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
레이철 조이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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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는 퀴니에게 쓴 말을 생각하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창피했다. 그는 자신이 편지를 부친 뒤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 모린이 데이비드를 부르는 모습을 그려 보았다. 퀴니가 버윅에서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삶은 똑같을 것이다. 그는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편지는 우체통의 어두운 입 가장자리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해럴드는 도저히 편지를 놓아 버릴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날씨도 좋잖아."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았지만 그는 소리 내어 말했다. 달리 할 일도 없었다. 다음 우체통까지 걸어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는 마음이 바뀌기 전에 포스브리지 로의 모퉁이를 돌았다." (pp.22-3)

 

 

여기 암에 걸린 예전 직장 동료를 만나기 위해 영국 남부 끝에 위치한 킹스브리지에서 스코틀랜드 바로 밑에 위치한 버윅까지 걷겠다고 선언한 사내가 있다. 이름은 해럴드 프라이. 자그마치 1,000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걷겠다고 했으니 몸짱에 체력도 엄청 좋은 사람이 분명하다고? 놀라지 마시라. 그는 그저 몇십 년 동안 주류 회사에 다니다가 얼마 전에 은퇴한 60대 할아버지에 불과하다. 운동은커녕 별다른 취미 생활도 하지 않았던 그가 갑자기 예전 직장 동료를 만나기 위해 엄청난 도전을 한 것을 보니 그 동료와 은밀한 관계였던 게 분명하다고? 그것도 아니다. 동료와는 오랫동안 연락 한 번 주고받지 않았고, 어디에 사는지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렇다면 왜 그는 이 엄청나고도 뜬금없는 일에 도전한 것일까? 소설 <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에 그 답이 실려있다. 

 

 

4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인 데다가, 줄거리라고는 해럴드 프라이가 오로지 걷고 또 걷는 것뿐이기 때문에 사실 읽기 전에는 이 소설이 과연 재미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막상 읽기 시작하니 책장이 넘어가는 것이 아까울 정도였다. 좋게 말해서 '평범'이지, 은퇴 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아내와의 싸움을 반복하며 무기력하게 살고 있던 해럴드가 예전 직장 동료의 편지에 답장을 보낸다는 것이 그 길로 길고 긴 순례를 떠나기까지의 과정은 짧지만 매혹적이었고, 그랬던 그가 '오로지 걷고 또 걷는' 단순한 행위를 통해 어린 시절의 상처, 아내와의 불화, 하나뿐인 아들 데이비드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 지루하기 짝이 없었던 직장 생활 등 지난날의 묵은 때를 벗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모습은 실로 감동적이었다. 

 

 

