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쓰지 않아도 마음산책 짧은 소설
최은영 지음, 김세희 그림 / 마음산책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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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산책 짧은 소설 시리즈는 한 편 한 편의 길이가 짧아서 가볍게 읽기 좋다. 최은영 작가의 <애쓰지 않아도> 역시 가볍게 읽기 좋을 거라고 예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한 편 한 편의 길이는 짧은데 내용이 은근 묵직하다. 여운도 길게 남고. 어떤 단편들은 장편으로 발전시켜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기를 먹지 못하는 여자아이가 경험한 어떤 폭력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호시절>이라든가. 성당의 대복사가 되고 싶지만 여자라서 소복사만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여자아이의 미래(<저녁 산책>) 도 궁금하고. 


<숲의 끝>이라는 단편에 나오는, 서태지의 노래 <컴 백 홈>에 대한 색다른 해석도 인상적이었다. 발표 당시 수많은 가출 청소년들을 집으로 돌아가게 만든 <컴 백 홈>에 대해, 이 소설의 등장 인물은 "집이 지옥인 애들이 있잖아. 집에 가면 실제로 죽을 수 있는 애들도 있어. 그런 애들 보고 무조건 집에 가라니. 듣고 있기 힘들어."(78쪽)라고 말한다. 이런 생각을 (이 책을 읽고) 이제야 했다는 게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서태지가 꼰대처럼 느껴지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게 (딱히 팬도 아니었지만) 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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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그린 사람 - 세상에 지지 않고 크게 살아가는 18인의 이야기
은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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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인터뷰집은 인터뷰이의 면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인터뷰이의 면면만큼이나 인터뷰어의 역량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책에 나오는 인터뷰이의 절반 이상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책을 내신 분은 책도 읽은 적이 있는데, 은유 작가의 인터뷰를 통해 인터뷰이들에 대해 더 많이, 더 깊이,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아마 이건 내 깜냥으로는 식별하기 힘든 인터뷰이들의 훌륭한 점들을 은유 작가가 '크게 그려서' 알려준 덕분일 터. 은유 작가처럼 보고 싶고, 읽고 싶고, 쓰고 싶고, 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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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나는 없었다 - 개정판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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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사 크리스티는 1976년 85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80여 편의 추리소설을 썼다. 이뿐만 아니라 1930년부터 1956년까지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여섯 편의 장편소설을 썼다. 필명을 쓴 이유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1926년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지금까지도 사건의 전모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남편의 외도와 실종 사건이 관련 있지 않나 하고 짐작하기도 한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필명으로 발표한 여섯 편의 소설 중 하나인 <봄에 나는 없었다>는 문제의 실종 사건의 전모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들이 담긴 작품이다. 


조앤은 변호사 남편, 장성한 두 딸과 아들을 둔 중년 여성이다. 어려서부터 현모양처가 되기를 꿈꿨으며, 결혼 후 자신이 생각하기에 어진 아내, 좋은 엄마라면 할 법한 일들을 수행하며 살아왔다. 어느 날 조앤은 바그다드에 사는 막내딸의 집에 들렀다가 런던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학교 동창 블란치를 만난다. 블란치에게 이해하기 힘든 말을 듣고 심기가 불편해진 조앤은 폭우 때문에 기차역 숙소에 발이 묶인다. 본의 아니게 낯선 장소에서 기약 없는 휴가를 보내게 된 조앤은 자신의 과거와 가족들의 일을 떠올린다. 


이제까지 조앤은 자신이 현모양처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변호사인 남편이 걱정 없이 일할 수 있게 서포트했고, 세 아이들이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잘 이끌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찬찬히 생각해 보니 남편과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자식들도 전처럼 자신을 따르지 않았다. 아니, 사실 남편과는 잠자리를 가진 지 오래다. 자식들은 전부 가능한 한 엄마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싶기라도 한 듯 자주 만나기 힘든 곳에 산다. 과연 조앤은 그동안 잘 살아온 게 맞는 걸까. 잘 살아온 게 아니라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 소설은 2014년 구판이 나왔을 때 처음 읽고 이번에 두 번째로 읽었는데, 그 때보다 지금 훨씬 더 공감이 되고 명작이라는 찬사에 동의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을 최근으로 바꾸면 <나를 찾아줘>에 필적하는 가정 심리 스릴러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필명으로 쓴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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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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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에게 어머니는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여성'이다. 자식은 어머니를 통해 여자란 누구인가, 여자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가치관, 사고방식, 선입견, 편견 등을 형성한다. 어머니와 동성인 딸의 경우에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어떤 여자가 되고 싶은가(어머니처럼 되고 싶은가 혹은 어머니처럼 되고 싶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는 바로 이런 생각에서 출발한다.


