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야기
미아키 스가루 지음, 이기웅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가슴 아픈 짝사랑의 대명사,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에드몽 로스탕의 소설 <시라노>의 주인공이자 17세기 프랑스에 실존했던 검술가다. 시라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빼어난 검술 실력과 읽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글솜씨를 모두 갖춘, 당대에 보기 드문 능력자였다. 그런 시라노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아름답고 재기 넘치는 록산느다. 시라노는 록산느를 사랑했지만 용기 있게 고백할 순 없었다. 기형적으로 큰 코 때문이었다. 록산느가 자신의 큰 코를 싫어할 거라고 지레짐작한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이라는 젊고 잘생긴 귀족의 이름으로 록산느에게 연애편지를 쓴다. 편지를 쓴 사람이 시라노인 줄은 꿈에도 모르는 록산느는 크리스티앙과 사랑에 빠지고, 시라노는 그런 두 사람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본다.


"우린 말이야, 그저 이름만 비눗방울처럼 부풀어 오른 허구의 연인에게 못내 애태우고 있어. 자, 받게. 이 거짓을, 진실로 바꾸는 건 자네네." - 에드몽 로스탕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중에서


미아키 스가루의 장편소설 <너의 이야기>는 주인공 '야마가이 치히로'가 '근미래판 시라노'인 '나츠나기 도카'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그린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다. 나노로봇을 이용해 인간의 기억을 개조할 수 있게 된 시대. 치히로는 의뢰인의 요구에 맞춰 가공된 기억, 즉 '의억'으로 결락된 기억을 채우는 것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부모 슬하에서 자란다. 다시 말해 치히로의 부모는 애인을 사귈 바에는 애인을 사귀는 의억을 사고, 가족과 시간을 보낼 바에는 가족과 시간을 보낸 의억을 사는 분들이다. 치히로의 부모는 정작 실제 자식인 치히로가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자라날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원하는 기억이 있으면 나중에 커서 네 돈으로 의억을 사서 채우라는 것이 부모의 가르침이다. 이윽고 어른이 된 치히로는 부모의 가르침대로 하루빨리 돈을 벌어 의억을 살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얼마 후 치히로는 넉 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생애 첫 의억을 산다. 치히로가 산 의억은, 듬성듬성한 기억의 결락 부분을 채우는 의억이 아니라, 듬성듬성한 채로 남아 있는 기억조차 깡그리 지워버리는 의억. 전문용어로 '레테'다.


얼마 후 치히로는 분명 듬성듬성한 상태였던 기억 사이사이에 이질적인 기억이 스며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들이킨 나노로봇이 레테가 아니라 가공의 청춘 시절을 제공하는 나노로봇, 즉 '그린그린'임을 확인한다. 얄궂게도 가공의 청춘 시절 속 여자친구 도카는 치히로의 이상형과 완벽하게 부합한다. 찰랑찰랑한 긴 머리, 멀리서도 눈에 띄는 새하얀 피부, 오묘하면서도 달콤한 웃음소리까지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 치히로는 내가 산 의억은 이게 아니라고, 내가 원한 결과는 이런 게 아니라고 항의하지만 항의할 대상이 없고, 설상가상으로 머릿속에 한 번 자리 잡은 의억은 밀어낼수록 밀려들고, 점점 더 강렬해지고 분명해진다. 치히로가 다시 한 번 레테를 복용하기로 결심하자, 이번에는 도카와 똑같이 생긴 여자가 치히로 앞에 나타난다. 이것은 기억도 아니고 꿈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다. 이 여자는 나를 속이려고 나타난 사기꾼일까. 아니면 도카라는 여자가 실제로 존재하는데 내가 잊어버린 걸까. 사기꾼에게 현혹되면 안 된다는 이성과 모든 걸 다 잊고 현혹되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던 치히로는 마침내 가슴 아픈 '진실'을 알게 된다.


"치히로는 날 어두운 곳에서 데리고 나가줬어." 그녀는 말을 이었다. "친구가 없던 내 곁에 항상 함께 있어줬고, 내가 발작을 일으켰을 때 몇 번이나 구해줬어. 치히로가 없었으면 나, 오래전에 절망에 빠져 죽었을지도 몰라." 오버하지 마, 나는 웃었다. 진짜라니까, 그녀도 웃었다. "그러니까 있잖아, 언젠가 치히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땐 내가 치히로의 히어로가 되어줄게." (201쪽)


치히로가 알게 되는 진실이란, 도카가 의뢰인의 요구에 맞춰 가공된 기억을 만드는 '의억기공사'라는 것이다. 의억가공사는 쉽게 말해 '한 사람을 위한 소설가'다. 소설가가 수천수만 명의 독자를 상정하고 소설을 쓴다면, 의억가공사는 단 한 명의 독자를 위해 글을 쓴다. 의억가공사는 의뢰인의 최면 상태에서 추출한 '이력서'를 살핀 다음 의뢰인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가공의 과거를 작성한다. 의뢰인이 힘든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면 즐거운 학교생활을 한 의억을, 연애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면 좋아하는 사람과 뜨겁게 사랑한 의억을 만들어주는 식이다.


