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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청춘, 문득 떠남 - 홍대에서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고 모로코까지 한량 음악가 티어라이너의 무중력 방랑기
티어라이너 글.사진 / 더난출판사 / 2013년 10월
평점 :
황혼의 인천공항. 온 힘을 다해 하늘로 오르기 전 출발선을 향해 가는 비행기. 이제부터 뮤지션, 아들, 친구로서의 페르소나는 활주로에 던져버리고 떠날 참. 골치 아픈 현실일랑 모두 두고 떠나리라. 하지만 비행기가 데려간 곳이 이상향은 아니었다. 현실은 비행기 구석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여행지에 도착하면 함께 내려 다시 어깨에 달랑 매달린다. 어쩌면 여행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현실과 부대끼며 이해하고 화해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p.14)
'비행기가 데려간 곳이 이상향은 아니었다'니. 첫 장부터 부정적인 어조가 나와서 여행기 맞나 싶었다. 왜 한비야나 손미나 같은 사람들의 여행기를 보면 여행이 얼마나 근사하고 멋진 경험인지, 그러니 너도 한번 해보라고 유혹하는 글 일색이지 않나. 게다가 얼마 전에 읽은 손미나의 <스페인, 너는 자유다>와 저자의 여행지(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가 겹치기도 해서 내심 남유럽에 대한 로망을 품고 읽기 시작했단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은 처음부터 여행은 '피할 수 없는 현실과 부대끼며 이해하고 화해하는 과정'이라느니 '완벽한 자기내면으로의 침잠'이라느니 '여행을 하며 생각은 길었고, 웃음과 향기는 짧았다'느니, 칙칙하고 우울하고 여행할 맛 뚝 떨어지는 내용이 계속 이어져서 내 기분을 팍팍 죽였다. 아아, 대체 왜?
처음에는 저자의 성격이나 관점 자체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부정적이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뭐 눈엔 뭐만 보인다는 말도 있지 않나). 그런데 책을 읽어보니 저자 탓만은 아니었다. 마드리드에 도착하자마자 찾아간 숙소에서는 불친절한 종업원 때문에 속을 끓였고, 스페인 광장으로 향하던 도중에는 칼자루를 쥔 강도를 만나기도 했다. 여행지마다 물가는 비싼데 노잣돈은 얼마 없어서 하루에도 몇 끼씩 굶기 일쑤였을 뿐더러, 타국에서 오랫동안 홀로 지내고 있자니 시도때도 없이 고독이 밀려왔다. 어쩌다 구한 동행인 중 열에 아홉은 같이 지내기 힘든 성격의 소유자들이어서 얼마 못 버티고 헤어졌다. 이러니 여행은 '피할 수 없는 현실과 부대끼며 이해하고 화해하는 과정'이라느니, '여행을 하며 생각은 길었고, 웃음과 향기는 짧았다'느니 같은 칙칙한 문장이 나오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따금씩 좋은 일도 있었다. 호안 미로나 피카소 같은 현대 화가들의 명작 수백 개가 그야말로 '무심하게' 걸려있는 미술관에 방문한 일이라든지, 프리메라리그 경기장을 압도하는 아삭거리는 소리의 정체(!)를 알아낸 일이라든지, 여행의 피로와 최악의 동행자들 때문에 지쳐있던 그에게 멋진 여행자의 모범을 보여준 일본인 '다이'와 만난 일이라든지 말이다. 그 중 최고는 자신의 팬을 만난 일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팬을 스페인 땅에서 만나다니! 게다가 그녀는 한국인도 아니고 스페인 사람도 아니고 독일 여자다! 이런 소소한 즐거움이 그로 하여금 칙칙하고 우울한 여행을 끝까지 하게 만든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삶 자체는 결코 즐겁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매일매일이 지루하고 우울하고 힘든 일 투성이다. 하지만 애정을 쏟을 만한 것을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 살아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기쁨, 어쩌다 마주치는 행운, 특별한 사람을 만나 함께 나누는 정 같은 소소하고도 귀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살아간다. 저자의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여행의 로망이나 일탈의 기쁨 같은 건 적을지 몰라도, 이렇게 인생을 닮고 현실에 맞닿은 여행도 때로는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