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에 빠진 인문학 - 애니메이션과 인문학, 삶을 상상하는 방법을 제안하다
정지우 지음 / 이경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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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에 빠진 인문학>은 애니메이션을 인문학의 관점에서 분석한 책이다. 고려대학교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저자 정지우는 <청춘 인문학>, <삶으로부터의 혁명> (서평 http://blog.naver.com/minorstars/100178948811) 등의 인문학에 관한 책을 주로 써왔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편도 아니고, 더군다나 인문학에는 조예가 깊지 않은데, 막상 읽어보니 유명한 작품과 작가들 위주라서 친숙하고, 학문적인 내용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책에는 <그렌라간>, <원피스>, <강철의 연금술사>, <충사>, <진격의 거인> 등의 작품들과 미야자키 하야오, 신카이 마코토, 호소다 마모루 등 일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주로 소개되어 있다. 먼저 1부에서 저자는 <그렌라간>과 <원피스>를 통해 중세와 근대, 현대의 사회 구조와 인간상이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한다. 크게 중세는 신을, 근대는 국가를, 현대는 개인을 중시하는 것이 차이라고 볼 때, 인류의 진보를 긍정하고 개인보다 국가와 사회를 중시하는 <그렌라간>은 근대를, 각 개인의 개성을 중시하고 다원적인 가치를 긍정하는 <원피스>는 현대를 상징하는 작품이다. 나아가 <원피스>는 유동적이고 파편화된 세계를 그린다는 점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이 제시한 '액체 시대' 개념과 일맥상통하며, 자기 자신만의 꿈, 신념, 열정 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이사야 벌린이 제시한 '낭만주의적 인간' 개념과 일치한다. <원피스>가 십여 년 간 일본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자리잡은 현상에는 이같은 인문학적인 배경이 있구나 싶었다.



2부에서는 <강철의 연금술사>, <충사>, <진격의 거인> 같은 작품을 통해 현대의 문제와 그 대안에 대해 제시한다. 현대 사회의 문제로는 소비 중독, 불안, 자존감의 상실 등을 들 수 있는데, 환상의 세계를 그린 만화 속에도 이러한 문제들이 내포된 경우는 많다. 여기에 대해 <강철의 연금술사>는 성공이나 부, 명예 등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해나가는 데서 오는 만족, 그리고 타인과 나누는 우정과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대안적이다. 최근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 <진격의 거인>은 더 심오하다. 근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기존의 작품들은 개인적인 욕망이 사회적인 가치에 의해 좌절되고 희생되는 경우를 그리는 일이 많았으나 <진격의 거인>은 다르다. 주인공 에렌이 사회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이유는 다름아닌 개인적인 욕망 때문이다. 개인적 만족이 사회나 타인의 이득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사실, 개인과 집단 모두 윈윈(win-win)할 수 있다는 점을 긍정한 점이 차별화된 부분이며, 인기 요인으로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 3부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 신카이 마코토, 호소다 마모루 등 유명 일본 작가들의 작품을 종합적으로 소개한다. 얼마 전 은퇴 선언을 하여 많은 팬들을 아쉽게 한 미야자키 하야오는 사회비판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의 작품들도 더러 그렸지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벼랑 위의 포뇨> 같은 전원적이고 환상적인 내용의 작품들을 자주 그렸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것을 추구하는 대중의 취향을 고려할 때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리는 전통적이고 향토적, 환상적인 세계는 언뜻 핀트가 안맞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이 일본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상상과 환상, 가능성을 답으로 제시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상상과 환상, 그로 인해 만들어진 세계는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또 우리에게 다른 꿈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한다." (pp.148-50) 신카이 마코토와 호소다 마모루의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현대 문명이 잃어가고 있는 감수성이 역으로 현대인들의 가슴을 울리는 것이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통찰을 가져다주고, 인문학이나 문화 비평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제안한다는 점에서 추천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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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황금시대 - 비즈니스 정글의 미래를 뒤흔들 생체모방 혁명
제이 하먼 지음, 이영래 옮김 / 어크로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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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초기의 뗏목이나 카누 제작이 강에 떠내려오는 통나무 위에 새나 동물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본 데에서 비롯되었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도예 기술에 있어서 호리병벌보다 나은 스승은 없다. 그들의 기법과 디자인은 초기 인류의 그것과 거의 동일하다. 죽은 나무의 섬유에 침을 섞는 1100종의 종이 말벌은 인류의 제지 기술에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중략) 건축 기둥은 확실히 연 줄기의 구조를 모사하고 있다. 파라오의 무덤에서 발견된 갑옷 조각은 옷감 위에 금속으로 된 물고기 비늘을 덧대 꿰멘 모습을 하고 있다. 이집트 무덤의 비율은 나무의 생장률과 일치한다. (pp.41-2)



