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로 산다는 것 - 우리 시대 작가 17인이 말하는 나의 삶 나의 글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아가면서 작가가 되어 좋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예를 들어 고시공부 하시는 분들 중에 어떤 사람이 이 년 만에, 삼 년 만에 됐다고 하면, 오 년 만에 된 사람은 이 년 만에 된 사람에 비해서 삼 년이나 시간이 늦어지고, 그러면 그것은 좀 시간의 낭비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설가한테는 자신의 어떤 시간도 다 소중해요. 제가 어릴 때 농사를 지으러 대관령에 올라갔다 내려오지 않았습니까? 제가 만약 학문을 했던 사람이라면 그 시기가 이 년만큼의 공백 기간일 수 있겠지요. 그 때 대관령에 올라가지 않고 제대로 공부를 해서 제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도 일찍 들어가 계속 공부를 했다면 그 시간만큼 학문도 깊어질 수 있었겠지요. 이렇듯 작가에게는 지난 어떤 시절도 그의 경험 안에 버릴 것이 없는 소중한 시간들인 것입니다. 부끄러웠던 기억들은 부끄러웠던 대로 제 마음속의 또 하나의 작품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구요. (이순원 pp.186-7)

 

 

글쓰기에 마음을 두니 글쓰기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음이 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소설을 즐겨 읽는 편이 아니어서 잘 몰랐는데, 우리나라에도 좋은 소설가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발견하고 그들의 글을 찾아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비단 소설뿐만 아니라 에세이, 평론 같은 글을 읽는 것도 재미있고, TV나 라디오, 팟캐스트 방송에 출연한 것을 일부러 찾아 보거나 듣는 것도 좋다. 모든 것을 돈이나 명예 따위로 환산하고 서열을 매기는 세상만 보던 내게 또다른 세상, 또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들이라서 더욱 마음이 끌리는 것 같다.

 

 

<소설가로 산다는 것>은 월간 <문학사상>에 연재된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17인의 소설가들의 창작 노트를 한데 모은 것이다. 김훈, 김경욱, 김애란, 김연수, 박민규, 이순원, 하성란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명한 소설가들의 창작론을 알 수 있다는 것도 좋았지만, 자신의 작품, 창작론에 대해 쓴다는 큰 틀 외에는 형식의 제한이나 정해진 규칙 따위가 없어서 작가들마다 제 스타일대로, 느낌대로 쓴 글을 비교하는 재미도 좋았다. 가령 (애초에 내가 이 책을 산 이유인) 김연수는 문학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보이는 음악에 대한 글을 썼지만, 다 읽고나니 '역시 김연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애란은 대학 시절 학교 선배에게 이끌려 고대 앞 헌책방에서 문학에 대한 책들을 들입다 샀으나 읽기는커녕 책 사이에 낀 쪽지의 주인을 상상하는, 역시 문학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보이는 엉뚱한 글을 썼다. 하지만 '역시 김애란이다!' 싶었고, 그녀가 어떤 마음과 자세로 소설을 쓰는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타로 점괘대로' 서른 즈음에 돌연 소설가로 전업한 이력을 가진 심윤경의 글도, '팔자에 없는' 소설가가 되어 골머리가 썩는다는 윤영수의 글도 좋았다. 한 사람은 점괘대로 소설가가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팔자에 없는 소설가가 되었지만, 둘 다 성공했고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는 것을 보니 점괘나 팔자나 다 소용없는 것 같다. 

