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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여자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근본적으로 책이란 게 뭘까? 종이 위에 일정한 순서에 따라 글자를 배열해 놓은 것에 불과해. 글을 쓰고 나서 마침표를 찍는다고 해서 그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내 책상 서랍에는 아직 출간되지 않은 미완성 원고들이 몇 개나 들어 있어. 난 그 원고들이 살아 있는 거라 생각 안 해. 아직 아무도 읽은 사람이 없으니까. 책은 읽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생명을 얻는 거야. 머릿속에 이미지들을 그리면서 주인공들이 살아갈 상상의 세계를 만드는 것, 그렇게 책에 생명을 불어넣는 존재가 바로 독자들이야." (p.315)
"픽션의 힘은 위대하지만 전능하지는 않다.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그녀를 즐거운 상상의 세계로 이끌어 단 몇 시간이라도 야수가 가하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 자체가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픽션의 세계에 사는 것으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마약이나 술에 의지해 잠시 동안 비참한 현실을 잊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어느 순간 무시무시한 현실이 다시 상상의 세계를 압도하여 서슬 퍼런 이빨을 드러낼 것이기에 우리는 지극히 무기력할 뿐이었다. (p.400)"
기욤 뮈소의 소설을 밤새도록 읽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드라마틱한 러브 스토리에 판타지를 덧입힌 비슷비슷한 내용이었는데, 그 때는 한편 한편 참신하면서도 감동적인 이야기라고 극찬하며 푹 빠져 있었던 게 신기할 따름이다. 오랜만에 기욤 뮈소의 소설을 읽었다. 제목은 <종이 여자>. 2010년 이 책이 나왔을 당시에는 기욤 뮈소에 대한 애정이나 열정이 이미 식어서 읽어 볼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어떤 서평집을 읽다가 이 소설에 짤막하게 나의 모교가 배경으로 등장한다는 것을 알고 궁금한 마음에 급히 책을 구해 읽었다. 정말 '짤막하게' 나와서 아쉬웠지만, 소설 자체는 기욤 뮈소에 푹 빠져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할 만큼 재미있었고, 그동안 기욤 뮈소가 (좋은 의미로) 달라졌다는 느낌도 들어서 반가웠다. 이 책 이후에 나온 작품이 있다면 읽어보고 싶을 만큼.
<종이 여자>는 기욤 뮈소의 기존 소설과 비교할 때 러브 스토리와 판타지의 결합이라는 형식상 특징은 동일하지만, 창작의 의미와 문학의 역할에 대한 성찰이라는 새로운 문제의식이 더해졌다는 점은 구별된다. 작가가 후기에서 '이 소설에서는 물론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하지만 문학 창작, 독서에 대한 생각도 나누고 싶었습니다' 라고 직접적으로 밝혔듯이, 이 소설은 문학 창작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나타내는 대목이 유난히 많다. 독자만으로 작품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픽션은 픽션일뿐, 현실을 바꾸고 싶다면 픽션이 아닌 현실에서 직접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 작가는 창작의 주체인 작가와 작품, 독자, 그리고 현실 - 이 네 가지가 상호작용했을 때 비로소 창작이 완성되고 문학 작품의 존재 의미가 분명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창작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기욤 뮈소의 분신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닮은 점이 많은 주인공 톰 보이드와 세 여성 캐릭터의 관계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오랜 친구 캐롤은 창작의 이유 또는 계기를 제공한 인물이다. 톰은 둘도 없는 친구 캐롤이 암담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괴로운 현실을 잊게 하기 위하여 이야기를 쓰다가 소설가가 된다. 즉, 창작의 최초 목적은 현실 도피였다. 톰의 전 연인인 오로르는 픽션과 현실의 차이를 깨닫게 해주는 인물이다. 오로르가 떠난 뒤 톰은 아름다운 연애 소설을 쓰는 것과 현실에서 사랑을 이루는 것은 별개라는 것을 깨닫고 절망하고, 창작에 대한 의욕마저 잃는다. 창작의 한계를 알려주는 인물로도 볼 수 있다. 톰의 소설에서 튀어나온 '종이 여자' 빌리는 창작의 의미를 되새김으로써 창작의 반복, 즉 재창작으로 나아가게 하는 인물이다. 창작의 힘도 알고 한계도 알게 된 톰은 허구인지 실제인지 모를 여인 빌리와의 만남을 통해 픽션과 리얼리티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오로지 작가로서의 역할과 열정에 충실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정반합?).
전체적으로 작가 톰의 재탄생과 또 다른 작품의 창조, 독자와의 만남, 현실의 변화 - 이렇게 네 가지 변화를 짜임새있게 제시함으로써 작가는 이 중 어느 하나가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 상호작용할 때 위대한 작품이 완성되고 현실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완성했다. 기욤 뮈소 하면 대중성만 높다, 환상을 덧입힌 연애물만 쓴다는 편견이 있는데(심지어는 팬인 나조차도 그런 인식이 있었는데), 이 소설을 통해 기욤 뮈소 소설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아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