경제경영서인 데다가 제목이 <새로운 황금시대>라서 금투자나 금본위제에 대한 이야기일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서문을 읽고서야 자연을 모방한 기술을 비즈니스에 응용하는, 듣도보도 못한 생체모방 비즈니스에 관한 책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문과 출신의 사회과학도인 나에게는 너무나도 요원한 분야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책 두께도 상당한데, 끝까지 제대로 읽을 수 있을까? 읽기도 전에 한숨부터 나왔다(휴우우).



다행히도, 책의 내용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물론 과학 용어나 전문 지식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맥락으로 알 수는 있었다. 게다가 생체모방이라는 기술이 생각외로 일상 생활에 많이 들어와있고 쉽게 볼 수 있는 것이어서 새롭게 알게된 것이 많았다. 가령 아무 생각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비행기나 배의 형태라든가 건축 디자인이 사실은 자연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는 점이 신기했다. 인간의 기술이라든가 아이디어라는 게 의외로 별것 아니다 싶기도 하지만, 자연의 상태가 최적임을 깨닫고 거기서 힌트를 얻어 기술을 개발하기까지 인류가 얼마나 고생했을지를 생각하면 대단하다 싶었다. 지금도 자연에서 힌트를 얻지 못해서, 또는 힌트는 얻었으나 개발에 성공하지 못한 기술, 아이디어가 얼마나 많겠는가? 생체모방 비즈니스 시장이 괜히 '새로운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게 아니리라. 



이 책은 생체모방 비즈니스의 개념과 사례, 현황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생체모방 기술을 개발하여 비즈니스, 즉 사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소개한다(그래서 경제경영서로 분류된 것이리라). (과학과 마찬가지로) 사업 역시 문외한인지라 자세히는 잘 모르겠지만, 환경 오염이나 에너지 위기 같은 말을 일상적으로 들을 수 있고, 친환경 마케팅, 친환경 기술이 대세인 현 시점에서 생체모방 비즈니스 또한 환경 관련 기업이든 일반 기업이든 채택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효용과 응용할 방법이 많을 것이다. 경제 상황이 어떻든 간에 새롭고 가장 나은 기술을 가진 기업이 산업을 주도한다는 진리에는 변함이 없다. 신성장 산업 개발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생체모방 비즈니스에서 활로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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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머핀 2013-10-21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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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씽 The One Thing - 복잡한 세상을 이기는 단순함의 힘
게리 켈러 & 제이 파파산 지음, 구세희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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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성공에 관한 잘못된 여섯 가지 믿음

1. 모든 일이 다 중요하다.

2. 멀티태스킹은 곧 능력이다.

3. 성공은 철저한 자기관리에서 온다.

4. 의지만 있다면 못할 일은 없다.

5. 일과 삶에 균형이 필요하다.

6. 크게 벌이는 일은 위험하다.

  

  

"오늘의 흔들림 없는 성공과 과거의 들쭉날쭉한 성공에는 무슨 차이가 있었을까? 내가 큰 성공을 거뒀을 때에는 단 하나의 일에만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나 성공이 들쭉날쭉했을 때는 나의 집중력도 여러 군데에 퍼져 있었던 것이다." (pp.17-8) 

 

 

멀티태스킹은 내 오랜 습관이다.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집안일, 운동을 할 때는 반드시 라디오를 듣거나 팟캐스트를 듣고, 밥 먹는 시간에 맞춰 VOD로 보고 싶었던 드라마나 영화를 본다. 책을 읽을 때도 그냥 가만히 앉아서 읽지 않고 요가나 마사지를 하면서 읽는다. 하다못해 양치질을 하러 화장실에 들어갈 때도 이 닦는 동안 메일이라도 확인해야지 하는 생각에 스마트폰을 꼭 챙긴다. 그래서 내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졌냐고? 대답은 노(NO)다.