그가 만난 사람들은 또 어떤가? 겉보기엔 허름하고 보잘 것 없던 여인이 그에게만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성녀(聖女)가 되고, 누가 봐도 세련되고 멋진 차림의 중년 남성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임을 토로하는 등 해럴드는 길 위에서 수많은 기적을 만났다. 이쯤 되면 대부분의 소설에서는 그를 성자 또는 영웅으로 그릴텐데, 이 소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자칫 화려하게 끝날뻔 했던 그의 순례는 지극히 순례답게 끝이 났다. 판타지 드라마에 나올 법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반전도 없었다. 할리우드 영화처럼 그가 순례 끝에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지도 않았다. 나는 이런 결말이 지극히 영국적이라서, 소설치고는 너무 '소설같지' 않고 현실적이라서 좋은 줄만 알았다. 그런데 책 끝부분에 실린 저자의 이야기를 읽고 나니, 이 소설은 그냥 소설이 아니라 저자 레이철 조이스의 이력과 경험이 상당 부분 투영된, 실화 내지는 우화와도 같은 소설이기 때문에 그토록 감동적이고 현실적으로 다가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 레이철 조이스는 배우로 활동하다가 결혼과 함께 방송 작가로 전직했다. 네 명의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이자 각본가로 활발히 활동해온 그녀는 몇 년 전 후두암 판정을 받은 아버지를 위해 이 소설의 초안이 되는 라디오 극본을 집필했다. 그녀의 극본은 BBC 라디오4의 라디오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그 해 최우수 라디오 드라마 상을 수상할 만큼 많은 청취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 극본을 가지고 어릴적부터 꿈꿔온 첫 소설 집필에 도전했다. 열네 살 때 가명으로 출판사에 글을 보냈을 만큼 오랫동안 글쓰기를 좋아했던 그녀는 정작 소설이라는 벽의 문을 두드리지는 못하고 연기와 극본이라는 다른 문만 두드리며, 그야말로 변죽만 울리며 살았다. 그러다가 생애 처음으로 이 소설을 쓴 것이다.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영국 아마존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올랐으며, 그녀에게 브리티시 내셔널 북 어워드 신인 작가상 수상과 맨 부커 상의 후보라는 영광을 안겨 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이 소설을 쓰게 만든 계기인 아버지는 소설은커녕 그보다 전에 방영된 라디오 방송조차 듣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저자의 이야기를 읽고나니 해럴드 프라이는 저자, 해럴드가 찾아간 예전 직장 동료는 저자의 아버지가 모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전 나를 위해 희생을 하고, 나를 끔찍이도 사랑해준 사람을 위해 오랜 시간 노력했지만 결국 구할 수 없었다는 아쉬움, 회한, 자기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겠다는 용기와 희망 등등 우연이라기엔 닮은 부분이 너무나도 많다. 그렇다면 저자에게 순례란 곧 소설 쓰기라는 해묵은 숙제였을 터. 해럴드가 예전 직장 동료를 만나기 위해 순례를 떠난 것처럼, 암으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위해 소설 쓰기라는 자기만의 순례를 하다가, 꼭 해럴드처럼 구하고 싶은 사람은 구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만 구원한 저자가 느꼈을 슬픔과 마음 한편의 성취감, 그 모순적인 기분을 상상하니 나까지 가슴이 저릿하다. 

 

 

어떤 이는 이 소설을 한 노인의 순례기 또는 여행기로, 어떤 이는 한 편의 로드무비와도 같은 소설로 여길지도 모르지만, 나한테는 이 소설이 그 어떤 작가의 자서전보다도 진솔한, 자기고백 같은 소설로 기억될 것 같다. 소설 속 해럴드 프라이의 이야기도 충분히 멋지고 감동적이지만, 글쓰기도 좋아하고 아버지도 한없이 사랑하는 나는 저자를 주인공으로 상상한 이야기에 더 큰 감동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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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퍼스트 클래스 승객은 펜을 빌리지 않는다.


전직 일본 항공사 스튜어디스가 십여 년 넘게 관찰하고 연구한 퍼스트클래스 고객들의 성공 비결을 담은 책이라고 합니다. 기내식을 고르는 요령부터 업무 처리, 메모, 독서, 취미생활 등 다양한 습관들을 일본인 특유의 꼼꼼함으로 자세하게 소개한 책일 것 같아서 기대가 됩니다.












2. 화폐를 점령하라


화폐의 역사라든가 화폐 자체의 속성에 관한 책은 많지만 대안 화폐에 대한 책은 드문 것 같습니다. 이 책은 화폐의 부정적인 속성과 폐해, 대안 화폐까지 자세하게 소개한 책일 것 같네요.












3. 원씽


멀티플레이어, 멀티태스킹 등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는 것을 찬양하는 시대에, 한 번에 오직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라는 메시지가 어떤 울림을 가질지 기대가 됩니다.













4. 편집의 힘


글쓰기를 인생에 비유한 책은 여럿 보았는데, 글을 편집하는 과정을 인생에 비유한 책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현직 편집기자가 소개하는 편집의 기술과, 그것을 인생에 적용하는 비법. 궁금하네요.










