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 교사들과 함께 쓴 학교현장의 이야기
엄기호 지음 / 따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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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보니 학창시절의 안좋은 기억들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그런데 비단 교사들만의 문제일까?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말이 있다. 일촉즉발 교실의 모습이 꼭 지금의 우리 사회 모습 같아서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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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 교사들과 함께 쓴 학교현장의 이야기
엄기호 지음 / 따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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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2학년 때의 담임은 정말 돈을 밝히는 교사였다. 그는 공부는 잘하지만 단칸 셋방에 사는 통에 촌지를 바칠 여력이 되지 못하던 나를 많이 미워했다. 학생들의 선거로 반장이 되었지만 그는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모욕했다. 심지어 다른 학생들 앞에서 나를 모욕하며 저런 '나쁜 어린이'가 되지 말라는 말도 했었다. 울며 집에 돌아온 나를 본 어머니는 며칠 후 화장품을 사서 담임을 찾아가셨다. 나는 아직도 그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어머니가 돌아간 다음 그 교사는 "누가 국산 화장품을 쓴다고......" 하면서 어머니가 놓고 간 화장품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p.7)



이 이야기는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의 저자 엄기호가 서문에서 밝힌 경험담이다. 이 책을 읽다보니 학창시절의 안좋은 기억들이 스멀스멀 떠올랐다(평소에도 시도때도 없이 떠올라 날 괴롭히는 기억들이기도 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벌써 십 년 가까이 되었건만, 내가 다니던 때의 학교와 지금의 학교는 별로 달라진 게 없는 모양이다. 책의 1장 <교실이라는 정글>을 보면 수업을 듣지 않고 널브러져 있는 아이들, 입시에 도움이 되는 수업만 골라 듣는 아이들의 이야기부터 학교 폭력, 교사와 학부모 간의 갈등 문제가 나오는데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학교 폭력이나 왕따는 다행히도 목격한 일이 없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2장 <교무실, 침묵의 공간>과 3장 <성장 대신 무기력만 남은 학교>의 내용들은 처음 보는 것이 많았다. 내가 지금 교사도 아니고, 교대나 사범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교사의 교, 선생의 선 자만 들어도 치를 떨 만큼 관심도 없다보니 권위적인 교직 내 분위기, 선후배, 동료 교사 간의 갈등 같은 일은 알 길이 없었던 탓이다. 구세대 교사들과 신세대 교사들의 갈등은 어렴풋이 이해가 된다. 저자가 지적한대로 최근 임용되는 교사들은 수능 성적 상위권이고 (수능 성적이 좋게끔 사교육을 받을 수 있었을 만큼) 가정 형편도 좋다. 내 친구들 중에도 교대, 사범대를 나왔거나 하다못해 교직이수를 한 친구들은 대개가 그렇다. 게다가 이런 친구들은 대학 시절에도 임용 준비를 하느라 색다른 경험을 하거나 교대, 사범대 출신 외의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별로 없다. 그런 아이들이 소위 말하는 문제아, 꼴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런 선생들이 있는 학교에 나는 내 아이를 보내고 싶지 않다. 내가 겪어본 구세대 교사들은 더더욱 싫다. 아직 아이는커녕 결혼도 안 했지만, 가능하다면 대안학교에 보내거나 홈스쿨링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이게 비단 교사들만의 문제일까?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김두식 교수가 <불멸의 신성가족>에서 지적했듯이 사법부에서도 그럴 것이고, 행정부, 의학계, 학계 등 점점 엘리트화, 세습화, 경직화, 폐쇄화되는, 소위 말하는 '순혈집단'에서는 공통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본다. 우리나라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사법부와 의학계가 폐쇄적, 경직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직업 또는 직위가 할아버지에서 아버지, 아버지에서 아들로 세습되고, 다른 분야, 다른 계층의 인간들과 전혀 소통이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이후에는 그런 현상을 행정부, 학계가 겪었고, 이제는 철밥통으로 불리는 교사, 공무원 또는 대기업이 겪고 있다. 고인 물은 썩는다. 다양성이 없는 집단은 환경의 변화에 쉽게 망한다. 사법부, 의학계의 병폐, 행정부, 학계의 폐단을 생각한다면, 앞으로 교사, 공무원, 대기업 임원 집단이 어떤 문제를 낳을지는 뻔하다. 그들은 각종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것이며, 사람들은 그들을 욕하면서도 자기 자식들은 거기에 집어넣으려고 갖은 애를 쓸 것이다. 사법부, 의학계를 욕하면서 제 자식은 판검사, 의사가 되기 바라고, 정부와 교수 사회를 욕하면서 제 자식은 고시에 패스하고 교수가 되기 바라며, 이제는 학교라면 치를 떨었던 사람들이 제 자식을 교대에 보내 선생 만들려고 하고, 공무원, 대기업 직원이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악순환을 끊는 곳이었어야 할 학교는 악순환을 만드는 곳이 되었고, 이제는 그 자체가 악순환에 편입되었다. 그동안의 악순환이 점점 더 확대되고 심화될 것이 분명하다.