도카도 치히로처럼 지독히 외로운 학창 시절을 보냈다. 아니, 도카가 치히로보다 더 힘들었다. 치히로가 교실에서 자기 자리를 못 찾고 도서실에 처박혔다면, 도카는 도서실에서도 자기 자리를 못 찾고 양호실로 밀려났다. 어려서부터 앓은 천식은 부모의 무관심과 방치로 인해 점점 심해졌고, 전교생 중에 1, 2등을 다툴 정도로 작은 체구와 병약한 몸은 도카를 학교 내 카스트 제도 최하위 계급에 머무르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카의 눈에 의억기공사라는 직업이 들어왔다. 의억가공사는 대단한 학력이나 경력이 없어도 필요한 재주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직장에 출퇴근하거나 여러 사람과 협력해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몸이 약하고 사회 경험이 부족한 도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다음 해 여름, 도카는 최연소 의억기공사로 나름 지명도 높은 클리닉에 취직했고, 학생인데도 적지 않은 돈을 벌게 되었다. 스스로 번 돈으로 방을 빌려 독립했고,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니면서 천식도 치료했다. 도카는 이제부터 진짜 인생이 펼쳐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도카의 몸에서 '새로운 병'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도카는 생존율이 낮지 않은 기존 알츠하이머병과 달리 치사율이 100퍼센트에 달하는 신형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차피 혼자인 몸.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잊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잊고 싶지 않은 시간이, 잊고 싶지 않은 장소가 하나도 없다는 걸 생각하면 눈물이 났다. 삶의 마지막 나날에도 혼자일 거라고, 마지막 눈 감을 때조차 철저히 외로울 거라고 생각하니 태어난 게 한스러웠다.


도카는 직업적 재능을 발휘해 자신이 필요로 하는 완벽한 '그'를 직접 만들어내기로 결심한다. '그'의 이미지에 가장 잘 부합하는 남자를 찾아서 '그'가 좋아할 만한 것들의 정보를 수집하고 '그'와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구실을 만들어낸다. '그'가 좋아하는 스타일에 맞춰 머리 스타일과 패션, 메이크업도 전부 개조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역할을 해줄 의뢰인이 나타난다. 그가 바로 도카의 운명의 상대, 치히로다. 도카는 치히로가 만족할 만한 '보이 미츠 걸' 이야기를 가공해 치히로의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도카의 예상대로, 치히로는 도카가 만들어낸 의억 속 도카와 사랑에 빠진다. 그렇다면 눈앞에 나타난 도카와도 사랑에 빠질까. 그것은 도카에게도 모험이었다. 평생 한 번뿐인, 생애 최후의,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죽기 전에, 딱 한 번이라도 상관없으니 누군가에게 칭찬받고 싶었다. 토닥임을 받고 싶었다. 동정받고 싶었다. 어린아이 대하듯 무조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다정하게 포옹받고 싶었다. 내 고독을 100퍼센트 이해해줄 100퍼센트의 남자에게 100퍼센트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죽은 후 비통해하며 그 죽음이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로 마음에 각인됐으면 싶었다. (262쪽)


소설 <시라노>의 답답한 전개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너의 이야기>의 시원시원한 전개가 마음에 들 것이다. '근미래판 시라노'인 도카는 록산느를 짝사랑하는 시라노인 동시에 록산느의 사랑을 쟁취하는 크리스티앙이다. 심각한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 앞에 나서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시라노와 달리, 도카는 자신의 외모를 상대의 취향에 맞게 바꾸는 노력을 불사하며 당당히 앞에 나선다. 진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면서 속마음을 깊이 감췄던 시라노와 달리, 도카는 자신이 호감을 느낀 상대에게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현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상대를 이끈다. 너는 가짜라고, 너의 사랑은 환상이고 거짓이라고 따지고 화내고 거부하는 치히로에게, 도카는 "왜 내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거야?"라고 항변한다.


다행히 치히로는 <시라노>의 히로인 록산느와 다르게 너무 늦지 않게 도카의 진심을 받아준다. 방법이 조금 특이하기는 해도, 사랑을 품은 상대에게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고 사랑을 쟁취하는 것은 '일반적인' 연애의 과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꿈이든 의억이든 환상이든 착각이든 상관없으니 언제까지나 이 달콤한 이야기 속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작도 끝도 자유자재인 허구와 달리 현실에는 분명한 끝이 있다. 모든 기억을 잊고 싶었던 치히로는 도카와 보냈던 생애 최고의 시간을 잊지 않기 위해 이야기를 짓기 시작한다. 생애 마지막 사랑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소원이었던 도카는 치히로만 홀로 두고 떠나야 하는 신세가 야속하다. 점점 바스러지는 기억을 붙들며 헤어짐을 기다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나는 속절없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랑은 해본 적이 없어서. 이런 이별은 하고 싶지 않아서. 


