무조건적으로 비난하지 말고, 비판하더라도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드는지 분명히 명시를 해야 한다. (리뷰어도 책임이 막중하다!) 안 그러면 서평을 읽은 사람이 서평만 믿고 아예 그 책과 만나지(그 책을 읽지) 못할 수도 있다.  

 

읽은 사람도 책이 재미없더라도 '안 맞는 책이었다', '아직 이 책을 읽을 때가 아닌가 보다'라는 식으로 넓은 마음을 가진다면 좋은 책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질 것이다. 사람이 저마다의 이유를 안고 태어나는 것처럼, 책 한권 한권마다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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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초보 43인, 이근철 영어를 훔쳤다! 120분 모질게 끝내기 6
이근철 지음 / 21세기북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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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나는 자타공인 <굿모닝팝스>의 애청자다. 아침잠이 많아서 6시 생방송을 듣지는 못하지만(반성 반성...) kbs tune에서 다운로드 받아서 하루도 빠짐없이 무한반복하며 듣고 있다. 우리 어머니는 tv에 근철쌤만 나오면 '얼른 나와보라'고 부르시고, 동생까지 덩달아 굿모닝팝스에 나오는 팝송을 다 외울 정도. 그런데 불현듯 근철쌤이 쓰신 책은 별로 읽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서점이나 신문에서 근철쌤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은 많이 접했는데, 막상 구입해서 읽을 생각까지는 못해본 것 같다. 아마도 방송으로 매일 근철쌤의 목소리를 때문에 굳이 책까지 읽을 필요를 못 느꼈던 것 같다. 찾아보니 근철쌤이 쓰신 책만 무려 70여권, 굿모닝팝스까지 합하면 200여권 가까이 되는 것 같은데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다니... 진짜 반성해야겠다. 그래서 어제는 2008년에 나온 <왕초보 43인 이근철 영어를 훔쳤다!>라는 책을 읽었다. 제목이 참 통통 튀고 재밌다. 책 디자인도 굉장히 예쁘다.

  

 

<왕초보 43인 이근철 영어를 훔쳤다!>는 발음, 문법, 단어, 독해, 회화, 듣기, 작문 등 7개 분야에 걸쳐 영어 왕초보들이 부딪히는 고민을 이근철 선생님의 20년 영어 노하우를 바탕으로 해결하는 내용이 담긴 책이다. 영어 교재라기보다는, 영어 학습자를 위한 안내서, 학습 지도서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저 같은 토종 한국인은 어떻게 해야 발음이 좋아질까요?', '미국, 영국, 호주식 영어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 문법사항중 무엇을 먼저 해야 될까요?', '단어장의 올바른 활용법 좀 알려주세요' 등등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고민해봤을 질문에 대한 답이 나와 있어서 좋았다. 특히 요즘 오랜만에 토익 리스닝 공부를 하면서 영국 영어 발음이나 액센트가 익숙지 않아 애를 먹고 있는데, 책에 영국 영어의 발음상 특징, 단어 차이, 그리고 영국 영어를 접할 수 있는 영화 리스트 등 문제 해결 방법이 나와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단어장을 만드는 방법' 같은 아주 기초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답변이 나와있다. 중, 고등학교 때 단어장 정리하느라 상당히 많은 시간과 수첩, 노트, 펜, 샤프, 가위, 풀.... 등등을 소비했던 기억이 난다(ㅠㅠ) 단어장을 너무 크게, 많이 만들지 말고, 알고 있는 내용까지 정리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도 말고, 단어와 뜻, 유사 표현, 유사 단어를 풍부히 기록하는 것이 포인트라고 한다. 그리고 반드시! 사전을 찾아서 활용 예문을 적어놔야 한다. 안 그러면 단어만 죽어라 외우고 정작 회화할 때나 작문할 때는 써먹지도 못하는 불상사가 생긴다고... (반성하는 1人...)  

 

여러 질문 중에서도 내가 가장 궁금했고, 또 공감한 고민은 바로 이것. 24세 대학생 김동진 님의 고민 '귀 기울여 듣지 않고 외국방송을 듣는 것이 도움이 되나요?' CNN 같은 외국방송을 배경음악처럼 틀어놓고 오랜 시간을 듣게 되면 귀가 트인다는데 사실일까? 나도 이런 얘기를 많이 들었고, 실제로 afkn이나 tbs e-fm같은 영어 라디오 채널을 배경음악 삼아 매일 틀어놓고 지내고 있다. 근데 정말 도움이 될까? 근철쌤에 따르면 소리에 익숙해질 수는 있지만 어린아이들만큼 효과가 좋지는 못하고, 그보다는 특정 상황에서 쓰이는 표현들을 모아둔 듣기자료를 집중적으로 공부를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한다. 가령 일기예보나 비행기 안에서 조종사가 하는 표현 등 말이다. (토익 리스닝 듣기자료를 반복해서 듣는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요즘 공부하고 있는 토익 리스닝 듣기자료들을 그냥 듣고 지우지 말고 계속 반복해서 들어봐야겠다. 

 

나는 근철쌤이 방송에서 보여주시는 에너지 넘치고 신나는 모습도 참 좋지만, 중학교 때 영어에 대한 흥미를 느껴 스스로 영어를 잘 하게 되는 방법을 찾아 나가면서 공부해오신 점이 멋져서 좋아한다. 음악과 영화, 책을 사랑하고, 그러한 관심을 다시 영어 학습으로 연결시키고 계신 점도 멋지다. 너무나도 닮고 싶다. 이제 근철쌤이 쓰신 책 한 권을 읽었으니 두권째, 세권째 계속 읽어나가면서 더 많이 배우고 공부에 응용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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