 

 

열일곱 편의 글 중에서 나는 이순원의 글이 가장 좋았다. 아직 유교적 근본과 옛것이 남아있던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난 작가는 어려서는 전통사회에 살았고, 자라서는 근대화, 산업화를 온 몸으로 겪었으며, 지금은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다. 오십년 남짓한 삶 속에서 무려 전근대와 근대, 현대 문명을 모두 겪어내느라 몸과 마음 모두 고단하고 불만이나 회한도 있을 법 한데, 작가는 그 모든 경험이 작품의 자양분이 되었다며 너그럽게 말한다. '지난 어떤 시절도 그의 경험 안에 버릴 것이 없는 소중한 시간들'이라니! 오래된 기억이나 안좋은 추억은 버리고 솎아내기 급급한 현대인들에게 이 얼마나 귀감이 되는 삶인가.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문명이 발달해도 소설이 존재하고 소설가들이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가로 산다는 것 - 우리 시대 작가 17인이 말하는 나의 삶 나의 글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좋아하는 작가들의 글만 쏙쏙 골라 읽어도 남는 느낌. 잘 몰랐던 작가를 알게 되는 건 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인 기업이 갑이다 - 끌어가는 삶을 살 것인가, 끌려가는 삶을 살 것인가
윤석일 지음 / 북포스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네는 꿈이 뭔가?"

"금융권 대기업 직원인데요."

"아니, 그런 것 말고 꿈 말이야. 어떤 직업을 갖는 것, 그게 꿈일 순 없지 않은가."

"전 그게 꿈인데요? 회사 들어가면 새로운 꿈이 생기겠죠."

"참 편안하게 생각하는군."

"하지만 꿈이 밥을 먹여주지는 않잖아요?"

"죽기 직전에 못 먹은 밥이 생각나겠는가? 아니면 못 이룬 꿈이 생각나겠는가?" (p.37)



베이비부머인 부모님 세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옛날에는 대학만 나오면 어렵지않게 취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때는 그게 참 부러웠는데, 요즘은 그렇지도 않다. 부모님 친구분들 중에는 최근 몇 년 새 명예퇴직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일을 그만두신 분이 많다. 휴일도 없이 열심히 일하셨던 분들이 평생직장 하나만 믿고 살다가 어이없이 팽당한 것을 보면 안됐고 불쌍하다. 오히려 십여 년 전 외환위기 때 직장을 떠나 진작에 자기 사업을 시작하신 분들 중에 지금도 의욕적으로 잘 사시는 분들이 많다. 고루한 어르신들은 평생직장의 시대는 갔다, 취업보다 창업이다 같은 말을 하면 귀담아 듣지도 않으시지만, 남들보다 먼저 혼자 힘으로 일해오신 어른들은 직장만이 답은 아니라고 조언하고 격려해주신다. 죽기 직전에 못 먹은 밥이 생각날지 못 이룬 꿈이 생각날지 그 분들은 이미 잘 알고 계신 것이다.


 

<1인 기업이 갑이다>의 저자 역시 '끌려가는 삶을 사는 대신 끌어가는 삶을 살라'고 조언한다. 스피치 컨설턴트이자 자기계발서 작가, 1인 창조기업 코치인 저자 윤석일은 스스로 1인 기업을 경영하는 경영자이자 오랫동안 자기계발 분야에 몸담은 전문가로서 그간 쌓아온 지식과 노하우를 이 책에 모두 담았다. 저자는 "이젠 직장에만 목매는 시대에서 나 자신잉 기업이자 브랜드가 되는 시대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내 이름 석자가 브랜드화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지금 하는 일과 사업의 성패뿐 아니라 인생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p.14)라고 충고한다. 그러면서 취업 대신 창업을 생각하고 있는 청년층과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는 베이비붐 세대 모두에게 필요한 1인 기업 창업 전략과 사례를 자세하게 소개한다.