이 책은 아니 에르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직후에 쓰였다. 외동딸인 저자에게 어머니는 가장 친밀한 가족이자 가장 중요한 여자였다. 저자의 어머니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학교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하고 일찍부터 공장 노동자로 일해야 했다. 그는 자신의 딸이 자신과 같은 삶을 살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을 설득해 사회적으로 공장 노동자보다 훨씬 좋은 대우를 받는 상인이 되었고(식당 겸 식료품점을 운영했다), 남편과 똑같이 일하고 때로는 남편이 못하는 일들도 척척 해냈다. 저자는 그런 어머니를 의심 없이 사랑하고 존경했다. 어머니 같은 사람이 되고 싶고, 어머니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저자의 어머니는 집안 형편상 다소 부담이 되는 교육비를 지출해 가며 딸을 기독교계 사립학교에 보냈다. 그 학교에는 주로 중상류층 이상의 집안에서 나고 자란 여자 아이들이 다녔다. 저자와 같은 상인, 노동자 계급의 여자 아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학교에서 만난 중상류층 이상의 집안의 여자 아이들의 어머니들은 저자의 어머니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들은 남편과 같은 직장에서 일하지 않았고(전업주부가 대부분이었다), 세련된 말씨와 우아한 태도로 딸을 가르쳤다. 저자는 그런 어머니들과 다른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런 속내를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에 '공부해라', '남자애들한테 한눈 팔지 말라'라고 잔소리만 하는 어머니에게 반발심, 저항감을 가지기도 했다.


결국 저자는 어머니가 소망한 대로 명문 대학에 입학했고, 상류층 집안의 남자와 결혼해 가족을 꾸렸다. 저자의 어머니는 이제 자신과 학력도, 계급도 전혀 다른 딸에게 거리감을 느끼는 듯 보였다. 그랬던 어머니가 어느 날 알츠하이머 병을 진단 받았다. 저자는 약 10년 간 어머니를 처음엔 자신의 집에서, 나중엔 요양병원에서 모셨다. 명민하고 성실했던 어머니가 하루가 다르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저자 역시 큰 고통을 겪었다. 어느 날은 어머니가 하루라도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어느 날은 어머니가 하루 빨리 세상을 떠나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편하게 해주길 바랐다. 애증에 죄책감이 더해지고 또 더해지며 저자의 내면은 폭발할 지경이 되었다.


마침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혼자 남은 저자는 어머니에 대한 분노도 회한도 모두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했던 또는 하지 않았던, 할 수 없었던 일들도 사실은 사랑에서 비롯되었음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모든 체험과 감정, 생각들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의 생애를 활자로 기록해 역사로 만드는 것. 그것이 자식을 작가로 키워낸 어머니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일 테니. 


이 책을 읽으면서 앨리슨 벡델의 책 <당신 엄마 맞아?>가 생각 났다.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남자의 자리>)와 어머니 이야기(<한 여자>)를 책으로 쓴 것처럼, 앨리슨 벡델 역시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펀 홈>와 어머니 이야기(<당신 엄마 맞아?>)를 책으로 썼다(정확히는 만화로 그렸다). 네 권 모두 훌륭하고 여운이 오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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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의 사료편찬관
마엘 르누아르 지음, 김병욱 옮김 / 뮤진트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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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전작 읽기에 도전하면서 프랑스의 역사와 정치, 문화에 관심이 생겼다. 마엘 르누아르의 소설 <왕국의 사료편찬관>은 이 작품이 2020년 공쿠르상 최종심과 프랑스 아카데미 소설 대상 최종심에 오른 작품이라고 해서 읽고 싶었다. 막상 읽어보니 프랑스가 아니라 오랫동안 프랑스의 보호령이었던 모로코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덕분에 이제까지 전혀 몰랐던 모로코의 현대사도 알게 되고 모로코와 프랑스의 관계도 알 수 있어 유익했다. 


이야기는 1929년생이며 1961년부터 1999년까지 재임한 모로코 국왕 하산 2세의 어린 시절 학교 친구였고 성인이 된 후에는 왕국의 사료편찬관으로 재임한 압데라마네 엘자립을 화자로 진행된다. 총명함을 인정받아 (훗날 하산 2세가 되는) 왕세자가 다니는 '콜레주 루아얄(왕실 교육 기관)'에 입학한 엘자립은 언젠가 왕세자의 최측근이 되기를 꿈꾸며 열심히 공부한다. 그 결과 왕(하산 2세의 아버지)에게 칭찬을 받기도 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가기도 한다. 


하지만 머리가 좋고 학업 성적이 뛰어나다고 해서 최고 권력자의 마음에 들 수 있는 건 아니다. 더욱이 그 최고 권력자가 학창 시절 동급생이었고 자신보다 성적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로부터 미움을 사거나 견제를 당할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엘자립은 남부러울 것 없는 학력과 실력을 지녔지만 도통 출세와는 인연이 없었다. 유배나 다름 없는 외딴 지역에 보내지거나, 사료편찬관이라는 - 이 자리에 배치된 게 은총인지 실총인지 알쏭달쏭한 자리에 배치된다. 


이 소설의 백미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런 식으로 왕과 미묘한 관계인 엘자립이 생애 처음으로 한 여인과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에필로그다. 작가는 1999년 가을 당시 과제를 하기 위해 즐겨 찾던 카페에서 우연히 압데라마네 엘자립을 만나 알고 지내게 되었고, 두 사람이 친해진 후에 엘자립으로부터 이 소설의 모티프가 된 원고를 받았다고 설명한다. 


혼란스러운 시대에 독재 군주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자기 자신이 아니라 차기 왕의 친구, 왕의 최측근으로서만 교육받고 일하고 사랑할 수 있었던 남자. 이런 운명이 기구하고 부당하다는 걸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고 평생을 산 남자. 오랜 세월 동안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잘 모르는 외국인 청년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었던 남자. 이런 남자의 이야기에 많은 프랑스인들이 주목한 이유를 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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