학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정을 벗어나 처음으로 만나는 사회다. 학교에 대한 기억이 대부분 좋지 않다는 것은 개인으로서는 비극이고 사회적으로는 큰 손해다.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두렵다면 좀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내 아이를 아무 걱정없이 학교에 보낼 수 있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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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 “이게 사는 건가” 싶을 때 힘이 되는 생각들
엄기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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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우리가(내가) 잘못 사는 게 아닐까? 책을 읽는 내내 내 안의 속물근성이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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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 “이게 사는 건가” 싶을 때 힘이 되는 생각들
엄기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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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연을 보러 가면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구경을 온다. 그런데 모두가 하나같이 들고 온 것이 있다. 카메라다. 요즘에는 조그마한 '똑딱이'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다. 다들 주둥이가 대여섯 발은 나온 DSLR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곳곳에서 플래시가 터진다. 사람들은 카메라 구멍에 눈을 박고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다. 공연에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중략) 우리는 카메라의 심부름꾼이 되었다. 우리는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즐길 뿐 결코 작품을 감상하지 않는다. 내 앞에 지금 서 있는 것이 앙코르와트건 성 베드로 대성당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내가 몰입하고 있는 것은 저 경치가 아니라 카메라이기 때문이다. (pp.107-8)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의 사랑의 '결'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가 없다. 이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동성을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다시 고백이 강요된다. 동성애자라는 특수한 정체성만을 공고화하고 자연화할 수 있는 '언제부터', '왜' 같은 질문이 이들에게 던져진다. (중략) 이들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행위의 주체로 인정되지 않는다. 오로지 '성적이기만 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한 동성애자는 자신의 일상에서 성 정체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겨우 2퍼센트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말하는 순간 자신은 100퍼센트 성적이기만 한 존재로 취급받는다고 말한다. (pp.195-6)

 

이전까지는 가끔 등하교를 하는 중고등학생들과 함께 버스를 탈 때 도무지 아이들의 언어를 견딜 수가 없었다. '은/는/이/가/을/를/다' 같은 말을 빼고 나면 남는 건 '졸라'와 '씨바'다. 가끔은 아이들 멱살을 잡고 "울부짖지 말고 말을 하란 말이야, 이것들아" 하고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 아이들의 언어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냥 욕이라고 생각했던 '씨바'와 '졸라'가 아이들에게는 공감의 신호였다. 이들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고 있음에도 다만 우리가 못 알아듣고 있었을 뿐이다. (pp.140-1)

  

 

