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검은 안개 - 상 - 마쓰모토 세이초 미스터리 논픽션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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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일본의 사회파 미스터리 거장 마츠모토 세이초가 쓴 <일본의 검은 안개>는 월간 문예춘추에 1960년 1월부터 12월까지 1년 동안 연재된 논픽션을 엮은 책이다. 연재 당시 일본 사회 각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켜 '검은 안개'라는 말이 유행어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의 정치, 경제, 역사, 문화 등 배경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적지 않고, 논픽션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주관적인 견해로 보이는 부분도 더러 있는 점은 아쉽지만, 일본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다면 일본 사회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마츠모토 세이초 소설을 포함한 사회파 미스터리 팬이라면 미제 사건이나 다름 없는 이야기들을 소설가 특유의 상상력과 집중력으로 복원하고자 한 작가의 열정에 놀랄 것이다.


이 책의 놀라운 점 몇 가지를 살펴보면, 첫째로 논픽션, 즉 실화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마츠모토 세이초는 허구의 이야기를 쓰는 소설가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열두 개의 이야기는 모두 실화다. 그것도 1948년 폐점 직후에 은행에 들어가 은행원 전부에게 독극물을 마시게 한 뒤 현금과 수표를 털어 달아난 '제국은행 사건', 1949년 일본국유철도 초대 총재 시모야마가 출근 중에 실종되었다가 이튿날 기찻길에서 사체로 발견된 '시모야마 사건', 1952년 탑승자 37명 전원이 사망한 일본항공의 '목성호 추락 사건' 등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굵직한 사건들뿐이다. 더 놀라운 점은 이 사건들이 여러가지 의문점과 사회적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미궁에 빠진 채 남겨졌다는 사실이다. 이제까지 수많은 범죄수사 드라마를 보고 미스터리 소설을 읽어왔지만, 이처럼 허구 같은 실화는 처음이다.


둘째, 용감하다. 이 책에 실린 사건들은 모두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1945년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미군 점령을 받고 있던 시기에 일어났다. 연재가 시작된 게 1960년 1월이니 약 9년의 시간이 흐르기는 했어도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며 미소 냉전체제였던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 때에 정치적으로 민감한 스파이 관련 사건부터 대형 비리 사건, 노조 탄압 및 불온사상 척결 광풍 같은 사건들을 공공연히 들춰내고, 신문으로 치면 다른 면에 실릴 사건들의 배후에 공통적으로 미군의 조작 내지는 음모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는 마츠모토 세이초의 태도는 지금 보아도 무모하고 과감하다.


셋째,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이다. 이 책에 실린 마지막 사건은 다름아닌 한국전쟁이다. 일본 국내에서 벌어진 사건들만 계속 보다가 마지막에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맞닥뜨렸을 때 나의 기분은 충격 그 자체였다. 저자는 왜 이 모든 굵직한 사건들의 최종장으로 한국전쟁을 택했을까? 저자는 "지금까지 다룬 일련의 사건들은 한국전쟁이라는 절정을 향해 있는, 그것을 최종 '목적'으로 하는 복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일본 내에서의 미군의 움직임이 어떻게 한국전쟁으로 이어졌는지 저자는 여러가지 가설과 증거를 제시한다. 그것들이 맞고 틀린지를 떠나서 한국전쟁에 대해 한국인인 나조차도 모르는 일이 많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해 일본의 군수공업이 호황을 누리면서 일본경제가 크게 발전한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일본인이 전쟁에 차출되었고, 오키나와 미군 주둔이 장기화되었으며, 일본의 민주화가 백지화되고, 재벌뿐 아니라 그동안 미군이 소탕하는 데 열을 올렸던 옛 군벌 세력과 우익까지 이때를 계기로 재기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알면 알수록 참 슬픈 역사의 이면이다.


