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백성실록 - 우리 역사의 맨얼굴을 만나다
정명섭 지음 / 북로드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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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백성실록>의 저자 정명섭은 원래 바리스타였다고 한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그가 바리스타로 전업하여 9년 동안 커피를 끓이던 장소가 파주 출판도시의 어느 카페였다니 작가가 된 것이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러운 선택일지도 모르지만, 첫 책을 출간한 2009년부터 해마다 문학과 역사 분야의 책을 부지런히 낸 것을 보면 바리스타로 일하는 동안 커피만 끓인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재능과 열정도 함께 익히고 우려내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은 저자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기록유산이기도 한 조선왕조실록에서 우리가 흔히 '민초'라 부르는 백성들, 요즘으로 치면 서민들의 생활 모습을 찾아낸 결과물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의 치적과 역사적 사실만 기록되어 있는 책인 줄 알았는데, 이 책을 보니 의외로 백성들에 대한 기록도 적지 않았다. 그 중에는 현대 사회의 모습과 달라서 웃음과 놀라움을 자아내는 것도 많다. 가령 실록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사고사는 다름 아닌 벼락에 맞아 죽은 것이라든가(p.59), 떡에 곡식이 허비되는 것이 술보다 더하다고 여겨 떡 만들기를 금하는 '금떡령'을 내린 것(p.95),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이 도읍지를 옮기려고 하는데 좀처럼 정해지지 않자 동전 던지기로 정한 것(p.174) 등이 그렇다. 반면 과거의 기록을 통해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내용도 있다. 자식이 보는 앞에서 어머니를 때려죽이는 사이코패스가 있었는가 하면(p.121), 오늘날 성범죄자의 신원을 공개하고 전자발찌를 부착하는 것처럼 조선시대에도 이마에 글씨를 문신으로 새겨 넣는 자자형, 발뒤꿈치의 힘줄을 끊는 단근형 등이 있었다고 한다(p.154). 당시의 기술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미제 사건도 많았다. <흠흠신서>는 정조의 명을 받아 미제사건 해결에 투입된 정약용이 범죄 사례와 판결을 모아 쓴 책이라고 한다. <목민심서>, <여유당전서> 등과 함께 그냥 제목만 알고 있었는데 이런 내용인 줄은 처음 알았다. <흠흠신서>를 잘 연구하면 정약용을 주인공으로 조선판 CSI, 셜록홈즈 같은 작품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이밖에 유교 국가였던 조선에 이슬람교 신도가 살았다는 이야기, 중국처럼 장성과 운하를 지으려고 노력한 이야기, 농사일을 거들게 하기 위해 물소를 수입한 이야기 등 국사 시간에 선생님이 가르쳐주지 않았던, 아니 어느 곳에서도 들은 적 없는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신기한 것은 책에 소개된 기록 중에 재미있는 기록은 세종과 성종 등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임금 시기의 것이 많고, 잔혹한 범죄나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기록은 세조나 연산군 등 정세가 혼란했던 시기의 것이 많다는 것이다. 지도자의 치세가 백성들의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만약 '조선왕조실록'이 아닌 '대한민국실록' 같은 것이 있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으로 기록될까? 새삼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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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동의보감 1 : 죽을래 살래? 허영만 허허 동의보감 1
허영만 지음, 박석준.오수석.황인태 감수 / 시루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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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데즈카 오사무, 미야자키 하야오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허영만이 있다. 허영만이 데즈카 오사무나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일본은 국가적 차원에서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하나의 산업으로 육성해왔고, 국민들도 만화를 예술과 대중문화의 한 장르로서 '숭상'하는 분위기다. 반면 우리나라는 순수미술을 하는 화가를 '환쟁이'로 비하하고 만화가는 그보다 못한 대우를 했다. 심지어 80년대에는 만화를 청소년 유해매체, 불법물로 간주하며 만화를 보고 그리는 것을 '범죄' 취급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 40년 넘게 만화가로서 굳건하게 활동하고 있는 거장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각시탈>, <날아라 슈퍼보드>, <비트>, <타짜>, <식객> 등 그의 작품들은 다양한 세대와 장르를 아우른다. 영화화, 드라마화 된 작품도 많고 대부분이 흥행에 크게 성공해서, 만약 허영만이라는 원작자, 스토리텔러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영화계, 방송계가 덜 재미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나는 허영만을 좋아하고 존경한다.