저자는 지식, 경험, 노하우를 자본화하고, 회사에서 쌓은 업무지식과 자기만의 취미를 수입원으로 만들라고 조언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공병호경영연구소의 공병호 소장이 있다. 공병호 소장은 박사 학위까지 하며 얻은 지식과 회사 생활을 통해 얻은 경험, 노하우를 기반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1인 지식기업인 공병호경제연구소(현 공병호경영연구소)를 설립, 자기계발, 자기경영 코칭 전문가로 변신했다. 민족문화콘텐츠연구원 박재희 원장은 어떤가. 그는 돈벌기 힘들다는 인식이 높은 한학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오랫동안 무명생활을 거쳐야 했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동양 철학과 고전에 깊이 심취했다. 결국 2001년 EBS에서 <손자병법과 21세기> 강의를 하면서 우리나라에 고전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지금은 방송, 강의, 저술 등 여러 활동을 하며 눈코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고 있다. 나만의 지식, 경험, 노하우를 자본화, 수입원화 하는 데 성공하면 1인 기업으로 변신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방법은 여러가지다. 세계화전략연구소 이영권 소장의 경우 대기업(SK) 재직 시 쌓은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1인 기업 변신에 성공했고,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방송 출연으로도 유명한 여러가지문제연구소 김정운 소장은 교수 출신이다. 아트 스피치 김미경 원장과 김창옥퍼포먼스트레이닝연구소 김창옥 대표는 밑바닥에서 시작했다. 드림파노라마 김수영 대표는 글로벌 기업에 재직한 경험이 있지만 전혀 관련없는 '꿈 전도사' 일을 하고 있다. 관심분야와 비전을 정확히 하고, 꾸준히 노력하고 연습하는 것이 핵심이지, 방법이나 경로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이 책은 이렇게 1인 기업 창업에 성공한 명사들의 사례를 중심으로 쓰여 있어서 읽기 어렵지 않고 재미있다. 관심있는 명사가 있으면 그 사람의 저서를 더 찾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뿐만 아니라 스피치를 꾸준히 연습하라, 하루 두 시간은 자기계발에 투자하라, 내 이름으로 된 저서를 가져라, 지독한 책벌레가 되라 등 1인 기업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도 자세하게 설명하여 1인 기업 창업에 뜻이 있지만 당장 무엇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다. 1인 기업가로 변신하여 평생 현역으로 살아가기! 이 책과 함께라면 수월하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의 교양을 읽는다 - 인문고전 읽기의 첫걸음
오가와 히토시 지음, 홍지영 옮김 / 북로드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팟캐스트로 철학박사 강신주 선생님의 <다상담> 강연을 들었다. 상담이라고 하면 이제까지는 심리학자 또는 정신분석 전문가가 하는, 지극히 과학적인 상담만 생각했는데, 과학이 아닌 인문학을 공부한 철학자도 대중들의 일상적인 고민을 상담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의심이 되기도 하여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 그런데 들어보니 김수영 시인의 시라든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문학 작품에서 인간의 가장 적나라한 심리를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인생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묘하게 납득이 되고, 상담 내용도 의외로 귀에 쏙쏙 들어와서 한가할 때는 하루에 몇 편씩 내리 듣기도 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고, 취업이나 연애, 결혼 같은 일상적인 고민도 철학이라는 관점에서 보니 다시 보였다. 그저 어렵고 난해하게만 느껴졌던 철학이라는 학문이 이다지도 일상 생활에 가깝고 고민도 해결해주는 학문이었을 줄이야! 새삼 철학이 달리 보였다.

 

 

오가와 히토시 역시 철학으로 일상적인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대중 친화적인 일본의 철학자다. 그는 교토대 법학부 출신의 엘리트이면서도 종합상사 직원, 아르바이트, 시청 직원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한 경력이 있는데, 현재는 도쿠야마 공업고등전문학교 준교수로 재직하면서 상점가에서 '철학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나는 전작 <인생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서평 http://blog.naver.com/minorstars/100176441956)를 읽은 적이 있는데, 제목 그대로 연애, 결혼, 인간관계 등 일상적이면서도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은 겪는 인생의 고민들에 대해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데카르트 등 유명한 철학자들의 격언과 이론을 빌려 해답을 제시하는 구성이 인상적이었다. 강신주 선생님의 강연처럼 일상적인 고민을 단번에 해결해주는 정도는 아니지만, 일상과 철학을 연결하고, 철학으로서 인생의 고민을 해결하려는 시도만큼은 좋았다.