마츠모토 세이초의 작품으로는 <점과 선>을 읽은 게 유일한데, 이 책을 읽고나니 저자가 왜 고위 관료를 주인공으로 설정했는지, 철도를 주요 트릭으로 설정했는지 어렴풋이 알겠다. 아무래도 다가오는 겨울에 마츠모토 세이초를 비롯한 일본의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을 많이 읽게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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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착한 기업 시작했습니다 - 젊은 사회적기업가 12인의 아름다운 반란
이회수.이재영.조성일 지음 / 부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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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책임, 노블레스 오블리주 운운해도 기업의 최우선적인 목표는 이윤 추구다. 그렇다면 사회적 기업은 어떨까? 사회적 기업은 '사회 혁신 마인드를 가진 기업가들이 빈곤, 실업, 환경, 교육 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비지니스 방식으로 해결하는 혁신적인 기업 조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과 의존의 삶이 아닌 자활과 자립의 길을 열어 주는 등 사회를 혁신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창출하는 역할을 한다.' (p.5) 일반 기업과 달리 사회적 기업의 최우선적인 목표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만, 기업인 이상 어느 정도의 이윤 창출이 안 되면 존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청춘, 착한 사업 시작했습니다>에 소개된 열두 곳의 사회적 기업을 보면 대안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는 열정과 도전 정신으로 사회적 기업을 창업한 12인의 사회적 기업가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에이컴퍼니 정지연 대표는 아티스트 팬클럽이라는 새로운 시스템을 기획하여 재능 있는 신인 작가를 육성하는 동시에 수요는 높으나 공급이 부족한 대중들의 문화생활을 지원하고 있다. 유명 작가에게만 후원이 몰리고 신인 작가의 진입장벽은 높은 불합리한 구조는 미술뿐 아니라 예술계 전반의 관행이라면 관행인데, 만화, 소설, 음악 등 다른 장르에서도 이런 시도가 있었으면 좋겠다. 연극계에는 있다. 바로 김동하 대표가 이끄는 토크앤플레이다. 연극배우 출신인 김 대표 역시 인기 배우, 유명 작품에만 자본이 몰리는 풍토에 회의를 느끼고, 노인이나 학생 등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대중들도 참여할 수 있는 신개념 연극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아직 일반 기업의 수익 구조를 갖추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지금의 추세라면 기대해볼 만 하다.

 

 

이들이 명문대 졸업장이 없어서, 좋은 직장에 취업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사회적 기업을 창업한 것은 결코 아니다. 모두커뮤니케이션즈 권태훈 대표는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의 엘리트다. 우연히 외교통상부에서 군 생활을 하게 된 그는 어려운 외무고시를 패스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외교관이라는 직업을 가지고도 삶에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을 보며 진로를 재고했다. 진로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얻은 정보를 비슷한 처지의 학생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청소년 진로 잡지 'MODU'다. 명랑에너지발전소 안연정 대표는 원래 방송국 PD가 되고 싶었는데, 서울과학기술대 2학년 때 모 방송국 연수에 참가했다가 사회문제에 대한 고민 없이 기계적으로 방송을 만드는 방송국 조직의 한계를 깨닫고 사회적 기업으로 방향을 돌렸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사회적 기업에 뛰어든 이도 적지 않다. 한국판 '티치 포 아메리카(Teach for America)'라 할 수 있는 직장인, 대학생, 다문화 청소년 멘토링 시스템을 개발한 점프의 이의헌 대표는 한국일보 기자 출신이다. 저신용자부터 정치인까지 '착한 금융'을 지원하는 신현욱 팝펀딩 대표는 삼성그룹과 네이버를 거쳤다. 이들이 높은 연봉과 편안한 생활을 뒤로 하고 사회적 기업에 뛰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배가 부르고 통장에 돈이 쌓이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 때문이 아니었을까? 오르그닷이 그 예다. 패스트 패션에 반기를 들고 윤리적 패션을 주도하는 패션 벤처 오르그닷에는 유명 대기업 출신 디자이너들이 상당수 근무하고 있다. 대기업에서 소비 지상주의, 대기업의 과도한 마진, 중소 하청업체에 대한 착취, 건전한 업무 관행의 말살 등을 목도하다 못 견디고 나온 그들은 사회적 기업에서 해법을 찾았단다. 과도한 스펙 경쟁, 의미없는 삶에 지친 이들에게 이런 청춘, 이런 기업은 어떤지 제안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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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ook 서른 넘어 옷 입기 - 지금부터 시작하는 ‘나답게’ 입는 법 F.book 시리즈
에프북 지음 / 포북(for book)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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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여자들은 자신에게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단순히 몸무게가 많고 적고, 나이가 들고 어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발목이 굵네, 가슴이 처졌네, 주름이 많네, 이 나이에 어떻게 이 구두를 신겠느냐, 분홍색은 나랑 안 어울린다... 하면서 말이다. ... 스타일 좋은 여자가 되자고 말하고 싶진 않다. 유행하는 스타일의 옷과 헤어스타일로 자신을 치장해야 자존감이 높아진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여자인지 깨닫길 바라는 것이다. 거울 속의 여자가 초라하고 멋없는 단점투성이가 아니라 보면 볼수록 매력 있는, 그래서 자꾸 예뻐해 주고 싶은 괜찮은 여자라고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p.115)