오랜만에 그의 신작이 나왔다. 제목은 <허허 동의보감>. 동의보감은 그렇다 치고 '허허'는 무슨 뜻인가 하고 봤더니, 양천 허씨 20대손 허준과 31대손 허영만 두 사람의 작품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한 가문에서 허준과 허영만, 두 명의 걸출한 인물이 나왔다는 것도 대단한데, 후손인 허영만이 조상인 허준의 작품을 만화로 재해석하는 시도를 했다는 것도 놀랍다. 책의 기본틀은 전작 <꼴>과 유사하다. <꼴>이 관상학적 지식을 재미있는 그림과 유머로 전달하는 책이었던 것처럼 <허허 동의보감> 역시 원전인 동의보감의 한의학적 지식을 재미있게 풀었다.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쉬우면서 알차기까지 하다. 건강에 관심이 많아서 이제까지 동의보감에 대한 책만 해도 여러 권 읽었는데, 이 책은 슬렁슬렁 쉽게 읽히면서도 동의보감의 핵심을 꼼꼼하게 담고 있다. 동의보감의 주요 문구와 핵심 개념도 어렵지 않게 설명이 되어 있다. 그래도 조금 부족하다 싶으면  고미숙의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를 읽어보면 어떨까? 초심자가 읽기에는 다소 어려운 것이 흠인데, <허허 동의보감>에 나온 내용보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나는 고미숙의 책을 먼저 읽고 <허허 동의보감>을 읽었는데, 고미숙의 책에서 어렵게 느껴졌던 대목, 잘 이해되지 않았던 대목을 <허허 동의보감>을 통해 쉽게 알 수 있어 좋았다.   



<허허 동의보감> 시리즈의 1권인 이 책의 소제목은 '죽을래 살래'다. 왜 이렇게 위협적(!)인 제목을 지었나 하고 봤더니 장수 비법에 관한 내용이 상당히 많다. 일단 전반부에는 동의보감의 탄생 배경과 기본 사상, 남녀의 신체적 차이, 병의 원인과 치료법 등이 나오고, 후반부에는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양생법이 나온다. 치료법과 양생법 모두 궁극적으로는 더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책과 신문, TV, 라디오 등등에서 건강에 관한 정보가 폭포처럼 쏟아지는데도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태반이라는 것이다. "첫째, 과식하지 마라. 둘째, 숨을 깊고 느리게 쉬어라. 소식하고 느리게 숨 쉬기만 해도 장수한다는데 이 만화를 그리면서도 이걸 실행하지 못한다. 과식하고 무심코 숨 쉰다. 그저 알고 있느냐, 아는 것을 실행하느냐, 단명과 장수의 차이다. (장수의 조건 pp.64-5)" 머리로는 알아도 몸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건강을 불신하고 불안에 떠는 사람도 적지 않다. 저자는 몸의 병도 문제지만 마음의 병도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64세 때 늙고 죽는 것을 두려워했던 노인이 좋은 스승을 만나 도를 튼 후 100세 넘게 살았다. '본디 아무것도 없었는데 티끌인들 담을 수 있겠는가!' 마음을 비우면 도가 튼다. 도를 깨닫는 데는 나이가 없다. (무심은 도로 가는 지름길 p.135)"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해서는 몸의 건강뿐 아니라 마음의 건강도 중요하다는 것, 마음의 건강의 핵심은 무심, 즉 욕심을 버리는 데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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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없이 나를 위로하는 50가지 방법 - 심리적 허기로 음식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자기진정법’
수잔 앨버스 지음, 서영조 옮김 / 전나무숲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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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생기면 집에 돌아가는 길에 과자나 아이스크림 같은 군것질 거리를 잔뜩 사서 먹어치우곤 했다. 과자를 와그작와그작 씹어먹고, 초코 범벅의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고나면 스트레스가 싹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때는 고작 몇 천 원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데다가, 남들처럼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생각에 자주 그렇게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랬나 싶다. 일차적으로는 살이 쪘고, 살이 쪄서 스트레스를 더 받았다. 고작 몇 푼이라도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사먹는 데 낭비했다는 생각에 죄책감도 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아도 군것질로 풀지는 않는다. 먹더라도 저녁 메뉴로 뜨겁고 매운 낙지 볶음을 먹는다든지, 양상추와 피망이 잔뜩 들어있는 샐러드를 와삭와삭 씹어먹는 정도다. 요즘은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푼다. 한 시간 정도 빠른 비트의 댄스 음악을 들으면서 집 근처의 공원을 한 바퀴 돌면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게다가 살까지 빠지니 일석이조! 몇 년 사이에 참 많이 발전했다.