 

 

<원씽>을 읽은 후로 나는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습관을 끊기로 결심했다. 며칠 안 되기는 했지만 꽤 잘 하고 있다. 오늘만 해도 아침에 일어나서 스마트폰 없이 바로 이닦고 세수했다. 밥을 먹을 때에는 뭘 보거나 읽지 않고 밥만 먹었다. 서평을 쓰고 있는 지금도, 예전 같으면 음악을 듣거나 라디오를 켜고 산만한 정신으로 썼을텐데, 아무 것도 듣지 않고 오롯이 글 쓰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다. 뭔가 심심하고 허전한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한 가지에 집중하는 즐거움을 맛보고 있자니 이건 이것대로 짜릿하다.

 

 

<원씽>의 저자 게리 켈러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큰 투자개발 회사 중 하나인 켈러 윌리엄스 투자개발 회사의 공동 창립자이자 대표이사이며 저명한 사업 코치이자 트레이너, 베스트셀러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그는 경영 위기에 부딪혔다가 기적적으로 회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구상했다. 저자는 중요한 한 가지 일(One thing)에만 파고들라고 조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가 하고싶은 일, 해야하는 일의 목록을 알아야 하고 그것들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을 파악하고 나머지 일은 모두 버린다. 멀티태스킹의 노예였던 나를 예로 들면, 이를 닦을 때는 이를 잘 닦는 게 우선순위다. 서평을 쓸 때는 글을 쓰는 게 우선순위다. 하나의 일을 할 때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것도 원씽이리라.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확대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직장인이라면 업무에서 가장 중요한 일, 자영업자라면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확대해서 보는 식으로 적용할 수 있다. 

 

 

하나만 하라니. 수십 가지 일을 동시에 해도 성공할까 말까인 세상에서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한다는 게 미덥지 않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들을 위해 저자는 그 유명한 파레토 법칙, 80대 20 법칙을 근거로 든다. "성공의 세상에서 평등한 것 없다는 말이다. 몇몇 소수의 원인이 대부분의 결과를 만든다. 제대로 된 인풋(input) 하나가 대다수의 아웃풋(output)을 만들어 낸다. 선택적 노력이 거의 모든 성과를 창조한다." (p.51) 즉, 자기에게 중요한 한 가지 일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최적의 방법 또는 습관을 찾아내어 거기에 '선택적 집중'을 하는 것만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침형 인간? 간헐적 단식?  내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습관이라면 몰라도 필요하지 않다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성공은 옳은 일을 해야 얻는 것이지, 모든 일을 다 제대로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p.75) 

 


이것저것 다 하라고 조언하던 기존의 자기계발서와 달리 이 책은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라, 그 밖의 것은 버리라고 조언한 점이 신선하고 특이했다. 지금 내 생활에 무엇이 부족한 게 아니라 넘친다니, 대체 무엇을 남기고 버려야 할까? 앞으로 나의 자기계발 화두는 아무래도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나의 원씽을 찾는 일이 될 것 같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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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머핀 2013-10-20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 감사드립니다 ^^

키치 2013-10-20 12:1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수고가 많으시네요 ^^
 
화차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4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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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그나마 꿈을 꾸는 선에서 끝났어요. 그게 아니면 어떻게든 그 꿈을 실현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죠. (중략)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꿈을 이룰 수는 없다. 그렇지만 포기하긴 억울하다. 그러니 꿈을 이룬 것 같은 기분이라도 느껴보자. 그런 기분에 젖어보자. 안 그래요? 지금은 방법이 많으니까요. 쇼코의 경우는 어쩌다 그게 쇼핑이나 여행처럼 돈을 쓰는 방향으로 나갔을 뿐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분별없이 쉽게 돈을 빌려주는 신용카드나 신용대출이 나타난 것뿐이죠." "그럼 다른 방법은 뭐가 있을까요?" 후미에는 웃었다. "음, 내가 아는 건...... 맞다, 친구 중에 성형 중독인 애가 있어요. 벌써 열 번 가까이 얼굴에 손을 댔을 거에요. 철가면 같은 완벽한 미인이 되면 인생은 100퍼센트 장밋빛, 행복해질 수 있다고 굳게 믿는 거죠. 그렇지만 아무리 성형을 해도 그것만으로는 그녀가 원하는 '행복'이 찾아오지 않아요. 고학력 고수입에 발군의 외모를 갖춘 남자가 나타나서 자기를 공주처럼 떠받들어줄 리 없죠. 그러니 몇 번이고 성형을 할 수밖에요. 이래도 안 돼? 이래도? 하면서. 같은 이유로 다이어트에 미쳐 있는 여자도 많아요." (p.344)