 

 

패셔니스타, 라기보다는 패션 테러리스트에 가까운 나지만,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을 살면서 나름의 패션 철학은 가지고 있다. 서른 즈음인 나의 옷 입는 방법이 서른 넘어서도 통할까? 그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에프북에서 만든 책 <서른 넘어 옷 입기>에 따르면 말이다.  책에는 패션 숍 <린넨 내추럴> 대표 오선영, 액세서리 브랜드 <캐미> 디자인 디렉터 김문정, 가방 브랜드 <꼬르뷔> 디자이너 송수정, 아동복 쇼핑몰 <꼬모> 오너 허수영, 온라인 숍 <오일클로스> 오너 김지영 등 패션피플이면서 동시에 아이 엄마이기도 한 다섯 명의 '엄마여자'들의 옷 만들고 옷 입는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애엄마라고 하면 떠오르는 꾸밈 없고 펑퍼짐한 옷차림을 떠올리면 오산이다. 이십대 미혼녀 못지 않은 감각적인 스타일에 실용성까지 잡은 완벽한 패션, 거기에 일과 살림을 균형있게 양립하는 라이프스타일이 어찌나 멋지던지, 보는 내내 감탄이 나왔다. (옷 잘 입는 여자들 이야기 사이에 배치된 옷 못 입는 편집자들 이야기는 또다른 재미다 ^^)



옷 잘 입는 그녀들의 비결을 몇 가지 소개하자면,

 

 

첫째, 기본 아이템을 잘 갖추라. 사도 사도 없는 게 옷이라지만, 아침에 옷장을 열었을 때 기본 중의 기본인 하얀색 면 티셔츠나 청바지조차 없으면 한숨이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그동안 비싼 돈 들여 산 건 대체 뭔가' 하는 자괴감이 든다. 그래서 계절마다 또는 세일 기간마다 유니클로, 자라 같은 SPA 매장에서 티셔츠, 청바지, 가디건 등 기본 아이템을 부지런히 '쟁여' 놓는 건 필수다. 아내이자 엄마인 그녀들의 기본 아이템에는 몇 가지가 추가된다. 모임이나 회식 등 중요한 자리에서 입을 블랙 정장과 원피스, 학교 행사에 참석할 때 유용한 트렌치 코트 등이다. 패션 숍 <린넨 내추럴> 대표 오선영이 소개하는 리넨, 니트 소재의 기본 아이템들은 몇 년을 입어도 유행을 타지 않는 데다가 예쁘기까지 해서 기본 아이템이라기보다는 신경을 많이 쓴 옷차림처럼 보였다. 액세서리 브랜드 <캐미> 디자인 디렉터 김문정 역시 질 좋은 셔츠나 자켓, 스트라이프 티셔츠와 청바지 등 기본 아이템부터 잘 갖추라고 충고한다. 여기에 팁 하나 더. 키가 큰 사람은 그냥 셔츠나 원피스를 입는 것보다 셔츠 스타일의 원피스가 잘 어울린다고 한다. 키가 175cm나 된다는 그녀가 소개하는 셔츠원피스를 보니 마음에 들어 나도 이참에 몇 벌 구입할 생각이다. 