 

 

오가와 히토시의 신간 <철학의 교양을 읽는다>는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부터 파스칼의 <팡세>,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등 철학사의 고전 48편을 책의 내용과 구성, 저자의 생애와 집필 동기, 배경, 당대 또는 후세에 미친 영향 등을 중심으로 요약하여 소개한 철학 개론서다. 철학 개론서라고 하면 보통 시대순이나 학파, 지역별로 구성한 것이 많은데, 이 책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철학',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철학', '나를 발견하기 위한 철학', '올바른 판단을 위한 철학',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철학', '인간 사회의 발전을 생각하기 위한 철학'으로 저자 나름의 분류 체계를 만든 점이 특징이다. 개론서이기는 하지만 (난해하기로 유명한) 철학 분야의 책이다보니 내용이 다소 어렵기는 하다. 전작 <인생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처럼 일상적인 고민을 철학적으로 해결해주는 대중 친화적인 내용이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철학에 관심이 있지만 막상 배우자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려운 데다가 두껍기까지 한 철학 고전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하는 철학 초보, 초심자들에게는 유용할 듯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게 - 어느 은둔자의 고백
리즈 무어 지음,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착한 사람이 살이 더 찐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착한 사람은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내는 대신 음식을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경향이 높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살이 찐다는 것이다. 몸무게가 '정확히 몇 킬로그램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220킬로그램에서 270킬로그램 사이쯤 될 거'라는 아서 역시 착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뚱뚱하고 못생겼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버림받은 어머니와 오랫동안 단둘이 살았던 아서는 학창시절엔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고, 교수로 재직하던 대학에서는 쫓겨났으며, 하나뿐인 여자친구마저 자신을 버리고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 대신 그는 먹었다. 먹고 먹고 또 먹었다. 

 

 

그런 그의 인생에 단 한 번 사랑이 찾아온 적이 있다. 제자였던 샬린 터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치과 접수 창구에서 일하던 그녀는 스스로 학비를 벌어 아서가 재직하던 대학에 등록했다. 공부에는 재능이 없어 엉뚱한 질문만 하기 일쑤였지만 아서는 그녀가 좋았다. 한 학기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자취를 감춘 그녀가 편지를 보낼 때에도 정성스럽게 답장했다. 비록 전보다 훨씬 불행해진 자신의 삶을 거짓으로 위장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1년 가까이 편지를 쓰지 않았던 샬린이 아서에게 전화를 해서는 고등학생 아들 켈의 대학 입시를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샬린에게 아들이 있는지조차 몰랐던 아서는 당황했다. 그동안의 거짓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명해야 할까. 용기를 내어 잘못을 비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당신이 나에 대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게 있는데, 내가 무지막지하게 살이 쪘다는 거에요.

신과 만나던 시절만 해도 그저 퉁퉁한 정도였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요즘 나는 때를 가리지 않고 먹고 싶은 대로 먹어요. 

먹는 양을 줄여보려는 노력을 안 한 지 꽤 되었는데, 꼭 그래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죠.

움직이지 못한다거나 아파서 누워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예닐곱 발자국만 걸으면 벌써 숨이 차고 굉장히 창피하기도 하고,

꼭 어딘가에 갇혀 있는 첼로나 값비싼 총이 된 느낌이 들기도 해요. (중략)

 

두 번째로 알아야 할 건, 20년 동안 당신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말하지 않은 게 있다는 거에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뒤로 여러 일이 겹치는 바람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어요.

그것 말고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한 말이 많이 있어요.

예전 친구나 동료들 얘기는 생각나는 대로 쓴 거였어요. 학교를 그만둔 지 18년이 되었거든요.

 

마지막으로 알아야 할 건,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건데,

이제 나는 집 밖에 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pp.13-4)



 