5. 세상을 여행하는 초심자를 위한 안내서


라디오 방송에 게스트로 자주 출연하는 김현철 정신건강전문의의 신간입니다. 트위터를 통해 이 책이 좋다는 멘션을 많이 받아서 신간평가단 멤버들과 같이 읽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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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머핀 2013-09-09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
 
요시모토 바나나의 인생을 만들다
요시모토 바나나, 윌리엄 레이넨 지음, 황소연 옮김 / 21세기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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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따르는 경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성장의 기회를 놓치는 사람입니다. 어떤 경험이든 대처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의 선택이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적으로 대처하는 선택입니다. 불만을 토로하고, 울부짖고, 눈물 흘리고, 원망하고, 자신을 나무라며 지나간 일들에 집착합니다. 또 하나의 선택은 긍정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웃음을 잃지 않고, 타인의 도움에 감사하고,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며 과거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갑니다." (p.13) 

 

"자신이 걸어가야 할 인생은 자기 자신과의 진솔한 소통, 교감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머릿속의 나머지 30퍼센트를 차지하는 부분입니다. 이 30퍼센트가 참된 자기 자신입니다." (p.38) "사람들은 세상이 주입한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에 얽매여 진정한 자신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중략) 누구나 살다 보면 인생의 문제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인생에서 찾아오는 이런 온갖 경험에 대처하고자 하지 않으면 더 높은 수준의 정신세계로 도약할 기회를 잃고 맙니다." (p.81)

 

 

검은 머리, 감색 교복, 검은 스타킹, 검은색 운동화...... 몸에 걸치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검은색 아니면 감색, 회색 같은 단조로운 색이었던 중학교 시절, 자주 가던 중고책방에서 책 한 권을 만났다. 빨주노초파남보. 자극적인 색상의 표지가 어찌나 마음에 들던지. 책의 제목은 <암리타>였고, 그 책을 읽고나서부터 나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팬이 되었다. 그 때가 2000년대 초반이라서 요시모토 바나나도 그 시대에 데뷔했거나 빨라봤자 90년대 중후반에 첫 책을 낸 작가일 줄 알았다. 그런데 대표작 <키친>이 무려 1988년에 나왔고, 데뷔연도는 그보다 한 해 앞선 1987년이라고 한다. 마냥 젊고 풋풋한 작가인 줄만 알았는데, 내가 첫 돌을 맞을 때 작가로 데뷔했다니... 그렇다는 것은 이제 곧 데뷔 30주년? 내가 나이든 건지, 그녀가 생각보다 나이가 많은 건지, 세월이 빠른 건지 분간이 안 된다. 아니면 셋 다 맞거나.

 

 

요시모토 바나나의 신간 <인생을 만들다>는 그녀가 세계적인 영혼 치유 전문가 윌리엄 레이넨과 1년 넘게 주고받은 메일을 엮은 에세이다. '소설도 아니고, 갑자기 웬 영혼 치유 에세이람?' 사실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가 에세이를 내는 건 흔한 일이지만, 그냥 에세이도 아니고 영혼 치유 전문가와 개인적으로 나눈 글을 에세이로 내는 건 흔치 않은 일이거니와 조심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키친>, <암리타>, <도마뱀>, <하치의 마지막 연인> 등 그녀의 지난 작품들을 되짚어 보고나서야 결코 뜬금없는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상처와 고통, 회복과 구원에 대한 소설을 주로 써온 그녀가 영혼을 치유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윌리엄 레이넨과 나눈 메일 속에서 요시모토 바나나는 그간 소설에는 직접적으로 쓰지 않았던, 어린시절의 기억, 개인적인 어려움, 창작의 고통, 유산으로 인한 아픔 등 내밀한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그 이야기들을 읽고 있자니, 일본을 넘어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작가인 그녀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아주 당연한 사실이 새삼 뭉클하게 다가왔다. 오히려 진작에 그녀의 작품 속에서 행간을 통해 읽었어야 하는 이야기들을 이제서야, 이렇게 적나라한 문장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독자로서 한없이 부끄러웠다. 