   

 

<이동진의 빨간책방>은 그동안 내가 몰랐던 책들을 참 많이도 알려주고, 알지만 안 읽었던 책들을 참 많이도 읽게 해주었다. 방송에 소개된 책들을 전부 읽은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읽거나 읽기 위해 구입을 했는데, 무려 일 년 하고도 몇 개월 전에 방송된 3, 4회 때 소개된 책,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를 드디어 읽었다. 같이 소개된 <은교>는 진작에 읽었는데 <화차>는 이제서야 읽은 이유는, 뭐 특별한 건 아니다. 무서울까봐. 추리물을 아예 안 읽는 건 아니지만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좀처럼 멈추기 어렵기 때문에 큰맘 먹지 않고서는 잘 안 읽는 편이다. 만약 <화차>를 읽으면 미야베 미유키의 다른 소설 - 예를 들면 <모방범>이라든가 <낙원>, 최신작 <솔로몬의 위증> 등 - 도 읽고 싶어질 게 뻔하고, 그랬다가는 주책없이 사들인 다른 책들은 내팽겨둔 채 미미여사의 책만 읽을 게 뻔하지 않은가, 뭐 이런 걱정 아닌 걱정이 앞섰다. 읽어보니 역시 잘못 읽었다 싶다. 미미여사의 다른 작품들을 읽고싶어 미치겠다.

 

 

배경은 1992년 도쿄. 휴직 중인 형사 혼마 슌스케는 아내의 사촌오빠의 아들(오촌인가?) 가즈야로부터 약혼녀가 사라졌으니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녀의 이름은 세키네 쇼코. 어렵지 않은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그녀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지만 놀랍게도 그녀의 과거 행적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진짜 세키네 쇼코'가 아니라 '가짜 세키네 쇼코', 즉 세키네 쇼코의 인생을 훔쳐서 살고 있던 또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이 사실을 밝히자 가즈야는 헛소리 하지 말라며 화를 내고 그녀를 찾는 일은 이제 그만두라고 한다. 그러나 혼마는 형사 특유의 직감으로 이 사건에는 더 큰 실체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느끼고 혼자서 사건의 심연으로 들어간다.

  

 

줄거리는 이미 '빨책'의 스포일러를 통해 알고 있는 상태였지만, 읽어보니 소설 특유의 포스와 카리스마는 변함이 없었다. 중심이 되는 사건인 세키네 쇼코 실종 자체도 기이하고 미스터리하지만, 사고로 한쪽 다리를 저는 혼마 슌스케, 그가 양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키우고 있는 아들 사토루, 겉보기엔 번듯한 은행원이지만 이기적이고 신경질적인 가즈야, 그리고 이들 주변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들이 묘하게 어우러지는 것도 볼만했다. 세키네 쇼코가 버블 붕괴를 맞닥뜨린 90년대 초반 일본의 흉흉한 분위기와도 잘 어울렸다. 

 

 