과거의 나처럼 스트레스나 우울감 등 심리적인 문제를 음식으로 달래곤 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기진정법'이 소개된 책이 있어서 읽어보았다. 제목은 <음식 없이 나를 위로하는 50가지 방법>. 저자 수잔 앨버스는 미국 클리블랜드 클리닉의 임상심리학자로 식생활 문제, 체중 감량, 신체 이미지 문제 등을 전문 분야로서 연구하며 10년 이상 거식증, 식욕이상항진증, 폭식증 등으로 고통 받아온 사람들을 상담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먼저 먹는 데서 정서적 위안을 얻는 사람들의 감정을 진단했다. "우리가 음식을 먹는 이유는 세 가지이다. 신체적 허기, 스트레스성 허기, 감정적 허기를 느끼기 때문이다. 신체적 허기는 자연스러운 몸의 반응이지만 나머지 두 가지는 자기위안을 얻기 위한 가짜 허기다.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창피하거나 잘못한 일을 잊어버리기 위해, 단순히 기분전환을 하기 위해, 어떤 감정을 더 오래 느끼거나 피하기 위해 음식을 먹는 것이다." (pp.5-6)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푸는 사람은 나말고도 많다. 여자들은 주로 케이크나 과자, 아이스크림 같은 달콤한 디저트, 아니면 카라멜 마키아토처럼 단 맛이 강한 커피를 마시는 경우가 많고, 남자들은 술이나 담배로 푸는 경우가 많다. 적은 비용으로 쉽게 스트레스를 풀 수 있어서 좋기는 하다. 그렇지만 스트레스, 불안, 우울 같은 궁극적인 문제를 해소하지 못하고, 장기적으로는 비만이나 당뇨, 암 등 신체적인 질환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음식 없이 나를 위로하는 방법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저자는 이 책에서 음식 없이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무려 50가지의 방법을 들었다. 그 중에는 명상을 한다, 5분만 참는다, 행복한 순간을 떠올린다 등 마음을 챙기는 방법도 있고, 온몸으로 크게 웃는다, 잡념을 비우고 멍하니 있는다 등 생각을 바꾸는 방법, 아로마 테라피를 한다, 요가를 한다, 서랍 하나를 정리한다 등 감각을 진정시키는 방법, 나만의 립스틱을 산다, 손을 움직여 목도리를 뜬다, 웹서핑으로 세상과 소통한다 등 관심을 돌리는 방법, 블로그 스타가 된다, 애완동물과 한바탕 뒹군다 등 관계를 통해 자기를 진정시키는 방법 등이 있다. 인상적이었던 것을 몇 가지 소개해보자면, 햇빛이나 밝은 전등 불빛을 피부에 쐬거나, 뜨겁거나 차가운 차를 마시거나, 따뜻하거나 차가운 수건으로 찜질을 하는 식으로 오감을 만족시키면 마음이 가라앉고 심리가 안정된다고 한다 음식 대신 시원하거나 따뜻한 음료수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고 하니 활용해봐야겠다. 운동을 하는 것도 좋다. 운동을 하기 위해 따로 시간을 내는 게 귀찮다고? 실험 결과에 따르면 운동을 하기 위해 따로 시간을 내지 않아도 일상적인 활동으로도 어느 정도 운동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한 학자가 2007년에 가정주부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그는 먼저 바닥을 닦고 먼지를 터는 등의 청소를 하는 동안 칼로리가 어느 정도 소모되는지 알려주고 청소를 하는 게 운동이라고 강조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특별히 따로 운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참가자들은 몸무게가 줄었고, 혈압이 떨어졌으며, 몇 가지 건강 수치가 좋아졌다." (p.146)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청소나 빨래 같은 집안 일을 할 때 아무 생각없이 있지 말고 운동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해봐야겠다.