둘째, 유행을 타는 디자인이나 색상보다는 기능과 소재 위주로 고르라. 더위와 추위를 유난히 많이 타는 나는 아무리 세련되고 예쁜 옷이라도 날씨에 안 맞으면 못 입기 때문에 전부터 여름에는 땀 흡수를 잘 하는 면, 겨울에는 뜨끈뜨끈한 히트텍, 기모 소재를 최우선적으로 골라왔다. 아이 엄마인 그녀들은 옷의 기능뿐 아니라 소재가 인체에 무해한지 여부에도 민감하다. 가방 브랜드 <꼬르뷔> 디자이너 송수정은 결혼 후 아이의 첫 가방을 고르다가 성에 차지 않아 직접 브랜드를 런칭했을 정도로 소재에 예민하다. 아이가 물거나 빨 수 있기 때문에 옷이나 소품을 고를 때 천연 소재인지, 피부에 자극을 주는 질감은 아닌지를 제일 먼저 본다는 그녀. 안 그래도 대량생산, 패스트 패션의 부작용으로 인체에 유해한 성분이 함유된 옷이 많다고 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그녀들의 제품은 엄마 마음으로 만든 가방, 소품이라고 하니 믿음이 간다. 



셋째, 나만의 고유한 옷을 입으라. 나는 늘 심플하게만 옷을 입다보니 심플함이 곧 나의 패션 철학이고 고유한 개성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옷 잘 입는 그녀들은 그저 심플하게만 입는 게 아니라 저마다 고유한 패션 테마를 가지고 있었다. 아동복 쇼핑몰 <꼬모> 오너 허수영의 패션 테마는 '프렌치 시크'다. 프랑스 여인들의 무심한듯 시크한 스타일처럼, 블랙, 베이지, 그레이 등 모노톤의 옷에 팔찌나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를 볼드하게 가미하는 식인데, 모노톤의 옷만 입으면 심플은커녕 밋밋하고 개성없어 보일 따름이지만 액세서리를 어떻게 가미하느냐에 따라 마치 다른 옷을 입은 듯 개성이 배가 된다. 신경을 쓴 듯 안 쓴 듯한 그녀의 패션 철학은 내 마음에도 쏙 들었다. 이것도 어쩌다 이렇게 된 게 아니라 책, 잡지, 인터넷 블로그 등을 통한 부단한 공부와 자료 조사의 결과라고. 온라인 숍 <오일클로스> 오너 김지영의 패션 테마는 보다 과감하다. 오랜 시간 캐주얼을 즐겨온 그녀는 결혼 후에도 캐주얼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간직하고 있다. 서른 넘어 입으면 다소 부담스러워 보일 수 있는 샬랄라 러플과 레이스, 요란한 프린트 등은 되도록 자제하지만, 티셔츠, 청바지 등 기본 아이템에 과감한 색상, 화려한 프린트를 추가하는 식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한다. 



이런 멋진 '엄마여자', 아니 언니들이 있으니 곧 있으면 다가올 '서른 넘어 옷 입기'가 결코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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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다 - 수전 손택의 일기와 노트 1947~1963 수전 손택의 일기와 노트 1
수전 손택 지음, 데이비드 리프 엮음, 김선형 옮김 / 이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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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는 것. 일기를 개인의 사적이고 비밀스런 생각들을 담는 용기 -속을 터놓을 수 있는 귀머거리에다 벙어리, 문맹인 친구처럼- 로만 이해하는 것은 피상적이다. 나는 그저 일기에다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보다 더 솔직하게 나 자신을 털어놓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창조한다. 일기는 자아에 대한 나의 이해를 담는 매체다. 일기는 나를 감정적이고 정신적으로 독립적인 존재로 제시한다. 따라서 (아아,) 그것은 그저 매일의 사실적인 삶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 많은 경우 - 그 대안을 제시한다. (p.213)


<다시 태어나다>는 세계적인 에세이스트이자 평론가, 소설가인 수전 손택의 일기와 노트를 모아서 엮은 책이다. 그녀는 평생 동안 백여 권이 넘는 일기를 썼는데, 가까운 친구나 가족에게도 철저히 비밀로 부치다가 2004년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하기 직전에 아들 데이비드 리프에게 일기의 존재를 알렸다고 한다. 리프는 그녀의 일기를 모조리 태워버릴 생각도 했지만, 그녀가 죽기 전에 이미 모교인 UCLA에 일기를 팔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편집자로 참여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내밀한 이야기를 아들인 자신이 직접 읽는 것도 모자라 책으로 정리해 세상에 알리는 입장에 서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나로서는 상상이 안 된다.