미야베 미유키는 사회파 추리소설로 유명하고, 그 중에서도 <화차>는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사회파 추리소설은 트릭이나 반전보다는 범죄의 사회적 동기를 찾는 일본의 미스터리 소설 장르를 일컫는 말인데, <화차> 역시 세키네 쇼코의 실종을 둘러싼 사건 그 자체의 트릭이 대단하다기 보다는 신용카드를 이용한 고금리 대출, 개인파산, 주택담보대출, 개인정보 도용, 무분별한 소비 등 자본주의가 야기한 여러가지 병폐들을 예리하고 능숙하게 지적한다. 신조 교코를 범죄자로 만든 데에는 사회의 탓이 크지만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누구나 신조 교코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범죄의 동기를 개인이 아닌 사회에서만 찾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미스터리 소설로서 <화차>가 독자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하는 방식이 어디까지나 사건 자체가 아닌 현실 사회에 대한 자각 내지는 성찰이라는 점에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용카드 외에도 인터넷뱅킹, 모바일뱅킹 등 각종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결제수단이 더 많아지고, 개인정보 도용 문제도 훨씬 심각해진 지금, 나라고 신조 교코와 같은 처지에 내몰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 내가 만약 그녀와 같은 처지라면 어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 어떤 의문에도 시원하게 대답할 수 없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공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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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연애수업 - 31편의 명작 소설이 말하는 사랑과 연애의 모든 것
잭 머니건.모라 켈리 지음, 최민우 옮김 / 오브제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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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 일부, 그러니까 핍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예민한 나머지 낭만적인 집착으로 내달리기도 한다. 우리는 자신이 충분히 고급스럽지 않아서, 학벌이 충분치 않아서, 매력이 충분치 않아서, 충분히 똑똑하지 않아서, 충분히 성공하지 못해서, 혹은 이들 전부로 인한 분노에 끊임없이 고통당하는 존재다. 우리는 귀인 - 핍에게는 에스텔라가 그렇듯- 이 언젠가 우리의 특별한 점을 발견하여, 우리가 무능하고 불편하며 소외된 존재라는 느낌을 없애준 뒤 마침내 이 세상에 편히 발붙일 수 있게 해줄 거라고 자신을 설득하면서 고통을 달랜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테면 유부남이거나, 당신에게 무관심하다는 등의 이유로 인해 맺어질 수 없는 사람에게 집착하는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우리는 대체 왜 이러는 걸까? 그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리가 실제로는 행복이나 사랑을 얻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사랑이 이뤄지는 게 절대 불가능한 상황으로 자신을 밀어넣기 때문이다. (pp.36-7)

 

 

서평을 즐겨 쓰다보니 남이 쓴 서평집도 찾아서 읽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이 책은 한 손 안에 들만큼 괜찮았다. 이 책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비롯한 서양의 고전 문학과 연애 상담을 결합한, 퍽 재미있는 형식의 책이다. 고전이든 현대물이든, 장르가 무엇이든, 작가의 국적이 어디든 간에 대부분의 문학 작품에 러브 스토리가 등장하는데, 왜 이제까지 여기에 주목한 사람이 없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아니 그것보다도 왜 내가 더 먼저 주목하지 못했을까?)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 쓴 책이 아니라, 연애상담 칼럼니스트 모라 켈리와 연애와 성 관련 에세이스트 잭 머니건, 이렇게 두 남녀가 함께 쓴 책이기 때문에 연애와 성, 결혼 등 같은 문제에 대해 남성과 여성이 각각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책을 많이 안 읽었다, 고전 문학을 잘 모른다 하는 사람도 남녀 문제에는 대체로(라기 보다는 아마도 99.99999%) 관심이 있을테니 두 저자의 연애상담에만 주의를 기울여도 읽을만 할 것이다(나도 이 책에 소개된 고전 중 제대로 읽은 건 다섯 편밖에 안 된다).

 

 

같은 여자라서 그런지, 나는 잭보다도 모라의 글에 더 공감이 갔다. 모라는 <벨 자>, <위대한 유산>, <제인 에어>, <위대한 개츠비>, 심지어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같은 고전 중의 고전을 통해 '나 좋다는 남자가 싫은 까닭은 무엇일까', '이상형이 한 남자의 일생에 미친 해악', '열정에 원칙을 적용하는 게 왜 바보짓일까', '남자가 끈질긴 건 기쁜 일일까, 징그러운 일일까', '때로 문제는 당신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있다' 등 여자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안줏거리로 오를 만한 질문과 답을 재치있게 제시했다.  특히 나는 <위대한 유산>의 남자 주인공 핍을 통해 이뤄지기 어려운 사랑일수록 더욱 빠져드는 모순과, E.M.포스터의 <하워즈 엔드>를 통해 정치적 성향이 다른 남자와 함께 사는 법에 대한 대목이 좋았다.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 사람들 중에는 - 재테크 책을 많이 읽는다고 다 재테크를 잘하는 건 아닌 것처럼 - 책 따로 현실 따로인 경우가 종종 있는데(나도 예외는 아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책에서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책으로 쓰는 - 선순환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사랑을 책으로 배웠다는 그네들처럼, 나도 내가 읽은 책 속에서 아무리 해도 어려운 사랑의 해답을 찾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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