 

음식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근본적인 이유를 이해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프로이트를 인용한다. "그(프로이트)는 이렇게 뭔가를 먹어야만 마음이 가라앉는 현상을 '구순고착'이라고 불렀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나거 18개월까지 인간의 발달 단계 중 첫 시기인 구순기를 겪는다. 아기는 태어나서 첫 18개월 동안 모든 것을 입으로 가져간다. 맛을 보고 만져봄으로써 세상을 탐구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 발달 단계를 제대로 거치지 못하면(즉 아이가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엄마의 젖이나 우유를 떼면) 어른이 되어서도 음식이든 담배든 입에 뭔가를 물고 있지 않고는 못 배긴다고 믿었다." (p.176) 프로이트는 구순고착이 심할 경우 과식을 하거나, 단것에 탐닉하거나, 담배를 피우는 것 말고도, 지나치게 말이 많다거나, 비꼬거나 가시 돋친 말을 잘하는 성격이 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유아기 때 자신에게 이러한 문제는 없었는지 알아보고,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치유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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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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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출간되자마자 사기는 했는데 읽을 엄두가 안 나서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몇 주 전 '이동진의 빨간책방'을 듣는데 이 책을 다룰 것이라는 예고가 나왔다. 안 그래도 김중혁 작가님이 전부터 하루키 팬이라고 공언을 하셔서 이번 신작은 어떻게 읽으셨나 궁금했는데, 빨책에서 길게, 자세히 설명해주신다고 하니 하루키의 팬이자 중혁 작가님의 팬으로서 기대가 되었다. 반드시 책을 읽고나서 방송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부랴부랴 읽었다. 그리고 오늘(8월 21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새로 업데이트된 방송을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이동진 평론가님과 김중혁 작가님이 오랫동안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시기는 했는데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2부로 미루시고 하루키에 대한 이야기만 잔뜩...... ㅠㅠ 빨책 1부는 낚시방송이라는 걸 잊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천천히 읽을 걸...... 만감이 교차했다. (2부 기대할게요!) 아무튼 여차저차하여 읽게 된 하루키의 신작이 이전 작품들에 비해 훨씬 쉽고 재미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줄거리도 제목에 제시된 정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절친했던 친구들로부터 영문도 모른채 내쳐진 경험이 있는 다자키 쓰쿠루라는 남자가 뒤늦게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순례 여행을 떠나는 내용이 소설의 전부다. 다자키 쓰쿠루는 왜 색채가 없을까? 색채가 뭘까? 왜 순례를 떠났을까? 등등 제목을 보고 떠올릴 수 있는 의문의 답도 소설에 자세히 제시되어 있다. 하루키 소설, 많이 친절해졌다.