"전부, 진짜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이 이야기는 거짓이었기에 진짜보다 훨씬 다정한 거야." "...... 그렇구나." 그녀가 뭔가 거머쥐듯이 양손을 가슴 앞에서 모으며 수긍했다. "거짓말이니까 다정한 거구나." (354쪽)


짧은 호흡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이지만 첫사랑에 빠진 남자와 여자의 감정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치히로가 기억을 헤집으며 도카의 정체를 알아나가는 과정은 흥미진진한 미스터리 소설 같았고, 마침내 정체를 밝힌 도카와 도카를 받아들인 치히로가 한 여름의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달콤한 로맨스 소설 같았고, 생애 처음으로 사랑이란 감정에 눈을 뜬 젊은 연인이 너무 빨리 찾아온 이별에 괴로워하는 대목은 슬픔이 넘쳐 고통스럽기까지 한 비애 소설 같았다.


인생은 사랑을 기다리고 사랑에 환호하고 사랑을 떠나보내는 과정의 반복이다. 그럴 기회를 충분히 가지지 못한 채 눈을 감은 도카가 안타깝고, 도카로부터 사랑할 용기를 전달받고 의억기공사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치히로가 눈부셨다. 그 어떤 사랑도 처음에는 짝사랑이다. 짝을 발견한 순간 짝사랑이 시작된다면, 짝이 되는 순간 짝사랑은 사랑이 된다. 부디 어느 누구도 사랑을 마음속 깊이 감추고 있지만은 않기를.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 기회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도카처럼 목숨을 걸고 사랑하고, 치히로처럼 눈앞의 사랑을 꼭 붙들기를 바란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이라면 발끈할 일을 어릴 때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몇백 명이 넘는 전교생이 일렬로 줄을 맞춰 서서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들어야 했던 조회 시간이라든가,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이 잘못한 일을 두고 반 전체가 똑같은 벌을 받아야 했던 단체 기합이라든가, 머리카락 길이가 귀밑 3센티미터를 넘었느니, 색깔 있는 양말을 신었느니 같은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전교생 앞에서 벌을 받아야 했던 복장 검사 같은 일들. 몸이 좀 큰 후에는 수염이 성성한 남자 선생님들이 복장 검사를 한다며 여학생들의 블라우스나 치마 속을 들추는 일이라든가, 친하게 군답시고 여학생들의 어깨에 손을 두르거나 팔뚝을 주무르거나 목덜미를 만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요즘 학생들이라면 부당하고 불쾌한 일을 당했다고 SNS에 알렸겠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SNS는커녕 스마트폰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일을 당했다고 부모님이나 다른 선생님들에게 알린다 한들 내가 바라는 대로 해결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네가 예민하게 구는 거라고, 네가 빌미를 제공한 거라고 더 혼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러니 으레 그런 것이라고, 다들 그렇게 산다고 스스로 위로하고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어린 나에게 으레 그런 게 아니라고, 다들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고 말해주는 어른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의 주인공 '아일린'에게도 그런 어른이 필요했다. 1964년 미국 북동부 대서양 연안의 뉴잉글랜드 지역 어딘가에 스물네 살 여성 아일린은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다. 어머니는 병을 앓다가 돌아가셨고, 하나뿐인 언니 조우니는 자기 삶을 살겠다고 집을 나간 지 오래다. 은퇴한 경찰인 아버지는 하루 종일 집에서 술을 퍼마시다가 아일린이 보이면 잔소리를 퍼붓는 것이 일과다. 마을에는 아일린의 집보다 부유하고 가족들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집도 많지만, 아일린의 집보다 가난하고 가족들끼리 원수처럼 지내는 집도 많다. 아일린이 그 사정을 잘 아는 건, 아일린 자신이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소년 교도소 '무어헤드'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일린은 자신보다 기껏해야 서너 살 어리거나 그보다 한참 어린 소년들이 아버지를 찔러 죽이거나 동생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는 명목으로 교도소에 끌려오는 모습을 매일같이 본다. 찰나의 충동으로 박살 나버린 소년들의 인생에 비하면 자신의 인생은 한참 낫다고 아일린은 짐짓 안도한다.


시내에서 본 기억이 있는 신입 경찰 - 그의 여동생에게 어떤 장애가 있었던 게 생각난다 - 이 간이 테이블에서 내 옆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기회를 잡아 그 청년에게 농담을 했다. 조우니와 내가 '감옥 미끼(성관계를 하면 본인 등의 여부와 관계없이 강간죄가 성립되는 미성년자를 이르는 속어)'라고.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몇 년 동안이나 알지 못했지만, 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은 잊지 않았으며 지금도 원망스럽다. (98-99쪽)


아버지는 내 허벅지 위로 손을 뻗어 다리를 쓰다듬더니 무릎 사이에 아무렇게나 팔꿈치를 넣어 지탱하며 창문을 올려 닫았다. 나는 그냥 침착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내 편안함이나 사생활을 존중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발육이 막 시작되었을 때, 아버지는 밤에 어머니와 식탁에 앉아 술을 마시다 이따금 나를 불러 얼마나 자랐는지 본다며 꼬집고 재고 했다. (266-267쪽)