수전 손택의 일기는 총 3부작으로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1부 격인 이 책에는 1933년생인 그녀가 14세가 되던 1947년부터 30세가 되던 1963년까지 쓴 일기와 노트가 실려 있다. 나(1986년생)보다 반세기도 전에 태어난 인물인데, 열네살 때부터 지금의 나보다 겨우 두 살 많은 서른 살까지의 삶이 너무나도 스펙타클하여 읽는 내내 놀라웠다. 그녀는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나이인) 열여섯 살 때 대학에 입학했고, (내가 대학에 입학한 나이인) 열아홉 살 때 결혼을 해 아이를 낳았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나이인) 스물네 살이 되던 해 이혼한 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파리에서 동성애적인 성정체성을 재확인한 다음(대학 시절에 이미 확인한 바 있다) 서구 최고의 지성들과 교류하다가 미국으로 돌아왔다. 인생에 단계라는 것이 있다면 그녀는 뭐든 나보다 한 단계씩 먼저 한 셈인데, 웃자란 만큼 그녀가 자아와 타인, 내면과 사회,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채우기 위해 남들보다 배는 고생하고 괴로워했던 걸 보면 그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은 것 같다.


수전 손택은 어머니에게 연민과 증오라는 양면된 감정을 가졌다. 이른 대학 진학으로 인해 남들보다 빨리 청소년기를 마친 그녀는 대학에서 두 여인 - H와 아이린- 을 만나 동성애에 눈을 떴다. H는 즐겁지만 거칠었고 아이린은 아름답지만 유약했다. 그녀들로부터 도피하듯 선택한 결혼생활은 악몽이었다. 남편 그리고 결혼생활 자체의 속박을 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역시 도피하듯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다시 H를 만나 사귀었으나 파국을 맞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아이린을 만났다. 놀라운 점은 드라마틱할 정도로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던 그녀의 사생활이 후에 그녀가 학자이자 작가로서 맞이하는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콤플렉스와 두 동성 애인과의 관계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정신분석학과 심리학, 페미니즘에 눈을 떴고, 문학과 철학 그리고 사회를 보는 눈도 보다 깊어지고 독립적으로 바뀌었다. 배움에 대한 갈증 또한 마르지 않았다. 책에는 그녀가 다방면으로 대량의 독서를 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독서 리스트가 실려 있다. 책뿐만 아니라 영화, 연극, 음악에 대한 조예도 깊었다. ''책은 벽이고 요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발포하는 화기로도 전환할 수 있다. 내가 말을 걸어야 하는 벽 저편의 사람들 말이다." 라는 그녀의 말은, 그녀에게 독서란 그저 읽어치우는 행위가 아니라 관계의 결핍 또는 정서적인 갈증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자기 생활에 대한 성찰과 다짐도 자주 엿보인다. 

녀가 스물두 살이 되던 1957년 1월 15일의 일기는 이렇다.

24살의 규칙과 의무들
1. 자세를 더 곧게 하라.
2. 일주일에 세 번 엄마에게 편지하라.
3. 더 적게 먹어라.
4. 적어도 하루에 두 시간은 글을 써라.
5. 브랜다이스(남편 필립이 사회학을 가르치던 브랜다이스 대학)나 돈 문제로 공공연히 불평하지 마라.
6. 데이비드(아들)에게 읽기를 가르쳐라. (p.166)


스물여덟 살이 되던 1961년 9월의 일기에는 이런 다짐이 실려있다.

1. 했던 말 또 하지 않기.
2. 재미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기.
3. 미소를 덜 짓고, 말수도 줄일 것. 역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미소를 지을 때는 진심으로 할 것. 
그리고 내가 하는 말을 믿고 진심으로 믿는 말만 하기. (하략) (p.364)


일주일에 세 번 엄마에게 편지할 것을 다짐할 만큼 어머니 생각이 깊고, 남편과 아들 걱정을 달고 살던 그녀가, 몇 년 사이에(아마도 이혼과 유학을 계기로) 했던 말 또 하지 않고, 재미있는 사람이 되려고 억지부리지 않기를 바라는 독립적인 '개인'으로 거듭난 것이 인상적이다. 서른까지의 변화가 이토록 극적일진대, 그 후의 삶은 또 얼마나 다이내믹할까. 2부와 3부의 출간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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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맨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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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시리즈'를 다 읽고 적적하던 차에 언젠가 라디오를 통해 알게 된 책 한 권이 떠올랐다. 노르웨이 소설로는 드물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스노우 맨>이라는 제목의 미스터리물로, 순수한 동심의 상징인 눈사람이 잔혹한 연쇄살인 사건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바로 구입해 읽기 시작했다.