여느 소설보다 쉽고 재미있게 읽은 건 분명한데 왜 막상 서평을 쓰려고 하니 생각나는 점이 없는 걸까? 줄거리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큼 의문이 드는 점이 없다. 단 하나 신경쓰이는 것은 '육손'이라는 개념이다. 소설에 여러번 등장하는 육손. 이것이 우성임에도 불구하고 자연도태 되었다는 점을 통해 작가는 어떤 개체가 아무리 뛰어난 성질이나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던 시로가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처참한 최후를 맞은 것처럼 말이다. 반면 시로와 달리 아카와 아오, 구로, 다자키 쓰쿠루는 어떤 식으로든 여섯번째 손가락을 잘라내고 살아남았다. 그렇다면 그 손가락은 시로였을 수도 있고,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일 수도 있고, 친구들 그 자체일까?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성장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손가락처럼 귀한 무언가를 버려야 한다는 뜻이라는 점은 알겠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육손을 택한 걸까? 그 점을 잘 모르겠다.



줄거리 외적인 부분에서는 신경쓰이는 부분이 참 많았다. 먼저 소설의 제목을 듣자마자 동생과 나는 라이트 노벨의 제목 같다는 얘기를 했다. 라이트 노벨이란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좋아하는 일본의 젊은 세대들이 읽기 쉽게 쓴 엔터테인먼트 소설을 일컫는 말인데, 90년대 말부터 일본에서 유행하기 시작해서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상당히 높다.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 수첩>도 라이트 노벨의 일종이다.) 라이트 노벨의 특징 중 하나는 제목이 '길어도 너무 길다'는 것이다. 아홉 자, 열 자만 되어도 긴데, 라이트 노벨 중에는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 <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 됐다>, <문제아들이 이세계에서 온다는 모양인데요?> 등 스무 자에 가까운 제목을 가진 작품도 적지 않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역시 제목이 길어도 너무 길다. 게다가 소설에서 주인공이 학창시절을 회상하는 대목을 보면 교복 차림의 소년, 소녀들이 풋풋한 우정과 사랑 비슷한 감정을 나누는 학원물, 청춘물을 자연스럽게 연상하게 된다. 하루키가 라이트 노벨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면 그야말로 억측이겠지만, 독자로서는 정통파 소설가인 하루키의 작품 속에서 이런 장르문학적인 요소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소설의 주요 모티프가 색채라는 점 역시 신경쓰였다. 등장인물마다 빨강, 파랑 등 특정 색채가 부여되어 있다는 설정은 요즘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만화인 <쿠로코의 농구>를 연상시킨다. 이 만화는 등장인물마다 이름에 색채를 의미하는 한자가 들어있고 심지어는 머리색까지 '깔맞춤'을 한 것으로 진작부터 유명했다. (인터넷에 많은 분들이 비슷한 글을 올리신 걸 보면 나만 이렇게 생각한 건 아닌 모양이다.) 사람마다 고유의 색채가 있다는 생각이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낯설지 몰라도 일본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회자되어 왔다. 가령 에하라 히로유키라는 이름의 영능력자가 몇 년 전에 자신에게 사람의 고유한 색채, 즉 '오오라(aura의 일본식 표현)'를 보는 능력이 있다는 주장을 해서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는 사람에게는 빨강, 파랑, 금색, 은색 등 다른 색깔의 오오라가 있는데, 이 오오라의 기운에 따라 개인의 능력이나 운명이 정해진다고 주장했다. 사람마다 고유의 색채가 있다는 설정을 보자마자 나는 에하라의 오오라 개념을 떠올렸다. 소설에서 이 개념이 직접적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색채를 읽는다거나, 색채의 기운이 좋고 나쁨에 따라 사람의 운명이 바뀐다거나 하는 점은 영 관련이 없어 보이지 않는다.