길거리든 식당이든 연예인이 나타났다 하면 사람들은 스마트폰이나 카메라를 꺼내들고 일제히 사진을 찍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연예인을 보면 멀찍이서 보거나 겨우 용기를 내 악수를 청하거나 사인을 부탁하는 게 고작이었는데, 요즘은 사진부터 찍는다. 대체 왜 그럴까? 아무리 대단하고 유명한 연예인이 나타났다 한들 나와 똑같은 사람, 평등한 인간인데 왜 누구는 플래시를 받는 사람이고 누구는 찍는 사람인가에 대한 의문조차 없다. 뻔뻔한 건지, 자존감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연예인 중에는 그런 시선과 관심을 불편해하는 이도 있을텐데 사람들은 그러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는다. 카메라 렌즈 앞에 놓이는 순간 연예인도 뭣도 아니고, 그저 피사체에 불과하다는 식이다. 연예인만 찍는 게 아니다. 얼마 전 뉴스에서 불꽃놀이 대회를 구경나온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는데, 이들 역시 하나같이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불꽃이 시커먼 하늘을 수놓는 아름다운 광경. 맨눈으로 보기에도 아까운 그 광경을 왜 사람들은 카메라 렌즈 너머로만 보려고 하는가. 왜 지금 당장 보지 않고 나중에 보려고 하는가. 여행지에서도, 연인과 데이트를 할 때도, 입학이나 졸업 같은 기념할 만한 때에도 사람들은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지 않고 사진부터 찍으려고 든다. 사진. 대체 사진이 뭐길래.

  


엄기호의 2011년 저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를 보니 저자 역시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눈이 있어도 카메라라는 대체 감각기관 없이는 온전히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상사에도 그렇게 무감각하다. 사회 지도층이 얽힌 논란에 대해서 무감각하다. 잘못된 회사 방침이나 관행에 대해서도 무감각하다. 성희롱을 당해서 쫓겨나듯이 회사를 떠나는 여자 직원을 보면서 같이 싸워주기는커녕 위로도 못해줄 만큼 마음도 굳었다. '무감각증'은 오로지 저들보다 힘없고 약한 이들에 대해서만 예외다. 이제 막 들어온 인턴 사원의 오타나 지각에는 시시콜콜 지적을 하고, 커피 전문점 점원이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사장 나오라며 열불을 낸다. 누구나 바쁜 출근길에 어깨를 부딪친 젊은 여자에게는 시비를 걸고 욕을 한다. 어린 아이돌 가수나 젊은 여자 연예인이 어쩌다 방송에서 말실수를 하거나 스캔들이 나면 득달같이 달려들며 훈수를 둔다. 비주류, 소수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비주류, 소수자 문제를 무시하고 묵살했던 시대는 가고 이제는 과민반응의 시대가 왔다. 주로 표적이 되는 대상은 동성애자, 성적 소수자다.

 


동성애자, 성적 소수자를 혐오하는 이들을 동성애자를 오로지 동성애자로만, 소수자를 소수자로만 본다. 그들이 꼬박꼬박 세금도 내고 투표권도 행사하고 일도 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똑같은 시민이라는 사실은 보지 않는다(또는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동성애자라는 사실에만 과민반응한다. 어디 이들뿐인가? 저자는 청소년 문제, 대학 문제, 20대 문제 역시 마찬가지라고 지적한다. 10대 청소년은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다. 집에서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형, 오빠, 누나, 언니, 동생이다. 누군가에게는 친구이며, 종교집단의 일원이고, 인터넷 카페나 팬클럽의 회원이며, 블로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10대 청소년을 그저 학생으로 규정하고, 조금이라도 학생의 본분에서 벗어나면 문제아로 낙인을 찍는다. 방황하는 대학생, 취업 못하는 20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역할로만 규정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드물다. 10대든 60대든, 여자든 남자든, 주류든 비주류든, 다수자든 소수자든, 몸뚱이 하나로 수십, 수백 개의 역할을 짊어지고 사는 유한하고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은 누구나 똑같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그들이 힘들어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감각이 없다. 무감각하다. 

