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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여행자 - 손미나의 도쿄 에세이
손미나 지음 / 삼성출판사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언젠가 칠레 남부를 여행할 때였다. ...
세상 어디를 가나 농촌의 모습은 비슷한가 보다 하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끝없이 펼쳐진 선명한 초록빛 벌판 사이로 무언가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보라색 페인트를 칠한 벽에 노란색 지붕을 얹은 농가의 모습이었고
또 얼마가 지나자 이번에는 파란 벽 위에 빨간 지붕을 얹은 그림 같은 집이 나타났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면서 도대체 어느 누가
시골집은 이렇게 저렇게 생겨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내 머릿속에 심어놓았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
보라색과 노란색을 정말 좋아해서, 빨간색과 파란색의 강렬한 조화를 너무나 사랑해서
그런 빛깔로 집을 칠해놓고 행복해했을 그 누군가를 생각하니 샘이 날 정도로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
지붕 색깔을 어떻게 칠해야 한다는 법칙이 없듯 인생에도 공식은 없다.
인생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을 따라가며 하나의 커다란 퍼즐을 맞추듯 완성해나가는 여행이다.
어떤 길을 선택해서 갈 것이냐 하는 것도 내게 달렸고,
그 길을 어떻게 가꾸느냐 하는 것도 전적으로 내게 달렸다. (프롤로그 중에서)
지난 여름 팟캐스트 <손미나의 여행사전>을 들으면서 손미나의 팬이 된 나는 틈틈이 그녀가 쓴 책들을 찾아 읽고 있다. 이번에 읽은 <태양의 여행자>는 2008년에 손미나가 아나운서를 그만두고 '여행작가'로서의 변신을 선언하면서 쓴 일본 여행기다. 일본 여행기라기에 사실 처음에는 생뚱맞다 싶었다.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전공하고 스페인으로 유학까지 다녀온 그녀인지라 스페인이나 남미 같은 스페인어권이나 인근의 유럽 국가들은 잘 알아도 일본에 대해서는 잘 모를 것 같았다.
책을 읽어보니 역시나 론리플래닛 같은 서구인의 시선에서 쓰인 여행책에 나올 법한 이야기 위주였다. 장소도 신주쿠, 하라주쿠, 아사쿠사, 츠키지 시장 등 도쿄 여행자라면 누구나 가봤을 곳들 뿐이고, 화제도 스시나 라멘 같은 일본 음식, 아톰이나 도라에몽 같은 만화 캐릭터 등 보통 사람들이 일본 하면 떠올리는 것들 뿐이라 일본을 잘 아는 사람이 궁금해할 만한 화제는 적었다. 체류 기간이나 언어 문제도 있었겠지만, 전작인 <스페인, 너는 자유다>에 비해 확실히 완성도나 전문성 면에서 떨어진다.
일본을 잘 아는 사람도 모를, 손미나만의 일본 이야기가 있다는 점은 높게 살 만 하다. 어린 시절 잠시 미국 학교를 다닐 때 그녀가 영어를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베스트 프렌드 키요코, 그녀가 아나운서를 그만두고 여행가의 삶을 살게끔 이끈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 등 일본에 얽힌 그녀의 추억과, 신주쿠 마마, 아사쿠사 인력거맨 하치, 오키나와 할머니, 초밥왕 아저씨, 친구 류이치의 가족 이야기 등등 도쿄에서 그녀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다. 이런 추억과 만남은 아무리 일본에 자주 가보고 일본을 잘 아는 사람이라도 얻기 힘든 귀중한 것이다.
책을 쓰고 얼마 안 있어 이혼한 전 남편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어 팬으로서, 그리고 같은 여자로서 애틋했다. 이 책을 볼 때마다 저자는 어떤 마음이 들까? 아픈 손가락 같은 책이 아닐까? 이 책을 읽고나니 밝기만한 '태양의 여행자'의 뒷모습은 달의 뒷면처럼 어둡고 쓸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