이밖에도 다자키 쓰쿠루를 전차 오타쿠로 설정한 점이라든가, 아카를 통해 자기계발 열풍에 대해 지적한 점 등 현대 일본사회의 대중문화와 사회문제를 직접적으로 등장시킨 점이 재미있었다. 하루키가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고, 재즈, 클래식 등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작가라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번 소설에는 유난히 그런 흔적이 많았고, 그 중 대부분이 오타쿠라든가 (색깔로 대표되는) 영능력 같은 서브컬처라는 점은 주목해서 볼 만하지 않나 싶다. (그걸 다 알고 있는 나도 신기하고.) 그러고보니 이번 소설은 일본문화를 아예 모르는 사람보다는 오랫동안 일본문화를 관심있게 지켜본 사람이 읽기에 참 좋은 소설인 것 같다. 그냥 줄거리만 보면 전체적으로 무난한 소설이지만, 일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면 지방 도시 특유의 정서와 수도와의 정서 차이, 개인주의, 권태와 무관심 등 일본 사회의 특징적인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주인공의 고향으로 설정된 나고야라는 도시는 오사카, 고베 같은 도시와는 다른 특성을 가진 도시이며, '나고야죠'로 일컬어지는 나고야 여성들에 대한 묘사가 수차례 나온다는 점도 의미심장했다. (신주쿠 역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90년대 미국이 일본 사회의 경직적인 문화에 대해 비판한 것에 대한 하루키의 해석 내지는 항변 같은 것도 신경쓰이는 부분이었다. 신경쓰이는 점은 많은데 나의 짧은 언어로는 표현하기가 어렵고, 하루키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없어 정확한 답을 얻지 못한다는 게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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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의 힘
샘 카펜터 지음, 심태호 옮김 / 포북(for book)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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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어느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아르바이트이기는 해도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라는 부담감 때문에 힘든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거대한 조직 속에서 마치 내가 부품처럼 소모되고 있다는 허무함이었다. 누구 하나가 빠져도 회사 운영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고, 빠진 사람을 대신할 사람은 어디서든 찾을 수 있다는 사실, 내가 없어도 회사 사람들 중 누구 하나 신경쓰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서글펐다. 그래서 그 때는 내가 없으면 안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일,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는 일은 찾지 못한 채) 나이를 먹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보니 그 때 그 회사처럼 내가 없어도 잘 굴러가는 회사가 좋은 회사라는 것, 오히려 자리에 앉은 사람이 바뀌었다고 일의 체계가 바뀌는 회사는 일하기 불편한 회사라는 것을 알겠다. 직원 개개인의 개성이 존중되는 회사도 좋지만, 그보다 먼저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야 개성도 발현될 수 있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이제서야 어렴풋이 깨달은 시스템의 힘을 진작부터 역설한 이가 있었다. 바로 <시스템의 힘>의 저자 샘 카펜터다. 그는 결코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가 아니다. 70년대 말, 대학 중퇴 학력으로 유유히 히피 생활을 즐기던 저자는 말이 좋아서 히피지 최저임금을 받는 육체노동을 전전하며 사는 현실을 비관하며 학교로 돌아갔다. 간신히 산림경비대원 학교를 졸업하고 열심히 돈을 번 끝에 전화응답 서비스 회사 '센트라텔'을 인수했다. 사업을 하면 전보다 잘 살 줄 알았는데, 현실은 달랐다. 한 주에 100시간 이상을 일해도 회사 매출은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병까지 얻고 아내와도 헤어졌다. 인생의 벼랑 끝에 몰린 저자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스템이 문제다!' 그 때부터 저자는 보다 원활하고 효율적으로 회사 경영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전념했다. 그 결과 업무 시간은 100시간에서 단 2시간으로 줄었고 회사 매출도 늘었다. 건강도 되찾았고, 등산과 자전거, 스키 등 레저 활동도 즐길 수 있게 되었으며, 가정생활도 원만해졌다. 