 


이 책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녀의 고백과 질문에 대한 윌리엄 레이넨의 답변을 함께 소개한다. 사실 최근에 힘든 일이 많아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매우 지쳐 있었다. 연말은 다가오는데, 올해도 이룬 것 없이 지나가는 것 같아서 허무하고 서글프고, 그런 마음을 속에 담아두면 그만인 것을 가을탄다는 핑계로 주위 사람들에게도 자주 내비쳤다. 투정에 짜증에... 내가 생각해도 참 밉상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이 반성했다. 일단 내가 하는(또는 내가 한다고 믿는) 생각의 대부분은 가족이나 친구, 연인, 직장 상사나 동료, 대중매체 같은 외부의 생각이지 '진정한 나'가 하는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뜨끔했다. 연말까지 뭐라도 이뤄야 한다는 것은 내가 정한 기준이 아닌데도 거기에 얽매여 마음상하고 주변 사람들까지 괴롭혔으니 한심하다. 아무리 안좋은 일이 있어도 스트레스를 받아도, 내가 그것을 고통이나 아픔이라고 느끼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한 그것은 안좋은 일도 아니고 스트레스도 아닌 법. 다른 작가도 아니고, 단발머리 여중생 시절에 처음 만난 요시모토 바나나의 에세이에서 이런 귀한 지혜를 얻게 되어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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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시간 관리 - 내 인생의 꼭 맞는 속도를 찾는 8가지 방법
라마 수리야 다스 지음, 안희경.이석혜 옮김 / 판미동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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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을 산 지 어느덧 4개월이 지났다. 스마트폰을 장만하니 좋은 점이 몇 가지 있다.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컴퓨터를 시시때때로 켜지 않아도 스마트폰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 서비스를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점, 이동하거나 운동할 때 따로 MP3 플레이어를 챙기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나 음악을 듣거나 라디오를 들을 수 있다는 점 등이다. 그런데 사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스마트폰이 없어서 못했던 일들은 아니다. 메일, 트위터, 페이스북이야 번거롭기는 해도 컴퓨터로 능히 할 수 있고, 음악을 듣는 것도 MP3플레이어와 라디오로 듣던 걸 다른 기계로 듣는 것에 불과하다. 안좋은 점이라면 책 읽는 시간이 많이 줄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전에는 이동 중이나 자기 전에 주로 책을 읽었는데, 요즘은 그 시간에 스마트폰으로 팟캐스트를 듣는 일이 많다. 책 읽는 시간이 줄어든 것만으로도 손해인데, 스마트폰으로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다른 일을 같이 하다보니(멀티태스킹을 하다보니) 집중력이 낮아지고 효율도 떨어진다. 그만해야지 하는데 몇 달 사이에 습관이 되어버려 좀처럼 그만둘 수가 없다. 스마트폰이 참 애물단지다 싶다. 지난 밤 스마트폰 때문에 대폭 줄어든 시간을 쪼개 <붓다의 시간 관리>라는 책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트위터에 뜬 140글자를 읽는 데는 몇 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산만함에 빠진 대가는 훨씬 더 오래 지속된다. 만약 우리 자신을 더 많은 일에 관여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인생은 수박 겉핥기 식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분주함은 삶의 깊이를 잃게 만든다." (p.14) 문장을 읽자마자 저자가 나의 마음을 읽었나, 내 생활을 보기라도 했나 싶었다. 뭘 먹었느니, 어디에 왔느니 등 시덥잖은 트위터의 멘션을 읽다가 이런 진짜 '멘션(mention)'은 놓칠 뻔 하다니! 이 문장 외에도 어떤 귀한 문장들이 담겨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속도를 늦춰 천천히 읽어보았다.