 

 

대체 이 감각없음, 무감각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철학의 빈곤 때문일 수도 있고, 인문학의 부재 때문일 수도 있고, 자본주의의 병폐 때문일 수도 있고, 뿌리깊은 사회 구조의 고착 때문일 수도 있고, 법과 제도의 한계 때문일 수도 있다. 저자는 여기에 언어의 문제를 추가한다. 저자에 의하면 의사들이 어려운 의학 용어로 이야기를 하고 판검사나 변호사들이 일반인들은 잘 알아듣지 못하는 법률 용어를 섞어 이야기 하듯이 아이들은 저들의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사나 판검사, 변호사가 알아듣지 못하게 말하는 것에 항의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은 꾸짖는다. 배운 사람, 가진 사람에게는 무감각하고, 만만한 사람, 못 배운 사람, 못 가진 사람들에게만 과민반응한다. 언제쯤 이들이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들을 수 있을까? 저자는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다고 말하지만, 나는 (나를 포함하여) 우리 중 다수는 잘못 살고 있는 것 같다. 사회의 문제, 구조의 문제, 제도의 문제를 아예 못 보고 못 들은 거라면 몰라도,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사는 거라면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대체 언제쯤 내가 잘못 산 게 아니라 온전히 사회의 탓이라고 안도(?)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아직도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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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을 발로 찬 소녀 2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뿔(웅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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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그 라르손이 열다섯 살 때 윤간 현장을 목격했다는 사실은 3부를 다 읽고 아쉬운 마음에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위키피디아에서 알아낸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나니 작품이 새롭게 보인다. 안 그래도 남성인 작가가 여성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게 단순히 저널리스트적인 열정 때문인지, 문학인 장치인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원래 반파시즘 성향이 강한데 남성우월주의도 파시즘의 하나로 보고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런데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였다니, 그것도 열다섯 살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끔찍한 사건이 이유였다니 마음이 아프다.


위키피디아에는 그 밖에도 충격적인 이야기들이 몇 가지 더 있었다. 스티그 라르손이 밀레니엄 3부작을 막 완성했을 때, 기자로서는 경력이 길지만 작가로서는 무명이다보니 책을 내줄 출판사를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하도 부정적인 의견을 많이 들어서 편집자는 이 책이 1만 부만 팔려도 좋겠다고 했을 정도였다는데 출간되자마자 세계적인 베스트가 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게다가 스티그 라르손이 기자 출신인 건 맞지만, 입사 초기만 하더라도 글재주가 없어서 사진이나 그래픽을 주로 담당했다. 그래서 혹자는 진짜 이 소설을 스티그 라르손이 쓴 게 맞는 지 의심하기도 했다. 가장 눈길을 끈 이야기는 스티그 라르손 사후 밀레니엄의 저작권을 두고 연인 에비 가브리엘손과 스티그 라르손의 아버지, 형제 사이에 분쟁이 있었던 것이다. 스티그 라르손은 네오 나치와 인종차별자를 비판하는 기사를 써서 오랫동안 테러 위협에 시달렸고, 이로 인해 에바 가브리엘손과는 차마 결혼하지 못하고 사실혼 관계만 유지했다. 문제가 된 것은, 스웨덴 민법상 사실혼 관계는 상속 관계로 인정이 되지 않기 때문에 수십년 간 스티그 라르손과 함께 동고동락한 에바 가브리엘손이 아닌 의절한 부모와 형제들에게 밀레니엄의 저작권이 넘어간 것이다. 에바 가브리엘손은 현재 밀레니엄 4부의 미완성 원고가 담긴 노트북을 (법적 권리 없이) 가지고 있는데, 팬으로서는 미완성 원고라도 좋으니 4부를 보고 싶지만, 스티그 라르손이 사랑했던 에바 가브리엘손을 생각하면 좀 더 참고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시리즈물이라는 게 원래 다 읽고 나면 허탈하고 섭섭한 법이라지만, 밀레니엄 시리즈의 경우는 아쉬움이 더 큰 것 같다. 작가가 3부작까지 탈고한 뒤 급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한 탓에 원래는 10부작으로 구상된 시리즈의 반의 반 정도밖에 보지 못한 것도 아쉽고, 3부까지의 내용이 이 정도로 방대하면서도 치밀하면 남은 7부의 이야기는 어땠을까를 생각하면 더 아쉽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와 원서, 비슷한 첩보물을 더 읽으면 아쉬움이 달래질까? 아무래도 힘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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