인생은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며, 우리가 알든 모르든(또 그게 마음에 들든 안 들든) 각자의 시스템은 실낱이 되어 '인생'이라는 천을 만든다. 즉 당신의 시스템들이 모두 합쳐져 삶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당신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면, 그 시스템들을 제대로 작동시키거나 작동시키지 못하면서 하루하루를 그럭저럭 살아왔을 것이다. (p.10)


우리 발목을 잡는 것은 '시스템'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인식의 결함'이다.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사건에 정신이 팔리면 통제할 수 있는 삶의 결함을 보지 못한다. 우리가 고통스러운 것은 세상이 불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시스템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개인의 시스템은 충분히 개선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삶의 사소한 부분까지 깐깐하게 살펴봐야만 성공과 마음의 평화, 즉 자유를 손에 넣을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을 인식해야 한다. (p.53)



경영, 그 중에서도 조직 관련 책은 일반인들이 읽기에 어렵고 지루한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저자 자신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해서 한결 읽기 쉽고 마음에 와닿는 부분이 많아서 좋았다. 시스템의 힘을 경영이나 업무뿐 아니라 개인의 일상 생활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저자의 경우 자신의 건강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시스템 방법론을 적용했다. 저자는 건강 악화가 우울증 때문이라는 주치의의 말을 듣고 나서 한동안 우울증 치료를 위해 애를 썼다. 그러던 어느 날 문제의 원인은 스트레스라는 생각이 든 저자는 경영에 시스템의 원리를 적용해 성공한 것처럼 건강 관리에도 시스템의 원리를 적용했다. "내 몸은 작은 시스템들이 모여 하나의 시스템을 이루는 주 시스템이었고, 그중 일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나는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몇 가지 시스템들을 고치거나 없애버림으로써 스트레스 자체가 생기지 않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내부적인 스트레스를 없애기 위해 인지적 방법론을 써서 나쁜 생각이 떠오르지 않도록 노력했다. (p.106)" 



저자처럼 건강 관리에도 시스템의 원리를 적용할 수 있고, 정리나 재무 관리에도 시스템 방법론을 쓸 수 있다. 정리의 경우, 먼저 각 물건의 위치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건을 사용하면 바로 그 자리에 가져다두는 것으로 원칙을 정하면 따로 정리할 시간을 낼 필요가 없다. 꼭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아침에 10분 또는 저녁에 10분, 이런 식으로 청소 시간을 고정해 놓는다. 시간을 내기도 어렵다면 어질러도 좋은 공간과 어지럽히지 않고 늘 깔끔하게 정리하는 공간을 구분해서 그 공간만 치우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재무 관리의 경우, 최근 몇 년 동안 유행하고 있는 통장 쪼개기야말로 개인의 재무 관리에 시스템을 도입한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통장 쪼개기는 구체적인 목적이나 계획 없이 은행에서 만들어주는 대로 통장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급여 통장, 지출 통장, 저축 통장, 예비비 통장 등으로 통장을 구분해서 관리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렇게 통장을 나눠서 관리하면 따로 통장 정리나 가계부 정리를 할 시간을 낼 필요가 없고, 재무 관리도 훨씬 쉽고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나는 진작에 정리와 통장 쪼개기를 통해 시스템의 힘을 경험한 터라 저자의 설명이 바로 와닿았다. 그렇다면 남은 숙제는 업무에 시스템의 힘을 도입하는 것. 저자는 조직 관리, 인사 관리, 재무 관리 등 회사 경영의 다방면에 있어서 시스템의 원리를 도입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인사 관리에 시스템의 원리를 도입하는 방법이었다. 저자는 기존 인력의 관리뿐 아니라 신규 채용에 있어서도 시스템의 원리를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그 시스템이라는 것이 학력이나 지연, 인맥 등 기존 인사 관리에서 높게 평가해온 항목이 아닌, 지원자의 열정과 포부, 창의력, 능력 등 새로운 평가 항목을 많이 반영한 점이 신선하고 놀라웠다. 보통 열정과 포부 같은 항목들은 인사 담당자가 자의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사기 쉬운데, 저자는 객관적인 평가 지표를 만들어서 누가 보아도 공정하다고 생각하게끔 신규 채용을 하고 있었다. 그저 시스템을 구축하고 관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시스템을 개발하고 더 나은 시스템으로 만들기 위해 개선하는 점이 좋았다. 이런 점은 우리나라 기업을 포함하여 많은 조직들이 새겨듣고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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