티베트 불교의 2세대 본토 라마이자 족첸 센터의 설립자인 저자 라마 수리야 다스는 먼저 불교와 시간 관리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다. "불교는 시간과 시간의 운용을 심도하게 다루는 공부다. 마음과 정신을 잘 운용해야 시간에 더 적게 얽매이고, 자유로움 속에서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출발선상에 섰을 때처럼 무한대의 기회와 가능성을 갖게 된다." (p.15) 불교에 대해서는 쥐뿔만큼도 모르지만(참고로 무교임), 불교가 오랜 역사만큼이나 다른 종교에 비해 영적이고 철학적이라는 데에는 동의한다. 그중에서도 티베트 불교는 신성한 여성 에너지와 이를 통해 남성 에너지를 보완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인데, 불교를 포함한 고대 종교와 철학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에너지의 흐름, 정신의 작용, 영혼과 기의 순환 등에 관심을 가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왜 현대인들은 에너지, 정신, 영혼, 기와 같은 개념들을 잊고 살게 된 것일까? "예수와 초기 기독교인들도 이런 균형에 초점을 맞췄으나, 원형의 메시지는 가부장제에 의해 검열되고 흡수되었다. 이는 <도마복음>, 빌립, 막달라 마리아와 <다빈치 코드>의 작가 댄 브라운이 등장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p.155) 즉, 기독교의 출현을 경계로 에너지의 흐름을 집중적으로 다루던 고대 종교와 철학, 연금술, 주술 등은 미신 또는 비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사장되었다는 것이다. 댄 브라운의 팬인 나는 오래전부터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이러한 '어두운 역사'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소설가가 아닌 종교인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처음 들어서 신선하면서도 더욱 설득력있게 다가왔다.



이 책에서 특히 '기다림의 미학'에 대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신기술은 사람들이 더욱 빠르게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도와주며 생활을 더욱 편리하게 만든다. 그러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모든 것을 전보다 빠르고 편리하게 해결할 수 있게 된 대가로 사람들은 '기다림'을 잃었다. 누구를 기다리거나 무엇을 하거나 사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을 사람들은 '버리는' 시간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상외로 인류가 이룬 일들의 상당 부분은 기다리는 동안 이루어졌다. "구소련 사람들은 칫솔에서 텔레비전까지 무언가를 사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줄을 서야했다. 잔돈을 거슬러 주는 줄, 점원이 주문을 넣는 줄, 물건을 배송받기 위해 주소를 작성하는 줄이 있었다. 줄 서서 기다리는 동안 많은 사람이 소설이나 시, 미술사 책을 읽었다. 그 결과 러시아 사람들은 굉장히 문학적이고 독서를 즐기게 되었다. 그들은 모임을 만들고, 줄을 서서 기다리며 서로를 알아 가고, 다른 사람들이 볼일을 보는 동안 자리를 맡아 주기도 했다. 이와 똑같은 일이 미국에서도 일어났다. 사람들은 공연표를 사기 위해 24시간 진을 치고 기다리거나 추수감사절 다음 금요일 파격세일을 하는 백화점 앞에서 밤새 줄을 서거나 중요한 운동 경기 티켓을 사려고 줄을 선다. 이 기다림은 원래의 목적보다 더 모험적이고 큰 만족감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심지어 새로운 로맨스가 시작되기도 하고 새로운 비즈니스 인맥을 발굴하기도 한다." (p.213) 나 역시 스마트폰이 생기기 전에는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이동하는 동안 어김없이 책을 읽었는데, 이제는 스마트폰에서 시시한 연예 기사를 읽거나 SNS를 확인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스마트폰이 있어서 아무 데서나 인터넷을 할 수 있고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을 수 있는 점은 좋지만, 그만큼 기다리는 시간을 유용하게 보내는 방법은 잊어가고 있는 것 같다. <붓다의 시간 관리>. 몇천 년을 이어져 온 불교의 사상에서 오늘 당장 적용할 수 있는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 놀랍고, 붓다의 가르침대로 시간에 덜 얽매이고 순간을 영원처럼 사는 방법을 익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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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번째 왕관
예영숙 지음 / 더난출판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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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번째 왕관>의 저자 예영숙은 평범한 주부였던 서른 네 살 때 삼성생명 계약직으로 입사하여 2000년부터 2009년까지 10년 연속 그랜드챔피언 자리에 올랐고, 2009년 4월에 명예전무로 승진, 2013년 또다시 전사 그랜드챔피언에 오른 보험왕 중의 왕이다. 연간수입보험료가 255억 원에 이르는 그녀가 관리하는 고객의 수는 무려 3천 명! '걸어다니는 금융기관'이라는 별명이 괜한 것이 아니다 싶다. 사실 보험업에 대해 안좋은 인상이 있는 터라 그다지 읽고 싶은 책이 아니었는데, 저자의 약력을 읽고 나서 마음이 달라졌다. 어떤 업계든 정상에 오른 사람에게는 성공한 사람 나름의 이유가 있고 비결이 있지 않겠는가? 게다가 여자 혼자 몸으로, 대단한 학력이나 스펙도 없이 오로지 자기 노력과 실력만으로 업계 최고가 되었다고 하니 그 비결이 무척 궁금했다.