하지만 과연 그럴까. 어쩌면 지금은 비록 교도소에 수감되었지만 형기라도 있는 소년들의 처지가, 아버지의 집에 매여 형기도 없이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는 자신의 처지보다 더 나은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아일린의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계기는 대체로 아버지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한 딸에게 다시 밖에 나가서 술을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키는 아버지. 자동차 창문을 닫는다는 핑계로 다 큰 딸자식의 허벅지를 만지는 아버지. 성인인 딸이 평소보다 좀 늦게 귀가했다는 이유로 목을 조르며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아버지. 아일린이 집 밖에서 아버지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을 만났다면 언니처럼 집을 떠날 수도 있었겠지만, 불행하게도 당시 아일린의 주변에는 아버지보다 나아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교도소에서 함께 일하는 직원들은 멍청하고 게을렀고, 이웃들은 아일린의 처지를 알면서도 모르는 체할 만큼 인정머리가 없었다. 잠시 동거했던 남자는 아일린이 '작은 젖통' 때문에 아버지를 실망시켜 내 기분이 나쁜 거라고 했다. "여자애들은 모두 아빠가 찌찌를 만져주길 바라지." (267쪽) 지금은 그 남자가 구제할 길 없는 '멍청한 새끼'란 걸 알지만, 그때는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현실 감각과 판단력이 부족했다. 아버지 그리고 여러 남자들로부터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너는 못났어, 너는 멍청해, 너는 평생 여기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 - 같은 말들이 아일린의 머릿속을 지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일린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나는 못나지 않았다고, 멍청하지 않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고 틈날 때마다 상기한다. 그 누구도 아일린에게 학력을 물은 적 없지만, 아일린은 자신이 한때는 대학에 다녔고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할 수 없이 자퇴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애쓴다. 공립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고,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를 우편 구독하고, 자신을 깎아내리고 무시하는 교도소 직원들과 웬만해선 말을 섞지 않는 것은 그 노력의 일환이다. 애인이 없는 외로움은 교도소 직원 랜디와 연애하는 망상으로 해소하고, 친구가 없는 고독함은 혼자서 영화 보러 가는 걸로 채운다. 때로는 그걸로도 외로움과 고독함이 사라지지 않아서 이대로 죽고 싶다, 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나는 너희와 달라, 나는 원래 이런 모습이 아니야 같은 생각이 아일린을 붙든다. 영영 타락하지 않도록. 영영 스러지지 않도록.


"고마워요, 아일린." 그녀가 나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있죠, 자길 보면 어떤 네덜란드 그림이 생각나요." 그러면서 내 눈을 응시했다. "참 이상한 얼굴이야. 흔하지 않고. 평범하지만 매혹적이고. 안에 아름다운 난기류가 숨겨져 있어. 정말 좋아요. 분명히 눈부신 꿈이 있겠죠. 분명히 다른 세상을 꿈꿀 거야." ... (중략) ... 나는 아직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밤은 덜 여물었고, 나는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마침내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219-220쪽)


마침내 아일린은 리베카를 만난다. 리베카가 교도소장의 뒤를 따라 처음 사무실로 들어왔을 때만 해도 아일린은 리베카에게 일말의 호감조차 느끼지 않았다. 그동안 살면서 만난 인간들이 죄다 실망스러웠던 까닭이다. 리베카 또한 며칠 전에 본 영화 속 여배우처럼 멍청하고 내면도 텅 빈, 아일린 자신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고 교류도 없을 인간이라고 단정 지었다. 하지만 리베카가 하버드 대학원을 나왔고, 앞으로 교도소에 수감된 소년들의 교육을 담당할 예정이며, 보면 볼수록 뛰어난 미모와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갖추었다는 걸 알고 점점 태도를 바꾼다. 이윽고 리베카에게 푹 빠진 아일린은 리베카가 관심을 보이는 모든 것을 시기하고 리베카의 관심을 독점하려 애쓴다. 아일린은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교도소에 들어온 레너드 포크라는 소년에게 리베카가 주의를 기울이자 자신도 레너드를 눈여겨보기 시작한다. 어쩌면 아일린 자신도 레너드 포크처럼 아버지를 죽이고 리베카의 관심을 받겠다고 이때부터 생각했는지 모른다. 어리고 멍청한 레너드 포크는 교도소에 갇혀 꼼짝없이 벌을 받는 신세가 되었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환상을 이때부터 품었는지 모른다.


아일린은 누구에게도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 여자애였다. 고분고분한 딸이었고, 성실한 직원이었으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이웃이었다. 하지만 레너드 포크가 부모에게 당한 일을 알게 된 순간, 미시즈 포크가 아들이 당하는 일을 뻔히 알면서도 부모 자식 간이란 으레 그런 것인 줄 알았다며 변명하는 것을 본 순간, 아일린은 모든 것을 버리고 당장이라도 떠나기로 결심한다. 지금 당장 떠나지 않으면 자신도 레너드와 같은 꼴을 당할 수도 있다고, 어쩌면 미시즈 포크처럼 자기 편하게 살겠다고 아들이야 어떻게 되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괴물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자신이 으레 그런 것인 줄 알았던 일들이 실은 규칙이니 관습이니 전통이니 하는 명목 아래 자행되는 모욕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행히 아일린의 작은 핸드백 안에는 평생 모은 예금과 아버지가 넘겨준 총이 들어 있다. 만약 그것들이 없었다면 아일린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영영 그 끔찍한 마을에 눌러 살았을까. 아니면 또 늦게 왔다고 아버지가 아일린의 목을 졸라 죽였을까.