 

 

저자 요 네스뵈는 1960년 생으로 노르웨이의 국민 작가이자 인기 뮤지션, 저널리스트, 경제학자 등으로 활약하고 있는 멀티 플레이어다. 서른일곱 살에 첫 소설이자 '해리 홀레 시리즈'의 첫 작품인 <배트맨>을 쓴 그는 '밀레니엄 시리즈'의 작가 스티그 라르손이 받은 바 있는 북유럽 최고의 문학상 '유리 열쇠상'을 받았다. <스노우 맨>은 '해리 홀레 시리즈'의 일곱 번째 작품으로, 전 세계 40여 개 국에 번역 출간되었고 거의 모든 언어권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바 있다.

 

 

이야기는 '완만하게 펼쳐진 시골 풍경 위로 11월의 눈이 오리털 이불처럼 내려앉아 있'는 광경에서 시작된다. 한 여성이 어린 아들을 뒷좌석에 태우고 운전을 하다가 어느 집 앞에 차를 세운 다음 금방 돌아온다는 말을 남기고 홀로 내렸다. 40분이나 지나서야 돌아온 그녀는 아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자 아들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눈사람을 봤다고 대답했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 후, 오슬로 경찰청의 형사 해리 홀레는 여러 명의 여성들이 줄지어 실종되는 사건을 맡게 된다. 얼마 후 그의 앞에 도착한 한 통의 편지. 발신인은 다름아닌 눈사람이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밀레니엄 시리즈', 그리고 독일 작가 넬레 노이하우스의 '타우누스 시리즈'와 비슷한 점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먼저 '밀레니엄 시리즈'와 비교해 보면, 두 작품 모두 작가가 북유럽(스티그 라르손은 스웨덴, 요 네스뵈는 노르웨이) 출신의 남성 작가이고, 주인공 역시 남성이다. 차이점이라면 '밀레니엄'의 주인공은 미카엘을 외모면 외모, 지성이면 지성 부족할 것이 없는 미남 저널리스트인 반면, 해리 홀레는 볼품 없는 외모의 알콜중독 증세가 있는 형사라는 점 정도. 하지만 둘 다 치명적인(?) 매력으로 이성에게 인기가 많은 점은 같다. 잘생기든 못생기든 (작가의 페르소나인 주인공이) 이성에게 인기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똑같나 보다. '밀레니엄'에는 미카엘 말고도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여인 리즈베트 살란데르가 등장한다는 점도 다르다.

 

 

'타우누스 시리즈'와는 비슷한 점이 더 많다. 두 소설 모두 주인공이 형사이고, 경찰청이 배경이며, 시리즈의 구성과 진행이 흡사하다. 차이점은 '타우누스 시리즈'에서는 남자 형사인 보덴하우스와 여자 형사인 피아가 팀을 이뤄 활동하는 반면, <스노우 맨>은 해리 홀레 단 한 사람뿐이라는 점이다(물론 보조를 이루는 여형사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함께 활동하지는 않는다). 넬레 노이하우스는 여자, 요 네스뵈는 남자 작가라는 사실이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다.

 

 

비슷한 장르의 작품들 속에서 <스노우 맨>이 가지는 강점은 문학성이다. '밀레니엄 시리즈'는 줄거리가 탄탄하나 문학성 면에서 다소 떨어지고, '타우누스 시리즈'는 시의성 있는 소재를 다루고 시리즈물로서의 매력을 갖춘 데 반해 문장의 아름다움은 덜하다. 반면 <스노우 맨>은 미스터리 소설로서 플롯이 탄탄하다, 소재가 참신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문장이 아름답고 인물의 심리와 장면의 묘사가 섬세하다. 특히 해리 홀레가 형사물 주인공으로서는 드물게 마냥 정의롭고 선하지만은 않은, 입체적이고 안티-히어로적인 인물이라는 점이 작품의 재미를 배가했다. 그러한 어둡고도 침침한 설정이, 저 먼 노르웨이의 설경과 눈사람이라는 독특한 소재가 만나 기이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무래도 '해리 홀레 시리즈'에 푹 빠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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