궁금한 마음을 안고 책을 끝까지 읽고나니 머릿속에 딱 세 글자가 떠올랐다. '디테일'! 평범한 주부였던 저자가 계약직으로 보험업계에 뛰어들어 하루아침에 보험왕의 자리에 등극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실적이 좋지 않았던 적도 많았고, 겨우 실적을 올려도 오해로 인해 고객들의 항의와 비난을 받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저자는 금방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포기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주 작은 것으로라도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때로는 하루에 몇 번이나 옷을 갈아입는 일도 불사했다. "보험왕이 되기 전 실적이 좋지 않았을 때도 나는 최소한 하루에 한두 번은 옷을 갈아입었다. 때와 장소에 맞는 옷차림은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을 하다 보면 경조사가 겹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결혼식에 갔던 옷차림으로 장례식에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조금만 더 신경 써서 격식에 맞는 옷차림을 갖춘다면 상대가 나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남에게 좋은 이미지를 남기려면 작은 것 하나도 배려할 줄 아는 마음 자세가 중요하다." (p.25) 이미지뿐 아니라 행동에 있어서도 디테일에 신경을 썼다. "고객과 대화하는 동안에도 계속 메모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메모하는 모습을 보고 상대는 '이 사람이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를 만난 자리에서 상대가 이런 생각을 하면 대화는 더욱 매끄러워진다. 이처럼 메모하는 습관은 상대에게 신뢰와 호감을 주는 동시에 대화를 계속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p59) 고객과 대화하는 빈번한 상황에서 메모라는 디테일을 통해 최고의 성과를 얻어낸 저자의 노력이 대단하다.



보험업의 특성상 저자는 고객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거절당한 경험이 수없이 많다고 한다. 거절당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기하고 돌아서는데, 저자는 거절하는 사람의 본심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고객으로 확보했다. "설득에 실패한 것은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더 많이 들여다보라는 뜻이다. 거절의 이유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보험은 들고 싶지만 당장 여유가 없을 수도 있고, 보험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아서 거부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세일즈맨의 본분은 설득에 있고, 고객은 일단 거절부터 한다. 설득에 저항하는 것은 고객의 자연스러운 심리다." (p.45) 말이 쉽지, 거절하는 사람의 속마음이 무엇인지 알아낸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거절당하면 바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 고객 리스트에 올려놓고 기회가 오기를, 때가 되기를 기다리는 지혜. 이것 역시 저자만의 디테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형적인 성공 스토리, 자기계발서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후반부로 갈수록 개인적인 경험이나 스스로 터득한 삶의 지혜보다는 이미 여러번 다른 책이나 매체를 통해 다뤄진 바 있는 사례가 인용된 경우가 많아서 아쉬움이 남지만, 보험업뿐 아니라 영업, 세일즈 등 판매직 전반에 적용할 수 있고, 여성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새겨들으면 좋을 만한 내용이 많으니 인생 선배, 직장 선배에게 한 수 배운다는 생각을 가지고 읽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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