당신은 맘대로 생각해도 된다. 내가 악랄하고 간교하다고. 이기적이고 망상이 심한 데다 너무 꼬이고 편집광적이어서, 죽음과 파괴에서만 만족과 행복을 느낀다고 생각해도 좋다. 내가 범죄자적 정신을 지녔다고, 타인의 고통을 통해서만 쾌락을 느낀다고, 어떻게 말해도 좋다. ... (중략) ... 그래, 당연히 나는 도망치고 싶었고, 리베카가 나와 함께 가준다면 더욱 그러고 싶었다. (346-347쪽)


여자라는 걸 제외하면 아일린과 나 사이의 공통점은 거의 없다. 출생연도도 다르고, 가정 환경도 다르고, 직업도 관심 분야도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일린>을 읽는 동안 나는 마치 예전에 쓰다만 일기장을 오랜만에 꺼내 읽는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나를 무시하고 조롱하고 비아냥거렸던 말들. 내 몸에서 가슴이 튀어나오고 엉덩이의 곡선이 드러나자 나를 탐하고 욕망하던 눈길들. 나를 함부로 만지고 상처 입히고도 미안해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던 손길들. 그들은 나를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나는 그들로부터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감정도 없고 욕망도 없는 투명인간 행세를 했다. 때로는 미친 듯이 악을 쓰고 싶다가도 여기를 벗어나면 밖은 더 끔찍한 지옥이라는 생각을 하며 분노를 억눌렀다. 죽고 싶지는 않지만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않은 채로, 그저 시간이 흘러 자연히 죽게 되기만을 기다렸다.


<아일린>을 읽는 내내 아일린이 이대로 죽지 않기를, 이 지긋지긋한 동네로부터 멀리멀리 떠나서 지금까지의 삶을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아일린>의 결말을 아는 지금 나는 그 어떤 것보다도 <리나>라는 제목의 소설을 읽고 싶다. 고향을 떠난 아일린은 낯선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자신을 리나라고 소개한다. 아일린은 리나로 살아가기를 결심하면서 하느님에게 이렇게 맹세한다. 이제 변하겠다고. 날마다 일기를 쓰고, 교회도 가고, 기도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좋은 친구들을 사귀고, 남자들과 진지하게 만나겠다고 약속한다. 과연 그 맹세는 잘 지켜졌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착한 여자는 더 나빠질 뿐이다. 남들에게 나쁘거나, 아니면 그 자신에게 나쁘거나, 그 둘뿐이다. 나는 리나가 '착함'을 강요하는 사람들에게 더는 굴종하지 않는 삶을 살았기를 바란다. 누가 뭘 시켰는데 내키지 않으면 단호히 거절했기를 바란다. 여자가 살림도 제대로 안 하고 예쁘게 꾸미지도 않는다고 타박하면 뭐라도 보태준 것 있느냐고 따졌기를 바란다. 남자가 허벅지를 만지면 손목을 꺾어버리고 가슴을 더듬으면 가랑이 사이를 걷어찼기를 바란다.


나는 리나가 누가 으레 그런 거라고,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고 훈계하면 으레 그런 일이란 없다고, 다들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고 딱 잘라 말했기를 바란다. 끝까지 누구의 착한 딸도, 착한 아내도 되지 않은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겼기를 바란다. 참는 것이 착한 것이라고 믿는 어린 '아일린'들에게 참지 않아도 괜찮다고, 너 자신을 죽일 만큼 착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기를 바란다. 그런 리나의 이야기가 나는 더 궁금하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이트 워치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70년대 레즈비언들은 어디서 만났을까'라는 제목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영상의 화자는 육십은 족히 넘어 보이는 백발의 여성 노인이었다. 70년대만 해도 새까만 머리의 20대였을 그는, 당시 레즈비언들이 서울 명동의 유네스코 회관 뒤편 골목에 주로 모였다고 회상했다. 지금은 없어진 맞춤집 골목에서 남자 정장을 맞춰 입고, 샤넬 다방과 PJ 레스토랑에서 레즈비언들을 만났다고 했다. 70년대면 서슬 퍼런 군부 독재 시절이다. '평범한' 젊은이들도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을 당했던 때다. 그도 경찰 단속에 걸려 유치장에 끌려간 적이 있다. 여자라고 항변하니 여자가 왜 남자같은 차림을 하고 다니느냐며 구타했다.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일들이지만, 그때는 앞으로 어떻게 이 나라에서 계속 살지 막막했다.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세라 워터스의 소설 <나이트 워치>에 나오는 1940년대 영국 런던의 레즈비언들의 모습은 1970년대 대한민국 서울의 레즈비언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있는 1947년 런던. 온 국민이 전쟁 피해를 복구하고 경제 성장에 몰두하던 그 시절. 직업도 없고 가정도 없이 레너드라는 의사의 집에 머무르고 있는 케이는 오랜만에 친구 미키를 만나러 밖으로 나간다. 짧은 갈색 머리와 바지 차림을 고수하는 케이는 사람들로부터 "아직도 전쟁중인 줄 아시나?"같은 핀잔을 종종 듣지만, 바지 입은 여자가 공공의 적쯤으로 취급 당했던 전쟁 전에 비하면 사정이 낫다. 전쟁을 경계로 여성들의 복장이 매우 자유로워졌다. 남성들이 전쟁에 동원되면서 남은 일자리에 여성들이 고용되었고, 나풀나풀한 레이스가 달려 있는 드레스 차림으로는 일하기가 불편해 바지 차림을 선호하게 되었다. 덕분에 케이와 미키 같은 레즈비언들은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짧은 머리와 바지 차림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은 케이와 미키에게 직업도 선사했다. 전쟁 전이었다면 꼼짝 없이 남자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라는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 케이와 미키는 전시에 야간 구급대원으로 일했다. 한밤중에 병원 응급실에 대기하고 있다가 신고가 들어오면 서둘러 출동해 사람을 구조하고 시체를 수습하는 일이었다. 평시였다면 많은 체력을 필요로 하고 위험하다는 이유로 남성에게만 기회가 돌아갔을 것이다. 전시라서 여성인 케이와 미키에게도 기회가 돌아갔고 보란듯이 해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일자리는 전쟁터에서 복귀한 남자들에게로 돌아갔다. 직업을 잃은 케이와 미키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귀족 계급 출신인 케이는 병원 이층의 작은 방으로. 노동자 계급 출신인 미키는 자동차 정비소로. 미키는 정비소에서 남자 이상으로 열심히 일하지만 손님들은 미키에게 얼마 안 되는 팁을 주면서 립스틱이나 사라고 훈계한다. 여자의 입술색이나 신경 쓰는 그들은 니커보커 차림으로 땀 흘리며 일하는 미키의 모습이 얼마나 멋진지 꿈에도 모른다.  