저만 섭식장애에 시달리고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인 줄 알았던 아서는 몰랐지만, 샬린과 아들 켈 역시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고 있었다. 빈민가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샬린은 켈을 억지로 부유층 학교에 진학시키고 대학에 들어가도록 강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켈이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운동에만 빠지자 술과 약물에 의존하며 삶을 포기한다. 켈은 어린 시절 집을 나간 아버지를 그리워하다 못해 아버지가 좋아했던 야구에 빠져든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부유층 학교에 진학한 뒤에는 부자인 친구들을 이용만 할 뿐 진정한 우정을 나누지는 않는다.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사실은 서로를 그리워 하면서도 아서와 샬린, 켈은 고독을 자처한다. 아서와 샬린은 집밖으로 나오지 않고, 켈은 어머니 샬린이 있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제대로 된 인간관계도 나누지 않는다. 아서와 샬린은 연애는커녕 친구, 이웃과의 소통도 기피하고, 켈은 사람을 사귀되 속마음을 터놓을 만큼 깊이 사귀지는 못한다. 이렇게 비정상적이리만큼 스스로를 고립시키던 사람들이 서로의 상처를 알게 되고 보듬어나가는 과정이 소설 <무게>의 핵심 줄거리다.

 


작가는 이들 세 사람의 상처와 고통을 짐이 되는 것, 고통스럽게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 복잡하고 힘겨운 것, 진지하고 심각하며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뜻하는 영단어 'heft'로 규정했다. 역자는 'heft'를 '무게'로 번역했으나, 정확히는 삶의 무게, 짐, 부담, 십자가, 소명 등 정신적이고 종교적이기까지 한 뜻을 가진다. 소설 <무게>의 인물들 역시 저마다 큰 삶의 무게를 지고 있다. 아서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젊은 시절의 꿈을 한 순간의 실수로 모두 잃어버린 것에 대한 깊은 후회를 안고 있다. 샬린은 여러 번 빈민가를 탈출할 꿈을 꾸었으나 결국에는 실패했다는 좌절감에 몸부림치다 술과 약물에 빠져든다. 아들 켈만이라도 제대로 살게 해주고 싶지만 쉽지 않다. 켈은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 어머니에 대한 증오와 죄책감이라는 모순된 감정 때문에 괴로워한다. 



세 사람은 자신이 지고 있는 무게를 좀처럼 나눠지지 못한다. 이는 내가 살고 있는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내 짐만 지고 가기에도 바쁜 세상에서 남의 짐을 보고 그 무게와 고통을 헤아려 주는 사람은 만나기 어렵다. 행여 남이 자신에게 더 큰 짐을 떠맡길까봐 움츠리고 등돌리는 사람이 태반이다. 아서처럼 집 안에 쳐박혀 음식을 먹는 것으로 갈증을 대신하거나, 샬린처럼 술에 의존하거나, 켈처럼 거짓된 관계를 반복하는 사람이 현실에도 많다. 다행히도 아서와 켈은 일련의 사건 속에서 자신의 짐을 같이 져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들로부터 큰 용기를 얻는다. 종국에는 타인으로만 여겼던 사람들의 진심을 알게 되면서 삶과 자신이 속한 사회를 전보다 더 희망적으로 보게 되는데, 그 과정이 무척이나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무거운 것을 혼자 들면 그저 괴롭고 버거운 일에 불과하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들면 훨씬 수월할 뿐만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친구가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소설을 통해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가벼운 소설인 줄 알았는데 막상 읽어보니 묵직한 울림이 있었고, 비정하고도 어두운 사회 이면을 그리면서도 따뜻함과 희망을 잃지 않는 점이 좋았다. 아서와 켈의 시점을 교차하는 서술 방식으로 되어 있어서 하나의 이야기를 두 사람의 관점에서 비교해가며 읽는 재미가 있었고, 나이, 관심사, 생활방식 등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 샬린이라는 한 여성을 통해 연결되고 이어지는 구성이 흥미로웠다. 무엇보다도 착하다는 이유로 남들에게 이용 당하고 상처만 입었던 아서가 결국에는 샬린과 켈, 욜란다, 이웃 주민 등 수많은 만남과 인연을 얻게 되어 다행스럽고 기뻤다. 자기처럼 외로워 보인다는 이유로 가난한 여대생 샬린에게 손을 내밀었던 아서의 따뜻한 마음이 늦게나마 보답을 받은 것 같았다. 착한 사람, 화내지 않는 사람, 욕심내지 않는 사람에게 행복이 찾아오는 '해피엔딩'이 그리운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