전쟁의 파고는 넘었으나 자기 삶의 파고는 넘지 못한 레즈비언과 다른 소수자들의 이야기는 그 후로도 이어진다. 헬렌과 비브는 전시에 해외에서 복무하느라 혼기를 놓쳤거나 아내와 소원해진 남성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여성을 찾아 연결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쉬는 시간이 되면 헬렌과 비브는 온갖 잡담을 나누지만, 정작 각자에게 가장 내밀하고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헬렌은 사실 촉망받는 추리소설 작가인 줄리아와 동거 중인 레즈비언이다. 비브는 전쟁 중에 만난 유부남 레지와 오랫동안 불륜 관계다. 헬렌은 줄리아가 작가로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보다 훨씬 멋진 여자와 눈이 맞아 당장이라도 이별을 고할까봐 불안하다. 비브는 헬렌과 줄리아가 그저 사이 좋은 친구인 줄로만 안다. 비브 자신이 불륜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동생 덩컨이 동성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감옥 신세를 진 일이 있어서 감히 동성애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요즘 몹시 바쁘거든. 매일 외출 스케줄이 빡빡해." "이상한 데나 쏘다니겠지." "영화 보러 다녀." 케이가 대답했다. "극장에 가는 게 뭐가 이상해. 한자리에 앉아 두 번 내리 볼 때도 있어. 영화 중간쯤에 들어가 후반부를 먼저 볼 때도 있고. 뒤를 먼저 보는 편이 더 좋더라. 보통 사람들의 미래보다는 과거가 더 흥미진진하잖아. 뭐, 나만 그럴지도 모르지만...... " (145-6쪽)


사람들의 미래보다는 과거가 더 흥미진진하다는 케이의 말처럼, 이 소설도 1947년, 1944년, 1941년 순으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흥미롭다. 1947년의 이야기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케이와 헬렌, 비브의 접점은 1944년과 1941년의 이야기에 이르러 비로소 드러난다. 1944년 당시 케이와 헬렌은 완벽한 연인이었다. 야간 구급대원인 케이는 언제 어디서 공습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천사처럼 예쁜 헬렌을 혼자 두고 매일밤 출근하는 일이 고역이었다. 헬렌은 헬렌대로 밤마다 피와 먼지를 뒤집어쓰며 일하는 케이가 안쓰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헬렌의 마음에 변화가 생긴다. 시청의 피해지원부서에서 일하는 헬렌은, 폭격으로 파괴된 건물을 조사하는 일을 하는 한편 공습 사이사이에 글을 쓰는 줄리아에게 점점 마음을 빼앗긴다. 이 때도 레지와 사귀었던 비브는 매달 찾아오는 '친구'가 오지 않아 마음이 불안하다. 비브의 걱정은 현실이 되고, 힘들게 병원을 찾은 비브는 불법 시술을 받다가 위독한 상황에 이른다. 유부남인 데다가 군인 신분인 레지는 비브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결국 비브는 여성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벨벳 애무하기>, <끌림>, <핑거 스미스>로 '빅토리아시대 3부작'을 완성한 세라 워터스는 작품 배경이 한정적이라는 고민 끝에 <나이트 워치>에서 처음으로 빅토리아 시대가 아닌 1940년대를 배경으로 택했다고 한다. 달라진 것은 시대 배경만이 아니다. <나이트 워치>는 전작인 <핑거 스미스>와 달리 레즈비언 서사만 다루지 않는다. 전쟁 중 병역을 거부해 복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동성애를 이유로 복역한, 비브의 남동생 덩컨과 그의 감옥 동기 프레이저의 이야기다.


1947년 덩컨은 재직 중인 공장에서 우연히 프레이저를 만난다. 출소 후 기자가 된 프레이저는 덩컨이 자신의 집과 가까운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덩컨이 현재 '호러스 삼촌'이라는 자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크게 놀란다. 덩컨과 프레이저가 감옥에 있을 때 간수였던 먼디 씨의 성이 호러스라는 사실이 떠오른 까닭이다. 복역 당시 프레이저는 덩컨과 먼디 씨가 평범한 죄수와 간수 사이가 아니라고 의심했을 뿐 아니라 덩컨의 성적 경향을 집요하게 추궁했다. 덩컨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을 추궁하는 프레이저가 부담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프레이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친밀해지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인다.  프레이저가 덩컨의 누나인 비브의 근황을 물었을 때는 왠지 모를 질투심마저 느낀다.


"나도…… 나도 세상이 달랐으면 좋겠어. 왜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 걸까? 이렇게 몰래 다니는 것도 신물나고…… (중략) 구질구질하게 살금살금 다니는 것도 싫어. 우리가 결혼만 할 수 있다면, 아니 그 비슷한 거라도." 케이는 눈을 껌벅거리다 시선을 피했다. 이것이 바로 그녀 인생의 비극이었다. 그녀는 남자처럼 헬렌을 아내로 맞이하거나 아이를 안겨줄 수 없다…… (428쪽)


"나는 네가 한 일이 용감한 일이었다고 생각해. 다들 그렇게 생각할 거야." 프레이저는 코를 훔쳤다. "아무것도 안 하는, 참 쉬운 용기지. 너는 나보다 더 용감한 남자야, 피어스." (575쪽)


<핑거 스미스>가 빅토리아시대를 고증하고 당시의 레즈비언 서사를 재현하는 데 집중했다면, <나이트 워치>는 시대보다도 서사와 그 의미를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이는 소설가가 되기 전 레즈비언과 게이 역사소설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세라 워터스의 학자적 면모가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다는 증거다. 학자라면 특정 시대를 고증하고 그 시대의 서사를 재현하는 데에만 집중해도 문제되지 않지만, 작가라면 작품을 통해 시대를 대변하고 독자들과 소통할 책임이 있다. <나이트 워치>는 그런 면에서 훌륭한 미덕을 갖춘 작품이다. 세라 워터스는 <나이트 워치>를 통해 레즈비언과 게이로 대표되는 소수자들의 잊힌 혹은 지워진 역사를 불러내고, 이들이 사회로부터 어떤 배제와 차별을 당했으며 그런 상황에서도 어떻게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내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며 살려고 했는지를 보여준다.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여전히 '투명인간' 취급당하는 소수자들에게, 그들에게도 역사가 있으며 새로운 역사를 쓸 자격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내가 '70년대 레즈비언들은 어디서 만났을까'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보고 비로소 그 시절의 레즈비언들의 삶을 알게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나이트 워치>를 읽고 미처 알지 못했거나 부러 무시했던 레즈비언, 게이 등 소수자의 삶에 대해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성애자 일색인 것처럼 보이는 거리에 레즈비언도 있고 게이도 있고 양성애자도 있고 트랜스젠더도 '있었다'는 것을, 바로 지금도 만나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이성애자 남성만이 승자 또는 패자로 기록된 역사뿐만 아니라 여성과 소수자의 피와 땀, 눈물이 밴 또 다른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누구라도 역사에서 배제된 역사, 구전으로도 전해지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동하지 않을까. 그렇게 공백이거나 투명한 채로 남아있는 역사의 부분들을 다양한 색으로 채우다 보면 우리 모두의 역사가 더욱 다채로워지고 풍요로워지고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인양품 문방구
GB 편집부 지음, 박제이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6월
평점 :
품절




무난하고 실용적인 디자인으로 문구 애호가뿐만 아니라 일반 소비자의 마음까지 사로잡고 있는 무인양품(MUJI)의 문구들.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무지러'들을 양산하고 있는 무인양품 문구들의 매력을 파헤친 책 <무인양품 문방구>가 나왔다. 무인양품이 탄생한 것은 1980년. 그로부터 1년 후, 문구 제1호인 메모장이 탄생했다. 현재까지 출시된 무인양품 문구의 종류는 약 500종. 이 책은 그중에서도 많은 대중들에게 사랑받고 있고, 무인양품만의 독창성이 빛나는 제품 20점을 선정해 각각의 탄생 비화와 특징 및 장점을 자세히 소개한다.


발매 당시 제품명은 '메모장'이었던 '재생지 메모 패드'는 출시 이래 단 한 번도 리뉴얼과 가격 인상을 하지 않았다. 저렴한 가격과 두툼한 두께가 장점이며, 뭐든 자유롭게 쓰고 그릴 수 있어서 지금도 스테디셀러다. 좌우 양쪽에서 눈금을 잴 수 있는 '아크릴 투명 자'도 인기 상품 중 하나다. 무인양품의 아크릴 투명 자는 여백 없이 끝에서 눈금이 시작되어 편하게 치수를 잴 수 있다. 무인양품의 오리지널 서체인 '무지 헬베티카'를 적용해 숫자가 눈에 쉽게 들어오고 보기에도 아름답다.


무인양품의 오리지널 노트 하면 '재생지 주간지 4컷 노트'가 유명하다. 이 노트의 특징은 4컷 프레임만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이 노트는 2000년대 초반, 무인양품의 문구 매출이 급감했던 '냉각기'에 탄생한 것으로, 처음에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소비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며, 현재는 기간 한정으로 판매해도 완판이 될 만큼 인기가 높다. 최근 인기 상품 하면 화이트보드나 냉장고에 붙여서 종이를 고정하는 용도로 쓰이는 '마그넷 바'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제품은 무인양품 직원들이 회사 안에서 회의실 등으로 이동할 때 자료를 모아서 옮기는 파일박스를 개선하다가 탄생했다고 한다. 그 결과 일주일에 약 3,000개씩 팔리는 효자 상품이 탄생했다니 재미있다.


무인양품의 문구를 애용하는 '무지러'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일러스트레이터 미에 겐타는 무인양품의 '주간지 4컷 노트'를 활용해 만화를 그린다. 같은 노트를 자유기고가 가네코 유키코는 원고 집필용 그림 콘티를 짜는 데 사용한다. 패션 작가 미노와 마유미는 딸이 태어나고 10년 넘게 무인양품의 '링 노트'에 육아일기를 쓰고 있다. 작은 문구 하나도 사소하게 여기지 않고 장인 정신을 다해 만드는 기업과 직원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고, 작은 문구 하나로 자기만의 생활, 자기만의 예술을 만들어나가는 무인양품 마니아들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쁘게 울긴 글렀다 - 넘치지 않게, 부족하지 않게 우는 법
김가혜 지음 / 와이즈맵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일론>, <보그 걸>, <코스모폴리탄>에서 피처 에디터로 일했고, 현재는 팟캐스트와 라디오에서 연애 상담을 하고 있는 작가 김가혜의 산문집. 화려해 보이는 매체에서 선망받는 직함을 달고 일했던 분이라서 책도 잔뜩 멋부린 내용이 아닐까 싶었는데, 예상과 달리 저자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크고 작은 상처들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책이어서 공감도 많이 되고 감동적이었다.


저자는 녹록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저자의 부모는 저자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혼했다. 저자의 할머니와 고모가 저자를 대신 키웠고, 부모를 대신해 키워주는 사람들을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말을 늘 들으며 자랐다. 그래서 늘 밝고 씩씩하게 행동했지만, 이따금 울음이 터지면 아무도 못 말렸다. 눈물이 많은 저자에게 할머니는 눈 아래 점이 눈물점이라서 그런 거라고 핀잔을 주었다. 눈 아래 점이 있으면 눈물이 많다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부터 저자는 펑펑 울고 나면 거울 앞에 서서 눈물점이 커졌는지 확인해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토록 눈물이 많은 저자인데,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었던 적이 있다. 고3 때 성적이 좋지 않아 대학 갈 길이 막막했던 저자는 대학에서 주최하는 문예대회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대회 전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가족들은 할머니가 바라는 건 내가 대학에 가는 거라고, 대회를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저자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억지로 떼서 눈이 퉁퉁 부은 채로 대회에 참가했다. 대회를 마친 후 저자의 두 손에는 '입상'이라고 적힌 상장이 쥐어져 있었다. 기뻐야 했지만 기쁘지 않았다. 슬픈데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후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 잡지사에 취직한 저자는 휴일도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공황이 찾아왔다. 심장이 가슴에서도 뛰고, 머리에서도 뛰고, 귀에서도 뛰었다. 샤워를 하다가, 영화를 보다가, 친구화 대화를 하다가도 이유 없이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생각 끝에 취재를 핑계로 정신과를 찾았다. 의사는 공황 발작이라고 했다. 회사에서 일 잘하고 가정 일도 잘하는 슈퍼우먼이라는 건 타고나서 체력이 좋은 사람이면 모를까, 일반인에게는 가닿을 수 없는 경지라고 했다. 무조건 쉬라고도 했다.


정신과 치료를 받기 전에는 겁도 나고 비용이 부담되기도 했는데, 치료를 받은 후인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마음이 편하고 홀가분하다. 과거의 나쁜 기억들과 현재로 이어지는 증상들을 말할 때마다 저자는 매번 울고, 저자의 내면에 살고 있는 '어린아이'도 함께 운다. 다 울고 나면 신기하게도 마음은 물론 몸까지 한결 가벼워진 듯한 느낌이 든다. 흘린 눈물은 애써 그러모아봤자 몇 그램도 안 되겠지만, '어린아이'를 가둬놓느라 눌러둔 마음의 돌덩이는 치워졌다. 이 밖에도 진솔하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가득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